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이병철 삼성 회장 24개항 질문 (7)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7)







3. 삶의 기본 구조-----------------------------------------------------------------------------------------------------------------------

그리스도의 복음은 학문이 아니라 계시다


세상 철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종교는 있으나 철학은 없다고 한다. 그 이유를 2000년 넘게 방랑생활한 데에서 그래서 생활의 안정과 여유를 누리지 못해 그런 것으로 돌리려 하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분석이 그런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철학이 없는 것은 그들에게 종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에는 반드시 종교철학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복음도 종교로 오해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중세 철학이니, 교부 철학이니, 스콜라(Schola) 철학이니 하는 용어 따위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종교 대신 계시(啓示-revelation)가 있었다. 계시만이 있었던 것은 계시에는 종교철학이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계시에는 철학이란 것 자체가 필요없다. 철학은 의혹(疑惑)에서 생기는 것이니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러나 계시는 조물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혹'을 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그것이 학문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실제는 파멸임을 우리는 에덴낙원의 비극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혹을 품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죄는 시작되고 불행은 그 뒤를 잇고 죽음의 파멸은 급속히 찾아든 것이다. 생명 자체이신 조물주의 말씀 하나하나가 다 생명의 법질서인데 그 법질서를 일개 피조물의 생각 정도로 착각하였으니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학문일 수 없고 종교일 수 없고 오직 계시라는 사실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경우를 미루어보아도 명백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까지는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감히 그 누구도 어떤 종류이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심(信心)이라기보다 하나님 친히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철저히 그 모든 계시된 바를 지켜 보존하셨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문제가 달랐다. 이미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분하게 명백히 나타나진 사실이므로 이 이상 더 하나님 친히 그 계시를 지켜 보존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시작되고 은혜의 구원이 이미 작동됨으로써 새 창조의 역사가 진행 중에 있는 까닭이다. 이 역사적 진행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방해 작업 역시 한 몫 하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면 그런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필수 사항으로 되어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을 충동하여 자기 입 맛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종교 중의 하나로 만들게 한 것이다. 종교로 만드는 것은 그로서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성령의 인도로 가르치심 받아 배우게 되는 것이 계시다. 아들께서 나타내주시지 않고서는 진리를 알 자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물론 아들을 알 자가 없다[마 11:27]. 그런데 어찌 인간의 연구와 사색으로 알아진다고 학문이란 이름을 붙이고 세상 철학의 분류 속에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갖다 끼워 넣는가. 그리고 계시는 원천적으로 많은 학문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말씀하신 것이 있지 않은가. "이것을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신 것이다.


왜냐면 진리 즉 인간이 구원 얻는 도리는 극히 기초적인 언어로도 능히 표현하고도 남을 수 있는 간단 명료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전달하기만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런 말씀에 의하여 믿음이 생기고 구원이 되는 것이니 그래서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개재될 틈도 없이 즉각적인 구원이기 때문이다. 순간적이란 말을 써도 무방하리만큼 즉시 즉석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 몸의 이치에서 내가 나를 위하지 않아도 나와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이 나를 위해주므로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도 그 최종 목적이 나를 위함이 아니냐 따라서 똑같은 자기중심이 아니냐" 할지 모르나, 이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을 잘못되게 해석한 것이니, 무조건하고 영원히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나를 위하지 않음'이 한 때로만 그치면 그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나,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다시 말해 영원무궁토록 나는 나 자신을 위할 줄을 모른다는 데에 핵심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영구적으로 나를 위하여 살지 않게 되는 것은 나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고 또 그 지시를 따라 모두가 즉 나와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 전체가 나를 위할 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말한다[고전 13:7].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믿음]다. 여기서 머리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즉 피조물은 그 누구도 이런 경우 머리 역할을 할 수 없고, 오직 모든 피조물을 지으심으로써 피조물을 최고도로 [그 어느 피조물보다] 사랑하시고[위하시고] 또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야 하는 것이다.


철학자 칸트도 이런 필연적인 결론으로 소위 "요청적 유신론"을 말했던 것이다. 말은 했지만 그 자신 성경대로의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으니 아는 것[지식]과 사랑은 별개이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눅 10:21/고전 1:21]. 그러므로 내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왜냐면 그가 나를 사랑하므로] 이가 있어 나를 완벽하게 그리고 항구적으로 위하고 있음을 100프로 믿을 수 있는 평안과 기쁨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요 14:27/15:11/16:33]. 내가 나를 위해 일절 신경 쓰고 마음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즉 '나를 위하는 것'은 나의 소관사, 내가 할 몫, 내가 할 책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의 원리인 것이다. 갑을 위하는 것은 을의 몫이요 을을 위하는 것은 갑이 몫이다. 영원히 그러하다. 자기 홀로 있을 때에만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둘이 있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상호간의 약조가 있음이니 이는 대등한 관계에서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하던 것으로부터 또 하나가 생기든 다수가 생기든 여럿이 어울려 지낼 때에는 반드시 머리와 몸의 관계를 형성하여 그 머리되는 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파생되어 나온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따로 생긴 것이 그렇게 모여 있다면 한데 어울려 있을 리도 없고 반드시 상호 쟁투에 의해 한꺼번에 모두가 일시에 박살 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현재와 같이 조화를 이루어 상당 기간이건 일시적이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한 머리의 통제 아래 있다는 증거이니 곧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증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가 피조물이요 만유의 창조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 한 가지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것이다.


왜냐면 현재의 모든 인간 활동이 모두 자기중심이라는 것은 누가 특별히 말해 주어도 모두가 양심과 양식(良識)으로 능히 판단할 수 있는 결론인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으로 뭉쳐져 있어 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로 전쟁이나 알력이나 다툼이나 분쟁이 끊일 날이 없는 것으로 보아도 이 세계는 한 강력한 힘에 의해 강제로 통합 유지되고 있음을 웅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을 거론하는 그 무엇이든 한 마디로 이성적이지 못하고 논리적이지 못함을 스스로 노정(露呈)하는 것이니 불교 역시 그 중의 하나다. 스스로 신[또는 부처]이 될 수 있다는 완전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음이다.


여럿이 저절로 생겨난 채로 그 가운데 머리를 뽑아 머리 역할을 순번으로 대리하게 한다면 같은 또래 가운데에서 선출한 머리라 그 능력이든 기타 면에서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게 된다. 아무리 그 머리가 공평공정을 기한다 하더라도 능력의 한계, 재량권의 제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 되면 결국 각자는 자기중심으로 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완전한 이상향의 삶은 영원한 불가능이 된다. 불가능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상쟁(相爭)으로 공멸(共滅)하기가 바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의 인간들이 이와 같이 한데 어울려 지내는 것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의 실재를 입증하는 것인데도 이를 보지 못하니 이 세상 지배자요 신(神)이 되어 있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눈을 어둡게 하고 있는 까닭이다. 억지로라도 어울려 지내게 하는 하나님의 강권 발동이 3운법칙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가. 오직 목적은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사람은 반드시 구원 받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이런 강제력이 작동되는 것이다. 그 마지막 사람이 구원되면 세상은 지체없이 막을 내릴 것이다.


그 마지막 사람이 구원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인 것이 이 세상의 존속 의미다. 마치 악이 넘치는 세상이라도 잘도 굴러간다고 착각할 정도가 되어 있지만 실상은 위의 설명처럼 전혀 그렇지 않다. 당장이라도 빠개져 버릴 세상이지만 억지로 추스리고 겨우겨우 지탱해나가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고로 하나님의 명령은 한결같이 "회개하여 악함을 버리라"[행 17:30/행 3:26]는 것이다. 악, 죄, 불의, 불법은 한 마디로 머리와 몸 관계로 이루어진 한 몸으로서의 생명의 체제에서 필수불가결인 자기 부인을 버리고 자기중심으로 제멋대로 나가는데 있는 것이다.


