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5일 월요일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2)ㅡ이병철 질문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2)ㅡ이병철 질문



8.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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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코 거부할 세상에서의 "위로"


그리스도께서는 영생에 이르는 길로서 그 부자 청년에게 가진 바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흩어 나누어 주고 빈 몸, 빈 털터리로 지내시는 주님을 따르라 하신 것이다. 부유함의 의미는 이웃과 나눔에 있다. 왜냐면 한 몸됨을 인하여 똑같이 하나가 되어 "함께 즐거워 하고 함께 울기[롬 12:15]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몸을 이룬 모두가 다 함께 누리는 부유함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부유하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나의 부유함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다. 그것이 한 몸의 이치이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는 이들은 오는 세상에서 다시는 위로가 없다"[눅 6:24,25/16:25] 하셨는데, 당신은 이 말씀을 무시하고서도 어떻게 구원의 말씀만은 믿을 수 있다고 하는가.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 산다는 것, 삶의 낙을 누린다는 것은 이 고해(苦海)의 세상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말씀이 마지막 때 당신을 심판하실 것이다. "위로"라는 말은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 결코 위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임을 알아들을 양식도 이성도 없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고[딤전 6:8],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 13:5] 하였다. 이는 절대로 이 세상 살라고 하는 말이 아니니 오직 일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생활지침이다. 그래서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하였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당한다는 말이 있는데 한 개인이 그런 식으로 생활 신조를 삼으면 절대로 세상에서 잘 살 수 없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거니와,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물건을 매입하는 자들은 그 물건을 소유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고전 7:29-32] 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세상에서 무슨 삶의 낙을 향유하겠다는 말인가.

때로 말하면 바울 당시의 그 때보다 지금 이 시대가 더 절박한 줄로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보다도, 당시 바울은 이런 시대를 겨냥하여 성령으로 예언한 것이다. 아니면, 세상 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낫고 못함이 없이 같은 본질인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대수가 아니다. 앞으로 적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자처하고 나설 것이니 이제는 드러내놓고 유신론을 표방하여 무신론은 제물에 사라지게 마련인 시대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열심히 파고들어야 하는 때요 그 가르치심에 충실해야 하는 때다. 적 그리스도가 비록 하나님을 인정하나 그 스스로가 하나님으로 위장하는 터이므로 성경만은 박멸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신약이 그 공격 목표이고 구약을 그는 악용하게 되어 있다. 즉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그런 뜻으로 모든 인류에게 주입시키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그리스어 대신에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더욱 선호하게 된다. 장차 그런 명칭으로 나타나게 될 악한 자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로 널리 알려져 있으니 겸용 또는 혼용함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예수 메시아"로 호칭하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그런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한 몸 구조에서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자기 부인을 계속 우리는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색깔만을 분명히 하면 적 그리스도의 그 어떤 혼탁한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음이다. 왜냐면 이것이 그 유일한 차이가 되어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다른 것은 다 똑같은 모양을 취할 수 있어도 이 자기 부인에서만은 모방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의 본색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이요 자기 자신을 위하는 본색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사해[dead sea]

이 고해(苦海)요 사해(死海)인 세상에서 위로 받기를 거부하면서 어떻게 가히 삶의 낙을 누린다며 산다고 할 것인가. 아예 '산다'는 생각 자체를 깨끗이 말끔하게 접는 것이 아니랴. "고해"가 불교 용어라면 거기서 한 술 더 뜬 의미의 "사해"는 성경의 용어다. 이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죽음이기 때문에 고난이 있음이다, 고난은 죽음의 영역이지 처음부터 생명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고난"이라고 어정쩡하게 표현하기보다 확실하게 가름하는 것이 제대로 실상을 이해하기에 좋은 것이다.

모든 인류가 다 "죽은 자"요 우리 모두 "허물[transgressions, trespasses]로 죽어"[엡 2:5] 있는 것으로 성경이 밝히고 있지 않는가.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無割禮, uncircumcision)로 죽었다"[골 2:13]고도 했다. "육체의 무할례"는 "육신"[롬 7:14-8:13]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고로 이 '죽음의 바다'에서는 '생명' 또는 '사는 것'은 없다.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이니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요 6:45] 것이다.

이 사실에 눈뜨지 않는 한 구원은 한마디로 '불가능'이다. 죽은 줄을 모르는데 어찌 생명으로 나아오리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든 하나님의 구원이 해당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주 남남이 되어 버린다. 병든 자라야 의사를 찾는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막 2:17].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다"[:17]는 것은, 죄인이므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은 자를 가리키심이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실제로는 비록 죽을 병에 걸려 있어도 의사를 찾지 않는 법이다. 예수님의 자기 부인에 대한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고 예수님을 떠난 것도, 굶주려 죽게 되어 있는 실상을 모르고 배부르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는 말씀에, 베드로가 "생명의 말씀이 계시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요 6:68] 하고 대답한 것은 바로 이 죽음에 직면해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릇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죽음의 바다인 줄 알지 못함에서 오는 심각하고도 중대한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를 믿어 "눈뜬"[행 26:18] 사람은 이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온 터라] 감히 이 세상에서 살 생각을 못하는 법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 살려고 하는 사람은 애당초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음을 성경의 권위로 확언할 수 있으니, 각자 자기를 살펴 조금이라도 혼동이나 혼돈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왜 현재의 모든 인생이 "죽은 자"인 줄 아는가 하면 인생은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어야 사는 것인데 범죄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네가 죽을 것이라"[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는 경고를 받을 때의 그 "죽음"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인간이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하고 있는 동안은 이것은 산 자의 모습이 아니라 죽은 자인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다. 자기 세상이고 처음부터 이 자연계에 살도록 지으심을 받은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만은 죽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나오기 전에 가장 먼저 이 사실부터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채 영원 세계로 나가게 되면 영락없이 멸망뿐이다. 또 이 세상에서 이 사실을 수용하지 않고 여전히 산 자로 인식하여 죽음 아닌 생명으로 이 세상을 알고 있을 때는 스스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상태를 생명으로 인식했던 바로 그대로 신령한 몸으로서의 정작 생명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면 그 스스로 그렇게 택했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 끝나면 생명이 종결되는 것으로 믿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으므로 자유 선택의 결말로 간주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이 죽음이라는]을 믿지 않기로 선택한 결과대로 되는 것이다. 모든 범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복종하지"[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않은 결과인 줄 감안한다면 이는 당연히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믿은 대로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대로 됨이니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고 믿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면 구원이 해당되지 않는 이치 그대로다.

