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이병철 삼성 회장 24개항 질문 (9,8)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9,8)



3. 삶의 기본 구조--------------------------------------------------------------------------------------------------------------


중국 산동성에서의 홍대위 목사


부산 송도 복음병원의 장기려 박사께서 생전에 남기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오세요..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있어요.." 북에 둔 아내를 생각하며 50여년을 홀로 사시던 장박사.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있어요'ㅡ. 이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아래에 홍대위(洪大衛) 목사의 간증을 소개한다. 그 분이 쓴 책이 <구원(救援)의 진수(眞髓)>인데, 아래 간증은 그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기적의 탈출>은 역시 홍목사가 소개하는 내용이기는 하나, 대구에서 그 자부되시는 김선동(金先同) 여사를 방문하여 들은 증언을 곁들여 적어본 것이다.


필자도 이 간증을 처음 읽을 때, "어쩌면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을까...우주가 내 것이란 확언을 ... 나는 거짓말이 아닌 담에야 죽어도 못할 것이다..."하고, 그렇게 믿을 수 있는 믿음이 몹시 부러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 설명한 사랑의 법칙을 알고 나서는 필자 역시 확언, 확신할 수가 있었다. <확신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홍목사는 <만유를 나의 것으로 상속해주신 하나님>으로 우리 일상생활에 가까이 계시는 사실을 세상에다 넉넉히 입증한 것이다.


남에게 꾸는 일 없고 구조를 요청하는 손을 평생 내밀어본 일이 없이 평생에 수십만금을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져보며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고아사업, 선교사업, 문서전도 사업을 원도 한도 없이 해낸 영국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 목사를 기억나게 하는 간증이다. 홍목사는 17세에 예수 믿고 20세의 약관으로 중국대륙으로 건너 가 40여년간 그 곳에서 복음전도와 교회 부흥에 헌신하다가 조국 광복 후 귀국해서도 80 고령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던 교계 원로였다. 이하의 글은 홍목사의 간증이다.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롬 8:32) 하셨다. 아들이 귀한가? 만물이 귀한가? 아들도 아끼지 않았거든 하물며 만물을 아낄소냐? 또 주님이 무엇이든지 구하라 하셨으니 우리가 구하여 얻지 못할 것이 없다. 만물의 소유주가 우리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상속자라 당당히 달라 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만물은 곧 우리의 소유가 된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것뿐이다. 필자가 중국에서 전도할 때 어떤 중국 신자가 묻기를 "목사님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한다. 나는 그에게 반문하기를 "자네 생각에는 얼마나 되어 보이는가?" 하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백석 추수하십니까?" 했다. 그 때 나는, "좀 더 한다네." "한 이백석 하십니까?"  "자네는 백자만 아나?"  "아!  그러면 한 천석 하십니까?" "천석도 더 한다네"  "그러면 한 오천석 합니까?"  "한 줄 더 올라가 보게" 하였더니, 그는 내가 실없은 농담이나 하는 줄로 생각하며 "그럼 만석 하신단 말이요?" "만석도 더 한다네" 하니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실없는 말이 아니올시다" 한다.


나는 정색하고 말하기를, "누가 그대와 실없는 말을 하겠는가?  나는 목사다. 목사가 교인과 실없는 말을 하는 법도 있는가?" 하였더니, 그는 다시 묻기를 "그러면 도대체 몇 십만 석이나 하십니까?"  "나도 자세히는 알 수 없어."   "아니 대강도 모르십니까?" "이 사람아, 하나님의 소유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는가?" 하니, 그는 "아!  그 말씀이로구먼요" 하며 비웃는 기색이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씀이라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말이면 혹 잘못된 말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리켜 자기의 상속자[성경에는 "후사(後嗣)"라 번역되었음]라 하셨고, 당신의 소유가 다 우리의 소유라 하셨다"고 했다.


근일에 소위 신자라 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예비하신 만물을 우리 상속인된 자가 누리지 않으면 누가 누릴 것인가? 우리가 누리는 것이 정당하다. 또 천부(天父)께서 기쁘게 주신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자. 필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에 믿는다고 해도 재산에 대한 욕망이 컸던 자이다. 그러나 재산은 얻지 못하고 궁핍하고 곤고한 생활을 하였었다. 궁핍 중에도 우환질고가 떠나지 않았으며 항상 불평과 비관으로 불신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념이 생긴 후부터 비로소 궁핍과 곤고가 없어졌으며 오늘까지 낙관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재산이 많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의 주인 "예수"를 얻은 탓이다. 내가 그의 상속자된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나는 타인에게 금전을 꾸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나의 천부께 구한다. 어떤 때는 십전, 이십전도 구하였고 때로는 백원, 이백원도 주셨다. 나의 필수에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주님이 주신 기사 이적을 일일이 간증할 수 없으나 필자의 평생에 제일 먼저 받은 표적 한 가지와 제일 최후에 받은 기사를 간증하려 한다. 30년 전 필자가 중국 산동성 교주(膠洲)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그 때 나의 모친은 강원도 평창에 계셨다. 하루는 모친께로부터 편지 오기를, 나의 딸을 귀국시키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여식(女息, 딸)이 15세라 중국 교육을 받아 가지고는 본국인에게 출가하기가 어려울 터인즉 차라리 본국에 와서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또 모친의 슬하가 적적하니 모친이 데리고 공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지당한 말씀일 뿐 아니라 그의 친모는 일찍이 별세하였고 지금 계모 슬하에 있는 것보다 조모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귀국시키기로 결정은 하였으나 여비가 문제였다. 중국 청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상륙하고 인천에서 다시 기차로 서울에 와서 서울서 버스로 평창까지 가려면 당시의 돈으로 50원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나의 수중에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그 날 저녁에 나는 이 사정을 나의 주님께 고하고 돈 50원을 구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스터라크(Miss Struck)라는 여선교사가 기도하러 왔다. 그는 독신인 사람으로 필자와 동역(同役)하는 사람이다. 가끔 필자의 서재에 와서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 날은 특별히 일찍 왔다. 기도를 마친 후에 편지 한 통을 내어놓으며, "이것은 내가 돌아간 후에나 뜯어 보십시오" 하고 나간다. 필자는 곧 그 편지를 뜯어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편지가 아니라 10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었다. "아니! 여보시오, 이것은 편지가 아니라 돈이외다그려!" 외쳤다.


그는 "왜 내가 간 뒤에 보시라니까" 한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돈이요?" 하니, 그는 말하기를,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어제 저녁에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을 하니 나의 수중에 돈 백원이나 여유가 있어서 이것으로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하였더니 목사님께 드릴 생각이 났어요. 목사님은 아들도 많고 생활에 곤란이 많을 듯 했어요. 그러나 이렇게 많은 돈을 다 드릴 필요가 무엇인가 하여 드릴까 말까 하다가 밤이 새도록 잠을 잘 못잤지요. 오늘 새벽에야 결정하기를 절반은 목사님께 드리고 절반은 다른 일에 쓰는 것이 좋을 듯 하여 그 절반 50원을 가지고 온 것이외다. 나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한다.


필자는 그 말을 들을 때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 그렇습니다. 내가 어제 저녁에 돈 50원을 주님께 구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급한 용도가 있었던가요?"   "네, 어제 나의 어머님 편지에 내 딸을 보내라 하시기에 그 여비를 계산하니 꼭 50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간구하였지요" 하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면 그렇지"란 소리를 연발한다. 그리고는 아무쪼록 안심하고 잘 쓰라고 부탁하고는 가 버렸다.


이제는 여비가 되었으니 떠나보낼 준비를 하게 되었다. 며칠 후에 청도 항(港)에서 배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배 떠나기 전 날 청도로 데리고 가서 배를 태워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딸을 데리고 기차에 올라앉아 청도로 가는 도중 교주에서 청도까지는 약 백리라 차 안에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여비를 잘못 계산한 것을 깨달았다. 50원이란 여비는 청도로부터 평창까지 가는 여비요, 나의 주소 교주에서 청도까지의 여비는 생각치 못하였다.


그 차비는 매인당 1원이니 두 사람에 2원이요, 또 청도에 도착하는 즉시로 승선하는 것이 아니라 여관에서 1박하고 내일 승선하게 되니 여관 숙박료가 또 매인당 1원씩이요, 내가 돌아갈 차비가 1원이니 도합 5원이 부족이다. 너무도 답답하여 딸에게 "얘! 너의 여비가 5원이 부족이로구나" 하니, 그는 얼른 대답하기를 "청도에 가서 꾸세요" 한다. 나의 딸은 말재주도 없고 애교도 없는 아이였다. 나는 "얘야! 나는 평생에 돈 꾸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니 그는 눈물이 글썽글썽하며 "그럼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한다.


