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9일 금요일

★하나님의 명령은 "믿고 영생하라"가 아니라 "회개하라"(행 17:30)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믿고 영생하라"가 아니라 "회개하라"(행 17:30)이다



§ 한경직 목사의 "고백"과 길선주 장로의 고백

하나님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방해할 자 천하에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에 대해 우리에게 감히 해를 입히려 하겠는가. 방해하고 그렇게 해를 입힐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 즉 전도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현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고난이 줄곧 세상에서 자행되어 오고 있다. 고로 이 고난은 하나님 친히 허락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 친히 본을 보이신 대로 죽음의 고난 중에 하나됨(우리 생명 있는 자가 아직도 죽음에 처해 있는 상대의 죄인으로서의 죽음의 고난과 함께 함 즉 나 스스로 그런 죄인의 모습이 되어 그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을 통하여 생명의 하나됨으로 나타나는 구원의 역사(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와 하나되어 나의 생명과 하나되게 함으로 그를 구해낸다는 이치이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기본 골격)가 가능해질 뿐 아니라 또한 고난 받음으로써 순종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케 되는" 길이라고 밝힌 히브리서와 일치한다(히 5:8,9).

고로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고난 받음은 필수라고 바울 사도만 아닐 베드로  사도도 그 전후 편지에서 명백히 했다. 고난이 없이는 하나님이 사업이 수행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라도 그런 세상 즉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핍박하는 세상을 만들어놓으셔야 할 판이다. 과연 하나님의 지혜로, 이 세상 곧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르는 이 세상을 그 목적을 위해 이미 만들어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바로왕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신 사실과고 같은 모양새다.

피조물은 자기 자유의지대로 행하여 저질러 놓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미리 내다보시고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역으로 활용하고 계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이 세상의 구조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 것부터가 그리고 우리가 이런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부터가, 옛적에 사람이 생기면서부터 악인 가인이 의인 아벨을 죽이던 것처럼 우리가 이런 고난을 받도록 정해진 것이라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결코 '사람 사는' 것 같이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 대접을 받으셨다면 십자가로 나아가셨을 리 만무하다. 우리도 이러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받기 위함이니, 의(義)를 위해,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고난을 받기 위함이다. 고난 받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해내자면 그 필수 요소가 고난이기 때문이다. 장차 고난 받으실 것을 상징하는 바로 그 세례를 친히 받으려 하실 때, 세례 요한이 이를 의아해 하자 주님의 대답이 "허락하라. 우리가 이 같이 하여 의[모든 올바른 것]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하신 것과 같다. 이 "의를 이룸"이 고난을 통해서임을 알 수 있다.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확정된 것이요 우리의 선택 사항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지못해 받는 고난이 아니니 그 고난 받음의 목적과 의미가 뚜렷해져 있는 이상 우리 각자가 자기의 일로서 기쁨으로 기꺼이 감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일에서는 그 아무 것도 마지못해 강제로 추진되는 일은 존재할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증명이 된다. 한경직 목사가 종교상이라는 '템플'상을 받으면서 자기의 신사참배 사실을 말하며 "고로 자기는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고 다만 한국교회에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신사 참배하게 된 배경을 말할 때 "교인들은 다 신사 참배하는데 나 혼자 아니하면 다른 사람은 다 지옥 가고 나 혼자 구원 받겠다는 인상으로 비쳐지겠기에 그러했다"고 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몹시 부끄러워할 발언이다.

그냥 솔직히 "나는 당시 죄를 지었습니다" 이 한 마디밖에 무슨 할 말이 있는가. 그리고 나서 무슨 말이든 이어 나왔어야 하는 것이다. 구차한 변명이라기보다, 회개하지 않았고 당시까지도 회개가 없었다는 증거다. 회개의 경우 그런 소리가 입 밖에 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이런 사람이 한국 교회의 이른바 "지도자" 행세를 하여 그의 말마따나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나섰으니 한국교회를 위하여 이런 창피스러운 일이 없다. 자기 책임하에 있는 양떼들을 왜 성경대로 바로 가르치지 못하여 신사참배하도록 만들었나? 목회자가 순교할 것을 가르쳐도 그 경고를 듣지 않고 그런 짓을 했으면 별문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런 궤변도 없다. 만일 그가 교회에게 그런 경고를 했다면 자기의 신념대로 순교를 하기로 각오하고 본을 보이는 일에 임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그런 상을 받기 이전에 왜 일찌감치 고백하지  못했는가. 그런 상을 받으면서(그런 상을 받는 것 자체가 세속적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양심대로 말한 것으로 인정될지 몰라도 실상은 자기가 그렇게 "발전한 한국교회"의 공로자로 자처하는 뜻을 함축한다. 그런 종류의 '양심'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 가룟 유다에게도 있었다. "혼자 구원 얻으려고 한다는 인상으로 남을까 해서 그랬다"면, 그러면 전도해도 믿지 않아 많은 사람 멸망하는 판이니 그들 따라 함께 멸망하는 것이 도리라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말인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어야 비로소 나도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식의 말은 조리에도 맞지 않다. 그런 말을 교회 지도자 운운하면서 했으니 한국교회에 큰 욕을 안겨준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초대교회의 초창기부터 핍박 일색이었다가 그 후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세계 곳곳에서 핍박을 면하여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시종일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의 한 지체일진대 초대교회 성도들과 한 몸이요 지금 세계 어느 구석에서든 핍박 받고  있는 성도들과도 한 몸으로 통해 있다.

