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삼운(三運) 법칙[trini homo]
------------------------------------------------------------------
"와신상담"
와신상담(臥薪嘗膽, 중국 춘추시대 오[吳]의 부차와 월[越]의 구천이 서로 원수를 갚겠다고 부차는 가시 많은 땔나무를 깔아 그 위에 자고 구천은 항상 곁에다 쓴 쓸개를 놓아두고 핥았다는 고사[故事]에서)으로 항상 자신을 추스르고 닦달하는 것이 필요하니, 이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한 증오심, 이는 다시 죄에 대한 증오심과 현재의 죽음의 실상에 대한 증오심["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함"-요 12:25]을 키워,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사력을 다해 훼방을 놓는 바 선과 의를 행함에 적극성과 능동성을 함양시키는 자극제로 삼을 수 있음이다.
이 고사(故事, 古事)는 원수 갚는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기보다 이 두 사람을 보좌하던 책사(策士)와 모사(謀士)와 관련된 것이 더 교훈적이 되어 있다. 왜냐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분을 위해 나도 목숨을 버림으로써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고자 함에서 그 성격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장악하는 세상 무대에서의 전쟁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그러한 책사, 모사[counselor-사 9:6/고전 1:30]가 되어 계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삶이 나를 위해 자신을 다 바쳐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나도 사랑하여 목숨 바쳐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어 우리에게 지혜가 되어 주셔야 하는 것이 필수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께 여쭙고 무슨 행동이든지 취한 것과 같이 우리 역시 모든 일에 하나님께 기도로 여쭈어[살전 5:17] 모든 일을 결행(決行)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건의 연습"[딤전 4:7,8]이다. 우리가 건강을 도모하기 위해 체력 단련을 하거니와 이는 영력(靈力) 단련이 되니 절대로 소홀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인"[딤후 2:3]이라 했다. 완전무장해 있다고 유능한 군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무장부터 철저히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음과 같다. 위의 '와신상담'은 우리의 정신 무장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들을 성경은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21:7]로 일관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요 12:25], 세상 삶의 낙을 누리려 하고 세상 일에 신경 쓰는 등으로 해서 세상 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세상에 대한 염려, 세상의 쾌락, 돈을 사랑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등-눅 8:5/마 13:18/막 4:3] "이기는 자"의 대열에서 탈락되니 이는 구원에서 누락되고 생명 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는 의미 바로 그것이다. 생명 책에 일단 녹명(錄名)되면 영구적으로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음을[계 3:5/시 69:28/출 32:32,33]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영원세세 살 터인데,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고후 5:15] 자기 부인 즉 전장에 임한 자로서의 '생즉사 사즉생'의 기본 자세를 왜 그다지도 못할 일처럼 생각하려는가. 이 세상 삶의 낙은 천국에서의 삶의 낙에 감히 비교할 수조차도 없는 안개나 바람을 움켜잡는 정도가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되신 우리의 구원자시다. 따라서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면 우리 구원은 완성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이상스럽게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하셨다. 친히 세상을 이기시는 것과 우리 위해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심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내가 사람의 대표로서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도 이기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구원'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할 때의 그 구원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하시는 것과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하는 것과의 양면 구조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나의 구원 받음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 수동적이고 피동적이 것이 아니라 내 편에서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필수 불가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는 것은 현재의 나의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상태를 산 자가 되게 하심이다. 이 영역[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분야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 그래서 은혜이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요 그래서 구원이 선물이다. 사람이 제 스스로 구원되지 못한다 즉 자력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 사실을 말함이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율법[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등의 모세 율법이 아님에 유의할 것이니 이 하나님의 율법은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라 할 때의 그 '율법'을 가리킴이다]은 산 자가 지키는 것이지 죽은 자가 아무리 지켜야 소용이 없다. 그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산 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 자가 되어 있어야 그 생명을 스스로 유지시키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가 자연법칙대로 삶으로써 그 생명을 유지시킴과 같은데 단지 그들은 기계적으로[타율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니 곧 우리 인간이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체력 단련도 하고 건강 유지법대로 사는 것이 이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계에 속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인간이 자율적으로 우리의 자유 선택에 의한 의지로써 영생의 삶의 법질서를 스스로 지켜 나가는 데에 있으니 이 차이가 분명하다.
아담이 죽은 것도 영물들이 악령이 되어 버려 장차 임할 영원 멸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도 이 생명의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에 있으니 곧 한 몸 체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지시]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는데 이를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빚어진 범죄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 역시 하나님의 새 창조를 받고 다시 출생하는 은혜[하나님의 아들의 우리 위한 죽으심으로]를 통해 당당히 산 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믿을 때 회개함으로써 약속한 대로 약속을 이행함 다시 말해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름[복종하는 것 다시 말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구원인 것이다. 즉 "다시는 산 자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오직 사는"[:15] 것이 생명의 법질서인데 이를 따름이다. 곧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이다. 율법을 가리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역할이 오직 그것뿐인 줄 착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이는 천부당 만부당이 된다. 앞의 설명대로 '죽은 자'와 '산 자'의 구별을 말한 것이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는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즉 어떤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음을 말함이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도 드러나듯이 성경은 헷갈리기 좋도록 짜여져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애매 모호한 뜻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아니니, 상식과 양식을 따라 곧이곧대로 성경을 이해하면 아무 걸림 돌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자기중심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기 욕심을 따라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함이니, 악을 좋아하는 자는 구원에 해당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이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기피하신다고 한 대로[행 28:27], 처음부터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기를 싫어하는"[요 3:19,20/마 22:3] 사람들은 걸러내시고 솎아내시고 추려내시는 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영광스러운 복음 곧 구원의 희소식으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행 4:11]이 되시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11]이 동시에 되시는 엄연한 양면의 의미이다. '시므온'이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함(the fall and rising of many)"[눅 2:34]이라 말한 그대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우심을 입으셨다" 했으니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정확한 예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것이다. 이런 정하심에 반발하여 그대로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패망뿐이다. 이렇게 패망하는 이들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니 "부딪힐 돌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다[롬 9:32]. 이 "믿음에 의지함"과 "행위에 의지함"의 특성을 논하면, 세상에서 "비방을 받는 표적"과 관련되어 있으니, 다시 말해 후자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요 12:25] 살고자 하는 마음이어서 일정한 법식(法式)대로 행하는 것만 좋아하고 자기 부인을 싫어함에 있어 종교 생활로 만족한다.
반면에 전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자기도 함께 죽음을 믿는 고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고후 5:15] 자기 부인을 하는 이들로서 자기를 부인하니까 이 세상에서의 고난도 죽음도 하나님의 뜻으로만 확신되면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모퉁이 돌"이심과 동시에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롬 9:33]이심을 똑바로 인식할 일이다.
때문에 세우심을 입지 못하고 도리어 이렇게 부딪쳐 깨어져 버리는 사람들을 가리켜, "저들이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는 것이니 이는 저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8] 하였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 일시 착각하고 있을 때 대답하시기를,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경고하신 것도 같은 뜻이다[마 11:6]. 이 세상에서 의인이 받는 "약한 자로서의 고난"[고후 13:4]을 말씀하심이다.