"얘야! 우리 기도하자, 응?  하나님께 달라 하자!" 하니 그는 픽 웃는다. 웃거나 말거나 나는 엎드려 기도했다. 기도를 하고 나서도 아무 동정(動靜)이 없다. 기차는 칙칙푹푹 달려만 간다. 얼마 후에 성양(城陽)이란 역에 와서 정거한다. 이 때 마침 청도 편에서 마주 오는 열차가 들어오더니 내가 탄 기차와 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게 되었다. 나는 우연히 차창을 열고 내어다 보는데 저 편에서도 창을 열고 이 쪽을 내어다 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내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의 집사였다.  필자를 보더니 "목사님, 어디 가십니까?" 한다. "네, 이번에 내 여식을 귀국시키려고 청도로 데리고 갑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더니 자기의 탄 차로부터 내려서 나 있는 차창 앞으로 와서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5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너무 섭섭하니 과자나 좀 사 주세요" 한다. 내가 그 돈을 받을 때 나의 두 눈에서는 또 한 번 눈물이 흘렀다. 나의 딸도 울었다. 어린 소견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기묘하다는 것에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 청도 항구에서 배를 태워놓고 집으로 돌아오니 1전도 부족함이 없고 또 남지도 않았다. 이러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최후로 된 일 한 가지만 또 간증하려 한다.


기적의 탈출


1948년 봄에 중국 상해에 있을 때다. 하루는 만주 봉천에서 백리언(白理彦) 목사의 편지가 왔다. 내용인즉 지금 봉천에 우리 한국인 교역자와 가족 약 500명이 있는데 공산당이 불원간 봉천을 함락시킬 전망이나 철로와 항공이 다 끊어져버려 우리 500명의 교역자와 그 가족의 살 길이 막연하니 무슨 구원 방책이 없겠는가 하는 편지다. 그 때 마침 미국 선교회에서 수송기(쌍발 비행기) 한 대를 상해 선교부에 보내온 것이 있었다.


이 비행기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동란으로 인하여 교통이 끊어져 조난 당하고 있는 중국 각지의 선교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파송된 것이다. 필자는 이 비행기를 빌리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 비행기 관리자를 찾아가 교섭을 했으나, 좀처럼 허락이 되지를 않았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으로 필경은 이 비행기를 가지고 봉천으로 가게 되었는데 적어도 당시의 화폐로 200만원이 들어야 하는 비용이 큰 문제가 되었다.


비행기는 떠날 일자가 내일 새벽으로 박두했는데 오늘 저녁까지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평생에 누구에게서 돈을 꾸지 않기로 결심했으므로 다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만 구했다. 그랬더니 그 날 밤 10시 경에 취침하려 할 때 어떤 중국 친구가 돈 200만원을 가지고 오지 않겠는가. 해서 그 이튿날 무사히 떠나게 되었다. 봉천 가서 500명의 교역자와 가족을 전부 실어다가 중국 천진까지 옮기었다.
 

기적의 탈출(2)

홍목사의 회상(回想)을 따라 이야기는 다시 이어진다. 홍목사의 80 노모와 손주 등 가족 5인은 만주 장춘에서 조국 해방을 맞았다. 대일전이 끝나자 모택동의 중공군은 때를 만난 듯 국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전투는 소련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 만주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난리 통에도 귀국할 준비는 서두르고 있었으나 도저히 빠져 나올 구멍이 없었다. 80노모와 어린 것을 이끌고는 해로도 육로로도 도저히 갈 수 없어 공중으로 날아가는 수밖에 없는 몹시 절박한 상황이었다.


상해에 체재 중이던 홍목사는 가족의 안부가 적이 염려되어 장춘으로 기어이 한 번 들어가려고 결심했다. 장춘서 봉천까지는 약 천리길이라 봉천서 500명 교민들을 실어 나를 때는 미처 손쓸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팔로군(중공군)은 날로 포위망을 압축하여 들어가니 비행기도 들어가지 못하는 장춘이라 통신마저 끊겼다. 평소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서양 선교사들에게 구차한 도움을 청하지 않는 홍 목사였지만 그 자친(慈親)과 아이들을 생각할 때 견딜 수 없었다.


그 비행기를 다시 교섭해보기로 하였다. 선교사들에게 가서 노모님과 어린 손주가 있으니 한 번만 더 비행기를 빌려 달라고 간청했다. 선교사들은 콧방귀만 뀌고 들은 척도 아니했다. 누가 사지(死地)로 자원해서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홍목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거절을 당했지만 밤새도록 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으로 세 번째의 간청 끝에 허락이 났다.


홍목사는 말한다. "하루는 조종사 독일인이 말하기를 당신이 먼저 들어가서 준비하여 놓고 비행장에 와서 기다리면 내가 곧 들어가 지체치 않고 싣고 오겠노라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말이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무엇을 타고 먼저 들어가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 불가능의 일이 가능한 사실이 되었다. 하루는 풍문에 중국 항공사령부에서 군용기 한 대가 탄환을 싣고 모험적으로 장춘에 간다고 한다.



나는 이 군용기 편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평생의 힘을 다 하였다. 그 비용도 상당한 금액이 들었으나 조금도 군색없이 그 군용기를 타고 먼저 장춘으로 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나는 선교회 수송기 조종사더러 오늘 내가 장춘에 먼저 들어가 준비를 갖추고 비행장에서 기다리겠으니 내일 오전 8시 안으로 오라 하였다. 조종사는 놀라운 표정으로 정말 들어가게 되었느냐 한다. 자기 생각에는 들어갈 길이 없을 줄로 알았다가 들어간다 하니 천만 뜻밖이라 농가성진(弄假成眞)이 된 셈이다. 자기의 한 말이 있으니 할 수 없이 허락하였다. 자기 평생에 처음 되는 모험이라 했다".


가족을 위하여 안전한 피난길을 열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린 홍목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추호도 틀림없이 정밀히 진행되었다. 홍목사는 그 날 저녁 군용기를 타고 장춘에 들어갔다. 전투기만 날아다니는 비행장은 성냥갑 밟아놓은 것처럼 다 깨어져 나무 한 그루, 집 한 칸도 보이지 않았다. 공산군들의 포격이 심했던 것이다. 마침 탄환을 싣기 위해 굴러 들어오는 트럭이 있어 홍목사는 그것을 잡아 타고 장춘 항공사령부로 달려갔다.


사령관을 찾아보고 " 내일 아침 8시에 수송기 한 대가 들어올 터이니 허락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사령관은 대경실색하며 못들어온다고 고개를 흔든다. '군용기도 마음대로 못들어오는데 여객기가 오다니' 하며 거절이다. "나는 이 때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러나 나의 주님이 계시니 무슨 염려가 있으랴 하고 고개를 숙여 기도했다"고 홍목사는 회상한다. 하나님 응답의 정밀도는 언제나 기적적인 것이다. "기도하는 그 순간에 어떤 군인의 구두 소리가 난다. 눈을 들어보니 천만 뜻밖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 친구는 장충신이라는 청년인데 수년 전 내가 산동성 어떤 중국 교회에서 목회할 때에 나에게 세례 받은 친구이다. 그 때 사령부에서 항공대장으로 있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앗! 목사님, 어떻게 이 곳까지 오셨습니까?' 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더니 그는 아무 염려 말라고 하며, '오늘 저녁에 각 기관에 교섭할 터이니 목사님은 나의 찝차를 타고 어서 자친이 계시는 곳에 가셔서 내일 떠날 준비를 하라' 한다. 아! 이 장면이야말로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이다".


이래서 모든 일을 장대장에게 일임한 홍목사는 소학교 수용소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때 홍목사의 자부는 시장에 가서 쌀도 몇 백근 사고 수수도 사고 찬거리도 장만해서 수레에 실리어 가지고 오는데 느닷없이 시아버님인 홍목사가 오셨다는 것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홍목사로부터 비행기가 온다는 편지는 미리부터 받고 있었지만 이 난리 중에 이렇게 정말 꿈같이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마치 천사가 나타난 듯했다. 그 날 저녁 즉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이불 보따리만 챙기고 내일 아침 먹을 것만 꾸리고는 수십 년 간의 재산을 몽땅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라도 더 챙겨 넣으려는 가족을 홍목사는 "생명만이라도 건지게 해주시니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모두 먹이고 입히실 것이라"며 제지했다 (이 기적의 탈출 후 생활이 곤궁할 때에 평소 홍목사를 존경하던 전국무총리 이범석 장군이 금품을 보내오기도 했다 한다).


