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5일 금요일

★"여보게들, 산다는 것 이상의 현안 과제가 없네ㅡ'산다' 함은 죽지 않는 삶(永樂)을 말하네" (23)

"여보게들, 산다는 것 이상의 현안 과제가 없네ㅡ'산다' 함은 죽지 않는 삶(永樂)을 말하네" (23)



6. 질문[24개]에 대한 답변-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격 루트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엄명하신 사실을 앞에서 다루었거니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의 여부로 가름되어질 수밖에 없다. 고로 '하나님'이라 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불가분이니 이는 아버지[하나님]와 아들[하나님 곧 사람되신 그리스도]의 불가분성과 같은 것으로서, 때문에 아들을 "말씀"[요 1:1,2]이시라 하는 것이다.


"말씀"이시라 할 때는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의 의미인 것이다. '실질 또는 실체'와 '형상 또는 형체'는 불가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재하시면 그 말씀이 또한 있어 '기록된 말씀'이 있는 법이니 그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하나님은 그러므로 또한 불가분이다. 다시 말해 성경에 거짓말이 있을 리도 섞일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우시기에 거짓말을 하시겠는가.


거짓말은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이지 강한 자는 원래 하지 않는 법이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간단히 되는데 무엇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머리를 써가면서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쓰겠는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보통으로 신경 써서 될 일이 아니다. 정말 속아 넘어가도록 딴에는 젖 먹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짜내는 술책이다. 앞뒤가 맞지 않게 허술하게 말하는 법이 없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하여 설명했지만 만일 성경이 거짓말이요 속임수라 가정하면 그런 허술한 거짓말도 없게 된다. 당장 들통이 나도록 되어 있는 것은 그 어떤 거짓말쟁이도 감히 시도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본의 아니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동조하여 한 편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철저한 지배를 받아 완전히 그의 노예 또는 포로로 일관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롬 7:5-8:2]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기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당당히 마주하여 겨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악신(惡神)[선신(善神)이라면 거룩한 천사가 해당되나 우리가 신령한 몸이 되면 우리 자신이 천사들과 대등하게 되므로 이런 신이니 어쩌니 하는 구별마저 없어진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를 시험하는 즉 싸움을 걸어오는 내용은 앞서 설명한 그리스도의 광야 시험을 통해 밝혀진 그대로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침투로(浸透路) 즉 우리에게 침투하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 더 정확히 말해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다.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려는[배반하려는] 생각을 먼저 넣어 주고[요 13:2] 이에 동의하니까 나중에는 완전히 그 마음에[속에] 들어가[:27] 차고 앉은 것이다[행 5:3]. 말하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와서 우리 귀에 대고 속살거리는 것이[에덴낙원에서 여자에게 접근하던 것처럼] 바로 우리의 생각으로 나타나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우리의 생각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물러가라!" 하고 마음으로 호통을 칠 수 있어야 하는 정도로 그렇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우리에게 근접해 오는 것이니, 전쟁 중에 적을 경계하는 최전방의 초병(哨兵)처럼 파수(把守)해야 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마음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미리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자기 중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무슨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했을 때 이 생각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준 것이었으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 하신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시종일관 자기를 부인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라"[:24] 하신 대로 그와 같이 하지 않는 즉 자기 부인 없는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준 생각을 따름이니 곧 에덴낙원에서 여자에게 자기 말을 따르도록 수작한 그 거짓말에 넘어가는 것이 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에게 우는[포효하는] 사자 같이 두루 헤매며 덤비나 예고 없이 하는 것이므로, 어느 것이 우리 생각이고 어느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넣어 주는 생각인지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와서 속살거린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무조건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일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삭임인 줄 간파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우리 자신 우리가 믿는 도리의 정확성과 논리성과 타당성에 마음 깊이 승복해서 항상 성경 말씀이 우리 뇌리 속에 충만하게 작동되도록 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경이라는 교과서를 펼 때마다 앞에 성경 교사이신 성령께서 계심을 알고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기도의 마음으로 읽을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싸워도 육체대로 싸우는 즉 상대를 살상(殺傷)하는 식의 무기가 아니라, "우리의 싸우는 무기(武器)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陣營) 을 파(破)하는 강력(强力)이라" 하였으니, 곧 "모든 이론을 파하며[깨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고후 10:3-6] 것이라 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 한 대로 사유(思惟)하는 존재인데 보이지 않는[주님의 부활하신 몸처럼 신령한 육체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의 원수(敵)가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침투해 오니 이것은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애초의 에데낙원에서의 아담 부부처럼 신령한 몸이 되어 있다면야 당연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접근해 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지만 현재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다보니 말 그대로 불가항력이다.


