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11. 종교의 종류와 그 특징은 무엇인가?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가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는가?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
회개한 강도
따라서 내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한 고난 받음은 필연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채 회개함으로써 영생에 들어간 그 강도의 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사례를 들어 우리가 임종 직전에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된다고 착각할 수 있는데, 그가 그 죄로 인하여 형벌을 받는 중에 회개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불찰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이런 일은 아주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과거 아무런 선을 행함이 없는데도 은혜로써만 즉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임을 확인시켜 주심이다. 그 강도는 말 그대로 오직 행한 것은 죄밖에 없는 데 그러나 넉넉히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에 들어간 것이다. 이 사실만을 성경이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 임종시에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사례로서 받아들이기에는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하니, 왜냐면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구원 받을 기회를 악의적으로 지연시키다가 그 기회마저 영영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회개한 강도의 형벌로서의 고난 받음을 여기서 지적하는 이유는, 그가 회개함으로써, 그 고난 받음이 자기 자신의 범죄를 인한 형벌로서의 의미가 180도 변환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영광스럽게 일신(一新)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왜냐면 똑같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도 그리스도의 고난은 바로 그 강도를 포함시켜 아담을 비롯한 모든 인류를 위한 형벌[사 53:8,12]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강도는 회개한 즉시 자기 죄를 인한 형벌을 이중으로 받을 필요가 없는 것. 왜냐면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이 자기 죄를 인한 것이었음이다.
다시 말해 그 강도는 회개한 순간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골 1:24] 의미로서 즉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받는 고난에 영광스럽게 동참하는[빌 3:10,11] 것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회개한 강도와 같은 희귀한 사례는, 임종시에도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이 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누구나 구원 받으면 그 즉시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받음에 돌입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고난 없는 전쟁은 없다. 서로 싸우는 마당이므로 서로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주는 것이다. 사단과의 전쟁에서 우리는 사단에게 발꿈치를 물리고 우리는 그의 머리를 밟는 것이다[창 3:15]. 전자가 먼저 일어나고 후자는 그 다음의 상황이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됨으로써 "자신을 구원하고"[딤전 4:16] "자기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지는 것이요 죽는 것이다[요 12:25]. 도리어 죽고자 할 때 악령 사단을 이기는 것이요 사는 길이다. '사즉생 생즉사'다.
지금까지 계속 설명해 왔지만, 자신을 구원하고 자기 구원을 이룬다고 해서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니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도"[고전 9:27] 나의 구원이 목적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 몸을 쳐 복종시킴'이다. "구원을 이루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이룸이요 "나 자신을 구원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함이다. 왜냐면 나를 새로 창조하실 때부터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는 전적으로 그 피조물을 위하실 뜻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균일하게 그러하시니 이는 그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서 처음부터 자리 잡으심이다. 따라서 각 피조물은 그 한 몸 체제에서의 각 지체(肢體) 역할이다. 머리는 몸[의 각 지체]을 위하고 몸[의 각 지체]은 머리를 위하는 구조다. 나를 구원하시는 새 창조에서도 당연히 그러하다.
그 증거가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시다. 성경은 정확히 이를 지적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Himself]을 버리신[주신-"to give"]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했다. 우리말 번역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고 과거사(過去事)로 표현
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번역자가 지금까지 이 글에서 줄곧 성토(聲討)하고 있는 "대신 죽으셨다"는 신학적 편견 내지 선입견으로 이 구절을 대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과거 이천 년 전에 죽으신 역사적 사실이므로 그렇게 과거사로 억지로 표현한 것이다. 영역은 물론 현재사(現在詞)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이라는 말과는 모순이 되지만 그럼에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강한 거부반응을 무리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고후 5:15]. 처음부터 즉 아담이 창조될 때부터 그러하다. 왜냐면 조물주 하나님 친히 그 피조물을 위하심으로써 '그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완벽하게 대신 수행하시도록 되어 있는 삶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사랑 안에서의 둘이 하나됨이다. 이것은 어떤 법칙이기에 앞서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이라도 어떤 물건을 제조했을 때 나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내가 만든 그 제품에 집중되어 있게 마련이다. 일껏 만들었다가 내팽개치듯이 할 바에야 처음부터 만들 작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하는 순리를 따르는 것이 모든 진리의 본성(本性)이다. 이는 다시 말해 만물 만상이 한 조물주[곧 아들 즉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그리고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 친히]로 인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대목이다.
여기서도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이 있으니 즉 '한 조물주의 모습'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한 분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두 분이라는 뜻도 아니다. 이것이 '둘이 하나되어' 존재하고 활동하는 특성 중의 하나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래서 하나님은 원래 모습[형체]을 드러내시지 않으신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라는 것은[고후 4:4] 의미상으로 그러하시다는 뜻이지 형체를 두고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피조물은 형체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천사들이 영이지만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대하여 대립
개념으로서의 영이어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오관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는 뜻이지 그 고유의 신령한 몸[형체]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몸 역시 그러한 몸으로 장차 변환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영물들의 "영"과 하나님이 영이시라 할 때의 "영"과는 또다른 차원의 개념인 것이다. 피조물로서의 영은 일률적으로 자기 형체를 지니는 것이다.
인간의 영은 처음부터 육체를 대동한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창조되고 그 다음 단계로 영혼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중 구조다. 이에 반해 영물들은 영계의 땅["ground"]을 소재로 하여 창조되었으므로 그 육체가 바로 영이고 영이 그 육체로서 동일하다. 영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능력이 있어 [영계로서의 에데낙원에 있는 식물이 생명과 나무, 선악과 나무에서 보듯이 그런 비상한 능력을 구비하고 있음과 같이] 얼마든지 자연계에 속한 육체 또는 기타 형상으로도 스스로를 변환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은 아무리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어도 영은 영대로 몸은 몸대로 변함없는 이중 구조 그대로였다. 처음 창조될 때부터 그런 구조로 시작했으므로 엄격한 일관성을 따름이다. 이 일관성에서 법질서, 원리원칙 등이 확립된다. 그래서 물 흐르듯 하는 모든 자연스러운 순리의 기본 바탕이 된다. 피조물이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되어 있다는 것 역시 그런 순리 중의 하나다.
생명이 바로 그런 의미 즉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므로 죽음은 그런 기본 질서에서의 이탈을 의미함은 당연하고 따라서 "구원"이라는 뜻 자체가 그 기본 질서로 다시 복귀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 "나 자신을 구원한다"는 등의 표현이 함유하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자기중심과는 완전히 180도 다른 것으로서, 그 반대 개념인 자기 부인을 가리킴이다.
워낙 세상이 죽음의 세계라 이 생명의 질서와는 처음부터 거꾸로 진행하는 터라 혼동하기 쉬우나 그러나 관점을 제대로 해서 보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혼란스러울 것이 실상은 없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의 이 영광스러운 생명의 법질서 아래로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니 곧 우리의 구원이요 이 구원의 뼈대가 다름아닌 둘의 하나됨에 있어 철저히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함에 있고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복종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을 항상 복종과 결부시켜 생각함이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된 이중 구조로서의 이 ‘복합’ 인생은 ‘여벌’ 인생이라고도 할 만하다. 옷이 겨우 한 벌뿐이면 그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전전긍긍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벌의 옷이 있다던가 할 때 넉넉함과 여유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와 같이 우리 각자의 삶이 하나는 이 땅의 나 자신이요 다른 하나는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므로, 내 자신이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위치해 있는 바로 그것이 나의 현재의 모습임은 당연하다.