밤이 맞도록 행리도 준비하고 또 한국 교회의 요인들을 소집하여 한 30 여명 가량 데리고서 이튿날 새벽 장대장이 보내준 짐차를 타고 비행장으로 갔다.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비행장으로 나아가 30명 승객이 비행기만 오기를 기다리는데 약속 시간이 되어도 하늘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애를 태우기 시작했으나 드디어 9시 경 까마득히 하늘에 뜬 하얀 연처럼 비행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행장으로부터 착륙 신호가 안나와서 1시간이나 공중에 그대로 뜬 채 돌아다니는 바람에 공산군에게 여지없이 발각되어 좋은 대포밥만 만들어주는 결과였다. 비행장과 연락이 잘 안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착륙이 된 비행기에 승객들이 올라타서 곧 뜨면 좋은데 우편물을 실어들인다, 장교를 몇 사람 더 태운다 해서 또 1시간 이상이 지체되었다. 이런 판국에 헌병, 순경이 군인들과 함께 다섯 대의 찝차에 분승해 와서는 앞을 가로 막았다. 비행기를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홍목사는 회상한다. "그 중에 한 경찰관이 말하기를 '경찰국의 허가가 있느냐?' 한다. 나는 '어제 밤에 항공사령부에서 다 교섭하였다' 대답하니, 그는 말하기를 '우리 경찰국에서는 이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지금이라도 수속을 밟아 허가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아마 어제 밤 다른 관청에는 다 교섭이 되었어도 경찰국만은 잊었던 모양이다. 경관의 말대로 하면 이 비행기가 허가를 얻기 전에는 떠나지 못할 모양이니 그 눈치가 무엇을 좀 요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신분으로는 무엇을 줄 수도 없고, 지금 허가 수속을 하여 경찰국에 교섭한다면 오늘은 떠나지 못한다. 사정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떠나지도 못하고 안떠나지도 못하는 그 순간에 별안간 대포 소리가 나더니 우리가 탄 비행기에서 약 40미터 되는 곳에 포탄이 떨어진다. 이것은 비행장 20리 밖에서 포위하고 있는 공산군의 포격이다. 그러자 헌병들과 경관들은 허둥지둥 차를 타고 도망한다."


이 최초의 포탄이 떨어지기 앞서 연료차가 와서 비행기 꼭대기에다 호스를 연결해서는 기름을 넣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 쾅 소리가 나니 꼭대기에서 기름 넣던 이들이 기름을 넣다말고 후닥닥 뛰어내리며 세 사람의 비행사들(미국인, 독일인, 중국인)이 저희들끼리 고함을 쳐댔다. 연료차는 기름을 그대로 실은 채 허둥지둥 뺑소니를 쳤다. 달아나는데만 정신이 빼앗겨 마개를 막지 않아 께솔린을 철철 흘리며 곤두박질해 내빼니 그 비행장 일대가 온통 기름 바다가 되었다.


불이 또 한번 번쩍 하며 펑 소리가 나자 비행사들은 쏜살같이 내려와 방공호로 도망쳐 버렸다. 승객들도 모두 방공호로 기어들었다. 불과 5분이 못되어 떨어진 이 두 번째의 포탄은 먼저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폭발되었다. 조금만 있으면 비행기까지 박살 나고 말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홍목사는 그 방공호 안에서 기도로 엎드렸다. 얼마를 기도한 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조종사를 불러, "죽기는 마찬가지니 죽더라도 떠나면서 죽자" 하고 곧 출발할 것을 간청했다.


당시 홍목사의 80 고령 자당(慈堂)께서는 남들은 모두 방공호 속에 숨었는데도 그냥 비행기 옆에 멍하니 서 계셨다 한다. 그래서 즉시 화급하게 서둘렀다. 승객들을 태운다기보다 짐짝처럼 처박고 처싣듯이 해서 프로펠러가 막 돌아가는 판인데 어쩌다 처진 한 가족이 아이들과 함께 아우성이다. 그래서 부리나케 줄사다리를 내려 두레박으로 건져 올리듯 하고는 비행기는 비틀거리며 굴러대기 시작했다. 모두가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데 비행사가 기관실에서 빠져 나오더니 "할렐루야! 저기 좀 내려다 보오!" 하고 고함을 쳤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비행장이 온통 불바다가 아닌가. 기름으로 칠갑을 해놨으니 오죽 잘 타랴. 비행기가 일분만 늦게 떴더라도 이 세 번째 포격에는 직통으로 얻어맞았을 것이다. 얼마 후에야 안전 벨트를 매라고 주의를 주는 등 정신을 차렸다. 이래서 봉천에 와서 승객을 쏟아 놓았다. 봉천서는 북경으로, 북경에서 다시 천진으로, 천진에서부터는 한국으로 가는 구호선이 대기하고 있어 그것을 타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


봉천 와서 간증담을 털어놓을 때 비행사들은 비행사 노릇을 몇 년 해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한다. 즉 비행기가 떠자면 활주로를 몇 번 구르며 돌아야 하는데 이건 새가 날 듯이 사뭇 바로 떠버린 것이다. "그 후에 소식을 들으니 비행기가 떠나던 순간에 포탄 14개가 그 자리에 떨어졌다 한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기묘하신 섭리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모든 비행기의 비용도 부족함이 없이 주셨다" 홍목사의 맺음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주님의 경고 말씀은 이러하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니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밝혀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마 7:21-23].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면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심하다"[마 7:26,27] 하셨다. 결론으로 말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각종 기적, 능력, 기도 응답 또는 교회 성장에 끼친 공헌[말씀 전파를 통한] 등은 그 개인의 믿음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능력일 뿐 우리 각자의 행함[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후 지켜 순종하는 것]과는 별개이다.


즉 우리의 복종이 믿음을 뿌리로 하는 것은 사실이고 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그런 믿음이 있을 리 없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어 이를 언제 어느 경우에서든 행사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마음의 향방을 따라 우리의 순종 여부도 정해지는 까닭에 처음 믿음을 저버림으로 심판을 받게도 되고[딤전 5:12]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써 회개할 필요성도 생겨[계 2:4,5] 이 경우 회개가 없으면 그 결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행 5:1-11].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생애에서 당시 믿음으로 나타나진 하나님의 능력과 그 사람 개인의 영원한 운명은 항상 반드시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현실과 더불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현재 그가 어떤 족적을 남기고 있는가 하는 그 점에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이니 이 점을 명심하여 혼동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그런 능력과 믿음을 나타냈다고 하여 그것이 그 사람 본인에게 긍정적인 의미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그런 믿음을 나타내고서도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얼마든 멸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마 7:21-23].


우리의 구원 자체가 항상 현재에 있고 과거에 있지 않으며 미래에 또한 있을 수 없음과 그 이치는 같다. 왜냐면 우리의 구원의 핵은 사랑에 있고 사랑은 항상 현재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사랑과 항상 교차(交叉)하여 상호 작용을 하는]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요일 3:16].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말은 동일한 의미가 된다.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구원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거나 중도에 타락해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믿고 구원을 얻으면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이내 죽는다 하더라도 명백히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왜냐면 그는 구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지체하는 경우 그것이 몇 달이 되고 몇 해가 되고 혹은 수십 년에 걸쳐진다면 그 믿음의 사랑을 끝까지 유지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고 마음이 변하면 그 처음 상태대로 머물 리가 없다. 회개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자멸 행위까지 스스로 저지르게 된다[히 6:6/10:26,29].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와 같은 경우는 절대로 흔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전혀 없는데 그 회개한 강도만이 유일한 예"라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면 왜 이렇게 회개한 강도만이 예외가 되었느냐" 한다면 이상 설명과 같이 중도에 그 마음이 변함으로써 처음 믿음, 처음 사랑을 버리거나 저버릴 때 멸망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니 구원 자체에 무슨 결함이 있어 완전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오해를 낳을 여지가 없도록 하심이라 보면 어떨까.


그리스도의 구원이 완벽하고 아무 하자가 없는 다시 출생함이고 새로이 창조됨이기 때문에 그 믿음과 사랑을 변함없이 끝까지 유지하면[3:6,14]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 구원을 현재 이루어져 있는 사실로도 표현하고 미래의 일로도 표현하는 것이니 한번 구원 받았다고 그것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우리의 마음에 좌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담이 왜 처음에 산 자로 창조되었어도 나중에 죽은 자가 되며, 악령들이 처음에는 거룩한 천사로 창조되었음에도 왜 악령들이 되어 영원 멸망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겠는가. 그들의 처음 창조나 우리의 새 창조나 똑같은 창조인 것이다.


