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삶의 구조---------------------------------------------------------------------------------------------------------------------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어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들 속에 보임이다. 하나님께서 이를 저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창세(創世)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으므로 저들이 핑계치 못한다"[롬 1:18-20]고 이미 못박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은 실체요 보이는 것은 형체로서, 형태를 갖춘 모든 피조물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 격이므로, 이 ‘형체’와 ‘실체’라는 양면성에서 형체는 보면서도 실체는 부정한다는 것은 모든 합리성과 타당성과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인즉 변명과 핑계가 일절 통하지 않는다[롬 1:20]. 피조물이 이와 같이 개개의 형체로서 각자 자기 고유의 공간만을 점유하는 육체를 따른 존재로 있음이 당연하니, 하나님과 같은 무소부재의 영이라면, 어떻게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 의인은 천국에 들어가고 악인은 형벌의 처소에 유폐(幽閉)되어 서로 분리될 수 있겠는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이것이 피조물이다]가 있으면 반드시 그런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조물주]가 있게 마련임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성경의 선언이다. 다시 말해 사람도 보이는 육체가 있으니 보이지 않는 영으로서의 영혼이 있고 자연계가 있으면 자연계의 오관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영계가 있음을 성경은 설명한다. 이런 양면성, 대립 개념, 대칭성[상칭성]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다고 확언하고 있다[고전 15:44]. 피조물과 조물주도 이런 양면성, 대칭[상칭]성을 이룸이다. 세계 그 어느 종교의 경전도 이런 이치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원리를 말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성경의 조물주를 인정하게 되는 까닭이다. 왜냐면 이런 원리의 근원이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하나 되어 계심에 있기 때문이니 이 사실을 무시하고서는 그런 이치의 뿌리를 밝혀낼 수 없는 연유이다.
모든 것[결과]은 그 근원으로서의 원인이 있게 마련이므로, 원인을 설명하지 않고 결과만을 말하는 것은 진리일 수가 없고 더더군다나 인간 구원일진대 더욱 진리 구실을 못하는 것이다. 영원한 이 원리원칙이 삼위일체의 법칙으로서 확립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양면성과 대립[대칭] 관념을 총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장 기본이 되는 우주의 원리에 대한 증명이 3운 법칙[trnini homo]의 절묘한 구조 자체에서 확연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곧 이어질 4. 만물의 생성과 존립의 원리, 5.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에서 설명될 것이다. 이런 모든 발견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니 왜냐면 성경이 이미 이 원리를 나타내고 있는 세상에서의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성경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칭 원리에 의해서 이 세상[자연계에 속한]과 오는 세상[영계에 속한]은 영원한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후자를 가리켜 내생(來生)이라 하고 후자 쪽에서 말하면 이 세상을 가리켜 전생(前生)이라 하게 됨을 이미 지적했다. 짝으로 되어 있으므로 전생은 되풀이되지 않는다. "전생"이 되풀이된다는 소위 "윤회", "환생" 등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임이 드러난다. 영원한 것은 영원하지 못한 것 즉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것과 짝을 이룬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과 대칭[상칭]을 이루고 있으니 이 세상이 불완전한 것이면 오는 세상[내생]은 완전하고 그리고 영원한 것임이 드러난다. 불완전한 것이 영원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여기서도 확연히 드러나듯이 고로 이 세상은 사람 사는 고장이 아니며 삶의 낙을 누리는 곳은 더더욱 아니다. 마지막 심판 전의 선[인]과 악[인]을 가려 내는 유일한 때요 장소일 뿐이다. 그래서 악인은 악을 행해도 형통하는 맛에 악을 그대로 행하도록, 그리고 의인은 그 어떤 불이익과 고난이 따라도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를 행하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그리고 절대적으로 긴요한 이 세상 이 모양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는 즉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아주 이상적으로 신묘막측하게 조성된 이 세상의 환경이라 할 것이다. 고로 세상사, 인간사가 절대로 뒤죽박죽이 아니며 엉망진창일 수가 없다.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은, 장차 영원히 누리게 될 삶의 낙을 정하고 영원히 당하게 될 고난을 각자 자기의 선택으로 정하는 다시 말해 영원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이 세상이므로, 이 사실을 아무쪼록 온 세상 모든 이들에게 알려 각자 대비하도록 해 주는 데에 있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선물을 우리가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가 구원 받는 유일한 목적을 말씀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證言者]이 될 것이라"[행 1:8] 하신 것이다. 이는 "성령을 받으라" 하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17:18] 하신 바로 그 뜻이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로서 이 이상 가는 것이 없고 이 사람 살리는 일 외에 달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 원하는 대로 이 세상 살고자 하면 살 수는 있다"고 말씀하신다고 가정하더라도, 오히려 그 '살 수 있다'는 권리를 우리 스스로 반납해야 할 판이 될 만큼 현실은 급박한 것이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므로 곧장 악령들에게는 적대 세력이 되는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증오의 표적이 되어 있는 판에 그렇게 편하게 세상 살도록 악령 자신이 실상 허용해 둘 리도 없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된 영광과 명예 등 그 무엇으로 보더라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불법, 불의로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려는 것 자체부터가 있을 수 없는 반역 행위이므로 논할 수조차도 없는 주제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소소한 일에 일개 악령 앞에 무릎 꿇고 이 세상 영광과 권세를 구걸하는 꼴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절하면[눅 4:7] 이미 그는 더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됨이 우리의 구원의 의미인데 그 하나님 아들됨을 이와 같이 반납한 상태에서 어찌 또다시 구원을 논하리요. 이는 팥죽 한 그릇에 넘어가 자기의 장자(長子) 명분(名分)을 팔았던 ‘야곱’의 형 ‘에서’의 망동, 그 한도 없는 어리석음과 같으니 그래서 성경에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상속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히 12:17/창 25:32]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면 나의 생존권, 삶의 낙을 누릴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을 침범한다 하여 이를 방해하는 세력이나 개인을 응징한다는 명분이 설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므로, 그래서 "원수를 갚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원수를 갚지 않고 악을 악으로 응징하지 않으니[원수 갚지 않는 것은 사울을 회개시켜 바울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목적 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세상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고후 13:4] 그대로다. 우리가 약함으로[왜냐면 악의 세상에서 악을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니까] 이 세상에서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은 악한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고후 5:15] 즉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원수 갚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하는 자세로서 그 대표적인 표본이라 할 수 있음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이런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요 12:25].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시키려는 오직 한 가지 목적밖에 없다. 악신(惡神)이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로 있는데 감히 이 세상에 눌러 살 마음을 먹을 수 없을뿐더러 이 세상 사는 데에 신경을 쓰다보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사업 곧 아버지의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내일 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인생살이에서 그 짧은 시간을 세상 삶에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이런 불충(不忠)이 없다. 이런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원하시겠는가. 세상 살고자 한다면 성경을 믿지 않든지 하나님을 믿지 않든지 해야 할 것이다. 세상 삶을 사랑하여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서도 영생 얻기를 바라지는 말 것이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육신의 마음을 세상 종교들처럼 허용하고 용납하는 모든 기독교의 교리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오직 일개 "종교[인위적인 교리를 지어내어 가르치는]"로서 배격하는 것이다.