내가 비록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 받아 내 육체가 비참하게 빠개지고 으깨져도 실제 나 자신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눌 21:18]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데반이 분노한 유대인들의 성난 돌팔매에 그 육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기 직전, 그 자신의 또 하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것이니 "보라! 인자[人子, 그리스도를 가리킴]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행 7:56] 하고 소리 친 것이다. 그는 자기의 또 하나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영광스러운 증언 때문에라도 격노한 군중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기 색깔을 선명히 지키기를 힘쓸 일이다. 비록 그것이 극심한 고난과 죽음을 유발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을 사단의 마수로부터 건져내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로서는 오히려 보람찬 일만 될 뿐이요 아무 유한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성령으로 친히 계시나 육체[신령한 몸]로는 하늘에서 하나님[아버지] 우편에 위치해 계심이니, 똑같은 그리스도로서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람으로 영구히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유 안에[in] 계시고 만유를 통해[through] 계시고 만유 위에[above] 계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됨은 이와 같이 엄청난 것으로서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해 있는 거대한 모습이니, 가감할 필요가 없는 말 그대로다. 이에 따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음이니, 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와 사람으로서[사람이 아니시면 나와 ‘하나 됨’이 불가능하다] 하나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심을 인하여 성령의 모습으로 내 안에 계시는 터이므로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계심인 고로[요이 1:9] 그래서 또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됨이다. 고로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기도[롬 8:9] 하고 아버지의 영이시기도[:11] 하니 둘이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두 모습이 아니라 한 모습으로 계심이다. 모습이라고 해서 형체를 말함이 아니라 그 실질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와 문자 그대로 불가분이므로 나 자신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어 땅에 있는 것이 무너져 백 번 어찌 되어도 하늘에 있는 나 자신은 항구불변이라 건재하므로 나는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는"[단 3:27] 것이다.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서도 셋이 아닌 넷으로 되어 있었던 것과 같다. 하늘에 계시는 ‘또 하나의 나 자신’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여벌’로서 여러 수만 명의 인간이 있는 것보다 무한정으로 나으신 것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이런 엄청난 위치에 있다는 것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 똑같은 비중으로 그리스도 친히 나를 통해 이 세상에서 자기의 남으신 일을 하시는 의미 또한 중요하므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17:18]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4:34] 이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임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앞에서 설명한 '둘이 하나 됨'의 '동시성'과 '양면성'을 따라 내가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뜻을 행할 때 한해서 그리스도께서 내 모습이 되어 계시는 의미가 부각되는 것인즉, 이런 '든든하고 넉넉하고 느긋하고 그득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 곧 사람 살리는 일에 충성을 다할 일이다.
12. 종교의 종류와 특징을 묻는 질문인데 11문과 동일한 내용으로서,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를 이회장은 묻고 있다. 질문이라기보다 항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착한 사람"이고, 어떤 이들이 구소련 독재자 스탈린이나 2차대전 당시 히틀러나 기타 사회의 각종 흉악범과 같은 "악인"[질문·6]이냐 하는 물음이다.
이들 독재자는 그들의 강제노동 수용소로 인해 더욱 악명이 높다. "이렇게 대량 학살 또는 참혹한 인간 비극을 더해 주는 이런 천인공노의 죄악은 왜 묵인되는가" 하는 것과도 같은 질문이다. ①첫째로 생각할 것은, 악(惡)에는 경중(輕重)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 누구든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자리에 앉혀 놓으면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나 문제는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다.
'질'에서는 모두가 똑같다는 것이니 곧 자아중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일체의 것이다. 단지 그런 권력이 아무에게나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극소수에게만 어쩌다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만이 그런 악행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것뿐이다. 해변에 놀러 갔다가 가지고 온 호도 껍질을 까기 위해 해변의 그 많은 자갈들 중 아무 것이나 어차피 하나만 집어 들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흉악범도, 인간의 그와 같은 수성(獸性) 또는 마성(魔性)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예에 불과하다.
그의 생활 환경, 신체적인 구성 인자(因子) 등이 복합 작용을 하여 그런 예를 만들었을 뿐이다. 오직 우리로서는, "인간의 죄성(罪性)이 저 정도로구나,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는 탄식으로 족할 뿐이다. 질에서는 모든 인간이 같으므로 도토리 키 재기일 뿐, 여기서 더 낫고 못함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마찬가지 의미지만 ②둘째로, 따라서 인간 중에는 엄밀하게 따져 "착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양심이 착하다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장치하신 기계적 작용이므로 착하고 올바른 것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양심을 인간 마음에 장치하여 제동 역할을 하도록 하신 하나님만 선하시다 하셨다[막 10:17]. 이런 실상을 알 리가 없어 하나님은 인식 못하고 양심만 눈에 들어온다 해서 맹자(孟子)는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하다는 뜻으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순자(荀子)는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그와는 반대로 성악설을 말한 것이다.
이 양면성에서, 어느 하나만 고집하면 둘 다 틀린 것이고, 둘 다 수용해야 비로소 각자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원천적으로 인간은 자기중심이다. "원천적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의 범죄 후 모든 인간이 '죽은 자'가 되어 있고 "육신"[롬 7:5-8:13]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을 가리킴이다.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에서는 선은 없다. 앞에서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한 바와 같다.
그래서 "인간 중에 의인은 없다"[롬 3:10]고 성경은 확언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하신 뜻이 바로 그것이다. 아담은 선했고 영물들도 선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선을 버려 악을 자취(自取)함으로써 악령이 되고 죄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자기중심인 인간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자기를 만든 것이다. 아담이 아닌 그 후대(後代)로서의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죽음에 이름으로써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서 생래적(生來的)으로 즉 "육신"[롬 7:5-8:13]에게 포로되어 죄인으로 위치해 있다. 물론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출생하기"[요 3:3] 전의 상태를 말함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마 8:22]라는 것은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었으므로 내일이라도 사고를 만나든가 병에 걸리든가 하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고 그렇지 않아도 일정한 때가 되면 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육신"[롬 7:24-8:13]이라는 자기중심의 본능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고 한 몸으로서의 지체들인 이웃을 위해' 살지 않으니 이 자체가 죽음의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불가능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행 17:30]. 모두가 다 죄인이므로 굳이 심판할 필요나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이 경우 멸망만이 해답이고 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어 구원될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만 기다리게 된 것인데[행 17:30]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오셨고 비로소 심판이 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이제는 비로소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무조건 악을 행하면 벌 주어 심판하고 선을 행하면 죽어 좋은 데로 보낸다는 그런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과 같은 이유로 해서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죄'요 '죽음'이니 심판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더 이상 인생이 죄와 죽음에 갇혀 있지 않도록 해방시키심으로 인해 그리스도 친히 그 해방자가 되시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선악간에 각자 그 행한 것을 따라 심판 받음이 가능하게 되어졌다는 의미다[행 17:31/고후 5:10].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출생한 사람은 범죄 전의 아담처럼 선하고 올바르고[義] 거룩하니[聖潔] "거룩한 천사"들과 같음이다. 범죄하기 전에는 모든 피조물이 선, 의, 성(聖)이었지만, 피조물[아담 그리고 영물들 중에는 사단과 같은 악령들] 스스로가[자기의 자유 선택으로] 자신을 그렇게 악하고 추한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 곧 지금의 "거룩한 천사"들이 그런 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로 '선'이요, '의', '성'인 것이다.