그러나, 아담이 당시 그렇게 영물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해서 우리와 나은 점이 무엇이 있었던가. 그대로 그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본다 아니 본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인 줄 식별한다 못한다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의 경고처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고후 10:5] 우리의 마음 그리고 생각 자체를 완전히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께 대한 생각 즉 항상 하나님을 인식하고 의식하는 것으로 충만히 채우는 것이 그런 적의 공격에 대한 완전무장이 된다.


심각한 불평등


사람은 생각의 결과로 행동하는 존재인즉 당연히 이 방법이 최상의 방도가 되어 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롬 1:28]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시고 오직 그리스도만 보면서 생활하는 것이어야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완전무장[엡 6:11]의 기본이다. 그래서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라는 것이요 자기 입에서 성경의 말씀들이 술술 나올 정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고 속였다는 것은 인간[아담]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는 증거다. 힘으로는 자기 속내대로 할 수 없다는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꾀를 써서 무너뜨렸다는 의미다. 현재에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천하를 속이는[to deceive] 자"[계 12:9]가 되어 있음은 인간이 강해서가 아니라 인간 배후[배경]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거룩한 천사들의 막강한 군세(軍勢)가 우리를 호위하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거의 모두가 에덴낙원의 그 뱀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조종한 것이라고 믿어 왔었다. 성경에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20:2]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어도 믿지 않은 것이다. "옛 뱀"이라 했으면 에덴낙원에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로 그 "뱀"인 줄로 알아들어야 하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니 어찌 된 영문인가. 기초적인 독해력(讀解力)도 없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배후가 되어 계신다고 해도 인간에게 완전 자유를 주심으로써 타율이 아닌 자율로 움직이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인간을 속이는 작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하나님 역시 저들을 그 상실한 마음[a depraved mind, a debased mind, corrupted minds]이 되도록 내버려 두시어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신다"[롬 1:28]고 했다. 여기서 합당치 못한 일이란 것은 각종 죄악을 말한다[:29-32].


마음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은 따라서 인간으로서 바른 행동, 떳떳하고 당당한 참된 행동을 하여 인간답게 사는 것 따라서 "합당치 못한" 일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니,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공동체 의식,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을 강조함이다. 전체 우리를 의식하는 데에서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욕심이 발붙일 수가 없다. 모든 죄악은 자기 중심 곧 "자기를 위해 살고자"[고후 5:15]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니 곧 "욕심"[약 1:15]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온 천하를 상대로 무신론을 만들어 속이고 종교를 통해 속인다. 이 세상 한 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속인다. 영원 무궁한 고난의 세월이 현재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 모든 것 집어치우고 오직 이 문제 해결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일 것인데 속고 있으니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기독교를 비롯해 각종 종교에 속는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속은 결과로 그렇게 종교에 의존하므로, 죽으면 영생한다는 거짓말에 기대어 나름대로의 희망을 품고 있는 관계로 역시 무종교자와 같이 아무 절박한 마음도 없다. 딴에는 영생하는 줄로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한 세상 남 밑지지 않게 적당히 낙을 누리며 가급적이면 잘살아 보자는 망상으로만 가득 차 있다. 몇 백도 아닌 불과 몇 십 년의 세월마저도 머물러 볼 새 없이 갓나서 죽고 10대에 죽어 나가는 인생들을 보고[이런 것 모두가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다] 놀라고 심란해지는 것도 한 순간이다. 이런 경종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생각할 여유는 없이 오직 사막의 신기루에만 붙들려 우왕좌왕하다가 구도(求道)의 황금 같은 기회를 다 소진해 버린다.  