다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
이상과 같은 선과 의에 대한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하셨고 따라서 이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정성들여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거짓말이 있고 속임수가 있고 만들어 지어내고 꾸며댄 내용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함부로 사람을 무시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당신은 평소에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는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한다고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 왔던가 하고 묻고 싶은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무릇 하나님 믿는 사람은 모름지기 그와 같은 모든 좋은 것, 모든 옳은 것의 화신(化身)이 되어 마땅하다고 역설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런 흉내라도 내지 않을 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재삼재사 역설하고 있다. 거짓이 거짓을 낳는 법이다. 그런 올바른 것을 끊임없이 지향하고 추구하는 그 원뿌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거짓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말씀을 받드는 이들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 끼워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바로 그런 의인, 선인을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 전에는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죽은 자'로서의 죄인, 악인, 온갖 누추함과 더러움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창조, 다시 이루어진 출생에 의해 의인, 성인(聖人, saint)이 된 것이다. 거짓말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진실만을 말하는 성경이, 믿어 구원된 자들을 가리켜 "성인"들이라 한 것이 결코 헛말이 아니고 예삿일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버이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한 가지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올바르고 정상적인 관계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관계를 그리스도의 족보를 대면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하고 그 윗대를 계속 거명해 올라가다가 맨 나중에 아담에 이르러서는 아담으로 끝내지 않고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라"[눅 3:38] 함으로써 명백히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과 하나님은 서로가 별개가 아니라 낳고 낳아진 그런 부모 자식 관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관계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소속이 어디인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부모에게서 난 것이다. 그런즉 부모 자식 관계다. 가장 안온(安穩)하고 아늑한 보금자리가 엄마 품속이었던 것이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런 엄마 품속에서 품었던 동심(童心)의 세계다.
이것이 바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세상 떠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 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요 14:18] 하셨다. 이처럼 정다운 말씀이 또 없다. 다시 말해 이 어버이 심정을 그와 같이 진솔하게 피력하신 것이다. 이것이 다시 강조하거니와, 나와 하나님 관계다.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것이 시편 139편이니, 그 중에 "주님께서 나의 전후(前後)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按手)하셨습니다"[시 139:5]라는 말이 있는데, 영역으로는 "You hem me in(have hedged[enclosed] me[NKJV], are all around me on every side[GNB])-behind and before, you have laid your hand upon me."[NIV]로서, "두르신다"는 것은 품에 안은 것이요 "손을 대신다[안수]"는 것은 쓰다듬는다는 표현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래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합니다"[:6]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가 어디 있든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상태이므로 "내가 주님의 신(神,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님 앞에서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陰府, 저승)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십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실 것입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黑暗·黑闇, 몹시 어두움)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될지라 할지라도 주님께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니 주님께는 흑암과 빛이 일반입니다"[시 139:7-12] 하게 된다.
품속에 있는 아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는 아기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왜냐면 그 생각이 단순할 것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복잡하지만] 나의 속 생각 깊숙한 데까지도 모두 들여다보고 계시는 것이다[:2]. 그리고 나를 생각하심 즉 나를 위하시는 생각들을 가리켜 "하나님, 주님의 생각[나를 대하시는]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 제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습니다"[:17,18] 하였다.
이 시편을 쓴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썼으니, 하나님 친히 그러하다고 나타내어 주시는 그대로 감동하시는 대로 가감없이 기록한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은 많기도 하십니다. 제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습니다"[40:5] 함도 같은 뜻이다. 그리고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139:18] 함은, 엄마 품속에서 잠들고 있다가 눈을 뜨면 엄마의 사랑이 담뿍 담긴 눈과 마주치게 될 것이니 바로 이를 표현함이다.
원래부터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어버이가 되신다. "창조주"라는 의미가 바로 그런 뜻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피조물로서 자식을 낳고 새끼를 낳는 것이 이런 측면에서 준(準) 창조 행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 즉 전에 없던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를 근본 바탕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는 어깃장 놓느라고 하나님의 창조를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과 같은 의미로는 생각할 줄 모르고 단지 무슨 물건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으로만 착각하고 있으니 이 모두 인간 구원을 방해하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책략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인식을 그릇되게 하려는 수작인 것이니 그런 "생각을 집어 넣어"[요 13:2] 주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때에도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는 것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어버이 심정 곧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어버이만이 나타낼 수 있는 답답하신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홍수라는 회초리를 드신 것이지만 그러나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그대로 성경에 드러나 있으니, 즉 비록 그렇게 조처하셨어도 나중에 그리스도 오신 다음에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기회를 얻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으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 3:19,20] 함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구원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아버지"[즉 어버이되심]로서 우리가 그 아들됨에 있으니,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우리를 구원해 내시려면 새로 창조하심 즉 다시 출생하게 하시는 방법 외에는 합당한 것이 없는데, 그렇게 하자면 친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당하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시고 그런 다음 그 성령으로 우리 각자 안에 영혼 격으로 임하여 오심으로 영원히 하나가 되셔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어버이]"가 되시는 것임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그러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어버이가 되신다면 왜 많은 피조물들을 악하다는 이유로 멸망에 처하시는가" 할 것이다. '피조물로서의 어버이의 의미'와 '조물주로서의 어버이 의미'가 같을 수가 없다. 조물주께서는 그 창조하신 모든 것의 근본이시므로 법질서 자체가 되신다. 모든 원리 원칙의 수립 또는 확립의 주체시요 그 집행자이시며 최종 심판자[재판장]이시다.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천사들의 호위(護衛)
이렇게 우리가 약함으로 고난을 받아도 막강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고난을 받음이니,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우리의 이 죽음의 고난 받음과 자기 부인이 하나님의 뜻임과 더불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기는 동력(動力)이 되는 것이다[계 2:7,11,17,26/3:5,12,21/21:7] 우리의 고난 받음이 실상은 바로 이러한 막강함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인자(人子) 그리스도께서 약한 자로 죽으심으로써 이기신 자가 되심과 같은 이치다.
고로 우리의 고난 받음은 세상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기는 천하무적 힘의 과시가 된다. "내 능력이 약한 데에서 온전해진다"[고후 12:9] 하신 또 다른 의미가 되므로, 우리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우리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머물게 하려 함"[:9]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10] 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이런 자랑을 두고 단언할 수 있다고 한 것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가 아닌가. 때문에 "내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갈 6:14]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8-20] 하셨다.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후 부활하신 신령한 몸으로 구름 속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행 1:8] 하신 바로 그 말씀이다. 성령의 임하심은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오심을 가리킴이다. 그래서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 하신 것이다. 우리 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우리와 함께 일하심이다[고후 6:1].