우리의 경우,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우리의 범죄가 자기의 임의적인 자유 선택이라기보다[물론 자아중심을 처음부터 선호한 경우 그렇지도 않으나] 생래적이었으므로 심판이 불가능했음을 위에서 밝혔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우리 역시 "자기의 자유 선택'이라는 아담과 같은 범주로 환원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믿지 않음이다. 믿더라도 중도에 변하여 역시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순종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중심을 고집하면 그 결과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 그것이다.
영물들 중에 사단과 같은 악령이 생겨났듯이 당연히 인간 중에서도 악인이 생겨나게 되어 있다. 숫자가 적었어도 그룹과 스랍들 중에서 그룹 하나가 그런 범죄를 했으니, 인간이야 그 수가 얼마나 많은가. 따라서 사단처럼 자기 임의 선택에 의해 악을 행하는 이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전자를 가리켜 그리스도께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악을 행하는 자로서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는"[요 3:19,20] 것으로 분류하셨다.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하여 이제는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니 이 자기 부인을 뿌리로 하여 모든 선과 의와 거룩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고 했고,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오직 자아중심이 되어("당을 지어"의 우리말 번역은 KJV의 "contentious"와 같은 것으로서 오역임)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7,8)고 한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는 토대 위에서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워질 수 있고 거룩해질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자아중심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 하셨다[:20]. 이것이 당연함은 영물들 중에서도 악령들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즉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구원자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판장이시다. 이 심판은 각자의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니 만일 구원이 하나님께서 무작정 미리 택하신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심판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즉 어떤 이는 믿어 구원하게 만드시고 어떤 이는 구원되지 못하게 묶어놓으시고는 마지막 심판대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에[롬 2:8,9] 구원 받지 못할 자로 책임 추궁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움직이신다고 먹칠을 해놓은 것은 사단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인간의 교리는 단연 배척할 일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냐, 그리스도를 믿어 얼마든지 이제는 선을 행할[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자기중심의 삶을 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았으니, 자기 자유 의사에 의해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지 않은 결과가 된다[요 3:18].
따라서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살후 2:12]고 한 대로 심판의 기준은 악을 행했느냐, 선을 행했느냐 오직 여기에 달렸다[롬 2:7-10/계 20:12,13/고후 5:9-11].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 기준일 수가 없는 이유다. 물론 믿어야 선을 행할 수 있다. 고로 선을 행하는 자는 이미 믿은 자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는 이들이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마 7:21/25:45].
그러므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제 막 시작을 했다는 의미다. 종결이 아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죽은 자였다가 산 자가 되었다 즉 물에 빠졌다가 남의 도움으로 물밖으로 나왔다는 의미다. 물밖으로 구출되어 나왔다가 또 부주의로 다시 물속에 빠지는 것까지 미리 예방해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담이나 영물(천사)들도 영생하는 상태에서 범죄함으로 자기 자신을 망친 사례들이다. 우리 역시 여기서 예외일 수 없다. 구원받음을 마치 천국으로 곧장 바로 들어가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오류 속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어 온 것은 스스로 성경을 읽음으로써 주님 친히 약속하신 대로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덕에 얹혀 편안하게 구원을 누리겠다는 공짜만 탐내는 자아중심의 욕심이 그런 피동적인 자세를 낳는 것이다. 사랑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데에 특징이 있다. 따라서 자아중심인 사람은 사랑이 없음을 스스로 입증함이다. 구원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이다. 사랑 없이 구원과 천국을 꿈꾼다는 것은 망상이고 미망이다.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인간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 전의 모든 인생 비극을 말하는 것이지, 원천적으로 인간 피조물이 무조건 선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니 그렇다면 어째서 "거룩한 천사"라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명령하고 있다. 거룩하고 선하게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러면 죄 짓도록 만드셨다는 뜻이니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찌 인간을 심판하시겠는가. 고로 말부터 우선 되지 않는다. 죄와 죽음은 한 사람 곧 아담 때문에 온 것이라고[롬 5:12] 성경은 못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③셋째로는, 인간이 인간을 착하다고 할 때는 객관성을 결한 것이니 그와 같이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예외 없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하지 않은 인간이 스스로를 선하다, 않다 판단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한 이가 없고 의인이 없다고 했을 때는, 누구는 특별히 악하다는 말도 다시 말해 스탈린이나 히틀러 등을 들먹이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을 때는, 오직 그 말씀으로써만 우리의 모든 판단 기준을 세워야 함이다.
④넷째로 고려할 것은 3운법칙을 설명하면서도 지적했지만 이 세상에서의 인간 삶을 정상적인 삶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삶이라면 3운법칙과 같은 우리[cage] 속에 넣고 인간 생애를 마름질하실 까닭도 없다. 오직 유일한 의미는 장차 나타날 영원한 세계에서의 자기 위치를 이 세상에서 각자 스스로가 정한다는 여기에만 있을 뿐이다. 그런 안목에서 판단할 때, 이 세상에서의 악인들의 발호(跋扈)도 이 세상의 실상이 죽음과 고통과 불행뿐임을 단지 일깨워 주는 역할로서의 긍정적 측면이 있다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필귀정으로 되어지는 인생사라면, 이 세상 사는 재미[낙]에 빠져 영원한 세계에 관해서는 더욱 생각할 틈을 얻지 못할 것이 아닌가. 빠듯한 목숨에 생각마저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흐른다면 인생의 현재의 비극상(悲劇狀)을 어떻게 헤아려 영원 세계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악인들의 그 악이 합리화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은 3운법칙 설명에서도 밝혔다. 악인의 악이 용납되지 않는 것과 더불어 그런 악인도 얼마든 회개하여 돌이키면 살 길이 열려 있음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악인을 강제적으로 즉각 처형한다면 그가 언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라도 만들어 보겠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어도 진노하시지 않고 그 요구까지 들어 주신 것도 이런 차원에서다. 그러나 이런 관용(寬容)도 이 세상 한 때뿐이지 영원 세상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정비되고 고착화하고 정착되어 있으므로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오직 이 세상에서만 "오늘"이라 하는 동안에[히 3:13] 기회를 살리고 정신 차리고 회개할 것은 하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권선징악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즉 악을 행하니 벌을 받고 선을 행하니[혹은 신의 요구대로 따르니] 형통한다는 식의 말은 성경이 금기시하는 강제, 간섭이기 때문이다. 오직 사리 판단으로 그리고 양심에 비추어 그것이 사람 사는 도리에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즉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히 1:9] 데에 본질이 있음이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 올바르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자유인이 누리는 자유의 제 모습인 것이다. 강제나 간섭에 좌우된다는 것은 자유인으로서의 개념에도 반하는 일이다. 성경은 그러므로 결코 모순된 내용을 담지 않는다.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는가?" 했는데, 이 질문은 앞에서 충분히 밝혀졌다 하겠으나 이회장은 불교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회장이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왜 꼭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불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면 그 대가로 천국이든 극락이든 가는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대체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장치해 두신 양심이 언제나 지상(至上) 명령으로 작용한다는 증거다.