즉 좋은 것, 올바른 것을 버리고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교만의 맹목(盲目)이다. 좋고 옳은 것이 무엇이냐, 모두에게 행복을 끼쳐다 주는 것을 말함이다. 모두에게 골고루 행복이 끼쳐지는 것이기에 그것이 옳다, 좋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것[善]이라 옳은 것[義]이라 할 리가 없다. 올바르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목숨은 버리더라도 그 옳고 좋은 것은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올바른 것]를 사랑하고 불법[옳고 좋기만 한 법질서를 어기는 것]을 미워하게 된다[히 1:9].


그러므로 무조건 자기 자신은 위함이 없이 남을 위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중에 그 일에 열심을 내어 더 많은 사람을 위하고 섬기는 이가 가장 큰 자라 하셨다[눅 22:26]. 그러므로 생명의 세계에서는 그런 사랑의 의지가 누가 더 출중하냐,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는 열심이 누가 더 세냐 하는 것으로써 영원한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열매도 그렇게 맺어지는 것이어서 30, 60, 100 배 등의 차가 생긴다. 그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차별의 기준이 없다. 그러므로 높고 낮음의 서열(序列)이 있다면 그런 사랑의 높낮이밖에 없다.


따라서 목적이든 동기든 영원히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일이 없으므로 자기중심이 아닌 것이다. 둘이 하나되어 몸과 머리로서 형성되어 있을 때에는 영원히 그러한 것이다. 자기를 위할 줄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고로 영원한 사랑이요 평안이요 즐거움뿐이다. 이런 것은 인간 수양으로 될 일도 되는 일도 아니고 몸과 머리의 체제에 오직 있는 것이다. 인간의 당면 목표는 영생하는 것이 아니니 영생하는 존재로 아담이 창조되었어도 아담은 죽었고 에덴낙원의 영물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엃고 좋은 도리를 따라 사는 것에 정작 핵심이 있다. 세상 종교는 문제를 거꾸로 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이 불행하여 인간고(人間苦)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행복하게 영원히 살도록 지으심을 받았으나 스스로 범죄하여 이 꼴이 되어 있는 것인데 범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이러한 머리와 몸의 관계를 무시하고 자기중심으로 나가 자기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데에 있으므로 이것만 해결하면 일체의 구원 문제가 완료되고 인간고가 종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악함을 버리라"[행 3:26] 즉 "회개하라"[17:30]는 것이다. 네피림이 영원 멸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회개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의 분신들이므로 악령은 이미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의 결과로 이미 멸망에 처해진 고로 회개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인간 역시 개중에는 악한 자가 있어 회개하지 않을 때 그래서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릴 때 역시 그러하다[히 6:6].


이 악함을 버릴 용의가 있는 인생들에게만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고 그 외에는 즉 회개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 결코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으니 즉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로 올 수 없다"[요 6:44,65]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배운 자만이 온다 하셨다[:45]. 무엇을 배우느냐, 이 세상이 죽음의 세상인 줄 아는 것이다. 왜 죽음의 세상이냐, 위의 설명처럼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죄의 실상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어 그 법칙대로 되어지므로 이 법칙을 자의적으로 어길 때 자연계에 생존할 수 없음과 같이 생명에도 동일한 법칙이 적용되는 것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단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은 자연법칙을 따름으로 되지만 사람과 같이 영혼이 있고 영생하는 것을 희망할 때에는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결과이니 그런 영생하는 법칙을 어김으로써 범죄가 형성되어 영생하지 못하고 부수적으로 인간고가 왔음은 역시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에 죄는 법을 어김이라 한 것이다. 즉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한 것이다. 불법은 범법[breaking the law, violation of the law, a transgression]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범죄하여 죄인이 되어 있는 것을 자각하는 것으로써 따라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이고 이 세상 역시 죽음의 세계인 줄 알면 구원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나 위하여 죽으신 의미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 나와야 구원인 것이다. 그런 모든 사실을 안다고 해서 따라서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영생하게 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이유가 나타난다. 이를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으로 성경은 이상과 같이 설명한 것이다. 왜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냐, 다시 말해 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셔야 했느냐 하는데 대한 해답이 나오게 된다.


왜 그리스도께 나와야 하느냐 즉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하나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삼기 위함이다. 그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되는 일이므로 따라서 그의 부활은 내가 부활함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 됨이다. 그리스도와 나는 불가분의 하나 즉 머리와 몸 관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영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영생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비법이기도 하다.


행복의 비결은 어느 누구든 앞서의 설명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데 있다. 머리를 위함이다. 머리이신 하나님께서는 각 피조물 즉 몸[의 각 지체]을 위하시기 때문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 자신께서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사랑으로 섬기는-갈 5:13/눅 22:27] 위치에 계시니 마치 내가 머리인 양 되어 있으니 내가 내 마음대로 나 자신을 위하지 않아도 내가 나를 위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자연스럽게 위해지니 여기에 무슨 비극적 불상사가 생기랴.


모두가 나 자신처럼 되어주어 나를 위해 주는데 이는 다시 말해 모두가 바로 나 자신처럼 되어 있음이다.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그러하니 이를 가리켜 생명의 체제라 하는 것이다. 그 여럿 중에 제일 꼴찌인 위치에 있어도 모두가 그를 떠받들기를 머리처럼 하여 위해 주니 마치 머리인 양 칙사 대접을 받고 영원히 사는 것이다. 머리와 몸이라는 위계 질서는 분명히 서 있건만 그것이 모두 하나로서 뭉뚱그려져 있으므로 어느 것이 머리이고 꽁지인지 분별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모두가 둥근 공(球)이고 원(圓)처럼 되어 있어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몸과 머리로 이루어진 '한 몸'으로서의 삶의 영원한 체제이다. 즉 생명의 법질서인 것이다. 법은 법이다. 사랑의 법이라고 해서 법의 엄정함이 절대로 물러져서는[누그러져서는] 안된다. 좋은 법일수록 엄정할수록 좋다. 무른 법일수록 조악(粗惡)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구조를 따르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경우 가차없이 법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으니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생명 아닌 죽음을 스스로 택했으니 그 택한 대로 죽음 외에 거두는 것이 없도록 하는 데에 그 생명이 있다.


따라서 이미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죽게 됨으로써 인간은 모두 죽은 자가 됨으로써 법질서는 확립되어 있다. 이를 그 누구도 무효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생명의 법의 제정자요 집행자요 심판자이시므로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이 법을 무시하고 죽게 된 인간을 다시 살게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죽은 자로서의 인간을 다시 살리시려면 합법적으로 행동하셔야 하는 것이다. 합법적이라 하는 것은 법에 결코 어긋나지 않게 하심을 말함이니 다시 말해 죄인은 생명을 스스로 떠난 자이므로 반드시 죽어야 하고 달리 도리는 없으므로 간단히 말해 죽은 자는 절대로 다시 살아나서는 안되므로 다시 살리시면 안되는 것이다.


