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이병철 삼성 회장 24개항 질문 (15)


이병철 회장 24개항 질문 (15)




4. 만물의 생성[창조]과 존립의 원리--------------------------------------------------------------------------------------


머리와 몸


하나님께서 우리들 피조물을 만드셨는데 이 우리와의 관계를 나타내시기를 친히 머리로서 자임(自任)하시니 그렇다면 우리는 그 몸인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과 피조물 관계는 한 몸[身體]의 관계다. 애초에 피조물 없이 홀로 계실 때는 '일시'이다. 그러나 피조물을 창조하심으로써 현재는 피조물과 상칭(相稱, 對稱)을 이루는 고로 '이원'이다. 그러나 머리와 몸으로서 조물주와 피조물이 불가분의 한 몸 관계가 되어 있으니 이 한 몸됨을 가리켜 '일체'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머리는 조물주를 가리키고 몸은 피조물을 말하는데 따라서 이 둘을 함께 '하나의 몸'이라 할 때는, '머리', '몸[의 각 지체]', 그리고 '한 몸'이라는 개념이 각각 다르다. 그래서 이 셋은 '삼위'를 구성하게 된다. 이 관계에서 몸은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한다. 그 어느 편도 자기 스스로를 위할 수 없고 '상대적'이라는 의미를 항구적으로 지녀 각자 자기이 상대를 위함으로써 현재의 한 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그리고 머리는 몸을 위함으로써만 자기 존재를 인식한다. 자기를 위하게 되면 '한 몸으로서의 자기'라는 존재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게 된다. 존재 의의가 없어진다. 머리 역시 이제는 몸이 없이는 자기의 존재 자체가 불투명하게 되어 있어 철저히 몸을 위한다. 이렇게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생명의 법질서가 되어 있는 것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인지함이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할 때[이것이 범죄다] 생명에서 끊어져 죽음을 스스로 맞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자신 자신을 절대로 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자기를 부인함"이라 하셨다[마 16:24]. 단 둘이 있어도 머리와 몸의 관계로 되어 있고, 여러 피조물이 있어 한 하나님을 머리로 모셔도 머리와 몸의 관계다. 그래서 남자로부터 여자가 났으므로 남자는 머리요 여자는 그 몸이라 하여 '한 몸' 관계다[고전 11:3].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생겨나는 수는 없다. 먼저 생겨난 것이 있게 마련이고 그 먼저 생겨난 것으로부터 똑같은 것이 생겨나니 여자다. 양성 생식을 하는 암수 구별도 이런 같은 이치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나고 나중 났으며 먼저 난 것에서 나중 나는 것이 생긴지라 어버이와 자식 관계라, 동등할 수 없고 대소(大小), 주종(主從) 관계다. 오늘날 유행이 되어 있는 소위 양성 평등은 합리적이지도 못하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완전한 이상(異常) 굴절(屈折)이다.


일종의 정신적인 혼돈으로서의 사회적 황폐화요, 정상 상태에서 이탈한 일시 표류 상태다. 진리는 항구적이므로, 그래서 이런 것을 "일시적 현상"이라 하는 것이다. 이 일시적 현상이 몇 백년 혹은 몇 십년을 흘러갈지는 모르나 항구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양성 평등'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양성 조화로서의 하나'를 이루는 운동이라야 역리가 아닌 순리요 본류를 따라 흐름이다.


사회생활은 질서가 그 뼈대다. 그리고 가정은 그 최소 기본 단위다. 남녀가 동등[대등]한 위치에 서면 머리가 둘이 되어 있는 꼴이 되고 몸은 없다는 의미가 되니 기형이고 하나로서의 조화 통일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정신적 퇴보(退步), 퇴화(退化)라 하는 것이다. '여권(女權) 신장'(伸張)에서 접근해도 될 일을 왜 무리하게 '평등'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무리 수를 두는가.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무시하는 데에서 오는 심각한 시행착오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이전과 달리 각종 과학 지식이 날로 발전하는 것과는 반비례하여 정신적으로는 황폐해 간다는 증좌다.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현대의 과학적 지식의 발달 자체가 정상이 아니라 이상 기류(氣流)로서, 이 세상을 조종하여 지배하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의도하에 이루어지는 책동으로서 결단코 달갑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은 흉조(凶兆)라는 의미이다.


세상을 가장 효과 있게 단일화시켜 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획책의 일환인 것이다. 물론 육체로서의 우리 인간은 이런 문명의 덕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정상이 아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그래서 이런 지식을 현재 인간들이 활용하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이나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신령한 몸이 우리의 원래의 모습이므로, 우리도 부활하여 신령한 몸이 되면 이들 도도하기 짝이 없는 악령들과 같은 능력자로 즉각 환원될 수 있으므로 그 때가 되면 이런 모든 문명 발달은 일종의 휴지 조각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런 과학 문명은 악신(惡神)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류를 대대적으로 기만하기 위한 전단계 초석(礎石)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각종 소위 "과학 문명의 이기(利器)"에 심취하여 몰두해 있는 청소년의 심리상태가 극도의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는 경악할 만한 사태 악화가 이를 증언한다. 인간 삶에서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이 최고 선(善)인데 그와는 반대 방향인 개인주의[이기주의]로 일관되게 흐르니 당연한 결론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의 입에서 회자되는 환경 재앙, 환경 파괴가 과학 문명이 결코 인간[현재 자연계에 속한]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둘째 증거다. 북극의 어름이 녹는 등의 감히 예측도 할 수 없는 불길한 조짐이 여러 면에서 드러나지고 있다. 애초 창조하신 대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현존 생명체[자연계에 속한]에게 이상적이다. 그런데 오늘날 여기에 이상(異狀)이 생긴 것이다.


정작 영계에 속하여 영생하게 되어 있는 인간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버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영계에서 추방당하여 자연계에 귀속됨을 인해], 무리하게 영적 존재로서의 불편과 불만을 해소해보고자[원래부터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은 아무 불편 없이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누리는데 반하여] 각종 지식을 동원하여 유해물질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지경에까지 이른 탓이다.


고로 인간은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을 입음으로써 영생의 낙을 누리는 것이 정상이요 제대로 된 모습이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아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 유일한 구제책이다. 영물들처럼 신령한 육체가 되면 이런 구질구질한 소위 과학 문명이 필요가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그런 몸 자체가 현재 우리가 아는 대로의 모든 기능[과학적 발명 발견에 의한] 이상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음이다. 즉 애초 창조된 대로의 삶을 향유할 수 있음이다.