그러나 이미 설명했지만 막연히 "착하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가 아니라 이치에 맞게 ’한 몸‘의 원리대로 살아야 그것이 삶의 법질서를 따름이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는 것은 하나님은 전체를 골고루 보시고 인간은 한정적이고 제한적으로 눈앞의 일, 코앞의 것만 볼 수밖에 없는 까닭에 차원이 다르다. 즉 공동체 의식, 또는 '우리' 의식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니 반드시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머리로 인정해야 함이다.
단지 양심대로 산다고 선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일시 착한 언행을 했다고 선행이 아닌 것이다. 공동체 의식이어야 하고 공동체 의식에서는 하나님을 반드시 머리로 인정해야 제대로 된 것이니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말씀을 믿지 않는 데에서는 선 또는 선행이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이 선도 아니고 성경에서 말하는 선행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은 단지 그 그림자로서의 형태에 불과할 뿐으로 맛보기로서의 의미만 있지만, 반드시 그 머리가 존재함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머리로서의 하나님조차 인정하지 않는 종교가 어찌 '한 몸'됨의 사람 사는 도리를 논하겠는가. 어찌 '선'과 '악'의 기준인들 정하겠는가. 장차 나타나게 될 "악한 자"[살후 2:3-12] 곧 악령 사단의 마지막 대규모의 속임수가 이와 같은 "착한 자" 즉 그럴 수 없는 선인(善人), 성인(聖人), 도덕군자로 가장하여 나타나게 될 것을 보아서도 이는 확인된다. 곧 적(敵) 그리스도의 출현을 말함인데 겉모양으로는 그 누구도 그를 악인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 말하는 피상적인 선이다. 그러나 하나닠은 그 중심을 보시므로 자아중심을 악이라 하는 것이다.)
정의(正義)와 선(善)으로 위장(僞裝)해 있기 때문에 인류를 멸망에 빠뜨리기 위한 흉계임을 간파해낼 재주가 없다는 뜻이다. 오직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만 다르다. 바로 이것이 결정적인 '악인으로서의 증거'이다. 그러면 다시 묻거니와, 성경에서 말하는 의와 선, 세상에서 말하는 선과 의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자는 실질(實質)이고 후자는 그 흉내 또는 피상적인 외견상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면 그 실질의 특징은 어디에 있는가. 이 대답 역시 이미 설명한 바를 따라 간단히 답할 수 있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이므로 머리는 하나뿐이지 여분으로 달리 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로서 충분하고[왜냐면 하나님께서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므로] 그 외의 것이 또 있다고 할 때는 그것은 속임수임을 그 스스로 폭로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하나님 친히 머리로서 자신을 알리셨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것은 일체가 모두 가짜임이 드러난다.
앞뒤 재어볼 필요도 없이 그렇게 단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아무리 천하 없는 의인, 선인, 성인으로 나타나더라도 우리가 그 속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악인이라 단정하여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확고부동한 기준[尺度]인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렇게 속임수가 날뛰고 거짓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는 명확한 기준을 먼저 정해놓고 순서를 따라 단계를 밟아 생각해 나가면 아무 것도 혼동될 것이 없다.
①첫째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부터 따져 ②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어느 것이 전통적인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느냐[그 내용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적인 증명과 더불어] 하는, 최소한 이 두 가지만 켕기는 것 없이 완전히 정리해 놓으면 모든 것은 이 말씀 따라 판단하면 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즉 아무리 첨단 과학이니 무엇이니 별의별 자랑을 다 해도 기록된 말씀[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면 무조건 사단으로부터 난 가짜라 판정 내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배후에 "속이는 자" 곧 사단이 있어 인간이 미치지 못하는 고도의 지식으로 인생들을 속이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 있는 다음에야 이 방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고 "그렇게 하면 어린 아이와 같이 유치하다는 소리만 듣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 고답적으로 나가겠다는 허영심에 "과학적 사실"로 따지고 들어가려 하거나 증명하려 들면 반드시 사단의 올무와 덫에 걸려 들게 마련이다.
그래서도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즉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고로 이 ①과 ②의 토대를 힘들여 정성껏 닦아놓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처음부터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②를 공고히 하는 방법으로서, 그 기록 자체만으로도 그 진실성이 입증되느냐의 여부, 그리고 어느 정도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점만 확실히 해서 못박아 두면 그 이상 가는 방법은 없다. 더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성경은 이런 모든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체 증명 외의 다른 요소를 가미(加味)시키면 백해무익만 된다. 가령 어떤 첨단 지식에 의존하여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려 할 때는, 악령(惡靈) 사단의 고등(高等) 지식은 그 어느 인간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므로 그는 얼마든지 이런 것을 무너뜨릴 충분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양식과 상식에 터전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의 증거만 유지부동하게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만세(萬世) 반석(磐石)이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어린 아이 같은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어른‘은 아는 척하고 잘난 척하는 성질이 있어 의외로 곧잘 넘어가는 내부적 결함이 있다. 쉽게 넘어갈 확률이 언제나 높다. 반면 어린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연약함 그 자체로 보이나 실제로는 그 어느 것도 손 못대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 된다. 왜냐면 사랑은 신뢰를 낳아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의심할 줄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 경우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약‘이 된다.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했는데, 영혼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연약하기 짝이 없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육체가 신령한 몸이 됨으로써 비로소 완전무결한 육체 즉 하나님 지으신 원래의 인간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영원성의 속성인 영혼과 더불어 우리의 육체도 영원성을 띠게 됨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회복이 되었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낙원에 두실 때는 거기서[이 지상(地上)에서가 아닌] 아담은 그 후대들을 낳게 되어 있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인류가 영물들처럼 선과 악으로 분류되어 마지막 심판 때 아담 자신이 인간과 악령들을 심판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왜냐면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음이다. 아담만 아니라 아담에게서 나는 모든 인간이 바로 그런 위치에 있음에는 동일하나, 아담이 그 대표로서 가장 먼저 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에덴낙원이 이름이 "동산"[a garden]이지 자연계가 아닌 영계인 만큼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기준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의 그냥 자그마한 동산처럼 여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령한 몸은 신축(伸縮) 작용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은 성경 기록을 통해 천사들의 활동하는 모습을 보아도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악령[타락한 천사들]들이 인간의 신체처럼 자신을 변환시켜 인간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 자식들을 생산할 수 있었음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계만 아니라 이 자연계에 속한 우주 전체를 통해서도 그 거처를 삼으려면 할 수 있으니 아담에게서 난 인류의 숫자가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그 선악간에 행하는 일들을 보아 영물[천사]들처럼 악인과 의인으로 분류될 것이었는데 첫 사람 아담 자신부터 범죄함으로서 죽은 자가 되어 버리니 하나님의 애초 계획은 좌절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 친히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았을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하시게 되었음이다.
따라서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신령한 몸 그대로 에덴낙원에 있으면서 자식들을 생산하였을 것이요 그렇게 생산된 모든 인간들은 역시 신령한 몸을 지냈을 것이므로 바로 그런 신령한 몸으로 모든 인생들이 마지막 심판대에서 선악간에 판결을 받고 혹자는 "생명의 부활로, 혹자는 심판의 부활"[요 5:29]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유를 회복하신다"[행 3:21]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지금 신령한 육체로 계심과 같이 나의 몸 역시 그와 같은 신령한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완전 자유의 몸으로의 변환(變換)이다. 그 때 비로소 본격적인 인간다운 삶의 낙을 누리게 된다. 삶의 때는 그 때부터가 겨우 시작이다. 지금은 절대로 아니다. 속지 말고 성경의 경고를 귀 담아 들을 일이다. 물론 육체가 아닌 내면적인 정싱적이고 영적인 삶의 평안과 기쁨은 진실이니, 이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길도 없는 특이한 것으로 지금 현재 우리가 모든 고난 가운데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요 14:27/15:11/16:33].