"행위에 의지하는" 이들은 자기 부인이 없어도 일정한 행위 즉 종교 생활로서의 의식, 예배 형식만 충실히 지키면 그것이 구원이 되는 줄로 착각함이다. 특정한 날에 특정 장소에 모여 일정한 순서를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면 그것이 곧 믿음이고 천국 가는 길이라고 믿는 미신이다. 다시 말해 내 스스로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래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지 않으면 따라서 내 스스로 순종하여 자기 부인의 길로 기꺼이 나가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자진해서 고난 받음에는 나의 의지가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 그래서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의지,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니 이것이 "회개"[행 2:38]의 의미이다. 그래서 이러한 회개를 지칭하여 "돌이켜 자기의 악함을 버리는 것"[3:26]이라 하였다. 고난을 받고 순종을 하는 등의 일이야 세상의 종교가들도 아니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차이는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 하는 데에 있으니 종교인들은 그것을 자기의 구원을 첫째 목표로 함이다.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차후 단계로 밀려나는 순서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자기가 무엇을 깨달아야 그 깨달음으로 남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이지 자기도 모르는 것을 어찌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 바로 그 깨닫고자 하는 처절한 노력이 까놓고 말해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아 그 선물로서의 성령을 내 안에 확고히 모시고 있는 터이므로 나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까지 나를 사랑하신[갈 2:20] 그리스도를 사랑하여[그리스도를 사랑함은 아버지를 사랑함이라고 그리스도 친히 밝히신 대로] 즐겁고 기쁘게 한없는 보람으로 고난이든 죽음이든 오로지 순종함에 우리 믿음의 특징이 있는 것이니 결코 세상 종교의 것과 같을 수가 없다.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상대를 닮는다고 말하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심정이 되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3]고 기탄없이 말하는 심경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회개의 결과이니, 이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이 처음부터 명백히 강조한 것이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눅 3:8]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회개한 개과천선(改過遷善)의 행동을 나타내라고 한 것이다. 회개 없이 다시 말해 "돌이켜 자기의 악함을 버릴' 생각은 없이 그냥 세례만 받으려고 몰려든 많은 바리새파(派) 사람들과 사두개파(派) 사람들에게, "독사의 후예(後裔)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7/마 3:7] 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믿음'도 잘못 알고 '구원'도 잘못 알 뿐 아니라 "회개'도 잘못 알고 있다.
자기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만으로 회개가 되는 줄 알고 있다. '죄인이므로 죽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만 인정하면 그것이 회개인 줄로 착각한다. "악함을 버리지"[행 3:26] 않으면 회개가 안된다는 것을 성경이 명시하고 있지 않는가. 또 어떤 이는 이 악함을 버리는 것이 회개라고 해서, 가령 내가 일억이라는 돈을 훔쳤는데 그 돈을 다 게워내지 않으면 죄 용서가 안된다고 또 착각한다.
내가 그 돈을 지금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반환해야 하고 임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훔친 돈을 다 쓰고 없다. 이럴 때는 다시는 그렇게 훔치지 않겠다는 결심만으로 "악함을 버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 곧 악함을 버리는 것은 다시는 악한 짓을 하지 않겠다 즉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고후 5:15]는 의지 표명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후 지내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경우, 믿음을 자기 스스로 버림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딤전 6:21/5:8/4:1/1:19/5:12/딤후 3:8/계 2:13/2:4]. 그래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는 당연하다. 내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어, 버리는 것도 나 자신이요 끝까지 사수(死守)하는 것도 다름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서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요일 5:5] 한 대로 우리의 믿음 즉 사랑의 순종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심은 우리의 대표로서 따라서 우리의 본으로서[즉 우리도 마땅히 이를 본받아 그와 같이 이길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세상을 이기셨다 함인데, 구체적으로 그 "이김'이 어떤 의미냐 하면 스스로 결행(決行)하는 세상과의 '명백한 차별화'다.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를 탐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앞에 절하여[눅 4:7]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던 대로 자기중심으로 나가 세상에 동조하고 동화하는 것이 패배요, 세상과는 끝까지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승리이기 때문이다. 내게 가하는 악에 대하여 나도 악으로써 대하는 것이 지는 것이요 악과는 반대인 선으로써 대응하는 것이 이기는 것임과 같은 이치다[롬 12:21]. 이기고 지는 것이 그러함은, 우리의 싸움[전쟁]은 비록 "육체로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후 10:3] 영적인 싸움, 정신적인 것, 신념을 굽히느냐 신념대로 밀고 나가느냐 하는 것으로 결판 나는 힘 겨루기인 까닭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싸우는 것이라 해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기는 법은 없다. 이미 그는 영원 멸망에 들어가기로 예정되어 있는 자로서 그가 이기고 우리가 진다고 해서 그가 영원히 승자로 남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그는 망하게 되어 있지만, 핵심은 나 자신의 이기고 지는 데에 있음이니 다시 말해 내가 지는 경우 그와 함께 하는 멸망이므로 이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본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그를 이기셨으므로 그 이김 안에 나 역시 동참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이기심을 토대로 하여 내가 이길 수 있음이니 내게 친히 그 능력이 되어 계심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러면 무엇 때문에 질 싸움을 하는가 하면 그는 자기가 진다는 것 다시 말해 미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판단이고, 그로서는 자기가 이길 수도 있다는 자기 생각의 요행수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요행수를 믿는 까닭은 하나님의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에 입각한 공평무사, 공명정대[fair play]에 있으니 때문에 자기도 얼마든지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범죄한"[요일 3:8]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순종하려는 생각은 없이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여 저울질하는 오만함이 결국 그를 범죄하게 만들고 패망의 길을 걷게 하고 악령이 되게 한 것이다[딤전 3:6]. 그래서 성경에, 교만이 패망의 지름길이라 했다. 따라서 구원 받을 사람의 숫자가 일정 수효대로 채워지지만 않으면 이 세상 그대로 언제까지나 지속되어지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마지막 심판은 그만큼 지체되며 따라서 세계는 이 상태대로 연이어져 나갈 수 있다는 계산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고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닌게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기는 자가 안되는 것도 아니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그 말씀을 믿는 고로 그것이 결코 현실적이지 않고 불가능하여 그가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전지전능의 조물주로서의 강제와 강권력을 발휘하여 그 피조물을 제압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악용할 정도로까지 원리원칙과 공명정대함과 공정공평함을 따라서만 움직이시되 한량 없으신 지혜로 미리 아시고 판단하심을 따라 미리 정하실 수도 있는 그 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근거로 미리 하시는 모든 말씀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불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얼마든지 자기 계획대로 성취할 수 있다고 자신함이다.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이 사랑의 법질서에서 벗어난 그 어떤 자신감도 악할 뿐 아니라 결국 패망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믿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러한 집요함은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도 변하지 않아 그의 활동은 최후 마지막 단계로까지 이어져 전개된다[계 20:7,8].