천사의 호위는 "주(主) 하나님의 사자(使者, 천사)가 주님을 경외(敬畏, 공경하고 두려워 함)하는 자를 둘러 진(陣)을 치고 저들을 건진다"[시 34:7] 함에서 확인된다. 그 실례를 엘리사의 경우에서 본다[왕하 6:17]. 누구든지 이와 같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여 공경하는 이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음을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이 인자(人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요 1:51] 하심으로써도 확인해 주셨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그 형이 두려워 외삼촌 집으로 피신해 가다가 해가 저물어 들판에 노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다가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과 같은 표현이시다. 그래서 야곱은 이 때 잠이 깨어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는데 내가 알지 못하였다. 두렵구나,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구나"[창 28:12-17]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특별히 그렇게 천사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니, '사람의 대표로서의 그리스도'이심을 명심할 일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면 누구나 이 천사[들]의 호위를 받는 것이니,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함과 같다. 야곱은 하나님의 성전의 문 앞에 있다고 했으나 우리는 몸 자체가 하나님 계시는 성전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배당된 천사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셨다[마 18:10/히 1:14]. 과연 그리스도께서 시험당하실 때도 천사는 함께 하였고[막 1:13/마 4:11] 십자가 고난의 죽음 받으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도 천사가 나타나 힘을 돕고 있다[눅 22:43]. 우리가 천사의 호위를 받으면 고난도 받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나 천사들의 막강한 힘의 보좌는 그 목적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함에 있으므로, "약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맞는 즉 스데반이 돌팔매질을 당하여 처참히 죽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함께 하는 천사의 위력인 것이다[행 7:56].
천사가 스데반의 눈을 열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서 계신 모습을 뵙도록 한 것이다. 같은 사도라도 베드로는 천사가 나타나 구출했으나 야고보의 경우 그냥 헤롯 왕이 보낸 사람들의 칼날에 맥없이 당한 것인데, 야고보는 천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는 것이 당시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천사는 그렇게 죽는 일을 도운 그런 차이다.
베드로는 또 구출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렇게 천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즉 "거룩한 천사"들이 하늘 위에서 땅 아래를 굽어보며 여차할 때에만 임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악령들이 공중에서 설쳐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지상으로 거침 없이 부단히 오르락내리락 즉 들락거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함께 있어 "진을 치고" 있는 양상 그대로다. 그리스도의 예에서도 보듯이 기도할 때 함께 하고 시험 중에도 함께 한다.
그러나 시험 중에 함께 한다고 해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방해하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 때는 자리를 떠나 있는 것이다[눅 22:43]. 떠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완전 자유 의지 아래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니 따라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즉 천사는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욕심이 없다 보면 남을 위하게 되고 그리 되면 자연스럽게 성인[a saint]이 되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자기 중심의 추악함에 빗대어 생긴 용어다. 당장 주변 사람들은 내일도 없이 오늘이라도 영원한 죽음의 멸망으로 들어가는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이를 보고도 모른 체 하겠는가. 당연히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조건 접어두고 일절 손 털고는 오직 사람 살리고 구원해내어 건지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하는데 바로 그런 것이 거룩함[聖]이지 무엇을 거룩하다 하리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
"원수를 갚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심이 당연함은, 만약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일에 관여한 사울을 원수로 여기고 그 악행을 갚았다고 가정한다면 교회에 크게 이바지할 교회의 큰 일꾼 바울은 영원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서도 입증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마땅히 갚아야 될 사람, 갚아서는 안될 사람을 가려내어 친히 갚으실 것이니 하나님께 전적으로 일임(一任)하라는 말씀이시다.
또 다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된 막강한 자로서 구원을 받았으므로 천하에 적수(敵手)가 없는 신분이요 위치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악령들과 공명정대 공정공평하게 싸우는 마당에서는 우리는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서지 않으면 안되고 이 약함을 끝까지 유지하여 우리의 신념을 어떤 경우에서든 굽히지 않는 것이 바로 승리가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다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온전해진다"[고후 12:9]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약한 것을 자랑[11:30/12:9,10]하는 것이니 "약할 때에 곧 강하기"[12:10]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약한 자로 자처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믿는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거짓말이나 속임수가 필요하기에 그런 지어내고 꾸며내고 만들어낸 말이 성경에 있겠는가. 따라서 늑대들만이 우글거리는 세상 현실에서 양(羊)으로 처신하라는[마 10:16] 가르침에 무슨 매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믿을 줄 알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믿기를 바라겠는가.
그런 약한 말을 하면서 거기에다가 거짓말까지 보탤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그런 약한 말을 하는데 거짓말을 보탠다고 얼씨구나 하고 믿겠는가. 믿게 하려면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거나 보태는 것보다 그런 "약한" 말부터 일절 '빼고' 제외시키는 일부터 가장 먼저 할 일이 아닌가. 머리 짜내어 거짓말을 만들어 내기보다 차라리 그 쪽이 더 쉬운 일이요 믿게 할 수 있는 더 합리적 수단이 아니랴. 이 하나만 두고 따져도 성경은 절대로 거짓말이 개입할 여지가 없음이 확인되고도 남는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냄이 양을 이리 떼 속으로 들여보내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라"는 경고의 의미가 드러난다. 즉 상대적인 차별화이니 상대가 폭력으로 나오면 철저한 비폭력, 강함으로 나오면 철저한 약함이, 자기 깃발의 색깔을 여지없이 발휘할 수 있는 선명성으로 부각되기 때문이다. 전투가 끝나고서도 자기의 깃발이 처처에서 나부끼고 있을 때 그것이 승리다. 이런 것이 이런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의 비결이요 책략인 까닭이다. 필승의 병법(兵法)이요 군사학(軍事學)이다.
일언이폐지하고,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을 억지로 믿게 하시지 않는다. 거짓말이나 속임수는 억지로 믿도록 만드려는 책략이다. 억지로 믿게 하려면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천주교나 이슬람교처럼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다. 시시하게 거짓말 따위를 농할 필요도 없다. 폭력이 상대적으로 오히려 산뜻하고 구김새가 없다. 구질구질하지 않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을 가르치고 강조하는 성경이 이런 구질구질한 속된 방법을 취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즉 성경이 지어낸 말이다 아니다 할 것 없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부터 먼저 따질 일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겠는가 하는 그것이다. 인간보다 약하시기에 거짓말이라도 해야겠다고 판단하시겠는가. 거짓말은 원래 약자의 짓거리다.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기 때문에 쓰는 약은 수단이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아담]에게 거짓말을 하여 속였다는 것은 그가 원래 아담 아래 있었다는 증거다.