바로 이 법질서 확립을 위해 이 법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 즉 죽게 되어 있는 자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고 이 자체를 허물어뜨려서는 아니되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의 법이 엄정한지 우리는 이로써 확인하게 된다. 당연한 것이니 법은 무너뜨리기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두철미 법대로 되지 않으려면 아예 처음부터 법이란 것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죽은 자로서의 인간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다시 살면 영원히 죽지 않음을 말한다] 맨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순서를 따지자면 먼저 죽고 나서야 그 다음에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로는 아무리 재주가 좋다고 가정해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수는 없다. 죽으면 그 죽음으로써 영원히 끝나는 것이다. 만일 다시 살아나는 수가 있다면 생명 아니면 죽음이라는 법 자체를 유린하는 것이므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당연히 그러하다.


인간 스스로로는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나는 것이므로 인간 스스로에 의한 구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과 더불어 나 위한 부활이 필수가 되어 있다. 부활만 아니라 그 부활 이후의 일체의 그리스도의 움직이심, 삶 자체가 바로 나를 위하시는 의미가 되어 있음이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의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 둘이 하나됨은 사랑으로 하나됨이니 사랑은 앞서의 설명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할 뿐이지 자기 자신을 영원히 위하지 않음이므로 그리스도와 나는 이러한 갑과 을의 의미로 둘이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하나됨은 이론상으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친히 사람으로서 동시에 하나님으로서[성령으로서] 내 안에 오심으로써 실질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됨은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되는 것이니 곧 성령 받아 모심이 나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되기 위해서는 앞서의 설명대로 반드시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행 2:38].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만이시라도 안되고 하나님만이시라도 불가하다. 사람이시고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나와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실 수 없으니 그 어느 육체[인간은 영혼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육체다]도 다른 이의 육체 안에 올 수도 없거니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상대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실 수 있음이다.


또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사람인데 하나님으로서는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없으니 왜냐면 나와 하나가 되시는 이유가 나의 이름으로 즉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에 있는데 사람이 아니시라면 원천적으로 나와 하나이실 수가 없음이다. 그러므로 '의미'상으로는 사람으로서, 나와 하나되시는 '방법'으로는[왜냐면 성령으로 오시면 나의 영혼처럼 되시어 내 안에 얼마든지 계시고 영원히 함께 사실 수 있기에] 하나님으로서 성령으로 임하여 계심이다.


이러한 완벽한 구조로써 나의 구원 즉 새로 창조됨, 다시 출생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묻기를,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은 우리와 같은 이런 이중 구조[그리스도와 내가 합하여 한 영이 되어 있음을 말함-고후 6:17]가 아니었는데 그 때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할 것이다. 당시는 아담이 영계에서 살아 신령한 몸이 되었으니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있는 현재의 우리와는 다른 것이다. 당시 범죄하기 전에는 그러한 영계에서 아담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는[요이 1:9] 것과 같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영생하는 존재로서 성령으로 출생한[성령을 개별적으로 자기 안에 모심으로써] 상태는 당시 아담이 영계에 있었던 상황과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과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아담 역시 에덴낙원에서는 그러했다. 오늘날의 영물들 또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을 제외한 모든 "거룩한 천사들"] 그러하여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다[마 18:10]. 오늘날 새로 창조된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성령을 내 안에 모셨다고 하여 당시 범죄하기 전의 아담이나 현재 거룩한 천사들과 더 나은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혜와 같은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오해해서는 안될 일이다. 오직 우리는 새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차이만이 있을 따름이다. 처음 창조에서는 우리가 죽었던 관계로 범죄 이전의 아담처럼 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또는 오늘날의 거룩한 천사들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정상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우리 각자 안에 모셨다고 해서 거룩한 천사들보다 또는 범죄 전의 아담에 비해서 더 나은 상태도 아닐뿐더러 똑같이 시험을 받아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음은 물론 아담처럼 또는 악령들처럼 범죄하는 경우에는 여지없이 자멸(自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을 나의 영혼 격으로 영원히 모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만 다르지 상황은 범죄 전의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산 자로서 창조되어 있던 것과 차이가 없음이다.


아담은 에덴낙원이라는 영계에서 시험 받아 스스로를 죽은 자로 만들었지만 우리는 이 자연계에서 시험 받아 스스로를 죽은[이제는 영원히 죽는 즉 멸망하는] 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이 전적으로 내게 달려 있으니 어찌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룸이 아닌가[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2/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으니 시험을 당하는 것이요 만일 이전처럼 죽은 자 그대로라면 시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죽은 자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함께 멸망하는 자리에 있는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일부러 시험할 이유가 없음이다.


따라서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우리가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스스로를 죽음 가운데 몰아넣은 결과로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아담 자신도 그 죽음에서부터[왜냐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으니까] 자기를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과론적으로는 지키지 못한 것이다[롬 5:12]. 어느 날 그 스스로 선악과를 먹고 있는 상황을 벌여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구원을 스스로 이루지 못한 것이다. 아담으로 치면 우리 역시 우리의 "새 생명"[6:4]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지키지 못하면 우리도 아담처럼 죽은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담을 시험했던 자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시험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반드시 시험을 받아야만 범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니 영물들은 시험하는 자가 없어도 자기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곁길로 들어 악령들이 된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고 에덴낙원에서의 아담 부부 역시 자기의 자유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범죄다. 물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거짓말로 꾄 것도 한 몫을 한 것이지만 거기에 인간 스스로 동조하지 않았으면 얼마든지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결코 결단을 강제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현재 상태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도 보듯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순응하지 않고 물리치면 계속 승리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물러가게 되어 있다[약 4:7/마 4:11/16:23].


그래서 아담은 범죄함으로써 자기의 신령한 몸을 잃어 버렸지만 우리는 범죄함으로써 신령한 몸을 아예 입지를 못한다. 즉 현재의 이 죽은 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령한 "몸의 구속"[롬 8:23]에 이르지를 못한다. 몸이야 생명에 들어가는 자와 마찬가지로 신령한 몸을 입게 되나[요 5:29] 죽은 자로서의 몸이지 산 자로서의 몸은 아니다. 신령한 몸의 상태에서의 죽은 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생명을 향유하는 육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인간고(人間苦)는 이 죽음[영생하도록 되어 있는데 죽는 자가 되어 있으니 죽음인 것이다]과 범죄의 결과다. 이런 증거를 눈 앞에 두고서도 회개를 않으니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그대로 있고[요 3:36]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다[:18]. "심판을 받았다"고 회개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 언제라도 회개하면 그리스도께 올 수 있다. 마지막 심판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원천적으로 심판 아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께 나아와 성령을 받음으로써 구원되어 있는 상태에서 범죄하면 다시는 회개가 불가능하다[히 6:6]. 성령을 거역함이기 때문이다[10:29/막 3:29].


그러므로 지금은 어느 모로 보나 "두렵고 떨"[빌 2:12/벧전 1:17] 수밖에 없는 때요 장소다. 바울 사도는 구원의 말씀을 전할 때에도 약하며 두려워하고 떨었다[고전 2:3-5]. 왜냐면 시험하는 장소로서 시험하는 자가 눈에 불을 켜고 하시라도 덤빌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음이다[벧전 5:8]. 적의 공격 아래 부단히 놓여 있는 상태이니 우리는 우리의 적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과의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있는 자가 방심하면 그것은 패배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우리를 쓰러뜨리기를 일구월심 바라기 때문이다.


성경은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이것이 성경의 모든 경계 경고의 일관된 기조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만 그리고 천천만만의 거룩한 천사들이 우리를 호위하고 지키고 있지만 그러하다. 왜냐면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에 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차원에서는 천사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여주지 않는다. 하나님 친히 손 못대시는데 천사들이 어찌 움직이랴.


