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 충돌의 진상-10. 기타 몇 가지 고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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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고 교회 앞에 경고하고 디모데를 가르치던 바울이니 만큼 그 자신 그렇게 자기 구원을 이루고 자신을 구원하는 본을 보인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그가 "내 자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원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이것이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큰 근심이 되어 있음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바"[롬 9:1-3]라 했으니, 이는 역시 같은 심정으로 기도한 모세의 마음과 같고[출 32:32]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이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나를 구원하라고 경고함이 진정 어떤 뜻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니, 오직 나를 보내신[요 20:21]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4:34] 것을 나의 일상 "양식"[:34]처럼 하라는 것이다. 그런 말로 표현한다고 해서 결코 내 구원이 목표인 양 착각하지 말 것이다. 내 구원이 목적이라면 어찌하여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란다"고 했겠는가.
이 말을 하면서 바울은 "내가 거짓말을 아니하는 줄 성령께서 증언하신다"[롬 9:2]고 했다. 우리 구원이 다시는 아담이나 악령 사단처럼 자기를 위하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머리의 지시를 받아 복종하며 사는 데에 있으므로 복종 않으면 구원 자체가 무의미, 무효가 됨이다. 가장 핵심되는 것 중 하나이므로 이를 백번 강조해도 좋다. 바울처럼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므로 '결과론적으로' 내가 나를 구원함이다.
대중 심리라는 말이 있듯이 이 세상 전체가 자기중심의 분위기에 휩쓸리니, 다수(多數)가 '정의'로 통하고 '진리'로 통하는 것도 무시 못할 현실이다. 반면에 소수는 항상 진리로 대접 받지 못하고 정의일 수도 없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로 악령들이 인간과 접촉하여 자식들[네피림-창 6:4]을 생산하여 이 세상에 군림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 조성을 위한 획책이기도 한 것이다. 대세를 이루어 사람들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못하도록 선동하고 부추기기 위함이다.
간교(奸巧)한 사단은 또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이단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소수로서의 핍박'을 받게 함으로써 진리 연(然)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진리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부당한 탄압을 받는다고 말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단은 생각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속임수와 거짓을 있는 대로 그야말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자이다. 사단이 이 세상에서 신(神)으로 군림하는 것은 그의 영적인 힘이 크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얼마나 허약하고 무가치함을 상대적으로 드러내는 것뿐이다.
우리가 신령한 몸에 비하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는 것이 훨씬 왜소하다 했지만 비유하자면 우리 사람으로 칠 때 어떤 동화에 나오는 것과 같이 마술에 걸려 곤충[벌이나 개미 등]과 같은 규모의 작은 몸집으로 변한 것과 같은 그런 몰골이 되어 있다 할까.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이런 비참함에 눈물이 마르실 날이 없으셨다고 해도 너무 지나친 말일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히 5:7] 하였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우셨다고 한 사실을 터전해서 하는 말이다.
그냥 간단히 살리시면 되는 일이므로 비감(悲感)에 젖으실 필요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죽은 나사로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죽은 자로서의 참상을 새삼스럽게 느끼셨기 때문이다. 참혹한 실상인 것이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 형제들이 그를 장사하고 난 뒤 크게 운 것도 같은 맥락에서가 아니랴. 부활하게 될 것을 그들 중에 아무도 의심하는 자가 없었지만 그래도 대성통곡한 것이 사랑하는 형제를 한동안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안타까움과 더불어 죽음의 고난에 함몰해 있는 인생 비극을 다시 확인하게 됨에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다는 이의 초상집에 갔더니 거기 조문 온 교회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슬퍼하는 또는 정숙한 맛은 없이 저들끼리 잡담하며 웃어대는 것을 보고 아주 정나미가 떨어져 기독교를 믿는 것 자체에 대해 반발심이 생기더라고 했으니 유의해서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최소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인생 비극에 대하여 뼈저리게 느끼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가 신으로 군림하여 이 세상을 주름 잡는다고 해서 무슨 굉장한 위치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사단의 의도하는 바대로 따름이 된다. 그가 그런 힘을 설령 쓴다 가정하더라도 항상 미가엘을 필두로 하는 거룩한 천사들의 군단(軍團)이 항상 악령들의 어떠한 돌출 행위도 없도록 철저히 감찰하여 중화(中和)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우리가 사단의 존재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 성경이 사단의 실존과 활동을 말하여 경계하면서도 비교적 여러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에덴 낙원에서 "뱀" 곧 사단은 인간[아담]을 속여 죽음에 몰아넣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 "흙을 먹고 배로 다니지 않으면 안되는데"[창 3:14] 그 결과 다른 악령들과 달리 용은 이 지구상에서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그런 용의 몸 그대로의 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신(神)은 모든 악령과 귀신들을 통할하는 까닭에 귀신이든 악령이든 다 사단의 이름으로 사단이 시키는 일을 수행하게 되어 있는 (물론 자기중심에서 우러나는 일들이지만) 존재들이다.
예수님을 판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의 "속에 사단이 들어갔다"[요 13:27]고 하는 복음서(福音書)의 지적도 그런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사단이 들어갔다"는 것은 사단이 부리는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가 그런 생각을 통해 그 사람을 완전히 조종했다는 뜻일 수 있다. 사단의 형체가 지구상에 나타내어질 때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눈으로도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용의 형체를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묘사하게 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용이란 것이 지상에는 실존하지 않는 동물이면서도 실재하는 양 널리 인식되어 왔음을 앞에서 설명했다.
용에 대한 기록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나, 동양은 예로부터 인구 밀집 지역이다보니 목격자도 상대적으로 많아 보다 상세한 정보에 터전해 있기에 용의 형상도 말 그대로 뱀의 형상임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을 따름이다. 중국인들도 그런 목격자가 상당수였기에 그토록 집요하게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서 [상상이 아닌] 용을 신성시해 온 것이다.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고 장담하고 여러 사람이 그런 목격담을 전하고 있으니 그 외에 달리 무슨 증거가 필요했겠는가.
오늘날까지 용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것이 아님을 단정할 수 있다. 용이 자기 실체를 과시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인간의 눈에 띄어진 것인데 사단은 자신이 아닌 용이라는 별개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꾸며 인생을 속여 왔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잘도 먹혀 들어 인생은 그 아무도 이런 용을 사단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음을 앞에서 지적한 그래도다.
인간을 속이는 일에 자기의 실체가 폭로됨으로써 절대로 이로운 점은 없는 것이다. 이런 용인지라 육지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 터이므로 과거로부터 지구상에서 주로 머물던 곳은 바다라고 생각되고, 퉁구스 사건 이후 흐느적거리며 지나가던 행선지도 바다 즉 버뮤다 삼각지대였으리라 판단된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어쨌든 바다가 그 거처이지만 사람이 아닌 '영적인 육체'의 영물이라 물 속에 있다 하여 그 활동이 제한되지는 않는다.
저주 받은 결과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되어 있기는 하나 신령한 몸이 특징은 그대로 있음 역시 이미 지적한 그대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용이라 하면 바다에 거처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인식되어 왔다. 산에는 산신령, 바다에는 용-이같이 "용궁의 용왕"으로서 바다의 신으로 알려져 있도록 사단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한정된 인간의 지식과 지능이기에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것을 이해 못하게 되어 있는 현실은 간과하고, 무조건 자연계의 한계를 넘는 현상은 일괄해서 미신으로 무시해 버리는 교만은 경계할 일이다.
분명히 현존하는 것을 없다고 우겨 스스로 그렇게 확신하는 것 역시 미신임에는 매일반이다. 사람의 영혼까지도 소위 과학 실험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여 그 존재마저 부정하려 드는 어리석음 역시 마찬가지다. 영계의 실체가 자연 과학의 법칙만을 수용하는 과학의 실험 대상일 수가 없는 것은 상식인데도 이를 무시하니, 이미 지적한 대로 진화론의 미신의 꿈 속에서도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즉 앞으로 적 그리스도가 아무리 첨단 과학의 이름으로 성경과 그리스도와 상충되는 소위 "과학적 증거들"을 들고 나오더라도 거기 일절 미혹되지 말고 흔들리지 말도록 하나님은 이런 진화론을 역으로 이용하여 경고하시고 있는 터이다.