막강하신 조물주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약한 인생들에게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것은 완전히 인간 상식과 양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거짓말이냐 아니냐 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존재부터 결론 지으라는 것이다. 결론 짓기가 어렵거든 성경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는 것부터가 무익한 일임을 알 일이다. 왜냐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니 성경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 면으로 따지면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조물주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것을 결론 내리기 어렵거든, 그 때는 성경을 읽어볼 일이다. 왜냐면 하나님께 대한 해설로서의 유일한 권위로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경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그 내용으로써 직접 증명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리요. 이것을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라는 것은 기적을 두고 지적함이 아니다. 거짓말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고 진실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는 그런 모든 내용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적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 차이가 없다.
기적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의미는 마찬가지다. 거짓말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고 진실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여기에 초점을 맞출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젖혀두고라도 성경 자체가 과연 지어낸 것이냐 했을 때 이상 설명이 바로 그렇지 않다는 확답이 된다는 그 뜻이다.
그러면, 성경이 가감없는 진실 그대로의 기록일진대 바로 그 기록 자체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면 어느 모로 보나 결코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자체적으로 증명하는 성경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여러 모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각종 기적을 보라. 그 능력이 엄청나지 않은가.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들이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요 15:24] 하심과 같다.
이렇게 코너에 몰리게 됨으로써 즉 이상 논증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므로, 사람들은 성경에 경고하신 대로 그냥 어린 아이 같이 다소곳이 순종하려 들지는 않고 그 대신 갖가지 핑계와 변명을 둘러대는 것이다. 즉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취사선택하여 일부는 믿고 일부는 안믿고, 어떤 것은 해괴한 해석을 내려 멋대로 풀이하는 등등의 수작을 감행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대목은 전설로 풀이하기까지도 한다.
기괴한 것은 이런 모든 짓은 성경을 믿고 하나님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자행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맞대놓고 "우리는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진실인 줄 알지만, 성경은 액면 그대로 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 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어떤 것은 문자 그대로 알아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는 식으로 선전하는 꼴이 되어 있음이 실상 더 기괴하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대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말씀이면 말씀 그대로의 뜻이지 오락가락 하는 의미로 말씀하실 리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니, 이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 악신(惡神)의 조종을 받아 감행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것이 오늘날 "기독교"로 인식되고 있는 '세상 종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어찌 그들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겠는가.
성경이 이상과 같은 사실을 대낮 같이[성경을 그대로 읽기만 하면] 밝히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읽지를 않고 대체적으로 자기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읽는 것은, 그 배후에 이 세상의 지배신(支配神) 악령의 조종이 있어 인간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유도한다는 증명이 되고 있음을 다시 강조한다. 순수하게 사람으로 말미암은 현상이라면, 이렇게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도 왜곡되게 이해할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활동을 입증하는 성경
대낮처럼 밝혀 놓은 내용[성경]을 억지로 비틀어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니 인간 외적(外的)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다. 그러면 악령이 왜 그렇게 정반대로 해석하게 하느냐 하면 바로 성경이 진실이기 때문이니,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얻게 하는 진리가 성경이라는 사실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 되기도 함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교회가 세상에서 핍박 받고 약한 것으로 일관하게 될 것이라 확언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이 성경인데, 이와는 반대로 최대의 종교세력화하여 도리어 세상 권력으로 군림해 온 이 역사적 사실 한 가지만 해도 이 실상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가 그렇고 일반 개신교가 현재 그렇다. 천주교는 세상 군왕들 위에 군림해 있은 한 때가 있었고 개신교는 그 정도는 아니나 국교로 삼는 나라도 있으니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 군림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으로 오인하고 착각하게 된다. 이와 같이 성경의 실질적인 내용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종교화' 현상은 참으로 희한한 불가사의라 하겠으나, 전혀 그렇지도 않으니 방금 지적한 대로 악령 곧 이 세상 신(神)의 공작(工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까지도 더불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이 또한 성경의 자체 증명에 한 항목 더 보태는 역할이다.
언제나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인생 구원은 사랑에 있으므로 절대적으로 각자의 자유 의지와 선택에 완전 일임된 상태이지, 강제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이다. 세상 종교 중에서 그런 강제성을 띠지 않은 종교란 없으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 중에서는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가 동양적이고 덜 강제성을 띤다 하겠지만 현재도 동남아의 불교 국가들이 존재하는 데에서도 보듯이 국교로 되어 있을 때는 반드시 강제성을 띤다. 간섭 위주다.
개신교도 무력(武力)을 동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교로 삼고 있는 데에서는 마찬가지다. 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도 남의 나라를 침략함으로써 포교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는 않았지만 국교[러시아, 루마니아 등]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는 악령이 이 세상에서 왕(王, 지배자, "임금"-요 14:30)이요 신(神-고후 4:4]이라고 밝히는 성경의 가르침을 전면 무시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자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개신교나 천주교와 다를 바 없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천주교처럼 그리스 정교도 비잔틴 제국의 비호 속에 있다가 제국이 망할 때 러시아로 그대로 옮겨가 왕실의 종교가 되면서 국가 종교가 된 것이다. 국가 종교가 되면 반드시 권력과 결탁하게 되어 있으므로 세상에 군림하는 모습이지 성경에서 밝히는 진리 그대로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독재하고 있는 세상에서, 무슨 권력으로 나라를 그렇게 종교[기독교]화하겠다는 것인가. 그런 철부지 생각이 어디 있으랴마는 철부지는 아닐 터이니 간단히 말해 성경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표방은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을 스스로 드러냄이다. 어쨌든 강제하고 간섭하는 것 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 모든 종교가 그러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장중(掌中)에 있고 이 세상 모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으니 그러면 나 혼자 독불장군 외톨로서 어찌하란 말이냐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가치와 위치는 이 온 세상과 맞먹고도 남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의 자주 독립성과 그 개성과 존귀(尊貴)는 이 모든 세상과 대등하다.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군천사 곧 거룩한 천사들이 그 배경에 있으므로 감히 악신이 그 모든 세상 권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우리 각자를 어찌하지 못한다. 또한 이런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을 가리켜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 천하를 얻음이 무엇이 유익하냐. 무엇으로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하셨다.
이는 다시 말해, 온 세계를 적(敵)으로 삼더라도 내 생명은 내가 지킬 것이며 온 세상이 나를 적대시하더라도 나 홀로라도 이에 당당히 맞설 수 있음을 가르치심이다. 나 혼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의지는 인간이므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요 하나님께서는 이를 당연히 기대하시는 것이다. 이른바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바로 이런 개인의 가치를 말한 것이다.
