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24.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
삼환(三環) 법칙
23. 여기서는 기업주와 노동자 관계보다 더 근원적인 부자와 빈자(貧者) 관계를 말하고자 한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인데 돈이 돌지 않고 부자에게만 쌓이고 빈자는 그 반비례로 갈수록 돈의 고갈을 당하는 사회 부조리를 타개하는 것이 삼환(三環) 법칙이다. ‘삼환’이라 함은 갑, 을, 병의 '삼위일체 원리'에서 부자를 '갑'의 위치에 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을'의 위치에 둘 때 의인(義人)이 '병'에 위치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 '병'의 위치에 서는 의인은 ‘성경적 윤리관’에
입각하여 기업을 경영하는 기업인이다. 이른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인 것이다. 성경 윤리라고 해서 별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는 있어도 실천하기를
주저해 온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에서
사리사욕만 일삼지 않으면 되는 것. 다시 말해 자기가 소유한
일체의 것이 자기의 사유(私有)가 아닌 공공(公共)의 소유가
되어 자기는 오직 그 청지기 역할로 남에게 베푸는 일에만
주력하는 것으로 일관할 때 바로 그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의인으로서 '병'의 위치에 선다(행 4:32). 곧 성경에서 가르치는
자기 부인의 삶이 기업 경영에 적용되는 예다.
이 세상이 이왕 이상향이 되지 못할 바에야 그래서 악인은 여전히 악할 것이고 보면 그리고 머리(대하 13:12/골 2:19/1:18/엡 1:22/4:15,16/5:23/계 1:5/고전 11:3)로서의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배척당하시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세상 인간이 한 몸으로서 한 형제처럼 살기는 불가능하기에, 또 이왕 존재하게 되는 악인이니 그 악인의 쌓여져만 가는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정상대로 흘러가도록 물꼬를 틔어 주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싶을 때, 바로 이 3환 원리를 따르면 최상, 최선의 방책이 된다.
이런 장치는 억지로 만들어 규제함으로써 될 일은 아니고 이런 성경적 윤리 의식이 있는 의인(義人)이 기업 경영을 하면서 "삼환(三環, tripod circulation)"이 되도록 함에서 이루어진다. 즉 악인(갑)의 돈은 의인(병)에게 흘러가게 하고 의인(병)에게 모이는 돈은 다시 ‘없는 자’(을)들에게 흘러 들고 을에게 모인 돈은 "돈이 돈을 번다"는 시장 경제의 원리를 따라 다시 갑에게 흘러가지만 결국 다시 병에게 모이게 됨으로써 병은 다시 을에게 내어 보내는 것이 되므로 ‘자연 순환’이 되어 항구적인 3환 고리를 만들게 된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병(의인)에게 모인 돈이 을에게 흘러가는 것은 병이 을에게 베풀면 된다지만, 갑의 돈이 어째서 병에게 흘러가느냐 하는 것인데,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역사(役事)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까지 병이라는 존재가 없어서 하나님의 그와 같은 역사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지, 누구든 병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리고 그 위치가 진정 신뢰할 만한 자리라면(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은 갑에게서 병으로 흘러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핵심을 이룬다.
모든 권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옴과 같이(롬 13:1,7) 그래서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사자(使者)"(:4)가 되어 있듯이 역시 이런 공의로운 일을 이룸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의 사자(천사)들이 동원될 것은 불문가지이고, 썩 달가워하지는 않으나 사탄을 위시한 악령들 역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그들 역시 천사들과는 색다른 면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이기 때문이다(욥 1:7/2:3). 일부 성경에 무식한 이들은 멋대로 해석하여 사탄이 하나님의 대적자라고 하지만 이런 종류의 해석은 사탄에게서 난 것이고 악마가 대적자가 되어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해서다.
처음부터 인간과의 전쟁이 선포되어 있었던 것이다(창 3:15). 하나님께 원수가 되고 대적자가 되는 것은 모든 자아중심이 바로 그러하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 곧 자아중심은 하나님과 원수된다 한 것(롬 8:7/약 4:4). 자아중심은 악령만 아니라 이와 같이 악인도 마찬가지이니 아직 마지막 심판이 이르지 않아 지금은 구원의 때이므로 악인도 얼마든 회개에 이를 수 있는지라 악인을 처벌하시지 않는데 악령들만 처벌하실 리 없다.
인간 구원을 위해 아직 악령들을 처벌하실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나름대로의 악역(惡役)으로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있음이다. 인간 구원이 완료되면 마지막 심판이 이르고 그 때 약령들도 악인들과 함께 처단되는 것인데, 악령 사탄은 그러한 때를 가급적 늦추거나 가능하면 항구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고 딴에는 자신하여 인간 구원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어질 것을 미리 밝혀두신 바지만 사탄은 헛된 교만으로 처음부터 말씀을 수용하지 못하는 자라 귀 담아 들으려고 않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원리원칙을 따라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밝히시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아무 기준도 없이 오직 힘으로 밀어붙이신다는 뜻이 아니니 그런 식으로 하신다면야 벌써 오래 전에 모든 일은 끝나버렸을 것이요 이렇게 시간을 끄시지도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원리원칙을 따라 행하신다는 이 사실만은 사탄이 잘 알고 있는지라 "그렇다면 나도 얼마든지 내 논리대로 해서 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 자신하고 있음이니 그러나 과신이요 원래 교만은 멸망의 지름길로서 실상을 말하면 그런 어리석음이 세상에 없다. 딴에는 지혜 있다고 자부하나 그게 바로 어리석음으로 통하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기 "욕심"(요 8:44)이 그 깨달음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것.
삼환(三環, tripod circulation) 법칙의 근거
이 삼환 법칙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 말씀에 터전한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그 근거가 된다. 삼위일체 원리를 따라 인간 생애가 철저히 저울질되어 나가는 것을 인간 생애의 법칙 즉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이라 함과 같이, 이 3각(脚) 순환의 경제 원리 또는 삼환 경제법칙(the economic principle of tripod circulation, or Tripod Circulation principle, or TRIPOD theory)을 간단히 삼환 법칙(trini econo or tripod law)이라 하는 것이다. 굳이 3각이라 할 것도 없이 익히 알려진 "삼위"라는 말을 활용, 삼위 순환(Trinity circulation) 경제법칙이라 하면 더 좋을 것도 같다.
①스스로를 부하게 해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하게 하여도(“스스로 부한 체 해도”, “스스로 가난한 체 해도”의 우리말 번역은 빗나간 것) 재물이 많은 자가 있다(잠 13:7-“There is that maketh himself rich, yet hath nothing: there is that maketh himself poor, yet hath great riches”(KJV, NKJV)). 우리말 번역대로 하면 그런 일은 세상 다반사로 있는 일이니 솔로몬의 지혜라고 할 수조차도 없다.
②흩어 구제해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으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다(잠 11:24-“There is that scattereth, and yet increaseth; and there is that withholdeth more than is meet, but it tendeth to poverty).
③이(利)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해질 뿐이다(잠 22:16-“He that oppresseth the poor to increase his riches, and he that giveth to the rich, shall surely come to want).
④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로 모아 쌓게 하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주게 하시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전 2:26-“For God giveth to a man that is good in his sight wisdom, and knowledge, and joy: but to the sinner he giveth travail, to gather and to heap up, that he may give to him that is good before God”).
⑤무거운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다(잠 28:8-“He that by usury and unjust gain increaseth his substance, he shall gather it for him that will pity the poor”).
⑥선인(善人)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인다(잠 13:22-“A good man leaveth an inheritance to his children's children: and the wealth of the sinner is laid up for the just).
⑦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의미이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이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심이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다. 기록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다 함과 같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시어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실 것이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유하여 너그럽게 헌금을 함은 그들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풍성해지는 것이다"(But this I say: He who sows sparingly will also reap sparingly, and he who sows bountifully will also reap bountifully. God is able to make all grace abound toward you, that you, always having all sufficiency in all things, may have an abundance for every good work, being enriched in everything for all liberality, which causes thanksgiving through us to God. For the administration of this service not only supplies the needs of the saints, but also is abounding through many thanksgivings to God. He has dispersed abroad, He has given to the poor; His righteousness endures forever. Now may He who supplies seed to the sower, and bread for food, supply and multiply the seed you have sown and increase the fruits of your righteousness.-고후 9:6-13).