이런 환경 파괴는, 인간의 현재 하는 짓거리들[하나님의 구원 받음이 없이 스스로를 구원하려는]이 온전히 정상 궤도를 벗어난 것임을 입증한다. 신령한 몸이 되어 영생하는 본연의 위치에 회귀하려는 생각은 없이 현재 상태를 개선하고자 하는 부질없는 노력에만 휘말려 있으니 무리이지 순리일 수가 없음이다. 회개하여 구원 받아 장차 영원 세계에서 삶을 누리는 것이 정상인데 이를 무시하고 이 죽음의 세상에서 정착하려는 억지인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다"[고전 15:44] 한 대로, 양면성[상칭성 또는 대칭성]의 원리에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 곧 우리의 이 육체와 대립이 되는 영계에 속한 몸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령한 세계에서만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니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그런 예다. 이 세상에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시어 그러한 몸을 40일간 계시다가 하늘로 오르셨던 것이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려져 간 에녹이나 엘리야 또한 그러하다. 이 세상에서 신령한 몸이 된 채로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엘리야가 불 말[horses of fire]이 끄는 불 수레(a chariot of fire)를 타고 승천하였다고 성경은 상세히 전하고 있다. 엘리야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다는 증거다. 대중도 없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은 아니다. 그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첫 사람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영생하는 자로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령한 몸이 인간의 원 모습인 것이다.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됨으로써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된 것이니, 이는 애초 아담이 이 자연계에서 자연계의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육체인 것이니, 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인간 육체로[창 1:12-27] 상향 조정하시면서[진화가 아니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신 까닭에 하나님의 생기(生氣, the breath of life)로써 인간의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이에 부합되게 영계[에덴낙원]가 창설되고 인간[아담]은 거기서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신령한 몸이 됨으로써 영적 존재가 된 인간을 보좌하기 위해 인간과 같은 영적 존재가 창조되니 곧 영물들로서 오늘날 거룩한 천사들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이 그들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천사들보다 먼저 신령한 몸으로 존재하였으므로 바로 이런 근거로 해서 에녹이나 엘리야가 그렇게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녹의 그러한 변화는 아담이 죽은 거의 직후의 일로서 아담의 죽음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심에 의미가 있었다. 아담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상징이었다면 에녹은 '의인의 종국적 결과'를 나타냄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시 인간들로서 유일하게 이 세상을 하직한 인물은 아담과 에녹 둘뿐이었다.


엘리야의 그러한 신령한 몸으로서의 변환은 엘리야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세상 출현 직전 그 앞서 나가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될 세례 요한을 상징하는 인물로 미리 예고되어 있었기에 가능해진 경우다. 즉 세례 요한은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고 그냥 비참한 죽음으로 그 생애가 종료되었음에 반해 엘리야는 역대 선지자들 중 최고의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했고 그 몸마저 그렇게 신령한 몸으로 변했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세례 요한의 성격 그대로를 드러냄이었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드디어 구원되어 그렇게 막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변환됨을 상징하는 의미였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정작 어떠했던가.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알리는 그 고유의 임무답게 그 역시 고난의 죽음으로 일관했으니 따라서 그는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았었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행하실 터인데 세례 요한마저 능력을 행한다면 그리스도와의 구별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또 그리스도의 특징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을 행하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으로서 우리 위해 죽으심에 핵심 의미가 있으므로 이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는 자답게 그 자신도 그런 미미하고 나약한 모습을 상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즉 여기서 '그리스도를 상징하여 나타낸' 세례 요한과 이 '세례 요한을 상징하여 나타낸' 엘리야의 대비되는 의미가 명확해진다.


즉 실질적으로는 능력이나 현실로는 나약한 자로서의 고난 받음이니 이는 곧 그리스도의 의미로서, 실질로는 막강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현실로는 우리를 대표하시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아담의 모습이셨기 때문이다. 범죄하기 전의 위세 당당하던 아담이 아니라 범죄여 죽음에 이른 아담의 모습이므로 바로 그 모습부터 먼저 나타내셔야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그 현실로서의 모습이고 엘리야는 그 실질적인 모습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양면성을 나타낸 것이라 하리라.


그리고 엘리야와 에녹 두 사람이 신령한 몸이 된 채 승천한 것은, 에녹의 경우 첫 사람 아담 즉 하나님 창조하신 인간의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니 곧 범죄 전에는 신령한 몸으로 아담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고, 엘리야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환원되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따라서 이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이렇게 극적으로 생애를 종료한 이는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또는 이유도 없이 특이하게 그렇게 신령한 몸이 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은 신령한 몸이 그 고유의 본령(本領)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죽음인 것이다. 그 처참한 몰골은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屠殺)할 양(羊)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롬 8:36] 함과 같으니, 희생 제물을 죽임과 같이 그렇게 인간의 육체도 해치는 자 임의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목을 비틀어 부러뜨리거나 베기도 하고 사지를 찢기도 하고 "톱으로 켜기라도"[히 11:37] 하면 그대로 피를 흘리며 참혹한 꼴을 나타냄은 짐승들과 아무 차이가 없음이다.


가인이 한번 아벨을 쳐서 [돌로 쳤는지 나무 막대로 쳤는지 모르나] 죽이니[창 4:8] 꼼짝없이 아벨의 숨이 끊어지는 비유하자면 종이 곽 같은 바스러지고 으깨지는 그런 육체다. 그러면 그런 참변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즉 소위 "천수(天壽)"를 누린다고 해서 [아담 이후 노아 홍수 당시까지는 천년 가까이 살았었다] 좋은 모양새를 간직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방금 전까지 눈망울 굴리고 입을 방긋거리며 말하고 온갖 감정을 나타내며 팔다리를 움직이던 육체가 한 순간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비극이다.


이런 비극적인 인간으로서 이런 비감(悲感)을 인생들에게 안겨 주시려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인간을 창조하실 리가 없다. 그런 비통한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하실 요량이시라면 자연계의 짐승처럼 이성 없는 비 인격적 존재로 만드시면 된다. 그러나 그런 존재들은 자연계의 동물들만으로도 충분하므로 그렇게 하실 이유도 없다.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 아담 안에 영원한 존재로서의 영혼을 조성하셨다는 것은 그 육체도 당연히 영적 몸이 되게 하시어 천사들과 같은 신령한 육체로 만드셨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 세계에서는 "천사들과 동등"[눅 20:36]이 된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가리킴이니, 이는 처음부터 인간이 천사들과 동등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처음 창조에는 그렇지 않다가 이제 우리가 구원 받음으로써 그렇게 됨이라면 아담의 범죄와 죽음이 그렇게 천사와 동등이 될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한 필요악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아담에게 불복종의 책임을 물어 그 죄의 대가로 죽음에 처해졌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창조는 이미 끝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인간을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다시 만드시는 그런 때는 아니라는 그 뜻이다. 오직 인간 스스로가 죽음에 처해져 있어 자초한 결과로 애초 창조에서의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났으므로[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름으로써] 이렇게 죽은 자가 된 인생들을 산 자로 만드시고자 함이 우리 구원이다. 즉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기 전 상태의 아담의 위치로 복구시킴이다.


우리의 구원은 구속의 의미


때문에 우리 구원을 구속(救贖)이라 하는 것이다. "구속"은 말 그대로 원래의 애초의 상태를 벗어나 있던 것을 원상태로 회복시킴이다. 이런 의미의 새 창조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죽음의 육체는 오로지 죽음의 고난에만 해당되는 것이요 이런 육체로써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것은 한마디로 언어도단이요 성경적 관점에서는 한없는 미련함이 된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몰라서 그리 되었다 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시어 모든 진실과 진리를 밝혀 주신 이상에는 그런 결론은 당연하다.


우리가 구원 받아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고[요 3:1,2] 명실상부한 '산 자'가 되어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님에도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속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으로써 사람 살리는 일 오로지 이 일만을 하기 위한 목적이다. 왜 죽음의 고난을 통해야 인간 구원의 사업이 가능한 것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이 그 증명이요 이유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어 그리스도와 '머리와 몸' 관계를 새로이 형성함으로써 원래의 첫 창조에서의 '머리와 몸' 관계로 복구시킴에 있으므로, 구원 받은 자는 그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고 머리와 동일한 보조를 취함이 몸[의 각 지체]의 임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것처럼 몸도 같은 모양새를 띠고 함께 일체(一體)로 처신하고 행동하고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를 성경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하였으니 희생 제물의 의미이다. 모세 시대에 바쳐졌던 짐승의 피로 특징 지어진 그런 희생 제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그림자 역할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짐승의 피로써 당시 사람들의 죄가 속량(贖良)된 것은 아니니[히 10:4]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을 희생 제물인 짐승이 죽었다고 해서 그것을 '대신 죽음'이라 여겨 그리스도의 죽으심에까지 적용한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전적인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은 나와의 하나됨[함께 죽음과 함께 무덤에 묻힘과 함께 살아남]에서 오는 죽음이요 그리고 부활인 것이다. 희생 제물로서의 짐승과 내가 하나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짐승과 인간인데 하나될 리가 없다.