이 세상이 죽음이라는 것은 죽은 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계이므로, 비록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도 [우리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요 역시 죽은 자로서의 모습이실 수밖에 없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 오신 것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요 산 자이나,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죽은 자의 모습임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 받음을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으로[요 20:21,22] 표현하심이 이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된 것이다.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아들이다[요일 3:1,2]. 현재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신령한 몸을 입고 영광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본디부터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셨으니 이는 정확히 무슨 뜻인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이 "아들을 내어주셨다"[롬 8:32]는 것으로 표현됨과 같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심이 바로 그러한 내어 주신 의미 곧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고난을 받도록 하시는 의미 바로 그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고난 받으라 하심이다. 죽음의 세계에서 죽은 자와  한가지로 되어 죽으라는 의미이시다. 이 세상에서 우리 구원 받은 자에게 이 외에 달리 의미가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 이전처럼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지 않은 이유다. 왜냐면 현재 아버지 친히 우리 인간들 위해 고난 중에 계시기 때문이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행 26:14] 하심과 같다.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의 의미이다. 구원 받아야 할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도 죄 중에 있어 구원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들과 하나되신 의미에서 그러하시다. 그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하나님 친히 이러하시니 역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한 몸의 체제를 이루어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고난 중에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있음은[롬 8:22]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고로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의 의미를 모르거나 무시하여 어찌하든지 이 세상에서 위를 받아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여 편안함을 찾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기피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이다. 또 반드시 이런 각오 아래 믿음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처음부터 이와 같이 성경대로 자기 부인을 강조하면서도 "사람들이 이런 자기 부인의 가르침을 과연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과연 이 자기 부인이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일까" 하는 마음조차 슬그머니 찾아들기 시작했었다. 너무 힘든 것 또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어, 보다 더 확실하게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득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있었는데.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금 위에서 설명한 대로의 "말씀 해석"이 나온 것이어서 여간 기쁜 것이 아니다.

아주 확실하게 단정적으로 못을 박은 말씀의 올바른 제대로 된 해석인 것이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우리의 고난 받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여하한 일이 있어도 믿기 전처럼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정당화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로써 확실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해답이 바로 우리 코 앞에 있어도 이를 발견하지 못하니 우왕좌왕하는 난맥상(亂脈狀)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것이 성령의 계시로 가르침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낫 놓고도 기역자 모른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성령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짚어 주시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 깨닫기가 이토록 불가능하니 손 가까이 있어도 이를 집어내지를 못하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아주 그럴 듯한 논리를 폈으나[눅 20:27-33], "주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음"[눅 20:37,38]이라 하신 한 마디에 두 번 다시 말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드심이 그러하다.

"생명에 이르게 할 하나님의 계명"[롬 7:10] 곧 "하나님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롬 8:3]이라 할 때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계명 곧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함이다. 그래서 이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은 하시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斷罪) 하셔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다"[롬 8:4] 함이다.

이 "율법의 요구"는 바로 위에서 말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육신 곧 "죄의 몸이 멸해진"[to be destroyed-롬 6:6] 다음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현재는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어 하나님의 모든 계명[율법, 그림자적인 모세의 율법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의 율법,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망의 쏘는[to sting] 것은 죄요 죄의 권능[strength]은 율법이라"[고전 15:56] 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롬 7:7] 함과 같다.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8]. 하나님의 계명을 통하여 법을 깨닫게 되니 내가 각양 탐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8,9/약 1:15].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롬 7:10]이니 곧 삶의 도리, 사는 방법이 계명이요 율법인 것이다. 할례를 받아야 하고 날과 달과 절기를 지켜야 하는 모세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율법이 확립되기 이전에 이 실체에 대한 그림자 역할로서 잠시 작용한 것뿐이다. 이제는 내가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으므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에 걸맞게 나는 "새 생명"[롬 6:4]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생명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가운데 "생명에 이르게" 되는 즉 생명을 유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고 사단 등 악령들이 범죄하게 된 것은 이 생명의 계명[율법]을 지키지 않고 범했기 때문이다. 그 계명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부인에 있으니 곧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든 피조물이 한 몸 체제를 이루어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에 있는 것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됨이니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을 따라 행함이다.

이를 성경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 "성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약 2:8]이라 한다.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고 했다[:8]. 그러므로 "이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12]고 경고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의 법"[갈 6:2]을 성취하라 하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고전 9:21]이기 때문이다.

ze:15.0pt;">"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심과 같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이다. 이 법 아래 있으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2] 것이다. "무엇이든지 남이 자기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마 7:12]라 하심과 같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7-40]이라 하신 그대로다.

그러므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갈 5:14] 했고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롬 13:8] 했으며,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으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9,10] 하였다.

그러므로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7,18] 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모세 율법의 실체로서 오셨으므로, 그림자로서의 성격으로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할례를 받고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등]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어 있는 현상을 곡해하여, 하나님의 율법마저 존재 가치가 없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심이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이렇게 곡해하는 풍조가 소위 기독교 교회라 자처하는 거의 전체를 휩쓸어 오염시키고 있으니 과연 이 세상은 사단이 그 지배자요 신(神)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단의 조종이 없다면 인간의 이성이 이다지도 마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성경이 그토록 명백하게 설명하여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치도 않는 해석으로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이와 같은 명백하고도 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무리 믿는 사람이지만, 계속 나를 괴롭히며 치근거리는 사람이 있기에 그 사람을 붙잡아 혼을 내 주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지 못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있다 하지 않는가". 늘 설명해 왔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있는가 그 목적 의식이 분명함과 그렇지 않음에 따르는 차이다.

살고자 하면 남의 삶을 방해하는 자를 징계하여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함이 옳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을 회개시켜 악행을 버리도록 하고 영생 얻도록 만들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신념이 있을 때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위의 그런 말을 한 사람도 함정에서 근무하던 수병(水兵)이었지만, 같은 처지의 어떤 수병은 함정 근무를 할 때도 반드시 일정 시간을 정해 매일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이를 보고 동료 수병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야유를 하고 따돌리고 괴롭혔다.

그 중의 하나는 기도하는 이 수병의 머리에다 대고 신고 있던 오물(汚物)투성이의 자기 군화를 집어 던지는 등 야만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 수병은 아무 말 없이 그 군화를 깨끗이 닦아 그 수병의 곁에 놓아 두기를 되풀이했다. 이 박해자는 마침내 그 용기에 감탄하고 자기보다 인간적으로 한 수 위의 신념 있는 동료로 알고는 그 후로는 다시는 그런 짓을 아니할 뿐 아니라 그런 인간성을 지니게 만든 하나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껴 마침내는 자기도 회개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둘의 합심 기도로[마 18:19] 그 함정에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실화가 있다. 믿고 구원 얻는 사람이 예로부터 적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경고대로[눅 13:23,24] 그런 예를 보기는 드물지만, 어쨌든 이것이 사람 삶의 정도(正道)임을 알고서야 어찌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일하고자 하지 아니할 것이며, 살고자 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만회 못할 손실이 아니랴. 두 경우 다 미국의 군대 내에서 일어난 사례다.