구도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가장 근본이 되는 것부터 풀어 나가야 함이니 곧 하나님이 계시느냐 하는 것부터 확정하고, 인생에게 주시는 그 메시지가 성경이라는 사실부터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눈을 돌리고 자기 멋대로 편한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앞서 말한 대로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다"[고후 10:12].


그러면 하나님도 성경도 그리스도도 인정한다고 하는 이들은 어떤가. "악을 행하는"[롬 2:8,9] 것을 가리켜 성경은 "자기 중심"[:8, "당을 짓는다"는 우리말 번역은 오역; 영역은 "selfish", "self-willed"]이라고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자기를 위해 살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고후 5:15] 않는 것을 가리켜 성경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 3:18] 하고 그 결말은 "멸망"[:19]이라 경고한다. 그런데도 이런 경고를 귀 담아 듣지 않고 매양 자기중심으로 살아도 구원은 얻는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 즉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는"[약 1:18] 것은 세상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니,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단지 사람이 죽을 때 미래[저승]에 대한 공포 없이 편안하게 양심의 매서운 책망을 잠재우며 떠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 즉 하나님께서 애초 인간을 만드신 목적에 맞추어 살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에게 한하여 영생이 약속됨 역시 마땅하다[행 5:32/히 5:8].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가 세상에서 옳고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산 자'로서의 능력을 베푸심이니, 따라서 아무리 입으로는[말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고 구원 받았다고 해도 이전 '죽은 자'였을 때 하던 행동 그대로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일 때에는 영생과는 전연 인연이 없다.


불교의 가르침이 이승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을 강조한다고 하나, 입산수도하여 득도에 정진함으로써 해탈, 열반에 이르렀다는 일부 승려들만 그런 자유를 누리노라고 말할 뿐 그래서 자유인이 되었다고 하여 무소유(無所有)와 무욕(無慾)을 말하나, 일반 신도들이야 어디 그런가. 일반 신도들의 일상생활은 그런 무소유, 무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무소유, 무욕이면 모든 불자들이 예외없이 다 그러해야 하거늘 수도승은 그렇게 자유인이 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지내다가 죽으니 무슨 극락왕생이고 해탈이고 열반인가.


불교의 가르침을 받는 중생(衆生) 모두가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진리다. 그래서 "쉬운 불교"라 하여 염불하는 등의 간단한 종교행위를 하면 왕생극락한다고 하는데 그럴 바에야 모두가 일반적으로 그런 쉬운 불교를 따를 일이지 입산수도로 처절한 정진은 왜 하는가.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심각한 불평등이다. 일반 불자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열반에 이를 수 있다면 수도승은 왜 그런 각고면려의 정진이 필요하냐 하고 거듭 묻는 것이다. (불교를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이름의 천주교나 개신교도 마찬가지로서 활발한 토론의 장을 열자는 도전 아닌 초청장으로 수용함이 옳다)


일반적이고 보편화되어야 즉 차별이 없어야 진리다. 왜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해도 좋다는 것인가. 그것이 속이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모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자체 증명이니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 외에 무엇인가. 진리에는 모순이나 자가당착이 없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인간을 지으실 때 차별화를 두어 창조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으로 뭉쳐진 이 악의 세상에서 사람답게 옳고 바르게 사는 방법이 있으니 이는 아주 간단하다. 악한 세상이니까 그래서 이런 올바르게 사는 것을 용납되지 않으므로[성경에, 악인은 의인에게 가증스러움이 되나 의인도 악인에게 가증함이 된다고 했다] 세상의 그 예봉(銳鋒)을 피하는 것은 오직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만 전력을 다함이다. 세상에 살고자 하지 않고 오직 이 구원의 일에만 전념함이다.