이 영혼의 문제 그리고 천국이나 불 못 등의 사실은 이미 설명한 삼위일체의 원리에 의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니 즉 양면성의 원리, 짝의 원리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은 대칭[대립]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음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영계가 있고 우리의 육체가 있으니 영혼이 있고 악인이 있으니 의인이 있는 것이요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고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원리가 인간 생애의 법칙[3운 법칙, trini homo]으로 증명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이 존재하면 어째서 이 세상에 이토록 악이 창궐 팽창하여 악인이 오히려 형통하고 양심대로 사는 이들은 오히려 반비례하여 고생살이로 일관하는가?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관장하신다는 증거인 것이다.
앞에서 ‘자유’ 이야기를 하면서 선을 행해도 기뻐서 자진 자발적으로 해야 그것이 완전한 자유인이고, 악을 행하는 것도 강제[형벌]가 없이 온전히 각자의 자유에 방임된 상태에서 악을 행하도록 되어야 그 본색이 드러난다 한 것처럼, 바로 그와 같이 '시험하는 무대'로서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지금까지의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원히 갈 것 같은 모양새로 지속되어 내려오는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기에 합당한 사람은 다 구원이 되도록 함에 있을 뿐 아니라, 이와 같이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여 갈라내는 작업을 동시에 겸하는 까닭임을 앞서 지적했다.
그러므로 곧 종결하게 되어 있고 그 시기는 지금 박두하고 있음을 성경은 여러 가지 증거로 밝혀두고 있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악인은 악을 행할수록 형통하게 되는 것으로써 함정을 만들고, 의인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할수록 역경이 닥치게 함으로써 진실로 선이나 의 자체가 좋아 즐겨서 하는지의 여부가 여실히 만천하에 드러나 입증되는 효과를 거두게 하는 것이므로 이는 필요불가결하다 한 것이다.
이런 것은 인간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또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좋다고 해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니, 하나님을 믿고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한다고 해서 당장 형통하게 된다면 누가 과연 선과 의를 행하지 않으며 믿지 않겠는가. 앞에서 누차 설명한 하나님의 강제, 간섭에 해당되는 까닭이다. 또 악을 짓는 즉시 천벌이라도 내려 당장 저주를 받는 식이 되면 누가 감히 악을 행하려 하겠는가. 그렇게 되어도 역시 간섭과 강제가 된다.
그리 되면 인간에게 완전 자유를 부여하시는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창조의 근본 의도와는 동떨어져 상충(相沖)이 되니 하나님은 그런 모순되고 자가당착이 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 앞에서 말한 대로 거짓말을 하시는 일이 없고, 뜻을 이랬다 저랬다 바꾸는 일이 없으시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피조물이 과연 하나님과 그 말씀을 신뢰할 것인가. 당장이라도 사람이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하시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의인과 악인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악인이 흥하면 의인은 망하는 모습을 부득불 취해야 함이다. 그래서 이 세상 삶이 그 뚜껑을 열기가 무섭게 죄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죽이는 살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아벨[또는 의인]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고 그리고 또한 의인들[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름을 나타냄이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두번째 세상에 나타나시게 될 그 때에야 비로소 의인들은 정상대로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된다.
첫번째 나타나실 때는 약하고 고난 받는 '종[만유(萬有)의 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시고 섬기시는-눅 22:27]'의 형태로 오셔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 양면성에서 나머지 '주인'으로서의 모습을 또한 세상에 증명해 보이셔야 하는 까닭이다. 물론 망하게 되어 있는 세상으로서 곧 사라질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일이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심이 되어 시계 바늘처럼 정확하기에 그대로 시행됨이다. 재림의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중의 하나로서 그렇다는 얘기다.
인생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 7:11]이시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그러하나 악인이라고 모두 처치하실 수 없음은 최초의 살인자로서 저주 받은[창 4:11] 가인의 소청을 오히려 들어 주신[:15]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죄인과 악인들이 악을 버리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시는 때가 바로 지금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노하신다고 해서 죄인[악인]이 반드시 저주 받는 것은 아니니 그렇게 되면 강제와 간섭이 된다.
따라서 세상 구원을 목적하여 그 죄와 악대로 일시 방치하실 때는 상대적으로 의인은 아벨처럼 억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한창 잘 나가던[부귀와 안락을 누리며] 악인이 그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는 순간부터 그는 거꾸로 이 세상에서 고난의 사람이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도 이로써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 받아 이 세상에서 믿음의 의인들이 잘 살고 형통한다고 가르친다. 이다지도 성경에 대해 무지하니 구원의 도리인들 제대로 전달할 리가 없다.
우리가 세상에 알려야 하는 사실은 '구원'과 동시에 '심판'이다[요 16:8/행 24:25].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심과 동시에 심판하시는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다[행 17:30].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는 구원도 심판도 없었다[행 17:30,31].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로부터 구원도 가능해지고 동시에 심판도 필연적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죄인이요 "죽은 자"[마 8:22]로서의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니[마 3:7'요 3:36/롬 1:18/2:5/13:4/골 3:6/엡 2:3/5:6/계 6:16] 즉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인 것이다[롬 5:9/살전 1:10].
빌립보 간수(看守,jailer)가 "내가 어떻게 하여 구원을 얻겠느냐?"[행 16:30] 하고 다급하게 물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본성적으로 직감하여 그 앞에서 "무서워 떨었기"[:29] 때문이다. 같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도 다른 이들은 전연 그렇지 않았다. 그러했다면 그 간수처럼 그들도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나와 떨며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구원을 얻음과 얻지 못함이 이런 차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무서워 떨며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절대 복종해야 하는 우리의 주인, 소유주로서] 믿으면 구원된다"라는 전도가 가능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전도함은 바로 그런 "두려움"[행 24:25]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까지만 느끼고 차일피일 하는 자에게도 구원은 없다. 로마 총독 벨릭스와 같은 경우다[:26].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요일 4:8]은 우리의 구원자이시지만, "소멸하는 불"[히 12:29]로서의 하나님은 진노밖에 없는 재판장이시기 때문이니 이 양면성을 동시에 한 쪽으로 쏠림 없이 정확하게 전달할 일이다.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금력이든 권력이든 기타 그 어떤 힘이든 간에 부자가 되든 대통령이 되든 또는 그 무엇이 되든 간에, 그가 그만한 능력을 갖추었기에 적재적소로 인간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정해진 대로' 되는 것뿐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호도를 까기 위해서는 해변의 그 많은 자갈 중 어느 하나만 집어 들어야 하는 것이니, 이런 것을 사람들은 "팔자(八字) 소관"이라 하는데, 요행히 적재적소가 되면 주위 사람들이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이 된다.