세상 사람은 이 둘째 수병을 바보라 하고 어리석다 하고 시골사람이라 하고 단순하다고 핀잔을 주게 되어 있다. 반면 첫째 소개한 그 수병을 사나이 같고 똑똑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한결같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어린 아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 관점에서는 심약한 것으로 비쳐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실 때도 사람들은 "평소에는 말씀이 권위가 있고 온갖 기적도 행했지만 저렇게 맥없이 당하고 죽는 것을 보니 아무 것도 아니구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게 죽으심이 하나님의 아들되신 증거였다. 심약하다면 그런 적극성과 능동성을 나타낼 수 없다. 심약하다면 그냥 당하기만 할 뿐이지 자진해서 그 구두를 깨끗이 닦아 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것이니 사랑이 곧 강자(强者),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의 유유한 풍도(風度)인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목적이 자기를 위해 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사람을 구원해내는 그리스도의 일을 함에 있음을 성경을 통해 잘 터득한 고로 그 배운 대로 실천한 것뿐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5리를 가 달라고 강요하는데 자진해서 10리를 동행해 주는 것이 바로 그런 자세다. 힘이 있건 없건 누구나 공통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강자의 힘이 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의 힘 그리고 그 열정인 것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망가져도 사람의 영혼이 영원한 속성을 지니고 있어 인간은 영원한 존재다. 인간이 죽음을 슬퍼하고 그것을 고통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이 영원성 때문이다. 바로 그 증거다. 그래서 그런 영원성에 비할 때 현재의 이 인생 삶을 무의미하다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죽은 자'이므로 오직 회개하여 '사는 자'가 되는 데에만 의미가 있다. 지금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시대다.

그러므로 영생에 이르는 사람은 "참고 선을 행함"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니[롬 2:7,10/요 5:29/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가 참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믿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삶으로써 죽은 행실을 버리지 못해[마 7:21/25:45] 자기를 살려 주신 즉 산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거역할 수 있다.

처음부터 믿지 않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져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음에도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요 3:19] "불의를 좋아하여"[살후 2:12] "악을 행함으로써 빛을 미워함으로 빛으로 오지 아니함"[:20]으로써 하나님의 명령[뜻]을 거역함과 똑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회개하라 하시는 것은 악을 버리라는 것인데,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삶으로써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살후 2:10] 결국 "구원을 이루지"[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답하신다"고 하지 않고,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그렇게 하신다고 바울 사도는 천명한 것이다[롬 2:7-10].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만드셨고 선하게 살도록 하셨는데 도리어 악을 행하니 그 사람이 살겠는가. 좋은 것을 선이라 하고 악은 그와 반대로 나쁜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좋은 것이고 불행하게 사는 것은 나쁜 것이다. 불행하게 살아서는 사람을 만드신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악을 행해 왔던 것을 회개하라 하시는 것이고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 지금 이 '그리스도 시대'의 의미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악을 버리라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고 도리어 악을 선호하고 스스로 그 악을 택하는 행동을 하니 그 선택한 그대로 영원토록 악 다시 말해 좋지 않은 모든 것이 그에게 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그래서 영원한 멸망이고[요 3:16]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계 14:11] 하였다.

그러므로 영원히 이어져 나갈 악의 고리를 지금 이 때 이 세상에서 스스로 단절시켜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현재 남아 있는 모든 인생의 최대 명제다. 세상 종교에서는 가급적 선을 행하기를 힘쓰라고만 하지 거기에 절대적인 의미를 붙이지 못한다. 사실상 선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이 주장하는 자기네 고유의 종교행위를 강조할 뿐이다. 즉 그런 종교 행위로써 구원 얻는다 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 자체가 멸망으로 통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롬 2:7-10].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종교의 근본적 차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 영생과 심판으로 갈라진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무조건 사랑의 화신(化身)쯤으로 착각하나 바울은 여기서 명백히 "주님의 두려우심"[the terror of the Lord]이라고 했다. 재판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양면성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요 3:16] 구원 얻는다 함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을 믿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악[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까닭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으로[성령으로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시어 육체와 영혼의 불가분성으로 나와 영원히 하나 되심을 인해] 확정되어, 나의 "옛 사람"[롬 6:6/골 3:9/엡 4:22]이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 기정 사실화되어 있기에 악을 행함 즉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실제 사실이었고 무덤에 장사 지내지신 것이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사실이 실제이었던 것만큼 나 자신이 죽어 무덤에 묻힌 것 역시 꼭 그대로의 실제인 것이다. "원천 차단"이고 "불가능"인데, 왜 여전히 악을 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믿는다는 사람으로서-마 7:21/25:45] 또 성경에 그런 심각한 경고가 넘쳐 나는데도 달리 행동하는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자기 스스로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살후 2:12].

하나님의 새 창조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창조의 역사는 완벽하기에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해 피조물 자신에게 새로 창조된 나 자신에게 완연한 허물이 있다는 그 뜻이다. 아담에게 허물이 있었음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하다. 아담의 범죄나 일부 영물들[사단을 위시한]의 불복(不服), 범죄 행위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못 창조하셔서 된 결과가 아닌 것이다. 그 스스로가 정하고 만든 결과다. 거룩한 천사들 역시 자기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결과다.

얼마든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거룩한 천사"들이 그 증거다] 그들 스스로가 범죄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음과 영원 멸망에 처해진 것이다. 우리의 새 창조도 마찬가지다. 불복이냐 복종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완전 일임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 함이다. 때문에 이 세상을 가리켜, 장차 전개될 영원한 세상에서의 생명 혹은 죽음이 결정되는 전생(前生)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전생 개념이다. 우리가 현재 전생에 위치해 있고 전생에 대칭되는 영원 세계는 이 전생 이후 펼쳐지는 세계다. 엄연한 인과 관계에서 벗어남이 없다.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죽음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범죄하지 않아야 이 죽음의 고난을 면하게 됨은 당연하다. 구원을 받아 원천적으로 새 창조를 입어 이 죽음에서 비록 벗어났어도, 다시 우리 스스로 범죄하여 죄의 '결과'를 맺으면 구원은 '원인' 무효가 되어 버림은 당연하다.

"의를 행하고"[요일 2:29] "선을 행하도록"[요삼 1:11] 새로이 우리가 창조되었으니 당연히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해야 즉 죄를 짓지 않아야 그 '원인'에 그 '결과'가 된다. 애초의 구원의 '원인'이 살아 있게 된다. 이 경우 우리의 구원은 영원불변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원인을 제공해 주셨으니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각자 맺게 되어 있음이다. 세상 종교는 거꾸로, 자기의 행위를 원인으로 보고 구원을 그 결과라 착각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혼돈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함"이다. 이는 현재의 인간 상태 즉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산 자'로 여기는 데에서 오는 착각이다. 하나님도 부정하고 성경을 알지 못하여 믿지 않으니 '죽은 자'임을 알 리도 없다. '죽은 자'로서 아무 선[또는 의]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산 자'로 만드신[창조하신] 다음 선을 행하는지 여부를 보시는 단계가 시험 무대로서의 지금의 이 세상이다.