불교는 개인의 가치는 알지만, 한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인이 그러하고 그리하여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이루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은데 그 많은 "천상천하유아독존"들을 조화 통일시키는 오직 한 나라로서의 머리가 반드시 필요한데도 이 머리를 인정하지 않으니 공리공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머리가 "천상천하유아독존"들의 수만큼이나 많다는 말인가. 그런 궤변이 어디 있는가.
"천상천하유아독존"적인 개인의 가치는 한 머리를 모시고 모두가 그 몸의 지체로 형성되어 있을 때에만 그 가치대로 인정되고 유지되고 향유되는 것인데, 이에는 어찌하여 눈을 돌리지 못하는가. 개인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은 개인주의[이기주의]와는 다르다. 후자가 죄악과 연결되는 반면 전자는 공동체 의식으로 인한 자기를 부인함에서 오는 막강한 가치요 힘이다. 말 그대로 천상 천하 자기라고는 자기 하나밖에 없는 그런 독보적인 가치의 인식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두를 각기 다르게 즉 개성(個性)이 있도록 창조하신 까닭이다. 이렇게 개인의 가치를 알면 비록 소수의 무리가 모였다 해도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는 대세(大勢)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게 된다. 이 세상에서 항상 소수의 약자로 취급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치가 그러하다. 왜냐면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그 배경에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와 항상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진귀한 보배는 그 가치를 아는 자만이 주인이다. 그래서 보화를 발견한 자는 자기의 온 재산을 다 들여 그 보화(寶貨)를 매입한다 하셨다[마 13:44,45].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보화'이신 것이다. 전 재산을 그 하나와만 바꾼 것이므로 당장은 가난의 고생이 막심하나 그 보화를 소유하였으므로 마냥 흐뭇하고 만족스럽기만 하다. 이런 것이 이 세상[苦海, 死海]에서의 진정한 행복이요 만족이요 자유다. 그러므로 진실된 구도자들은 이 점을 헤아려 직접 시간을 ‘투자하여’ 성경을 읽을 일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와 같이 하나님을 찾는 이에게만 진리의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구원 얻는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나기"[롬 10:17] 때문이다.
천주교가 그와 같이 권력 지향성인데 반해 개신교는 소위 기복(祈福) 신앙으로 대종화(大宗化)되어 있다. 하나님 잘 믿어 천국에도 가고 세상에서도 축복 받아 형통하고 남부럽지 않게 산다는 것이니 이 또한 가당치도 않은 미신(迷信)이다. 그리스도의 말씀과는 180도로 다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형수(死刑囚)가 당시의 자기 사형 형구(刑具, 십자가)를 걸머지고 가는[눅 9:23] 것과 같은 형국으로 매일 이 세상을 보내라고 경고하셨는데, 어깃장 놓는 것도 유분수지 이것은 완전한 도발이요 성경에 대하여 일종의 조롱조로 나가는 격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서 무사할 리 없다. ‘청개구리[하도 말을 안듣고 반대로만 행동하는 자식들을 둔 청개구리 엄마가 임종시에 새끼들에게 산에 가서 산소를 쓰라는 말을 차마 못해 개울가에 묻으라 했더니 이번만은 엄마 말 제대로 들어 주자고 진짜로 개울가에 묻은 결과 죄다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슬퍼서 운다는 우화]’ 모양으로 반대로만 나가는 양상이다. 그래서 그들의 전도는 "예수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되고 천국도 간다"는 식이다.
자연적으로 그 행동은 위선자(僞善者)의 본이 될 것뿐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절하는[4:6,7] 터라 자기중심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육신"[롬 7:5-8:13] 타령이나 하며,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8:13]는 것이 성경의 경고인데도 ‘그러나 구원만은 받는다’는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명백히 성경은 사람이 "참고 선(善)을 행해야 영생을 얻고"[롬 2:7,10/요 5:29] "자기중심[self-seeking, selfishness, 우리말 번역 "당을 지어"는 오역]으로 나가 악(惡)을 행하면 멸망"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래서 앞서 지적한 대로의 성경에 대한 편견과 억지 해석에 물들어 있는 이들은 이런 로마서를 어렵다고[難解] 한다. 성경을 어렵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왜 욕이 되느냐 하면, '어렵다'는 것은 '횡설수설로서 요령부득'이라는 뜻이기에 그렇다. 사람 삶의 진리는 어렵지 않고 성경도 어려울 이유가 없다. 진리가 평범한 데에 있다는 것은 세상 자체가 진리 덩어리로서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진리이므로 진리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면 어찌하여 사람이 사는가. 사람 사는 이치가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면 아담이 죄를 지었다고 할 것이 아닌가. 또 산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두뇌 명석하다는 뜻이고 좀 머리가 둔한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결론일 것이니,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가 되므로 진리에 입각하지 않은 망언이라는 증거만 된다. 바로 그런 것이 성경의 내용이라는 뜻이 되므로 성경을 욕되게 한다 함이다.
그래서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는 불신자의 생각을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면서도' 그들 스스로 대변하는 꼴이 되고 있다. 자기 욕심대로 세상에서 살고는 싶은데 영생까지도 얻으려니까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다. 왜냐면 성경은 자기 욕심대로 살면 결단코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의 말씀에 기겁을 한 당시 많은 제자가 그리스도를 버리면서 떠날 때 한 말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5] 한 것과 똑같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자기 부인'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된다. 이를 아주 엉뚱하게 "우리 대신하여 죽으신" 것으로 곡해하여 구원을 180도로 거꾸로 받아들임으로 오히려 구원의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다. 이미 지적했지만 중요하기에 반복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아주 간단히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설명할 수 있다. 왜 죽으셨느냐.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기 위해서다. 즉 그 죽음의 흘리신 피[요 19:34,35]를 속전(贖錢, 贖金, 죄를 면하고자 들이는 돈)으로 우리를 사들이시기 위함이다[행 20:28].
그래서 이 사실을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主)님"이라 부르는 것이니 이는 나를 사신 나의 주인님, 소유주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마 16:24]은, 내가 영원한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어 있어 더 다시 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니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님을[고후 5:15]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시기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9:23] 하신 것이다. 이는 다른 말씀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속하시어 구원하셨으므로 나는 다시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롬 14:7-9]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 사실대로 행동하라는 것을 의미하심이다. 나를 피 값으로 사들이셨으니[행 20:28] 나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것이고 이것이 나의 구속 곧 구원일진대 다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없으므로[고후 5:15/롬 14:7-9] 이것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 위해 죽으심'이 '나의 구원'이요 이는 곧 '나로서는 자기 부인'이라는 등식(等式)이 성립된다. "대신하여 죽으셨다" 할 때는 자기 부인과 무관한 의미가 됨이니 즉 자기를 부인하나 아니하나 '나 대신하신 죽으심'이므로 나는 어쨌든 구원된다는 논리가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 부인이 없으면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주님은 경고하시기를 나를 부인하는 자는 나도 부인할 것이요 나를 시인해야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라 하신 것이다[딤후 2:12/마 10:32].