세상의 예봉을 피한다는 것은 그 공격을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약점을 일절 허용하지 않음으로 적의 공격의 쉬운 목표가 되지 않으니 적의 공경에 넘어가거나 휘둘리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고로 양심을 따라 사람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서, 멸망 중에 처한 인생들을 구원내해는 것 이상 가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사람 살리는 일 이상으로 "선을 행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 받은 우리를 이와 같은 나약한 육체로 남겨 두시는 이유를 밝히시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17:18] 하셨다. 그리스도 친히 나약한 육체로 "약하심으로써"[고후 13:4] 받은 십자가 고난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신 바로 그 발자취를 그 몸된 교회로서 우리가 따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율적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율적이므로 만인평등이다. 입산수도하는 자 따로 있고 그렇지 못하고 "쉬운 불교"를 해도 괜찮은 자 따로 있지 않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거니와[롬 8:14],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인도하시는 법은 없으니 그렇게 되면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반드시 내 스스로 그 인도하심을 사모하여 기도하고 쉬지 않고 이를 앙망(仰望)함으로써 되어지는 일이다.


이 강제,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영원한 운명 즉 구원 받음과 못받음에만 상관되는 일이니, 그렇지 않은 분야에서는 당연히 강제, 간섭이 이루어지는 것인 바 인간 생애를 주장, 주관하는 3운법칙이 그 증거 중 하나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혼동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도 그러한즉"[잠 23:7] 말하자면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일체유심조'의 진정한 바른 뜻이다.


마음 하나가 사람됨을 좌우하고 심지어 그 영원한 운명까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이러한 제대로 된 의미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엉뚱한 데에까지 적용시켜, "있다 생각하니 있는 것이고 없다 하면 없는" 것이라고 뜻 풀이를 하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고도 있다 하니 있는 것이고 나 자신이라는 것도 있다 하니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라 하니, 내가 부처라 하니 내가 부처인 것이고 이 우주 만물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니, 말을 위한 말이요 말의 희롱이다.


우리 마음이 우리 인간됨의 중심부요 지휘부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중심부에 그리스도 친히 임하여 오심으로 다시 말해 내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복종하기로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로"[고후 5:15] 내 스스로 약속하는 경우에 한하여 내 안에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오심으로써 비로소 '일체유심조'가 되는 것이다. 마음 하나 잘 닦는다고 영생, 영락(榮樂), 영복(永福)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악이냐 아니면 선이냐 하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창조 즉 다시 나는 변화를 터전으로 해야만 가름되어지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는 모두가 악 일색이요 선은 없다.


심지(心志, 心地)가 곧아야


사람들은 흔히 변명하기를 세상에서는 육신으로 살아도 천국에서는 분위기에 젖어서라도 죄를 지을 수가 없을 것이니 천국 가서야 순종이 제대로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멸망한다]"[롬 8:13]는 성경의 선고는 확고부동이다. 왜냐면 "영[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산다"[:13]고 대립 각(角)을 세워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몸"이 아니라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하지 않았으니 왜냐면 "죄의 몸"[6:6]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파멸된"[:6] 까닭이다.