왜냐면 창조 당시부터 말 그대로의 '자유' 의지를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번 창조하신 바를 스스로 어찌하시지 않는다. 하시고 싶어도 못하시는 것이다. 강제하시거나 간섭해서 될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다. 이 '일사부재리'가 사실상 두려운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도 어찌하시지 못하니까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이로써 하나님도 자승자박하신다고 착각하지 말 것은 하나님 친히 앞서의 설명대로 법 차체이시므로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공정공평하시고 후회하심이 없으시다.


혹자 생각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음으로써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구원이 끄떡없다는 사실에 우리의 평안과 기쁨이 있기도 하는데 이렇게 두려워하고 떤다면 그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하다는 말인가"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 받은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육체요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인데 그는 이 세상 표준으로 하면 막강한 신(神)이다. 그러나 동시에 알아야 하는 것은 악령들과 견줌이 되는 거룩한 천사들은 전적으로 우리 편에서 우리의 이러한 약점을 충분히 보완하고 있다[히 1:14].


그 세력 균형으로 말하면 지금은 깨어져 있다. 하늘의 전쟁이 종결되어 현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이 지상으로 추방되어 있음이다[계 12:7]. 그러나 지상에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여전히 왕(王)이요 신이다[요 14:30]. 하늘에서만 쫓겨 내려왔을 뿐이다. 어쨌든 문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력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주의, 경망함, 정신 못차림,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지 않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방심[어느 전투에서 방심이 허용되랴] 등에 있는 것이다.


물론 세상을 배경으로 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우리를 해칠 수도 있다[욥 1:12]. 심지어 여러 가지 방법[참혹한 것까지 포함해서]으로 우리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다[2:6]. 그러나 우리를 해치는 일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임의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 하나님의 허락하심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1:11,12/2:3,5,6].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 일당이 아직은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활동할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 이상 하나님의 지시 아래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과의 차이는 외양으로는 똑같이 복종하나 악령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피조물인 사람들을 사랑함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고로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고 그 자신의 불찰에 있고 영물들[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의 범죄도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은 그러한 좌우지간에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운 우리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자극을 줌에 있을 뿐이다. 시험에 휘말려도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그에 동조하기 때문임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우리가 능히 복종하는 것도 우리 구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함께 하심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시나 그것을 강제로 하시거나 간섭하시는 식으로는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지로써 선과 의를 행하기로 작정하는 그 바탕 위에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실 수 있음이니, 왜냐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최대한으로 다 하시고 마치신 다음이므로 다음 차례는 우리의 반응 여하에 있음이다. 즉 '갑과 을 둘이 하나됨의 사랑'의 시동(始動)을 거신 것은 하나님께서 충분히 하셨으므로,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대응(對應) 사랑이 요구됨은 당연하다[요일 3:16].


그리고 우리는 지금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결과 앞에서 이런 인간고 속에 있으므로 그 범죄의 실상을 충분히 알고 있는 터에 우리 역시 범죄하면 그렇게 되는 경고를 받고 있는 마당에서 어찌 아니 두려워하고 떨지 않을 것인가. 아담이라고 처음부터 악한 이로 창조된 것도 아니고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 앞에서 어찌 "두려워하고 떪"이 없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두려워하며 떨라고만 하지 않는다. 그런 경고를 하면서도 그런 말을 한 같은 편지에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강조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한 것이다. 베드로도 이 세상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면서도[벧전 1:17]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8,9] 한 것이다.


이를 양면성의 이치라 해도 좋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 한 것처럼 항상 우리 앞에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엄위(嚴威, severity, sternness)가 함께 양면으로 펼쳐져 있어 우리의 양자 택일을 요구하는 것이다[롬 11:22]. 하나님 친히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심은 사실이지만 우리 스스로 또한 그 인자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힌다, 너도 아껴보시지 않는다"는 경고가 사정없이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면서도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엄위"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로서의 죽음과 이 모든 불행을 보지 않는가. 아껴보심이 없다. 차별하심이 없다.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갈 6:7].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자기중심으로]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자기 부인으로]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9].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고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했으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견지하고 있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3:12-14].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무효가 되는 것이니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음이다[마 7:21].


아담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으나 즉 산 자로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 자신이 자기를 죽은 자로 만들어 그 영생을 무효로 돌린 것이다. 영물들은 다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으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영원 멸망의 대상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선례(先例)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본보기 앞에서 어찌 두렵고 떪이 없으리요. 하나님을 믿었어도 얼마든지 나중에 "믿지 않는 악심을 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엄중 경고하고 있으니 어찌 두렵고 떪이 없으리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서"[빌 4:4] 그렇게 떨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구원 받은 것도 엄연한 현실이요 아담이 죽은 자가 되고 영물들이 일부분은 거룩한 천사들로 남아 있고 나머지는 악령들이 되어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물론 더 이상 이런 양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없다. 영원한 삶의 쾌락과 죽음의 고통과 비애로만 양분되어 나타나질 것뿐이다, 그 때의 양면성은 이와 같이 완연하게 다른 두 개의 세계 오직 천국과 영원한 불 못이라는 양면성으로 갈라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삶의 낙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의미하니 여기서 삶의 쾌락을 찾는 이마다 죽은 자로서 완전히 버림 받게 된다[딤전 5:6]. 이 세상은 삶의 낙을 누리는 데가 아니라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그 스스로 정하는 그런 아주 중요한 때이다.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시어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다"[행 14:17]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즐기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니 "자기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심으로써"[:17]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니"[17:27]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심"[:27]을 알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 얻기 위한 목적으로만 이 세상이 임시로 존재하고 있다는 실상을 누구나 다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믿는 사람은 다 받아들이시되 그 진실성을 입증해야 하므로[처음에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수용해주시는 것은 아니다-요 6:44,65] 처음부터 믿지 않는 경우는 예외가 되지만 비록 믿은 사람이라도 중도에 그 마음이 얼마든 변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권을 부여하신 것] 바로 이 세상에서 그런 부자격자가 죄다 걸러지고 솎아지고 추려지는 것이다[마 13:49].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47] 하신 것이다. "그물에 가득하면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는 것처럼 세상 끝에도 그러하여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면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48] 하셨다. 그물에 걸려 든 것이라 함은 그리스도 구원의 희소식을 듣고 일단 믿고 그리스도께 나온 이들이다. 그런 구원 받은 사람들 중에서 무자격자로 판명 난 이들은 모두 걸러내지는 것이다[마 7:21/25:45/벧전 4:17/히 10:30].


다시 말해 이 세상은 "악인들을 갈라 내는" 곳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처음부터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믿지 않고 성경을 믿지 않아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이미 악인들로서 낙인 찍혀지는 터이다[요 3:18]. 뿐만 아니라 믿는다고 이들도 그 진위(眞僞)가 이 세상에서 가려짐을 명백히 하신 말씀이 위의 대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태평스러워 하는 것은 성경을 너무도 읽지 않는 데에서 오는 자멸행위인 것이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천국 가는 것을 의미함이 아니니[마 7:21] 자기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님, 주님"[:21]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겉과 속이 달라 애초 복종하겠다 약속함에서[히 9:19,20/출 24:7] 세례 받았는데도 처음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됨 즉 머리와 몸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음을 그 스스로 증명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약속을 액면대로 수용해주시고 그를 받아들이셨으나 그 스스로는 그 받아들이심을 일축(一蹴, kick; reject; refuse flatly; turn down)해 버린 격이니 왜냐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한 것이 됨이다[행 5:4].