뱃사람들이 바다를 상대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악령들 혹은 사단과 조우하게 되는 경우가 예로부터 많았던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육지 사람들은 "뱃사람들의 미신"이라고 치부하여 일소에 붙이지만 실은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지금도 그런 바다에서의 "진기한, 신비스러운" 현상을 심심찮게 증언하는 이들이 있다. 거대한 빛 덩어리의 바퀴 같은 것이 바다 물 속에서 시계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말한다.
그런가 하면, 해저 깊은 곳에서부터 탐조등이라도 비추듯이 해면에 그런 빛의 원형(圓形)이 형성되기도 하고, 수평선상에서 각종 짐승의 형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가 하면 금방 둘로 쪼개지고 여덟으로 나눠지다가 그것이 다시 세미한 끈처럼 형상이 변하는 등 온갖 조화를 부려 선원들의 넋을 빼놓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지구상의 곳곳에서 묘기 아닌 묘기를 부리고 있는 ufo들과 똑같은 짓들을 바다에서도 하는 것임은 당연하니 같은 악령들 또는 사단의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공중에서 그런 것들이 나타나 하나가 갑자기 둘 이상으로 쪼개지는 것과 같은 그런 짓들이다. 똑같은 악령들의 짓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행동 목적은 하나다. 소위 "외계에서 온 외계인"으로 가장하여 나중에는 조물주로 자처하게 되는 등의 마지막 속임수를 위한 전주곡인 것이다. 일부 과학자는 그런 부정할 수 없는 바다 속에서의 현상들을 보고 소위 "해저(海底) 문명권(文明圈)"의 실재(實在)를 확신하고 있을 정도다. 이 역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일종의 미신이다. 미신을 안믿는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더한 미신에 빠지고 드는 소위 과학자들의 무지요 무식이다. 성경을 믿지 않으니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이런 사실을 소개하면서 러시아 프라우다지(인터넷 영문판)는, "우주에 그런 문명권의 실재를 믿는 이가 있는 판이니, 해저 깊이에도 그런 문명권이 있어 현재 육지 생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일 수는 없다"는 식의 기사를 싣고 있을 정도다. 그것을 뉘 알겠냐는 논조의 글이니, 이런 것이 모두 성경만큼은 고집스럽게 믿기를 거부하는 골 빈 세상 사람들의 소위 지식의 실태다.
즉 인간보다 월등한 지능과 지식을 가진 존재들[성경은 이들을 악령들이라고 명백히 가르치고 있건만]이 몸을 감추고 있다는 뜻의 말을 하면서도, 자신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외면하니 보통 자가당착이 아니기에 하는 소리다. 마귀가 인간이 보지 못하는 그런 깊고 너른 바다 속에서 가끔 그런 짓을 해서 "용왕"으로서의 위상과 두려움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을 아는 일에 의도적인 혼란을 야기시켜 주고 있는 사실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사단이, 하나님께 향해야 할 인간의 경배를 낚아채고 있다고 생각함은 착각이다. 그는 일구월심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면 이 일에 자기 딴에는 자기의 명운(命運)이 걸려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즉 구원되는 인간의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이런 식으로 세상이 한정 없이 지탱해 나갈 확률이 높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런 확신은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말기에 사단이 무저갱으로부터 놓여 나와 지상의 사람들을 끌어 모아 반역을 시도하게 된다는 요한 계시록의 예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실로 집요하다. 그러나 그 때 완전히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후에야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얼마나 그가 악착스럽게 이 방해공작에 뛰어들고 있는지 알 만하다. 그는 원래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으므로 그 장래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언도 귀 담아 들을 리 없다. 단지 잘만 하면 자기 계획도 결코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계산에만 심취해 당치도 않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고집도 실로 가공할 만하다고 하겠다. 이는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공명정대하시고 공정공평하심과 원리원칙주의로만 움직이심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단 역시 이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일방적인 독단이나 전횡이 아닌 이상, 자기에게도 얼마든지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하는 것이다. 이런 고집은 비단 악령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마찬가지이니 이것이 악의 특성이라 할 수도 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니,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한다"[벧후 2:10] 한 그대로다.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한다"[:12] 함과 같다.
퉁구스 대충돌은 이전처럼 유유히 공중을 가로질러 가는 모양새가 아니라 지상에 세게 부딪쳐 일어난 충돌[세상은 "폭발"이라 하나]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런 것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가로질러 달리거나 공중으로 그냥 치솟는 모양이었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터이지만, 고공에서부터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내려오는 것이 관측자에 의해 목격되고 뒤이어 일어난 충돌[폭음과 화염과 진동 등]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별다르고 남다른 것이다.
즉 '천사들과의 하늘 전쟁에서 내쫓긴 용의 정체'이다. 요한 계시록에 밝힌 대로, "큰 용", "옛 뱀", "마귀", "사단" 등 그를 지칭하는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사단은 성령 받기 전의 베드로를 시켜서도 시험하는 말을 하고, 가룟 유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어 주다가 드디어는 그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사단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귀신이 그와 같이 하는 것], 즉결처분을 받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는 그 안에 "가득한" 등 갖가지 양상을 띠며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모든 귀신과 악령들이 사단의 명령 일하에 그 이름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단의 직접 행동처럼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이 욥의 참된 심중(心中) 즉 믿음을 모르고 그렇게 욥을 시험한 것처럼, 사단을 비롯한 영물들이 인간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는 뜻은 아니니 우리보다 능력이 월등하다는 것뿐이고 우리와 똑같은 피조물들이기 때문이다. "신(神)"이라고 해서 과대평가할 일이 아니다. 사단을 과대평사단에 대한 우리의 지식도 성경에 나타내고 암시한 대로의 정보뿐이나 실상 그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용 이외에 그와 함께 싸웠던 다른 영물들은 왜 보이지 않았는가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결론 내린 대로 용을 제외한 그 어떤 영물들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 인간의 시야를 밝혀 주어 보게 하도록 만들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 우리 오관으로 그들을 인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사단만이 우리의 시야에 그와 같이 드러나는 것이니 그 부하 영물들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사단을 그와 같이 결박하여 끌고 내려 와 힘껏 동댕이쳐 버린 천사들 역시 우리 인간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악령들이라 해도 사단처럼 그런 특별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므로 처음부터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 패배해서 쫓겨 내려오건 말았건 그들의 고유의 능력은 변함이 없는 까닭이다. 오직 인간의 눈에 띄게 되어 있는 용만이 그렇게 가시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오랜 역사의 전통이 있는 각국에 약방의 감초처럼 전해내려 오는 건국설화 등의 내용들이 어찌 보면 이상 관점에서 살필 때 실제 일어난 상황이었다고 단정해도 우리가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의 "네피림"에 관한 지식이 있는 한 감히 자신 있게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외 잡다한 소위 "신비스러운" 현상들은 악령들과 결부시키면 제대로 된 연결 고리가 된다.
그리고 이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남미 고대 유적지나 페루 나즈카 평원 등지에서 발견된 각종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대규모의 지상 건조물 또는 고공에서나 확인 가능한 문양(紋樣) 있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듯한 조형물들은 다 이들 영물들의 활동 잔재이거나 아니면 오늘 이 시대의 어떤 목적을 위해 일찍부터 미리 조성해놓은 의도 있는 짓거리들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퉁구스 대충돌을 두고 학자들은 운석 낙하설, 혜성 돌입설, 반물질 충돌설, 블랙홀 돌입설 등 갖가지로 설명을 시도해오고 있다. 영계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자연계에만 속박되어 있는 인간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되어 우물 밖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으니 그런 자연계에 한정된 생각밖에는 할 도리가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으로 볼 때, 그래도 사실에 어느 정도 접근한다고 볼 수 있는 시도가(試圖)가 이른바 반물질(反物質) 충동설이라 할까.