따라서 요즈음 색다른 이단사설이 유행하여 "구원 받았습니까?" 하는 말을 하며 돌아다니는 마치 구원 받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하는 "구원파"라는 것이 있다는데 이들은 한번 구원 받은 것만이 전부라 하여 심지어는 기도에 힘쓰는 것마저 게을리하고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을 정도라 한다. 그러면 왜 성경에 기도에 전력을 다해["with all perseverance"-엡 6:18] 힘쓰라 했겠는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성경의 요소요소마다 대목대목마다 그 몫을 지키고 있어 유사한 것 또는 가짜를 만들어놓고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4:2] 하는 일에 도가 통해 있는 자이다.


무신론을 만들어놓아 거기서 걸려 넘어지지 않을 때는 유신론을 표방하여 안심시켜 놓고는[남들은 거의 모두 무신론이라 하는데 하나님을 인정하니 정직하고 진리대로 말하는 줄 착각하게 만들어] 다른 무엇에 다시 걸려 넘어지게 한다. 현재 구원을 받았다고 해야 할지 앞으로 받게 되어 있는 것이라야 옳은 대답인지 확신이 없어 망설이는 이들에게 "구원을 지금 받은 것"이라는 말과 함께 다른 속임수 즉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는 성경의 경고를 "죽지 않는다"는 식으로 해석해 주어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속이듯이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는 질문에 당당히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다시는 이전과 같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해야 그것이 정확한 답변이다. "영생을 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는 인생들아, 이제는 안심하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영생하니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 4:17] 하신 것이다.


"돌이켜 악함을 버리는"[행 3:26] 것이 회개인즉 다시 말해 "악함" 곧 죄, 불법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고후 5:15/롬 14:7-9].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명"[요 13:34]을 주신다 하셨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 또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모든 계명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지금 계명이라 하실 때는 우리[구원 받은] 모두의 머리로서의 지시가 되심이다.


머리의 위치에서 내리시는 머리의 지시이므로 머리는 그 몸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영원히 위하지 않음이니 왜냐면 머리와 몸이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향후 절대로 몸을 떠나서는 머리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음이다. 고로 자기를 위할 때는 반드시 몸을 위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 몸[의 각 지체] 역시 당연히 그러하다. 그러므로 머리의 뜻을 행하고 머리의 일만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 하신 것이다. 몸은 머리가 친히 본을 보인 대로 행할 따름이다. 이것이 머리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이다.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던가 하면 자기의 전부를 다 주심으로써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본으로써 보이신 것이니, "내가 너희 먹을 양식이요 마실 음료"[요 6:55]라 하신 그대로다. 송두리째 당신 자신을 오직 우리 위해 내어주심이니 곧 영원하신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이 말 뜻을 알아차린 많은 제자들이 "어렵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느냐" 하고 다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다고 성경은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영생에 이르는 문은 좁으니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고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 경고하신 것이다[눅 13:24]. 오늘날은 이 말뜻조차 그들 제자들처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다.


그래도 당시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바로 알아듣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는 필요 없다" 결론 짓고 미련없이 그리스도의 곁을 떠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의미다. 자기 스스로 만든 그리스도의 상(像)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만든 하나님,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구원, 믿음 등 온갖 것을 지어내어 그것만을 위하고 그 외에는 모두 인정하려 들지 않는 가당치도 않은 교만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경고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고후 11:4]이 개입하게 된다. 오늘날 이러한 "다른 것" 곧 가짜가 판을 치고 온 누리에 가득하여 출렁대고 거의 모두가 여기에 물들어 있다. 물론 그들은 우리를 그 "다른 것"이라 하여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혼돈만이 소용돌이치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처음부터 미리 경고하시기를 계시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올 자도 없고 그리스도든 하나님이든 알 자가 없다 하신 것이다[마 11:25-27/요 6:44,65].


미리 경고해두신 사실이므로 여기에는 그 어떤 혼동도 혼돈도 있을 수 없다. 말씀하신 그대로 되어지는 현실들이기 때문이다. 양심과 양식(良識)과 상식을 통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았으니 하나님의 진리인 줄로 믿은 그 믿음대로 모든 지시하시고 경고하시는 바를 따르면 될 일이다. 기도에 힘쓰라고 하셨으니 그 경고대로 힘쓸 일이지 다른 해석을 갖다 붙일 일이 아니다. 노아 당시 세상은 노아를 미친 사람 취급했음을 항상 기억할 일이다.


미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반드시 노아가 하는 대로 따라 하여 불원간 임할 홍수에 대비하여 방주를 만들었을 것이요 그래서 당시 홍수로부터 구원 받은 사람이 겨우 8명이었다는 성경 기록의 나타남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노아는 당시 세상에서 퍽도 험한 세월을 혼자 보낸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나면서 인류의 중간 시조(始祖)가 되면서 마치 아담처럼 자기 세상이 온 것이다. 그래서 3운법칙은 그의 950년 생애를 홍수 이전까지는 침체기 또는 비 활동기간으로 잡고 홍수 이후를 전성기 또는 활동기[SN형]로 정하고 있음이다.


바울 사도도 자기 자신이 "미쳐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너희[교회]를 위한"[고후 5:13] 것이라 하였다. 미쳤다는 소리를 부지기수로 듣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다[행 26:24]. 그래서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그들은 장차 내가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막 8:37] 하셨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믿고 구원 받은 신분임을 말한다. 그렇지 못하면 부끄러워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구원은 받았어도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세상 앞에서 드러내고 말하고 선전하기를 부끄러워하니 그 사람의 결말은 멸망이다. 우리가 앞에서 구원을 논할 때 주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하였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시함이요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서[히 6:6/10:26,29] 좌 아니면 우, 흑 아니면 백으로서 그 중간 지대는 없다. 이것이 엄정한 3위1체의 원리인 것이다.


노아를 미친 사람으로 당시 사람들이 여긴 것은 당치도 않은 것을 믿고 이를 행동화한다는 것이었다. 멀쩡한 좋은 기후에 홍수가 날 정도로 비가 올 턱이 없는데도 홍수로 온 세상이 망하기까지 한다 했으니 이를 미쳤다고 한 것이다. 소돔 고모라 멸망 당시의 롯도 그 날 당일 치기로 경고를 받지 않고 며칠 사이를 두고 그 사실을 알고 소돔 고모라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면 정녕 노아처럼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롯의 사위될 젊은이들은 자기네 장인될 어른이기에 그런 막말은 못하고 멋지게[왜냐면 정색을 하고 누가 보아도 심각하게 경고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농담을 하는" 줄로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현실로 나타날 때는 그 누구도 더 이상 미친 것으로 믿지 않았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성경의 경고가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는 우리 역시 그런 광신자로 취급될 것이다. 그래서 미리 경고하시기를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누구든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부끄러워하시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리는 만무하다.


노아가 그 믿은 대로 방주[ark, 方舟, 네 모 난 모양의 배]를 짓지 않을 수 없었고 롯은 당연히 다급하게 사위들에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믿는 대로 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세상 앞에서는 미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광신자로 다루어지는 것은 세상의 종교인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삶을 누리면서 그런 "믿음"을 표 내지 않고 노아나 롯처럼 실제 행동으로 옮기면서까지 자기 믿음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믿고 있는데 어찌 그 사실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건성으로만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랴. 세상이 저주 받아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줄 알면서도 어찌 이런 하나님 미워하시는 세상을 사랑하고 그 삶을 즐기며 누리려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차라리 "믿지 않는다"고 할 일이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의미다. 죄를 지었으므로 그 결과로 죽은 자가 되어 있지 않은가.


죄를 지어놓고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겨주시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유다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을 벧엘의 여로보암 왕에게 보내실 때 명령하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으니 이는 벧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미워하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음이다.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고 다른 길로 가고 벧엘에 오던 길로 따라 돌아가지 않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변경치 않으심을 나타냄이니 나아가는 방향을 중도에 변하지 않음이다. 왔던 길로 도로 가면 그 길을 기준하여 말하면 방향을 바꾸는 것이 된다.


이는 따라서 방향 전환 즉 의의 길로 내처 줄곧 가야 하건마는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인간의 범죄 행위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선포하는 자로서 죄를 지은 거룩하지 않은 것과 한데 섞여 먹고 마시는 등 일시적이라도 삶의 낙을 누림이 마땅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여기서 삶의 낙을 누리며 살고자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인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머리와 몸 관계로서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을 말함이다. 고로 하나님을 머리로 인정하지도 않고 제각기 자기가 우주의 유일한 주인 즉 하나님인 것처럼 되어 자기중심으로 사는 세상인데 어찌 이런 세상과 한 동아리가 되어 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가증스러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도리어 사랑하고서 어찌 하나님 앞에서 옳다 하심을 얻으리요. 자신을 항상 죄인의 위치에 둠이 아니랴.