그러나 아예 산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경우도 있으니 하나님을 알려고도 않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의 실상이 그러한데 이 경우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 3:18/고후 4:3].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해서 덮어놓고 그렇게 속단할 것은 아니니 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실 뿐이다. 언제든지 회개하여 돌이키면 살 길이 열려져 있음이다. 이 세상은 사람 사는 장소가 아니고 회개할 기회를 잡는 곳이고 스스로 회개하였으면 다른 이들도 회개할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힘쓰고 노력하는 때요 곳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어 산 자가 되어 있어도 스스로 "죽은 행실"[히 6:1]을 함으로써 아담처럼 죽는[이 경우 멸망이다] 경우도 흔하다. 이 경우 죽은 자로서 산 자로 새 창조를 입은 후 다시 죽은 자로 회귀해 버리는 결과이니, 아담 역시 처음에는 자연계에 속해 있던 몸이었다가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후에도 범죄로 다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회귀해 버린 것과 같다. 산 자로 창조되었으나 그 스스로 죽은 자되기를 선택한 결과다. 이 순서는 우리도 같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모두가 아주 좋았다"[창 1:31]고 했다. 즉 아주 "선하다[indeed very good]"는 뜻이다. 고로 이런 하나님의 "선한" 세계에 악이 발붙일 틈이 없다. 악한 자, 죄인 등이 천국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면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 좋은[선]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악] 것은 내어 버린다"[마 13:47] 하심과 같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다시 말해 부모라고 나와 직결되어 있음도 아니고 자식이라고 제2의 나 자신이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뿐이다. 부모가 자식 운명을 좌우하지 못하고 자식의 운명을 부모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함이니 자식은 자식대로의 인생이 있을 따름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이 의미에 잘 들어맞는다. 나는 우주 천하에 나 하나뿐이다. 차라리 "독존(獨存)"이라 했으면 더 잘 들어맞을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칼]을 주러 왔다. 내가 온 것은 아들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4-37] 하심과 같다.

부모 자식 간에 불화하고 원수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리 없다. 그런데 왜 불화하게 하고 원수 되게 하시려고 화평이 아닌 쪼개내는 칼을 주려고 오셨다 하셨는가. 앞에서 말한 대로 개인의 자주 독립성을 말씀하심과 더불어 새 피조물로서의 새 ‘부모 자식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이요 구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전 것"[고후 5:17]과의 완전 결별이다. 죽었으므로-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죽는데 부모가 어디 있고 자식이 무슨 소용인가. 죽으면 모든 것과의 이별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는 말씀이나,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29,30] 하심이 모두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기 전의 모든 인생사·세상사가 죽음 일색(一色)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함을 말함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딤전 5:8]라 하였다. 성경에서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사람 사는 올바른 도리'다. 죄는 이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이요 성경에 말하는 의(義, 올바른 것)와 선(善, 착한 것, 좋은 것)은 이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양심의 소리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의 도리를 지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새 것’과 ‘이전 것’[고후 5:17]의 분기점(分岐點)에 그리스도께서 위치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영생을 얻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새 창조로 다시 출생함으로써 새 생명 가운데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에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기존의 모든 인간 관계, 가족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받아 모심[그리스도를 영접]에서 오는 새로운 자주 독립성을 말함이다.

즉 부모 자식이 반대한다고 해서 그리스도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부모 말을 듣는 것이 효(孝)일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를 잘못 파악함이니 결국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세상 곧 현재 인간의 위치가 죽음 일색임을 자각하지 못함이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구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 바로 "누구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나"[요 3:16] 동시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올[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6:65] 하심을 가리킴이니,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살후 3:2]이라 함과 같다.

말하자면 가족 중 나 혼자만 믿음으로써 구원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인생이 온통 죽음이라는 현실을 가족들이 받아들이지를 않으니 어찌 하랴.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나도 믿음을 포기할 것인가. 바로 여기서 나는 나요 나의 가족이 내가 아니고 내가 나의 가족이 아니라는 이른바 각 개인 고유(固有)의 자주 독립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는 천국에서는 과거의 내가 내 부모의 자식이요 내 자식의 부모였다는 ‘가족 관계’가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 것으로써 증명되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고려되는 상황이라면 모든 인간은 다 그런 횡적 종적 관계에 걸쳐져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이 없으니 그렇게 따지고 들면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럴 리가 없을진대, 그러면 거의 사람마다 자기 가족 관계에서 어떤 이는 구원되고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함으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서도 고스란히 그냥 그대로 온전한 가족 관계가 이루어져 있지 못한 상태일 것이니, 과연 그럴 때 기존 가족 관계에서 외톨일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므로 그런 사람은 그 경우 천국에서 외로워 어떻게 살 것인가.

따라서 외로워하지도 않고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에 천국의 극락(極樂, 더 이상일 수 없는 최고도로 향유하는 삶의 낙)이 아닌가.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가족 관계는 천상(天上)에서의 영원한 가족 관계를 단지 상징하는 것이라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있게 된다. 만일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또한 모든 인간이 범죄를 아니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영생하게 된다고 가정한다면야 그런 복된 가족 관계가 영원히 천국에서까지도 연장된다고 하겠지만, 현실은 범죄로 인하여 죽을 자는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고 영원히 살 자[범죄하지 않아 사람 사는 도리를 지킴으로써]만 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아무리 가족 관계라도 강제적인 이별이다.

그래서 인간 고유의 자주 독립성이 거론되는 것이다. 즉 인간 개개인이 세상에 생겨나기 위해서는 가족 관계[부모 자식이 되는 인과(因果) 관계]가 없을 수 없지만 실질상으로는 개개인이 독립적인 존재이다. 다시 설명이지만 이는 인간이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부모도 모르는 후레자식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개인 혹은 자연인으로서의 존엄성, 고귀함, 개성을 말하는 것이다. 늙었다고 자식에게 매이는 것도 아니고 어리다고 부모에게 매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리기 때문에 부모의 은혜를 입어야 하고 늙었으니 자식에게 의존하는 것은 현실이다. 그래서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하는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딤전 5:8] 자라 하였다. 은혜를 입었으니 은혜를 갚아야 하고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해야 당연한 것이니 이것이 사람의 도리, 사는 법이다. 이런 도리를 따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심은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라 하심인데] 죄가 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이미 아담의 범죄와 죽음으로 확정되어 선례(先例)가 되어 있은즉, "믿음[다시 말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배반하는" 것이 되고 불신자보다 더 악할 수밖에 없다.