그러나 결국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산이 틀렸고 하나님의 예측이 정확하심이 입증됨으로 인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항구적으로 불 못에 들어가게 된다. 이 최후의 단계 역시 하나님의 간섭이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미리 말씀하신 대로 믿는 자의 숫자가 제대로 채워짐을 인하여 드러내어지는 결말이다.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서도 아무 불만불평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대표 즉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그와 같이 첫 사람 아담의 범죄에 의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아래 종속되어 있는 현재의 인간의 위치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시고 따라서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자리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불변의 신념을[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 확정적으로 기도의 사투(死鬪)를 벌이셨지만] 친히 입증하여 나타내실 의지가 확고하셨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이겼다["I have overcome."]" 하신 것이다.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오직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랑의 순종이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순종은 순종일 수가 없다. 일시적으로 필요에 의해 하는 것이 억지 순종이니 이는 자기중심의 또다른 형태일 뿐이다. 반면 순종 자체를 사랑하여 영원히 순종할 태세가 되어 있을 때 그것이 억지가 아닌 사랑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억지로 하는 순종이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고 하여 맞대놓고 배역(背逆)의 일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어느 피조물이 그런 일을 하겠는가. 그가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것도 인간 중 악인들이 악행하는 것과 같은 그런 수준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의 순종'과의 차이는, 순종을 특정 목적을 위한 수단 방법 차원으로만 인식한다는데 있다. 수단 방법이라는 것은 원래 목적만 달성되면 무용지물로 인식되는 법이다. 즉 선(善)과 의(義)를 행함을 구원 얻는 수단 방법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하고 믿음으로 된다' 함이다. 왜냐면 믿음에서 우러나는 순종은, 그 순종 또는 '의를 행함'과 '선을 행함'이 더 다시는 수단 방법[구원 얻기 위한]이 되지 않고[이미 구원은 받았으므로] 스스로 선과 의가 좋아서[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므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예속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도 스스로 기뻐서 좋아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부득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기에 하는데 비해,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심으로써 앞에 말한 그런 '차별화'를 분명히 하셨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셨고, 우리 역시 그렇게 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을 이룰 수 없음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무엇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뻐서 행할 때 그리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을 때 그것이 자유인으로서의 행복이요 자유를 만끽함이다. 남 보기에는 무미건조하여 무의미하게 보이고 무척 불행스럽게 비쳐져도 당자로서는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되어 즐겨서 할 경우라면 그에게는 무한의 행복이다. 아무리 주종 관계에 있어 종인 내가 주인인 나의 상대를 섬겨도 내가 즐거워서 기쁨으로 자진해서 이 종 노릇을 할 때 나는 자유인으로서의 주인인 것이다.
주인은 아무도 자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자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내가 섬기는 주인을 내가 섬기고 싶어서 하는 일일 때에는 나는 그야말로 주인인 것이다. 이를 사랑의 주체성이라 한다. 하나님 믿는 것을 영생을 얻기 위해 또는 기타 일로써 하나님께 의지하는 의탁심(依託心), 의타심이라 하는 이들은 이 사랑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주종, 대소, 인과 관계가 엄연하면서도 완전한 자주 평등이 그 특색이다.
고로 오늘날 양성평등이라는 착각 속의 시행착오를 버리고 주종, 대소, 인과 관계라는 자연법칙 및 인간 삶의 법질서를 외면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의 진정한 자주 평등을 추구할 일이다. 조화 속의 일치를 목적해야 하는 것이다. 외형상의 평등은 대립, 갈등, 반목, 불화 등 온갖 인간 삶의 부조리와 불행을 양산하는 온상만이 될 것뿐이다. 둘이 하나되는 사랑이라는 것은 삼위일체의 대립 개념에서 온 것이고 따라서 그런 본연의 위치는 영원하니 주종, 대소, 인과 관계라는 조화 속의 일치(一致)에서 영원한 것이다.
죽기를 무서워함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인생 행복은 그 뿌리가 미래 지향성에 있지 않고 정확히 말하면 과거 회귀성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과거에의 회귀 본능"이다. 실낙원(失樂園, lost paradise) 의 현상으로부터 탈피하여 복락원(復樂園, restored paradise)에의 염원이다. 간단히 말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곧 향수(鄕愁)와 직결되어 있다. 인간의 본 고향은 에덴낙원 곧 영계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뒤집어[거꾸로] 증명함이다. 세계가 진화해 가는 것이 아니라 퇴보, 퇴화한 것임을 역으로 입증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할 때의 천국이 바로 이 본향(本鄕) 곧 영계(靈界)의 의미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영광의 영계에서 벗어나 버려 현재의 이 구차한 자연계에 속한 몸의 상태가 되어 있어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요,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요, 영원성을 잃고 일시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인간의 현주소이다.
만일 이것이 정상 상태라면 미래 지향성이 되어 마땅하다. 과거보다 현재, 현재보다 미래로 진보 발전되어 가는 진화가 제대로의 움직임인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로서의 실상부터 먼저 자각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어 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은. 이러한 정상 상태에서의 진보가 아니라 이 퇴보된 상태에서의 무리하고도 어쭙잖은 그리고 구차하기 짝이 없는 부질없는 '만회의 노력'일 뿐이다.
무리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소위 문명 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연 환경 파괴를 초래하여 오늘날 기후 변화와 같은 재앙이 닥치고 있지 않는가. 바로 그 증거이다. 이것이 순리에 의한 것이라면 결코 이런 역작용이 일어날 리 없다. 이 또한 소위 "진화론"의 허구성에 대한 증거이다. 그리하여 과학 지식으로 인한 갖가지 문명 이기(利器)로 인해 인간 심성은 더욱 개인주의, 이기주의로 치닫는다.
고삐가 풀어진 말처럼 야생마(野生馬)로 날뛰는 판이 되어 손쓸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어가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이런 것이 진화일 수가 없다. 행복이 미래 지향성일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지식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신속히 소통하는 통신, 교통망으로 인해[단 12:4] 사람 살기가 한결 편해졌다 하나, 그런 것은 부분적이고 더 큰 재앙으로 닥치고 있는 자연 재해, 핵무기, 날로 흉포화 지능화하는 범죄 양상을 보아서도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뜻이기에 그렇다.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이 죽기 전 반짝 하고 회복 기미를 보이듯 하는 그런 양상이다.
하나님께서 산 자로 만드셨으나 인간 스스로 범죄하여 즉 산 자가 지켜 마땅한 생명의 법질서를 어김으로 인해 죽은 자가 되어 버린 탓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므로 맹목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심지어는 이웃을 해치며 죄악을 범하기까지 무리하게 추구함이다. 인하여 자기중심 일색이 되었으니,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히 2:15]이라 하고 있다.
"죽기를 무서워함"[fear of death]은 아직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라는 뜻이 아니라 삶의 행복을 모르고 죽음의 불행 속에서 전전긍긍한다는 뜻으로서 그러니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죄에 매여 평생토록 노예화]일 수밖에 없음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16]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을 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처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여 신뢰하고[믿고]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이들을 말함이다.
악령들이 이 구원에서 제외됨과 같이 악인들 역시 제외된다. 무엇이 악인이냐 하면 빛이 있음에도 어두움을 더 선호하고 사랑하여 빛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말함이다[요 3:20]. 영생은 당연히 누구나 좋아하지 미워하고 싫어할 까닭이 없으나 "악함을 버리기를"[행 3:26] 원치 않는다. 즉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계 9:20].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여 돌이켜 악함을 버리라는[행 17:30] 것인데 이 구원의 기회를 외면하고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을 더 선호하는 까닭이다. 왜냐면 거기에는 회개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것은 그냥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이 아니라,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력의 작동을 말함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인한 자기 부인의 토대 위에서 절대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엄숙한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부인에서야 진정한 순종이 우러나고 가능한 것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름[순종함]이 없이 무슨 '한 몸을 이룬 지체의 역할'로서의 생명을 누린다는 것인가. 하나님 정하신 생명[영원한]은 오직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려 하여 억지로 삶의 낙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그런 이들에게는 역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만 비쳐지는 자기 부인에서, 진정한 삶의 행복을 이런 죽음의 세상에서나마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향수, 회향병, 과거에의 동경을 '하나님의 품속"에서 지금 '누림'[누림이 되는 까닭은 이 속에서 우리는 크나큰 힘의 원동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요,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온갖 즐거운 환상과 꿈에 젖어 있음[세상 사람은 실현 불가능한 것을 '환상'이라 하나 우리는 천국에서 실현 가능한 것을 '꿈꿈'이다-행 2:17]이니, 미래에 대한 벅찬 희망, 그리고 기대(期待)로 직결되어 거기 부풀어 있음이다.