머리를 떠나 자기가 머리인 양 자행자지(自行自止, 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함)하는 것이 죄요, 악이요, 불법이요 불의다. 자기중심으로 뭉쳐져 있는 세상 삶을 사랑하는 것은 나 스스로 내 생명을 버리는 행위요 반대로 나가는 것이니 생명과 반대 방향이니 죽음밖에 더 있는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않은 그 선지자는 마침내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가 되어 자기 집 땅을 밟기도 전에 사자에게 찢겨져 죽음을 당한다[왕상 13:1-34].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도 마시게 하라 하였다"는 말로 그 선지자를 속인 그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墓室, 무덤 속의 주검이 안치되어 있는 방)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였다. 속임과 거짓말이 죄가 되는 것은 그 상대를 파멸에 몰아넣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이 아닌 말 자체로서의 거짓말 그래서 결과론적인 속임이 있다. 누군가 가족 중에 불치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를 아무쪼록 위로하기 위해 그 사실을 숨김으로 결국 속이는 것을 두고 죄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죄는 상대를 해치고 불행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의식적으로 나타내는 일체의 행위인 것이다. 사랑해서 그 사실을 차마 말하지 못해서 "속이는" 경우 그 목적이 사랑에서 오는 것이므로, 사람이 말[言語]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뜻 그대로이다.


늙은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사람을 해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의 불충(不忠)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20,21,28]. 하나님께서 이미 친히 말씀하셨는데 다시 천사가 와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시라 하여 전달하는 것이 있어도 그것이 진짜일 리가 없음은 능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일 이랬다 저랬다 하신다면 말씀으로서의 영(令)이 어찌 서겠는가.


그 하나님의 사람이 사실은 그 마음 속에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만이 서려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진단되는 것을 후세의 우리들이 거울로 삼도록 하기 위해 일벌백계로 징계하여 보이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함에[요 12:25/요일 2:15] 대하여 불만을 품고 달갑게 여기지 않는 누구든지 결코 그 영혼이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사전에 미리 경고하신 것이다. 앞서의 설명대로 자기중심으로 엮어지는 삶이 결단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이루어지는 인간 삶인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기중심이 아니라 시종일관 자기 부인으로 나가는 그리스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세상이 곱게 볼 리 만무하다. 항상 따돌림의 대상이 되고 멸시하여 경멸의 대상으로 삼게 마련이다. 악인은 의인들의 가증히[밉게] 여기는 바이요 또한 의인 역시 악인들이 가증스럽게 보는 것이다[잠 29:27]. 고로 하나님 미워하시는 세상과 함께 살고자 할 때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순신정신 선양운동


우리가 이공(李公) 순신(舜臣)의 정신을 기리는 것은 그와 대조되어 나타나는 '나'원균[우리 모두가 원균과 같은 자기중심이요 원균만이 악인이 아니라는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 "내가 바로 원균"이라는 뜻으로 '나'를 덧붙인 것이다]의 행적을 우리 모두의 행위로 간주하고 반성하자는 뜻도 당연히 포함된다. 이공과 같은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생을 마친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이공 혼자만은 아니나 이와 같이 역사 무대에서 대조적인 두 인물이 그 완연한 공과(功過)를 교차(交叉)시켜 얼개를 이룬 것은 역시 동서고금을 통해 유례가 없는 일이기에, 이러한 크나큰 역사적 교훈을 지닌 한국국민의 긍지라고 여겨 범 국민운동으로 전개할 가치가 충분함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정신 함양운동, 이순신 정신 고취 운동 등 그 어떤 명칭이라도 좋다. 올바른 인생 삶을 지향하는 이라면 개인이든 단체든 이에 호응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는 또한 교육자가 타락하고 국가 공무원이 부패해질 때 그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처럼 다른 분야는 다 부패해도 교육 공무원이 국가 미래를 책임질 어린 싹들을 올바르게 길러내고 행정 일선에서의 공무원들이 청렴하여 공직에 충실할 때 나라의 장래를 보장받을 것은 불문가지이므로 이런 공익정신이 투철한 인물들을 배출하는 데에 주동 역할을 담당하기 위함이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강탈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할 것이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이지 아니할 것이다"[사 33:15,16] 하심과 같이 올바른 사람 삶의 근간은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하나 의식에 있는 것이다. 이공 순신은 바로 이런 정신으로 생애를 유한없이 끝낸 인물로 그 대표적인 사표인 것이다.


3위1체 원리의 구조도(構造圖)는 공동체 의식으로 한 몸 체제에서 살아야 하는 모든 삶의 구조도이니 즉 머리와 몸의 관계인 것이다. 이순신 정신이라는 것은 이런 공동체 의식을 말함이니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이며 그와 반대되는 의[무릇 올바른 것]와 선[모든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감없이 밝혀줌이다. 왜 성경에서 이 자기중심의 세상에서 "참고 선을 행해야"[롬 2:7] 즉 자기 부인으로 일관해야 영생에 들어간다고 하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세상 삶에서의 공동체 의식의 삶은 이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한다는 그 점에서 차이가 난다. 따라서 세상에서 아무리 공동체 의식으로 살아도 그것이 영생에 이르지 하지 못한다. 즉 구원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생하는 삶의 기본 틀이 무엇인지는 확연하게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 이공 순신과 '나'원균으로 나타나는 교훈인 것이다. 이 공동체 의식으로 철저히 완벽하게 살자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이 필수이다. 그래야 다시 출생함이 되고 새 창조가 되는 것이다.


'나'원균은 용맹스럽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쟁에서는 아예 싸우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평소 믿었던 인물이다. 왜적이 처음 모습을 나타내자 그는 이 전쟁은 승산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싸우기를 일절 단념한 결과가 자기 휘하의 모든 수군 병력을 흩어 치우고 전선(戰船)은 모조리 바다 속에 침몰시켰다. 이것이 그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최선"이었다.


올바른가 그른가를 떠나서 자기에게 유, 불리(有不利)를 따지고 드는 것이 자기중심의 특성이다. 이공은 자기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떠나서 그것이 먼저 사람 삶의 도리에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부터 따진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그 두드러진 사례가 현재로 말하면 국방부의 인사과에 있을 때 상관이 부당한 청탁을 해오자 감연히 이를 거절한 것이다. 상관의 비위를 거슬러놓았으니 자기 신상에 불리한 것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과감히 자기의 신념대로 행한 것이다. 승진이라는 것은 순서대로 해야 하는 것이지 새치기를 해서는 공동체에 암적 존재가 된다는 그의 평소의 믿음을 따른 것이다. 또 한번은 자기가 일을 보는 청사 뜰에 오동나무가 있는데 이를 보고 개인적인 용도로 쓰려던 직속 상관이 수군 절제사가 사람을 보내 베어 달라고 요청을 해왔을 때도 공공의 물건을 사유화하면 공익에 어긋난다 하여 역시 거절하니 이에 앙심을 품은 이 두 소인배(小人輩)로부터 평생을 통해 미움을 받았고 그들의 방해 공작으로 곳곳마다 진로가 막혔다.


때마침 유례 없는 국난이 일어나 그들 소인배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되면서 그 손아귀에서부터 벗어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평생 그 악인들의 등쌀에 절대로 볕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신상에 불이익이 닥칠 줄 알면서도 올바른 것에 대한 그의 충직(忠直)함을 변하지 않은 것이 '나'원균과의 차이다. 그로 하여금 역사상 불세출의 인물로 만든 것은 그의 용맹보다 두뇌의 명민함보다 나라에 대한 충렬보다 이러한 시의(時宜,  그 당시의 사정에 맞음)였고 이것이 그를 구출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공동체 의식이 올바르고 정작 사람 사는 도리인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신념대로 살지 못하고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여 모두가 다 자기중심으로 나가 자기에게 유리함과 불리함만을 따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순신 정신 선양운동을 벌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올바른 데 대한 신념 하나만으로 사는 것이 과연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취지로 벌이는 운동이다.


이공처럼 때를 얻음으로써 그 이름 석자가 역사에 남겨지든 않든 그런 것에는 오불관언으로 오직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이가 하나라도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이상 사회로 진전하는 한 걸음씩을 보태는 보람찬 일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이공 하나만으로 족하다. 대표적으로 나서서 역사적 교훈을 만대에 끼침으로써 의의가 있고 이로써 족한 것이다. 겉으로 생색 냄이 없이 묵묵히 사람 삶의 정도를 걷는 이들이 그 국가 사회의 버팀목이 된다는 지식, 포부, 그것만으로 만족인 것이다.