따라서 이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전 9:27] 함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의 죽은 잔재(殘滓)들을 처치하게 된다는 의미다. 이 구분을 명확히 하고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하고 끙끙 대는 이들은 아직도 믿음에 있지 않은 것이다. 믿지 않으니 구원도 없다. 참으로 믿고 참으로 구원을 얻을 일이다. 참으로 믿고 거짓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로는 믿는다고 해도 미아예 믿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 한 직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롬 8:14,15] 했으니, 믿어 구원 받은 결과임을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없을 경우 그는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니 구원과는 전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죄 짓는 죄인은 천국에서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니 아예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여놓지를 아니하신다. 분위기에 휩싸임으로써 비로소 죄를 짓지 않을 그런 타율성의 인간은 처음부터 원치 않으신다. 그럴 바에야 모든 인생들을 모두 다 자동적으로 구원되게 하셨을 것이다. 사랑의 특성은 순수한 자율성에 있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신 이유다. 천국은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랑의 나라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의 순종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내는 순종에 한해서 순종으로 인정된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순종이 순종으로서의 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여 그 순종이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 것은 구원을 목표로 한 순종이지 순수한 사랑의 순종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확증된 사랑에[5:8] 접하여 나도 나 자신을 다 바쳐 사랑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회개요 믿음이요 구원이다.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구원일 수가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이 사랑의 특성이 주인 의식에 있다 함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순종도 주인 의식에서 하는 것이니 간섭을 받거나 강제되어서 하는 것이 아님이다. 따라서 이런 주인 의식은 분위기에 젖음으로써 좌로든 우로든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심지(心志, 心地)가 견고한 자[whose mind is stayed on God/is steadfast]를 평강에서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니 이는 그가 주님을 의뢰함이라"[사 26:3] 한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여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들을 때 그러했다. 분위기에 젖어 버렸다. 선악과 나무를 보니 과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창 3:6]. 남자[아담]가 범죄할 때도 그러했다. 여자가 먼저 그 과일을 먹고 난 다음 건네 주는데, 먹어도 아무 변화가 당장 나타나지도 않고 아리따운 자기 분신(分身)으로서의 여자가 생글거리면서 먹으라고 주는 분위기에 완전히 물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거울 삼아 오직 마음을 다지고 도지게 먹고 세상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 일이다. 한데 어울려 동화하는 것은 좋으나 의와 불의,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경계만큼은 명백히 그어두어 처신하기로 항상 힘쓸 일이다. 생사에 관한 문제이므로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손이 들릴라 앞에 천추의 한이 될 짓을 저지른 것을 거울 삼는 것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되는"[딤후 3:15] 성경의 역할이다.


"생사가 달려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말은 정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니, 이제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이시므로[골 3:4]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 여부가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生)'은 그리스도를 사랑함과 동일시되고 '사(死)'는 그리스도께 대한 불충을 뜻하는 것으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옛 시절 충신 열사(烈士)들이 사람답게 사는지 여부를 가렸지 생사에 좌우되지 않았던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일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그와 같이 충의를 (忠義)를 위해 목숨을 헌 신짝 같이 내버리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의롭게 살고 죽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역시 당연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충성하지 못함을 죽음보다도 더 못한 것으로 여겨야 함이다.


이 세상은 자기중심 일색이어서 죄요 죽음이니 이렇게 대세(大勢)를 이룬 탁류(濁流)에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탁류를 따라 함께 흘러가면 수월하지만 거슬러 올라가자니 힘이 들므로 "힘쓰고"[히 4:11/눅 13:24/고후 5:9/벧후 1:10] 애씀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신 차리지 못하면 자기도 함께 딸려 들어가 탁류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룰"[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필요가 있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어느 시대에서나 구원 얻는 사람은 소수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스도 친히 제자들에게 일부러 "적은 무리여[Little flock],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22] 하심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신 것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소수이니까 무서움을 탈 수밖에 없은 사정을 감안하셔서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이께서 세상에 있는 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보다 크시다"[요일 4:4] 함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에서 기독교가 가장 유력한 종교가 되어 있는 것에 위안을 삼지 말 일이다. 겉으로는 하나님도 믿고 그리스도도 믿고 성경도 믿는다고 하나 바울의 판단대로 하면 거의 전부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빌 3:18]들로서 "하나님의 교회"로 가장하고 있을 뿐인즉,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그 몸을 저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라"[요 2:23-25] 한 대로 그들에게 "의탁하지" 말 것이다.