①, ②, ③은 악한 수단으로 재물을 긁어 모아도 그 재물이 남아 있지 않고 또 자신의 재물을 남에게 흩어 주어도 그 재물이 자꾸 쌓이는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④, ⑤, ⑥은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적극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통로(通路)로서 자기를 인식하는 자(의인)에게 그런 악한 자들의 재물이 흘러가도록 하나님께서 역사(役事)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말씀을 믿고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임을 이들 성경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런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부조리의 숨통을 틔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성경 구절 ①에서 “스스로 부한 체 하여도(to pretend to be rich)”라는 번역(우리말 번역도 포함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부하게 만든다(악착스럽게 돈을 버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말함)”는 번역(흠정영역, "to make himself rich")이 옳으니 이는 위의 ②와 ③의 구절들과 일치함이다.
따라서 오늘날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병리 현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 “의인”이 없음(不在)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의인"은 성경에서 말하는 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우리 구원을 의미하는 그런 의인이 아니라 지금 설명하는 경제 순환 원리에서 병(c)의 위치에 서는 사람을 가리킴은 물론이다. 공산주의는 그 이상을 성경에서 땄으나 자아중심이 해결되지 않고 자기 부인이 없는 바탕 위에서의 모든 이상(理想)은 공리공론으로 그치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시행착오인 것이다.
이 죽음의 세계에서 인생들이 모두 죽은 자(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므로 영생을 못하니까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을 기준하면 죽은 것)이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여기서 모쪼록 잘 살고자 하는 마음만 굴뚝 같아 그런 가난한 자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이런 데에 실상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 역시 인생 구원이 가장 시급하므로 복음 전도에 나섰기 때문에 이런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위의 성경 말씀은(①에서 ⑥까지) 솔로몬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신 남다른 지혜에서 이런 통찰력이 나왔으므로 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불변의 법칙으로 믿어 결코 손색이 없다고 단정하게 된다. 여기서 "악인의 재물이 의인에게 몰려 쌓인다"고 했는데, 의인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렇게 모이는 재물을 충실히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 줄 것이므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쌓이도록 하시는 것이다.
⑦은 이상 사실을 신약 시대에 와서 바울이 다시 확인해 준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이나 오늘날 그리스도의 시대에서나 변함없는 이 세상에서의 경제 법칙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즉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함이니, '돈이 모이는' 원리를 말함이다. 단지 여기서는 "줌으로써 얻는" 것인데 "얻는" 것은 다시 주기 위함인즉 흘러 오는 것은 반드시 흘러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흘러 보내는 의인(義人)이 없을(不在) 때 부자는 더 부해지고 없는 자는 더욱 없게 되는 부익부 빈익빈이 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인들로서 이런 죽음의 세계에 처하여 호의호식하고 삶의 낙을 누린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위의 인용 구절을 보아도 의인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세상에서 살고자 아니하고)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자이다. 따라서 여기서 의인에게 "재물이 몰려든다"는 것은 의인의 편안한 삶을 목적함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 의인은 재물이 쌓인다고 해서 남도 주고 자기도 동시에 그 혜택을 누린다는 뜻이 아니니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면서 오직 가난한 사람들 봉사를 위해서만 그 재물을 활용한다는 의미다.
바로 이 점에 이 법칙의 핵심 의미가 있다. 엄연한 원리요 법칙임에도 이런 것이 이 세상에서 아직 운용되고 적용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위의 지적대로 누구도 이런 뜻으로 기업을 운영해간 사람이 없었다는 데에 있다. 비록 구제를 힘쓰는 사람이 있기는 해도 자기도 그 덕에 부유하게 되는 것을 원하는 터라 여기서 말하는 "의인"의 자질로서는 미달이다. 자기 부인으로 일관해야 "병(c)"의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없으니까 이 좋은 법이 운용될 수가 없다. 믿음이 없으니 이런 일이 나타나질 수가 없다. 그리고 의인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니까 "자기를 가난하게 하는"(잠 13:7)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주님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 모두를 부유하게 만드신다고(고후 8:9) 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뜻은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살고 형통하는 데에 있지 않으니 이는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그렇다고 인생들이 고난을 받는 그대로 방치하신다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세우신 삶의 원리, 하나님의 법질서를 따라 인생들이 사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비롯해 모든 일들의 기본 바탕이 되므로, 비록 일시적인 이 세상 무대이지만 이상과 같이 나타나져 있는 원리를 따라 움직일 때 자연계가 자연법칙에 맞추어 운영되는 것과 같이 사람 삶도 보다 차원 높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나타날 것은 불문가지이다.
따라서 위의 성경 구절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한량 없이 선물로 받은 솔로몬이 인생사를 규명하면서 내린 결론이므로, 당당한 인간 삶의 일종의 법칙을 밝힌 것이라 해서 무리는 없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의인에게 악인의 재물이 모이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결코 의인의 물질적인 형통과 안락한 삶을 의미함이 아닐 바에야, 위와 같은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소통, 유통 구실로서의 의인의 위치를 말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인생으로 태어난 자로서 자기를 가난하게 하는 자는 일찍이 없었다. 오직 있다면 종교적 이유로 해서 그런 흉내를 내는 것뿐인데 오직 영생 얻으려는 구도(求道)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이런 가난한 자 구제에는 열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실상 자기 부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즉 그리스도를 그 안에 모신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사람 역시 다른 사람들 구원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므로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념하였기에 이런 일반적인 경제 법칙에 유의할 여유가 없었음 역시 현실이었다.
그러나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삶의 원리로서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가장 기본적인 '균등 배분의 방법'인데도 이를 따르지 않음으로 지금까지의 인류 고통이 가중되어 왔음을 이제 마지막 때를 당하여 뒤늦게나마 알리는 것이 마땅한 줄 믿어 이를 세상에 널리 공표하는 바이다. 그 나머지 참고하여 음미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런 구절들은 위의 ①, ②, ③ 그리고 ④, ⑤, ⑥을 측면 지원하는 것으로 이 진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례에서 이런 비슷한 행적을 남긴 본보기를 들라면 "경주(慶州) 최부자(崔富者)(12대 400년간)" 그리고 "제주도의 의녀(義女) 김만덕(金萬德, 1739(영조)-1812(순조))" 정도일 것이다.
§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으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Yes, you yourselves know that these hands have provided for my necessities, and for those who were with me. I have shown you in every way, by laboring like this, that you must support the weak. And remember the words of the Lord Jesus, that He said,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행 20:34,35).
§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Let him who stole steal no longer, but rather let him labor working with his hands what is good, that he may have something to give him who has need.-엡 4:28).
§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분량을 넉넉히 재어, 달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가 계량(計量)하는 그 계량으로 너희도 도로 받을 것이다"(Give, and it will be given to you: good measure, pressed down, shaken together, and running over will be put into your bosom. For with the same measure that you use, it will be measured back to you.-눅 6:38).
§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할 것이다"(He who trusts in his riches will fall, but the righteous will flourish like foliage.-잠 11:28).
§ "빈약한 자를 생각해 주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주(주인의 뜻)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실 것이다"(Blessed is he who considers the poor(helpless, or powerless); the Lord will deliver him in time of trouble.-시 41:1).
§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는 것이니 그 일을 공의로 할 것이다(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선인(善人)은 그 일을 분별력 있게 처리할(수 있게 되어질) 것이다)(A good man(Happy is the person who) sheweth favour, and lendeth: he will guide his affairs with discretion. {discretion: Heb. judgment.-시 112:5).
§ "빈약한 자를 생각해 주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주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실 것이다"(Blessed is he that considereth the poor: the LORD will deliver him in time of trouble.-시 41:1).
§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A faithful man shall abound with blessings: but he that maketh haste to be rich shall not be innocent.-잠 28:20).