그러므로 부자라고 해서 특별히 악인이라는 말도 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이 부자가 되게 하신 뜻을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천국 가는 것이 거의 그렇게 불가능하다 하신 것이다. 또한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세상 삶을 장미 빛으로만 보는 선입견 때문에 죽음으로서의 이 세상 실상을 보지 못함으로 인하여 구원 받는 방법을 탐색하려 하지 않는 데에 더 큰 화근이 있다. 부자나 이 세상에서 제법 그럴 듯하게 사는 이들일수록 이런 함정에 빠지는 율이 크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반드시 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부자가 대표적으로 거론되었을 따름이다. 돈이든 권력이든 기타 예술적 재능이든 그 무엇이든 거기에 낙을 붙이고 그 재미에 세상 가는 줄 모르고 이 세상의 죽음과 죄의 실상에 대해서는 도외시할 때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이니 곧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려 함과 같이 된다. 재력이든 권력이든 재능이든 개인이 지니고 있는 모든 역량은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에서 지체(肢體)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런 "낙타"가 된 그 부자 청년에게 "네 가진 모든 것을 다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 하셨지만 "사람은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 하셨으니, 이는 이러한 실상을 깨닫고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의 소유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 전환으로 모두의 것임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할 때 영생에 이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딤전 6:19].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식 전환에 달린 일이니, 간단히 생각하면 간단하기 그지없고 어렵게 보면 죽어도 못고칠 불치병이 된다.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 하신 것은 그런 부자 같은 사람들을 믿도록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간섭이고 강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일은 아니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해결 방안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가리킴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그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면 이 세상에서의 부와 권세와 기타 무엇이든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태세를 갖출 수 있음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이나, 이 경우 주님의 말씀은,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까?"[눅 18:26] 하는 제자들의 놀라움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영생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요한 3:16].
17-24. 이하의 질문들은 시사성(時事性)과 관련된 것이나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궁금히 여길 수도 있어 여기에 그 대체적인 성경적 답변을 하면 이렇다.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 이탈리아는 어째서 세상의 모범국가가 되지 못하고 사회 혼란과 범죄가 그리도 많은가 한 것은[질문·17]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질문·20] 함과 같은 내용이다.
이 질문[20]에서는 천주교가 아닌 개신교를 지칭한 것인데 교회도 많고 신자도 많으면서 사회 꼴은 왜 이 모양이냐 하는 힐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런 것을 보아도 하나님은 실존하지 않는, 인간의 상상이 지어낸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중요 이유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역시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오해의 결과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신라와 고려가 불교가 성행했지만 결국 나라는 망하고 그 사회 역시 맑은 사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위 기독교를 위시해서 모든 종교는 올바르게 사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 말은 그렇게 하나 실제는 관심 밖이다. 왜냐면 사단에게 절해야 이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눅 4:7]. 고로 이 세상 살자면 올바르게 양심 따라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하고 사람답게 살려면 이 세상 사는 것을 단념해야 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이 내세에서의 형통이든 현세에서의 형통이든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다.
불교나 기독교나 사람 삶의 최고 덕목으로 자비, 인애, 사랑을 표방하나 양심을 따라 제대로 실천할 수 없는 것으로 아예 따돌려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은 이 세상이 사는 곳이 아님을 깨우치기 때문에, 사는 것을 포기함으로 욕심이 있을 리 없고 오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일편단심 목적이므로 이야기가 다를 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말하기를 천주교도 불교도 개신교도 믿지 말고 그 어느 종교도 의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하는 것이 진리를 따름이요 그것이 옳고 따라서 영생에 이른다고 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앞에서도 강조한 대로 ‘올바르게 사람답게 사는 데’에 있다. 그 방법은 자기 부인에 있고 이 자기 부인은 앞에서 설명한 공동체 의식[머리를 중심한]이 핵심이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천주교나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함이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위해 죽으셨다는[고전 15:3] 그런 특정 사실 하나만 달랑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랑을 알아 나도 그리스도를 사랑함이다[갈 2:20].
그리하여 '나와 함께 하나를 구성'하고 계시는 ‘또 하나의 나’라는 존재, 나의 영원한 개인적 동반자(同伴者)로서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그래서 ‘둘로 하나 되어’ 있는 삶을 사는 생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말하는 것이기에, ‘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천주교 신부들이나 불교 승려들이나 개신교 목사들이 모두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무소유’를 실천하고 청빈한 삶을 즐기고 인격자가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들처럼 모든 세상 인간이 아니 그 중 단 얼마라도 된다 해도 이 세상은 한결 살기가 나아지고 혼탁을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욕심에서 아귀다툼이 벌어지는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비단 그런 독실한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세속적인 역사에서도 드물기는 하지만 그 모범적인 공동체 의식의 모범 사례에 접하기도 하여 우리는 그들을 본으로 삼고 배우게 된다.
왜냐면 자기를 중심하여 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니 우선 외양(外樣)으로도 그런 바람직한 삶의 본을 그들은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니, 즉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그런 공동체 의식에서 오는[양심의 소리가 바로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것] 삶의 자세이기는 하나, 그것이 사람을 영생하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즉 구원하지는 못함이다. 모세 율법이 유대인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면 양심은 그런 율법이 없는 유대 민족 외의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롬 2:14]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율법[계명]대로 살 수 있고 양심 따라 생활할 수 있음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아니고는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 의식이 우리 속에서 형성될 수 없다는 여기에 핵심이 있기에 성경은 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 의식에서의 정상적인 삶은 산 자가 영위하는 것이지 죽은 자에게는 그나마 해당되지도 않는다. 산 자가 되는 것부터 우선 순위다. 이 산 자가 되는 것은 일단 우리의 죄과로 인해 죽은 다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필수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첫째 이유가 된다. 둘째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철저히 자기 중심으로 살도록 하심이다.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완벽한 토대로서는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났다는 것은 이제 영원히 그리스도와 나는 한 영으로 하나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를 나를 위해 사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새[믿기 전과는 반대로 나가는] 삶의 구축이다.
죽음의 현실
아담의 범죄 이후 '죽은 자'가 되어 있는[롬 5:12] 인생이므로 이미 한번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이상 필연코 죽는 것이지 영생할 길은 아주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그 노력은 가상(嘉尙)스러우나 그것이 그들의 구원으로 인도하지는 않는 것이다. 영생하지 못하는데 그런 공동체 의식에서의 선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세상에서의 현실적인 삶은 한결 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 확실하고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 삶이 아닌가.
인생 중 가령 99%가 갓나서 죽지 않고 10, 20대에 죽지 않으니 나도 그 99% 중에 끼이려니 하고 그렇게 모두 태평스러우나, 실인즉 나 역시 얼마든지 그 나머지 1%에 끼일 수 있음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너무나 요행수의 마음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확실한 근거가 없이 "나만은 그렇지 않겠지,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불확실성에다 자기 미래를 위태위태하게 얹어 두고 살얼음 판을 내디디면서도 사뭇 태평이다.
이는 처음부터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원히 사는 존재로 즉 죽지 않는 생명체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태성(胎性)이랄까 본성(本性)이랄까 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런 착각 속에 사는 것이라 했지만, 그러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존재이므로 이런 막연한 요행심리가 아니라 확실한 근거를 두고 하루의 시간이라도 보내야 마땅하다. 이런 자살 행위를 하면서도 대체적으로 이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창조에 의해 다시 출생함을 통해서만 그리하여 새 생명 가운데 사는 새 사람이 되어야만 공동체 의식의 삶이 비로소 유효하고 의미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체제와 구조 속에서의 한 몸됨이라야 제대로 된 공동체 의식이 가능한 것이다. 공동체 의식의 핵심인 자기 부인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수 있게 된다.