고로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던 희생 제물로서의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히 10:4]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자연계에 속한 죽음의 육체로서 세상에 태어나심은 우리 인간이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 죽은 자와 하나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 역시 똑같이 죽은 자로서의 육체로 죽으시지 않으면 안된다. 고로 죽으심에 목적이 있다기보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로서 죽은 후의 다시 살아남이 당면한 현안 과제이므로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남에 역점(力點)이 주어짐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죽으시지 않고는 우리 위해 다시 살아나심이 있을 수 없는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인해 우리 역시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먼저 죽으심이 전제되고 확증되어야 하므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 죄인으로서의 저주 받은 죽음이므로 죄인으로서의 형벌 곧 십자가 죽으심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구조는 '한 몸' 체제에 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만물이 나왔으므로 피조물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분신(分身) 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만물이 생겨났으니 하나님 친히 그 몸의 구조에서 머리이시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구원 역시 바로 이 한 몸의 원리를 따름이니 곧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에 그 목적이 있다. 이는 다시 아들로 말하면 아버지와 둘이 하나를 이루어 계시는 데에서 출발함이니 왜냐면 아버지와 하나 되시지 않고는 죽으신 아들께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가령 한 분 하나님이시라면 [지금까지 사람들이 대개 생각해 온 대로 명칭만 아버지, 아들, 성령 등으로만 표현되실 뿐 한 개체로서만 존재하신다면] 절대로 우리 위해 죽으실 수가 없는 것이니, 한번 사람이 되시면 영원히 사람이시고 따라서 한번 죽으면 영원히 죽으셔야지 다시 살아나신다면 일종의 거짓이 됨으로써 죽으시지는 않고 죽으신 시늉만 하신 것이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둘이 하나되어 계심으로써 마치 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것처럼 나타나시는 까닭에 [그래서 "성령"으로 때로는 표현되심] 아버지께서 그렇게 아들을 살리신 것이다. 단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살리신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둘이 하나가 되어 계시기 때문에 살리실 수 있는 합리적 근거를 이루신 것이다. 단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살리신다면 아들 스스로 살아나시는 의미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왜냐면 우리 위해 일단 죽으셨으므로 그 죽으심이 '영원하고 확고'하기 위해서는 살아나시면 안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작은 자가 큰 자를 따른다는 원칙에서 큰 자로서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니 작은 자로서의 아들께서 아무리 죽으셨더라도 불가불 [아버지를] 따라서 살아나실 수밖에 없다는 그 이치다. 이 원리는 물론 우리에게도 통한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이지만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그래서 이 '한 몸' 되는 이치에서, 그리스도 친히 머리[큰 자]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작은 자 곧 그 몸이 되어 있는 나는 당연히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지고 함께 다시 살아남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현재의 나의 구원 받은 삶이 그 함께 살아난 결과요 따라서 이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무덤에 묻힌 것을 전제하는 것인즉 당연히 죄를 지을 수 없게 되어 있는 완벽한 장치요 구조다. 왜냐면 나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동시에 지금 현재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할[고후 5:15] 욕심을 부려 죄를 지을[약 1:15] 여지가 없어진 까닭이다. 오직 아담처럼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처럼 스스로 자유 선택에 의해 죄를 짓는 것만은 가능한 것이니 이 경우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전례와 같이 멸망밖에 없다.


단 여기서 유의할 점은 항상 주의를 주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일상 다반사로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지었을 경우 그것은 잘못된 교리[성경의 가르침이 아닌]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구원 받은 자로 착각하고 있었음이니[실제로는 구원되지 않았음에도], 이 때는 "나는 이제껏 알면서도 죄를 지었으니 어쩌나" 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성경대로 회개하여 믿고 성령을 받으면 이제 비로소 구원되는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왕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구원 얻은 자로 자처하여 회개하기커녕 성경 자체를 곡해하여 기존의 주장을 계속할 경우 하나님 앞에서 일반 불신자처럼 간주되는 것은 당연하다. 즉 버리심을 받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고의적인 범죄"의 경고는 오직 구원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요한의 지적처럼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요일 5:17]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형제 사랑이 그렇게 심각한 죄인 줄 모르고 소홀히 했을 때와 같은 경우다[1:6-2:1].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심은 한 영이 되심으로써 이를 가리켜 성령이시라 [성령이라는 "이름"(마 28:19)은 고유 명사는 아니고 경우에 따라 편의상 불러지심을 가리킴] 함과 같이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는 하나다. 교회는 그 몸이요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시다. 많은 '내'가 이루어져 '우리'가 되고 교회를 구성하고 있으니 당연히 나 역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런 몸과 머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아버지시니 곧 하나님이시다[고전 11:3]. 남자는 여자의 머리다[:3]. 이와 같이 위계 질서가 분명하니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둘이 하나를 이루심으로써 확립되어 있는 삼위일체의 원리 그대로다. 모든 사물은 큰 자와 작은 자로서의 대립 개념이지 대등 경우인 예가 없다. 대등일 때는 하나로서의 조화가 불가능이다. '파생시킨 자'와 '파생된 자'와의 관계가 그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다.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되는 "성령으로 출생"[요 3:5,6]함이요 새로 창조됨이요 따라서 구원 받음 곧 산 자 됨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시기로 하고 그렇게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 죽으시고 영계에 속한 몸 즉 신령한 몸으로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바로 그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 그대로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니, 나는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하나됨이다.


그래서 나는 죽었고 또한 다시 살아나니 새 생명 가운데 있고 새 사람이 되어 있다.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다. 고로 나는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다. 이런 현격한 변화이기 때문에 전의 나의 상태를 가리켜 "옛 사람"이라 하고 현재의 나라는 존재를 가리켜 "새 사람"이라 하는 것이니, 이는 명칭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즉 이전에는 '나 홀로'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나'라는 이중 구조다. 완전히 별개다.


따라서 아담을 처음 창조하실 때 죄 짓는 인간으로 만드시지 않은 것처럼 나의 새 창조에서도 마찬가지로서 죄 짓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신 것이다. 이는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만 창조됨과 같으니 말하자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나 홀로'였으나, 아담이 영혼이 새로 조성됨으로써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게 된 것과 같이 나도 성령을 받음으로써 영혼 없던 육체으로서의 내가 영혼을 완비하게 됨이다.


즉 영생을 잃어 버리고 더 다시는 신령한 몸이 아닌 현재의 나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영혼이 조성되기 이전의 아담의 '육체'로 간주하시고, 성령께서는 '그 영혼'이 되시어 내게 임하시는 그런 이치를 따름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라"[요 20:22] 하실 때 아담의 영혼을 만드실 때 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시던 형용을 그대로 취하시고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신 것이다[:22].