§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을 것이다"(He that giveth unto the poor shall not lack: but he that hideth his eyes shall have many a curse.-잠 28:27).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주(主人)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실 것이다"(He that hath pity upon the poor lendeth unto the LORD; and that which he hath given will he pay him again.-잠 19:17).
§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해질 것이다"(The liberal soul shall be made fat: and he that watereth shall be watered also himself.-잠 11:25).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다.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다"(But thou shalt remember the LORD thy God: for it is he that giveth thee power to get wealth.-신 8:18).
§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잠 3:9,10).
"처음 익은 열매"가 가리키는 처음의 것, 초태생(初胎生) 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유월절 곧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될 때 이스라엘 장자들이 죽음을 면함으로 인하여(이집트의 장자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렇게 살아난 맏아들(처음 난 자식)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우리 구원을 상징했던 데에서부터 그 의미가 확고히 다져진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처음 난 것은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贖良, to redeem)되어 자유인으로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소유(所有)가 됨을 대대로 가르쳐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모세 율법을 통해 사전(事前) 교육을 시켜 오신 것. 그러므로 위의 구절은 하나님께 우리 스스로 바치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차원에서 보면 우리 자신을 비롯해 모든 수입의 100%가 하나님의 것이라 인지하고 하나님께 드릴 때에 그러함을 말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시대에서는 그러하다.
§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 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만사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When thou cuttest down thine harvest in thy field, and hast forgot a sheaf in the field, thou shalt not go again to fetch it: it shall be for the stranger, for the fatherless, and for the widow: that the LORD thy God may bless thee in all the work of thine hands.-신 24:19).
§ "그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편이 됨으로 형통하였으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He judged the cause of the poor and needy; then it was well with him: was not this to know me? saith the LORD.-렘 22:16).
§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다.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모든 일과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다"(Thou shalt surely give him, and thine heart shall not be grieved when thou givest unto him: because that for this thing the LORD thy God shall bless thee in all thy works, and in all that thou puttest thine hand unto.-신 15:10).
§ "너희 중에 할당된 몫이나 상속분이 없는 레위인들과 네 고장에 머물러 있는 나그네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실 것이다"(Thou shalt bring forth all the tithe of thine increase the same year, and shalt lay it up within thy gates: And the Levite, (because he hath no part nor inheritance with thee,) and the stranger, and the fatherless, and the widow, which are within thy gates, shall come, and shall eat and be satisfied; that the LORD thy God may bless thee in all the work of thine hand which thou doest.-신 14:29).
§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한다"(Only they would that we should remember the poor; the same which I also was forward to do.-갈 2:10).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는 것을 잊지 말 것이다. 이같은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But to do good and to communicate forget not: for with such sacrifices God is well pleased.-히 13:16).
§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함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But I have all, and abound: I am full, having received of Epaphroditus the things which were sent from you, an odour of a sweet smell, a sacrifice acceptable, wellpleasing to God. But my God shall supply all your need according to his riches in glory by Christ Jesus.-빌 4:18,19).
§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라"(Distributing to the necessity of saints; given to hospitality.-롬 12:13).
§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Charge them that are rich in this world, that they be not highminded, nor trust in uncertain riches, but in the living God, who giveth us richly all things to enjoy; {uncertain: Gr. uncertainty of riches} that they do good, that they be rich in good works, ready to distribute, willing to communicate; laying up in store for themselves a good foundation against the time to come, that they may lay hold on eternal life.-딤전 6:17-19).
§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여유 있는 것으로 저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들의 여유 있는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For I mean not that other men be eased, and ye burdened: But by an equality, that now at this time your abundance may be a supply for their want, that their abundance also may be a supply for your want: that there may be equality: As it is written, He that had gathered much had nothing over; and he that had gathered little had no lack.-고후 8:13-15).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혹은, 나누어) 쓰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And all that believed were together, and had all things common; And sold their possessions and goods, and parted them to all men, as every man had need.-행 2:44,45).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혹은, 나누어) 쓰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우리에게 주인 즉 우리의 소유주가 되심은 먼저 자신을 우리 각 사람에게 선물로 주시어 우리를 사랑으로 섬기시는 종이 되셨고 영원히 그러하시기 때문)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궁핍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면 저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었다"And the multitude of them that believed were of one heart and of one soul: neither said any of them that ought of the things which he possessed was his own; but they had all things common. And with great power gave the apostles witness of the resurrection of the Lord Jesus: and great grace was upon them all. Neither was there any among them that lacked: for as many as were possessors of lands or houses sold them, and brought the prices of the things that were sold, And laid them down at the apostles' feet: and distribution was made unto every man according as he had need.-행 4:32-35).
§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Now when Jesus heard these things, he said unto him, Yet lackest thou one thing: sell all that thou hast, and distribute unto the poor, and thou shalt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follow me.-눅 18:22).
§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유케 하려 하심이다"(For ye know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s he became poor, that ye through his poverty might be rich.-고후 8:9).
§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서 굳세게 할 것이니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다"(Hereby perceive we the love of God, because he laid down his life for us: and we ought to lay down our lives for the brethren. But whoso hath this world's good, and seeth his brother have need, and shutteth up his bowels of compassion from him, how dwelleth the love of God in him? My little children, let us not love in word, neither in tongue; but in deed and in truth. And hereby we know that we are of the truth, and shall assure our hearts before him. {assure: Gr. persuade} For if our heart condemn us,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 and knoweth all things. Beloved, if our heart condemn us not, then have we confidence toward God. And whatsoever we ask, we receive of him, because we keep his commandments, and do those things that are pleasing in his sight.-요일 3:16-22).
§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평안히 가라, 따뜻하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말만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What doth it profit, my brethren, though a man say he hath faith, and have not works? Can faith save him? If a brother or sister be naked, and destitute of daily food, And one of you say unto them, Depart in peace, be ye warmed and filled; notwithstanding ye give them not those things which are needful to the body; what doth it profit? Even so faith, if it hath not works, is dead, being alone. {alone: Gr. by itself}.-약 2:14-17).
지금은 소비자의 시대라고 하여 기업의 승패는 소비자에게 있다고 하는데, 소비자의 마음을 산다는 데에 이러한 성경적 기업 윤리의 주안점이 있다고 하겠다. 결국 그와 같이 사회 공익을 먼저 생각하게 될 때는 그 기업은 소비자의 절대적 지지와 비호를 받게 마련이다. 그러면 자연 그 기업은 창달하게 되고 그래서 기업 이윤은 영락없이 ‘없는 계층’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 되면 차츰 사리사욕을 일삼는 기업은 도태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누구든 기업을 할 때는 사회 봉사 차원에서 한다는 것으로서 인식 자체가 바뀌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병(c)"의 한결같은 의지(意志)가 중요 관건이 된다. 자기가 번 돈을 절대로 자기 개인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회의 것으로 여기는 철저한 공동체 의식을 말함이다. 과거 그런 기업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철저한 이념 차원에서 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 정신을 어느 정도 살린 예가 앞에서 잠깐 언급한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그 윗대 조상은 임진란에 의병으로 활약하여 자기 고장(경주)을 지켜 공을 세웠고 그 후로 무과에 급제하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하다가 병자호란 당시에도 노구(老軀)를 끌고 출전하여 전사하는 등 무인 집안이었다. 처음에 부(富)를 일구게 된 계기가 양대 전란을 거치면서 국민의 생활상이 극도로 피폐해짐을 따라 황무지와 같이 버려진 땅을 거두어 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어쨌든 12대 거의 400년간을 명성 있는 부자로서의 이름을 지켰으니, 외국에서도 그 사례를 찾기 어려운 그런 독특한 경제관(經濟觀)과 경영 철학에 의한 선행으로 전국적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분수를 지키며 공동체 의식으로 공생(共生) 공영(共榮)을 꾀한 것이 그 특징이었다. 그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에는 "사방 100리 안에는 결코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 있고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고 하여 남의 고통을 빌미로 치부(致富)하는 것을 금했다. 그 외에도, "한 해 만석(萬石, 곡식의 일만 섬, 한 섬은 되의 백 곱절) 이상은 하지 말라"는 내용도 있다. "벼슬은 진사와 생원 이상은 하지 말라" 했으니 자기 분수에 넘치는 과욕(過慾)을 경계한 것이다.