더러운 욕심으로 이름을 내어본들 그것이 무슨 가치냐, 오직 욕됨만 돌아올 뿐이지 않은가. 사유(私有)와 공유(共有, 公有) 하나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식별력도 없으면서 공직(公職)에 턱턱 앉아 개인적인 야욕을 부림으로써 전체 인간고(人間苦를 더 심화시키는 병폐를 일찍부터 통감해온 이공이기에 배경의 덕을 입고 출세하는 것을 혐오했기에 직속장관이 병조판서가 그의 인물됨을 보고 서출 딸을 이공의 소실(小室)로 주고자 해도 거절했다.


먼 친척뻘인 이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어 자기를 직접 면담하고자 했을 때도 벼슬길에 나서는 데에는 그보다 더 좋은 배경이 없는데도 이를 거절했으니 자기 실력으로 나아가야지 실력도 없으면서 연줄을 타고 처세하는 것을 정도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구로서의 우정으로 그렇게 연줄을 대주려고 했던 유성룡은 그 후로는 그를 고집불통으로 취급하여 일절 관여하지 않다가 시국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국가가 널리 인재를 찾는 바람에 그제서야 지금까지 잊은 듯이 버려두어 한낱 미관말직으로만 떠돌고 있던 이공을 다시 천거하기에 이르러 그제야 수군 절제사로 앉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결론 내리기를 그를 "때가 불러냈다"고 한 것이다.


나라가 불러 일을 시키면 대장부로서 진충보국(盡忠(報國))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초야(草野)에 묻혀 농사나 지으면 족하다고 평소 그 시구(詩句)에 읊조려 둘 정도로 그는 개인적인 공명심이나 야심이나 사심(私心)이 없고 오직 사람 본분을 다하는 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유일한 생의 소망이었던 것이니 이 점을 우리는 높이 평가하여 우리의 귀감으로 삼자는 것이 우리 운동의 목적인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기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심은 적으나 그 결과의 가치로 말하면 생사(生死)가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삶의 도리로서의 자기 부인을 하면 이 세상에서는 삶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등지려 하지 않고 [인간의 원수인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세계이므로 등질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세상과 벗하여 세상에서의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경우 이런 공동체 의식의 삶을 기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몸과 머리로서 구성된 한 몸으로 하나되는 삶의 방식이 최고로 이상적인 삶의 형식인데도 이를 버리고 우선 당장 편한 대로 자기중심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이 악인 것이다. 따라서 선과 의는 자기를 부인하여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한 몸 체제에서 각 지체가 되어 있는 자기의 상대인 머리를 위해서 살고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이웃[자기와 함께 된 지체]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니 그 증거가 사람 생기자 살인극부터 먼저 일어난 가인과 아벨의 사례이다. 세상이 전반적으로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살아남아 있는 이유는 이 세상은 구원 받을 만한 사람은 누구나 구원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강제로도 지금은 세상이 존속해야 할 필요성에서다. 그 강제력이 3운법칙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 있음이다. 구원 받을 그 마지막번째 되는 사람이 마침내 구원 받을 때 세상은 지체 않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되어 있다.


세상은 갈수록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악화 일로를 걷고 있으니, 죽은 자들의 세계요 이들을 통치 지배하는 것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 악함을 버리라 즉 회개하라는 것이나[행 17:30/3:26],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악함을 버리는 것만 쏙 빼어버림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거짓말을 믿어 구원 얻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나가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름이 없이 악하면서도 구원 얻는다 함이 양심으로 판단해도 면구스러워 만들어놓은 교리가 즉 "육신대로 살아도"[롬 8:13] 즉 죄를 지어도 "죽지"[:13] 않고 구원은 받는다는 교리다.


그리고도 다시 생각하니 그것이 논리적으로도 부합할 리 없으므로 다시 교리를 만들어놓되 엉뚱하게도 "미리 택하심"을 아전인수 격으로 끌어들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원 받을 사람들을 택하시고 멸망하실 자를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택함 받은 자는 믿게 하시고[그래서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그들 중에는 많다] 그 나머지는 멸망에 버려두셨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귀에 갖다 붙이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귀고리는 귀고리라 말씀하시고 코걸이가 있다면 코걸이 외에는 달리 의미가 없도록 말씀하시는데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은 말씀을 한도 없이 혼잡하게 만드는 것이다[고후 2:17].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어느 누가 함부로 취급하여 전연 엉뚱한 해석으로 혼잡하게 할 것이냐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를 않으니 왜냐면 하나님은 그런 악인들의 "말씀 혼잡"을 악인들 스스로를 걸러내는 수단으로서 역으로 이용하심이다. 즉 악인들을 걸러내시기 위한 방편으로 삼으심이다. 이는 장차 임할 적(敵)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서도 성경은 같은 이유를 밝히고 있으니,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누가 감히 혼동시켜 가짜를 만들어 사람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하나님을 막는 행위를 할 수 있느냐" 할 것이 아닌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의 대상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그런 악한 자를 이용하신다 한 것이다[살후 2:11,12].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섭리다. 왜냐면 구원 얻을 자는 오히려 "어린 아이 같이"[마 18:3]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와 같이 잘 아는 체하고 확실한 지식이 있는 양 하여 각종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 잘 믿는다고 하는 이들은 말씀을 어렵게 생각하도록 하여 그래서 말씀 혼잡을 통하여 심판하시는 것이다[고전 8:1-3].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알게 하여 주시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앞으로 올 수 없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요 6:44,65/마 11:25-27].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요 6:45] 어떤 사람에게 계시를 해주심으로써 알게 하시느냐 하면 세상이 죽은 자들의 죽음의 세계요 결코 사람 사는 곳이 아님을 알게 하심이니 죄를 지어 악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되었으므로 악함을 버리는 자가 그 대상이다.


다시 말해 "회개하라"[행 17:30]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함으로써 회개하여 악함을 버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린 아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이다. 이는 당연하니 현재의 인간고와 죽음이 악함 즉 범죄함으로써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또 다시 아담처럼 범죄하여 악함을 자취함으로써 죽을 바에야 구원하신들 무슨 소용이랴. 이렇게 성경에 분명하게 밝히고 있건만 억지로 비틀어 성경 해석을 하여 자멸에 이르게 하니 이보다 더 정확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재와 활동에 대한 증거를 어디서 찾으리요.


왜 이것을 증거라 하느냐 하면 소위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성경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이상 지적과 같이 그렇지 않은 사이비 종교[기독교라는 이름의]를 가장 강대한 세력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 가장 큰 세력이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당치도 않은 교리를 만들어 위하고 있는 곳이요, 그 다음이 위에 지적한 그러한 악행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수긍하기만 하면 그것을 구원 얻는 "믿음"이라 가르치고 그것만으로 능히 구원되다는 가르치는 종교 집단이다.


후자의 경우 비록 그런 "교회"에 나가더라도 그 가르치는 바에 상관 없이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여 겸손하게 대접을 하고 스스로 악함을 버리라고 성경에 명령하고 있으니 양심상으로 그 악을 따르지 않는 "어린 아이 같은" 이들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그런 이들은 그가 소속되어 있는 단체의 교리 여하에 관계 없이 [실상 그런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들이므로] 구원 받는 수가 있다.


물론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전혀 구원이 없는 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그런 예가 없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 자체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전적으로 소멸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친히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구원이 되는데 "마리아를 통한다"고 가정해보라. 이는 그리스도를 믿되 "모세 율법을 통한다, 할례를 통해야 한다"는 바울 당시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갈 5:4]과 똑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왜 이런 이단 사상을 근절시키기 위해 그 각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여러 말로 그 거짓됨을 지적했는지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은혜에서 떨어지도록"[:4] 만드는 장본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이런 문제로 결부시키는 이마다 그 속에는 성령이 임하실 수 없음을 재차 단언하는 것이다. "악행을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고 "예수님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말 번역에나 "대신 죽으셨다"는 말로 오역(誤譯)이 되어 있지 영역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to die for us]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슷한 의미일 수는 있어도, 똑같은 의미는 아닌 것이다. 처음부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신 것이니 우리 위해 죽으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으셨다고 했지 대신 죽으셨다고 설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대신 죽으셨을' 경우에는 "우리는 그 덕에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된다. 나 대신 죽었는데 내가 또 죽는다면 그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내가 죽을 것을 대신 죽었으니 그 대신 나는 죽지 않아야 '나 대신해서 죽었다'는 말이 비로소 성립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내 죄를 지시고 내가 받을 형벌을 받아 죽으신 그 죽음이 바로 나와 함께 죽으심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가령 아기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나 아기를 안은 엄마가 한사코 아기를 죽이는 것을 반대하고 "나와 아기는 한 몸이라" 울부짖으며 같이 죽겠다 하므로, "오냐 그렇게까지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 죽음이 어떤 것인가 한번 맛보아라" 하고, 아기를 업은 엄마를 온갖 형태의 고통을 가하여 죽인 후 그 살아 있는 아기와 함께 묶은 다음[엄마가 아기와 한 몸이라 하고 아기의 죽음을 반대했다고 하여] 강물 속에다 집어 던지는 것에 비유할까.