불신자는 믿지 않기 때문에 멸망이고, 그런 사람은 불신자보다 더 악하기 때문에["믿는다"고 말은 해도-마 7:21/25:45] 멸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 좌고우면(左顧右眄)할 것 없이 믿고 순종한 다음 자기 가족도 믿을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는 것이 정상이고 도리이지, 처음부터 가족에게 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인간이 인간 스스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기[창조됨으로써]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가족 관계보다 중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닌가. 이는 상식 차원에서 판단할 일이다. 인간 곧 내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도리 중에 첫째 가는 기본 도리 즉 도리 중의 도리이다. 내가 낳았기 때문에 또는 내가 낳아졌기 때문에 맺은 인간 관계 즉 가족 관계라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창조된 나와의 관계는 더 근본이요 기본적이고 더 가깝고 밀접한 관계가 아닌가.

그래서 내가 물에 빠졌으면 나부터 먼저 건짐을 받는 대로 구조된 다음에 나머지 내 가족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일의 당연 순서이지, 내 가족이 구원되지 않았다고 나 역시 구원되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사람의 양식(良識)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 먼저 구원 받고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함이 아닌가. 가족이 아직도 물 속에서 허우적거린다고 나에게 구명정이 다가와도 이를 거부한다면 그런 어리석음이 어디 있는가. 내가 구원된 다음에 나도 내 가족 구원하기 위해 손을 보태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 도리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구원, 개개인의 구원이 시급하고 화급하고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는 뜻이다. 죽음이 눈앞에 갑자기 닥친다고 했을 때 바로 그 순간 자기 가족 생각하고 누구 생각하고 할 여유가 없음과 같다. 오직 자기 자신 "죽음에 이르렀구나, 속절없이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딴 생각이 날 리가 없다. 구원되었으면 구원된 다음에 가족 생각도 나는 법이요, 죽음이면 죽은 다음에 자기 가족 생각도 나는 것이다[눅 16:2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마 12:39/16:1-4] 세상이라 하셨다. 사단의 나라가 되었으니 당연히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음란하다"는 것은 인생들이 마땅히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떠나 있음을 말씀하심이다. 마치 남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한 쪽이 자기 상대를 떠나 다른 이성에게 마음을 두고 있음과 같은 양상이기에 그러하다.


이회장이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어 주지 않는가?" 한 것과 같은 생각으로 당시 '바리새'파(派)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표적"[또는 증거]을 구했다. 분명하게 그런 증거를 드러내면 믿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대로 똑똑히 분명하게 드러내시면 우리 위해 죽으시는 일은 참으로 ‘물 건너가 버리게’ 된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의 선지자 혹은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에 오신 이를 죽이려 들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나타내 주어도, 처음부터 믿지 않는 마음은 결코 돌이켜질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회장이 질문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시면 누가 믿지를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강제가 되고 간섭이 된다. 믿음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밖에 안된다. 억지로 믿지 못하게 하시는 유일한 이유는 악인들을 걸러내심에 있다. 즉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이들만 오직 구원하시고자 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시는데"[:9] 나는 "불법을 좋아한다면"[살후 2:12] 어찌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 우리 구원인즉 서로 반대가 되는 것끼리 융화하고 화합할 리가 없다.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는 것이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 3:7,8]이라 함과 같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시는 것으로는 현재 상황 이상 가는 것이 없다고 판단하면 가장 정확하다.

그러므로 소[牛]는 소대로 말[馬]은 말대로 끼리끼리 모여드는 것과 같이, 그런 강제나 간섭이 없이 오직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사람들만이 모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죽으심의 의미 곧 죄 짓는 자는 결코 살지 못하고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거 죄의 청산]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다시는 죄를 지을 수가 없게 된 구조적 장치[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 됨]가 이루어졌다는 희소식(喜消息, 복되고 좋은 반가운 소식)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요구될 것이 없다.

하나님의 실존(實存)에 대한 증거는 성경에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롬 1:20] 있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어떤 확고한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또는 정작 중요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핵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됨에 대한 자각이다. 그런 것이 없이 단지 영생과 영원한 영광만을 구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 되고 옷을 뒤집어 입는 꼴이 된다. 그런 몰골로는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던가"[사 53:1] 하지 않았던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하셨지만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롬 6:65] 하신 것처럼, 악인 즉 불의를 좋아하는 자는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설혹 인류 전체가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로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 첫째 가는 악인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악이 좋아서 악을 지은 것이 아니라 악인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양심으로 깨닫고 있으면서도 "육신[육체]"의 욕심에 사로잡혀 그렇게 되어 있었다면[롬 7:5-8:13], 얼마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와 의인이 되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그 뜻이다.

그런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오지 않는 한, 죄인 아닌 이가 없는데 어찌 감히 의(義)를 논하리요[3:10] 마는, 그러나 "불의를 행하는 것이 좋아"[살후 2:12]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을 버릴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친히 구원 받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다[행 28:26,27]. 비록 믿는다 하더라도 도중에 그와 같은 마음이 되어 그런 "불의를 좋아함"이 드러나면 심판의 대상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렇다[살후 2:12/마 7:21/25:45].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한 사람’으로서 "선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자기도 선할 수가 있고[아니면 당시 자기 딴에는 선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단지 그 외에 더 보탤 것이 있을까[영생 얻는 데에] 하고 그리스도께 찾아 온 청년 부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계명"[눅 18:20]의 본질로서의 "자기 부인"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버리고[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흩어 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죄요 불의, 불법, 악인 것이다.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여겨 차마 버릴 생각을 못함이 바로 자기를 위함이기 때문이니 그래서 부자가 천국 가지 못하는 것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비유하신 것이다. 왜냐면 ‘한 몸’ 된 이치로만 사는 삶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중심 곧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말씀"[요 14:21,23]의 요강,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은 "자기 부인"이다.

한 몸의 이치대로 사는 삶의 도리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체제이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하는 구조가 아닌 것이다. 고로 생명의 이치에서 나는 항상 일방적으로 주는 것뿐이다.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즉 받기 위해 내 스스로 노력하는 체제가 아니다. 오직 주기 위해서만 힘쓰는 것이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위하고[이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뜻이다], 그 지시["계명", "새 계명"-요 13:34]를 따라 나와 함께 된 같은 ‘지체(肢體)’로서의 이웃을 위함이다.

원래는 내가 이웃을 위하면 이웃이 나를 위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모든 것이 상각(償却)이 되는 것이나, 이 세상에서는 악한 자 위주이고 의인은 소수이므로 따라서 나 혼자만 손해 보는 듯 하는 인상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믿는 형제들과는 그렇지 않으므로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29,30] 하신 것이다.

즉 내세에서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백배를 받는다 하심이다. 위와 같은 ‘한 몸’의 이치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까닭이다. 교회가 그 시범(示範)의 장(場)이 될 것을 말씀하심이다. 초대 교회가 당연히 그렇게 했다[행 4:32]. 그래서 이 ‘줌[to give]’의 비법을 설명하시면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計測, 計量]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눅 6:38] 하셨다.