따라서 아담이 육체[자연계에 속한]만이 아닌 그렇게 영혼이 새로이 조성됨으로써 비로소 영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하고 영생하게 되는 완벽한 기틀이 잡혀짐과 같이 나 역시 이제 비로소 얼마든지 영생하는 토대가 완전히 구축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비록 그러했으나 범죄하여 다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몸으로 되돌아와 버린 상태를 스스로 만든 것처럼, 나 역시 고의적으로 범죄하게 되면 이전 구원 받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기에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다. 아담의 범죄의 선례(先例) 앞에서 어찌 아니 두려워하고 떨지 않으리요.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양성평등의 무리(無理)


삼위일체의 원리를 설명하다보니 다시 소위 "양성평등"을 논하게 되는데, 이 원리로부터 인위적(人爲的)으로 완전히 어긋나 있는 대표적 예이기 때문이다. 자연 그대로 따르면 될 것을 가지고 억지로 무리하게 논리를 내세워 만든 억지인 것이다. 온 세상이 지금 이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주제가 되기에 다시 언급하게 된다. 자연법칙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순순히 이 '삼위일체 원리의 대립 개념에 의한 조화의 순리(順理)'를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기계적인 작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가 부여되어 선이든 악이든 스스로 선택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인간이므로 이런 무리수도 둘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 즉 여자도 남자와 대등하다는 주장은 남자의 이기적인 일방적 횡포에 대한 당연한 반작용이다. 그동안 여자는 얼마나 일방적인 남자의 횡포에 시달려 왔던가. 여자들이 반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창 3:16] 되어 있다는 것은 저주의 결과다.


그러나 남자는 "다스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를 기화로 이기적으로 횡포와 강포(强暴)를 부린 것이다. 명백히 남자의 죄과다. 다스리는 것과 포악해지는 것은 별개다. 동일시될 수 없다. 남자에게 당연히 허물이 있다. 삼위일체 원리에서의 조화 일치를 무시하는 행위다. 그렇다고 여자까지 이 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도 않고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여자만이라도 이 원리를 지켜야 무슨 희망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옳지 않은가.


여자의 저주 받음은, 여자가 먼저 범죄하고[딤전 2:14] 남자에게 동참하기를 요구한 즉 자기와 함께 하여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 데에 있다. 이는 자기를 따르도록 하는 의미여서 좋은 일에 함께 하자는 것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나쁜 일에 동참하도록 유도하였으므로 남자[아담]는 단지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빨려[또는 딸려] 들어간 것이었으나 결말은 남자가 여자를 추종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원래는 남자가 여자의 본이 되어 여자를 인도하는 것이었는데[먼저 창조되었고 또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므로(고전 11:8) 이는 마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같다. 만일 하나님 친히 만드시지 않고 남자가 직접 여자를 파생시켰더라면 '자식'이 되지 '여자'가 되지 않는 그런 이치다] 머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따르기보다 같은 지체(肢體)로서의 여자를 더 사랑하여 그의 말을 따른 것이 되어 버렸으니 이는 곧 '생명의 질서' 파괴요 거역이다. 범죄인 것이다.


여자 또한 머리로서의 남자를 따르지 않고 남자는 머리로서의 하나님을[고전 11:3] 따르지 않으니, 이 무너진 질서를 억지로라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남자는 부득불 여자를 "다스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무리하게 억지로 하게 되는 일이 개입하게 되니 그 속성은 저주일 수밖에 없다. 즉 "남자가 여자를 다스린다"는 것은 저주의 결과다. 저주의 질서이니 질서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리가 아니고 부득불 하게 되어 있지 않은 정상적인 모습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머리와 몸'의 관계 그대로이니, 즉 "그리스도를 경외(敬畏, 공경하고 두려워함)함으로 피차 복종[to submit]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救主)시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아내들도 모든 일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 것이다.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1-25] 함과 같다.


다시 말해 인간 삶[사회생활]의 기본 또는 근본 도리, 그 법질서가 머리와 몸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가장 기본되는 최소 단위로서의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는 철저한 머리와 몸의 관계를 유지하라는 경고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상호간 피차간 복종하라는[엡 5:21] 것도 사랑 가운데에서 피차간 종 노릇을 하되[갈 5:13],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가운데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는 각자 모두가 그리스도[머리되시는]의 지시를 받아 자기와 한 몸을 이루어 지체가 된 이웃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이고 교회는 그 예행(豫行) 연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는 "말에나 일에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게" 되어 있다[골 3:17].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의 말씀과 역할을 대리하고 대행하듯이 함께 지체(肢體)된 이웃에게 봉사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피차간의 복종을 말하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이다.


아내는 남편과 한 몸이 되어 있어 아내의 머리가 남편이므로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하는 일은 없다. 오직 남편은 아내의 복종을 받는 대신 '자기 자신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니 이 곧 머리의 역할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말하면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함이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니 여기에는 아무 차이도 차별도 없다. 단지 표현만을 그렇게 "절대 복종하고[아내는 남편에게]" "자기 자신을 바쳐 사랑함[남편은 아내를 위해]"으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의 성격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중심한다.


그러므로 남자[남편]가 여자[아내]를 "다스리는" 것을 저주라고 했듯이, 아내가 남편을 넘보고 남편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여 오히려 남편이 자기를 따르기를 바랐으므로[에덴낙원에서 남자와 먼저 의논할 생각도 없이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난 다음 남자에게 권함으로써 자기를 따를 것을 요구했으니], 이렇게 무너져 버린 원래의 질서 유지[이로써도 여자의 범죄는 가중되었다]를 위해 그렇게 강제로라도 여자를 다스리도록 하심이었으므로 저주의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강제이기 때문에 저주다.


그래서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도 부정(不淨)하지만, 모세 율법에서 여아가 태어나면 남아보다 배나 부정한 것이었다. 여자는 7일 1주의 갑절이 되는 14주간 부정하다 했던 것이다. 아무리 아담이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어 있지만 인간이 태어나는 것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실 리 없다. 그러나 부정하다 한 것은, 원래 아담을 지으심을 따른 신령한 몸에 의한 생식 방법이 아닌, 처음부터 의도하시지 않았던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의 즉 짐승들과 같은 양식대로의 생식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음이다.


이런 저주가 아니더라도, 여자는 의당히 작은 자로서 큰 자인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자식이 자기를 낳은 어버이에게 순종하듯이 왜냐면 여자가 남자로부터 낳아진 것과 같은 것이므로], 또한 당연히 남자는 여자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듯이 사랑해야 하는데도 일방적으로 자기중심에서 아내만을 닦달하려 하니 횡포가 되고 여자의 반발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여자의 반발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니 갑이 죽는다고 을도 죽을 필요는 없듯이 갑이 죄 짓고 악행한다고 을도 덩달아 죄 짓고 악을 행함으로써 똑같이 죽음의 대가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의 악에 대한 여자의 반발이 그런 식으로 즉 양성평등으로 나올 때는 남자와 똑같이 여자도 악함이 되고 둘 다 공멸(共滅)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도 그 정당성을 찾지 못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양성 대등"이 아니라 "머리"와 "몸" 관계로 설명되는 "한 몸"으로서의 "양성 조화"가 답이다(고전 11:3).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하게[좋게, 제격에 맞게, 아무 불평, 불만이 없도록] 만드셨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를 충분히 보장해 주셨더니 그 자유로써 선한 것을 따르지 않고 그 반대가 되는 쪽을 택하는 일부 피조물들이 생긴 것이다. 순수하게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래서 악한[좋지 않은, 즉 오늘날의 환경 파괴와 같고 사람 삶의 법질서를 위반하는 것과 같은] 것이 존재하게 되고 악령과 거룩한 천사들의 구분이 생기며. 의인과 악인으로 인간 역시 결국 분류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영생하는 피조물들이었으나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그와 같은 '생명'과 '죽음'의 구별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 구원은 처음부터 악을 좋아하는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악한 영물들이 장차 영원히 격리될 것과 같은 것이다. 부득불 죄를 지었고 원치는 않으나 지금까지의 불가항력의 환경과 여건을 못이겨[롬 7:24] 죄를 짓고 악인이 되어 있던 자에게만 주는 자유 해방이[8:2]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니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아담이 죽지 않으면 간단히 해결되었을 일이다.악령 역시 범죄는 했어도 장차 멸망하지 않아야 형평에 맞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는 더 생각하시고 어느 누구는 덜 여기시는 그런 불공평한 일은 아니하신다. 영물이나 악인이나 똑같은 형벌의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보아도 똑같이 취급하신다. 영물(靈物)들이라고 더 가혹하게 다루시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모든 피조물은 평등한 것이다.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이요 영원 멸망이다. 다시 말해 앞서의 설명처럼 의를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할 만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런 죽음과 고난의 불행을 당하고 있는 것인즉 죄를 짓지 않아야 즉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야 들어가는 천국이요 누리게 되는 영생이라는 실상은 영원히 확고부동하다. 따라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만 아니라 '죄'로부터의 단절 다시 말해 죄를 다시는 짓지 않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요 선결 요건인 것이다.