그리고 또 하나 행복의 요건으로 앞에서 지적한 '모험심의 충족'이니, 사람 살리기 위해 온갖 고초를 당하는 것은 일종의 감흥[전율, a thrill]이라 할 수 있음이다. 왜냐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큰 기쁨이 되고[눅 15:7],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벧전 1:12] 했으니, 천사들이라도 전율을 느낄 만한 일일진대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짜릿한 감흥과 모험의 일도 없다.
천만 가지 고난도 어엿해 보이고 비록 죽어도 다시 살 것이니 유한이 없다. 오히려 이런 고난의 대가로서 영광의 영원하고 무거운 것이 우리에게 임해질 것이니[고후 4:17] 이보다 신바람 나는 일은 없다. 고로 역설이 아니라 당연 귀결로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이 불행한 세상에서 가장 행복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인식 전환, 관점 차이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광을 바라본다고 해서 자기중심이요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고 할 것인가. 이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12:2] 함과 같은 "앞에 있는 즐거움"이다. 내 스스로 즐거움을 위한다고 해서 꼭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즐거움이라고 일면만의 의미로 생각할 것이 아니니,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함과 같이 함께 즐거워함의 그런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는 가운데에서 '나'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과, '우리'는 젖혀 둔 채 오직 '나'만의 즐거움을 위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앞에서 '와신상담'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대한 '원수 갚는 일'을 말했지만, '나'의 원수가 아니라 '우리'의 원수이다. '우리'라고 하면 또 집단이기주의를 떠올리지만, 전체 인류를 '우리'라고 할 때는 의미가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이 '원수 갚음'은 상대에게 해와 악을 가한다는 뜻이 아니라 원수에게 한사코 지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상대의 부추김[자기 자신을 위해 살도록 충동하는]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말하는 것이므로 의미가 다르다. 해를 가한다는 의미에서의 원수 갚음은 하나님 친히 우리 위해 담당하신다고 약속하신 바다[롬 12:19].
부차와 구천
오(吳)의 부차(夫差)와 월(越)의 구천(句踐)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이렇다. 부차의 아버지가 월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이로 인해 죽게 되자 반드시 싸워 이겨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고 아들에게 유언했으므로 이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고 하여 그렇게 절치부심하느라 신하들이 자기 방에 들어올 때마다 그 아버지의 이 유명(遺命)을 복창(復唱)하게까지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부차[오]는 구천[월]의 적의가 더 이상 불 타오르기 전에 싹부터 잘라 버리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 참모인 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선제 공격을 시도했다가 대패하여 나라 밖으로까지 도망을 가게 된다.
이렇게 궁지에 몰려 버린 구천을 이번에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오자서의 경고를 부차가 따르려고 할 즈음, 범려의 계략을 따라 구천[월]이 吳의 재상 백비를 거금을 들여 매수했다. 그래서 내통자로 만들어 놓고는 항복하는 자세를 취하니, 부차[오]는 오자서의 말을 따르기보다 뇌물 먹은 매국노 백비의 말을 더 그럴 듯하게 여겨 구천[월]의 목숨을 살려 줌으로써 장차의 화근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자기 나라로 돌아오도록 했는데 이것이 20년 후에는 파멸을 자초하는 것이다.
목숨을 붙여 준 보답으로 구천[월]은 범려와 함께 3년간 부차[오]의 노예 노릇을 했고 그 처는 부차의 첩이 되었다. 이에 구천은 부차가 일찍이 섶[薪]에 누웠던 본을 따라 자기는 쓸개[膽]를 핥는 것으로써 이를 실천했다. 그래서 농사꾼으로 가장하여 부지런히 군사 훈련을 시킨 지 20년만에 부차를 꺾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된다. 부차가 전에 자기 목숨을 살려 준 보답으로 구천 역시 부차의 목숨만은 살려 주어, 일정한 곳에 머물게 하여 여생을 보내도록 조처했으나 부차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부차나 구천이나 ①현상 유지에 머물러 피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즉 현실의 분위기에 젖어드는 대신 스스로 능동적이 되어 사태를 장악함으로써 마침내 목적을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가 배울 만해서다. ②부차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수를 갚으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 마치 첫 사람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넘어가 죽기에 이른 것으로 비유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인간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원수 사이를 인정하고 전쟁이라 선포한 이상[창 3:15] 이 현실은 무시할 수 없다.
③부차나 구천이나 모두 자기 곁에다 유능하고 훌륭한 모사[책사]를 두었지만, 하나는 그 계략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그 묘책을 수용했기 때문에 승패의 결말로 갈라졌는데,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그런 모사(謀士, a counselor, a schemer, a strategist, a tactician)[사 9:6]가 되어 계심에서 우리가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할 필요성에서다.
④그리고 20년간 온갖 장애와 굴욕을 견뎌 낸 구천의 인내다. 비록 현재는 종 살이에다가 그 아내가 적의 첩이 되는 등의 굴욕이 이만 저만 아니었으나 '20년 후'의 희망으로 견뎌내었듯이 우리가 현재는 비록 이러한 비극적 참상에 처해 있으나 최후 승리의 그 날에 대한 희망을 먹고 사는 것이다. ⑤그리고 자기 부인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우리의 육체["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음으로써-고전 9:27]가 바로 그 백비와 같은 내응자(內應者)가 된다.
⑥전에는 범려의 지혜를 구천이 따르지 않았으나 이제는 전적으로 범려를 믿고 의존함으로써 그런 기회를 살린 것과 같이, 우리는 다시 결의를 새롭게 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따를 일이다.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고전 1:30]가 되신다. 이 "지혜"라는 의미는, 그리스도께 관한 예언에서 그리스도의 특성을 밝힐 때,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 다스림, government)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Wonderful]라, 모사(Counsellor)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사 9:6]이라 할 때의 그 "모사"에 해당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17:18]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쉬지 않고 기도할"[살후 5:17] 필요성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모사로서의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고자 함이다. 범려는 구천에게 생명과 같은 둘도 없는 모사, 책사(策士)였다. 얼마나 구천이 범려의 헌책(獻策)에 의존했으면 20년 후의 성공 뒤 범려가 구천을 떠나면서 "고난 때에는 함께 할 수 있었으나 영광의 때에는 함께 할 사이가 아니라" 했으랴. "토사구팽"이란 말은 범려가 지어낸 말이다. 그 길로 범려는 그 명석한 두뇌로 농사와 상업에 전념하여 대부호가 되었다.
반면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평생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고 구천은 처음에 범려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뼈에 사무치는 낭패를 당한 뒤에는 그 학습 효과가 있어 그 뒤로는 범려의 말대로 하여 유한 없이 목적을 달성했다. 부차는 오자서와 같은 인물을 두고서도 그 현책(賢策)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패망했고 구천은 인덕이 있어 좋은 사람을 얻었기에 아니, 그보다도 그런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구천이 부차와 싸울 때 자기의 막걸리를 자기가 마시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나눈다는 의미에서 병사들이 마시는 강물에 쏟아 부어 부하들의 마음을 산 것은, 알렉산더가 페르샤와의 전투에서 목이 마르다고 부지중 말하는 것을 한 부하가 듣고는 적진을 뚫고 들어가 물을 길어 온 것을 부하들 머리 위에다 모조리 뿌리며 "자기 목숨을 걸고 길어 온 물이니 우리가 다 함께 나누자!" 하고 외침으로써 부하들의 마음을 단합시켰다는 것과 같으니 이런 지혜는 모르긴 하지만 책사 범려로 말미암았을 듯싶다. 이와 같은 확실한 공동체 의식은 전체에게 생기를 주는 것이다.
