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1일 목요일

★자주 독립성과 "둘이 하나됨"과의 차이

자주 독립성과 "둘이 하나됨"과의 차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

"이를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버린다"ㅡ이것이 자주 독립성이고,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ㅡ"이것이 둘의 하나됨"이다. 즉 사랑으로 "둘이 하나되어" 있음인데 그리고 "사랑은 서로 종노릇함"(가 5:13)인즉 내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섬김을 받음으로써 되는 주인이다. 그 대신 나는 당연히 나의 상대를 섬김이다. 이렇게 서로를 섬김으로써 둘이 하나됨의 사랑을 이루는데 억지로 시켜서 강제 간섭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니까 절대적인 자유요 자주 독립성이다. 

위의 말씀이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아버지의 계명은 아들된 도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자진해서 그 계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이것이 사랑의 주체성(자주 독립성)이다. 하나님께 순종을 해도 순종해야 되겠기에 억지로 마지못해 그 때만 어떻게든 넘기려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순종이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 순종은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순종을 했노라고 자부할지 모르나 하늘에서는 순종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불순종으로 낙인 찍힌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선지자가 그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자에게 도리어 물려 죽은 것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도 경고하시는 것이다(왕상 13:30). 천사가 말했다는 말 한마디에 두 말 없이 먹고 마신 것은, 그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된 데에 대하여 불만스러워 했다는 증거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계명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에게도 주신 바와 똑같은 것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내용 그대로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너희들 역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요일 4:20) 까닭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위하니 너는 나를 위하고 사랑하라는 생명과 사랑의 법칙의 '동시성'이다. 동시에 움직이게 되어 있음이다. 즉 갑과 을 간의 사랑은 갑이 을을 위하니 을 역시 당연히 갑을 위하지 않고는 즉 동시성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동시성을 동일성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하나된(동일성) 가운데에서라야 그런 동시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상대가 나를 보아주니 나는 나를 보려고 애쓸 필요 없이 나는 상대만 보아주면 된다. 

이것처럼 이상적인 것이 없다. 내 등 뒤에 무엇이 묻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나 상대는 볼 수 있으니 내게 관한 것은 상대방에게 일체를 모두 맡기고 나는 그 대신 상대방을 그렇게 보아주면 끝나는 일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자기를 일체 위하지 않음)이다. 이것이 삼위일체 원리의 양면성의 동시성(동일성), 동일성의 양면성(duality as unity, unity as duality)이다.

이것은 둘이 하나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통하는 용어다. 다른 데에서는 통용되지 못한다. 둘은 둘이지 하나일 수 없고 하나면 하나이지 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성을 처음부터 띠므로 제3, 제4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고 오직 양자 간의 관계다. 그래서 이 하나되어 있음까지 포함해서 마치 3자 구조인 것처럼 되어 있는 양상이므로 이 이치를 가리켜 간단히 "3위1체 원리"라 하는 것뿐이다.

오늘날 사탄은 사람들의 시간 갉아먹는 데에 도통해 있다. TV, 인터넷 기타 각종 매체의 발달로 생존에 극히 필수적인 것만 빼고는 모든 시간을 여기에다 갖다 바치도록 만들어 놓았다. 사탄이 이렇게 하는 것은 따분하게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 불확실성의 인생들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개구리를 따스한 물에 넣어두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인데 차츰 온도를 높이면 뛰쳐나올 생각은 못하고 여전히 기분이 좋은 채로 있다가 결국 삶아 죽이는 그런 현상을 모방함이다.

정확히 말해 영원 세계에 대한 생각을 못하도록 그 심각성에 대해 잊어버리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손쉬운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자연계가 있으니 거기 대비하라는 경고를 들어도 듣는 그 때뿐이지 쇠귀에 경 읽기다. 믿는다고 하고 구원받았다는 사람들도 기도하고 성경 읽고 모이는 일에 태만하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율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자율성의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성경이다. 내 스스로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여하한 시험이 있어도 이를 극복하는 이들이 이런 자율성에 속한다. 그렇지 않고 일시적인 재미와 호기심에 시간을 보낼 때 구원 받았다는 그 믿음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이것이 오래 계속되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 끔찍한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타율성"의 인간을 만드는 홍수 같은 급류에 대처하기 위해 이런 3위1체의 법칙이니 3운법칙 같은 것이 소개되어 있는 것이니, 100%가 되어야지 89 또는 98, 99%도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고 유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사람 구원하는 일인즉 오직 여기에 전심전력을 기울여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 보고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은 자아중심으로서 자기 구원을 위해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으로 할 때 그는 이미 자기의 구원된 위치에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이요 만물의 상속자 곧 주인으로서의 의젓한 자세를 잃지 않음이다. 사탄이 보여주는 이런 세상의 갖가지 현상들은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면 신물이 나도록 보고 듣고 즐기고 할(생명이 세계에서는 실상 물리고 지치는 일이 없으나 각자가 창조성을 띠는 까닭에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감흥 속에 지내게 되고 그런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가운데 다시 다른 것이 생성되는 등 변화무쌍한 재미 속에 묻혀 지내는지라 싫증이 날 짬도 없지만) 것인데 이 사람 살리는 귀중한 기회와 시간, 영원히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황금보다 더 귀한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내 시간인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나의 기력인가? 모두가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께 바친 것이 아니던가. 내 것은 하나도 없으니 모두가 주인님의 분부대로 하기 위해 주님의 소유로서 맡아 있는 내 목숨이다. 왜냐면 주인님께서 바로 그 종인 나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시고 나를 위해서만 일체를 하시고 나를 섬기시는 위치에 영원히 계시기 때문이다(눅 22:27).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랐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이제 비로소 배우게 되지 않았던가!(요일 3:16).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 평안 등은 이 사랑의 기쁨과 평강(평화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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