구원 받았음은 새로이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창조되었다고 전부가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담을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 만드셨으나 결국 그는 죽은 자가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가 무효가 된 셈이다. 그 자신이 들어 자기를 죽은 자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다. 우리의 창조도 아담의 창조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악령]의 창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똑같은 창조이다. 일정한 원칙을 따라 창조됨이니 처음 창조와 새 창조가 각기 내용이 다를 수가 없다. 우리의 구원이 무의미해지고 그래서 무효가 된다고 함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악인과 의인을 구별해내는 곳으로서의 세상인 만큼 이 세상을 사람 살 만한 곳이라고 여겨 여기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러한 악인을 걸러내기 위한 시험의 방법으로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히 10:31]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은 당시는 범죄 전의 세상이므로 영속하게 되어 있고 따라서 삶의 낙을 누리게 되어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후 노아의 홍수로 인한 당시 세상의 심판 후에도 축복하신 것은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 받을 때까지는 세상이 존속해야 하므로 멸망하지[홍수 때처럼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저주가 아닌 축복이 있어야 함이다.


성경은 이 세상의 의미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되 인자[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자신을 이렇게 나타내신 것이다]는 머리 둘 곳도 없다"[눅 9:58] 하셨고, 인간의 원수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 세상 임금"[요 14:30]이라 하셨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3:36]고 하신 것이다. 때문에 처음부터 도저히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므로 이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 사는 나라를 성경은 "천국"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3:2/4:17]이다.


고로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 우리 역시 당연히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눅 9:60] 하는 것이다. 천국을 전파한다 함은 이 세상에서 절대로 살고자 하고 세상 낙을 누리기를 도모하지 말라는 뜻이 당연히 포함된다. 이런 모든 비극적인 결과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난 것임에도 도리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속여 이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니 성경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세상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세상이 그의 장악 아래 있어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배운다는 것도 이 세상의 실상을 아는 것을 말함이다[요 6:45]. 이런 실상을 알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예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볼 때 세상에서 약한 자, 없는 자, 천한 자들이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고전 1:26-29] 강하고 부유하고 고귀한 신분을 자랑하는 등의 사람들은 거의 한결같이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 몸 체제에서 머리와 몸으로서 상호 사랑의 작용을 하는 것이 삶이지 이런 자기중심의 세상이 사람 삶의 터전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의 죽음에서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마다 가장 먼저 이러한 세상과의 결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은 내게 대해 죽고 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갈 6:14] 것을 성경이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로 세상의 실상을 깨달음으로써 세상과 등지게 되어 있음을 승복하지 못할 때 그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세상도 사랑하고 이 세상 삶도 즐기면서 영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말 일이다. 이 사실을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자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마 13:44-46]는 말씀으로써 나타내셨다. 생명과 죽음과 같은 양자 택일이다.


그리스도 친히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증언하심과 같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악령들의 나라일 수밖에 없다. 이 비극적인 현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거짓말로 인간[아담]을 속여 빼앗은 결과다. 아담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더 믿고 따른 결과가 됨으로써 스스로 그 아래에 예속(隸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각자는 남녀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이 주님과 합하여 한 영이 되어 있는 것이다[고전 6:17]. 전자는 육체로써 그렇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 그 삶 즉 일상생활로써 그렇게 된다. 그러나 둘이 하나되는 원리는 동일하니 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3위1체의 법칙은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각자는 자기 위치한 곳에서부터 전도를 시작하여 그 자리에서 교회를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바[르게]영[원히]사[는]회[개]' 운동이다.


때문에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그 위치에서 사람 구원하는 일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라 하는 것은 아내/남편 없이 믿음에 들어왔거든 그대로 혼자 평생을 지내면서 주님의 일을 하라는 취지다. 남의 종으로서 구원을 받았거든 종 그대로 있으면서 사람 살리는 일을 함이 온당하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어도 차라리 종으로 지내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을 함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고전 7:17-27].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롬 14:7-9]는 측면에서도 이는 합당한 것이다. 자기의 호불호(好不好)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에게는 죽음이라도 남에게 생명을 주는 즉 구원 얻게 하는 것이면 그 쪽을 택한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의 동족인 이스라엘이 구원 얻기를 바란다"[롬 9:3]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보내심 받음 즉 구원 받음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한 영으로서 하나되어 "주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자가 되었으니 주님과의 간단(間斷)없는 대화가 기도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마치 엄마 품속의 아기와 같다 함과 같이, 아기는 그 엄마와 손 잡고 갈 때는 무엇이든 알고 싶은 대로 쫑알대며 묻기도 하고 엄마야 듣든 안듣든 제 혼자 엄마를 상대로 쉴 새 없이 지껄이는 것이다. 육신의 엄마는 엄마대로의 삶이 있기에 아이는 아무리 그렇게 해도 엄마는 엄마대로 골똘히 자기 생각에 잠기지만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렇지 아니하시다.


왜냐면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하는 모든 말, 모든 행동, 기타 그 무엇이든지 거기 대해 나 자신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이다. 왜냐면 갑은 을을 위해 존재하여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존재하여 갑을 위해 사는 것이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 관계로 사는 생명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역시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빌 1:21] 하지 않는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요 따라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고후 5:15/갈 2:20]이라 하지 않는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으니 나도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위함이지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함이 아닌 자는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 중에 아무도 없다고 바울 사도는 단정한 것이다[롬 14:7-9]. 이것이 초대교회 즉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물려받아 그대로 살았던 당시 교회의 특징이었다. 이렇게 주저없이 '단정'할 수 없는 어느 집단이든지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이다. 단정하여 말할 수 없는 어느 개인이든지 그는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임을 성경의 권위로써 확언할 수 있다.


그런즉 구원 받은 즉시 즉 성령의 선물을 받은 즉각으로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되니 내 앞에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위치해 계심이다. 이를 가리켜 엄마 품속의 아기라고 표현하고 있거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품속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세상 육체로 말하는 아기와는 다르니 엄연한 자주 독립성을 갖춘 인격성을 지닌 개체다. 따라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3위1체 원리에 의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마음, 생각, 의도하는 바, 목적하는 바 등 모든 것에 대해 강력한 그리고 효과적인 자율 통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킴이다[고후 10:5].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난 것인지 즉 그 뜻에 부합한지의 여부를 여쭙는 것이다. 그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이 즉결 처분을 내릴 수 있는 것이 "모든 이론"이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5]이다.


"모든 이론"은 무엇이며 "모든 생각"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할 때, 모든 이론은 주님께 여쭈어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다시 우리 스스로 판단해도 아무 쓸모없는 모든 허무 맹랑한 망상, 잡념에 속한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오직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일에 관련된 것만 한하는 것이고 그 중에 우리가 생각해도 이것은 주님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체의 잡상인 것이다.


주님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생각이라도 그것이 과연 주님께로부터 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을 때 그 경우에는 주님께 아뢰어 기도함으로써 "모든 생각을 복종시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이 주님께 여쭐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서 판단할 때 전혀 어긋나는 것["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과 함께 단박에 박살을 내는 것이다.


행동은 생각에서 나온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 어떠함에 따라 그 위인(爲人)됨도 즉 그 사람의 됨됨이도 정해진다[잠 23:7] 하였고 "무릇 지킬만 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킬 것이니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4:23]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우리의 생각을 스스로[자율적으로] 통제하면 그것이 막강한 힘이 된다. 이 생각은 생명[영생]에 관한 한[사람이 자기 자유 의지에 의해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 하나님께서 절대로 관여하시지 않는다.