선결 조건이라 함은 구원 받기 전에 그런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실상 구원되지 않으면 의와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반드시 의와 선을 행할 것을 하나님 앞에 약속한다는 뜻이다. 즉 회개가 선행(先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이며 따라서 이에 역행하는 죄가 무엇이냐, 앞에서 지적한 대로 머리는 몸만을 위하며 자기를 위하지 않고 몸도 머리만을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되어 있는 한 몸 체제로 사는 삶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의, 선이요 그 반대되는 것이 죄다.


상대[머리는 그 몸, 몸은 그 머리]를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죄요 악이고 불의요 불법이다. 그런즉 나 위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사랑을 알고"[요일 3:16]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자"[고후 5:15] 작정하여 회개하는 순간, 이미 나는 하나님 앞에서 과거 죄도 용서 받은 터라[행 2:38] 의인이고 선인이 되어 있는 생애의 첫 출발점에 위치해 있으니 이런 나를 누가 죄인이라 하고 의인이 아니라 하리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는 것 즉 복종이 구원의 선결 요건이라 함은 자기 행위로 구원 얻고자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 혼동하지 말 것이다. 성경이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 한 것은[다시 말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첫째 ①'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둘째로는 ②'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심'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14] 의미하기 때문이니 죽은 자는 자기가 없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어찌 또 자기를 위해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 그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제는 무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의 첫째 의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이라는 것은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임하여 오시어 나와 둘이 하나되어 계시심을 의미한다.


부활 후 그냥 하늘에 앉아 계심이 아니다. 육체로는 그렇게 계시나 영[성령]으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줄곧 지금까지 세상에서 활동하시고 믿는 각자 안에 그 삶의 중심이 되시어 계심이다. '그리스도'와 '나' 이렇게 둘이 하나됨은 앞서의 설명대로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을 말함이니 이 관계에서 머리는 오직 몸을 위하고 몸은 오직 머리를 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15].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나만을 위하신다[당신 자신을 위하심이 없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나 위해 죽으심의 두번째 중대한 의미다.


이와 같이 내가 죄를 다시는 짓지 않는 이 구원의 선결 조건이 내 스스로 어떤 선행을 하고 의를 행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즉 회개를 함으로써 거저 주시고 은혜로서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고로 나는 단지 회개함으로써[행 2:38] 다시는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결심과 약속을 하게 되는데 따라서 향후 이 약속을 스스로 이행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면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능력을 받은 것이니[행 1:8]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께서 바로 그 능력이신 것이다. 고로 내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나 자신을 위해 살아 온 것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다. 즉 성령으로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오심으로써 그 죽음과 부활이 내 것이 되어 있는 사실과 그리스도 친히 그렇게 전적으로 나를 위하신다는 것을 믿음이다. 그래서 세례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되고 연하여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런즉 우리의 구원은 흔히 말하는 '귀소성(歸巢性)'[또는 심층심리학에서 말하는 바 인생의 "과거에의 회귀 본능"]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나의 의지'의 합작품인 것이다. 은혜의 능력이 없으면 회귀 본능이 작동될 수 없고 나의 의지가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가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모든 '행복의 원천'으로서의 과거 즉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복귀함이다.


그 행복의 원형이 다름아닌 '엄마 품속의 아기'이다. 그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창조주의 "품속"["in the bosom"]이다. 천지 만물과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도 아버지께서 낳으신 아들[the only begotten Son]이시라고 하여 "아버지 품속에 계시는"[요 1:18] 것으로 표현하였을진대 하물며 우리 인생들이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품속을 떠났는데 이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미신


불교는 한 술 더 떠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신이라는 개념은 자연법칙을 초월해 있는 상태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벗어나 있어 거기 구애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신(神)이다. 자연법칙대로 하면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고 그 존재는 종결되는데도 여전히 지금과 같은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니 그것은 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신의 경지에 들어가 영생할 수 있게 되는 방법이 "스스로 깨달음"에 있다는 것이므로, 원천적으로 자기 자신을 기반으로 하고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한마디로 "지혜가 없다"[고후 10:12].


스스로 깨달아 자기 욕심을 제어함으로써[혹은 욕구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동물적 본능이 관장하는 것뿐인 자연계의 자연법칙에 따르는 삶의 영역을 성령의 능력으로 벗어남으로써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스스로 미워하고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를 따르는 것을 스스로 좋아하여 이기주의적으로 나가지 않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인 것이다.


모든 육체는 썩음으로 돌아가 다시는 이런 육체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최소한의 자연 과학적 지식이나 법칙을 부정하고, 무턱대고 영생하리라는 미신에 젖어 있다. 자연계에 속하면 절대로 자연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과학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법칙 또는 원리로 작용할 수가 없다. 변경될 수 있는 것을 누가 법칙이라 하던가. 오늘날과 같은 과학 시대에 여전히 이런 망상 속에 젖어 있는 것 자체가 신비라고 했거니와 이 신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하에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임을 이미 설명하였다. 미신은 과학적[자연법칙에 기초한] 사실을 토대로 하지 않는 일체의 것을 말한다.


과학적으로 말하려면 만사 만상 만물은 양면성으로 되어 있어 자연계가 있으면 그와 상칭되는 영계가 있어 자연계에 속한 생물이 다르고 영계에 속한 영물이 따로 있다고 해야 모든 과학적 법칙과 원리의 기본이 되는 삼위일체 법칙에 부합한 것이다. 신[혹은 영]은 자연계가 아닌 영계에 속한 생물[피조물]이다. 영역이 다르다. 음양론[이원론]은 접어두고라도 최소한 보어가 주장하는 논리쯤은 염두에 두어야 과학적 사고방식이라 할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인간이 어째서 영계에 속한 신[영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영계에 속한 신은 능력이 있으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자기를 변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계는 하급 세계인지라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 이런 양면성의 원리를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새로 창조되어야 자연계에 속한 우리 육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하여 비로소 신격화되고 영생이 가능한 것이다.


이 새 창조는 아무리 조물주 하나님이라도 떡 주무르듯이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설명한 대로의 철저한 원리원칙에 따라 친히 인간으로서의 모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기까지 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는 그런 엄청난 대가(代價)의 산물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런 "다시 출생함"으로 "새로 창조되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악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그런 어쭙잖은 여러 가지 거짓말을 만들어 하나님은 없다 하고 그런 것을 믿도록 인생들을 속인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없었고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다는 속임수는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이 결정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 이런 것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물을 들여다 보는 이들에게는 허황된 변설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임이 너무나 분명해지는 것이다. 새 창조 외에는 결코 대안이 없다는 사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적나라하게 드러나진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지금까지 설명해온 바와 같다.


