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7.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 버려두었는가? --------------------------------------------------------------------------------------------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임"
따라서 아무리 유일신을 믿고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해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이상으로 그 어떤 이름을 앞세우든 또는 그리스도 외의 그 어떤 요소를 덧붙이든 그 종교는 허위요 속임수요 거짓인 것이다. "마호메트"라는 이름도 앞세워서는 안되고 "마리아"라는 존재를 덧붙여도 안되는 것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하나님[의 아들] 외의 다른 것을 추가하니 이는 바로 신성모독이 된다. 감히 인간의 이름을 덧붙이고 앞세우다니 말이나 되는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영원히 사람이 되어 계시니 이 이상 가는 '사람'이 필요치 않다. "마리아"도 "마호메트"도 그 어떤 사람이든 더 필요할 턱이 없다. 왜냐면 모든 면에서의 완벽하신 사람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 되실 까닭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 구원이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것 또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은, 앞의 설명대로 마땅히 우리가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반드시 살아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서 사람되시어 나와 함께 죽으시고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시는 의미를 만드신 후 성령으로 내 안에 친히 오심으로써 그 의미를 현실적인 것으로서 구체화시키시는 것 외에는 일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둘이 하나되는 원리[삼위일체의 원리]로써, 이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친히 우리 위해 사람되신 이름이시다. 하나님 친히 새 창조의 일을 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 이상 가는 그 어떤 방법이 달리 있을 리 없다. 이 구원으로써 우리도 얼마든지 죄를 짓지 않게 되었으니, 사단 등 악령들은 죄를 지었어도 "거룩한 천사"들은 죄를 짓지 않았던 것처럼 바로 그와 같은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수준에 우리도 비로소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 '수준'이라 함은 자기 스스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한 얼마든지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될 수 있는 바탕을 말함이다[히 9: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죄인으로서 '과거의 죄 값을 청산했다'는 그 의미와 더불어, 다시는 "육신"[롬 7:5-8:13]의 조종이나 지배를 받지 않고 이제는 그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내가 내 몸[육신]을 쳐서[to beat, to discipline] 복종시킬[to make it my slave] 수 있는"[고전 9:27] 단계[수준]에 이르렀음을 의미함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사로잡혀 있던 즉 과거 "율법 아래" 있던 처지는[롬 7:24] 그리스도 오시기 전 혹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상태였음을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데도, 이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한 소위 신학자, 개혁자, 교부(敎父) 등등의 말만 듣고, 이러한 설명을 하고 있는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개인적 체험이라고 가르치는 모든 개신교 역시 이상 말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는’, 그렇고 그런 종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다. 성경대로 말하지 않으니 역시 허구요 거짓말이요 속임수이기는 기타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다.
우리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도[6:6], 내 자신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고전 9:27] 않으면 안되니, "왜 육신이 또 살아났는가" 할 것이다. "또 살아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후 함께 살아나 "새 생명"[롬 6:4] 가운데 있는 즉 "다시 난"[요 3;3] 육체이기는 하나, "죄 있는 육신의 모양"[8:3]으로서의 육체임에는 분명하고 그냥 그대로이니, 이런 육체로 있는 한 이 육체는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에게는 '죄와 죽음의 화신(化身)'인지라 성령의 능력으로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13] 필요가 있음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런 육체로 사람이 되셨으나 성령으로 그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신 까닭에 죄가 없으시고 죄를 짓지 않으신 이치와 똑같다. 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바로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이다. 때문에 "육신대로 살"[:13] 필요도 없거니와 또 살아서도 안되는 것이니, "육신대로 살면 죽는"[:13]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시던[부활하시기 전] 그런 몸의 상태로 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과 같이, 우리도 아들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 곧 성령 받아 모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요 20:21,22/17:18].
그러나 경고가 있으니, 그렇게 하지 않고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멸망한다]"[롬 8:13] 함이다. 육신은 앞서의 설명대로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경향의 본능이 앞서는 것을 말함이므로, 이를 따라 행동하면[즉 그리스도 중심,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데도]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되어 범죄가 될 것은 필지이다. 이런 진리를 알고서도 죄를 지으니 이는 고범죄(고의적인 범죄)에 해당되어 다시는 죄 용서가 없다[히 6:6/10:26,29].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뜻이다. 이는 바꾸어 말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 그의 다시 살아나심을 나의 현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있음'으로서 믿는 나의 믿음에 비례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가 능히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믿는 자에 한해서만 때문에 그 믿은 대로 행동하는 경우에만 나타나게 되어 있는 '현실'이요 '능력'이다.
김유신이 한창 나이로 젊을 때 기생 집에 드나드는 등 방종하므로 그 어머니가 유신을 불러 앉혀 놓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는다고 그렇게 방탕하느냐" 하며 눈물로 훈계하였다. 유신이 크게 뉘우치고 있는데 하루는 말께 올라 졸고 있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옛 기녀(妓女) 천관(天官)의 집 앞에 말이 와 다다라 있고 천관이 울면서 달려 왔다. 정신이 번쩍 든 유신은 단 칼에 애마(愛馬)의 목을 베어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와 버렸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천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둘로 나누어질 수 없는 일이다. 두 임금을 섬길 수 없고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이다[마 6:24]. "하나님과 재물[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24]. 과거의 버릇대로 자주 가던 옛 길을 습관대로 따라 갔던 말은 "육신"에 견줄 수 있다. 유신의 어머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할 수 있고 유신의 한번 맹세한 마음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믿음, 순종이라 하겠다. 이전에는 유신과 말이 하나 같이 움직였지만 이제는 유신은 변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의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일"[롬 8:13]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 범죄하기 전의 아담 수준으로 회복 또는 복귀되었다 했는데, 이 말은 그런 상태에서는 범죄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는 아담처럼 또는 사단을 비롯한 악령들처럼 얼마든지 여전히 범죄할 수 있다는 뜻을 똑같이 포함하는 것이다. 즉 "육신"[롬 7:5-8:13]에 따른 타율(他律)에 의한 범죄는 불가능해졌으나 그 대신 자율(自律)에 따른 범죄는 아담처럼 또는 사단과 같은 악령들처럼 얼마든지 가능함이다.
물론 몰라서 짓는 죄는 예외로서, 회개할 때 충분히 용서가 됨을 요한 사도는 명시하고 있다[요일 1:6-2:2]. 요한이 그 편지[요한일서]에서 밝힌 바 예컨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마땅히 유의할 일은, 오늘날은 전반적으로 성경대로 가르치지 않아 실제 구원 받은 일은 없어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여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비록 알고서도 죄를 지어도 고의적인 범죄가 해당되지 않으니, 오직 회개하여 성경대로 믿어 성경대로 구원 받음 즉 성경대로 "다시 출생함"[요 3:3]으로 새로 창조되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게 성경대로 다시 난 다음에는 정신 바짝 차리고 고의성을 띠는 범죄를 짓지 않기로 모든 주의를 기울일 것이니 그래서 "두렵고 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공동체 의식으로 공동체 삶을 사는 한 몸의 체제가 생명의 체제인즉 반드시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이요, 말이든 행위든 나 자신을 위주하여 자기중심으로 사는 일체의 것이 죄 곧 사람 사는 도리를 벗어난 것임을 알 일이다.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지 않으니 죽음밖에 더 있는가.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골 3:17]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고전 10:31] 된다. "각각 은사(恩賜, gif)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執事, steward] 같이 서로 봉사하는" 것이니,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 되어"[벧전 4:10,11] 있다.