만석으로만 한정하니 최부자집 땅이 많아질수록 소작인(小作人,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사용료를 내는 사람)들이 내어야 할 소작료도 자연히 낮아지는 결과가 되어 최부자가 부유해질수록 덩달아 소작인도 함께 부유해지는 "공생공영의 경제"였다. 여러 번 급한 사정을 인해 담보 잡혔던 많은 사람의 문서가 책상에 가득하게 되면 모두 불태워 버려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최부자집 며느리로 시집 오면 3년간은 비단 옷이 아닌 무명옷만 입게 했다. 참으로 듣기에 상쾌, 유쾌, 통쾌한 얘기가 아닌가.
이런 사유(私有) 아닌 공유(共有) 개념은 강제적일 수 없고 자발적인 것이어야 함은 앞에서도 역설했다. 강제적일 때 그것은 공산주의 독재와 같은 모순만 되풀이된다. 그것은 개인적인 야욕을 위한 구실만 만들어 준 것임을 인류 사회는 지금까지 뼈저리게 경험해왔다. 자발적이어야 하나, 다수가 그렇게 의인(義人)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비록 소수라도 철저한 자기 관리에 의한 자기 부인(self-denial)으로 일관할 때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그 기업인 또는 의인은 부(富)는 쌓고 있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그의 개인적인 삶만큼은 ‘없는 자’ 중 하나로 시종일관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차이를 분간할 줄 아는 무소유(無所有)의 사람이 이 '병(丙, c)'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이다. 다시 말해 무소유라 하여 일신을 승려 또는 선교사 또는 신부, 수녀로 평생 마치려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런 사업에 뛰어들어 기업가가 될 일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이치로 사람 삶이 엮어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하고 따라서 이상 지적한 바와 같이 경제 원리 차원에서 이를 확고하게 신봉하는 신념이 요구됨은 물론이다. 그렇게 되면 인류사를 새로 쓰는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도 같다. 그러나 세상 종말이 다 되어가는 이 때에 와서야 이런 삼환(三環, 3각(脚) 구도로 3자(者)끼리 순환하여 도는) 법칙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이 아쉽다고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에서 인생들이 삶을 누리게 하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원칙을 깨달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와 원래의 창조 목적대로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하심에 있으므로 때와 관계 없이 진실을 파악하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목적일진대 얼마든지 의미는 퇴색되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인생의 참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 몸 체제에서 각자가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지체(肢體) 됨을 의식하여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것이 사람 사는 방법임을 알리는 데에 있다.
바로 이 이치가 영생에 들어가는 이치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 정하신 영원한 삶의 이치를 따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찾게 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데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만고의 진리를 음미해 가는 일이니 모름지기 뜻 있는 자는 당찬 신념과 모험 정신으로 개척해볼 만한 분야다. 의인(義人)의 부재(不在)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부조리가 적체되어 기형아가 되어 있는 오늘 난국을 타개하는 유일한 계책이 이 삼환 경제 원리다.
지금까지는 병(c)이 없으니 갑(a)과 을(b)의 대결 구도만 형성되어 온 것이다. 갑, 을, 병 3각(脚) 구도라야 순환이 원활히 되는데 병이 빠지니 병적(病的)으로 일방적인 흐름만 지속되어 온 것이다. 다리 하나가 없어지니 일방적으로만 기울어져 원활히 돌아가지 못한 사회구조의 완전 불구(不具)다. 자기가 가진 것이 자기 개인의 사용(私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공(公共)으로 쓰이기 위한 일시 위탁된 것임을 아는 의인이 없을 때 사업주와 노동자의 불화만 증폭되게 마련이다.
피고용인 역시 자기가 고용된 업체에 대한 애착이 없어 눈가림만 하는 고로 피차간의 불신이라 어느 한 쪽만 두둔하거나 나무랄 이유도 사실상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푼돈을 모아 선한 일에 기부하려 해도 믿을만한 데가 없어 주저하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기탁하려 해도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꼴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실정이니 일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의인' 기업인이 나서서 그런 복지 자선 사업체를 아울러 운영한다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신바람 나는 윤활유 역할이 되겠는가,
기업인이라 하면 무조건 이윤 추구라 해서 개인적인 욕구 만족으로만 한정해 생각하는 편견부터 버릴 필요가 있다.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이윤 추구를 목적하지 않을 때 '기업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선입견부터 잘못된 것이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 공동체 의식으로는 왜 이윤 창출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는 왜 인식 전환을 못하는가. 사회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말 그대로의 삼환(三環) 작용의 주역(主役)이 되는 기업가 상(像)으로 기업을 해볼 창의성과 모험 정신이 오늘날 요구된다.
국가마다 복지정책을 가장 효율성 있게 운영하려거든 먼저 이런 정신의 기업가부터 육성할 일이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의 사회 부조리는 사라질 것이 아닌가. 자연발생적으로 이른바 사회 공산주의 체제가 부르짖었던 균등 배분의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악덕 기업인들은 점차 도태될 것이니 덩달아 각종 사회문제도 풀어지는 계기를 만날 것이다. 사회 정화의 기풍이 확립될 것이다. 이런 일은 이 세상을 악으로써 지배하는 악령들도 감히 방해를 못하는 법이다.
왜냐면 인간 삶의 기본 원칙을 건드릴 위치에는 절대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단이 활동할 때는 인간 자신의 악한 동기(動機)가 동조(同調)되어 저질러지는 일종의 합작이다. 아담의 범죄도 사단의 거짓말에 맞장구를 쳤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고 사단이 방해하는 것은 사람이 '구원 얻는 일'에 국한되는 일이지, 만일 이런 일까지도 방해한다면 성천사(聖天使)들의 막강한 세력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악령들은 이미 천사들에게 패퇴하여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듯 내려온 것이 1908년 6월 30일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이다.
실상 이런 경제 법칙은 이 세상 삶에 관여되는 것이요 인생 구원과는 직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므로(물론 간접적인 영향은 지대하다) 사단으로서도 참견할 명분이 없다. 그러므로 과감히 이런 사업을 구상해볼 일이다. 오늘날 회자되는 기업의 윤리 문제 그리고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 부조리를 척결하는 통쾌한 새 역사를 쓰는 선구자 역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으로 일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이제까지 사단이 방해했고 지금도 그러할 것임은 분명하다.
방해를 해도 '처음 시작'을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뜻이니 일을 시작했는데도 그 일 자체를 방해하여 성경의 약속대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일은 그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처음 시작을 방해하는 이유는, 이런 일이 시작되면 성경의 하나님과 성경의 진실성을 세상에 광포하는 것이 되므로 사단이 이를 절대로 좋아할 리 없다. 그래서 아예 이런 데에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러나 오늘날 이 마지막 때 여전히 이런 보배스러운 인간 삶의 법칙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公義) 차원에서도 묵과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부인을 단 한 마디로 정의(定義)하면 "주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는 받는 것이 되어도 '나'로서의 일관된 자세는 일방적으로 주는 것 곧 흘려 보내는 것이다(위의 그림). 다시 말해 내게로 흘러 들어오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의식하지 않음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되어지는 결과일 뿐이지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흘러 들어 오도록 만들지는 않는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다(행 20:35)
"주라"고만 말씀하셨지 다른 내용을 덧붙이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주는 것의 (순환)법칙을 말씀하신 것이니 곧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計量)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눅 6:38) 하신 것이다. 즉 전부를 다 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역시 전부를 다 주는 것으로써 도로 받게 된다. 자아중심은 그 반대다.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받고자 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이를 의식함이다.
세상의 돈이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받으려고만 하는 자들에게만 몰리는 것은 사단이 그렇게 조종해서라기보다 주려고만 하는 의인이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이 없는 무대(舞臺)인지라 '을'은 부득불 병적(病的)으로 비대해지지 않을 수 없음이다(그림 50). 지금이라도 이런 '병'의 존재만 나타나게 되면 '을'의 이상(異狀) 비대증은 치유되는 것이다. 이 치유는 사단도 천하의 그 누구도 막지 못하고 방해하지 못한다.