⑦그리고 그 장장 20년 세월에, 아무리 범려 같은 인물이 있어도 구천의 절치부심하는 "상담(嘗膽)"의 굳은 의지가 없었더면 볕을 보지 못했으리라. 이는 분명한 진실이다. 아무리 그리스도께서 내게 능력이 되어 계셔도 내가 믿음과 사랑과 순종으로 호응하지 않으면 절대로 일이 제대로 풀릴 수 없다는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활동하시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그 칼[劍-엡 6:17]이다. 성경 전서는 우리의 모사(謀士)가 활용하시는 책략 전서(全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것이 생사(生死)를 가름하는 것이므로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으니 성경[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이므로 신약은 더 말할 것도 없다]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하였고, 또 "주님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시 119:98] 하였으며, "내가 주님의 증언을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낫고 주님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연장자보다 낫습니다"[:99,100] 한 것과 같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주(主) 곧 우리의 주인, 소유주로서 우리의 머리되시니 오직 머리의 명령 하나에 움직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친히 모사, 책사가 되신다 하여 보좌의 역할을 하시는 것처럼 되어 있음이 무슨 의미인가 할 것이다. 이 모두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 되는' 원리를 말함이다. 갑이 을을 위하든 을이 갑을 위하든 그렇게 "위할" 때는 주인에게 종으로서 위함이기도 하지만 이 둘이 하나 되는 사랑과 생명의 원리에서는 주인의식[또는 주체 의식]으로써 상대를 위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를 위할 때는 나의 자유 의지와 자유 선택에 의하여 움직이는 측면이어서 사랑의 원리를 따르므로 그리스도 친히 나를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실 수 없다. 자유인으로서의 이런 주인 의식은 당연하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가 주인 의식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 그 특성이다. 물론 주님의 뜻을 내게 밝히심으로써 친히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알게 하시지만, 그 외의 것으로 더 나아가시면 간섭, 강제가 되므로 오로지 나의 결정과 의지에 모든 것이 일임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힘으로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그러므로 은혜 일색임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구원 받음으로써 누리고 있는 "새 생명"[롬 6:4]의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없이는 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음이다. 그리스도 친히 이 능력이 되어 계시는데, 이를 가리켜 "간섭이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은 자를 먼저 '산 자'로 만드신 다음[그래서 그 산 자로서의 능력이 되어 계심이다] 그 '산 자' 스스로 자기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으로 움직이도록 하심이니 간섭이나 강제일 수가 없다.
강제나 간섭을 아니하시므로 모사와 책사로서의 역할을 하심이다. 그러나 역시 강제가 아니므로 내 스스로 주님께 묻지 않는 한 그 책략을 내게 말씀해 주실 리 없다.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그렇게 하시면 이것이 바로 간섭이 되는 까닭이다. 때문에 하시려고 해도 하실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분명히 병자들의 병이 고쳐졌지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을 항상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믿지 않을 때는 아무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셨던 것이다[막 6:6].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열매 맺음이 사람에 따라 30배로 그치는 수도 있고 혹자는 60배, 혹자는 100배가 되는 등 차등이 생기게 된다[마 13:8]. 백배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를 강제하고 간섭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친히 모사, 책사가 되시는 의미이다. 그 앞에 적이 없을 정도로 언제나 필승을 기했던 다윗 왕은 전투에 임하여 반드시 하나님께 여쭙고 나서 행동에 나섰던 것이니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싸움에 임하는 우리 각자의 본이 된다.
전쟁 마당에 임하여,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 것이 필연이다. 도망 가기 때문에도 죽고 싸울 의욕이 없어서도 죽는다. `열매를 맺을 때 "인내로써"[마 13:23] 결실한다 하셨다. 인내는 강한 의지와 불가분이다. 전쟁은 인내 없이는 수행되지 못한다. 선을 행하는 것도 참음을 통해서야 행할 수 있고 이렇게 선을 행함으로써 영생에 들어간다[롬 2:7,10].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함과 같다.
누구든지 악을 행하면 멸망이다[롬 2:8,9]. 이는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8:13]는 경고와 같은 뜻이다. 천국은 침입해서 들어가 힘으로 빼앗아 차지한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한다[마 11:12/눅 16:16].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중에서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21:7]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말씀과 같다. 전쟁하여 이기려는 자로서 소극적이고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자는 없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선을 행함과 의를 행함으로 나타나지는 것이다. 적극, 능동적으로 나가는데 그것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날 리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를 적대하여 인간을 멸망에만 빠뜨리려고 사력을 다하는 악령 일당과 전쟁 중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전쟁은커녕 완전히 그 속박 아래 있는 포로들의 처지이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비로소 대등한 위치에서 맞서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 전투에서 필승을 다짐하는 군사학 교과서라 생각해도 좋다. 그 내용 안에 필요한 전술 전략이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인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인으로서 나와 함께 고난 받으라"[딤후 2:3] 했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했고,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하셨으며,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1:18/6:12] 했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우리의 할 일을 다하는 것을 가리켜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라 했고[딤후 4:7], 구원 얻어 천국에 들어가는 자를 가리켜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21:7]라 했으니 모두 전투 용어다.
단 "우리가 육체로서 존재하므로 육체로써 움직이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武器)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堅固)한 적진(敵陣)을 파괴하는 막강한 힘이라"[고후 10:3,4] 하였다. 즉 '생각'이 실제적인 우리의 전쟁 마당이다. 생각에서 이겨야 이기는 것이지 생각에서 지면 모두가 진다. 전쟁 마당에서는 항상 되풀이하는 경고이지만 "사즉생 생즉사(死則生生則死)"가 필수다. 살고자 하는 자 필멸(必滅)이다. 목숨을 내던져 싸움으로써 필승이다.
오늘날은 적(敵) 그리스도의 시대로 돌입하는 때로서 그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그 "몇이든지 죽게"[계 13:15] 되어 있는 시기다. 주님 위해 당당히 죽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있는 때이니 각오를 단단히 하여 매사 임할 때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고자 하거나 미련을 갖는 등의 부질없는 일에 일분이라고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니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람 살리는 일에 전념할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이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인 악령의 일방적인 속박 안에 처해 이 세상이 독재자의 강제노동 수용소처럼 되어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믿은 후로부터 자유 해방이 되어 이 악신(惡神은 시험['유혹'과 '위협'이라는 양 날의 칼로써]하는 자로 변모되어 있고 이 세상은 시험장이기도 하고 동시에 전장(戰場)이다. ‘전쟁’이 말하자면 ‘시험’ 역할도 하는 것이요 시험하는 것이 바로 전투를 위한 도발, 도전 행위이다.