왜냐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심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 나의 구원 받음이므로, 나의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될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 되어 있는"[요 14:10/갈 2:20] 까닭이다. 또 내가 하는 일은 나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으로 일관되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 보내심 받은 의미 곧 우리의 하나님 아들됨의 의미이다[요 5:19].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변화이므로 끝까지 이 믿음을 지속시키지 않으면 "육신대로 살아 죽음'[롬 8:13]에 이를 수 있는지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떪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고전 9:27]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한다고 해서 나 자신의 구원이 목표가 아님은 앞에서 콘크리트 양생(養生) 비유에서 설명했다. 내 스스로가 잘못하면 지금까지 이룩한 일이 말짱 헛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즉 사람 사는 유형을 볼 때 ①신[창조주]도 없다, 내세(來世)도 없다 하여 엄벙덤벙으로 사는 이들이 있으니 오직 눈앞, 코앞의 일만 대수로 삼는 불나방의 하루살이 같은 삶이 있고, ②내세가 있는 줄 알아 선하게 살려고 하는 종교인의 삶이 있고, ③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사는 삶이 있다. ①의 경우 현세에서의 성취뿐이다. ②의 경우 내세에만 희망을 건다.
그러나 ①이든 ②든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실질적으로 아무 미래도 희망도 없다.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혹은 무신론자, 무종교인이든 다 똑같다. ③은 물론 내세에다 희망을 걸기는 ②와 같으나 동시에 현세를 중시하기로는 ①과도 같다. 즉 ①과 ②를 동시에 포용하여 양면성의 건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③이다.
여기서 건실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의 자기 부인을 말함이니,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이웃을 위해 사는 아주 바람직한 삶이다. 이 이웃을 위함은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함에서 비롯되어 그 지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②가 자기 구원이 최종 목적인 반면 ③은 자기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웃의 구원이 목적이다. 그러니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한 건실한 삶인가. 이 건실하다는 것은 세상에서 적당히 품위를 유지하고 자급자족으로 남부럽지 않게 산다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가난하게 약하게 천하게 사는 것이 대부분이라고[고전 1:26] 할 정도가 ③의 실상이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 ③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고후 6:1],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처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義-올바름)를 좌우(左右) 무기(武器)로 삼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고후 6:3-10].
유능하고 쓸모 있게 일하는 일꾼의 특색은 하고 싶어서 못견뎌 하는 데에 있다. 싫든 좋든 부과된 임무라 여겨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의식으로서 자기 일을 하는 것, 일에 낙을 붙여 하는 것을 말함이다.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은 그런 일꾼의 대표적 본보기였다. 물론 그만 아니고 모든 사업체의 주인들이 그러하겠지만, 정주영 회장은 항상 일을 꾸미고 만들고 진척시키는 재미로 살아 밤잠을 못잘 정도였으니 그의 말대로 항상 "설렘 속에서 아침을 맞아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먼저 새벽 이른 시간에 기상하여 설쳐댔다. 돈을 버는 재미로 산 것이 아니라 그는 일하는 재미로 산 것이다. 우리가 사람 살리는 일을 함이 그런 것이다. 이로 인하여 비록 갖은 모욕과 고난과 재앙이 바울 사도의 경우처럼 따르더라도 지칠 줄 모르는 의욕은 꺾여지지 않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히 11:38].
또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16/요이 1:9] 하였고, "너희는 저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영역으로는 성별(性別)을 나타내지 않는 "children"]가 될 것이다.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이시다.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6:17-7:2] 함과 같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게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당당히 마음껏 기를 펴고 신바람 나게 만유의 주인[하나님의 상속자이니까]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그렇게 올바르게 산 자에 한하여["참고 선을 행함으로써"-롬 2:7,10/요 5:29] 영생을 주시게["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요 5:29] 되어 있는 것이 멀지 않은 장래에 모든 인생들을 상대로 할 마지막 심판의 의미인 것이다[행 17:31].
이 올바르게 살도록 하시려는 배려 차원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 지으신 만유의 상속자들이 미리 되게 하신 것이다. 이 미리 되게 하심이 우리 구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친히 나와 영원토록 하나가 되어 주신 것이다. 고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사랑과 은덕(恩德)이 고스란히 내게 오도록 하는 그런 영원한 장치를 나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것이다.
그런 고난 가운데에서의 멋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 이 세상 "나그네"[벧전 1:17] 길이다. 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초조하게 세상 앞에서 겁 집어먹은 표정이 되어 갉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누더기라도 당당하게 걸치고 어깨를 펴고 신바람 나게 휘적휘적 걸어 나가 '일하고 싸우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풍도(風度)로서의 철저한 자기 부인이다. 세상에서 용맹스럽게 치고 나아가 자기 노력으로 일을 만들 재주가 없어 그 대신 하나님께 의존함이라는 일반적인 그릇된 인식을 털어 버릴 일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는 믿음은 그런 것과는 180도로 다르다. 오히려 당당한 주인 의식에다 이보다 더 철저한 자주 독립성도 없다. 자기의 영원한 운명까지 자기 스스로 요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마당이니 더 말할 것이 무언가. 은혜로 선물로서 주시는 것을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 하는 것을 사단은 철저히 왜곡시켜 지어낸 자기의 거짓말을 믿도록 만든 것이다.
분별을 제대로 못한 결과다. 즉 사람은 처음부터 완전한 자유 의지를 행사하도록 만드셨으니까 자기 운명까지 자기 스스로 요리하도록 완전 일임된 것이다. 이 사실은 아담의 경우에서나 영물들이나 현재의 우리나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 및 시종일관성이다. 변동이 있으면 누가 그 법질서대로 움직이려 하겠는가. 단지 은혜를 말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죽은 자'였기 때문에 '산 자'부터 먼저 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산 자'가 되는 것만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은 자기네 종교가 인간적인 노력을 중시하고 인간[인격] 완성을 지향한다고 자랑하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낱 세상 종교에 불과한 소위 "기독교"의 교리가 표방하는 내용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을 직접 진지하게 연구하고 난 다음의 결론이어야 하는데 그냥 피상적으로만 수박 겉 핥기로 핥고 나서는 "다 알아 버렸다" 하니 얼마나 경망한가. 이런 가벼운 사람은 진리는 항상 외면하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은 그네들보다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적 노력[사람답게 삶으로써 이룩되는 모든 선하고 의로운 열매의 결실(結實)] 그리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인간 완성[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함을 이룸-벧전 1:16]을 이루는 것이니 곧 철저한 자기 부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에서만 이룰 수 있는 이런 자기 부인은 세상 그 어느 종교도 그리고 소위 성인(聖人), 인격자도 따라오지 못하는 경지(境地)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거룩함에 이름으로 인하여 말 그대로 성인(聖人, saint)들이 되어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니 이보다 더한 자기 완성, 인격 도야(陶冶)가 어디 있는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요 근본적인 치유요 타개책이다. 밑 뿌리부터 파고드니 이런 철저함도 없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개인 따라 열매의 차이는 있으니 혹은 30배, 혹은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나타내는 등 균일하지는 않다.