즉 아낌없이 다 주면, 그 ‘아낌없이 다 준 것’이 바로 내게 그대로 돌아오되 내 이웃의 숫자만큼이나 배가(倍加)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은 그런 사랑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중심 일색이며 교회라 하더라도 "적은 무리"[눅 12:32]의 집합체이므로 그 정도의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기도 아니고 현장일 수도 없다. 지금은 무조건 사람 사는 때도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본격적으로 사람 삶을 시작할 때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신체의 순환 원리를 보라. 일방적으로 흐름이니 곧 주는 것이다. 거꾸로 받기만 한다고도 말할 수 있기는 하다.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역시 양면성이다. 그러나 그냥 머물러 있지 않고 동시에 계속 흘러 빠져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주안점은 흘러 들어오는 데에 있지 않고 흘러 빠져 나가는데 있다. 머물러 있어 그 머문 것이 계속 쌓여져 가야만 '받는다'는 개념이 성립됨이다. 머물러 있지 않으니 '주는 것'뿐이라는 결론으로 쉽게 이른다.

혈맥이 흘러 들어오는 것과 흘러 나가는 것과의 모순과 상반성의 조화는 이 '둘이 하나'라는 데에서 답을 찾게 된다. 그래서 초대(初代)교회에서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共用, 通用)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음"[행 2:44,45/4:32]을 성경은 강조한다.

개인적인 소유(所有)의 개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니 즉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전체에게 봉사하기 위한 지체(肢體)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이는 당연하고 또 굉장한 축복이니, ‘되’[斗]로 주고 ‘말’[‘되’의 열 갑절]로 받는 정도가 아니라 한 움큼 주고 차 떼기로 받는 것 그 이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자기 부인"을, ‘말’로 주고 ‘되’로 받는 것과 같은 또는 차 떼기로 몽땅 주고 자기는 알거지가 되는 것쯤으로 착각하고 있다.

성경을 알아도 잘못 아는 폐해가 이와 같이 너무나 크다. 들어오는 복을 제 발로 걷어차 버리는 꼴이다. 버림으로써 백배나 받으나 그러나 경고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서의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 하셨다. 물론 핍박 중에는 "산업[property, 재산, 소유]을 빼앗기는 것도"[히 10:34] 포함된다. 즉 이 세상은 믿는 사람들의 재산[공용으로 쓰게 되어 있는]을 압수하고 모든 믿는 이들을 헐벗게 하고 굶주리게 할 수 있다. 그런 것이 핍박이다.

뿐만 아니라 수감하여 가두고 죽인다. 이는 사단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주무기(主武器)다. 그래서 미리 "망대(望臺)" 비유로 경고하신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 사람이 일을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써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눅 14:28-33] 하심과 같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어떤 표준으로 나그네 생활을 할 것이냐 하는데 대하여 성경은 "현재의 상태대로 족한 줄로 아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딤전 6:6] 하였고,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7] 하였으며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 하셨다"[히 13:5] 한 것이다.

이 세상은 마귀가 관장하는 적대 세력[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한]의 영역이다. 원래 사단 마귀가 인간의 세계를 불법 찬탈(簒奪)한 격이나 어쨌든 현실은 무시할 수 없으니 그의 나라요 세계요 영역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 얻어 결과론적으로 사단의 지배를 벗어나 원수로 정해져 있으니 충돌은 불가피하고 또 마땅한 것이며 그래서 전투가 벌어져 현재는 먼저 우리의 발꿈치가 물리는 상황이다.

나중에 우리가 이 원수의 머리를 뭉갬으로써 최후 승리가 오게 되어 있으나 현재는 그러하니 담담히 이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고로 이 세상이 비록 시한부(時限附)이기는 하나 이런 실정을 충분히 감안해야 함이다. 그래서 이런 것도, 자기 욕심만을 앞세우는 악인들을 걸러내고 솎아내고 추려내는 한 과정인 것이다. 이 세상은 신기루와 같음을 하나님께서는 반복해서 그 증거를 제시해 주고 계심이니 인생으로서 갓 태어나기가 바쁘게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그 중의 하나다.

10대, 20대 짬도 없이 쫓기듯이 세상을 하직하는 그 모든 것이 이를 증명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제대로 활용하면 이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끊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주 끊기 어려운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이 세상사를 악마 사단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성경이 또 무슨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 의당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실들을 지적하는 정도일 뿐이다.

모든 것을 버린다 해도, 가진 것 같은 시늉을 하고 있는 하찮은 것을 버리는 대신 그야말로 하늘과 땅을 온통 차지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누가 이런 맞바꿈에 기꺼이 호응하지 않으리요. 그러나 어쭙잖은 자기 욕심에 포로되어 눈이 멀어 이를 보지 못하고, 말도 못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주님은 "깊이 탄식하셨다"[막 8:12].

옆에서 이를 지켜 본 제자들이 그렇게 느껴 나중에 기술할 정도이니 얼마나 그 심령 깊이 탄식하셨겠는가. 그런 표적이 없어도 능히 믿을 수 있는데도 보여 달라고 할 때는 설혹 그런 것을 보여 주더라도 더 이상의 것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쓰며 만족을 모르게 되는 것이 뻔하니, 이는 참으로 회개하겠다는 의사 표시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살겠다는 고집 외에 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복된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의 행함 즉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 율법을 지키고 않고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즉 착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하는 것은 일절 불문에 부치고 그야말로 무조건 영생하게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왜 모든 인간을 다 자동적으로 구원 얻게 아니하시고 믿어야 구원된다는 조건을 붙이시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왜 사람을 차별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만들기를,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나 어느 피조물도 간섭할 수 없는 하나님 고유의 특성을 따라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사유가 있어 구원할 사람 그리고 구원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 미리 택하심을 따라 사람을 믿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믿게 하셔야 믿게 되는 "하나님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리 되면 차별하시기는 마찬가지가 된다.

그러면 누구나 믿으면 구원된다는 것은 실제로는 "누구든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택하신 사람만 구원된다"는 의미가 되어 전혀 상반된 내용이 된다. 따라서 처음부터 택하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영생하려 하고 믿으려고 하나 믿을 수도 구원될 수도 없고 영생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우리로서는 알지 못하니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은 완전히 빈 말이 되고 헛된 구호에 그칠 뿐이다.

명백히 '말의 모순'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모순된 것으로 세상에 선전하는 꼴이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구원에 관한 한 "힘쓴다"는 말을 하기만 하면 펄쩍 뛴다. 그것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고 성경대로의 구원 얻는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되는데 왜 힘쓰고 노력해야 하느냐, 그것은 성경에서 강조하여 배척하는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지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 아니지 않으냐" 한다.