비유는 적당하지 않다 할지 모르나, 그럴 때 아기는 숨을 못쉬어 그냥 죽었고 엄마는 갖은 고통 가운데 죽었다는 그런 차이라 할까. 그래서 내가 엄마 덕에 안죽는 것이 아니라 엄마와 함께 죽은 것이 그리스도의 우리 위하신 죽음의 의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근거를 만들어주시기 위함이다. 우리 홀로로는 일단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이것이 엄정한 자연법칙이다.


하나님 세우신 자연계요 그 법칙이나 이 기존 원리를 떠나서는 하나님은 그 무엇도 하실 수가 없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그 기존 질서를 없애시는 결과가 되고 그리 되면 기존 피조물 전체가[거룩한 천사들까지 포함하여] 해체되고 와해되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사람되시고 나와 하나되심으로써만 나를 다시 살아나도록 하는 대책밖에 없다. 그래서 자연법칙에 묶여 꼼짝 못하는 나에게 자연법칙을 초월하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이룩된 나의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이시니 자연법칙에 구애되시지 않는다.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법칙을 새로 창조하시면 되는 일이다. 그 새로운 원리원칙을 따르면 나는 아무 탈 없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기에 여기 비로소 나의 구원[영생]이 가능해지는 터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철저히 과학적이니 과학적이라는 말은 자연법칙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이런 논리도 없고 합리성도 없이 세상 종교는 무턱대고 영생한다고 가르치니 얼마나 반 과학 비 과학이요 따라서 가당치도 않는 미신인가.


미신이면서도 미신인 줄 모르고 외려 과학적이라고 장담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완전히 제 궤도를 이탈한 이성이요 지성이다. 우리는 육체인데 이렇게 육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영(靈) 곧 신(神)밖에 없다. 인간의 철천지원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바로 이 세상 신으로 군림해 있음이다. 앞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생들을 좌지우지한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이 신의 소행이 아니라면 가짜가 진짜를 압도하거나 월등하게 표출될 수는 없는 일이다.


성경은 명백히 하나님의 사람들은[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핍박의 대상이 된다 하시고 때문에 "나와 내 말[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의 말씀-현재 일반적으로 설파되고 있는 소위 교회의 교리는 그 말씀이 아닌 것이 거의 전부다]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눅 9:26] 경고하실 정도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서나 어느 곳에서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이들은 세력화를 형성하고 세상 권력마저 한 때 그 아래 굴복하고 있었으니 성경과는 전혀 다른 사이비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유야무야로 만들고 실제 상황과는 다른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횡설수설로 만들어 놓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보라, 기독교가 너희도 보다시피 세상에서 절대적인 세력으로 이만큼 성장해 있는데 그리스도는 항상 약체로서 핍박의 대상이 된다고 했으니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이 정도다" 하고 얼마든지 말을 지어낼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성경은 누구나 이해하기에는 한도 없이 어려운 책으로 또는 종잡을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 인식시키기에 오늘까지 성공해온 것이다.


이런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략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한 대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사업에는 하등 지장이 없다.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따라 진행되고 있을 따름이다. 악인은 걸러지고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만이 그래서 그 한 몸의 지체 역할 하기를 충실히 하는 이들만이 구원 받는다. 하나님 앞에서 일체의 일은 차질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오직 한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이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하나님은 미리 아셨다는 것뿐이다.


미리 아심을 근거로 해서 미리 정하신[택하신] 것이므로 그 최초 혹은 최종 근거는 나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인 것이다. 이 자유 의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다. 하나님 친히 손대시지 않는 것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므로 나의 영원한 운명을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 하나님도 그 누구도 관여할 일이 아니다. 미리 아심을 따라 미리 택하신다는 것은 내가 만일 악함을 버리고 머리되시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기로 작정했을 때 그 어떤 장애나 방해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처하신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이들이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처럼 어떤 이는 구원하시는 것으로 어떤 이들은 멸망시키는 것으로 정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누가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겠는가. 실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아들께서도 모르시고 천사도 모르는 일을 하시는 분이기도 하지만[마 24:36] 원칙적으로 피조물에게 자초지종을 알리시지 않고 하시는 일이 없으시다[요 15:15]. 피조물에게 매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교제를 위함이시다. 상대를 모르고서 참다운 사랑의 교제가 있을 수 없음이다.


앞에서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만 '나'원균이 당시 성급하게 모든 전선을 자침(自沈, 자기 배를 스스로 침몰시킴)시키지 않고 수군 병력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이공의 전라도 수군의 전과에 크게 고무되어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을 것이다. 왜냐면 그 때 왜적은 우리 수군의 위세에 완전히 기가 꺾여 도망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부산 앞 바다의 왜 수군 본거지를 함락시켜 일찌감치 전쟁을 종결시키고 왜의 육군을 독 안의 쥐로 만들어 포위시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결론 지어도 반박할 여지는 없다.


그러면 '나'원균의 이공에 대한 시샘도 없었을 것이고 통제사 자리를 놓고 '나'원균의 모함에 가까운 비방도 없었을 것이니 숫제 통제사 자리를 만들 필요도 없을 것은 경상, 전라 수군이 협동하여 작전을 잘 수행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전쟁은 곧 끝나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반대로 '나'원균이 통제사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됨으로써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박할 여지가 없다. 왜군은 우리 이공의 수군에 갇혀 운신의 폭이 극도로 제한되어 전쟁을 다시 시작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원균으로 인하여 우리 수군이 전멸하자 그제야 전쟁을 다시 일으킬 담력을 얻은 것이다. 이공을 제거하기 전에는 감히 전쟁 재개는 엄두도 못내는 터였으므로 전부터 치밀한 계교를 쓴 것인데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마음 놓고 이전에는 손도 대지 못한 전라도 방면으로 진격하여 나간 것이다. 이공은 공동체 의식에서의 주인 의식이 철저했으므로 왜의 계략에 말려든 조정의 시답잖은 출전 명령을 무조건 따르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2차전 때 연합군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들었던 독일의 명장 롬멜도 히틀러의 마음에 차지 않는 명령에는 불복하기가 예사였다. 히틀러는 그렇다고 해서 롬멜을 불러 올려 단죄하려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으니 당시의 우리 조정보다는 군사 전략면에서 훨씬 똑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공은 그런 파멸을 초래할 명령에 교묘히 피해오다가 결국 항명죄로 포박되어 서울로 가 문초 중에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공은 신념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일말의 후회도 없이 그런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도 담담하기만 하고 구태여 연명할 기회를 찾지 않았다. 당시 뇌물만 쓰면 죽은 자라도 살아난다고 이공도 그 난중일기에 쓰고 있지만 뇌물을 써 구명하라는 친지의 권유에도 "인명 재천"(人命在天)이라고 대꾸했을 따름이다.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평가처럼 이공이 만일 전과에 연연하여 경상 우수사와 다투는 등의 졸장부였다면 당연히 이런 변칙적인 뇌물 쓰는 것을 마다할 리 없다.


'나'원균은 조정에 연줄이 닿아 있음을 기화로 부하 군졸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도 미흡한 군량미로 뇌물을 만들어 부지런히 갖다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덕에 죽어서도 영예롭게 감히 이공과 나란히 "선무일등공신"에 봉해진다. 죄상을 따진다면 일찌감치 군법에 회부되어 형장에서 사라졌어야 할 '나'원균의 행적(行蹟)이다. 인간 세계에서 한다는 일이 대개 이러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바로 이와 같이 올바르게 사는 것을 가르치고 명령한다.


그 근거는 명확하니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각자는 그 한 몸의 각 지체로서의 역할 분담으로 그 핵심적인 것이 자기 부인이다. 이공의 경우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세상에서의 공동체 의식에 의한 정의로운 삶이 바로 그러한 형태를 띠는 것이고 그림자적인 실천에서도 그런 청사에 빛날 공덕을 이룩한 것이거늘 이 바로 영원한 삶의 최대 행복을 위한 조건이 되고도 남지 않겠는가. 이 자기 부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실화하고 구체화하고 실질화하고 일상생활화한 것이다.


즉 공동체 의식에 철저한 삶을 산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나 올바른 사람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내는지 그 역사적 실례를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대조된 삶에서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운동과 더불어 이순신 정신 선양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죄가 무엇이고 악이 어떤 결과를 맺는지 그리고 선과 의(義)가 무엇이며 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상반된 삶이 자세와 이상 설명과 같은 결과인 것이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한 몸의 체제에서 자기 부인을 하는 삶이 의요 선이요 이와 반대로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죄요 악인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그 근본부터 밝히는 것이므로 완전한 구원과 사람 삶의 법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만큼 영생과 직결되어 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이치야말로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 사는 법은 현재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천국에서나 본질적인 의미는 똑같은 것이니 곧 한 몸 체제 속에서의 공동체 의식인 것이다.