"반물질"에 대한 과학적 구명(究明)은 극히 초기단계에 있으므로 여기 소개할 정도까지는 아니나, 어쨌든 쉽게 말해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대칭적으로 우리의 형상이 나타나듯이 물질이 있으면 반물질, 따라서 반은하계(反銀河界), 반인간(反人間)이 있다는 논리로 전개되겠다. 이 '반인간'을 더 구체화시켜 그들은 '우주인' 또는 '외계인'이라 할지 모르나. "반(反)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인간은 그 자체가 이런 이중성으로 되어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그렇다.
반물질의 반우주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또 우리가 "영계"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바로 그런 신령한 세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입장에서의 '반물질' 개념은 성경상의 영(靈)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를지 모르나, 각종 소립자에는 거울에 비친 것과 같은 "상대적인" 반입자(反粒子)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상, 그 두 개념 사이는 촌수가 그리 멀다고 볼 수 없고 삼위일체 원리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보면 틀림 없는 것이다.
물질과 반물질은 쌍(雙)으로 만들어진 구조로서 즉 ‘짝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반물질은 모양과 질량 등 모든 성질이 물질과 같으나 전기 전하만 서로 반대 값을 갖고 있는 입자라는 사실 정도가 오늘날까지의 과학이 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지식의 전부라고 한다. 물질이 양화(陽畵)라면 반물질은 그 음화(陰畵)인 셈인데, 양화와 음화를 합치면 그 형태가 사라지고 회색 배경만 남듯이 ‘물질’과 ‘반물질’이 충돌하면 둘 다 소멸하고 ‘에너지’만 남는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다.
"소멸"이라기보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같이 빛의 ‘입자’라는 성질과 ‘파동’이라는 성질이 서로 융합하여 ‘빛’으로 존재함과 같이 '하나'로서의 융합인 것이다. 그런데 물질인 이 우주계만이 버젓이 홀로 남아 건재하고 있는 것이 얼른 해답이 나오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말들을 하나, 이 <반물질>이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을 액면대로 받아들인다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영계(靈界)임이 확인되고 있음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그러므로 수수께끼가 아니라, 가시적인 이 자연계에 비해 영계는 상대적으로 불가시적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면으로 존재할 뿐인데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에 대해 명백히 설명하고 있는 성경 자체를 믿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구와 그 지상에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을 다 만드신 다음에 다시 에덴 낙원이라는 '땅'을 창설하시고 그 땅 위에 다시 식물과 동물의 순서로 창조하신 사실을 여기서 지적함이다.
생물이 있으면 '반(反)'생물이 있으니, 뱀(蛇)이 있으면 '반'뱀이 있고 사자와 소가 있으면 '반'사자, '반'소가 있게 된다. 이 '반'식물, '반'들짐승, '반'새, '반'가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성경 창세기 에덴 낙원에 등장하는 동식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반'인간은 없다. 왜냐 하면 우리 인간이 바로 '반'인간 그 자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니 인간과 '반'인간의 이중(二重) 구조로서의 합성인 셈이다.
이 '반'인간적 요소가 사람의 영혼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인간"이란 표현은 물론 쓰지도 않고 쓸 필요도 없다. 오직 ‘영(靈)’과 ‘육(肉)’이라는 표현만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므로, 그와 같은 이른바 인간 및 '반'인간의 대칭적 요소를 그 안에 아울러 함께 지니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피조물인 사람'으로 계시게 되는 사실로써도 확인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출생하고 새로이 창조되어 있는 '나'라는 구조를 볼 때 명백히 그러하다.
§ 지금까지 설명해오기를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하늘의 전쟁 마당에서 만신창이 또는 인사불성이 되어 강력한 천사[들]에 의해 붙들려 지상으로 끌려 와 영구적으로 내리 박힌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러 천사들이 그냥 볼끈 들어다가 지상으로 처박아도 될 일인데 왜 그렇게 세게 내리 꽂듯이 큰 충돌을 일으킬 정도였을까. 그야 우리 자연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영계에서 생긴 일을 알 수 없는 것이고 단지 추측일 뿐이다.
즉 하늘에서 다시는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는 요한 계시록의 서술에 주목할 따름이다. 영물이므로 다시 싸움을 걸어 그 '하늘'로 복귀하려 할 것이므로 아주 영원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어서일까.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 그런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하면서 우리 세상 이야기로 말하면 아주 불구자로 만드는 식으로 두 번 다시 하늘에 오르지 못하도록 즉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드느라 그렇게 했을까. 이것은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단지 그렇게 추측만 했을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유의할 것은 세상에 아무리 악령들이 꽉 차게 밀집되어 있다 해도 지나치게 정도에 넘치도록 과분하게 인간을 압박하거나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그런 모든 월권행위를 무산(霧散)시키고 퇴색시켜 철저히 질서 유지를 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충분히 그 일을 해내고도 남는다. 그리고 이제는 하늘 전쟁에서 단연 압도적으로 제압한 터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예수님 말씀대로 천사들은 12영(營) 하고도 더 되는 병력이다. 한 '영'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상이 비록 이런 악령들의 세상이요 그들의 한판 무대일지라도 인간 구원에는 일절 직접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인생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피조물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방금 지적한 대로 그들과 맞대응하는(지금은 하늘 전쟁의 종결로 확실히 승자로서의 우위(優位)를 차지한) 천사들이 항상 빈틈없이 악령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고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요 1:12/3:16] 길이 계속 그대로 열려 있다.
그리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이나 어제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히 13:8]. 그 능력과 은혜가 처음 초대(初代)교회가 문을 열던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으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때를 분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효과있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종 영적인 현상들을 나타내어 소위 "외계인 운운" 하면서 사단은 기만전술을 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우리가 이 시대에 처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성령께서 각자에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전력을 다할 일이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누누이 경고하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별로 실감이 가지 않고 그냥 세상이 좋다는 마음이라면, 이상 모든 사실들을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는 그 뜻이다. 한 마디로, 마귀가 이 세상을 완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부터' 핍박 받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요 '마지막까지' 그러할 것임을 성경을 밝히고 있다. 사도행전은 교회 고난사(苦難史)요 요한 계시록은 교회 고난의 예언서다. 지금 한창 핍박을 받는다는 그런 심정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역대 로마 황제의 핍박 속에 믿는 이들이 카타콤에서 모이던 그 때처럼 여기고, 살기등등한 유대인의 손에 스데반이 순교 당하자 예루살렘으로부터 산지사방으로 교회가 뿔뿔이 흩어지던 그 때처럼 여길 일이다.
그런 때는 조만간 우리 자신에게 닥치게 되어 있다. 오늘날 북한 사회처럼 여기고 하나님께 충성할 일이다. 주님 오실 때까지 사정은 더 악화되면 되지 결코 더 나아지지 않게 되어 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일제 치하에서 믿음을 지키던 때처럼 여기고 믿을 것이다. 지금의 강제노동 수용소 통치하의 북한 땅에 사는 것처럼 여기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의 일사[一死] 각오로 임할 일이다.
로마제국의 핍박이 걷히고 콘스탄틴 황제가 믿음의 자유를 선포하자 믿음의 자유커녕 그 때부터 교회는 착실히 타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핍박이 아니면, 세상 사랑과 세상 생각(눅 8:14)으로써 질식사시키는 것이 마귀의 전술이다. 교회가 로마제국을 이긴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神)이 더 효과 있는 전술로 전환한 것뿐이었다. '핍박'에서는 교회가 살아남았으나 소위 "자유" 아래에서는 거의 살아나지 못할 빈사 상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교회는 요지부동으로 확고하다. 사단의 전술이 바뀌어졌다는 의미뿐이다.