일방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죽어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내게 영원하신 선물로 이미 주신 다음의 단계다. 다음이라기보다 동시라 할 것이다. 왜냐면 사랑이므로 사랑은 동시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먼저 사랑을 나타내고 시작한 쪽이 있게 마련이니, 동시가 아니라 전후 순서가 있다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즉 주님께서 자신을 내게 주셨으므로 나 역시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니, 곧 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소유로 삼게 하시어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로 섬김 즉 그의 종이 되는 것을 말함이다.
종은 그 죽고 사는 것이 주인에게 달렸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써 그렇게 피차간 섬기고 섬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 창조하신 삶의 구조다. 그래서 주인을 섬김이 곧 주인을 따름이라 하셨고[요 12:26],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눅 22:26] 하셨다. 내게 자신을 선물로 주셨으니까 그래서 나와 하나되어 계시니까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그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이 곧 내가 그렇게 되어 있음이요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엡 2:5,6].
그래서 내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는 것이다[요 5:24].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 하신 대로 자기 부인 없이는 구원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여 공짜로 생각하는 이가 거의 전부인데 이와 같이 사랑으로서의 '서로 주고 받는 대가성(代價性)'이 분명한데도 왜 이를 억지로 부인하려 하는가. 나를 그리스도께서 사들이시는 것은 강제로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 쪽에서 스스로 드리는 경우에만 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절 아무 한 일도 할 일도 없이 당장에는 눈을 들어 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을 보는 데에 있으므로 그 사실을 보기만 하고 인정하기만 하고 믿기만 하면 모든 것 일체가 완료되기 때문에 그러하지만, 이와 더불어 나 자신을 명백히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어 나 자신을 드려 내가 그 종이 되어 절대 복종하겠다는 약속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행 2:38/17:30]다.
약속 역시 일단 '마음'으로 '서명 날인하는' 것이므로 그 어떤 '행위'도 수반되지 않는다. 단지 그 확실한 '서명 날인'으로 세례를 받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약속은 그렇게 해서 체결되지만 그 후로는 명백히 약속 이행이라는 '움직임'[행동]이 절대적인 의미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행하지 않으면 그 약속은 취소되는 까닭이다. 그러면 그 약속이 무슨 약속이냐, 나를 바쳤으니 이제는 그리스도의 소유이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4:34].
그래서 우리 구원을 가리켜 다시 말해 성령을 받음을 가리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심이라 하셨다[요 20:21,22/17:18]. 주인이 그 종에게 일정한 일을 부과하여 그것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종은 주인의 명령대로 하게 되어 있으니 곧 복종이다. 아들로서 아버지께 순종함이요, 나를 그 피 값으로 사들이신 주인께서 종에게 명령하시니 그대로 절대 복종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이 주인과 종의 관계는 더 이상 성립이 안되니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다. 즉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나의 약속 이행 여부, 복종 않고 아니함에, 나와 그리스도와의 종과 주인 관계 즉 나의 구원 자체가 달려 있어 좌우되고 직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의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이는 곧 내가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 무슨 구원이 있는가.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나의 소유이시고 선물이심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그리스도 역시 나를 부인하시어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3] 하시게 되어 있음이다. 곧 "우리를 부인하심"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하시는 말씀이 "악을 행하는 자들아"[눅 13:27]가 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는 것이다[마 7:23]. 왜냐면 모든 악행, 불법은 모두 자기중심에서 오는 것이니 곧 자기 부인이 없는 데에서 싹트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을 하면 자연적으로 선을 행함이 되고 의를 행함이 되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감에 필수 요건인 "선을 행함"[요삼 1:11]이 무엇이고 "의(義)를 행함"[요일 2:29]이 무엇이냐, 바로 사랑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함이다. 곧 하나님의 모든 뜻, 명령, 계명, 율법에 대한 복종이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뵙지 못했다"[요삼 1:11] 했으니 선을 행함이 영생의 필수 요건이 아니고 무엇인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안다"[요일 2:29] 했으니 의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도 못받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았는데 어찌 다시 난 것 즉 구원 받음이 되는가.
정의로운 삶
‘사랑’은 정정당당한 것과도 통한다. 결코 유약(柔弱)한 것과 동일시할 일이 아니다. 의(義)와 선(善)은 정의(正義)다. 다시 말해 세상의 잡스러운 쓰레기 같은 죄인들을 부르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세상 모든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모두가 이런 죄인들이므로] 잡스러운 쓰레기 죄인 그대로 구원하시려 함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켜서 잡스럽지 않고 당당한 의인(義人), 성인(聖人, saint)들로 만들어 천국으로 들이고자 하심이다.
이 "만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창조 행위다. 그러하나 최종적으로 천국에 들이시는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단독 행위가 아니니 반드시 나의 믿음, 회개, 복종, 사랑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으로서[마 7:21], 아담을 산 자로 만드셨다고 아담이 끝까지 산 자로 남아 있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스스로 범죄하여 죽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도 그러한 양면성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의인’ 또는 ‘성인’은 분명 잡스러운 쓰레기로서의 ‘죄인’ 또는 ‘악인’이 아닌 것이다. 악령(惡靈)들과 대비(對比)해서 의를 행하는 천사들을 "거룩한 천사[聖天使]"라 함과 같다. 소위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을 믿는 사람들은, 현행범으로서의 ‘죄인’을 "의(義)롭다 하시는" 즉 ‘의인’되게 하시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구원의 도리를 착각하고 있다. ‘죄인’을 회개시켜 이제는 의를 행하게 하시니까 ‘의인’이 되었고 그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인데 이 사실을 180도로 거꾸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회개의 세례를 받고 죄 용서 받아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이루어진다. 바로 그 순간까지는 나로서는 세례 받는 것 외에는 일절 아무 것도 행동화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무슨 의를 행하였다고 나를 의롭다 하시겠는가?" 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아무 행한 것이 없이도 구원되지 않았는가?"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은 미리 아시는[豫知, foreknowledge] 분이시다"가 된다. 이 미리 아심에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그 회개한 강도처럼 충실되게 끝까지 순종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에는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중간에 그 마음이 변하여 변절하고 불복종으로 끝날 것을 미리 아시는 경우다. 그러면 후자의 경우 결국은 불복종으로 끝나게 될 것을 미리 아시므로 처음에는 복종하겠다는 그 약속을 아예 무시하실 것이냐 하면 절대로 무시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항상 오늘이다.