공동체 의식에서 핵심 요소는 주인 의식으로 자기 역할을 다함에 있고 공명심 같은 개인적인 사리사욕에 사로잡히지 않는 데에 있다. 이공 순신은 이런 점에서 그 특징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요 과연 그 결과야말로 경천동지할 만한 것이 아니었던가. 쓰러져 가는 한 국가를 살려내었을 뿐 아니라 이웃 중국까지도 보다 참혹했을 [명이 몰락하고 청이 흥기(興起)하는 과정은 필연적이라 보더라도] 전쟁의 참화 속에 빠져들기 전에 방비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한 개인, 다시 말해 올바르게 정신이 바로 박히면 '나 한 사람'의 힘이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역시 한 개인의 잘못된 인생관이 자기 한 개인에게만 미치지 않고 한 나라, 한 대륙이라도 불행 속에 빠뜨릴 수 있는 실증(實證)인 것이다. 하물며 영원한 세계, 영원한 삶과 관련된 일이랴. 이공 순신을 일개 무장으로 인식하면 아니 될 일이다. 참다운 공직자(公職者) 상(像)으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자랑으로가 아니라 온 세계인의 삶의 귀감으로 삼아야 마땅한 것이다.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대조적인 삶의 자세와 그 결말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우리인즉 각자 개개인이 이런 정신으로 나가도록 운동을 벌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억지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책무를 강조하고 "먼저 나부터, 나만이라도"의 운동을 하자는 것이니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각 개인이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국가 변란에서도 이공 순신 평소의 개인적 신념이 끼친 힘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망국적인 생활 태도이니, "나 하나쯤이야 공동체 의식을 가져본들 무엇하랴" 한다든가, "나 하나쯤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사리사욕을 취한다고 나라가 둘러 빠지겠느냐" 한다든가 가볍게 생각하기 쉬우나, 이공 순신과 '나' 원균의 사례에서, 절대로 그렇지 않고 "나 하나"라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침몰하려다가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한 실례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당시 한 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원리가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적용되는 인간 삶의 기본 도리임을 우리는 3위1체의 원리에서 확인하고 있는 터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공의 전반부 생애에서 살폈듯이 절대 다수는 자기중심으로 나간다는 것이니, 따라서 공동체 의식으로 일관되게 삶을 영위하려면 현세에서 환영 받지 못하고 이공의 경우처럼 "복이 없다", "옹졸하다", "가족 굶어 죽이게 안성맞춤이라"는 등의 별의별 소리를 다 듣게 된다는 것을 각오하고 실제 그런 응달 속의 삶이라도 각오하지 않는 한 그런 신념에 찬 삶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옛 시절 우리 임시 정부의 김구(金九) 주석(主席)이 외친 사자후가 있지 않던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바로 이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우리가 문화 민족이 되어 문화로써 세계 선도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예로부터 예의지국이라는 평을 받았고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순결과 정결을 숭상하여 흰 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이라 했었고, '나'보다 '우리'를 앞세워 "우리 집,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들" 등 언어생활에도 그대로 드러나듯이 개인적인 이기주의보다 공동체 의식이 두드러진다 하여 기독교 선교사로 온 자기네 서양 문명이 도리어 부끄러워진다고 술회한 서양 사람도 있었다.


방송에 들으니 현재의 19세 난 어머니 없는 자기 친 딸을 십여 년 간 성 폭행을 한 50대 남자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9세 난 아들이 자기가 게임에 몰두하는 것을 타일러도 듣지 않아 따귀를 몇 대 때린 어머니를 폭행죄로 고소하고는 처벌은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런 일은 인륜 차원에서 별도 취급하여 특별법으로 다스릴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에 앞서 그런 조처를 취해야 옳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세계가 금수의 정글로서 추락하기는 오직 시간 문제다.


형태만의 국민복지정책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다운 삶의 정신 문화 창달에 힘을 쏟으면 그런 것은 저절로 해결된다. 왜냐면 자기 혼자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개인주의[이기주의]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기에 그렇다. 이기주의는 공동체 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다. 공동체 의식에 철저한 생활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태면 그것이 영생이요 구원이다. 다름아니라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머리로 모시고 항상 이 머리를 위주하여 머리 중심으로 사는 삶이다.


내게 영원하신 어버이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사실과 그리고 나의 단짝으로서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친히 우리 각자의 머리로 계심을 인정하고 내 안에 모셔 들임이 구원이요 영생이다. 사람마다 이와 같이 머리를 위하는 일만 항상 생각하여 한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모시니 모두가 그 머리의 몸의 각 지체요 머리의 지시를 따라 또는 머리의 본을 따라 각 지체 상호간을 위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체를 머리와 및 함께 된 각 지체의 소임(所任)으로서 일임(一任)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동체 의식은 어떤 나라와 같은 집단이기주의에 불과한 집단 체제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자기 나라의 일에는 똘똘 뭉쳐져 남의 나라를 때때로 침략하는 것은 자기중심의 연장이요 확대일 뿐이다. 고로 창조자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다. 이는 직접 영생과 직결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하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말하자면 그의 나라다. 따라서 곧 그는 적(敵) 그리스도를 출현시켜 스스로 하나님으로 가장(假裝)하게 하는 최후의 전략을 구사하여 진행시킬 것이다. "최후"라는 것은 이후부터는 그리스도 친히 세상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항상 미리 가짜를 등장시키는 데에 이력이 나 있는 자이다. 선수(先手)를 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는 하나님이 사업을 방해하는 차원은 아니니 하나님 앞에서는 악인들을 걸러내고 추려내고 솎아내는 작업이 되는 까닭이다.


지금은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 악령들의 나타남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이다. 그 자신의 모양새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종 형상과 모양으로 가장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하는 것이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이른바 "외계문명의 우주선 또는 외계인"이다. 흔히 하는 말로 ufo라는 것인데 악령들의 변장술이다. 지금 이 시대는 동영상이 발달하여 그런 각종 잡것을 직접 목도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화면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런 각종 문명 기기의 발달을 촉진시킨 것이다. 물론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진행되어 오는 것이다[살후 2:12].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도 멸망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고후 4:3,4]. 그런즉 그런 각종 동영상들은 참고 정도로 한두번 보고 확인할 일이요 거기 빠져 흥미를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런 것 역시 어느 정도 사람의 마음을 마취시키는 중독성이 강하여 백해무익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악령들은 워낙 신(神)들이기 때문에[고후 4:4/히 1:14] 그런 육체나 자연 물질에 관한 일들은 우리가 진흙 주무르듯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로도 자신들을 변형시켜 인간 여자와 더불어 자식들까지 낳은 자들이다[창 6:4]. 거룩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분부를 받들어 인간에게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사람의 형상 외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악령들은 인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파멸시키기 위한 속임수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런 각종 모양과 형상으로 변형을 하거나 소위 우주선[ufo]과 같은 것이나 기괴한 사람 모양을 손쉽게 만들어 써 먹는 것이다. 사람도 요즘은 로봇 인형 같은 것을 만들어내듯이 악령들 역시 그렇게 하기는 간단한 작업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신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 할 것이다. 그러나 창조자와 피조물의 격차가 큰데 친히 그리고 영원히 그런 피조물의 형상이 되신다는 것은 사랑 그것도 보통 사랑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우리를 위하시는 어버이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으니 사람이 되셔도 그 이유가 죄인으로서의 형벌 곧 모든 죽음의 고통을 지시며 나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함이니 '사랑'만이 이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아들을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 따로 아버지 따로 우리가 보거나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면 그것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시므로 사람의 몸으로 계셔도 영원히 그것은 아들이심과 동시에 또한 아버지의 모습이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으니 나를 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되고 그리스도는 바로 나의 모습이시기에 제2의 나, 또 하나의 나라고도 설명하게 된다.


바로 내 형상을 하시고 있고 그 형상 그대로 그 모든 계심과 일하심, 움직이심이 바로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는 따로 나 자신을 위해 살 것이 없고 위할 이유가 없다. 나보다 완벽하게 주님 친히 나의 삶을 사시고 있는 것인데 그보다 못하게 내가 나를 위하는 서투른 일일 내가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대신 항상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심장-빌 1:8]으로 그리스도 친히 이 세상에서 일하신 대로 일하는 것이다. 그것이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밤낮 가리시지 않고 기도하시고 선한 일을 본으로 보여 주시며 행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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