그러나 성경은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해야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할 것이다"[벧후 1:10] 하고 있다. "택하심"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내 자신이 굳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양면성임이 분명하다. "이것을 행함"으로써 그리 된다 했으니 힘쓰고 "더욱 힘쓰게" 되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러면 바울의 신학(神學)이 다르고 베드로의 신학이 달라서 그렇다 할 것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바울은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켜 "참고 선을 행하는"[롬 2:7,10] 것으로 확정했다. 이를 혹 잘못 알아들을까 하여 다시 확언하기를 멸망에 이르는 것은 "악을 행했기"[:8,9]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 "믿음으로 얻는 영생 즉 구원"에 대해서는 여기 일언반구도 없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바 "선을 행함"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악을 행함"을 '믿지 않는 것'을 가리킴이라고 강변할 것인가.

한번 말의 모순을 저지르면 계속하여 그런 모순된 말을 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말은 더 이상 말로서의 의미나 가치나 권위를 상실하게 마련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불교에서 그런 말의 혼탁을 저지르는 것과 똑같이 되어버린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신학을 믿고, 성경 대신 인간의 교리를 믿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4:2] 하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사단이 에덴낙원에서부터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혼잡을 꾀하여 그것으로써 아담 부부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다.

바울 당시부터 이미 그런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그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고 "다른 영"이 판을 쳤으므로 그런 것을 퍼뜨릴 때는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라"[갈 1:8]고 선언했다. 구원 받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것을 내 스스로 유지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니, 구원 받은 상태 또는 증거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써 "은혜"의 "거저 주시는 선물"로 구원 받은 자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는 단 하나도, 아무도 없는 까닭이다[롬 14:7-9].

그러므로 현재 내가 구원 받아 있는 것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삶을 지속시킨다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산 자가 되었으니 산 자로서 마땅히 움직여야 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함이다. 나 자신을 위하여 살아 자기중심으로 행동하는 것은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의 몸짓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구원을 목적으로 내가 "선을 행하기"를 "힘쓰고" "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차원부터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산 자와 죽은 자, 생명과 죽음의 차이다. 죽어 있던 자를 산 자로 만들어놓으셨는데 어찌 은혜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 아니고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 아닌가. 죽은 자가 무슨 선을 행함이 있었던가. 죽은 자는 선이든 악이든 일체의 행위가 의미 없는 것은, 이미 그는 죄인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므로 그 죄에다 아무리 악을 행해도 물에 물 붓기요, 아무리 선을 행해도 물에다 물 붓기니, 본 바탕이 죽음으로서 그리고 죄와 악으로서 일절 변동이 있을 수가 없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라야, 선을 행하면 생명 그대로이고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면 죽음이 되어 버리니까 비로소 변동이 생기는 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죽은 자였으므로 일체의 행위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했었다. 그래서 내가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또는 악을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이를 허물하시지 않았다[행 17:30]. 물에 물 탄 듯했기 때문이다. 물은 물이지 물이 포도주가 될 리도 없고 기름이 될 리도 없음이다.

그러나 이전에 내가 죽은 자였다가 이제는 산 자가 되었으니 일대 변동이요 인간 개벽이었다. 이 변화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의 행동[선이든 악이든 불문하고] 여하와는 일절 관계 없이 오직 나를 새로 창조하심으로써 되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성령을 주심으로써 성령으로 출생하였고 다시 출생하게 됨으로 산 자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은혜이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고 믿으면 되는 것이었다. 행함은 일절 무관하게 이루어진 변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 다시 말해 행함의 의미와 그 가치를 따지고 묻게 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닌 오직 산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참고 선을 행함을 따지고 악을 행했는지 여부를 묻게 된 것이다[롬 2:7-10]. 베드로가 힘쓰고 더욱 힘쓰라,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함은 바로 이 선행을 독려함인 것이다. 선이 무엇이냐, 앞에서 이미 설명하기를 우리가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어 있는 현재의 위치를 고수함이니 곧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삶인 것이다.

우리 육체의 생명으로 말하면 건강을 힘써 지키라는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내 건강은 내가 지키는 것이요 지키기를 힘쓰는 것이지 남이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자동으로 건강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니, 내가 건강식을 해야 하고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하고 몸에 해로운 것은 힘써 피해야 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야 당연하다. 바로 이런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을 나의 영생에 적용시키라는 그 의미인데 그것이 그렇게 생소해서 억지 해석을 함으로써 자멸에 이르는[벧후 3:16] 것인가!

그래서 나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신 것이다. 자유 의지가 있는 이유다. 영생하는 생명이나 한시적인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이나 생명은 같은 것이다. 단지 영생하지 못하니 이 자연계에 속한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불확실성의 생명을 죽음이라 하는 것뿐이다. "같다"는 것은 생명과 죽음이 내 스스로 선택함에 따라 결정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생명도 내 스스로 끊으면 자결, 자살이 된다. 영원한 생명에서 자살 행위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함이다.

원래 선(善)하다는 의미가 '좋다'는 것이다. 악(惡)은 그와 반대로 '나쁘다'는 뜻이다. 좋은 것을 따르니까 이는 옳은(義) 것이다. 나쁜 쪽을 택하면 그것은 올바르지 못하니 불의(不義)라 한다. 모름지기 좋고 올바른 것을 내 스스로 택하여 이를 따르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을 가리켜 법, 질서, 계명, 율법이라 한다. 내 스스로 하게 되어 있는 일이므로 내 스스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 않을 때 불법, 범법(犯法)이 되고 다른 말로 범죄가 된다.

구체적으로, '좋다(善)'는 것은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고 그 피조물은 몸의 각 지체(肢體) 역할을 하는 한 몸의 체제로 생명의 구도가 짜여져 있음을 가리켜 말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어놓고 보시니 "보시기에 아주 좋았다"[창 1:31]. 즉 모두가 '선' 일색(一色)이요 '악'이라고는 한 구석도 없었던 것이다. 이는 그 만드신 모든 것의 짜임새가 그렇게 '선'뿐이었다는 뜻이다. 그 짜임새가 바로 이 '한 몸'의 생명의 구조인 것이다.

그냥 낱개로 뿔뿔이 중구난방으로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두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성경이 말할 리가 없다. 정밀한 기계처럼 어김없이 운행되고 있는 것을 보신 것이다. 여기서 단 하나라도 애초 설계하신 대로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차질이 생기고 더 이상 좋은 것이 없어지고 나쁜 것이 생기게 됨은 당연하다. 자연계의 생물체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있고, 인격성을 지녀 자기 의사, 의지대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어 양분되는데 인간이나 영물[우리가 천사라 부르는]이 이에 속한다.