그래서 악마 스스로 그런 그리스도 대용(代用)이 되는 적(敵) 그리스도를 일찌감치 내세우려 하였으나 자기 때에 이르러 그런 짓을 하도록 지금까지 막아 왔었다[살후 2:7]. 이제는 그 '자기 때'가 왔으므로 이제까지의 속임수와 거짓말을 다시 다른 거짓말로 방향 전환시켜 무신론을 걷어치우고 유신론을 다시 꺼내면서 자기 자신 그런 창조주로 가장함으로써 대규모로 인류를 속이려는 마지막 획책 아래 지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오늘날의 소위 "UFO"가 그런 소동의 일환이다.


삼위일체 원리가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하나님을 낳으심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설명하였거니와, 아버지와 아들께서 유일하게 분리되어 계시던 한 때가 있었으니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 위하여 아들을 "내어주심"[롬 8:32]으로 아들 친히 우리 위해 죽으시고자 사람이 되시던 때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나 홀로 사람이 되셨고 30세쯤 되어 세상에 나타나시기까지 그렇게 계셨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물론 변함이 없으셨으니, 오직 '아버지와의 하나'로 계시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12세 되시던 때 예루살렘으로부터의 귀향 길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와 이전처럼 동행하시지 않고 성전에 홀로 남아 율법학자들과 담론하시고 있는 것을 뒤늦게 찾아 발견한 마리아가 책망조로, "아들아[얘야], 네가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우리가 얼마나 너를 찾으려고 헤맸는지 아느냐?" 하는데 대한 대답으로, "왜 나를 찾으셨는지요?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혹은, 아버지의 일에 관여해야] 할 줄을 모르시나요?" 하셨던 것과 같다.


다른 사실은 일절 기록이[소개가] 되어 있지 않는데도 왜 이런 사실만은 유독 성경에 알려져 있느냐 하면, 인간으로 치면[우리 모두는 인간일 뿐이지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이는 보통 불효가 아닌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를 근심하게 하셨고 그렇게 애타게 찾도록 만드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심으로써 육신으로서의 부모[마리아] 자식 관계를 일정 부정하시는 발언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사람이 되셨지만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으로서의 어버이되신 분께 효를 행하심이다. 즉 비록 우리 위하여 사람이 되셨지만 사람만이 아니시고 동시에 변함 없이 하나님이신 이 양면성을 이 때 나타내신 까닭에 이 사실만은 성경에 드러내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30세쯤 되시어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경우 "성령"은 아버지의 영]을 받으셨는데 이 때로부터 이전처럼 아버지와의 하나 관계를 회복하신 것이다.


"회복"이라 함은 이 모든 하신 일들이 우리 인간의 대표로서 하신 일이기에 쓰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우리 역시 성령[이 경우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또는 아버지의 영, 즉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성령-롬 8:9-11]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 분리된 홀로 있는 즉 ‘죽은 자[생명이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므로]’였으나, 성령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산 자’가 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시작[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기 시작하심과 같이]함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대표[표본]로서의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심 그리고 성령 받으심이다. 즉 이 때 이렇게 세례 받으심은, 그 죽으심과 장사 지내지심이 우리 각자의 죽음이요 우리 자신의 장례(葬禮)를 치름이 되는 것이어서 우리 역시 그와 한 모습으로 세례를 받게 됨으로써 구원이 되는 까닭에 바로 이를 구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자 요한이 "제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째서 당신께서 제게로 오십니까?" 하니 대답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하셨다[마 3:13-15].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올바르게 모든 일을 수행해 나가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시면[그리스도 친히 우리 각자의 영생으로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여 오시어 영원히 계시면] 우리가 구원 받아 영생하는 줄로 단순하게 알았던데 반해,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영생하게 되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나타내심이었으므로 이렇게 세례 받으심은 필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니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하면 되는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인하여 우리 스스로 죽은[또한 장례를 치른] 자가 되어 있음으로써 그렇게 죽은 자답게 그래서 이로써 다시 살아나 다시 출생한 자답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새 생명을 삶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짐을 명확하게 밝히신 것이다.


영생을 받는 것과 영생을 살아간다는 것과의 차이다. 영생을 무슨 일정한 규격으로 된 물건처럼 받음으로써 영생한다면 그것은 피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것과는 완연하게 다른 것이다. 자유 의지를 십분 발휘하며 구사하면서 주인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위해 사는"[고후 5:15] 우리 [각자] 편에서의 적극성이 필요하고, 이런 능동성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다시 살아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했다는 사실을 내 스스로 실생활에 적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즉 죄를 지었던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겠다는 나의 적극적인 자세가 필수인 것이다. 바로 이 뜻으로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심과 같이 [그 본을 따라] 우리 각자도 세례를 받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으로 끝나고 우리는 단지 영생을 받기만 하면 되고 우리 스스로 죄를 짓고 않고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고 그래서 우리 구원에 절대 요건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삶의 대표가 되신다는[우리가 어떻게 새 생명을 살아야 하고 어떤 정신으로 임해야 하는 등] 데에 의미가 있어 모든 일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직 아버지를 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차원에서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음으로써[롬 15:3]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고후 5:15]. 이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결과이고 이렇게 "믿음으로 따라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이니[:23],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 곧 이와 같이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여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자기 부인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15:1,2].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 되어 계신다는 사실로써 이 삼위일체의 원리 다시 말해 양면성의 원리를 성경은 설명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제적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세상이 이제까지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간과하고 있었을 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니, 곧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사실이다. 그 신령한 몸이 어떠하다는 것을 자세히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다.


문을 철통 같이 닫아 안으로 잠근 상태라도 거침없이 무사통과로 드나드신 것이고 불현듯 나타나셨는가 하면 또한 갑자기 사라져 종적을 감추기도 하셨다. 그냥 허공에 몸이 붕 떠 있는 채 하늘 높이 오르시어 제자들을 떠나셨고 또한 그렇게 가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승천하시면서 구름에 가려 결국 보이지 아니하셨다. 명백히 고난 받으시기 이전에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요 부활하신 후에는 자연계와 대칭을 이루는 영계에 속한 신령한 육체이셨음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도 워낙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셨으므로 그런 일에 면역이 되어 버렸는지 몰라도, 이와 같이 명백하게 실제로 증명해 주셨음에도 이 중요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자연계와 영계의 양면성, 자연계의 동물과 에덴낙원의 동물들[다시 말해 영물(靈物)들]과의 양면성, 영혼과 육체로서의 인간의 이중(二重) 구조에 따른 양면성이 엄연히 실존함을 입증하신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이중 구조에 의해, 자연계의 육체로도 변환될 수 있고 영계의 몸으로도 변환될 수 있는 자유자재함을 갖춘 것이 에덴낙원에서의 아담의 육체였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신 까닭에 바로 그런 육체로 환원하신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심이었다.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지만 역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도 변환될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고 구운 생선을 드리니 그것을 잡수심으로써 이를 입증하셨다[눅 24:41,42].