오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만이 그러한 간섭을 하고자 하는 것이니[물론 강제로는 할 수 없다]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거짓말로 꾄 것도 그런 사례다. 예수님께는 베드로를 통해 그런 넘어지게 할 수 있는 말을 함으로써 다시 시험하기도 한 것이다[마 16:23]. 그래서 "우리의 싸우는 무기[weapon]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strongholds]을 파하는 강력(强力)이라"[고후 10:4] 한 것이다.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일체의 생각을 헌신짝처럼 즉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즉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생각 외에는 일체의 것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인하여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會堂)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고관들 앞에 끌어 가므로 그들 앞에 설 것이니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이는 그들과 이방인[불신자]들에게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미리 염려치 말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材)와 지혜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눅 21:12-15] 하심과 같다.


이 경우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다"[막 13:11] 혹은,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 10:20] 하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성령이 곧 그리스도시요 또는 아버지이심을 나타내심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모습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성경은 "성령"이라 표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로 하나되어 계실 때에는 아들의 모습은 곧 아버지의 모습이 되시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미리 연구하거나 염려하거나 하는 대신 그와 같이 인도하여 주시기를 믿고 구함으로써 그런 변박할 수 없는 지혜로 말하게 하심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일체를 하나님께서 주장, 주관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지혜를 얻음이다[고후 6:1]. 에덴낙원의 여자처럼 남자[아담]에게 먼저 의논하지 않고 혼자 무엇이든 하려고 하지 말 것이다. 그것은 낭패의 지름길, 멸망의 첫 걸음이 된다.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살고 나는 너를 항상 생각하고 너는 항상 나를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산다는 것이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는 삶이다. 머리와 몸의 관계다.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의 관계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사랑의 삶을 위해 죽든지 살든지 하는 것은 참으로 보람차고 아름답고 값진 것이다. 비록 상대방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한다는 것, 즉 머리의 지시를 따라 그렇게 한다는 것이니 그래서 진심으로 바울은 "내가 내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더라도 그들이 구원되기를 바란다"고 한 것이다[롬 9:3].


모세 역시 오랫동안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편단심으로 일한 결과 "저와 합의(合意)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아니하시려면 원컨대 주님의 기록하신 책에서 제 이름을 지워버려 주십시오"[출 32:32] 하는 기도가 나온 것이니 모두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일절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安危)는 처음부터 염두에 없었고 계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인 것이다. 곧 자기 부인이다. 모세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았어도 [당시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그런 자기 부인이 가능했다는 그런 말은 아니고, 그런 마음 자세 즉 삶의 정상적인 모습의 일단(一端)은 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얼마든지 그런 자세로 임할 수 있었다는 그 차이다. 나 자신의 죽고 사는 것은 나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위하시는 머리께서 맡으실 소관사인 것이다.


자기 역할을 따라 자기 몫을 충실히 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안에서의 주인 의식인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진실로 죽어볼 만하고 희생해볼 만하고 그 어떤 고초도 맛볼 만한 그래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리요. 이 고해(苦海), 사해(死海), 누해(淚海)에서 이보다 값진 일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강제하여 될 일이 아니니 스스로 알아서 자진자발적으로 참여할 일인 것이다. 생명의 구원 역시 강권적(强權的)으로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개하는 자에 한해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리고 한사코 이와 같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으로써 그 스스로 쳐들어가 강제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천국이다[눅 16:16/마 11:12]. 세상 앞에서 소심하여 겁에 질려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기만 하고[눅 9:26]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 하고 사랑 가운데 호기 있게 진정으로 외칠 줄 모르는 자는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자(the cowardly)"[계 21:8]를 믿지 않는 자, 간음하는 자 등과 같은 계열에 두어 멸망의 장본이라 명시한 것이 그 때문이다.


고로 성경은 "대장부 같이 강건하라"[고전 16:13]고 주문하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자 같이 용맹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당신을 만들지 못하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 중 하나가 된다. 멸망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천성적으로 그런 성향인 것과는 여기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사랑으로 변신하는 것을 말한다.


천성이 얼간이 같은 이라도 사랑이 그를 주장(主掌)하게 되면 완전히 180도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은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아무리 넘쳐 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을 높이 기린 것이다[고전 13:1-13].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 온 전신을 사로잡을 때 어버이가 나타내는 사랑의 위력은 가히 모든 것을 초월하고 초연한 것이다.


자기의 영생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구원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고 오직 이웃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임하는 자세야말로 얼마나 숭고하기까지 하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를 성경은 그래서 거룩하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하라"[엡 4:24/벧전 1:15,16/히 12:14/고후 7:1]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면 이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복음, 삶의 아름다움, 생명의 아름다움을 이기적인 욕망의 충족으로 바꾼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교리이니 곧 이런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함"[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이 없이 무조건 특정 사실[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나 대신으로 죽으셨다는 억지로 만든 의미로 바꾸어]을 진실이라고 수긍하기만 하면 천국에 가도록 되어 있다는 오늘날 기독교에 만연된 인위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인 것이다.


따라서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악함을 버리지"[행 3:26] 않은 결과로 밤낮으로 시달리는 양심의 가책은 차마 버리지 못해 "처음부터 구원하시기로 택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는 역시 난데없는 교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속이기에만 바쁘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렇게 "처음부터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왜 주셨단 말인가. 이런 의문 하나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저들의 소위 천년 이상의 전통을 세웠다는 "신학(神學)"이다.


그래서 세상 종교의 비소(鼻笑, 코웃음)거리만 되게 만든 것이다. 미신에 불과한 세상 종교이건만 오늘날 기독교가 자랑하는 교리보다는 그들이 훨씬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로서는 입이 열개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미신 중의 미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악령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따랐기 때문이다. 성경을 스스로 읽어 "과연 그런가" 하고 성경을 직접 찾아 읽었던 초대교회의 베뢰아 사람들보다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행 17:11].


이와 같이 옳고 바른 소리를 할 때에는 세상과 세상 종교의  미움을 받게 된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도 충분히 각오하고 있는 터이다. 세상은 지금까지 그런 진리를 가르치고 외쳤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붙잡아다가 별별 야만적인 수단으로 참살, 압살했다. 이미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악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죽인 것으로써 명백히 나타내신 것이다. 죄인의 손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우리들 그 몸된 교회는 당연히 그런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는 무참한 죽음뿐이다.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성령 충만하여 그들 앞에 전달했을 때 저들은 스데반을 무참하게 돌로 쳐 죽였다. 세상은 오늘날까지 한 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이 소위 '자유 세계'에서 그런 무참한 죽음이 지금까지 얼마동안 없었다는 것은 진리의 소리가 어느 곳에서나 들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교회 핍박이 유달리 심했고 지금도 그러한 북한[79세의 나이에도 찬송 한번 실컷 불러보겠다고 중국으로 탈북했던 형제]이나 중국[석자직 목사] 같은 곳에서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오히려 두각을 드러낸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사랑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누구든 오라. 생명의 아름다움, 삶의 아름다움은 이 사랑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니 생명의 핵은 이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가치는 영원하다. 이런 영원성을 사랑하는 이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달려오라. 영생을 욕심 내어서는 달려오지 말라. 영생은 이런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욕심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사랑은 말 그대로 자신을 부인하는데 있다. 깨끗하고 맑고 거룩한 것을 사랑하는 이는 다 오라 하신다. 자기중심으로서 깨끗하고 거룩한 것은 없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데에서 생명은 출발한다. 자연계의 아름다움을 보라. 이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랴. 삶의 아름다움은 당연하고 사랑의 원리가 아름다운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모름지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의(義)와 선(善)과 아름다움[美]은 다 같은 뜻이다.