악령들이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전쟁 상황이기 때문에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창 3:15/고후 10:3-6/딤후 2:3].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과의 전쟁은[계 12:7] 인간을 중심한 것이다. 유념할 것은, "이 세상이 전쟁 상황이라 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 뜻을 행하기를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는 것이라 했으면 전쟁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즐긴다는 것이냐?" 하겠으나, 전쟁과 평화가 같을 수 없어 전쟁을 원하지 않고 죽음의 고난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전쟁이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너무나 보람찬 일이기에 즐겁게 전쟁에 나가는 것과는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 평안과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하셨지만[요 14:27/15:11/16:33], 또 한 편으로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 26:37] 하신 것과 같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고 마음을 다시 정하셨을 때는 자진해서 죽음을 마지하는 상태로 돌입하셨으니 아버지의 뜻을 기쁘게 수용하신 것이므로 바로 이 차이를 명심할 일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현재 상대적인 열세에 있으므로[능력이 있는 영물 즉 악령들에 비해] 거룩한 천사들이 인간[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이들]을 위해 그 형평 관계를 유지시켜 주고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원래 이들 영물들은 인간[아담]을 보좌하기 위해 창조되었던 것인데[창 2:19],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을 꾀어 넘어뜨림으로써 인생 전체를 이런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으니 이 장본인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닐 수 없다.
자기중심의 결말이 이런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는 것이니 그래서 죄를 암(癌) 세포에다 비유하게 된다. 자기만 망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전체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고로 전쟁 마당에서 어찌 적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자살 행위가 아닌가. 어찌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리요. 죽기로 한하고 싸워 이겨야 비로소 살 길이 열려지지 않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만이 유독 죽는 것도 아니고 탄압 받는 것도 아니니, 인생 삶 자체가 전반적으로 죽음이요 험한 꼴 일색이다.
단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경우 그 죽음과 고난에 새로운 의미 부여가 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의미가 엄청난 가치의 것이기에 이를 절대로 기피하지 않고 자진 자발적으로 기꺼이 수용한다는 그 차이다. 고난 자체를 즐긴다는 말이 아니라 선하고 올바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난 받음을 필연적인 것으로 또한 보람으로 여긴다는 뜻이니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자진해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도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그런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니 곧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함"[히 12:3]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적극성과 능동성이다. 의식적으로 앞장서서 주인 의식으로 임하는 모든 것이다. 믿음만 해도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인데 이 믿는 것이나 말씀을 듣는 것은 의식적으로 "마음에 두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어 버리는"["흘러 떠내려 가는"-히 2:1] 속성을 가진 것임을 성경은 경고한다.
믿음 좋은 마리아는 한 번 들은 것을 항상 "마음에 두는"[눅 2:51] 특징이 있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결사적으로 새처럼 말씀의 씨앗을 쪼아 먹어 버리는[없애 치우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견고하게 붙잡지 않으면 빼앗긴다[계 3:11/히 3:6,14]. 이 세상에서만은 그렇다. 이 세상을 그래서 똑바로 보라는[直視] 것이다. 소위 하나님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사는 것 같이 살아보려 하고 심지어는 축복 받아 잘 살겠다는 이기주의가 판치니 이 사실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인 것만 보아서도 전쟁이 지금 한창인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두 눈 부릅뜨고 이를 악물고 덤벼 드는 이런 상황에다 이런 판국인데 태평스럽게 코를 골며 세상 잠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오늘날 소위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들의 거의 전부의 실상이다. 이 세상을 사람 사는 곳으로 착각하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애당초 인간을 거짓말로 꼬드겨 죽음에 빠뜨렸고 인간은 그런 거짓말을 따랐으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 위에 올라섰고 따라서 인간 세상의 신(神)으로서 그 지배자[王, 임금-요 14:30]가 된 것이며, 이와 같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즉 인간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됨으로 인해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히 2:14]가 된 것이다.
마귀가 '사망의 세력을 잡았다'는 것과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은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전쟁에서 사망과 사망에 따르는 고난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주된 무기(武器)다. 사망과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무기를 두려워함이요 군인이 적의 무기를 두려워하는 한 그 전쟁은 승산이 없다. "혈육(血肉)에 속하셨다"[:14]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계셨음을 말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마귀의 권한 아래 속했다는 뜻이니, 따라서 "약할"[고후 13:4/11:30] 수밖에 없고 마귀가 가하는 각종 고난의 표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그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현재 우리가 그러함이 바로 이런 사유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그러하다. 약함 가운데에서 강해지는 비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날마다 죽는다"[ㄱ전 15:31]고 자랑하는 데에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계속 강조하는 것이지만 "죽음"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오고 죽음이 왔다"[롬 5:12]고 한 대로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시한부 생명으로 전락했음을 말함이다.
또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 이러한 마귀를 없애기 위해서는 즉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無力化)시키려면 친히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하는 것이었으니[:14], 그 죽으심으로써 그렇게 마귀를 무력하게 만드신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의 고난으로써만 유일하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맞설 수 있음이니 이것이 승전의 비법이다. 죽으셨다가 반드시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으므로 이로써 사망을 무기력하게 만드심이다.
이런 사실을 믿는 이마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써 죄[자기를 위해 살고자 즉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여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는]에게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15] 것은 끝났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완전 자유 해방이 있다[:15]. 그래서 그렇게 "죄를 짓다 보니 마귀에게 속했었는데[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므로]" 그러나 이제 해방되니 "마귀의 일은 멸해지는"[요일 3:8] 결과가 된다. 다시 말해 죄를 짓지 않게 되고 따라서 죽음의 결과도 없게 된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마귀의 권세라는 것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의 지배권을 말함이다. 때문에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이 마귀에게 넘겨진 것이므로 그가 원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고 이는 당연히 그에게 절하여 경배할 때 다시 말해 처음부터 범죄하고 있는 마귀를 따르겠노라 즉 범죄함[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으로써]으로 추종하겠다는 결정을 할 때 그렇게 된다[눅 4:7].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더 이상 이런 죽음에 개의치 않고 자유 해방을 누리게 되었으니 마귀에게 구태여 절하면서 즉 죄를 지으면서 살고자 발버둥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실상대로 말하면 "우리가 다 잠잘[죽어 있을]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게 되는데" 그리스도께서 이제는[과거에는 자연계에 속한 약한 육체 곧 혈육으로 오셨기에 형평 차원에서] 영광의 몸으로 다시 세상에 오심이 필연적이므로, 이렇게 오실 때 "호령[a shout, a loud command, the shout of command]과 천사장(天使長)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앞세우고"[살전 4:16] "불꽃 중에 나타나실"[살후 1:7] 것이다.
"불꽃"은 신령한 몸의 특징처럼 되어 있다. 마귀[Devil]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Satan] 곧 악령 용(龍-계 12:9/20:2)으로서의 형상을 보면 그 입이나 코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눈에 목격되었던 것과 같다. 성경은 이미 이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니 용이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곧 용이다[계 12:9/20:2]. 이에 대해서 상세한 것은 '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충돌의 진상'에서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양면성에서[이는 첫 사람 아담의 육체의 양면성과 같으니 곧 자연계에 속했던 육체와 신령한 몸의 일치 조화] 자연계에 속한 몸 즉 혈육으로는 이미 나타내시어 죽음의 고난을 맛보셨으로 나머지 신령한 몸의 측면으로서도 반드시 나타나시게 되어 있음이다. 왜냐면 일면만을 나타내시는 것은 사리에 벗어나는 것이므로[양면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뜻에서] 나머지 면을 세상에 나타내실 필요성에서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천사들을 앞세우고 그 호위 속에 임하시는 것은, 원래 천사들[영물들]이 첫 사람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들 위에 군림해 있었던 바로 그 모습대로 이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 그 원래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모습이시기에 그러하다. 이는 첫 사람 아담이 애초 에덴낙원에서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과연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의 일대 장관(壯觀)이 될 것이다. 그 전에 적(敵, anti) 그리스도의 때가 진행되는데 역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각종 기적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할 수 있는 한의 최대 규모로 현란하게 과시해 보일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도 그다지 생소한 국면의 전개는 아닐 것이니 왜냐면 그 즈음이 되면 그동안 초자연적인 현상과 사건을 인류는 너무나 많이 체험하고 체득해 옴으로써 완전히 숙달되어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는 초자연계의 영계에서 인간[아담 부부]이 존재하다가 범죄로 인하여 자연계로 넘어온 과거의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것을 재연(再演)해 가면서 원 상태로 회복해 가는 모습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요즘 시대는 이전과는 아주 다르게 초자연적인 것이 확대 확산되어 나타나는 세대임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재림하신 후 천년 동안 세상을 통치하시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즉 그 때는 사람들이 대개 천년 정도는 장수할 것인데 왜냐면 노아 홍수 이전에 인류가 천년 가까이 살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을 밟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가 되면 백년도 채우지 못해 죽는 것은 저주 받은 결과라 여겨질 것임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사 65:20]. 그리하여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게 되는데"[고전 15:25]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26]이다.