"네피림[nephilim]"


신령한 몸이 바로 이런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악령들은 인간의 몸으로도 변신하여 즉 스스로를 변환시켜 인간 여자들과 관계하여 자식들을 낳기도 하였으니 이들이 '네피림"이다[창 6:4]. 지금은 그런 짓거리는 더 이상 못하고 오직 그 씨[seed, 후손]들이 그와 비슷한 짓[범법 행위]을 함으로써 소위 윤회, 환생, 전생(前生) 따위의 말을 만들어내어 인생들을 현혹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고 인간 중에 나타날 때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런 현상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일시적 변환[또는 변형]이니 즉 얼마든지 자신의 영적인 몸을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 스스로 바꿀 수 있음을 드러내는 예에 불과하다. 그렇게 변환시킨 다음에는 다시 원 상태 즉 신령한 몸으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4] 할 때의 이 "아들"의 의미는 "하나님 친히 만드신"이란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 獨子, 외아들, the Only begotten Son)"시라 하여 하나님이신 아드님은 단 한 분이시니 이 경우와 구별됨을 성경은 명시한다.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친히 만드신 작품이다. 이들 영물(靈物)들은 사람[아담]을 위해 창조되어 사람을 돕도록 되어 있는 까닭에 처음부터 지, 정, 의가 있는 인격을 가진 피조물들이며, 영계에 속하므로 능력이 있어[벧후 2:11] 그렇게 스스로를 변환시키는 일을 할 수 있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이 그런 변환을 통해 "네피림"을 만드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이런 영물들["거룩한 천사들"을 포함해서]은, 만물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과는 차원부터 다른 '피조물로서의 영'으로서[히 1:14], 물론 한정적인 육체(영적인 신령한 몸)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반은 영(하나님과 같은 속성의 영은 아님을 언제나 명심할 필요가 있다)이고 반은 육체라 할까.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니,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 우리 인간과는 다르다. 그래서 영물들은 영혼이라는 것이 없고 우리 인간만이 영혼과 육체로 분리되어 있는 이중 체제다.


우리가 현재로는 영계나 영적 존재에 대한 지식이 없는 터에 무어라 말할 수 있는 처지는 못되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말할 수밖에 없으나 현재로는 이로써도 충분하다. 그들 영물들과 사람의 딸들의 육체가 결합하면 거기서 파생되는 인간들은 그런 생물[영물]들의 속성을 물려받는 영혼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은 죽으면 사람들의 영(구원을 받았든 아니 받았든)이 가는 곳에는 가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신 대로 "물없는 곳을 피해 돌아다니는" 것이니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의 "더러운 영" 곧 귀신들의 정체다.


조상 숭배라고 하여 오늘날 미개한 아프리까 등지의 토착민들이 전통적으로 행하는 소위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우리나라는 유교의 관습에 젖어 아직도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무슨 미덕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조상의 넋으로 믿는 미신 때문이다. 조상들의 넋이 아니라 네피림의 죽은 영혼 즉 귀신의 장난임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전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죽은 넋 불러 올리기[우리나라에서는 각종 무속 행위를 하는 무당과 같은 일종]를 자행하고 있는데 이런 짓거리들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던 사울 왕이 신접(神接, 무당) 여인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는데 무당의 눈에 "신들['엘로힘', gods]이 올라오는 것"을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삼상 28:5-25]. 사무엘의 혼백이라면 당연히 단수이지 복수일 리가 없다. 복수라고 한 것은 사무엘의 영혼이 아닌 귀신들의 장난 곧 짓거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귀신들은 어쨌든 죽은 사람의 형용이나 말투나 평소 나타내던 일체의 것을 모방하여 나타내는 능력이 있어 이 기록에서도 성경은 이 귀신들을 그냥 "사무엘"이라고 받아 주고 있을 정도다.


네피림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악령들의 후손이므로 지상을 배회하는 까닭에 그런 짓도 하고 있으나, 아담의 후손들로서의 인간 영혼은 죽은 후에는 일정한 장소로 나누어 수용되고 서로의 내왕도 불가능한 사실을 그리스도께서는 밝히셨다[눅 16:19-31]. 서로의 내왕도 되지 않는데 하물며 지상의 인간들과는 더더욱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거지 나사로를 내 형제에게 보내어 알려 주게 해 달라"는 소청을 한 것은, 나사로의 영혼이 가서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답변대로 하면 육체로 다시 살아나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보면 영혼으로서 인간들과의 접촉이 불가능함을 확언함이다[:31].


물론 네피림 종(種)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은 실제 그 넋이 나타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 네피림인지 아닌지 식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시지 않았다. 그리 되면 불필요한 혼돈을 야기시킬 것이므로 그런 네피림이 실재한다는 사실만 알도록 하셨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일에 일체 구애되거나 괘념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활동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구원 얻지 목하게 함에 있지 인간들을 자기 발 아래 두어 지배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네피림이 처음 생성되었을 때 그들은 성경의 표현대로 거인(巨人, giants)이었다. 어느 정도 거인이었는지는 요즘 동영상에 나타난 그들의 유골을 보면 실로 엄청나다. 그들의 아비가 악령들이었으므로 그런 현상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사람으로 태어나 죽어 귀신이 된 다음에 다시 인간의 태에 들어오는 "환생"이 될 때는 이미 사람[네피림 종(種)이기는 하나]으로서의 넋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므로 그런 신체적 특성이 소멸되어 있을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외형으로는 제1대 네피림 외에는 우리가 도저히 식별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아담을 죽음에 빠뜨린 것도 바로 이 목적 때문이다. 물론 인간에 대한 시기심도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범죄함으로써 영원 멸망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나름대로의 계산에 맞추어 말하자면 인간을 볼모처럼 잡아두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인간 중에 구원 얻는 자들의 수효가[계 6:11] 일정량에 미치지 못하면 이 세상은 무한정으로 지속될 수 있게 되고 그리 되면 결국 자기에게도 모종의 대책이 있으리라는 꿍꿍이 속에 저지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아래 움직이는 귀신들이므로 아담의 후손이든 네피림의 후손이든 막론하고 일괄적으로 죽은 조상의 넋 행세를 함으로써 인생들을 속이는 일을 아니할 리가 없다. 그래서 그런 "넋"으로 자칭하는 귀신들로 하여금 "사후(死後)의 세계에 갔다 왔다"든지 하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어 모쪼록 인생들로 하여금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 숭배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지 실제는 귀신들을 섬기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무릇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가 주님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님의 상(床, 식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님보다 강한 자냐"[고전 10:20-22] 함과 같다. 그러니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된다는 것은 일면으로는 사실인 것은 그런 "네피림"이라는 별도의 인간 종자(種子) 역시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되어 생겨난 존재들로서 아담의 후손들로서의 인간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같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구원 받을 수 없음을 명백히 하셨다. 왜냐면 인간[아담의 씨]에게 구원이 베풀어지는 것인데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령들의 후신(後身)으로서 사람의 형상만을 입었을 따름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한다"[요 3:5]는 말씀이 그 뜻이다.


자연계와 영계의 대립 개념을 "물"과 "불"로 대칭시키는 말씀이시다.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영광을 표현하여 "불꽃 가운데 임하신다"[살후 1:7] 함도 그 뜻이다. 성경 중에 그런 표현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불 병거[수레], 불 말" 등도 역시 이에 속한다. 이 "물"을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 지구 표면의 70프로가 물이요 인체의 7할이 역시 물로 되어 있음을 감안해도 자연계는 물로 상징된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네피림의 죽은 영혼들인 귀신이 어떤 경우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환생하는지는 알 수도 없거니와 알 필요도 없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단순히 원한다고 해서 어느 귀신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앞서 설명한 대로 지정된 여자의 태(胎)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잉태하게 되는 달 수를 제대로 채워 인간 세상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네피림에게는 실질적인 아버지가 없게 마련이다. 오직 그 어머니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니 왜냐면 자신에게 인간 육체를 입혀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어머니 역시 자기의 실질적인 어머니라고 할 수 없으니 억지로 이름 붙이자면 "환생 어머니"일 뿐이다. 환생도 단 한 차례만 하게 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차례도 가능한지 그것도 우리가 알 바 아니다. 환생이 자주 있다면 "제1 환생 어머니", "제2 환생 어머니" 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그 어머니는 악령이 처음 네피림을 생성시킬 수 있었던 시절의 그 때 당시 "사람의 딸"들 중 하나이다. 물론 그 아비는 악령들 중 하나다. 그러므로 애초의 아비와 어미로서의 이들 외에는 실질적인 아비, 어미는 없는 셈이다. 이 네피림은 그 후로도 귀신들로서 줄곧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단지 거듭해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변화만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도 인간 모두가 이런 환생, 윤회, 전생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렇게 환생한 네피림 족(族) 인간이 자녀를 생산했을 때 그 유전적 분포는 어떻게 될까. 즉 그 낳은 자녀들이 모두가 네피림의 속성일까, 아니면 반반 또는 일정 비율로 혼합되어 나타날 것인가. 이런 것은 아예 우리가 현재는 알도록 되어 있지 않다. 만일 그런 것을 알게 된다면 백해무익일 뿐 불필요한 일대 혼란만 야기될 것이다.