이 지구는 지금까지 보아오듯이 폐기 상태다. 낭떠러지로 비탈길을 내리닫는 것처럼 급전직하의 인간 문명이다. 문명한 삶이 인간을 구원하기를 모두 바라지만 오히려 멸망을 재촉하는 현상임은 지구의 환경 파괴로도 입증된다. 그리고 과학의 발달로 인한 세상 인심의 각박함 그리고 그런 기술로써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 내일이라도 지구 전체가 초토화하는 재앙이 닥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하는 모순 속에 있다.
그러하나, 즉 실질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래서 형태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도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이라는 개념만은 분명하고 이것이 인간 삶의 근본이요 기본임은 변할 수 없으니,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 사람에게서 우리는 그런 의식으로 산 삶의 아름다움은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고 그 가치를 눈 여겨 볼 수 있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되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할 필요도 없다.
이순신 정신
그리스도의 구원이 바로 이런 공동 의식, 한 몸 의식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그리스도의 구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애초 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원의도가 바로 이 한 몸 체제 안에서의 생명과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상 이런 공동체 의식으로 일관했던 삶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다. 공자가 흠모해 마지않았던 주공(周公) 단(旦)이 그러하고 임진왜란 당시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그러하다.
그들은 공동체 의식의 화신(化身)이라 할 수 있고 그리하여 불멸의 교훈을 남겼다. 특별히 우리의 이공(李公)은 온 세계에 내어놓아 365일 논제(論題)로 삼아도 좋을 인류사적 교훈의 ‘꽃’이 되어 있다. 이공을 단지 일개 무장(武將) 그래서 구국영웅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은 비뚠 역사 인식이다. 그는 천재도 아니고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단지 그가 우리의 사표가 되는 것은 그의 확고하고도 건실한 그래서 평생 변할 줄 몰랐던 그의 공동체적 생활 이념인 것이다.
그의 평소 시종일관했던 공동체 의식이 없었더라면 의기소침한 패잔병력 겨우 12척을 끌고 나가 그 10배나 되는데다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다는 자부심에서 사기충천한 왜적과 맞설 엄두부터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무인(武人)이기에 앞서 공동체 의식을 삶의 기둥으로 삼은 한 건실한 양식(良識)의 대표적 실례였던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정계 등 다른 방면에 나갔다면 주공 단이 되었을 것이고 공자와 같은 사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인(世人)이 주(周) 성왕(成王)의 삼촌을 "주공"이라 상찬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이공"이라는 애칭(愛稱)과 존칭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피압박 민족의 서러움으로 36년간 암흑기를 보내던 당시 우리의 지사(志士)들은 좌중에서나 담론 중에 이공의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 시키지도 않았건만 자세를 바로잡고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 여몄다고 한다. 이런 생활 신념에 감명을 받은 모 현직 헌법재판소의 한 법관은 "이순신 정신" 고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데 훌륭한 발상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런 정신의 백분의 일이라도 마음에 둔다면 이다지도 혼탁하고 지리멸렬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이 이럼에도 지금까지 "이순신정신 선양운동"을 벌이는 단체도 하나 없다는 것은 나라의 부끄러움이요 국민적 수치라 할 수 있다. 왜냐면 그런 정신의 결과물은 모두가 기리지만 정작 그런 삶 자체는 누구나 또한 꺼리기 때문이다. 공자가 각국을 돌면서 여러 제후들을 깨우치려 한 것은 주공 단을 대표적인 사례로 삼는 건실한 공직자(公職者) 상(像)을 각인시키려 함이었다.
주공만큼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왜냐면 주공이라는 본보기가 이미 역사상 그 실례로서 부동의 위치로 인류 사회에 교훈이 되어 있기 때문이요, 그런 공동체 의식이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제 개인적인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 본을 따를 수 있다는 점을 역사는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까닭에 공자가 그렇게 나섰던 것이다. 우리가 이공 순신을 항상 말하고 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주공이나 이공이나 극히 제한적인 몇몇 개인의 소신으로 그칠 따름이요 일반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일반화시키려는 공자의 노력은 결국 공자 개인의 이상으로만 그치고 그래서 실망 중에 낙향해 돌아와 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자기 부인이 가능하고 그런 이상 세계 구현이 바로 천국인지라 이런 공익정신 함양운동에 적극적인 것이다.
공자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으니 우리는 알고 있는 까닭이다. 공직자의 정의(定義)는 이렇다. 임금은 머리요 백성은 몸이니,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한다. 공직은 이러한 머리가 되어 있는 국가 수반의 업무 대행이다. 따라서 사심(私心)에 머물러서는 안되니, 그렇지 못하겠거든 공직에서 아예 물러날 일이다. 나라의 녹(祿, 녹봉, 급료)을 먹는 이상 국민을 위하는 머리로서의 업무 대행자이므로, 대통령이 선출직인 이상 아무리 하급 관리라도 사욕을 부리면 그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것이다. 고로 조금이라도 부정을 저지르면 엄단, 퇴출시키는 것이 사리에 옳다. 이런 것은 결코 지나친 처사일 수 없다. 국민과의 약속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일이요 따라서 국가 존폐와 직결된 것으로 바로 인식하고 자각해야 함이다.
우리 구원 얻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이다. 이 세상이 자기중심 일색이기 때문에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공'과 '사'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만, 원래는 '한 몸'으로서의 삶의 체제에서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라 '공'이 곧 '사'이다. '공' 일색이지만 그 안에 '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그런 의미다. '공'으로 일관되게 나감으로써 '사'는 자연적으로 해결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천국에서의 삶 다시 말해 하나님 창조하신 대로의 원래의 인간 삶은 모두가 이 세상 표준으로 하면 '공직(公職) 생활'로서 일관함이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대로 '공익'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고후 5:15] '사익'을 염두에 두고 이를 따르면 즉각 퇴출당하는 엄정한 체제다. 왜냐면 하나라도 그런 것이 있고는 그것이 암세포화하여 주변으로 전이, 확장되어 전체를 망치기 때문에 즉각 제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만 아니라 반드시 이웃을 해친다는 그 속성은 사단이 아담 내외를 죽음에 몰아넣고 사람이 생기자마자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에서 이미 입증되어 있는 터이다. 공직자 즉 공무원이나 학교의 교직(敎職)에 있는 자가 부패하면 그 나라는 필연적으로 패멸한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다. 내부로부터 부패하여 붕괴하기 시작하는 그 어떤 조직체든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외부 압력이 가해지면 지체없이 허물어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이순신 정신"을 거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사람의 굴함이 없는 공동체 의식이, 한 나라는 물론 인근 국가까지 전화(戰禍)로부터 방비해 주는 위업(偉業)을 성취하는 본보기를 보인 것이다. 이공의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의 승리가 없었다면 한반도를 보급기지화하여 기세등등한 풍신수길은 단번에 중국의 산동반도로 향하는 해로(海路)와, 요동 땅을 통하는 육로를 통해 중국을 여지없이 유린하여 전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공익정신
공익정신은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24,33] 함과 같고,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라"[롬 15:2/히 10:24] 함과 같다. 이것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무엇이든지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는"[롬 14:21] 것이 이런 자기 부인의 차원인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은 "강한 자로서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함"이니[15:2]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3]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함과 같다. "'주님을 비방(誹謗)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습니다' 함과 같다"[롬 15:3]고 말한 그대로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중심의 "육신"[롬 7:14-8:13]에 포로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의 몸이 멸해진"[롬 6:6] 것이니 즉 이 "육신"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육신" 상태를 설명하여 바울이 제일인칭인 "나"로써 표현한 것을 두고 바울 자신의 체험이라고 우기는 것은 철부지와 같은 미숙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쉽게 또는 극적으로 표현하여 얼마든지 그런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구절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my own profit"]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33] 한 것도 같은 차원이니 바울 자신의 유익을 말함이 아니지 않은가. 이와 같이 우리는 항상 성경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자신을 연마(練磨)하는 것으로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시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한다"[:4-6] 함과 같다.