미리 내다보시지만 판단의 기준만은 언제나 현재인 것이다. 미래도 과거도 표준하시지 않고 오직 오늘이다. 그래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항상 "오늘"[히 3:13,15]이다. 과거에 아무리 잘 믿었다고 해도 오늘 악을 행하면 그는 탈락된다[마 7:22,23]. 과거에 아무리 악행을 했어도 오늘 회개하면 그는 사도 바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금방 복종하겠다는 다짐으로 세례 받아놓고 금방 불순종할 사람은 없다. 일정 시간이 경과하게 되어야 그 진위가 판별 난다.
말로만 회개한다고 하고 입으로만 일시적 기분으로 순종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 없다. 그런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예외다. 제외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성경대로의 복음을 깨닫고[오늘날과 같은 사이비 교리를 따라 종교인이 되는 것에 불과한 세례 받음은 여기서 논할 가치도 없고] 세례에 임할 때는 다 그 때만은 진심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진심을 받아들이시고 그의 말대로 순종의 길로 나아갈 것을 미리 아시므로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중도에 이탈하여 불순종에 빠질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당장은 진지하게 나오고 순종하겠다고 결심하니까 그 약속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 주실 수밖에 없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일관성이요 공평공정하심이요 원리원칙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으로서 첫 시작을 하는 단계에서 이를 죄인으로 취급하실 아무 이유도 근거도 없는 것이다. 의인으로서 시작하는 시점에 있는 상태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의인으로서 시작하다가 아담처럼 죄인으로 끝나고 않고 하는 것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당사자에게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무릇 구원 얻은 자로 자처하는 이는 모름지기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여 날마다 자기 십자가[사형 판결을 받고 당시 사형수들이 자기가 사형 당할 사형 틀인 십자가를 메고 가듯이, 그리스도께서 그런 모습으로 사형장인 골고다로 올라 가셨듯이]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나를 구원하신 사실을 믿지 않으며 일절 부정한다"는 의사 표시임을 명심할 일이다.
더 이상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되었다"는 미신에 붙들려 있지 말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이상 설명과 같은 성경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대로의 성경적 구원과는 별개의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기의 구원 받음을 의식할 때는 반드시 자기 부인과 연계시켜 인식할 일이요 만일 그런 자기 부인이 없다고 판단될 때는 자기가 과연 믿음에 있는가를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할 때임을 명심할 일이다[고후 13:5].
매일 매시간 자기 부인의 삶이어야 함을 마음에 아로새길 것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확인할 일이다. 회개함으로써 과거 죄가 청산되고, 회개했으니까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의인으로 인정해 주셔서 "성령의 선물"[행 2:38]을 주심이다. 현재 현저히 죄를 짓고 있는 죄인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聖靈]을 주신다는 착각은 ‘몰이해’라기보다 차라리 ‘모독’죄가 된다. 추악한 죄악을 하나님의 거룩하심[神聖]과 동일시했으니 모독이요 불경(不敬)이 아니면 무엇인가.
'머리'와 '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
생명의 법질서라 하는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할 것이다. "살면 되는 것이지 사는 데에 무슨 법칙이 또 있다는 말인가". 생명의 법칙은 사랑의 원리라고도 한다. 삶이 사랑이고 사랑이 삶의 진수(眞髓)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몸' 의식['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으로 자기 부인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이미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모두가 머리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루어 있으면 각자는[머리를 위시해서]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할 수가 없는 체제다.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을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기주의[개인주의, 자기중심]로 절대로 처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공동체 정신으로 일관되게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정신으로 살기만 하면 즉 무신론만 버리고 공동체 의식으로 살면 사람이 저절로 구원이 되고 누구나 영생에 들어가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야 한 몸 체제를 이루어 완벽한 자기 부인이 가능하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나와 하나를 이루셨다고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심으로써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밖의 나는 현재 죽은 자이므로, 이 죽은 자가 살기 위해서는 죽은 자로서의 죽음이 먼저 선행되어야 함이다.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하므로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청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청산된 연후라야 산 자로서의 하나님의 새 창조가 가능하게 되고 다시 출생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합리성 또는 정당성을 띠게 됨이다.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 이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그래서 그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나와 필연적으로 하나가 되시지 않으면 안되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일절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의 하는 일이 이성적이어야 하고 합리성을 띄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 역시 "대신 죽으신다"는 식의 동화(童話)가 아니라 이와 같이 현실적이고 엄밀 엄정한 합리성을 갖춤이니 이 역시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미 앞에서 설명한 대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다시 말해 이 "육신"[롬 7:14-8:13]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인하여 그의 죽으심으로써 내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냄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자기 부인을 통하여 행복을 영생을 담보하는 확고한 터전이 마련되어야 하므로,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가 구원 얻을 수 있는 방도가 천하에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한 몸 체제에 비하면 그림자일 따름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 마땅히 '실체'를 따라야 함이다. 마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모세 율법을 통해 사전(事前) 교육을 하신 것처럼 그래서 '그림자' 역할로서의 모세 율법으로써 인간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되는 것처럼,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은 그런 실체가 아닌 '그림자'일 뿐이니 '실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벽한 공동체적 삶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머리로 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 몸 의식은 불가능한 것이다. 임진란 당시의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사례에서 우리가 보듯이, 비록 그런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와 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인명을 도탄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는 위업을 이루었으니 사람 삶의 유일한 방책이 이와 같이 올바르게 사람 사는 법 즉 공동체 의식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인생들에게 말씀해 오셨으나 이 "마지막 때[인간이 보는 시대 구분이 아닌 하나님 정하신 시대별로 볼 때]"에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이 인간 세상에서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인생 구원의 사업과 사람 삶의 기본 원칙을 인간에게 밝히시는 "말씀"[요 1:1] 역할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대신하여 죽으심"은 이 세상 신(神)이 만든 교리
그러면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가 이미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증명함이다. 그러므로 그 죽으심은 죽으심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 각자와 함께 죽으심이 되어 함께 살아나시는 거기에 초점이 있음이다[고전 15:14-18]. 지금까지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우리 '대신하신' 죽음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화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인위적 종교 교리인 것이다.
'대신 죽으심'은 그 죽으셨다는 사실 하나에만 무게를 두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분명히 부정하고 있다[고전 15:14-18]. 이렇게 대낮 같이 밝히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비틀어 딴 소리를 하고 있으니, 이는 영락없이 그 때 에덴낙원에서 "죽을 것"이라는 경고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다"고 억지 해석으로써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바로 그 거짓말이기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리"라 단정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하게 되면 나의 현재 상태 즉 죄를 짓든 아니 짓든 관계 없이 이 사실만 믿기만 하면 "죽지 않는다" 즉 영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구원이 된다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특정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이라는 '특정 사실'을 믿는 것이니 이는 전혀 별개의 의미이기에 그러하다. 이런 미신을 믿는 현상이 전 세계적이라는[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들 중에서] 사실 즉 절대 다수가 이런 당치도 않는 거짓말에 아무 비판 없이 빠져 있다는 것 자체가, 성경에 명시된 대로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그 활동을 여실히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함이다.