양면성의 원리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의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시면서 사랑이시다[요일 4:8].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嚴威)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모든 믿는[구원 받은] 이들에게 적용됨을 강력하게 교회에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롬 11:22]. 사랑 없이 법질서의 위엄만 있어도 삭막하고 무미건조하다. 위엄 없이 사랑만 있으면 무질서에다 문란이다. 더군다나 이 법이 생명과 사랑의 법이므로 사랑은 3위1체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지라 엄위와 인자의 양면성은 필연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신 대로 상대를 위하여 사는[고후 5:15] 데에 사랑이 있는 것이니 고로 죽으나 사나 오직 사랑하는 상대를 위함뿐이다[롬 14:7-9]. 그래서 "나는 너의 것, 너는 나의 것, 너의 것은 나의 것, 나의 소유는 너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르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나의 소유주라는 뜻이다. 그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바다[갈 2:20/요 4:10/행 2:38].


우리 즉 이 한 몸 체제에서의 각 지체를 이루고 있는 각자는 머리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갑이 본을 보인 대로 을도 갑을 위하는 것이니 갑이 먼저 을을 위함을 시범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의 회개가 바로 이 을의 이같은 반응을 말하는 것이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상대를 위해서만 사는 삶의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성경은 사람들이 그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한 대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음부터 이 세상이 있었고 그래서 노아의 홍수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나타났던 터이다. 그러나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은 동일한 죄악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벧후 3:15].


이렇듯이 절박하고 긴박한 상태에 놓여 있는 지금의 세상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노아 홍수를 기준하면 이 세상 역시 멸망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노아 당시와 같은 홍수로써는 심판하지 아니하시리라 약속하시고[창 9:13] 무지개를 주신 것은 [이 무지개는 홍수 당시와 그 이전의 기후가 오늘날과는 아주 판이했음을 말한다] 오래 참으셨다가 결국 불로써 조만간 심판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심이다[벧후 3:10-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심판을 영구적으로 철회하신다는 뜻에서 무지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을 예고하시는 의미이므로 오늘날의 인간 죄악상을 볼 때 이 세상이 하나님의 당시 노아 대홍수와 같은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지 "장차 임하실 진노"[눅 3:7]라 함은 마지막 심판 때의 불의 심판을 의미할 뿐이다. 아직은 오래 참으심으로써 그 마지막 때가 지연되고 있는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 얻을 만한 사람은 다 차질없이 구원 얻도록 배려하시는 뜻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죽으신 척하다가 살아나신 것이 그런 뜻이 아니라 [왜냐면 비록 죽으셨으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말 그대로 죽으셨고 따라서 결코 다시 살아나실 수 없으나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불가불 다시 살아나시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뿐으로 죽으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아버지와 하나되셨으니까 아버지께서는 살아 계시는데 아들께서 죽어 계실 수는 없다. 그래서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이요[고전 15:14-18] 그 죽으심만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느냐 하면, 범죄로 인한 아담의 죽음은 영원 멸망이 아니었고 단지 신령한 몸을 상실하고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었으나 이대로 방치하면 다시 말해 자연법칙을 따라 그 육체가 한번 죽어 썩어 버리면 더 이상 자연계에서든 영계에서든 사는 길이 완전히 막히므로 그 영혼은 멸망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인간은 이 자연계에 속한 죽음을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나는 수가 있어야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 복귀될 수 있음이다. 바로 이 불가능한 그러나 필수적인 과정을 나 위하여 사람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치르신 후 그 영[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영혼[그리스도]과 육체[나 자신] 관계로서의 이중 구조[아담이 애초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였던 것과 똑같이]로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인하여[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사람이시지만 하나님이시므로 육체로만 계시지 않고 영으로도 계시는 터라 성령으로써] 나 역시 이제는 당당히 신령한 몸을 입게 되어 영생하게 되는 그 이치다.


아담이 맨처음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였으나 영혼이 다음 단계로 조성됨을 인하여 영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가 살 근거를 마련하게 되어 그리하여 거기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것과 같이 됨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죄 값으로서의 죽음의 결말을 완전히 치르신] 다음 다시 살아나실 때에는 죄 값으로서의 자연계에 속한 이전의 육체가 아니시고 신령한 몸이셨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즉 나와 함께 죽으시는 것이 되기 위해 친히 나의 죄 값을 담당하시느라 죄인으로서의 받을 형벌로서의 죽음이셨으므로 그런 십자가의 죽음[죄수로서 혹독한 사형에 처해지는]을 거치셨다는 데에 단순히 죽음 즉 목숨이 끊어지는 것 이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면 죽음도 잠결에 가는 듯이 생을 달리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으로서의 마땅한 형벌[내가 받아 마땅한]을 받는 죽음이셨던 것이다[사 53:5-8,11,12].


고로 단순히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의미보다 그렇게 죄인으로서의 형벌을 당하는 모든 죽음의 고통 그리고 수치를[히 12:2] 나 위해 당하셨다는 데에서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다[다시 말해 온갖 수치와 고통의 죽음에 이르는 죽음까지도 불사하시는]는 확증이 확인되는 것이다. 내 죄로 인한 멸망의 죽음을 대신하셨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니 성경은 그렇게 가르친 예가 없다. 오직 우리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죽음을 치름으로써 우리의 죄과(罪科) 즉 죄와 죽음의 빚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그 죽으심을 나와 함께 죽으신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부활,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승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심 그리고 성령으로 다시 오심[오순절 날], 뿐 아니라 영원히 사시는 그리스도의 일체의 것 그 전부를 내 것으로 삼는 영원한 결과를 의미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나를 위해 사시는 사실이 현실화되는 것이며, 이를 근거로 나 역시 오로지 그리스도를 주인[그래서 "주님"이라 부르는 것]으로 삼아 나를 그 소유로 바쳐 오로지 그 뜻대로만 사는[고후 5:15] 즉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으로서의 자기 부인이 가능해진 것이다. 


내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즉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소유인 것이다. 처음 창조에서나 새 창조에서나 창조는 하나님의 단독 행위이기 때문이다. 창조하실 때 즉 피조물이 될 때 모든 것을 거저 주셨던 하나님의 소유를 나는 단지 되돌려 드리는 의미이지만, 형식으로는 내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드리는 것이 되게 하신 것뿐이다. 왜냐면 나 자신이 마치 나의 것인 양 착각하여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그러했듯이 또는 아담이 한 때 그런 마음으로 범죄했듯이]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드는 착각 속에 빠져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의 의미를 똑바로 아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첫걸음이 된다. 절대로 이 세상 살기도 하고 영생도 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세상은 시초부터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죽음의 처소요 멸망에 이르기 전 형벌의 자리인 것이다. 이런 짧은 목숨이나마 일정하지 않아 갓 태어나서도 죽고 10대, 20대의 나이에 짬도 없어 죽어 나가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성경이 증언하는 대로 "우리의 연수(年數)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버립니다"[시 90:10] 함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보내는 이 짧디 짧은 찰라 같은 세월을 오로지 보람찬 일에 바쳐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 전념할 때 그 어떤 의술(醫術)로 사람 목숨을 연장시켜 주는 것 이상의 값어치를 생산해낼 것이요, 그 어떤 억만 금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일시 그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 이상의 자비와 인자를 베풂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은 이들은 다른 것이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영원한 생명을 안겨 주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고후 6:1].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도 통하는 말이다. 3위1체 법칙의 대칭성 원리는 만유(萬有)가 대칭으로 양면성을 이루어 인과(因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모름지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그 닮은꼴[대칭형]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즉 만유가 있으니 이 만유의 창조자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반(反) 자연계 즉 영계가 있다는 증거다. 육체가 있으니 반드시 영혼이 별도로 존재함을 입증함이다.