세상과 교회는 물과 기름이다. 사단 곧 용이 세상을 차고 앉아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창세기 에덴낙원에서의 여자 그리고 계시록에서의 그 여자가 '교회'를 상징한다면 "용"과 "여자"는 분명 상극이다. 철천지원수지간인데 어찌 상종이 되겠는가. 악령들이 "공중에서 활동한다"고 점잖게 공중에서만 배회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에 있다"는 것은 전체적이고 효과적인 인간 통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의 발 닿는 곳, 손 잡히는 곳 그 어디서든 그 보이지 않는 형태로써 사단은 그 세력을 나타내고 있다. 악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천사들도 마찬가지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개입하는 천사들이다. 그리스도의 경우에서 보듯이 시험 받은 후 또는 간절한 기도 때 더욱 그렇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 그렇지 악령이나 천사나 그들은 없는 데가 없다. 물론 영역이 정해져 있다는 것뿐이다. 즉 불가피한 사정으로 반드시 필요한 경우 외에는 그들은 뒤섞이지 않는다. 하늘 전쟁에서는 사단 이하 악령 일당들이 패퇴하였으나 이 세상만은 사단의 영역이니 이를 천사들이 무단으로 침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 공명정대하심과 공정공평성 때문이다.
이들 영물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사람의 모습은 아니니, 이 사람 형상이 그들의 고유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감히 이런 형상을 할 수가 없다. 사단의 모습으로서의 용이 그 대표적 예다. 자연계에 대립되는 영계에서, 자연계로 말하면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뱀"에 해당되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의 뱀의 모습이 아니라 용의 모습임과 같다.
용만 저주 받은 결과로 배로 다니지 모두가 직립 보행이다. 인간[아담]과의 교제, 교류를 위해 영물들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악령들 중 하나의 모습을 예로 들어 말하면,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짐승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그런 형태로, 짐승이므로 물론 사람처럼 목은 없고 머리통이 그냥 몸통에 붙어 있듯이 되어 있고, 올빼미/부엉이 같은 퉁방울 눈은 머리통의 1/3 이상을 차지하며 전면에 붙어 있고, 머리통도 사람처럼 보기 좋게 둥그런 모습이 아니라 마치 물통을 거꾸로 둘러엎은 형상인데다, 크지는 않으나 적당한 뿔이 머리 양쪽에 불거져 있고, 보통 사람 키의 거의 10배는 족히 되는 전신(全身)이 온통 진한 다갈색 털로 덮인 그 산더미 같은 우람함을 목격하는 사람은 우선 까무러치기부터 먼저 할 것이다.
물론 이런 형상은 영물 자체의 모습은 아니다. 영물 자신의 모습으로 말하면 비록 사람의 모습은 아니더라도 빛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움 그대로다. 또 위에 묘사한 것은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 대칭[상칭, 대립]이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두가 다 그렇게 일률적인 형태일 수는 없다. 또 그런 것이 그들의 변장술인지 실제 모습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처럼 빛을 내거나 내지 않거나 자기 임의로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세상사람들이 이런 괴물들이 인간을 압제하고 마치 꼭두각시처럼 인생을 조종하고 있음을 안다면, 지금까지 생명 줄처럼 여기고 매달리던 이 세상 모든 관심사를 헌신짝처럼 동댕이치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구월심 '이 생지옥에서부터 구원받는' 데에만 기를 쓰고 덤빌 것이나, 모르니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듯이 태평이기만 하다. '웃음'이 어디 있고 '즐겁다'가 어디 있고, '재미'가 어디 있고, '신난다'가 어디 있겠는가. 벌집을 들쑤셔놓은 듯할 것이다.
전혀 모르기 때문에, 눈이 아주 어두워 볼 수 없으므로 그런 소동이 없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정상 상태로서의 평온이 아니라 모두 눈 가리개로 가려져 앞을 못보는, 처참한, 무서운, 그리고 비극적인 적막이다. 세상 사람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니 이런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상이 마치 천년만년 갈 듯이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오늘처럼 자기 삶이 여전할 듯이 착각하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종 진열품에 헛되이 취하여 코를 박아둔 채 세월 가는 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런 모양의 괴물을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그나마 먼 발치에서 목도하고 있다는 증언들이 나돌고 있는 상태다. 단지 이를 목도한 목격자들은 그저 그런 불가사의한 존재로만 여기고 있을 뿐 성경에 나오는 대로의 악령들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거의 아무도 없다. 그래서 한 때의 사건으로 취급되어 가고 잊혀진다. 히말라야의 소위 "설인(雪人)"도 그런 종류일 수 있다. 어쨌든 신비라고 딱지 붙은 것치고 악령들과 무과한 것은 없다. "거룩한 천사들"[그리스도 친히 이런 표현을 쓰셨기 때문]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뒤통수에 얼굴이 없으니 사람을 비롯해 모든 피조물은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는' 사랑의 법칙으로 살도록 조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얼굴이 한 쪽에만 면해 있으므로 동쪽을 보면 서쪽을 보지 못한다. 즉 세상을 보고 거기에 관심을 두면 그와는 반대방향인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고 믿음을 등진다. 둘은 상극이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상극이 아니라 범죄로 인하여 세상이 거꾸로 선 모습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죄악이 다 하나님 앞에 '거꾸로' 된 가증스러운 비정상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추태[醜態]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니는 의미는, 내가 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은 모습일 때 세상에 대하여 그렇게 죽은 모습이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부활했을 때 세상이 내게 대하여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이 된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해(害)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그 말씀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생명이고 믿음이고 순종이요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미워하기를(사랑하지 않는 것은 미워하는 것) 싫어한다면 그것은 사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아비"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단을 "아버지" 하고 따르는 꼴이 된다. 자기에게 해로운 줄 '믿으면서도' 그 해로운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한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안믿는 것이 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 경우 어떤 것을 믿는 것은 그 어떤 것이 자기 이해관계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고, 안믿는 그 어떤 것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믿으면" 당장 손해가 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이다. 그래서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안믿는 경우, 이는 바로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다. 이해관계 정도가 아니라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데, 그에게만은 그렇지 않음이 이로써 만천하에 드러나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믿어야 하는데 생각만 그렇게 한 것일 뿐이므로 "믿은"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사단이 이 세상을 인간으로부터 빼앗아[강탈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담 스스로 어리석게도 넘겨 준 것이다-눅 4:6] 관장하는 사단과 그 일당들이다. 이런 악독한 피조물들 앞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 외에는 모두 장님이 되어 버려 완전 노예로서 끄는 대로 끌려가고[고전 12:2]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더라도 틈만 있으면 "포효하는 사자처럼"[벧전 5:9] 삼키려 하는 것이 사단이다.
삼키는 것이 실제 불가능하면 그가 그렇게 할 리 없다. "사단을 대적하면"[약 4:7] 삼키지 못한다.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사단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에 덮치는 것이다. 그래서 사자 같은 마귀를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라"[벧전 5:9] 하였다. 사단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틈을 노리고 있다가 기회를 붙잡기가 무섭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한 것이다.
가룟 유다의 경우처럼 마침내 그 안에 들어 가 (마비시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 위에 곧장 내리게 만든 것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라는 금속성(金屬性) 도체(導體)가 자기중심의 형태로 내 안에 가득하니, 필살(必殺)의 '심판'이란 벼락이 유도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여 온 교회는 크게 두려워했다[행 5:11].