따라서 자기 완성도 당연히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철저히 각자의 자유 의지, 자유 선택에 의한 결과이므로 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이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침입해 들어가[to press, to use violence]" 천국을 "강탈한다[to take it by force]"는 사실에서는 일치한다[눅 16:16/마 11:12]. 이보다 더 적절하고 완벽한 인간적인 노력, 자기 완성에 적합한 표현이 또 있겠는가. 이보다 더한 적극성, 능동성이 있는가.
여기서 의타심(依他心)은 발 붙이지 못한다. 순수하게 나의 결단, 결심이요 자발성(自發性), 자율이요 그리고 사랑이다. 사랑은 항상 주인 의식이다.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능동적이요 항상 적극적인 것이 사랑이다. 몸과 머리 관계 혹은 주인과 종의 관계라고 "의타심 운운" 할 것은 없다. 의타심은 일방적으로 움직인다는 의미이니 혼동하지 말 것이다. 사랑은 동시에 움직인다. 사랑의 성격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치 양쪽 모두가 다 종이요 주인처럼 되는 그런 동시성(同時性)의 움직임이다. 물론 머리가 먼저 시작한 것이고 몸은 그 본을 따름이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시동(始動)이 걸린 다음부터는 어느 것이 꼬리고 머리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원(圓) 또는 구(球)의 성질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각자는 이러한 주인[주체] 의식으로 충만하여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다시 탄생함이요 새로 창조됨이므로 모든 것을 새로 타고 나는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다. 나의 힘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나의 사랑, 선택, 의지만이 나의 몫이요 소관사일 뿐이다. 왜냐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선물로 받음으로써 그와 내가 영원히 둘이 하나 되어 있는 이치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의 힘, 능력이 되어 존재하심이다.
삼위일체 원리에 의한 영원한 짝으로서의 하나다. 홀로가 아닌 둘로서의 하나이니 실로 막강한 천하무적의 힘을 "새 피조물"[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들에게 선사하신 것이다. 친히 그 능력이 되어 내 안에 계심이다. 사람이 움직이면 자기의 의지로써 움직이나 신체적인 힘이 있어야 그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의지는 나의 것이나 신체적인 힘은 내 것이라기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므로 차원이 다르니 그와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는 깊은 애정으로 다시 말해 당신의 분신(分身) 격으로 만드신 것이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왜냐면 모든 피조물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나온 만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분신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피조물들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또한 그 뜻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점에서 피차간 노력하고 자기 완성을 꾀하라는 것은 당연한 말씀이시다. '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히 원도 한도 없이 주셨으므로 오직 '하겠다는' 의지만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터이다.
의지까지 없다면 그것은 완전한 인간 로봇이 아닌가. 개신교의 오류는 이 의지까지 스스로 무시하려 드는 데에 있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들은 하나님의 말씀까지 아주 비상식적인 것으로 폄훼하는 결과가 되고 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롬 2:23]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즉 스스로의 잘못된 처신으로 인하여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롬 2:24] 함과 같다.
단순히 영생만 주시는 것뿐이라면 아무 자유 없는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들처럼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시면 될 일이지 무엇 때문에 그런 엄청난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겠는가. 자유를 주신 것은 스스로 그런 아름다운 목적을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요 자기 완성을 이루라는 것이 아닌가. 상식 수준에서 판단할 일이다. 진리는 평범한 데에 있다는 말처럼 절대로 우리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상식을 벗어나기 때문에 사이비가 되고 이단(異端)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심' 오직 그 하나만으로 그래서 내 죄가 용서됨으로써 내가 의롭게 되고 구원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고전 5:14,17,18]. 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나의 구원의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셨으니 나도 그리스도를 위하게 되어 있는 이 동시성(同時性), 양면성이 핵심이다. 때문에 믿어야 즉 회개함으로써 그래서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순종을 약속해야 구원이다. 이것이 회개의 의미다. 그렇지 않다면야 모든 인류가 다 자동적으로 예외없이 구원되게 하셨으리라.
생명의 일은 사랑의 일이요 사랑에서는 일방적인 것은 없다고 이미 우리는 전제하였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은혜만이 우리의 구원의 요소가 될 수가 없다. 반드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도 함께 포함되어 있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내가 죽은 것은 기정 사실이므로[우리를 '죽은 자"라 하셨으므로-눅 9:60] 여기에는 '산 자'로서의 의미도 아무 변화도 있을 이유가 없다.
내가 이미 죽어 있으므로 나 위해 죽으심만이 나의 구원이라면 나 위해 죽으실 필요가 실상 없다. 왜냐면 나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니까 그 위에다 죽음을 더 포갤 필요가 없음이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즉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일 경우에만 "나를 대신하신" 죽음의 의미가 있는 법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 5:14]이라 했으니 이 말대로 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밖에 없다. 확인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아무 의미가 없다.
고로 이것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으로 "산 자"[고후 5:15]가 된 우리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었다는 이유에서다. 앞의 지적대로 비로소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으심은 우리 모두가 죽음을 의미하고 그가 살아나심은 우리 모두가 다시 살아남을 의미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음을 표현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두 즉 "모든 사람"은 세상 사람 전체를 말함이 아니라 "우리" 즉 그리스도를 믿어 "산 자"가 되어 있는 이들을 한정해서 말한 것이라고 이해함이 타당성이 있다.
다시 말해 방금 위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가 믿는 자로서 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15] 바울이 강조함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죽었으니까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지 일반적으로 모든 인생이 죽은 자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의 죽음에[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나와 함께 하나 되심으로써 그래서 그가 살아나실 때 나 역시 살아나도록 하려 하심‘이 그 목적인 동시에, 나의 이와 같은 살아남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제하고 기반하는 것이기에 다시는 그 죽은 나[죽어 장사 지내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물론 믿음으로써]를 위해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이렇게 함께 살아나시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함께 죽으심이 필수이기 때문에 죽으셨고 이것이 "우리 위해 죽으심"의 의미이다. 바로 이렇게 죄인으로서 형벌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을, 우리 위한 그 무한하신 사랑, 창조주의 사랑, 어버이로서의 사랑으로 단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나는 과거 나 중심으로 살아 나를 위해서만 살던 삶을 '죽음으로써 청산'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셨고, 그렇게 위하심으로써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나 위하심[이 위함이 곧 사랑이다]이 확증되었으니[롬 5:8],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머리되신]를 위해 사는"[고후 5:15] 삶이 '구원 얻는 믿음'의 핵심인 것이다.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생명의 일에서 일방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셨으니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위하되 영원히 위함을 나도 확증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할 책무를 짐은 옳다. 이 세상은 그 증명을 나타내 보이는 절호의 기회요 장소요 때다.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여 주셨으니 나는 당연히 그 본을 따름이 옳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둘 사이의 하나' 관계는 유지되어지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움직임으로써 둘이 하나 되는 법은 없다. 쌍방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 둘이 하나 되는 구조요 그 원리다.