솔로몬의 지혜가 하나님 주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은 얼마든지 이 법칙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홀로 밝힌 것은 아니고 위의 여러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한 것. 솔로몬이 말기에 가서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그래서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고(고전 10:12)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경고하고 있다) 그 지혜의 글들이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은 명백하게 하나님 주신 지혜로 사물을 살핀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지혜로써 하나님께서 인간 중에 하시는 일을 깨달았으니, 즉 악인의 재물은 필연코 의인에게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전 2:26/잠 28:8/13:22/11:24). 의인에게 재물이 모이는 것은 의인이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이 절대로 아님을 다시 강조한다. 의인은 가난한 사람, 궁핍에 처해 있어 생활고를 겪는 사람에게 구호의 손길을 항상 뻗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므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재원(財源)을 조달해 주신다는 그 뜻이다(고후 9:8).
다시 말해 솔로몬은 그 지혜로 삼환법칙(三環法則, trini economia)을 알아낸 것이다. 그런데 이 법칙이 오늘날까지 사장(死藏)되다시피 한 것은 그런 취지를 살려 적극적으로 나선 의인이 없었음이니,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이야 많지마는 앞에서 설명한 그런 역할을 담당하기로 뜻을 세운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다. 비록 늦으나마 오늘이라도 그런 의인의 역할을 하기로 나서는 이들은 놀라운 이 약속(행 20:34,35/눅 6:38/고후 9:6,8-13/빌 4:19/신 4:27/8:18/14:29/15:10/23:20/24:19/잠 3:9,10/11:28/13:7,22/19:17,25/22:16/28:8,20,27/전 2:26/시 41:1/렘 22:16/갈 2:10/히 13:16/빌 4:18/딤전 6:17/고후 8:13-15)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인이 있고 없고 하는 것에는 관계없이 초대교회에서는 바로 그런 정신을 가르치고 있었으니 즉 바울의 말대로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직업)을 한"(엡 4:28) 것이다. 도둑질하던 사람이 그 짓을 그만 둔다면 도둑질 외에는 평생 익힌 기술이 없는데 선한 직업에 종사하여 벌면 얼마나 벌겠는가. 가족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할 것이지만 그러나 어쨌든 목표는 가난한 사람 구제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골고루 행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은 원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정확히 1/3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생애들이 있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적용시켜 보았더니 희한하게 맞아 떨어졌으나 예외도 많기에 이 예외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심 끝에 노아의 생애를 역시 적용한 결과 그래서 3운법칙의 세 가지 유형이 완전히 찾아졌던 것이다. 만일 노아의 950년 생애를 한낱 신화로 치부했다면 노아의 생애를 적용시킬 엄두도 못내었을 것이니 결국 이 법칙은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FS형을 "아브라함형"이라고도 하고 OT형을 "모세형", SN형을 "노아형"이라고도 한다. 굳이 FS, OT, SN형이라 하는 것은 처음으로 이 3운법칙을 대하는 이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1/3은 One third(Ot), 7/19은 Seven-nineteenths(Sn), 4/7는 Four-sevenths(Fs)임을 기억하기 좋게 하려고 붙인 이름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지 않는데,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 어느 법칙인들 믿을 수 있고 적용할 수 있으랴.
3환법칙 역시 솔로몬의 지혜의 글들이 하나님 주신 것임을 믿지 않고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SN형이나 OT형에만 있는 'JP기간'은 아래 그림과 같은 요셉의 110년의 일대기에서 발견한 것이다. 29세까지가 요셉의 JP기간이고 이 기간이 끝나면 DP기간부터 1년간 지속되다가 그 후로 내처 LP기간으로 연이어지고 그 후 비활동기인 DP기간이 시작되어 임종시까지 나간다. 3운법칙에 의하면 요셉의 나이 70세에 제2인자의 자리를 물러나게 된 것이 드러난다. 즉 40년간을 이집트를 통치한 것이다.
균등 배분
'균등 배분'이라 해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없고 내일도 모르는 이 세상 삶이므로 오직 구원 얻는 것
이상으로 의미 있는 일이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단지 이
삼환법칙을 적용함으로써, ①'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확실성과 진실성을 가일층 입증하는 것이며, ②비록 우리가
죽은 자로 위치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으나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은 변함 없으심을 증명하고(가난하여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구제의 의미이니, 그리스도께서 세상 계실
때 여러 병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어 각종 기적을 행하신
것과 같은-행 10:38), ③자기 부인이 사람 삶의 기본 법질서임을
온 세상에 알린다는 차원에서 의의가 있다.
의인의 자기 부인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이 스스로를 가난하게 한다"는 것도 가난 자체가 미덕이라 그런 것이 아니고 부유한 자보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가 더 많으니 "평균하게" 하려 함이다. 주변 사람이 모두 부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난하게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로서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는 실상이기에 가난한 자가 절대 다수다. 가난한 자 구제는 나라도 못당한다는 옛말도 있다.
그 중에 혹간 부자가 있지만 이는 개인적인 어떤 축복이 아니니, 악한 자가 악한 마음으로 자기 중심이 되어 자기를 위해서만 사는 고집과 욕심으로 긁어모은 것이기도 하고 또는 부모의 재산을 상속 받는 경우도 있고 그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여 재산을 모으는 수도 있으나,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 삶의 기본 원칙은 변함 없으니 혼자 부유한 것은 한 몸의 원리에서 절대로 용납되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물려준 것이든 자수성가한 것이든 그 부유함의 목적은 없는 자들과 함께 나눔에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딤전 6:17-19).
따라서 부유하여 이 세상에서 그 부(富)를 홀로 누리는 자는 장차 오는 세상에서 받을 일체의 위로가 없을 것은 이 세상에서 모두 탕진되고 고갈되었기 때문이라고 엄한 경고를 내리신 것이다(눅 6:24,25/16:25). 즉 이 세상에서 부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자기 중심으로 일관했다는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다"(고후 5:15)는 충분한 이유가 되므로 이것이 범죄가 되어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는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전연 무관하기 때문이다(:15).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롬 14:9/고후 5:15)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데 구원이 유효할 리 없다. 그래서 부자는 다른 악행이 아니라 그 부유함을 거지 나사로(여기서 상징하는 것은 "믿는 형제"이니 처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교회를 상징해왔기 때문으로 물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의 기간이다)와 나누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써 불(마지막 심판의 불 못이 아닌 그 심판 때까지 악인이 유하게 되어 있는 장소-눅 16:24)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이순신 정신
성경 윤리가 지배하는 기업 양성에 주력해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순신 정신'에 입각한 기업 경영이다.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공동체 의식의 원리원칙대로 사는 생애였다. 바로 그런 원리원칙대로 행하는 것이 이순신 정신이다. 젊은 무관(武官) 시절 이공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당시 병조판서(직속 장관)가 자기의 서출(庶出) 딸을 소실(小室)로 주겠다고 해도 거절했고, 당시 이조판서(관직 임용권이 있는)로서 먼 친척뻘이 되는 이율곡이 상면(相面)하자는 청을 넣었을 때도(유성룡을 통해) 스스로 사절한 것이 이 때문이다.
실력도 없이 금권, 권력, 인맥(人脈)의 힘으로 턱턱 자리를 차지해 앉는 것을 공동체 의식에 반하는 일이라 판단했기에 그리고 그 폐해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터라 오직 자기 실력에 따른 공정공평하고 공명정대한 경쟁으로 관계(官界) 진출을 목적함이 도리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은 까닭이다. 상급 지위로 나아가려면 그만한 정도의 자기 계발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사리사욕의 자기 중심의 자세를 배격하였고 사람으로서의 도리 지키기를 엄격히 하였다.