모두 잠든 한밤중이지만 불 난 것을 보았으면 "불이야!" 하고 외쳐대야 정상적인 마음이다. 강둑이 터져 홍수가 날 위급을 알았으면 "홍수야!" 하고 소리 쳐 모두에게 알려 주는 것이 상식이고 도리다. 그런 사태를 처음 알아낸 그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런가. 황후(皇后) 에스더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들은 것과 같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집은 멸망할 것이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스더 4;14).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 바로 이 일을 하라고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요 20:21,22/행 1:8]. 내가 부득불 할 일인데도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고전 9:16) 함과 같다. 악마가 존재함을 알려 주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 신(神)에 대하여 특별 취급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심지어는 그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는 그런 상황이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니 자기에게 맞으면 믿고 안맞는 것은 안믿고ㅡ이런 것은 처음부터 아예 전부를 모르는 것보다 못하니 더 해독을 끼침이다. 성경이 악령들에 대해 특별 취급하여 말하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 신의 행패보다 인간 자신의 죄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원래 아름답고 좋기만 한 것으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이다. 사단인 "용"도 마찬가지다. 흉물스럽고 징그러운 데는 없다. 그런 아름다움 속에 단지 살인자(殺人者, 아담 부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로서의 악함이 있다는 것이니, 용을 이렇게 사악한 존재로 만든 것은 인간과 똑같은 이 "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인도 우선 그 형상에서부터 그 악이 배어져 있는 것과 같이, 용도 이제는 그 심성의 악함이 그 형용에도 당연히 배어 날 수밖에 없어 아름답기커녕 그 눈망울만 보아도 섬뜩해짐을 느끼게끔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하나님 앞에서의 "용"이라는 존재는 가브리엘이나 미가엘(인간을 위하는)과 똑같은 피조물이므로 특별히 비중을 두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그가 인간의 원수로서 활동하는 까닭에 그 실상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간혹 여기저기 성경에 서술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욥기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에게 각종 해악(害惡)을 끼치는 일을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철저히 하나님의 규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용이나 그 아래의 악령들이나 그런 악한 모습으로나 또는 그 어떤 것으로든 인간을 위협하거나 놀라게 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못한다. 못하도록 철저히 규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것은 아예 무시해고 전혀 고려에 넣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항상 인간 편에 있어 악령들의 그 어떤 종류의 월권 행위든 철통 같이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그러하므로 세상 사람들은 마치 악령 마귀도 없는 듯이 천사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오직 인간들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지내는 것이다. 분명히 착각인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물들과 인간이 뒤섞인 것이 이 세계다. 단지 악령들은 그 정체를 감추는 것이 인생 멸망을 획책하는 데에 더 낫기 때문에 스스로를 감추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이들은 자기의 정체를 알므로 그들을 증오하는 까닭에 위협적인 몸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을지라도 할 수가 없다는 것뿐이다.
왜냐면 천사들의 비호 때문이라기보다 구원 얻은 사람들은 그 자체가 막강한 하나님의 아들들이므로 감히 손도 못대는 상황이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께로서 나신 이가 그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9] 하였고, "자녀들이여[Children],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들을 이기었으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4:4] 한 것이다.
욥을 사단이 시험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니 "욥의 목숨은 손대지 말라" 하신 것이 그런 예이다. 이 경우 사단이 "목숨을 빼앗을"[스스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기타 방법을 통해] 수도 있다는 의미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멸망시키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신 것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기 자신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아는 고로 하나님께서 만일 죽음을 허락하시면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내게 없는 것이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사단의 사자(使者)"[고후 12:7]였던 것처럼 사단이 인간에게 어떤 고통을 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충분히 소화시키면 훌륭히 전화위복이 되는 근거가 될 수 있어 오히려 '있음'으로써 더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진행 중인 하나님 사업까지도, "사단이 막을"[살전 2:18] 수는 있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쪽에서 기도를 함으로써 그 방해를 얼마든지 없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히 13:19/몬 1:22].
그리고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단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심령을 계속 불신 가운데 묶어둘 뿐 아니라 믿는 성도들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갖은 수단으로 유혹하고 꾐으로써 멸망에 이르도록 하는 일에 수천 년의 관록이 붙은 자이다. 만일 사단이 자기 판단으로 그 시험 상대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임을 감지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부질없는 일이라 하여 그렇게 시험하는 일을 아니할 것이지만,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각자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을 미리 아시는 차원에서 미리 정하신 것을 알므로 안심하고 인생들을 그렇게 시험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도 그 시험의 대상이 되셨음에 주목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얼마든지 당신의 자유 의지로써 중도에 마음을 돌리시고 [비록 성경에 예언을 하셨다 하더라도] 애초의 뜻을 변경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를 따라 믿고 안믿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차원이므로, 사단은 얼마든지 택한 자든 아니든 개의치 않고 시험함이다.
이 사랑의 생명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당자 본인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서 강행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불 못에서만은 예외이니, 사랑의 세계가 아닐뿐더러 이미 형벌의 세계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형벌이라는 것은 내 스스로가 불러들인 화근이요 재앙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로 그릇된 인간이 지어낸 교리에 혹하여 나 자신의 "택하심"을 안다고 태평으로 지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힘써 굳게 하는>[벧후 1:10] 것 이상으로 합당한 것은 없다. 고로 이렇게 해야 "실족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신다"[:11] 한 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천국 들어가는 것이 몹시 불확실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가르치는 대로의 "믿음"을 알려고는 않고 덮어놓고 자기 생각대로의 "믿음"이란 것을 만들어 거기에 의존하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마 15:8,9] 하신 것이다. 사람이 지어낸 것으로 믿으니 헛되이 믿는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에 "용" 및 "짐승"이 성도(聖徒, saints,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하게 된 이들)들과 싸운다고 했는데 이 싸움에서의 교회의 완전 무장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임을 재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적 그리스도와 싸운다고 해서 교회가 정치세력화하고 아니면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압력단체화하는 것은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세상의 일'이다. 그런 길로 흐를 때 그것은 원수의 계략에 완전히 빠져 들어가는 것이 된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불의(不義) 일색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당장 그 불의를 응징하시거나 그 불의를 사전 예방하는 것 같은 조처를 취하시지 않았다. 그렇게 하시려면 이 세상 신(神)부터 응징하고 그 지배하에 있는 이 세상 자체를 끝내셔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인간 구원은 완전 물거품이 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위치에 있어야 함이니 인생들 구원이 목적인 것이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고 그래서 구원 받기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채워져야 하고 따라서 세상의 불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세상은 존속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우리의 고난 받음과 세상의 불의는 이런 식으로 연결 고리가 되어 있다. 세상은 그 불의함으로 우리에게 고난을 가하고 우리는 인생들 구원을 위해 자진해서 이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불법, 불의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같은 이치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열망하신다면 그런 악령들의 존재를 볼 수 있게 하실 수 없는가, 볼 수 있게만 되면 누구나 악행을 뉘우치고 믿을 것이 아닌가. 비단 악령만 아니라 천사 중의 하나라도 자주 나타난다면 그런 효과가 있지 않겠는가. 사람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을 누구나 동경하게 될 테니까 그런 천사들이 나타나 인간 세계에 모종의 능력을 자주 나타낸다고 해도 그가 하는 말을 무조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회장이 왜 하나님께서 똑똑하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느냐 하는 질문과 같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기 때문이니 앞서의 설명대로 그렇게 되면 간섭과 강제가 된다. 자유를 완전 보장해 주신 의미가 사라지게 되니, 하나님은 결코 모순되는 일은 아니하신다. 무서워서 이를 피하기 위해 혹은 너무 좋아서 이를 탐해서 움직이는 그런 피동적인 인간의 자세를 원치 않으신다. 인간 구원을 열망하신다는 것도 오직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게"[히 1:9] 되기를 원하신다는 뜻이니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인생들까지 용납하시어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님이다.
그런 것을 용납하시면 아담은 왜 죽었고 악령들은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 의를 사랑하든 불의, 불법을 좋아하든 자기 자신의 선택에 속하는 일이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지[행 17:30] 처음부터 믿으라고 하시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은 회개하는 자에게만 해당된다[막 1:15]. 악령이 나타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도 안되고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을 과시해서도 안된다. 천사가 나타나는 경우도 꼭 필요한 때에 한해서다. 그리고 보통 사람으로 심부름꾼의 행색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동정하시는 데에 있지 않고 그래서 영생만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자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심이 우리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롬 14:9/고후 5:15].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경우에만 천사가 나타나 힘을 돕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죽었고 악령들이 범죄함으로 장차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되어 있음이 바로 그런 증거로 세우신 것이다.