이와 같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정체는 여지없이 드러남이니, "죽는다"는 경고를 "죽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둔갑시키고 있는 그의 수법은 여전히 그대로이므로 그 실체를 간파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만 끝나면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롬 6:3,4,8/골 2:12,13,20/엡 2:5-7/딤후 2:11,12].
나의 구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 있는데[고전 6:17], 대신 죽으심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죽어 계셔야 하는 것이다. 다시 살아나시는 순간 나의 구원은 그 즉시로 무효가 되어 버린다. 왜냐면 나의 구원이 그의 대신 죽음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나시면 일시적인 죽음 즉 죽으시는 시늉만 하신 것이 된다. 이는 거짓과 같은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현재 '죽어 있는 자[영생하지 못하므로 이생만 끝나면 다시는 삶을 누리지 못하는]'인데 다시 '산 자[이생이 끝나도 당연히 다시 살아나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되는]'가 되려면, 이미 인간은 죽은 자가 되었고 이 죽음이 스스로 택한 결과[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자업자득인 까닭에]인 이상[롬 5:12], 하나님의 창조 질서 또는 만유 존립의 질서에서 한번 되어지는 일은 절대로 번복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므로[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렇게 엄정해야 질서 확립이 된다], 나 자신이 일단 죽어야 하고 그 어느 누구도 대신 죽을 수는 없는 일이며, 그래서 이렇게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길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짐으로써 일단 과거 자기중심으로 살던 나 곧 나의 육신은 죽어 완전히 매장되어 없어지고[죄 짓던 "옛 사람"이 죽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자로서 내가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결과로서의 "새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이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핵심인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살아나실"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이시면 영원히 사람이시니 살아나실 때에도 사람으로 살아나신 것이다. 오직 그 영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시므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영이지만[물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영은 원래 영으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원 전부터 계시던 변함 없으신 그 영으로서 오직 지금은 사람의 육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시다는 그 차이뿐이다. 육체와 불가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이신 것이다.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죽으셨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전 다시 말해 죽기 전의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아담의 '대신 죽으심'으로써 내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태어나 아담의 형상[닮은꼴]이 되어 있는 것처럼 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의 닮은꼴이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되어 지금 살아 있음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물려받음'으로써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여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이니,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아담의 형상이 되어 있음과 같이 마지막 아담의 영을 '물려받아'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모습이신 것처럼 나 역시 당연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몸인즉, "대신 죽으심"의 경우처럼 단순히 죽지 않고 영원히 내가 산다는 데에 의미를 두지 않고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음으로써 또다시 죽음에 빠지지 않고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함이므로 본질적으로 차이가 현격하다.
누차 역설하는 바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가 어린 아이라도 듣고 깨달을 정도의 쉬운 용어로 밝혀져 있는 극히 간단 명료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성경의 엄중한 경고를 오늘날 강단에 외치는 자가 거의 전무(全無)하다. 성경이 절대로 헤픈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두려워 떨" 정도의 경고이니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이렇게도 괴이한 일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이 아니고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 수준의 상식으로 판단해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죄와 죽음이 왔을진대[롬 5:12] 이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게 될 때에는 아담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아야 즉 절대 복종을 해야 구원이 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두렵고 떪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도 항상 복종함으로써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와 같이 절대 복종할 의사가 없으면 구원 자체가 해당이 되지 않으므로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닌가[행 17:30].
그리고 처음에는 그렇게 결심하고 약속을 하여 회개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바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신 것이요 이를 가리켜 인간의 "자유 의지"라 하는 것이다]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지적하여 성경이 그렇게 엄중한 경고 즉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인데도 이를 완전히 무시하니 어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사로잡히지 않았다 하리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가상적으로 그려볼 필요가 없다. 바로 이런 현실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활동을 역력히 증명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개입이 아니면 도저히 이럴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혹 변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의 지적처럼 처음부터 어려운 성경이라는 선입견으로 성경에 접근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허탈감을 느낄 정도로 너무나 간명하다. 그런데도 이다지도 왜곡되게 이해하고 생명과도 같은 이런 준엄한 경고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파한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입밖에도 내지 않고 있다니!
무엇을 어떻게 복종하라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머리로서 그 모든 피조물을 한 몸으로 짜놓으신 구조에서 그 조직 내의 각 지체(肢體)된 구성원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지 말고[고후 5:15]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르라는 것이니 이것이 "복종"인 것이다. 아담이 이 복종을 하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렀고 인간에게 이렇게 하도록 부추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처음부터 범죄하는 자"[요일 3:8]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결과인 것이다.
이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원리를 따른 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관계를 말씀하심이니 그래서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사람의 일 즉 나의 일을 생각해 주시기 때문이다[마 16:23]. 이것이 자기 부인이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어서 범죄요 죽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유형이라 할 정도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대명사가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가르치시기 위해 베드로를 꾸짖으실 때 "제자들을 보시면서" 말씀하셨다고 마가는 보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또 이를 가리켜 "마귀의 일"[요일 3:8]이라 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일을 "멸하려(to destroy)"[:8] 하심이라는 말로 명백히 하고 있다. 왜냐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데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자기중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동일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귀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범죄하는 죄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범죄한 아담이 비록 첫 사람으로서 모든 인류를 죽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어도 반드시 죽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처럼 무릇 범죄하는 자는 죽는 것이지 살 수가 없다. 아무리 입으로는 믿는다고 해도 과거의 믿음의 경력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해도 그것이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마 7:21/25:45].
그런 것이 만일 그를 구원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세상 모든 종교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복종하는 것은 순수하게 내게 달려 있는 문제이므로 내 스스로 아담처럼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자멸의 길을 택할 수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워 여러 소리를 한단 말인가. 산 자더러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이 죽은 자에게 어찌 구원을 이루라 하겠는가.
그러나 구원을 아무리 받아 산 자가 되어 있어도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범죄하면 죽게 되고 멸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담이 죽게 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영원한 멸망의 운명을 그 스스로 만들 당시 그들이 "죽은 자"였던가? 엄연히 '산 자'였었다. 산 자가 스스로 죽은 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구원 얻어 산 자로서 그렇게 죽는 자, 죽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경고가 바로 "네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 아닌가.
즉 범죄하지 말라는 것이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말라는 그 뜻이다. 그렇게 되면 필살(必殺)이고 필멸(必滅)이기에 그렇다.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아담에게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나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구원이 은혜가 되고 선물이 되는 뜻은 그래서 믿기만 하면 구원이 된다는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현재의 위치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산 자가 될 수 없어 그렇게 하나님께서 산 자가 되는 것을 선물로 주셨다, 거저 주셨다, 은혜로 주셨다 하는 그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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