이미 어릴 때에도 옆집의 유성룡(西厓)이 자기 집(유씨) 감나무에 달린 감을 따먹자고 제의했을 때 "어른께 먼저 알리고 나서 따야 된다"며 응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성룡 자신이 세상에 소개한 이공의 성품을 밝혀 주는 일화다. 이런 모든 것은 어릴 때부터 다져진 가식(假飾) 없는 이공의 일관된 인생관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기본되는 질서 의식이다. 이런 것 하나만 본으로 삼아도 오늘날과 같은 무질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어린 시절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동했다는 일화가 인생 삶의 기본 교범으로 널리 알려져 우리까지도 이를 알고 있는 터에,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의 희대의 위인으로서의 이런 어린 시절 일화 하나도 마음에 제대로 담아 두는 일이 없으니 얼마나 사회가 혼탁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대주의에 찌든 자주 정신의 결여가 낳는 폐단이 얼마나 중한지 오늘날까지 그 결실을 거두고 있건만 깨닫지 못하니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다.
따라서 상관의 부당한 청탁을 감연히 거절한(한번은 인사 청탁을 거절했고 다른 하나는 관아(官衙)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달라고 부탁하는 또다른 상관의 청을 거절한 것) 그 정신이, 임진란에서 나라를 거의 혼자의 힘으로 건진 것이다. 명의 원군도 한산도 대첩을 비롯한 연전연승으로 서해 해로(海路) 차단이 가능했기에 망정이지 그것이 없었더라면 명나라 자체가 위기의 궁지에 몰린 터에 원병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었지만 우리나라 영웅은 죽이려 들고 명나라에게 신세 졌다고만 하여 허리를 펴지 못했었다.
또한 명량 대첩이 없었던들 한산도 대첩의 의미가 한낱 물거품이 되고 한반도가 결국은 왜군에게 포위되면서 명군은 퇴각하기에 바빠 자국 영토 보존에만 급급했을 것이다.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微臣不死, Twelve ships have we still, and I have not died. Or, twelve ships still have I and, besides, my own life.)"는 세계적인 금언(金言) 중의 금언이다. 가당찮은 배달 혼(魂)의 발로다. 세계를 능히 제패(制覇)하고도 남을 기개(氣槪)다.
한 사람의 공동체 의식이 이렇게 위대한 것이다. 한편 원균으로 대표되고 상징되는 인류 전체의 일반적 타성(惰性)으로서의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가 일조유사시에는 자신만 아니라 사회(국가) 전체를 패멸(敗滅)로 몰아 넣을 수 있다는 실례를 우리는 이로써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사실(史實)을 들출 때마다 "나원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원균이 아니라 '나'원균이다. 내가 바로 그 원균이라는 뜻이다. 내가 만일 당시 원균의 위치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원균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그 뜻이다.
왜냐면 이공(李公)과 같은 특출한 공동체 의식으로 시종일관하지 않는 한 대체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원균 한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참 실상을 원균이라는 거울로 비추어 보는 것이 똑바른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원균 개인을 비난할 어떤 근거도 없다. 오직 자아중심의 폐단과 폐해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각자 자기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원균은 개인적으로는 호탕한 쾌남아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우리들 모두처럼 자아중심에서 포로되어 있는 상태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공 순신은 그런 자아중심으로 예외 없이 얼룩진 죽은 자로서의 인생 중에서도 인간 삶의 기본 법질서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철두철미 실천한 표본에 불과하지만, 그런 표본일지라도 그 정도의 혁혁한 공을 세우고 모든 이들에게 이득을 안겨 주었다는 데에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체제 안에서의 삶이 얼마나 절대적 가치가 되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아주 드문 증거이기에 높이 사고 이를 온 천하에 알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생명의 도리는 바로 이 공동체 의식에 의한 '한 몸'의 이치를 따라 사는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핵심이 자기 부인이다. 한 몸 구조에서 머리든 몸이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아무도 없다. 오로지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악, 불의, 불법)는 바로 자기 중심, 위주, 본위이니 곧 자기 부인을 부정하는 일체의 언행이요 사고방식이다. 이 한 몸 원리에서는 머리와 몸의 상호 관계가 핵심이다. 따라서 이런 공동체 의식에서는 머리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
이공(李公)의 그런 공동체 의식이 이성계와 같은 개인적인 야망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은, 임금의 제삿날만 닥치면 어김없이 서울을 향하여 북향(北向) 배례(拜禮)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 혁혁한 전승(戰勝)을 기화로 이성계처럼 나라를 차지하겠다는 배포는 없이, 오직 전쟁이 끝나면 향리로 돌아가 이름 없이 농부가 되어 일생을 마치겠노라고 읊은 담백하고 소박한 인간성을 노래한 그 시는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런 이공의 심경과는 달리, 왕을 비롯해 조정은 이성계의 재판(再版)을 두려워하는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이를 눈치 채고 최후의 전장(노량해전)에서는 찬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늦은 가을 초겨울 날씨였으나 스스로 갑옷을 벗어버리고 차라리 명예롭게 전몰(戰歿)로 생을 끝내기를 바라 결국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는 말이 전해올 정도이다. 퇴각하는 적 앞이었기에 그렇게 하였지 한산도 해전이나 명량 해전과 같은 전투였다면 적을 섬멸시켜 그들의 야욕을 분쇄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렇게 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적이 황급히 퇴각하는 마당에서는 적을 섬멸한다는 의미가 없어지고 오직 인명 살상의 무의미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토와 영해를 침범한데 대한 응징은 필연적이므로 노량해전은 불가피했으나 마땅히 싸워 이겨 적을 소탕해야 한다는 필연성은 이미 사라졌던 것이다. 당시의(지금도 그렇지만) 지독한 자아중심으로 뭉쳐진 세상은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짓고 살겠다"던 이공의 소박한 소원도 들어 줄 능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아무 정당한 사유도 없이 고발당하여 장차 약사발을 받아 마시는 지경에 이르자 부당한 처사이니 탈옥을 해도 무방하다고 누가 옆에서 말하자 "악법(惡法)도 법이다" 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 것과 같다. 한 사회에서 그 질서 유지(법을 따름으로써 유지가 되니)가 최고 선이라 믿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이공의 담담한 자세였다. 악법도 법이라고 해서 그 악법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그런 악에 대해서 그는 죽음으로써 맞섰고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그 악법을 단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도 불법으로 행해진 불의의 판결을 따르심이었다. 그러나 그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이 세상 권력을 쥔 사단을 이기는 것은 그가 그 권력으로 우리를 죽이려 위협할 때(눅 4:7) 우리가 거기 응하여 죽음으로써 대응함으로써 이기는 것이다. 사단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사단이 원하는 바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심약(心弱)하게 만들어 그 십자가로부터 내려오시게 하면(마 27:40) 그로서는 성공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승리"(골 2:15)를 의미함이었다. 칼은 법(法)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그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의(義)가 아니라 악(惡)인 것이다. 사단이 이 세상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 칼날을 피하는(그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처음부터 법과 질서 의식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롬 13:1).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그렇게 한 몸이 되어 있는 구조에서 각자는 그 몸의 지체 역할을 함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의 각 지체)은 머리를 위하는 것이므로 이런 체제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안되고 오직 자기 부인이 있을 따름이니 이것이 이 우주 영원한 생명 세계에서의 법과 질서다. 이를 어기면 죄요 따라서 죽음이고 이를 어떤 대가를 무릅써서라도 지키면 의(義)의 순종이요 선(善)을 행함이니 곧 생명(영생)이다. 이 한 몸 의식이 공동체 의식이다. 왜 하나님께서 죄 짓지 말라 하시고 의인이 되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이공과 '나'원균의 대조(對照)되어 전개된 역사의 무대 위에서 재차 확인하게 됨을 보는 것이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마다 이 사실을 함께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면 죄 짓지 않는 데에는 죄의 실상과 해독(害毒)을 사무치도록 실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義, 좋은 것 곧 삶의 도리로서의 '한 몸' 의식)의 실상과 가치를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으면 그 이상으로 좋은 것이 없다. 이런 인품의 인물은 세상에서는 "늘품 수 없어 옹색하다"는 둥 "처자식 굶어 죽이기 딱 좋게 되어 있다"는 둥 "괴짜요 고집불통"이라는 둥 그런 소리만 예나 지금이나 듣게 되어 있다. 그를 높이 사 주는 이는 가뭄에 콩 나듯 하고 전체적으로 빈정거림만 받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태평이다. 진정 자유인으로서의 포부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공이 우리에게 사표가 되는 것은 그가 투철한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으로 이상적인 공직자상(公職者像)을 구축하였을 뿐 아니라, 굶어 죽는 한이 나고 처자식 고생시키는 짝이 나더라도 세상의 부정 비리와는 한사코 타협하지 않고 거기에 물들지 않기로 작정한 그 올곧은 삶의 철학, 신념 내지는 기개에서 그러하다. 다 자기 한 몸 보신책에 급급하고 자기 가족 먹여 살리는 것 등을 생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기 때문에(이것이 자아중심이다) 부패 타락하고 오점을 남기는 생애로 대개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공은 홀로 그런 세파에 물들지 않고 우뚝 서 있던 몇몇 극소수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 점을 높이 사는 것은 성경이 바로 이런 삶을 칭송하고 이런 삶의 자세로 이 악한 세상에서 일관할 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순신정신 선양운동'을 벌임도 여기에 있다. '양성평등'이 아닌 '양성조화'를 강조함도 모든 일에 법질서 확립이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까닭이다. 질서 확립을 등한히 하면 파멸은 필지이다.