"사망"이라는 것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말함이니 이런 육체는 곧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므로 정상이 아닌 것이며 현재 모든 인류는 비정상 상태에 있음을 앞에서도 설명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구원될 사람 다 구원됨으로써 모두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날, 인간의 범죄로 야기되었던 이 "죽음"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고 있는 비정상적인 현상은 영구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될 것이라 기록된 말씀이 응할 것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to sting]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3-56] 함과 같이 완전 종결되는 것이다.
죄를 지음으로 사망이 왔고[롬 5:12] 율법[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어김으로써 죄가 왔다는 그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죽지 않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죽음은 영구적으로 되풀이되었을 것이나, 마침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리신 것이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다"[:21] 함과 같다. 하늘의 나팔 소리를 신호 삼아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살아남은 자들]도 변화할"[:52] 것이기에 그렇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요 5:29]고 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어 있었을 바로 그 상태로 모든 것이 회복된다. 즉 "죽음"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몸’은 없어지고 악인이든 의인이든 모두 신령한 몸, 애초 아담 부부가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에덴낙원에서 생산했을 그런 신령한 몸의 인간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부활", "심판의 부활"이다.
범죄하지 않았다면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가 낳았을 인간들 중에는 악인도 의인도 물론 다 있을 것이지만 죄를 지어도 영물들처럼 신령한 몸은 그대로 있는 것이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리는 그런 불상사는 처음부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즉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이렇게 다시 말해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된 것이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영원한 "불 못"[火湖, lake of fire]에서도 자연계에 속한 몸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써 모두가 지내게 된다는 뜻이다.
자연계에 속한 몸이라면 당장 소멸되고 말 것이지만 영적인 몸은 그렇지 않으니 거기서는 벌레라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하셨다[막 9:48].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입고 있는 연유와 의미를 알았은즉, 의인으로서 이 세상에 이런 몸을 하고 있을 때는 오직 한 가지 이유와 목적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유능한 군인"으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접전하는 가운데 "고난 받음"[딤후 2:3/골 1:24]에 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움으로써 나머지 인생들이 구원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고난 자체가 인생들을 살리는 데에 원동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인생 구원을 널리 알려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얻게 하는 데에는 말씀을 증언하는 우리들 증인들의 제사장적인 기도와 복음 전파가 필수인데 이런 일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골 1:24]으로써 가능하다는 그 뜻을 말함이다.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은 내 안에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되는 줄 아는데 심판의 부활에 해당하는 이들은 그러면 어떻게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가 한다면, 삼위일체 법칙의 대칭 원리를 따름이라고 답하게 된다. '기본형'만 정해지면 나머지 그 '대칭형'은 반(半)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다시 말해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 다 구원 받게 되는 것을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본형'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은, 각자 구원을 얻되 전적으로 자기 자유 의지의 결정에 의해 믿음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기본형'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구원 받는 사람들의 일정한 숫자가 채워지지 않으면 '기본형'이 이루어지지 않고 따라서 마지막 심판[악인과 함께 악령들이 불 못으로 들어가는]도 불가능해지는 까닭이니 '대칭형'으로서의 "심판의 부활"이 형성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악인들도 신령한 몸을 입어야 영원한 불 못을 견딜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고로 악인들이 신령한 몸을 입지 못하게 되면 마지막 심판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리 되면 악령들 역시 불 못에 들어가는 것이 지연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목적하는 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기본형'이 반드시 형성된다고 미리 확언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자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리원칙대로만 움직이시는 줄 잘 알므로 그런 원칙대로 하면 자기의 계획도 어느 정도의 성사를 내다볼 수 있다는 교만에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런 방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결이 아니라 인간과의 대결에서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우리 원수의 끊임없는 도발, 도전을 받고 있는 상태다. 영생 하나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받아 챙기는 것으로써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도발 행위가 목적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이 선물이 빼앗기도록 하려 함이다. "내가 속히 임할 것이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하심과 같다.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약 1:12]이라 한 대로,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이다. 그러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계 2:10]은 어찌 된 뜻인가.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을 지키라는 경고이신데 또 그 생명을 주시겠다 함이 무슨 의미이냐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하고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다"[요일 5:12] 한 요한이, 동시에 "15.0pt;">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는 성경이 모순(矛盾)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矛)와 순(盾)의 조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는 창이요 '순'은 방패를 말한다. 그러니 이 둘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모순의 조화라는 것은 삼위일체 원리에서 나온다. 즉 대립 혹은 양면성의 원리다. 다시 말해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갑[a]과 을[b]이 둘이 하나되어 병[c]을 이룸이다. 삼위일체 법칙의 도식(圖式)인 아래 그림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다, 보라,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계 1:18].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사셔도 이제 영원히 나를 위해 사시는 터이다. 때문에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다"[요 14:19] 하셨다. "내가 살았으니까 너희도 살게 된다" 하심이다. 나를 위해 사시니까 나를 위해 존재하시게 되고 그러므로 바로 "또 하나의 나", "제2의 나"가 되어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골 3:4/갈 2:20]이시라 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나 살으심이나 모두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고 생명과의 불가분성을 지님이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다"[고전 15:14,17,18] 하는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롬 5:10] 함과 같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셔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엡 2:5,6] 것이다.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각자의 위치가 그러하다. 죄인으로서는 죽게 되어 있으니 일단 죽은 다음이라야 새로이 무엇이든 창출될 수 있기 때문에 죄인으로서의 나는 먼저 마땅히 죽어야 하며 이렇게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나의 구원[영원히 살고 죽지 않음]에 필요불가결한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는 데에는 갑, 을, 병 관계가 형성되어 절대로 갑은 갑 자신을 위함이 없고 반드시 을을 위함으로써 병으로 통일되게 되어 있으며 을 역시 그러함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 죽음의 필연성에 부응함이니 생명의 법에 어긋나는 모든 것 즉 자기중심의 대가는 죽음뿐이라는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그러하고 현재의 나의 위치[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가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서의 "육신"[롬 7:14-8:13]에 매여 있는 터이므로 이 육신 곧 "죄의 몸이 파괴되어야"[6:6] 하기 때문이다.