처음부터 강조한 것을 다시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거는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다[롬 1:20]. 더군다나 오늘날 3운법칙으로 인하여 삼위일체의 원리가 확증됨으로 인하여 그 증거가 가일층 추가되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반드시 인간에게 주시는 그 말씀이 있게 마련이요 그 말씀이 바로 신구약 성경임이 확증되어 있음을 말했고 그 증거 중의 가장 확실한 것이 여러 면으로 대낮 같이 나타나는 그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성경이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이 이 세상 신(神)으로서 현재의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실질적인 군주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정체와 활동이다. 그러므로 온 세상 전체가 성경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데에 총동원되더라도 거기에 미동도 하지 말 것을 거듭 경고하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음을 안 이상 그런 현상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고 의당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세(大勢)가 정의가 아니며 절대 다수가 진리 편인 것은 아니다. 세상 전체가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를 부인하더라도 나 홀로만은 부인하지 아니하리라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 중에 단 몇이라도 우리가 전파하는 것을 들어 줄 때 감사할 일이다. "내 말을 지켰으니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50] 미리 말씀해 주셨다. 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자가 극소수임을 미리 알리시고 경고하심이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생명으로 통하는 길은 길 같지도 않고 문은 좁고 찾는 자가 적으며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결국 못하는 자가 적은 숫자가 아니라 많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고 하셨다. 이 경고 말씀을 받들어 모든 일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눅13:24/행 1:14/2:42,46/24:16/롬 12:12,13/14:19/고전 15:58/16:10/살전 4:1/골 4:2/엡 6:18/4:3/빌 4:3/딛 3:8,14/딤후 2:15/4:2/벧후 1:5,10/3:14/유 1:3/히 4:11].


심지가 곧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상적인 것은 대나무다. 대는 나무가 아니라 풀로서 연악함의 대명사이지만 쉽사리 꺾이지 않고 질기니 절대로 굴하지 않는 그 기품 대단하다. 자연계에 속한 우리 육체는 말 그대로의 연약한 풀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심지만은 대처럼 곳곳해야 함이니 인간 생애를 주관하는 3운법칙에서 세 유형 모두가 56, 57 등의 마디사이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이 어찌 우연히 그렇다 하리요. 대쪽 같이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 함유되어 있지 않다고 누가 감히 단정하랴.


하나님의 법치(法治)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은 첫째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롬 5:8], 둘째는 철저한 원리원칙에 따르시는 '하나님 나름의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만천하에 드러내심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성경이 강조하는 이유는 그 죽으신 사실을 두고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니, 단순히 그저 "하나님이 죽으셨다" 하면 누가 이를 곧이 듣겠는가.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시고 해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실 수 있음이니,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시어 나와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살아나신 이 놀라운 사실에 나의 구원이 있는 것이다.


"법치주의"라 함은 국민의 의사에 따라 제정된 법률에 따라 국가 권력이 집행된다는 뜻임과 같이 한마디로, 하나님 마음대로 원하시는 대로 대중 없이 일을 처리하심이 없다는 그런 의미다. 독재(獨裁)하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나가시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친히 '사람되시어 죽으심'의 고통을 통하시지 않고는 절대로 우리의 행복한 삶의 최대치(最大値)를 내실 수 없는 사실에서 그런 십자가 죽으심도 불사(不辭)하셨다는 그 의미다.


이를 사람들은 또 잘못 해석하여, 일국의 통치자가 흐트러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자 엄한 법을 제정하여 두 눈을 빼어 버려 소경을 만든다고 공포해놓고 보니 가장 먼저 걸려 든 것이 자기 모친[또는 아들]이었으므로 고민하다 못해 자기 한 눈과 그 골육의 한 눈을 함께 빼 버렸다는 역사상의 실화를 예로 들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정도로도 모든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원리원칙은 무자비한 죽음, 파멸밖에 없다.


완전히 끝낸 다음에 새로 시작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적당히 우물우물 넘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한 원리원칙에 의한 똑 부러진 자세와 언행을 명령하시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살면 자기를 위해 살아 죽음에 이르고, 생명에 이르려면 반드시 자기 부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되[요일 4:8] 동시에 소멸하시는 불이 되심은[히 12:29]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엄격, 엄정하심은 당신의 [우리 위한]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으로써 증명하신 것이다.