바로 이 '한 몸' 의식, 공동체 의식, '하나' 의식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피조물(영적 존재로서의)로서의 삶의 도리요 법질서이다. "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어찌 자기 중심인가. 그러면 가족을 굶겨 죽여도 좋다는 말인가?" 할 것이다. 이는 자기 부인을 자기 부정으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인데, '자기 부인'을 정확히 정의하면 '한 몸 의식에서 먼저 머리를 위하고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이웃을 위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자기가 위해지는 것을 말함이다.
우리의 머리께서는 그리스도이시므로 이는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하고 내 가족을 위해도 나 자신 그리고 나의 가족이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여겨 나 자신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위함이다. 그리 되면 내 이웃(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 믿음의 형제) 역시 그리스도의 것이기는 일반이니 내 가족만 위함이 아니라 내 이웃 역시 똑같이 위하게 된다.
내 자신이라고 해서 또는 내 가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위하는 일이 없이 평균되게 위함이다. 그 내 이웃 역시 같은 신념으로 자기만을 위하지 않고 동시에 나를 위하게 된다. 이래서 한 아버지를 모신 한 형제들, 한 가족의 개념이다. 여기서 기준이 있으니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율법과 선지자는 무엇이든지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마 7:12) 데에 있다. 나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위하고자 하는 그 상대의 기준이다.
즉 내가 그의 처지에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가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그에게 해 주는 것이 가장 공평공정한 행동 지침인 것이다. 물론 상대편도 내게 그렇게 해주는 것을 전제하나, 그러나 이것이 삶의 법칙일 때에 그가 그렇게 아니한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니 나 역시 범법한 자가 되는 까닭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것이 생명의 법질서인 줄 알므로 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 뜻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고 염치가 있고 자기 분수를 알므로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대의 기준이기는 하나, 그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는 것은 나의 인식과 판단을 중심하는 것이므로 나를 기준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삼환법칙에 의해 사업이 창성하게(이윤이 부풀려지게) 되는 것은 사단이 아무리 이 세상 지배자라 하더라도 방해하거나 제재를 할 권리가 없다.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작업은 얼마든지 그의 소관사이지만 그 이상으로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혹은 배반하도록 하는 갖가지 방해 공작을 감행하는 것은 그에게 가하나 대상이 되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안믿음은 그가 절대로 어찌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믿는 자는 넉넉히 구원될 수 있음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있는 이는 누구든지 이 일을 시도하여 선을 행할 일이다.
곁들여 말해 둘 일은, 영국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의 고아원 사업이 순전히 기도에 의한 사업으로서 성공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모든 필요한 것을 기도로써 응답 받은 결과임과 동시에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뮬러 자신이 (아내와 함께) 자기 부인의 삶으로 일관한 데에 그 비결이 있는 것이다. 부부와 함께 25세시 믿음으로 복음 사업을 하기로 한 후로부터 일절 고정 봉급을 받지 않았던 것이며 사업이 진척됨에 따라 자기 개인으로 할당되는 생활비 역시 늘어났으나 시종일관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한"(딤 6:8) 줄로 알고 그 개인 수익(收益)을 절대로 치부(致富)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의 개인 수익이라는 것은 후원자들이 사업 자금을 수시로 보내 올 때 특별히 그의 개인 생활비로 쓰라고 지적하여 명시하고 보내오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1831년에 151파운드(영국 화폐 단위)였던 것이 1870년에는 2천 파운드가 되었으나 뮬러는 자기에게로 할당된 것이라 하여 그것을 다 쓰지 않고 쓸 만큼의 비용대로 고작 1년 300파운드 정도로만 그와 가족의 개인 용도로 쓰고 나머지는 다 나누어 준 것이다.
오늘 현재까지도 뮬러의 사업은 조지 뮬러 자선 기금(The George Muller Foundadion, 2009년 3월에는 The George Muller Charitable Trust로 명칭 변경)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물론 기도 응답이라는 운영 방침은 불변이다. 1986년에서 2010년까지만 해도 지역의 노년 층들을 위한 주거 환경 개선 사업에도 관여해 왔다. 조지 뮬러의 기도 응답에 의한 고아원 사업은 3환법칙(3자간(三者間) 경제 순환 원리)의 한 실례(實例)라고 할 것이다.
삼 사회복지 재단
누구든지 3환 법칙을 따라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은 일정 마크를 기업체 명칭에다 붙이게 된다. 그러면 거의 모든 기업체가 이 마크를 붙이게 되는 결과가 된다. 왜냐면 소비자는 이런 마크를 단 업체를 신용해주게 되는 까닭이고 따라서 이 마크가 없는 기업체는 자연 도태될 수밖에 없음이다. 이윤을 소비자에게 돌리는 업체를 선호하게 될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또 처음부터 이러한 마크를 달게 되면 그 업체는 괄목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 과연 그 해당업체가 성실하게 3자간 경제 순환 원리를 따라 기업 경영을 하는지 감시할 필요성이 생긴다. 인간은 원래 자율적으로 생활하도록 창조되었으나 스스로 타율의 삶이기를 결과론적으로 바라는 이들이 대부분이니 부득불 이런 강제성을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는 개인적인 이윤 추구를 위해 소비자들을 속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체의 업주는 생활부터 검소한 것이 특징이니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고 일반인들은 취지에는 찬동하나 그리스도 믿음을 강제할 수는 없으므로 그렇게 스스로 믿음에는 들어오지 않는 이들은 이러한 비슷한 운동을 벌일 수는 있다. 그러나 삼(森) 재단의 가입 회원일 수는 없다. 따라서 '森 마크'를 사용하지는 못한다. 森 재단의 "삼(森)"을 영어로는 Sam(Samuel)이라고 하는데 이유가 있으니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사무엘을 낳기 전에 무자하여 주변의 눈총을 받아 괴로워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만일 아들을 낳게 해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한 데에서 유래한다.
고로 이 재단의 회원(가입한 각 업체의 업주)들은 자기의 노력으로 수확한 일체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민중의 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면서 사회에 환원시킨다는 것을 목적하므로 이 사무엘이라는 명칭은 합당한 것이다. 따라서 "森" 재단은 국민 개개인이 개인적으로 기부행위를 하려고 하나 마땅한 성금 기탁처를 알지 못할 때 森 재단에 일체를 위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森 재단의 존립 목적은 그런 것보다 3자간 경제 순환 원리를 실천해 보임에 있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자 함이 절대로 아니니 사는 것 자체가 여기서는 부정(否定)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님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一息間)에 다합니다(We finish our years like a sigh.). 우리의 연수(年數)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labour and sorrow)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흩날려갑니다(to fly away)"(시 90:9-11) 함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시어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여 주십시오"(So teach us to number our days, that we may apply our hearts unto wisdom)(:12)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 중의 우리의 나날이니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7:11)이시다. 고로 삶의 윤곽이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에 있다는 것만 알고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는 말 것이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들이건만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말씀은 정작 모르고 있다. 기가 찰 일이 아닌가. 따라서 시급한 일이 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알리는 데에 있다.