죄의 몸이란 것은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 등의 생명체에서 보는 종족 보전을 위해 자기중심 일변도의 기계적 작동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여기에 속하게 되어 있지 않으니 왜냐면 그런 타율성에 지배되지 않고 자율성으로 그 삶이 좌우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자기 자유 의지를 따른 선택에 의해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하나님께서 정하시는 타율적이 아닌] 결정하게 되어 있는데 이미 그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의 구분이다.
이들 악령들은 장차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 역시 그런 멸망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린 결과[왜냐면 처음에 그는 자연계에 속한 물질로서 그 육체가 먼저 지음 받았으므로] 이런 나약한 육체 가운데 위치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아담의 죄의 대가 곧 죽음이었던 것이다[5:12]. 아담의 죽음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며 우리의 죽음의 실상이 여기서 연유됨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본 뜻을 설명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나도 당연히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나 자신을 전부 주님께 바치고["주님"이라는 호칭이 바로 이를 적시함이니 곧 나를 소유하신 주인님이라는 뜻] "그 모든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하게 되어 있는 주님의 보내심 받은"[요 20:21] 영원한 위치에 있음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언제나 매일 매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7] 하신 대로,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 하심에 있는 것이다. 왜냐면 모든 관계의 가장 기본이 되시어 앞서의 설명대로 "군사부 일체"가 나와의 사이에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한 몸"[창 2:24] 관계에서의 아내 남편보다 더 밀접한 인간 관계[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으니]를 형성하고 계심이다[고전 7:33,3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러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가 되어 있음이 아니라 창조 당시부터 그러하였으나 그래서 아버지 품속에 인간이 있는 것이었으나 인간 스스로 그 품속에서 벗어나 자기중심이 된 비극적 결과로서의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완연하게 폐기된 상태에서 죽음으로써 끝내고[그리스도의 나 위하신 죽음으로] 새로이 창조하시는 과정이 창조자이신 아들 친히 [사람되시고 그리고 그 죽으심과 더불어] 다시 살아나심인 것이다.
현재의 인간고는 죽은 자로서의 이 죽음의 양상인 것이다. 첫째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기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그렇고 둘째는 죄 가운데 있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로써는 생명이 아닌 죽음의 열매만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악한 자를 걸러낼 목적의 생명처럼 착각될 세상의 영화와 권세가 있는 것은 그래서 생명처럼 착각될 정도의 "삶의 낙"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처음 이 세상이 창조될 때의 흔적이 남아 있음이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로소 저주 받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세계로 창조되었으니 인간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까닭에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장차 오는 세계는 처음부터 생명과 죽음으로 양분되어 나타나는 양면성이 뚜렷한 세계이므로 다시는 이런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고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표현한다. 그 대신 생명의 세계는 애당초 창조 당시의 것처럼 전혀 새로운 100% 생명이 세계로 등장하게 됨은 당연하다.
군신지간은 국가 위급시에는 장졸(將卒)지간으로 모습을 정비하게 된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다. 그러나 독불장군(獨不將軍)이니 아무리 장수가 뛰어나도 군졸이 따라주지 않으면 장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또 장수가 똑똑치 않으면 그 아래 부하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똑똑하지 못한 명령에 부득불 따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로부터 오는 폐해를 자초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때문에 전체와 운명을 같이 한다. 생사를 함께 하는 것이니 한 몸의 체제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몸의 구조에서는 머리가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머리가 시원치 않으면 몸 전체가 파멸이다. 고로 머리를 잘 만나야 한다. 임금을 잘 만나야 하고 단체의 장을 잘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머리는 유독 역량이 뛰어나야 할뿐만 아니라 전체를 자기 자신처럼 위하는 특점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머리를 따르는 몸의 구성원 즉 몸의 각 지체 하나하나도 그런 동일한 일체(一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머리 스스로 그런 본을 보여야 즉 머리가 그렇게 부하들을 자기 자신처럼 여겨야 하는 것이니 그런 본을 보여 주지 않고는 대개 불가능하다. "대개"라고 한 것은 머리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똑똑한 아랫사람이 있어 그런 정신으로 일관할 때 머리로 말미암아 빚어진 불행한 파국을 역전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현저한 예를 임란 당시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보여준 것이다. 당장 쓰러져가는 나라를 그 스스로 붙잡아 다시 세워 일으킨 것이다.
국가 존망이 걸린 전쟁에서는 개인으로 치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문제다. 이런 사활이 달린 난국에서 본성적으로 뭉치는 힘이 바로 군대로서 나타난다. 이 군대의 조직은 철저한 머리와 몸[의 각 지체]의 구조다. 때문에 이러한 군대 조직을 생명의 가장 명확한 구조라 하는 것이다. 생명의 원초적인 모습인 까닭이다. 하나같이 움직이지 않으면 제물에 붕괴되어 버린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데에 생명력이 있다.
그러나 국부적으로 보아 그렇지 시야를 넓혀 전체를 조망하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을에서 갑으로 흘러가기도 하는 분명한 현상을 나타낸다. 이것이 삼위일체 원리다. 명백히 순류(順流)인데도 동시에 역류 현상이 존재하는 것이라 할까.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땅에서의 일이다. 하늘 곧 공중에서의 작용이 있으니 거기는 태양이 있고 공기 등으로 해서 해수가 증발하여 구름을 형성하고 그것이 비를 내려 모든 높은 곳에다 끊임없이 물을 공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땅의 일은 갑[a]과 을[b]의 작용이요 하늘 곧 공중에서의 일은 병[c]의 작용이다. 그래서 위의 그림과 같이 갑에서 을로 끊임없이 흐르되 병을 통하여 을에서 갑으로 또한 흐르는 것이다. 을에서 갑으로 흐르는 역류를 순류로 만들어 작동시켜 조화시키는 것이 병의 역할인 것이다. 사랑과 생명의 원리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서로 하나로 조화 통일되어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시고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이니 곧 우리 구원이다. 즉 갑이 을을 위하니 을도 갑을 위하게 됨으로써 '갑'과 '을'이 하나되어 있는 '병'을 서로가 이룸이다. 여기서 어느 일방적으로 움직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둘이 동시에 움직여야 함이니 곧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해야만 둘이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함으로써 하나를 이룬 것인즉 어느 일방이 그 상대를 위하지 않을 때 어떻게 되는가. 자연스럽게 그 둘은 다시는 하나일 수가 없게 된다.
생명체와 무생물의 차이는 전자는 끊임없이 그 스스로 움직임에 있고 후자는 일절 그런 움직임이 없이 타의, 타력에 의해서만 비로소 움직인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자연계의 생명체가 아닌 영계에 속한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나 영물이 자발적으로 즉 자유 의지에 의해 그 스스로 움직이되 갑을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움직여야 한 몸 체제로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음은 이미 앞에서 여려 차례 설명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도록 되어 있는 삼위일체 원리를 따라 처음부터 창조된 대로 각 피조물[인격성을 지녀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은 머리되신 하나님을 위하니 이는 하나님 친히 그 피조물을 그렇게 위하심을 그 이지(理智)로써 능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하나를 이루어 한 몸 구조가 되어 있는 것이 생명 체제일진대 그리고 그와 같이 움직이도록 창조하셨을진대 우리 피조물이 이렇게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면[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고후 5:15] 아무 문제가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정해진 질서를 따르지 않고 궤도 이탈을 하여 다시는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위할 때 그 하나됨이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자기중심으로 나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하여 악령들이 멸망에 처해져 있는 상태이고[지금은 아직 마지막 심판 때가 아니므로 그 사실이 나타나져 있지는 않으나]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했던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현실이 이 증거다. 더 이상 애초 창조된 대로의 생명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