인자(仁慈, love)와 동시에 위엄, 엄위(嚴威, severity, 

harshness)다[롬 11:22]. 엄격(rigor), 가혹, 무자비다. 보어의 상보성 이론에서와 같은 이 두 가지의 전적으로 다른 상충(相沖)되는 의미의 하나님의 면모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어디까지나 원리원칙에 따라 움직이시니 인간으로 말하면 철저한 법치(法治)다. 그 증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이 이상 가는 하나님의 공정성(公正性)에 대한 증거는 없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창조하신 영물들이 ‘그룹[cherub]’들과 ‘스랍[seraph]’들인데 그들 중에도 스스로 젠체하며 타락한 자가 생겼다. 그리고 인간[아담]을 위해 그 보좌역으로 창조된 영물들 역시 그런 선과 악으로서의 구별이 그들 스스로에 의해 정해져 악령들과 "거룩한 천사"들로 나누어진 것을 이미 말했다. 그 다음 차례가 우리 인간이다. 현재 우리가 그 진행(進行) 과정을 목도하고 있는 그대로다.


오늘날의 인간의 모든 고통, 불행, 죽음은 자업자득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됨으로 인하여 거두는 열매들이다. 물론 영계에 속한 피조물이라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간[아담]을 꾀어 죽음에 빠뜨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살인죄에 대한 대가(代價, 저주 받음)로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고", 그리고 인간과의 싸움에서[인간을 죽게 만든 인간의 원수이므로] 그렇게 인간의 발꿈치를 물어버려["아킬레스 건(腱)"이라는 말도 생겨났듯이 이 부분이 상하면 힘을 못쓴다] 맥없이 만든데 대한 보응으로 나중에는 자기 머리가 사람의 발 아래에서 짓밟힘을 당하게 되어 있다[창 3:15/롬 16:20].


그리고 인간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여파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인간과 더불어 고통 중에 있음이니[롬 8:22]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머리로서의 위치에 계시는]과 함께 한 몸을 이루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머리되시는 하나님 친히 우리 인간의 죽음의 고통에 함께 하심에 이르니[십자가 죽음이 그 증거요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당하는 고통에 성령께서 함께 하심이 그러하다] 다른 여러 피조물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전체적으로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롬 8:22]. 고통을 당해도 산고(産苦)의 진통 속에서 우러나는 신음 가운데 있다고[:22, "탄식"이라는 우리말 번역은 오역이니, 영역은 "진통 중의 신음"] 묘사하고 있는 터이다. 치통(齒痛)과 더불어 진통(陣痛)은 가장 격심한 인체 고통 중에 속한다. 그러므로 영물들도 나름대로의 고통 중에 현재 처해져 있음은 사실이나 인간은 인간대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다보니 고통과 죽음은 불가피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마찰로 인한 인화(人禍, 人災)는 더욱 크다.


사랑하지 않고 상대에게 해를 끼침으로 인한 인간 재화(災禍)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형용할 길이 없다. 인간의 굶주림의 고통도 인간이 서로 아껴 나누어 먹는 지혜의 결단을 따라 행한다면 결코 아사자(餓死者)나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이 있을 수가 없으련만,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그리고 보통 사람은 그들대로 이웃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음으로 인한 '사랑 없음'에서 오는 원인이 더 큰 것이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 한다 해서, 원수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갚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싸우고 전쟁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인간을 죽음에 빠뜨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이 처음부터 선포되어 있는 상태다[창 3:15].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아담]을 죽음에 빠뜨린 후로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히 10:30] 즉 "나의 소관사(所關事)이지 너의 소관사가 아니라" 하시는 것뿐이다. "원수 사랑"은 오직 그 원수를 구원한다는 차원에서다. 스데반에게는 사울 곧 바울이 그와 같음이다[행 8:1].