이 짧은 인생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 일에만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눅 10:42). 그 가장 좋은 것이 이 하나님의 일에 통하고 사람 살려내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 이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 것이 옳다(고전 7:17,20,21). 그러나 그렇다고 여전히 도둑질하면서 전도하라는 것일까 착각할까 싶어 성경은 그 점도 명백히 밝히고 있으니 즉 그런 경우 선한 직업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엡 4:28).
이 세상이 사람 사는 곳이라면야 종으로 있다가 자유할 기회가 있으면 당연히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하는 데에 있고 이 일을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악령들과의 전쟁 중이므로, 종 그대로 있으면서 주변의 종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건져내는 일을 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그리고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해내는 일에서 단연 나름대로의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때문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한다"(고전 9:25) 하여 그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이 차이만 빼면 전심전력을 다하는 데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이 불철주야 노력하는 그만큼 우리도 당연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남 놀 때 놀지 않고 각고면려하는 것처럼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이런 초보적인 기초 지식도 없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성경을 잘못 배워 이기적으로 생활해도 구원 영생은 따놓은 당상인 양 의기양양 때로는 양심의 가책마저도 무시한다. 때문에 가장 이기주의로 노는 이들이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욕을 먹는다. 당연 귀결이다.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요즘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어놓는 장본인들은 거의 전부가 소위 "기독교"인들이다. 그런 사이비들을 지탄의 대상으로 삼는 교인들도 50보, 100보 차이다. 삼환 경제순환 법칙을 따르는 이들은 그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
지구 종말
24. 지구 종말에 대해서는 곧 이어 소개하게 될 글(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충돌의 진상)로써 가름하고자 하나, 그 전에 이미 다니엘의 예언으로써 이 시대가 바로 세계 종말에 처해져 있음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지금 이 시대는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자연계와 대칭되는 영계가 이 마지막 때를 두고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는 시기이므로 악령들의 발호가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 극심할 것이기에, 이에 대한 대비로서 충분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고 보아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령 사단의 실상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번 소위 세계 종말에 대한 소동이 있었던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세계 종말에 대한 사단의 '물 타기 작전'인 것이다. 그렇게 자주 소동을 피워야 성경대로 "이 세상은 결국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된다"고 외쳐도 이에 대해 마이동풍 격이 되어 인생들을 속일 수 있고 그 끝 날에 대한 경각심을 잠 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양치기 소년이 심심해서 "늑대가 나타났다!" 소리쳤더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허겁지겁 올라오는 것을 보고 여러 번 그렇게 소동을 벌여 재미를 보다가 한번은 진짜 늑대들이 나타나기에 소리치고 또 아무리 소리쳐도 마을 사람들은 또 속는 줄 알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효과를 사단은 노리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이런 지구 종말에 대한 것을 물은 것도 그런 '종말 소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경을 믿지도 않는데 새삼스럽게 그런 문제를 제기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이 있음을 통해서도 정말 지구 종말은 때가 되면 오게 되어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진실이기에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을 능사로 삼는 사단이 이런 짓을 가끔 심심찮게 벌이고 있음이다.
지금까지 되풀이하여 설명해 왔지만 사단의 실상을 아는 것과 함께 우리의 실상을 아는 것도 중요하니, 애초 첫 사람 아담 아래에 악령 사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사단을 비롯한 모든 영물을 다스리고 있어 지배를 했건만 아담 자신의 범죄로 이와 같이 아래 위가 거꾸로 뒤바뀐 오늘날의 비극적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에덴낙원이 영계였고 거기서 아담이 신령한 몸을 입고 있었다는 정확한 성경 지식이 없었음에도 지금까지 믿고 구원 얻는 사람이 끊이지를 않았다는 여기에 참으로 경이(驚異)가 있다 할 것이다.
왜냐면 인생 구원은 하나님 친히 주관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구원의 요체는 이론적인 '지식'에 있다기보다 "어린 아이 같은"(마 18:3) '사랑의 순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정확한 지식이 있든 없든 구원 받음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단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사랑을 위주로 해도, 그것이 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때와 단지 인간의 상상 속에서 지어낸 것일 때의 차이이다.
인간이 지어낸 상상 속의 하나님, 상상 속의 그리스도를 만들어낸 것이라면 아무리 그것이 사랑, 인애, 자비를 표방하는 것이더라도 오늘날의 현상처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악령 사단이 참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가짜를 많이 만들어 두어 그것을 믿도록 충동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믿고 있든, 하나님 친히 그런 사랑의 순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으심으로써(그렇다고 믿도록 강제하시지는 않음을 성경은 명백히 했다) 그렇게 적잖은 숫자의 사람이 믿음에 들어오든, 진실이 근거가 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다.
악령 사단이 그런 거짓 것을 꾸며 속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이 진실이기에 그 진리를 믿지 못하도록 막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이 구원에서는 사랑의 순종이 핵심이기 때문에 그런 논리적이지 못한 성경 해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구원 받음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얻는 이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수다. 극소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밝혀두고 있는 것이다. 왜 소수인가 하면 순수한 사랑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을 많은 사람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많은 제자가 그 즉시로 물러나고 다시는 따르지 않은 것으로도 이는 입증되고 있다(요 6:60,66). 자기 부인이 가장 합리적인데도, '주인임과 동시에 종'이어야 하는 사랑의 논리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만이다. 내처 '주인'으로 있기를 원하고 '종'으로서의 낮은 자리에 임하려는 자세는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확증되어 있듯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 곧 진정한 사랑의 본질인데 이를 싫어하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이를 수용했음에 반해 사단은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처음부터 범죄하는"(요일 3:8)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사단과 같은 오만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진리가 아닌 세상 종교로서도(여기서는 기독교 외의 종교를 말한다) 사랑, 인애, 자비를 말하지 않는 것이 없다. 다 공통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랑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니 나름대로의 어떤 종교적 요건을 내세우고 그것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영생하는 요건'으로서 그런 것을 내세우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들이 약속하는 내세의 행복과 영원 삶을 목적하고 그런 종교를 영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유일한 요건으로서의 사랑은 젖혀두고 영생만을 욕심 내는 본말전도(本末顚倒)다. 왜냐면 그런 것이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영합되기 때문이다.
종으로서의 낮은 자세로 임하는 사랑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은 그러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느냐?" 하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능력을 말함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의지, 마음이 기본 바탕 또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능력만 갖추어지면 얼마든지 그렇게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 영물들이 바로 그러했다. 그런 악령들은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이를 따르지 않은 경우다. 반면 거룩한 천사들은 그런 자세로 임했음을 나타낸다. 아담 역시 얼마든지 같은 자세로 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단의 충동 질을 받아 교만한 자세가 되어 스스로 범죄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실상은 어떤가.
그리스도 안에서야 그 능력을 받게 된다. 왜냐면 이미 죽은 자가 되어 버렸고 그리고 육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대로의 의지만은 불변이다. 다시 말해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그런 의지를 말한다. 아니라면 사단 등 악령들이 드러낸 오만함이 작동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지 후자를 위한 것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후자에 해당되는 사단 등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처해 있고 아담 역시 죽음에 이른 것이 그 증거다.
모세 율법 아래에서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는(롬 7:24) 경우는 전자에 해당되는 것이다. 후자는 제외된다. 후자는 그런 고뇌에 빠지지도 않는다. 왜냐면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기"(살후 2:12) 때문이니, 그래서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으로서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 즉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므로 빛으로 오지 아니한다 하신 것이다(요 3:18-20).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나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지만 단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이들은 해당이 되지 않음을 밝히신 것이다(:19). 따라서 성경은 오직 회개함으로써 사랑의 순종으로 일관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니 왜냐면 이것이 영원히 사는 법질서를 따르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