선악간에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고후 5:10]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선과 악으로 다시 양분되도록 정해져 있음을 말한다. 어차피 그 스스로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정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정하는 것이 선인지 악인지는 그 절대적 자유를 적용시켜 행동에 임하는 자 그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양분(兩分)이니 양자택일이다. 흑이 아니면 백이고 희색은 없다. 중간 지대, 중립은 아예 존재조차도 불가능하다. 생명 아니면 죽음, 바로 그 뜻이다. 산 것이 아니면 죽은 것이요 산 자 아니면 죽은 자이다.

그러면 산 자는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게 되어 있고[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로 분류된다. 선과 의를 행하지 않으니 이 이분법(二分法)에 의해 악을 행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 몸' 구조로서의 생명의 체제에서는 우리의 신체적 구조에서 보듯이 몸이든 머리든 몸의 각 지체든 각자 자기 상대방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그렇게 철저하게 짜여져 있는 것이 한 몸 체제다.

이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하고 이와 어긋나게 감히 무리(無理)로 나가는 것을 자기중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악을 행하는 것을 가리켜 분명히 "자기중심"[롬 2:8]이라 규정해놓고 있음은 당연하다. “당을 짓는다”는 우리말은 오역이고 영역으로는 "selfish, self-seeking"이다. 그런즉 산 자는 모름지기 죽는 한이 나더라도[실상은 죽지 않는다] 그 어떤 대가를 무릅써서라도 이 죽은 자의 짓거리인 악을 행하지 않아야 하고 자기중심이어서는 안되고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상황에 처하여서든 자기 부인을 아니할 때 그것은 치명적인 독극물, 사약(死藥)을 스스로 들이키는 자살, 자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산 자로서의 모든 의미는 그로써 종결되고 죽은 자로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과거 한 때 다시 말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은 자가 되어 있었던 터라 하나님 은혜로써 이제 산 자가 되어 있었는데, 다시 죽은 자가 되니 또다시 산 자로 복귀한다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산 자로서 어떤 일에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을 이루려고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고 노심초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전연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산 자의 권리다.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데에 있다[요 20:21/4:34]. 이것을 우리가 "먹을 양식'[4:34]이라 하신 것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죽은 자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없다. 오직 산 자만이 먹는 행위를 한다. 바로 이 먹는 행위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으로서 곧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아닌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관계로,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서 나를 통해 당신의 일을 마저 하고 계시는 의미이니,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고후 6:1].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운다고 하는 것이다[골 1:24].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쓰고 애쓰고 노력하지 말라는 것은 굶어 죽으라는 바로 그 뜻이 된다. 자살 행위를 하라는 의미가 된다. 항상 사태(事態)는 양면성으로 전개된다. 이것 아니면 오직 저것이다.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의 일을 않으면 그것은 죽음에로의 직통(直通)이다. 산 자로서의 움직임이 없으면 그것은 죽었다는 증거다. 이 산 자로서의 움직임을 자꾸 "구원"에다 무리하게 연결시키려 드니까 혼동과 혼돈이 오는 것이다. 제발 그런 일을 좀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악마 사단이 이 세상의 신으로서 인생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삼재사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끔찍한 현실은 인간이 애초 왜 범죄하게 되었던가, 왜 인간이 오늘날과 같은 이런 숙명적인 불행에 함몰해 있는가 하는 등의 그 원인을 규명해서 밝혀 주는 성경을 접하게 됨으로써 알아지게 된다. 이 세상의 실태는 인간들을 압제하는 원수 사단의 족쇄 안에 들어 있다는 한 마디로 족하다. 이 족쇄 안에서 인간은 그 고유의 자주 독립성을 상실한 완전히 노예가 되어 있음이다.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주 독립성과 자유 의지는 별개다. 자유 의지라는 것은 각자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데에만 활용된다. 왜냐면 그것이 진짜 생명이고 죽음이기 때문에 이런 핵심되는 것에 대해서는 사단은 일절 간섭하거나 강제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단이 아무리 진리를 가리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갖은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속여도, 인간의 이성은 이런 모든 것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까닭이다.

단지 자기 자신의 욕심이 작용할 때 즉 의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를 좋아하는[히 1:9] 자기 자신의 선호(選好)로 인하여 사단이 발 붙일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는 셈이다. 고로 이 세상은 진리에 사사건건 배치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고 있다. 사단에게 완전 농락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령이 시키는 대로 춤 출 수밖에 없는 꼭두각시 놀음의 참상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의 필요성은 너무나 잘 알아 동감하면서도 [이는 각 사람 안에 하나님 친히 설정하신 양심이란 기계적 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 문화는 이기주의 즉 자기중심, 위주, 본위가 그 주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려는 모든 의지력에 대한 도전과 방해, 장애 걸어놓기 작전이 차고 넘친다. 처음부터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이 시험의 고비를 잘 넘기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음을 계시록은 밝히고 있다. 바르게 사는 것은 “다시 출생한”[요 3:3] 몸으로 새 피조물로서[고후 5:17] 산다는 것이요, 그것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이요[빌 1:21],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갈 2:20].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니[고후 5:15],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니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어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主, 나의 주인, 소유주)라고 부르는 것이라[롬 14:7-9] 함과 같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시게 하려는”[빌 1:20]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 사신(使臣-ambassador)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권면[appeal, to plead-간청, 간원(懇願)]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5:20]는 말을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구하는"[to implore, plead-간청, 애원] 삶이다. “제발 구원 받아 다오, 영생해 다오, 멸망하지 말아 다오...죽지 말아 다오” 하는 것이 위의 "구함"의 뜻이다.

이것이 우리 위한 십자가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심장이다[빌 1:8].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어버이 마음이시다[롬 8:32]. 바로 이 마음을 우리가 닮는 까닭에 "저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면 제 이름을 생명 책에서 말소해 주십시오"[출 32:32] 한 모세처럼 기도할 수 있고, "내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동족이 구원되기를 바란다"[롬 9:3]고 충심으로 토로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친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던 그런 마음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마 23:37] 하시던 마음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무진장 기다려 주시는 마음은 아니다. 오늘날 교회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광야 교회"[행 7:38]로서, 당시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의 60만 장정 중에 단 둘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갔던 그 상징성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떠는"[빌 2:12] 것이다.

주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제자들은 "구원 얻는 사람이 적습니까?"[눅 13:23],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18:26] 하는 말을 연발했음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13:24]이셨고,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베드로가 말한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습니다"[18:28] 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대답하신바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18:27]는 것이었으니,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29] 것으로서 바로 그와 같이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이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14:33]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13:24] 하는 한결같으신 경고인 것이다.

그러나 항상 양면성을 갖춘 것이니,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면서도 동시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 함이 그러하다. 극(極)과 극의 완전 조화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심에 조금도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신 것이다. 둘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것 같으나 실제 현실은 완전한 화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러한 "소멸하는  불"이심의 완전 조화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을 설파한 바울이, 교회 앞에서 이러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든지 사랑하지 않는 이는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는 경고를 서슴지 않은 것이니, 그의 가르치심의 논조는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롬 11:20-22]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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