이 세상이 있으니 오는 세상이 있고 이전 세상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의와 불의가 혼재(混在)하는 등 일견 무질서하니 오는 세상은 질서 정연하고 완전한 세상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존재는 명백한 것이다. 자연법칙의 통일성을 보아서도 하나님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이시다. 역시 3위1체의 원리가 가르치는 바다. 하나님이 계시면 인생들에게 주시는 그 말씀이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러 공언해오고 자처해온 것은 성경밖에 없다. 성경의 진실성은 그 내용이 훌륭히 자체 증명하고 있는 터다. 다른 외부적인 그 무엇으로도 입증하려 할 필요가 없도록 완벽하게 모든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이를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직접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도 볼 생각은 없이 겉모양으로만 지레 짐작하여 선입견으로 읽으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실성 입증은 다음 사실로도 측면 지원된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도 믿고 그리스도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않은 거대 종교 집단이 그것이다. 세상에서 세력화가 될 수 없다는 성경의 명백한 천명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정치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등 성경의 내용과는 무관한 것으로 교리를 삼고 있는 말하자면 그리스도 복음의 "가짜"이다. 오히려 이런 가짜가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믿고 생활하는 진짜보다 융성(隆盛)하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부조리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가짜가 진짜보다 흥청거릴 수는 없는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 경우 처음부터 줄곧 그러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 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활동을 증명함이다. 인간은 그에 비하면 육체에 불과하므로 적수가 되지 못하는지라 그 조종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을 얼마든지 마비시킬 수 있음이다.


이런 악령의 조종하에 움직이는 이들은 악령 일방적인 처사가 아니고 3위1체 법칙의 양면성 또는 대칭성 원리에서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 있으니 그런 조종을 받는 이들 자신이 그 "악함을 버리지 않고"[행 3:26] 회개하지 않음에 기인하는 것임을 성경은 역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아예 구원 받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어둡게 하시고 마음을 혼미케 하심이니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행 28:26,27] 하심과 같다.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 즉 악함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생하지 못한다는 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신 뜻이다[마 4:17/3:2]. 왜냐면 현재의 인간고가 악함을 미워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데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담의 범죄다. 이 세상 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 벌어들인 결과다. 자기 운명을 자기가 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경우에만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 것이요, 처음에는 회개하여 구원을 받았어도 또다시 악함을 버리지 않을 때는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영생이 취소되었듯이 우리의 영생도 취소되는 것이다.


악함이 무엇이냐 하면 조물주 하나님과 우리 각자는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하나되어 사는 것이 영생인데 그래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데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위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올바르게[의롭게] 선하게 사는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현재의 죽은 자로서의 죽은 상태로는 영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계의 지배를 받는 육체에 속해 있는 몸이므로 이 자연법칙을 따라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죽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고 종료되는 처음 창조이니 영생과는 무관이다. 그러하고도 다시 하나님이 살리신다면 그 죽음은 죽은 척하기만 했지 실지로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죽은 것으로서 모든 것이 종료된 다음 새로 창조되는 차원으로 내가 영생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유일한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위해서는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 첫 사람이 창조된 것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 위해 죽으신 다시 말해 나와 하나되시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되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친히 내 영혼처럼 내 육체 안에 오심으로써 이 새 창조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셔야 하는 것이니 여기에 들어맞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죄인처럼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데에 있다. 다시 살아나셔야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실 수 있지 않은가.


또 그렇게 다시 살아나심은 이제는 나와 영원히 하나되어 계시는 위치이시므로 내 스스로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격이 되어 새 생명으로 다시 출생하는 것이 되고 새로 창조되는 의미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나는 이제는 영원히 죽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뜻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그런 것과는 우리 구원이 아무 상관도 없다. 이렇게 그리스도 친히 내가 되어주시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으니 이는 영원히 자신을 선물로 내게 주시어 나를 위해 영원히 사시게 되어 있는 새로운 삶의 구조가 되어 있다.


바로 이 생명의 체제 즉 그리스도와 내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 하나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구조로 다시 출생해 있으니 한 머리 아래 많은 지체로 형성되어 있어 거대한 '한 몸'의 구조로 영원히 살아나가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게 되는 데에 우리의 말할 수 없이 넘치는 은혜와 사랑의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구원은 종교가 아니라 삶 자체인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리고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믿음의 형제[내 이웃]들과 어울려 지내는 일상생활을 가리킴이다.


공자나 맹자는 어떤 신앙의 상대를 정하여 그것을 위하는 전당 같은 것을 지어놓고 그런 것을 경배하는 뜻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이 올바로 사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는 법'은 영생이 따라주지 않는 것으로써 불완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몸과 머리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으니 머리가 되시는 창조자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으로 삼기는 좋으나 실천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왜냐면 그런 가르침으로는 자기 부인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공자나 맹자 자신도 자기 부인을 못한 것은 당연하다. 양심을 따르는 정상적인 삶의 외형은 그렇게 그려내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속 빠진 겉껍질처럼 실속이 없고 원동력이 없었으니 생명력으로써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머리 없는 몸[의 각 지체]과 같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런 모든 올바른 삶의 기조와 토대로서 인식 변화 또는 전환을 강조했는데[모든 행동은 생각에서 오듯이]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데 따른 맹점은 공맹(孔孟)의 도리와 하나도 나을 것이 없음이다.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오직 나를 위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내가 나를 부인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는데 그런 바탕이 빠져 있으므로 항상 나 혼자뿐이라 부득불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항상 자기중심으로만 맴도니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뿐인 것이다. 한 걸음도 진보 발전이 없는 영원한 제자리 걸음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죽은 자"[마 8:22]라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죽음과 함께 운명을 함께 하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노아의 대홍수 때와 같은 심판 아래에 있음을 알아야 할 일이다. 왜냐면 오늘과 같은 죄악으로 인해 당시 세상은 그와 같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은 그 이후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되어 우리가 세례를 받음[물 속에 몸을 완전히 잠기게 함]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는 것을 의미함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심판 아래 있어 죽음 아래에 있는 이 세상 혹은 세상 삶을 감히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에서 살아도 되는가 하겠는데, 산다는 것은 일절 자기중심이 없이 오로지 자기 부인으로써 머리와 몸의 한 몸되는 체제에서 사는 것을 말함이고 또한 영원한 생명의 신령한 몸으로[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는 것을 말함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일반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죽음의 짓이지 결단코 생명의 일일 수 없고 사는 것일 수가 없다.


그리스도 친히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이심에도 우리 위해 죽은 자 곧 죄인처럼 되시어 나 위해 죄인으로서의 형벌 받는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나를 구원하신 것처럼, 나도 그 머리의 그 몸된 각 지체로서 당연히 그 모습을 띠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 곧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적이요 의미인 것이다[요 20:21].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믿어 홀로 에티오피아 땅으로 나아간 여왕 간다게의 내시처럼[행 8:39] 내가 사는 고장에서부터 전도하여 사람들[제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기를 시작하면 그 곳에서 교회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히 3:12] 합심 기도[마 18:19/행 1:14]의 필요에서 모이는 것이기에, 매일 모여도 필요를 따름이다[히 3:13/행 2:46]. 여기에는 따라서 강제성이 없고 모두가 자진해서 모일 따름이기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와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더욱 힘쓰자"[히 10:25] 한 것이다. 그래서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이요 집 교회 운동이요 그리스도 의식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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