수십 억 인구 중에 그런 "의를 사랑하는" 인생이 단 하나뿐이라면 그 사람 단 하나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제외하실 것이다. 영생과 영원한 영광이 탐 나서 혹은 멸망이 두려워서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다 손치더라도 반드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한 그는 구원의 여망이 없다. 왜냐면 아담처럼 다시 범죄하여 죽을[멸망할] 것이니 죽을 사람 다시 살려놓아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자주] 나타나지 않아도 인간 이성과 상식으로써 믿을 사람은 믿게 되어 있고 안믿는 사람은 안믿게 되어 있다. 구약시대에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구출할 때도 인류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기적을 그렇게도 자주 나타내셨건만 믿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믿지 않았다. 절대 다수가 그러했다. 타고 가던 당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는 기적을 보고서도 선지자 발람은 당장 발길을 돌릴 정도의 회개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욕심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를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런 마음 바탕이었으므로 발람은 발락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범죄하도록 조언을 해줌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치는 악을 범했고 자기도 멸망당한 것이다[계 2:14].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세상에서 베푸셨으나 믿지 않았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 120명 정도만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을 정도다. 또 부활 후 친히 그 살아나신 모습을 믿는 이들에게 보여 주셨어도 5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고전 15:6].
그만큼 믿는 이가 적었다는 의미다. 천사가 인간에게 나타나더라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모습의 인간으로 그것도 목적이 있어야 나타나게 된다. 왜냐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전락해 버린 인간인지라 무조건 초자연적인 것을 지존자(至尊者) 곧 신으로 떠받들려는 약점이 있어서다. 고로 이 세상에 속한 육체로서의 인간은 완전히 이 세상 신(神)으로서의 마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요 세상은 오직 그런 곳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신 하나님이 아니라 악령 용인 것이다. 즉 용의 세계다. 용의 세계이므로 중국인들은 세상 지배자[王, 임금-요 14:30]로 태어나는 자들을 용과 연관시키기를 잘 한다. 용이 밝힌 그대로다[눅 4:7]. 물론 그들이 성경을 믿어 그런 것이 아니라 사단이 그렇게 믿도록 만든 때문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단 스스로가 인간을 꾀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단을 처벌하실 수 없는 것은 사단의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아담]이 동의하여 이루어진 악령과 인간의 합작(合作)이므로 벌하시려면 인간도 처벌되어야 함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가 없게 된다. 악인들만 처벌해도 안되니 그 악인들 중에 얼마든지 구원 받을 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누가 구원 받을 것인지 누가 악을 그대로 행할 것인지 하나님은 아시되 인간들은 모르므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대로 구별해서 손을 대실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 되면 인간들은 인간들을 미리 아는 능력이 없으므로 장차 믿을 사람까지 없애신다 또는 현재 믿고 있는 사람들까지 처단하신다는 등 불평불만으로 하나님을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의 불평 때문이 아니라 혹 그런 마음을 품음으로써 정작 믿을 사람까지 믿지 않게 될까 그것을 염려하심이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는 부득불 이 세상 위에 군림하여 인간들을 지배하도록 되어 있는 악령 사단이다.
사단이 에덴낙원에서 인간[아담 부부]을 꾈 때는 인간은 사단과 대등한 위치였고 오히려 아담은 그런 영물(靈物)들보다 상위(上位)에 있어 오늘날의 우리처럼 공포 분위기는 고사하고 이 자연계에서 사람이 짐승을 대하듯이 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그 의미가 그들에게 아담이 '이름을 지어 줌'이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의 위세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에덴낙원 곧 영계에서 아담이 영물들을 상대하는 것이 바로 그런 모양새였으니 즉 "사람"과 "각종 짐승들"[창 2:19]과의 관계였던 것이다.
성경은 그들을 "천사"니 "영물"이니 하지 않고 "짐승들"이라 서술해 놓고 있는 것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다[창 2:19]. 단지 그 "짐승들"이 인간보다는 지식이 월등하여 인간을 보좌하게 되어 있었다는 그 차이는 분명했다. 지, 정, 의를 갖춘 인격성을 지녔으니 단지 모양만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뿐이지 사람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담]도 영물들을 무시할 수 없었고 영물 또한 [그들의 월등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대할 때 그러했다.
창세기에서 이들 영물들은 "짐승들"이라고 했으니 신약성경의 맨 끝 부분에 위치해 있는 요한 계시록도 그런 창세기 기록과 맞물려 앞으로 출현할 적 그리스도를 "짐승[beast]"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니 이는 사뭇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계 11:7]. "네피림"이 말하자면 "짐승들" 곧 악령들의 후예인 것이다. 그 앞에서 소위 예언자로 나서는 인간 역시 "짐승"[13:11]이라 했으니 네피림 중 하나이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도 강제가 되고 그 반대로 하나님 잘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축복을 하셔도 강제[회유(懷柔)로서의 강압]가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뜻은, 인간 각자 스스로 회개하여 의를 사랑함으로써 선을 행하고 불법을 미워함으로써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 회개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음이다. 바로 그와 같이 할 수 있도록 완전무결한 장치를 해 주신 것이 새 피조물됨, 다시 나게[출생하게] 하심 곧 우리 구원이다.
이 다시 나게 하시고 새 피조물로 창조하시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로만 가능하게 되므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영생하는"[요 3:16]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영생하게 하시는 것’보다 가장 앞서 '회개하여’ 죄를 버림으로써 의인이 되게 하심이다. 의인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의롭다 하시는 것[稱義]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약속할 때 즉 회개할 때에만 한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써 이루어짐이다.
죄가 그대로 있는데 의롭다 하실 리 만무하다. 그렇게 죄가 용서되어 있는 깨끗한 자리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임하여 오심으로써 그 약속한 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 능력이 친히 되어 주심이다. 물론 이 능력은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귐으로 인한 '하나 됨'으로 되어지는 것이니, 이미 설명한 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 즉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그래서 나를 위해 사시고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으로써 시작되고 또한 유지됨이다.
남녀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치대로다. 즉 남자[남편]의 몸은 여자[아내]의 것이요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으로서, 자기가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여 다른 남자 또는 여자를 친근히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전 7:4]. 이를 어기면 그 한 몸됨은 깨어지고 당사자는 간음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하나님 지으신 대로의 법과 질서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의 은혜도 불쌍히 여기심도 일절 없다.
법과 질서를 어겨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신다는 교리를 인위적으로 지어낸 것은 사단의 조종으로 만들어진 세상 종교["기독교"라는 이름을 내건]의 거짓이요 속임수다. 하나님께서 간음죄를 엄단하시는 것도 바로 이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다. 다른 악은 남에게 해를 끼쳐서 되는 것이지만 음행이야 서로가 좋아해서 하는데 어찌 죄가 되느냐 하고 묻는다면 줄 수 있는 답이다. 모든 죄는 불법이기 때문이니 즉 삶의 기본 법질서를 어김이다.
그 기본 질서가 무엇이냐, 한 몸 구조에서 자기를 부인함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상대에게 해를 끼치느냐 끼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법질서를 어겼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써 죄를 논하는 것이니, 따라서 아직 한 몸이 되지 않은 남녀가 미리부터 성행위를 하는 것도 처벌의 대상이 됨은 당연하다. 비록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어도 그러하니 왜냐면 약속은 약속이고 현재는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가 창녀와 관계해도 한 몸이 되는 것은 서로가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성폭행을 하여 그리 되었다면 한 쪽은 명백히 피해자이므로 한 몸으로 인정되지 않고 그렇게 폭행한 자만이 처벌 대상이다. 이미 자기 짝을 두고 함께 살면서 그와 같이 외간 남자나 여자를 상대할 때는 간음죄가 형성된다. 서로가 합의해서 다시 말해 남편이나 아내를 서로가 바꾸는 망동을 해도 그것은 법질서를 유린하는 문란 행위로서 엄격히 죄로 다스리게 된다.
§ 하나님의 존재를 "그 만드신 만물로 보여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롬 1:20]는 것은 사람의 이성(理性)으로 넉넉히 알 수 있다는 그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넉넉히 판단 가능하도록 이성적인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 것이다"[요 7:17]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고 회개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인위적인 교리에 붙잡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그러므로 한시 바삐 그런 혼미에서 벗어날 일이다.