그렇다면 한 몸이면서 그들은 고난 받고 우리는 고난에서 면제될 수 있는가. 있을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실제 모습 즉 의인이 고난 받는 곳임을 가인의 행위에서부터 하나님은 이미 천명해 보이셨다. 한경직 목사는 얼마나 "좋은" 전도지를 쓰고 얼마나 "헌신적으로" 교회 활동을 했는가.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고 올바르지 못한 것임을 그 스스로의 그 때 그 고백으로 스스로 폭로한 셈이 되었다. 개인을 폄훼할 의사는 없다. 한국교회 실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기에 침묵할 일이 아니므로 부득불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비록 목숨을 바쳤다 하더라도 어떤 내용의 복음인가가 항상 문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이랍시고 가르친다. 또 복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구원된다고 하는 그 구원의 명확한 뜻, 명확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만 선전하는 비극을 낳는다. 그러므로 한경직 목사가 한 일이 "좋은" 것이고 "헌신적"이라는 말은 삼가는 것이 좋다. 그런 말 역시 그 사람됨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걸림 돌이 될 수 있다.

신사참배에 대한 또 다른 궤변이 있다. 그것은 당시 신사참배는 교회 유지 차원에서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우상(神)에게 절 함으로써 기독교를 그나마 유지했으니 오히려 공로자가 아니냐 하는 것인데 이는 바로 악마의 소리다. 아무리 최악의 수단으로 지금 북한 지하교회를 북한 독재자가 핍박하여도 교회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 않는가. 그 교회가 교회됨을 부인하려는가. 당시 로마시대 교회는 이방신 (異邦神)에게 절함으로써 그렇게 300년간이나 유지되어 왔던가? 아니다, 극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건재해온 것이다.

만의 일에라도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 핍박하는 집권자들을 당장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제거하셨을 것이다. 그런 경우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핍박자들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도 없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주제넘게 걱정 안해도 된다. 우리는 우리 일만을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아래 그렇게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께서 능히 자기 교회를 왕성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 유지 보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 그는 교회 타락에 큰 기여를 했던 장본인으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기억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북한 교회가 그 증거다.

콘스탄틴 이후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혼란에 처해 왔던 것이다. 핍박을 받던 초대교회부터서는 어디서나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하는 고로 그런 혼란이 비교적 덜했으나 교회가 세상의 품 안에서 보호를 받는 시대가 되고 나니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줄 착각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고 이런 현상은 오늘날까지 여전하다. 그래서 핍박 없이 온실에서 자란 신생국가 미국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선교사들의 전도를 받고 일어난 한국교회의 사정 역시 별반 나은 것이 없었다.

물론 개개인으로 보면 주기철 목사처럼 성경적으로 복음을 바로 깨달아 정상적인 믿음 생활을 한 사례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수박 겉 핥기 식의 피상적인 내용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믿음이 아니면서도 믿음인 줄 그릇 알아 많은 사람이 믿는 자로 자처하게 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이다. 만일 그러한 사정에서 자기를 그리스도인으로 그릇 인식하다가 신사참배라는 위협에 굴복하였다면, 그 사람은 해방 후 세월을 보내면서 복음을 진정 깨닫게 되어 참으로 은혜 안에 들어오는 경우 얼마든지 구원이 되고 순수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복음을 알고 성령을 받은 후에 그렇게 신사참배하였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되어 다시는 죄 용서가 없다. 한경직목사가 위의 예에서 전자에 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섣불리 한 개인을 두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가 표명한 그런 발언이 불행히도 그의 행적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그가 한국교회에 기여했다는 말만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개인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실상을 밝히는 것도 오늘날 교회(국 내외를 막론하고)의 실상을 제대로 지적하기 위함이다. 실상을 알아야 회개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친구의 유산인 과부의 재산을 일부 가로챈 교회 주동 장로가 자기 실상을 뒤늦게야 알고 "내가 바로 아간입니다!"(수 7:1) 하고 교회 앞에서 실토 고백할 때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의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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