고로 어느 한 쪽이든 상대를 위하지 않게 되면 상대를 위하다가 중단하게 되면 그 둘의 하나 됨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은 그냥 나 위해 일방적으로 죽어 주시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가 되시기 위함이니 이 하나 됨에는 반드시 내 쪽에서의 움직임이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두 손바닥이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이는 영원히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의 구원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됨에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나 위하심을 확증하셨고 지금도 불변이신지라 재론할 것이 없지만[또 하나님이시므로 영원 불변하시지만], 나도 이상 설명과 같이 나 자신의 구원에서 엄연히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니 내 소임을 다하지 않으면 구원 자체가 성사되지 않도록 되어 있으므로, 바로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즉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을 삶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 당연 귀결이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우리 구원이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 있으므로 이 하나 되는 구조는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해야 하는 체제다. 갑만 을을 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범죄는, 사단 같은 악령이나 첫 사람 아담이나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생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 관계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와 함께 다시 살아나심"으로서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니, 말 그대로 그리스도 자신께서 다시 살아나 계심이 그 첫째요 그리고 나 자신이 또한 살아남이 그 둘째다. 내가 산 자가 되어야 그리스도를 위하지, 죽은 자로 머물러 있어서야 단 한 손가락인들 생명에 관한 한 움직일 수 있겠는가. 또 산 자가 산 자를 위하는 것이지 어찌 죽은 자를 위할 수가 있는가. 죽으신 그리스도를 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위할 수 없는 것이요 산 자만이 산 자를 위할 수 있음이다.
따라서 대신 죽으심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마땅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이셔야 함이다. 왜냐면 '둘이 하나 됨'에는 반드시 그 상대의 생명이 되어 상대의 삶을 살아 주는 데에 그 ‘하나 됨’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있으면 나는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는 자가 되어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뜻과 나의 일을 하는 위치에 계셔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시려고 살아 계심이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롬 14:7-9] 그리스도는 나의 것[그래서 성령을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시라 하는 것]이 되심이다. 때문에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갈 2:20]. 고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하였다[빌 1:21]. 따라서 내가 받는 고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받는 고난이라 했으니[:29] 나의 일체의 삶과 죽음이 즉 죽어도 살아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함이 되어 있음이다[롬 14:7-9].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 사는 구조이니 그래서 "새 생명"[6:4]이라 하고 새로 창조된 "새 피조물"[고후 5:17]이라 하는 것이며 "다시 출생해서’[요 3:3] 다시 시작하는 삶이라 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골 3:4]이 되심은 당연하다. 나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동시성에서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께서 내게 대하여 바로 그러하신 것이다. 이전 나 홀로 내 마음대로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던 것과는 완전히 별개다.
과거의 그런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장사 지내져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이를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임이 "믿음"이다.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바로 이것이 처음 창조 때 앞서의 설명대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였는데, 영물인 사단이 이를 어겼고 그의 충동질[거짓말을 함으로써]에 넘어가 인간[아담 부부] 역시 이 삶의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부인’을 배격한 결과가 오늘의 인생 비극이다.
그래서 내처 이런 이탈된 상태에 머물러 ‘죽은 자’요 죄인이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과거 청산을 하고 "다시 출생해서"[요 3:3]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됨은, 아담이 처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조성된 다음에 그 영혼이 다음 단계로 조성된 것과 똑같은 양상을 밟은 것이니, 즉 내가 그 '육체'에 해당되고[자연계에 속한 몸이니까]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영혼'에 해당되시는 것으로서, ‘영혼’과 ‘육체’가 영원히 불가분인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와 나는 영원히 불가분으로서 하나로 존재함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로 존재하시어 '한 하나님'이 되어 계심과 같은 이치임을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아담과 나와의 차이는, 아담의 경우 그 육체는 물질이었으므로 그런 육체와 영혼 관계는 기계적인 것으로서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지만, 그러나 나의 경우 육체는 바로 나 자신으로서 물질이 아니라 나의 영혼이 작용하는 까닭에 아담이 범죄하기 전과 같은 그런 [조물주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되는 의미임을 앞에서 지적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가 ‘영혼과 육체 관계’라는 것은 그러한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함이니, 즉 ‘죽은 자’로서 ‘산 자’가 되기 위한 정당성과 합리성의 근거가 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로 회복되었으면서도, 얼마든지 아담처럼 또는 사단 등 악령들처럼 불복종함으로써 다시 죽음[이번에는 멸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尙存, 殘存)하는 고로,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일방적으로 죽어 주셨다는 ‘특정 사실’을 믿는 것으로서 거의 모두가 착각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님을 다시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주신 그 "사실을 믿으면"이라 하시지 않고 "그[그리스도]를 믿으면"[요 3:16]이라 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심을 믿고 신뢰한다는 뜻이니 이는 기필코 나도 그리스도를 위해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포함하고 있음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반드시 회개하는 자에 한하고, 세례 받음으로써 죄가 용서되는데[행 2:38], 이렇게 중대한 의미의 세례이기에 "회개의 세례"라 한다.
회개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고후 5:15] 즉 순종하겠다는 다짐이요 약속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약속"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하나님은 "몸의 구속(救贖,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같은 신령한 몸으로 환원됨) 즉 양자(養子) 되게 하심"[롬 8:23]에 대한 약속이요, 우리는 아담처럼 되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순종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신약(新約, 새로운 약속)과 구약(舊約, 첫 약속 즉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약속으로서 실체이신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그림자로서의 약속)으로 나누어 하나님의 말씀을 신구약(新舊約) 즉 "언약(言約)의 말씀"이라 한다. 때문에 이와 같이 회개가, 믿음으로써 은혜로 얻는 구원에 절대 필수 조건이므로 먼저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시지 않고 "회개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다[행 17:30]. "믿으라" 하셔도 "회개하고서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시는 의미이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라는 도시의 형무소[감옥, 교도소] 간수[jailor]에게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된다"[행 16:31]고 한 것은 당시 이미 감옥의 터가 흔들려 죄수들을 묶어 놓았던 쇠사슬이 죄다 풀어지는 등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났으므로 본성적으로 회개하는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되겠느냐?" 하고 바울과 실라에게 매달렸기 때문이다. 바울의 대답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표현하였음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나를 종으로 부리는 주인, 나를 소유하여 내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소유주]'로서 믿으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회개"는, 앞으로는 절대로 순종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내어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내가 그 종이 되어 나 자신을 부리시는 나의 주인[소유주]으로 인정하여 믿는다는 것은, 종으로서 그 주인에게 절대 복종한다는 의미이다. 일종의 명칭이나 호칭으로 "주님"이라 하는 것이 아니니, 바로 이상과 같은 엄숙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절대 복종할 결의가 되어 있지 않거든 "주님" 하고 부르지도 말고 구원 받을 생각부터 버릴 일이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롬 10:13]이라 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냥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 7:21] 하신 그대로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 하심과도 같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인다면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홍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함과 같다. 그러나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홍수가 부딪히자 집이 곧 무너지며 파괴됨이 심하다"[눅 6:47-49] 하신 경고를 반드시 되새겨 들을 일이다.