지금은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른 것은 악령 사단이 마지막으로 그 속임수를 대대적으로 펼쳐 보이려는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심판하시는 단계에 서서히 접어듦으로 인하여 악령들의 능력 과시를 어느 한계까지는 충분히 인정하시게 됨이니, 하나님의 심판 차원에서[살후 2:12] 갖가지 거짓 기적과 초자연적 현상과 악령들의 능력이 대대적으로 전개될 것이기에 그렇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우리의 이 시대에 나타나도록 그동안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7].
앞에서 "파티마의 마리아" 소동도 언급했지만 세상 종교 가운데에서 각종 초자연적인 현상[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하는]들과 소위 각종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을 주름 잡고 있는 것이 사단으로서 그가 신(神)인 이상[고후 4:4] 신으로서 그런 놀라운 일[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인간들에게는]들을 행하는 것이야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요즘 들어서는 불교도 부쩍 그런 소위 "기적"들을 나타내고 있는 중이다.
워낙 자연계의 육체에 속하여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한 인생들인지라 초자연적인 일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는 신적 존재로서의 영물들 앞에서는 가히 고양이 앞의 쥐일 수밖에 없다. 무조건 우러러 보고 신적인 권위로 경배하게 되어 있다. 이 세상을 움켜쥐고 있는 신이 있고 그 신이 바로 인생의 원수인 악령 사단이라고 숨김 없이 설명하는 것은 성경뿐인데 성경을 믿지 않으니 불가항력으로 사단에게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단의 속임수에 신적인 권위를 두는 것은 천주교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성인"[그 대표로, 이태리의 아씨시의 프란시스] "성녀"[프랑스의 잔 다아크 등]들 중에는 그런 거짓된 음성을 하나님이나 천사에게서 난 것인 양 착각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모하멧도 동굴 속에서 그런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무소유의 청빈한 생활로서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하여 많은 사람이 우러러 보는 아씨시의 프란시스[1181-1226]도 그런 음성만 아니라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까지 보았다는 환상을 말하기도 했다.
죽을 때는 바울 사도가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가졌다고[갈 6:17] 한 것과 같은 그런 흔적을 가졌다고도 했다. 오늘날 불교에서 신자의 몸에 각종 흔적을 남겨 주고 이른바 UFO가 요즘 사람들의 몸에 이상한 모양의 무늬를 새겨 주는 등과 같이 악령들은 얼마든지 그런 음성이나 환상을 나타내 주고 소위 "흔적"을 남겨 주기도 하고 직접 천사들처럼 가장하여 나타나기도 한다[고후 11:14].
그렇게 해야 그 속임수를 신적(神的)인 권위로 가장(假裝)하여 정당화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요즘은 또 별난 것이 생겨 각자 개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자기의 마음만을 고집하지 말고 소위 "우주의 마음"을 수용하면 현세에서의 평안도 얻을 수 있고 따라서 삶의 기쁨도 충만해지고 그리고 영원한 생명도 자연스럽게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신흥 사이비[진리가 아니니까 사이비이다]가 생겨 국내외로 열기를 띠고 번져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스트레스가 없는 삶이 현실로 나타나 있다는 과학적 실험 수치를 자랑하고 있다.
각종 기적과 거짓 기적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는 사단인지라 인생들의 마음에 그런 평안과 기쁨을 넣어 주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다. 환각제 같은 것도 사람을 삼매경, 황홀경에 빠뜨리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데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고차원 고단계의 능력을 구가하는 사단이야 그런 것을 하고도 남을 일이다. 신흥이라 하는 것은, 과거에도 사단이 그와 같은 일을 하여 세상 종교에서도 그런 심적(心的) 평안과 희열을 조작해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처럼 드러내놓고 종교 차원["영생한다"고까지 하니까 종교이다]에서는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면 "막는 자가 있어"[살후 2:7] 그리 된 것인데 이제는 사단의 때가 되었으므로 그 막는 것이 걷혀져 마음대로 얼마든지 이런 속임수를 자행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그래서 그런 마음의 평안이나 기쁨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의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를 믿어도 그런 것은 얼마든지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사단이 그런 마음을 조작해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모두 악령들의 거짓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요즘은 또다른 사이비가 판을 치고 역시 해외에까지 그 독소를 퍼뜨리고 있다. 일종의 신비주의다. 이런 신비주의 역시 사단이 당연히 그 배후에서 활동하므로 마음의 평안과 희열을 조성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하는 일에 일사천리로 나갈 수 있도록 형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단으로서는 식은 죽 먹기로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런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써 그 "진실성에 대한 증거"로 삼도록 만드는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지 말 일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름이냐 그래서 그 영혼이 구원 받아 장차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생명의 세계에서 사느냐 여부에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사단이 얼마든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모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모방 그리고 거짓으로써 장차 적 그리스도가 대대적으로[그런 속임수에 관한 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차하면 택한 자라도 미혹할 것이라 미리 경고하신 것이니 마땅히 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비주의"라고 함은 회개 없이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수용하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 내용은 성경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고 조리가 정연하다. 무조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성령을 받아 모심을 가리킴인데 성령께서는 회개함으로써 죄 용서를 받은 마음에 임하여 오시는 것이다.
이런 사이비들의 주장은 회개 없이도 그냥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기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시인하고 오직 그리스도로써만 구원되는 것을 믿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즉 성령을 받으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거짓이다.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은, 오직 회개하여 향후 순종하기로 하고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고후 5:15/롬 14:7-9] 약속을 하는 경우에만 세례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되고[행 2:38] 바로 그런 마음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라야 하는 것이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바로 죄를 짓지 않음이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보내심을 받았다"[요 20:21]는 것이요 성령을 받음은 바로 그렇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의미다[:22]. 이는 주님 친히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요 7:18] 하심과 같다. 다시 말해 보내심을 받은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 그 특징이므로 불의가 없어 죄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있을 때만 그렇게 보내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영원히 그렇게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받는] 위치에 있음이니, 왜냐면 항상 머리의 지시를 따라서만 움직여 머리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 영원한 삶이기 때문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니 머리는 몸을 위하시므로 자연스럽게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체제로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영생의 의미요 천국에 들어감의 뜻이요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이다. 선을 행함이고 의를 행함이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의 이 연약한 자연계에 속한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이니 이런 희망을 바라보는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 하고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함"[breaking of the law]이니 죄는 불법[lawlessness]이라 한 것이다[요일 3:4]. 죄, 선, 의를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으로서 법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이다.
법 질서 차원에서 죄를 이해하면 죄를 지어서는 절대로 살 수 없고, 선을 행하지 않고 의를 행하지 않는 한 그는 죽은 자 대접을 받지 산다는 이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을 생명의 영원한 이 법질서를 나타내기 위한 맛보기 즉 그림자로서 나타내었으므로 그 그림자에 대한 실체가 나타나게 되면 의당히 그 그림자는 소멸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나 실체는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죄인으로 있으면서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육신에게 포로됨을 면하지 못하여 죄를 여전히 지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향유하리라 망상을 하고 그런 못된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떠받들고 있으니 어찌 그런 집단을 세상 종교의 하나로 취급하지 않겠는가. 세상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기필코 사람을 멸망시킨다는 것을 사단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교리를 만들어 종교[기독교]를 만들어 놓고 세상을 완전히 석권하게 한 것이다.
왜 죄를 짓는가 하면 죄에게 종이 되어 있기 때문이요 왜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가 하면 의에게 종이 되어 있기에 그러함을 성경은 분명히 가려 주고 있음이다[롬 6:16,18].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면 우리가 참으로 자유할 것이라"[요 8:34,35] 하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영원히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신다는 뜻이다. 나와 하나되심을 통해 그가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써 그와 같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없이 무조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만 계시면, 다시 말해 결단코 한사코 죄를 짓지 않겠다는[왜냐면 죄를 짓는 것은 다시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처사가 되므로(히 6:6) 즉각 그 경우 회개하면 그런 자멸행위로 이어지지 않으나 회개 없으면 그런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므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과 결단의 약속도 없이, 그냥 무조건 성령이 계시면[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기만 하면] 병균이 우글거리는 불결한 데에 초강력의 소독약을 떨어뜨리듯 모든 것이 금방 깨끗해진다는 식으로 그렇게 믿으니 "신비주의"라 하는 것이다.