그런 네피림에게도 일단 인간으로 태어난 만큼 자유 의지가 있을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만 아니라 모든 영적 피조물에만 한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다. 네피림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자유 의지는 없다. 그런 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애초 자유 의지가 보장되어 있던 영물이 그 스스로 악한 길을 택함으로써 영원한 멸망에 처해져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며 그런 상태에서 그런 "네피림"이라는 불미스러운 짓거리를 자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런 악령들의 분신들이므로 악령들의 속성일 수밖에 없다. 아담이 애초에는 창조 당시의 완전히 살아 있는 영생하는 존재였으나 그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면서부터는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인생들이 모두가 죽은 자로서 태어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아담의 경우 육체로서 그러하고 네피림의 경우 영으로 그러하니, 인생들은 구원 받을 기회가 있으나 악령들이나 네피림은 전혀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중심 일변도 즉 죄와 악 일색으로 나가게 되어 있는 그들의 특징이다.


그러면 양심은 있을까. 양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양심이 결코 영생을 얻는 쪽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분명 멸망 길에 접어들었지만 그 양심의 가책에 못이겨 자살하기까지 한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논의의 주제를 넘어선 것이다. 즉 가부간에 논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


그리스도께서도 그 영혼은 성령 곧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시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원히 사람의 육체와 불가분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이신 것이다. 사람이 되신 것은 천사가 일시적으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인간 중에 나타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인간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고[악령들이 네피림을 생산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 일정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다시 원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사람이 되신 것이니 인간 여자의 태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네피림"이라는 인간 종자도 그 영은 악령의 분신(分身)이나 인간의 태를 통해 육체를 입고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영원히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악령의 속성으로서의 영이다. 불법적으로 생겨난 것인데 그들이 구원될 이유는 없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그러면 과연 그런 생물체가 생겨날 수 있는가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창조와는 다르다. 창조는 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형상을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성되는 것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났으니 하나님 친히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런 "네피림"의 경우 하나님의 뜻은 아닌데도 인간의 형상이 생겨난 것이니, 기존의 피조물이 이미 창조되어 존재하고 있는 기정(旣定) 순서와 과정을 따라 거기 맞추어 이루어진 것으로서, 이는 물론 저절로 나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도 아니고 불복종하는 악한 영물들의 소행이기는 하나, 오늘날 이 세상에서 모든 범죄가 일시 허용되는 것과 같이 그런 불법행위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인간 세상을 관장하는 이상, 이에 부합되게 용납이 되는 것뿐이다.


용납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니 마지막 심판 때가 이르기 전에도 그 당연한 보응은 받게 되어, 이 네피림을 생산한 악령들은 그 짓거리로 인해 마지막 심판 때까지 무저갱(無低坑, bottomless pit} 에 구류되어 있는 상태다[유 1:6,7].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그런 짓을 하였고 그 씨[seed, 후손]가 있으나[창 3:15], 이 세상 지배자로서의 활동이 중요하므로 그 아비 대신 그 씨가 무저갱에 갇혀 있는 그런 형국이 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이제 곧 멀지 않은 장래[2013년 현재를 기준하여] 세상에 "구세주"[적(敵) 그리스도]로 자칭하며 나타나게 될 "악한 자"[살후 2:3-12]가 바로 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씨'로서, 성경은 그래서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계 11:7]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적 그리스도는 자기가 "하나님[창조신]"이라는 것을 증명한답시고 이를 대대적으로 과시해 보이기 위해 각종 기적으로[살후 2:9] 소란을 피울 것이 예상된다.


'네피림'이 생기는 것은 이상 설명과 같이 창조의 영역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모방일 뿐이다. 오늘날 소위 "인간 복제"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는 것도 그런 이치다. 실상 이론으로만 아니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영혼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오는 것이어서 영혼 조성은 불가능하므로, 인간 복제를 하더라도 형상은 사람이지만 사람은 아니니 영혼이 없는 것을 우리가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음이다. 아무 이성적(理性的) 작용도 없이 "마치 짐승처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네피림'은 영혼이 있으니, 왜냐면 악령들은 그 신령한[spiritual, celestial] 몸과 영혼이 일체인지라 사람처럼 그 둘[영혼과 육체]이 나누어져 있는 이중 구조가 아니고 단일 구조로서 우리 인간을 기준하면 '영혼의 형상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악령들로부터 물려받는 인간 구성의 인자(因子)가 곧바로 그 영혼[육체는 인간의 것이나]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가 된다.


이로써도,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그 구성 인자의 배합도(配合圖)를 그려볼 수 있다. 즉 육체의 것을 물려받는 인자(因子)는 모친으로 말미암고, 정작 한 인간으로서의 핵심 요소인 영과 관련된 인자를 물려받는 것은 부친으로부터인 것이다. 여자가 남자[아담]로부터 나왔으니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는 것이기는 하나, 아담이 남자와 여자의 육체로 나누어짐을 따라[창 2:21-25] 그렇게 역할 분담이 된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는다고 해서 그 영혼을 물려받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영 자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나[히 12:9/사 57;16/슥 12:1], 그렇게 내가 태어남으로써 나의 영혼이 내 육체와 결합될 수 있는 그 기본 바탕 또는 틀이 부친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뜻이다. 네피림의 경우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우리와는 달리 그 기본 바탕이 바로 악령의 신령한 육체[우리로 말하면 영혼의 형상화]인즉 우리로 치면 영혼에 해당되고 이러한 조건에 아무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아담의 씨]의 모친으로부터는 인간의 육체를 물려받고 악령[아비 역할]으로부터는 영혼을 물려받음이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의 경우 아담의 영혼은 물려받지 못하니, 아담으로부터는 육체만 물려받아 모친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아담이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던 그 근본[핵심] 바탕만은 부친으로부터 받음으로써 나의 영혼이 안착하게 되고 육체와 결합하게 된다.


이로써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사실 역시 설명이 된다. 사람으로서의 육체는 마리아로부터 "물려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 계시던 바로 그 모습 [원래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니까]그대로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 외에는 아무 것도 "물려받으심"이 없고 스스로 그 육체의 영혼이 되어 계시는 것뿐이다. 마리아의 육체를 물려받으시기 위해서는 마리아의 태를 통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시니 이제는 영원히 사람이시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 모습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고로 네피림의 경우 그 영혼은 악령의 후신(後身) 또는 분신일 뿐이다. 본질상 사람의 영은 아니다. 따라서 복제 인간은 살아 움직이기는 하고 개나 원숭이 또는 돌고래 정도의 지능은 나타내는 것이나 영혼은 없으니 여기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영혼이 없으니 물론 일반 동물들처럼 죽어 그 육체가 썩으면 그로써 끝이고 영원한 불 못의 대상은 되지 않는 것이 복제 인간[만일 그것이 생성될 경우]이다. 당연히 선과 악을 행함에 대한 자주적인 주체성도 없다. 그러나 "네피림"은 그들의 아비들인 악령들과 함께 영원한 불 못의 대상이다. 즉 영적 존재 혹은 영물에 속하므로 영원한 형벌의 대상이 된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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