지나간 날의 자기 자신을 위해 살던 삶을 청산하는 것 그래서 이제 후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이 회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처럼 사랑하시어 그런 사랑의 확증을 보여 주셨는데 그래서 그 모진 인간의 죽음의 고통만 아니라 온갖 수치(羞恥)의 고통까지 당하셨는데[이는 자식 생각하는 어버이 마음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하다] 나로서 아무 사랑도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말로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일 뿐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반응하는 법이다.
그런 반응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는 다 유효하더라도 반응이 없는 나에게는 무의미, 무효일 뿐이다. 회개하라는 명령이 없다손 치더라도 당연히 나타내게 되어 있는 사랑인데, 이 사랑이 바로 회개가 의미하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사랑하는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기쁨으로 이루는 것이 사랑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선(善)이지 무엇이 선행인가.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롬 2:7,10/요 5:29/계 20:12,13/고후 5:9-11]. 구원은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해당된다[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상대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는 멸망하게 된다[:8,9]. 이 구절에서 "믿는 자가 영생한다"고 하지 않은 이유다. 왜냐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심지어는 심판 자리에서까지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졌지만 악행을 하고 있었고[마 7:21/25:45] 그 결과 멸망에 들어가는 사례가 "많기"[눅 13:24] 때문이다. 악을 행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영생으로 통하는 좁은 문과 길로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24]. 그래서 "들어가기를 힘쓰라"[:24] 하셨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로 "힘씀"[고후 5:9/벧후 1:10/3:14]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와 같이 죄의 개념은 명확하다. ‘한 몸’ 의식, ‘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데도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모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어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 되어 있는 관계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사는 모든 것이 죄인 것이다.
삶이란 것은 살아지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삶]의 원리원칙을 정해놓고 그 원칙을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함이요 그 원칙에 충실하여 추호도 이탈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영생]이시다[골 3:3]. 사람의 생명은 원래가 영생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이런 시한부 생명이 아니다. 영생하도록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롬 5:12].
다시 말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영생하는 신령한 몸을 잃어버리니[그렇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불복함으로써 그리고 순종하지 않음이 죄이니까-창 2:17], 남은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뿐이다. 이런 육체는 시한부 생명이므로 죽음이요 따라서 우리가 죽은 자라 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생명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여차하면 태어나자마자 죽기도 하고 10, 20대에 죽어 나간다.
그래서 이와 같이 정함이 없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생명이므로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에 걸맞게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식물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인간[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자연계에 속한 몸과 더불어 신령한 몸을 겸비한 이중(二重) 구조로 되어 있었으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신령한 몸은 영원히 상실되고 따라서 우리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만 여기 이 세상에 있는 것이기에 '죽은 자'이다.
이런 ‘시한부 생명’은 ‘영생’에 비하면 ‘죽은 자’다. 영생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산 자’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죽을 것이다" 경고하신 대로 죽음의 결과다. 따라서 ‘죽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폐기(廢棄)된 상태이므로 필연코 죽음의 종말을 맞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되심으로 나를 위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어 성령으로 즉 그 영으로써[영으로 오실 때는 반드시 아버지와 함께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으로서] 내 안에 임하여 영원히 나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 되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함께 사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던 그 신령한 몸으로 현재 계시는데 나는 왜 아직도 이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냐 할 것이다. 아직도 구원 받을 사람들이 남아 있고 이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이 아직도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답이다. 이 고난 받음은 신령한 몸으로서는 안되고 자연계에 속한 연약한 육체라야[고후 13:4] 함이니 우리가 구원해내어야 할 대상이 되어 있는 이들이 아직도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의 죽음의 고난을 함께 나눔으로써[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의 생명을 그들이 나누어 가져 그들 역시 나처럼 산 자가 될 수 있음이니[죽은 자로서의 굴레를 벗어난]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이치 그대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육체를 통해[자신과 하나되어 있는 우리의 고난 받는 몸으로 말미암아] 그 고난을 계속 받으시고 그렇게 됨으로써 나머지 인생들을 구원하심이다.
이로써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되어, 신령한 몸[그리스도]과 자연계에 속한 몸[나 자신]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앞에서 설명했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몸으로 두번째 세상에 나타나실 때, 나 역시 그와 같은 신령한 몸으로 현재의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이 변환[아담처럼]되는 즉 "몸의 구속"[롬 8:23]의 근거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 받으신 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계에 속하고 동시에 영계에도 속한 이중 구조이시나 현재 영계에 속한 몸으로 계시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이중 구조이기는 하나 현재는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다는 그 차이다. 신령한 몸이셨지만 '동시에' 우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몸이시기도 한 사실을,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고 제자들이 드리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으시고 그 앞에서 잡수심으로써 증명하셨다[눅 24:41-43].
우리 역시 현재 이런 이중 구조로 되어 있음이나, 앞에서 콘크리트 양생 비유를 하였지만 우리로서는 아직 "양생 중"이므로 그리스도처럼 금방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또는 영계에 속한 육체로 자유자재로 변환시킬 수는 없다. 콘크리트로 완전히 굳혀져야 그런 자유자재함을 누릴 수 있으므로 지금은 "양생" 과정이어서 주님을 따라 일단 죽어 부활하는 단계를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동참, fellowship]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빌 3:10,11] 것이다.
믿는 자에게만 나타내시는 증거
그리스도께서 첫 사람 아담의 원래 모습 또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부활하신 모습의 신령한 몸의 측면을 인간에게 보이신 것은 바울이 되기 이전의 사울에게 나타나시던 당시, "정오의 해보다 더 밝은 빛"[행 26:13]으로 임하시던 때 [기록으로는] 단 한번이다. 그 강렬한 빛에 사울은 즉각 시력을 상실하게 되어[나중에는 뜨게 되지만]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므로 사람의 손에 끌려가는 상태가 되었다. 동행인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는 못하여 무슨 영문인지 몰라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고 했으니[행 9:7,8] 그들은 그 빛에는 접하지 않았으므로 눈이 멀게 되는 일도 물론 없었다.