"신비한" 것이 아니라 악령 사단의 '속임수'인 것이다. 신비주의라는 것은, 바로 그런 회개로써 세례 받아 죄 용서가 되어야 그래서 죄가 청산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하는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사랑의 약속을 믿어 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죄 있는 마음, 죄 짓는 마음 그대로에 임하심으로써 죄가 소멸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둘이 하나됨이므로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는 삶이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고 따라서 특성상 약속인 것이니 언제나 마음으로 자유 선택의 여유가 있어 마음이 중도에 변할 수가 있어 그 누구도 이 자유를 제약할 수 없도록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켜 이행하는 경우에 최종적으로 몸이 구속을 받음이니 곧 양자가 됨이다[롬 8:23]. 최종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값도 지불하기 전에 물건부터 먼저 받는 형식이 우리 구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원부터 먼저 받고 능력부터 먼저 받음이다. 농부가 지주(地主)로부터 양식을 먼저 받고 그 양식을 먹으면서 그 힘으로 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양식이 없으면 먹지 못하고 먹지 못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먼저 받으니 은혜이다.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다. "그러면 거저 주시고 선물이라 함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가 지불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할 것이다. 선물은 선물이고 거저 주시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것으로써 그 성격이 달라진다.
즉 어떤 물질이나 물건이면 그렇게 주고 받는 것으로 끝이다. 그 받은 것을 가지고 남을 도로 주든가 내버리든가 자유이고 그에 대하여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 그리스도를 선물이라 할 때[요 4:10],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오심을 인하여 성령을 선물이시라 할 때[행 2:38]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영생을 무슨 물질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오해를 단 한 마디로써 풀어 주고 있다. 즉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요일 5:12] 한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생명"[골 3:4]이신 것이다.
우리가 죄 용서 받기 전에 회개의 세례를 받는 의미는 과거 죄의 청산이 되었음과 동시에 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을 근거로 하여 믿어 그 믿은 대로 향후 영구적으로 다시는 나 자신을 살지 않고 나와 하나되어 계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하는 결의요 다짐이요 약속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결해져 깨끗해졌다 함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 즉 나의 죽음[그리스도와 함께 한]이 기정 사실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써 과거 죄가 청산된 바로 그 순간이 완전히 깨끗해져 있는 바탕을 이룸이다. 그러면 그렇게 된 바탕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경우일진대 그 깨끗함이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 죄가 청산되어 깨끗해진 그대로 다시 살아나 있는 상태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정결하게 되어 있는 이유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니, 갑과 을이 하나 되어 있는 체제에서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이 그 구조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됨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고후 5:15]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니까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보내신 이의 영광만을 위하고 구하니까 "불의가 없다"[요 7:18]. 불의가 없는데 무슨 죄가 있는가. 그래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데"[히 1:9] 무슨 죄가 있고 죄를 지을 수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올바로 정의(定義)하자면 이와 같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고후 5:15]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소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 곧 나의 주인 또는 소유주로서 호칭하는 것이니]으로서, 살아도 주인[그리스도]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인을 위하여 죽어 자기를 위하여 사는 일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일도 없는"[롬 14:7,8] 사람, 이렇게 된다.
주인이면 그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니 자기 뜻대로 일절 움직임이 없다. 그래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그런 자가 없다"고 성경은 아주 단정해버리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의미다. 단지 영생이나 주시려고 죽으신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주인이] 되려 하심이라"[:9] 한 그대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고 성경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데 그 어떤 욕심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죄는 욕심에서 잉태되는 것이다[약 1:15]. 자기가 죽어 있는데[그리스도와 함께] 무슨 욕심이 있다던가.
산 자로서의 유일한 욕구는 어찌하면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까 하는 오직 이 한 가지뿐이다[고후 5:9/고전 7:34]. 그리스도께서 친히 생명이시니 생명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하지 생명 아닌 죽음의 환심을 사려 하겠는가.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다시 살아나 현재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되어 있는데 앞에서의 설명대로 이 하나됨의 핵심이 그 하나를 이룬 상대를 위해 사는 데에 있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데 무슨 사사로운 자기중심의 욕심[私慾]이 있다던가.
죽었기 때문에도 욕심이 없거니와 살아도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살아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할 뿐 나 자신을 위함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 일절 없다. 그러면 죄가 없고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 "죄를 지을 수도 없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 곧 구원은 나로 하여금 과거 죄가 청산된 바탕 위에서 향후 영원히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심에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일절 완벽하게 마련해 주신 데에 있다.
이 일은 나 자신의 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새로이 창조됨이요 다시 출생함이다. 내가 출생하는 데에도 창조와 마찬가지로 내 힘이나 공로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은혜요 거저 주시는 선물이요 따라서 이를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멍석을 깔아 주신 것은 하나님 몫이고 그 위에서 춤사위를 벌이게 되어 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형[꼭두각시, doll,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와 같은]처럼 만드시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시어 자유 선택과 의지력으로써 모든 일을 하게 만드셨음이다.
영물들을 그렇게 만드심으로써 그 중의 일부가 악령이 되어 스스로 멸망의 운명을 만든 것처럼 어디까지나 내 스스로 벌이는 춤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이비들을 분별해내는 기준이 있으니 위의 설명처럼 그리스도의 구원을 얼렁뚱땅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해 치움으로써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자기 부인]을 강조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는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위험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는 경고를 하지 않는 이 두 가지로써도 능히 그들을 판별할 수 있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사단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능력"을 말한다면 이미 설명한 대로 그런 것은 악령 사단으로부터 나오는 초자연적 활동 또는 힘일 뿐이다. 모방하는 것이므로 진짜와 똑같게 또는 과장되어 나올 수도 있으니 이는 그것이 거짓이기 때문에 거짓에는 그것이 폭로될 일정한 때[시간]가 오기 전에는 한도를 모르게 부풀려질 수 있고 그 폭로되는 때가 되기 전에는 그 사기성(詐欺性)이 까발려질 수가 없는 까닭이다. 거짓이 당장 드러나는 성질의 것이라면 누가 감히 거짓말을 하고 속이려 들 것인가.
그런즉 앞으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더라도 그 능력 자체를 두고 진위를 가리려 하지 말 것이니 이는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꼴이 된다. 오직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진리를 따라 판단하되 하나님이 말씀은 상식과 양심과 양식(良識)에 어긋나게 말씀하시는 법이 없으니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이런 것을 인간에게 허용하시지를 않았을 터] 성경에 터전한 상식적 판단으로 판단하면 무난하게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은 이상 말씀에 전폭 의존하여 따를 것이요 그 진실성 또는 말씀으로서의 확증은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 글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에 있으니 다른 데에서 찾지 말 것이다. 그 자체로서 만세(萬世)반석(盤石)이 되어 있으니 다른 것으로 해서 요동 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장차 적 그리스도는 소위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도 그 속임수를 드러낼 것이니[그 자신 하나님으로서 자처하므로] 어쨌든 무슨 종류든 능력 여하로써 판단의 기준을 삼지 말고 오직 성경을 중심할 일이다.
이런 사이비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자기 부인을 외면하면서도 의인이라 자처하여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있다고 했으니 의인이라 강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기성교회"에서 죄인으로 자처하며 옹색하게 지내는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기" 때문이라 역으로 선전하기도 한다.
사단의 속임수는 이와 같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복음을 모르기는 둘 다 똑같다. 단지 후자[그들이 "기성교회"라고 물아 붙이는]는 양심이라도 있어 죄를 짓고 있는 현실이기에 사실 그대로 죄인이라 하는 것뿐이요, 전자[사이비 이단들]는 그런 양심마저 소위 "무조건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상식 밖의 교리를 내세워 마비 상태에 있다는 그 차이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둘은 공통이다. 따라서 둘 다 세상 종교라는 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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