우리 모두의 머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서, 비느하스[시 106:30]를 기억하게 된다. 우상(偶像, 목재, 돌, 금속 따위로 사람이나 동물의 형체를 조각해서 만든 것)에게 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실 때[:29] 비느하스가 일어나 그 범죄자들 중 우두머리를 대표적으로 즉결처분시킨 것이다[민 25:4]. 이를 두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다" 하시고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언약하셨다"고 했다[민 25:12,13]. "이 일이 그에게 의(義, 올바름)로 정해졌다"[시 106:31] 한 것이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과 전쟁하여 가나안 땅을 쳐서 차지하고 그 후 계속하여 전쟁을 벌인 것은 이방인들의 더 다시는 묵과하실 수 없는 죄악에 대하여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차원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도 그러한가 하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시대이다. 오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법질서 곧 삶의 영원한 법칙을 세상에 알리신 것이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니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할 것이라"[요 12:47] 하심과 같다. 삶의 원리원칙을 알려 주셨으니 이제는 모든 사람이 과연 이 법칙대로 사느냐 여부만 살피시고 최종 판결은 마지막 심판 때에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거하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하였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11] 한 것이다. 예루살렘 여행 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음을 보고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십니까" 했을 때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人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하러 왔다"[눅 9:53,55, 난하주(欄下註)]는 말씀으로 꾸짖으신 것과 같다.
즉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하나님의 뜻과 오신 후의 뜻에 경륜(經綸)의 차이가 있다. 왜냐면 오시기 전에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죄의 해악(害惡)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심이니 이는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오신 후에는 그리스도 친히 그 진노의 저주를 우리 위해 당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담당하시어 죄의 대가를 우리와 함께 하신 죽음으로[엡 2:5,6] 모두 치른 연후의 단계로서 이제는 구원의 말씀 전파만이 오직 목적인 것이다.
이에 대한 불복종의 대가 곧 처벌은 이 복음 전파의 순서 다음에 오기로 되어 있다. 순서를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이제는 오직 우리 각자가 회개함으로써 스스로 죄를 짓지 않도록 되어 있는 순서요 단계이다. 그래서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면서[골 1:24] 사람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하고 있음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함과 같다. 우리 위해 고난 받으신 바 "그 피에 참예하고 그 몸에 참예함"은 그렇게 하시어 이루신 그 결과 곧 산 자로서의 생명에 참예함만 아니라 그렇게 참예함의 결과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을 이룸에 있는 것인즉 직접 그 죽음의 고난에 참예함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모든 사항은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그리스도의 의미를 미리 가르치고 그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단계로서의 뜻이 있고, 그리스도 오신 다음에는 실질적으로 모든 진리가 나타나고 진상이 밝혀져 누구나 회개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니 산 자로서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지침을 그와 같이 밝혀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될 사람은 다 구원 얻고 난 다음에는 악인과 의인이 명확히 가름되어졌으므로 그 최종 단계는 각자 스스로 선택한 대로 영원한 '생명'과 '죽음'으로 정착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 경우 '죽음'은 구약시대에 나타났던 그대로의 하나님의 진노뿐이다[눅 3:7]. 때문에 세상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찬양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은 원래부터의 하나님 정하신 바 사람 삶의 원형이요 근본이고 기본이다.
가장 이상적이라 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니 곧 성경이 강조하는 자기 부인이다. '한 몸' 이치에서 이 멸사봉공은 실제는 멸사(滅私)가 아닌 공생(共生)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기 확대, 확충, 확장의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되는 것이다. 독재자들이 한 때 이런 구호를 자기 합리화와 핑계의 구실로 거짓되게 외치는 바람에 거부반응이 심하나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주공 단과 이공 순신
주공 단이 나타낸 두드러진 모범 사례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다. 첫째는 주공 스스로가 제왕 자질이 충분하지만 평생토록 조카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의 질서를 끝까지 유지하기에 힘썼다는 바로 그 점이 만인의 사표가 된다는 것이다. 수양대군이 조카를 내치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과 같은 그런 비인간적 비양심적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니, 이공 순신이 이성계처럼 자신의 전공(戰功)을 앞세워 야망을 이루고자 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리고 둘째는 그 열심이니 곧 공동체 의식에서 핵심이 되는 주인 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한 점에서다. 누가 찾아 오면 식사를 하다가 입에 있는 것을 다 뱉어서라도 즉시 영접하기를 지체하지 않고 맞아들여 국사(國事)에 대한 성과 열의를 다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좋은 정신을 지녔다 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열성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데 주공은 이를 겸비, 겸전(兼全)하였고 공자는 그래서 그를 흠모한 것이다.
그렇다고 방금 지적했듯이 그런 맑은 삶이 영원한 행복과 영생을 보장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이 구원 얻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임을 지금까지 설명했다. 대표적인 의인이 이공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그런 인물들은 언제나 소수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적은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공을 말하는 것은 그와 같은 그의 공동체 의식에 의한 결실로서의 행적이 역사상 너무나 뚜렷한 족적을 남겼기에 대표적으로 항상 거론하는 것이다.
의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가 그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 예로 드는 것이다. 그가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고 공동체 의식이 철저했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지, 성경이 선언한 대로 "의인은 하나도 없는"[롬 3:10] 것이다. 베드로가 로마 군대의 백부장[百夫長, centurion] 고넬료를 가리켜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행 10:35] 했을 때의 바로 그런 "의를 행하는" 차원에서의 의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말하건 성경에서 말하건, 하나님 정하신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법이 '한 몸' 의식,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이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비록 성경은 몰랐지만 그런 불변의 삶의 이치대로 살았던 삶이 아름답고 그래서 우리에게 본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의인됨을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요 의인이 없다는 성경의 선언은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함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는 사실까지 포함시키는 말이 아니니,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음"[롬 3:20]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으므로"[롬 8:2] 이제는 더 다시 죄를 짓지 않으므로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사는"[고후 5:15] 까닭에 죄를 지을 수가 없게 되어 있는지라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한다"[롬 3:28] 함과 같다.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자'[왜 '산 자'가 되느냐 하면 "다시 났기" 때문이다-요 3:3]가 되어 있지 않고, '죽은 자'로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차원에서 율법을 행함 즉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은 죽은 자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산 자가 되어 산 자가 지키는 것이니, 그렇게 지킴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유지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그렇게 자기 생명을 유지 보전할 아무 생명도 없으니 왜냐면 이미 죽은 자로서 산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생명을 유지 보전하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음이다. 그 먹고 마시는 행위가 다름아니라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신 대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룸"[요 4:34]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내가 먹을 양식이라"[:34] 하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20:21]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을 지키고 그의 "새 계명을 지킴"[요 13:34]이다[고전 7:19/롬 13:9/요일 2:3,4/3:22-24/5:2,3/계 12:17/요 14:15,21,23/15:10,12/13:34].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라"[요 15:10] 하심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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