이는 그 때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만 나타나셨다는 의미로서, 다시 말해 바울은 신령한 몸이신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왜 소리는 들렸느냐 하면 '소리'와 '말'은 또 다르다. 만일 '소리'가 아닌 '음성[말]'을 들었다면 그들 역시 그 권위에 압도되어 땅에 엎드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기도하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요 12:28,29] 했는데 "곁에 서서 들은 사람들은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음과 같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라"[:30] 하신 대로, 환청(幻聽)이 아니라 바울이나 예수님이나 친히 말씀을 들은 것임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당시 듣고 본 것이 결코 환상이나 환청이 아니라 실제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을 입증하기 위해 빛은 보지 못해도 소리만은 들을 수 있게 조처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기록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면 이와 같이 듣기만 하는 것과 보고 또 듣게 되는 것, 말 뜻을 알아듣는 것과 소리만을 듣는 것 등의 분명한 차별화가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령한 몸으로 계신 그대로 뵙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그렇게 그리스도를 대면했다는 의미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니,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이 딱 한번만으로 당신을 나타내심으로써 만인[믿는 사람이면]에게 그렇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왜냐면 사람사람에게 굳이 그렇게 나타내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분명한 차별화'로써 이 효과를 극대화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 자신의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은 바울이 세 번이나(행 9:3/22:9/26:13) 연달아 같은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을 사도행전은 그대로 기록해 두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이상 설명과 같은 그런 상황이 이를 확실히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 점 독자들은 깊이 유의하실 일이다. 요한은 이상[vision] 중에서 그와 같은 신령한 몸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뵈었기 때문에 바울처럼 실질적으로 대면해 뵌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겠으나, 그래도 비록 한상 중이기는 해도 이를 보고 요한은 졸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계 1:10-19].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만 그렇게 신령한 몸으로 나타나신 것은 바울만을 총애하셔서가 아니라, 위의 설명처럼 그 한 가지만의 사실로써도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기록을 통해[이상과 같은 설명을 따라], 우리 모든 사람도 바울이 그렇게 주님을 대면한 것처럼 대면해서 뵙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바울에게도 그 딱 한번만 나타나셨지 계속해서 나타나시지는 않았다. 마찬가지 의미다. 우리에게도 이 한 번의 기록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이런 나타나심이 계속될 필요는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오직 이를 그렇게 수용하는 자들에게만 한해서 나타나는 의미다.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다. 그와 같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전연 해당되지 않는, 그러나 이를 수용하여 믿는 자들에게만은 "흔들릴 것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서 그 부활하심을 당시에 나타내신 것이다. 이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여 믿는 이에게는 바울 자신 직접 보고 들은 것과 똑같은 비중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의 "증거'이다.
부활 후 500여명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다 했으니[고전 15:6] 당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 그 정도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엄청난 사실도 이를 수용하여 믿는 자는 당시나 현재나 소수의 "적은 무리"[little flock]이다. 따라서 성경은 억지로 믿으라 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고 믿도록 강압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억지로라도 많은 무리를 끌어 모으기 위해 일체의 거짓말이든 속임수든 그런 잔 꾀를 부리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바울이 말한 바 500여명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일시에 나타내셨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그렇게 밝혔기 때문에 아는 것이지 복음서에는 전혀 기록되지도 않았다. 또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도 했으니[고전 15:6] 그것을 소문으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실제 확실한 근거를 두고 하는 말임이 드러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복음서 기자들은 그 부활의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증거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가정해보라.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것까지 낱낱이 찾아 기록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이나 당시 교회에서 그렇게 시시콜콜 일부러 찾아내려 하지도 않은 것은, 너무나 확실한 그리스도의 부활이시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그렇게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복음서 말미에 일제히 기록했을 뿐이지 그 부활을 입증하는 자료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만일 지어낸 것이거나 불확실한 것이라면 절대로 무덤덤하게 이런 식으로 나올 리가 없다. 이런 것들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다.
성령께서 임하신 사실에 대해서도 그냥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가감없이 전했을 따름이니, 성령께서 임하시는 모습을 두고도, 그리스도의 경우 비둘기 같이 임하셨다 했고 오순절[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후 50일째 되는] 당시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는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와 같이 두 경우가 전혀 상치된다. 이는 실제 일어난 그대로를 기술하였다는 증거다. 인위적으로 보태거나 빼거나 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경우는 어떻게 조화되느냐, 불의 혀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되어 120명이나 되는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았으니 그러하고, 그렇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임하신 것이라면 날개 치는 비둘기 형상이었을 것이다. 나풀거리는 형상이시라는 데에는 일치된다. 그리고 옥내(屋內)와 옥외(屋外)에서 사람 눈에 비쳐지는 차이도 있다. 답은 이뿐이다. 그러므로 모습은 동일하신 것이다. 이렇게 성령 받아 모심이 그 때 당시만 그렇게 '모습[형상]'으로 나타나신 것은 당시는 초대 교회의 초창기(草創期) 맨 시작이므로 그렇게 사람의 눈에 드러나 보여질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시는 조처를 취하신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후로는 그렇게 사람의 눈에 띄는 모습으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기록이 없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그 후로 성령이 임하실 때는 "예언을 하고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등의 현상이 대신 나타났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 역시 그 한 때 초창기로서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끝났을 뿐이니 성령께서 그렇게 임하신 것이 명백한 사실이었음을 알리는 데에 있기 때문에 연속하여 계속 그런 현상을 나타내어져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기록에 따르면 남자만 5천명, 4천명씩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어도 믿은 사람은 고작 500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이 역시 진실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이미 설명했다. 성경 기록이 진실과 진상의 기록이 아니라 지어내고 꾸며낸 것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니, 수천, 수만 명에게 나타났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렇게 해야 각종 기적이나 부활 등을 일부러 꾸며낸[지어냈다고 가정한다면] 목적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런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처음부터 그러했다. 즉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도 물론 있기는 하나 기적을 본 이들이 모두 믿음이 있었다고 성경은 밝히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믿었으나 나중에는 그 믿음을 버렸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고로 이런 경우는 처음부터 믿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처음부터 겨우 500정도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리스도 부활 때까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이들은 그 정도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성경은 그 진실성을 자체적으로 증명
그러므로 성경의 '각종 기적에 대한 기록'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므로 따라서 그런 기적을 일부러 지어내고 꾸며내고 한 거짓이나 속임수가 아님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을 그대로 밝히고 있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셨으나 항상 비유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만 그 비유를 풀어 친히 가르치신 것도 그 까닭이라 하셨다[마 13:10-15].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니,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아니 되었다" 하셨고,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하셨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들어 이사야의 예언대로 되어지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 모두 같은 이유에서다. 즉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했던 것이다.
그리고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하셨다. 그런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이와 같이 분명히 차별하여 가르치셨다는 사실이 또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훌륭한 자체 증명이 된다. 왜냐면 거짓말과 속임수, 사실이 아닌 것을 지어내고 만들어내고 꾸며대는 일체의 모든 것은 예외없이 억지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단이 세상 종교 중에 천주교와 개신교를 첨가시킨 것도 이런 점에서도 의당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사람들을 모쪼록 대량으로 끌어 모아 대세를 형성시켜 위압하기 위함이다.
개신교는 천주교의 가르침이 성경적이 아니라 하여 반기를 든 것이라 해서 이름도 "프로테스탄트[to protest]"라고 했지만, 그 개신(改新)이라는 것이 인위적인 교리 갱신에만 그쳤을 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복귀가 아니었던 것으로써 주류를 형성하고 있음이다. 물론 개중에는 참으로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가 주류를 형성했다는 것이 그 동안의 역사적 증거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은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고 또 그 의미가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시종일관 후자가 아닌 전자를 택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에 들어오는 이들이 절대로 '많은 사람'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세상에 예고하셨다는 증거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충만하시어 친히 그 많은 기적을 베푸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어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제자들이[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에야 말해 무엇하랴.
과연 "500여"[고전 15:6]명 정도의 사람에게 일시에 나타나실 때라면, 이미 그 전에 개별적으로 그리스도 친히 찾아가 당신의 살아나심을 나타내어 주신 이들을 모두 한데 모으셨다는 의미이니 이는 다시 말해 믿은 이들의 숫자가 모두 500정도였다는 사실을 입증함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평소 그 나타내시는 기적을 보기도 하며 그 가르치심을 받을 때도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눅 18:26], 또는 "구원 얻는 사람이 적습니까?"[13:23] 하고 번번이 놀란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믿는 사람이 결단코 많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인상을 제자들이 받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요 15:20] 하신 다음에,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하신 것이다. 전혀 귀 담아 듣지 않고 믿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불식시켜 주시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핍박한 것은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지만 일반 대중들 역시 믿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느냐" 하고 물러가지 않았던가[요 6:60,66].
그렇게 실제 증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거짓말이요 지어낸 것이 아님을 이와 같이 명백하게 자체 증명하고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왜냐면 진실되게 참말을 해도 믿지 않는 내용인데 거짓말하고 지어낸다고 해서 믿을 줄로 알고 언감생심 그렇게 제자들이 꾸며대고 조작해내려 하겠는가. 그런즉 우리는 여기서 이중으로 성경의 이 진실성을 확인하게 됨이니 성경의 이와 같은 자체 증명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성경을 인식하게 만드는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존재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달한다고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성경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쳐 세상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어떻게든 끌어 모아 세력화하려는 일반적인 작태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는 세상 권력을 통해 그렇게 군림한 역사로 지금까지 연이어져 오고 있고, 개신교는 "십일조 내면 풍족해진다, 잘 산다" 혹은 "잘 믿으면 축복 받아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누리게 된다" 식으로 현혹해온 것이다.
십일조 즉 수입의 1/10을 내는 것이 대수가 아니니 100프로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더욱 많은 것이 돌아오더라도 그것은 나 개인의 유복한 삶을 위함이 아니요 가난한 사람 구제하고[엡 4:28] 또는 좋은 일에 전적으로 사용하라는[딤전 6:18] 것이 하나님이 뜻이다. 왜냐면 내가 소유한 것으로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나의 소유란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일절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를 않는데[고후 5:15] 무슨 내 것이 있는가. 내가 잘 살고 부자되기 위하여 만일 하나님께 바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되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죄악이 된다. 이런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구원이 적응될 리가 없다. 극좌로 치우친 것을 바로잡는다면서 오히려 극우로 치우쳐 버린 꼴이다. 중도(中道를 따라 즉 한복판으로 똑바로 걸어가야 하는데, 치우쳐 그 역시 옆 도랑으로 빠져 버렸으니 엉망진창이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성경에서부터 이탈한 오류의 측면에서는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었던 것이 천주교에서 이탈해 나간 개신교의 실상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평소 수만 인파가 구름 떼처럼 떼지어 몰려다녔으나 정작 믿음에 들어온 사람은 5백명에만 그쳤고 그들에게만 "천국 비밀에 대한 지식이 허용된" 것이다. 가난하고 비천하고 약한 계층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아니니 착각하지 말 것이다. 그런 이들 중에 택하심을 받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그 뜻일 뿐이지[고전 1:26] 마음이 완악해져 있기는 매일반이기 때문이다.
이회장은 왜 하나님께서 자기를 똑똑히 인간들에게 나타내시지 않느냐[질문 1] 했는데, 이렇게 '똑똑히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만 그렇게 나타나시고 주위 동행인들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았던 것처럼, 성경을 통해서만 이 '똑똑히 나타내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당시 믿은 사람들에게만 확증되어 나타났고 믿지 않던 세상 사람에게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임에도 이 부활의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그대로다.
왜냐면 그렇게 믿지 않는 이들에게 나타나신다면 강제가 되고 간섭이 되는 까닭이다. 억지로 믿게 하시지 않고 억지로 구원 받게 아니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함이라고 위에서도 지적했다. 다시 말해 순종하는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순종은 사랑에서 나오는 자진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므로] 자가 아니고는 믿도록 허용하시지를 않는 명백한 차별화, 구별화이신 것이다. 왜냐면 인간의 죽음을 비롯한 모든 고통과 불행이, 사랑 없어 순종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재차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당위성에서다.
그래서 연속 강조하는 것이지만 믿는 자, 회개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해당된다. 그래서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6:44,65]고 즉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처음부터 선을 그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500여명에게 일시에 나타내 보이셨다고 했지만 만일 그 중에 단 한 명이라도 가령 불신자가 끼어 있었다면 주위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어도 그 사람에게만은 그 부활하신 모습이 보여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뜻이다.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再臨] 함은 그 때가 되면 구원 얻을 사람은 다 구원되었고 더 이상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때 임하시게 된다. 강제나 간섭이 될까 저어하시는 경우는 그제는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 부활하셨던 사실은 당시 온 세상에 나타내져야 했던 것이나, 그렇게 되면 보기 때문에 믿는 것이 되어 따라서 그 누구든 믿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기에, 앞에서 말한 그런 간섭, 강제가 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즉 사랑하고 순종하려는 의지(意志)로써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어야 하므로, 믿는 자들에게만 그 부활을 오직 나타내시고 나머지는 일절 제외시키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함이니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타나셔 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음이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살아 계심을 "똑똑히 나타내시지" 않는 이유라고 앞에서도 이미 설명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 만드신 만물 가운데에서 충분히 입증되어 있기 때문에 핑계할 수가 없는 일이다[롬 1:20]. 다시 말해 '똑똑히 나타내어 보이셨으나'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이 차이를 명심할 일이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함과 같다. 집이 있으면 틀림없이 누가 지었기 때문에 그 집이 덩그렇게 세워져 있음과 같이, 이 우주 만물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 지으신 분 곧 하나님의 작품임을 증명함이다.
그리스도 천년 통치 기간의 의미
그러면 그리스도 다시 오신 후 천년간의 그리스도의 세상 통치 때는[고전 15:25] 어떻게 되는가. 이미 그 때는 적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에게 경배했던 세상은 파탄이 나 그런 사람들은 모두 한꺼번에 죽어 멸망하고[계 19:21] 믿음을 지킨 극소수만 남게 된 상황이므로[눅 18:8] 그들을 통해 인류는 재생산되는 것이니, 마치 노아 홍수 때 노아의 가족 8명을 통해 인류가 다시 지상에 깔리게 된 것과 같은 양상이 된다.
앞서의 설명대로, 영생하기로 되어 있던 아담이 범죄로 죽음에 이르자 그 수명(壽命)이 천년 가까운 세월이었던 시절로 이제는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이 세계가 종결되려는 것이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멸망당하는 원수가 사망이 된다[고전 15:26]. 이와 같이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과정을 다시 거꾸로 해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뜻은 인간의 범죄로 일시 폐멸(廢滅)되어 있던 것이 다시 정상 상태로 회복된다는 뜻임을 명백히 함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상태가 애초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제 모습이 아니라는 그 뜻을 강조함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는, 악령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고 그리스도 친히 세상을 통치하심으로써 세상이 정의의 천하가 되어도 인간 각자 스스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지"[히 1:9] 않는 한 그 악행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입증해 주는 데에 있다. 왜냐면 이 천년 통치의 기간 말(末)에 사단이 다시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 아니나다를까 하나님을 배반하는 무리의 "수가 바다 모래 같아 지면에 널리 퍼져 있는"[계 20:8,9]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증거다.
다시 말해 오늘날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지만,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때이므로 상황이 전적으로 다르기는 하더라도, 아직 심판이 실시되지는 않은 때라 "믿음"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사단이나 아담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한 것은 아닌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써 빚어지는 결과가 범죄이다. 그리스도 통치 기간도 그런 상황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누구나 인식하면서도 범죄하는 것이니 이는 에덴낙원에서조차도 사단이나 아담이나 범죄한 것과 같은 현상 그대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무엇 무엇이 눈에 나타나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내 스스로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否定)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미련하고 근거없는 망상에 불과한지 이로써도 입증된다.
그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혹은 그런 세대일수록] 표적을 구한다"[마 12:37] 하셨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마 16:1/막 8:11)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 구원자이심을 똑똑히 증명해 보이는 증거" 또는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똑똑히 보여 주는 것"을 요구했을 때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오직 대답하시기를,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人子-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람되심을 강조하여 자신을 가리키실 때 노상 사용하시던 용어로 '사람의 아들' 곧 '사람'이란 뜻)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마 12:39] 하셨다.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표적[또는 기적]을 말씀하심이다. 다시 말해 이런 기적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요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이 요구하는 그런 "표적"은 이미 충분히 나타내신 것이니, 즉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들이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요 15:24,25] 하심과 같다. 다시 말해 그 이상으로 나타내시면 그것은 간섭과 강제가 된다. 모두(冒頭)에서의 천주교 신부의 말처럼, "신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면 인간은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니 힘 있는 사람이 얼쩡거릴 때 부담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 되어 그래서 나타내시지 않는다"고 한 그런 상황이 됨이다.
사람은 논리적인 존재다. 이는 인간을 논리적으로 판단하도록 만드셨다는 의미다. 따라서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이성적 판단과 논리로 현재의 상태만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모든 하시는 일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이 논리대로 판단하지 않고, 덮어놓고 어떤 능력[소위 말하는 기적 등]이나 위세에 끌려 따라가는 것은, 스스로의 욕심[자기를 위해 사는]으로 인하여 그런 논리대로 판단하게 되어 있는 이성(理性)이 마비된 증좌다.
강제와 간섭을 배제하고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신 것도 바로 이 논리적 판단을 따라 생명과 사랑의 법칙을 능히 이해하고 그 좋고 나쁜 것을 충분히 깨달아 사람 사는 올바른 도리를 따라 행할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유를 온전히 활용하여 스스로 의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의를 사랑해서, 아니라면 불의를 좋아하는 이는 그 불의를 좋아하는 대로 심판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정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 이 현재의 상태인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혹자 생각하기를, "그렇게 요구하는 사람의 말대로 그렇게 '똑똑히 나타내시면' 안믿던 사람도 다 믿게 되고 안믿을 사람도 믿게 되니 좀 좋으냐" 하겠지만, 하나님은 "누구든지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나"[딤전 2:4/벧후 3:9], 앞에서 설명한 대로 모든 사람은 아니니, "누구나 아무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신 그대로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살후 3:2]고 못박아 두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다시 말해 믿을 만한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 중에는 영물 가운데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분류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반드시 악인들이 있게 마련이다. 개신교를 다른 종교와 똑같이 사이비[진리를 기준할 때 진리와 어긋나므로]라 하는 것은 죄인은 그 죄와 악을 버려야 하는데도, 악을 그대로 행함으로써 죄인이 되어 있는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육신대로 사는"[롬 8:13] 죄인임에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지어낸 교리를 더 믿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신뢰하고 친근히 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보다 더 돈독히 하는 천주교와 하나도 나을 바가 없는 까닭이다.
유대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것 즉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나타내 주신 것 이상의 것 즉 "똑똑히 자신을 증명해 주실 것"을 요구할 때는, 다른 뜻이 아니라 자기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저의(底意)가 깔려져 있음이다. 즉 자율적이 아닌 타율로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을 내 의지로 단속 못하겠으니 즉 내 스스로는 안되니 확실한 그 무엇으로 해서 나를 모쪼록 얽어매어 달라"는 그런 요구가 된다.
그러면 그 요구를 들어 주면 믿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더더욱 보다 나은 증거가 있어야 한다면서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방편으로만 삼을 뿐이다. 이는 그 스스로 악하다는 자체 폭로의 의미밖에 없다. 악인은 하나님은 구원하시지 않는다. 죄인이 회개하는 경우에만 구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죄인을 의롭다 하여 구원하시려 함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심으로써 의인으로 만들고자[의롭다 하고자] 하심이다.
이는 나를 의롭다고 하실 만반의 조처를 충분히 취하셨기 때문이니 곧 나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때문에 '이미 완성된 구원'이다. 완성되었으나 반드시 동시성과 양면성의 원리를 따른다. 즉 내 스스로 의인이 되고자 하여 의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기로 작정함으로써 그대로 행할 결의가 확고할 때[이것이 회개다] 비로소 그리스도의 그 모든 능력이 내게 적용됨이다. 내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그 구원이 내게 나타나지는 법이 없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함이다. 즉 우리 스스로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함"[히 1:9]이 없는 한, 아무리 천국이라도 유혹의 계기가 오면[사단처럼 그 스스로 충동이 되어서라도] 결국 오늘날 같은 비극적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음을 지금 이 세상에서 증명해 보임이다.'천년 통치 이후의 반란'[계 20:8,9]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그 스스로[기뻐서 자진 자발적으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경우에만 한하는 것이다[롬 2:7,10/마 7:21].
따라서 이 세상에서 그런 행함이 없을 때는 천국에 가서도 여전히 그러하리라는 증거가 되므로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에의 길이 아예 차단되는 것이다. 강제와 간섭의 타율적인 것으로써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천국은 순수한 사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악[자기중심으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버리기를 원치 않는데 그러나 영생은 얻고 싶다는 단순히 욕심뿐이라면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선의에서 천국에 수용해 들이더라도 경우에 따라서 종국적으로는 아담 같이 되고 사단 등 악령들과 같이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구원하시려면 아담을 처음부터 죽지 않도록 강제하시고 간섭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이 무의미함을 처음부터 아시므로 그런 식으로는 움직이시지 않는 것이다. 즉 회개하여 복종함으로써 기꺼이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만 부르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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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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