"원수 갚지 말라" 하심은, 머리와 몸으로 이루어진 ‘한 몸’ 원리에서 머리의 일은 몸의 각 지체로서의 우리 자신이 하고, 몸[의 각 지체]을 위한 일은 머리이신 하나님 친히 하신다는 그 뜻이다. 그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이든 자기 자신을 위해 하지 않음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일[우리 위해 사람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등의]을 아들께서 담당하신 것이다.


또 그러한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친히 움직이심이니[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등] 아버지와 아들께서 서로를 위하심으로써 이루어진 우리 인생의 구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하시니 우리 역시 오직 하나님을 위한다는 계명[율법]도 함께 선포되어져 있다[고후 5:15/롬 14:7-9].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시면서 "새 계명"을 주신 그대로다[요 13:34].


그러나 아들께서 담당하셔도 아들과 하나되어 계심으로 인하여 아들을 통해 아버지 친히 일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친히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셨다. 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살리셨지만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통해 아들 스스로 친히 살아나시는 바가 되시기 때문에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10:18]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하셨고 '이[내 목숨]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하신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계명"은 무엇이냐 하면, 무릇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내리시는 모든 계명은 모두 한결같이 예외없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사랑으로 하나되는 이치에서 내려지는 것임을 말씀하심이다. 즉 아들께서 아버지를 위하심으로써 그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하실 때는 즉 아버지의 계명을 행하시고 순종하실 때는 반드시 아버지 친히 아들을 위하심을 내포하는 것이다.


어느 일방적이 아니고 쌍방 교류 차원에서 동시에 움직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으심이요, 아버지께는 아들을 위해 일하셔서[움직이셔서] 아들을 살리신다는 의미가 동시에 이루어짐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룬 나 역시 바로 그러한 하나 관계에 있는 복된 현실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는 과거 죽음의 일을 하던 때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삶이니 이는 곧 나와 함께 하나가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고 나를 위해 살아 주시는 의미가 동시에 이루어짐이다.


"다시 나고[출생]"[요 3:3] "새로 창조된"[고후 5:17] "새 사람"[골 3:10/엡 2:15/4:24]의 "새 생명"[롬 6:4]의 "새 계명"[요 13:34/갈 6:2/고전 9:21/롬 8:2] 아래에서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따라서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갈 2:20] 것이라든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든가 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해 사심을 말함이고,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되어 있음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일방적이 아니고 동시 쌍방에서 움직이는 것이므로 그러하며 그래서 자기 부인이 가능하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나는 나를 위하지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부인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므로 내가 절대로 "부인되지" 않는 까닭이다. 이러한 관계는 또 어떤 양상을 만드는가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그리스도 역시 나를 부인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그리스도 역시 나를 시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딤후 2:12/마 10:32].


이는 이치상으로도 당연하니 그리스도 친히 나의 생명이 되어 계시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 자신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까닭에 이는 다시 말해 자멸, 자살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의 인간이 자기를 좋아하면 나도 그를 좋아하고 나를 미워하면 나도 그를 미워하는[마 5:46,47]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니 이를 혼동하지 말 것이다.


"새 생명'으로 "새 사람'된 것은 "성령으로 출생했기"[요 3:5,6-내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로서,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오심으로써] 때문이니 그래서 이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을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갈 5:25]이라 하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삶의 법, 원리, 이치, 도리]이 죄와 사망의 법[과거에 억눌려 살았던]에서 나를 해방하였기"[롬 8:2] 때문이다.


왜냐면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행 2:38] 성령으로 출생하여 성령으로 생활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기"[갈 5:24] 때문이니,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전제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을 인한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해 하시는 일이지 나 자신이 들어 내 원수를 갚는 일이 아니니, 나는 이제 무엇이든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다시는 살지 않는 새 생명의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함"이다. 나의 원수이기는 하나 내가 내 원수를 갚게 되어 있지 않으므로 내가 내 원수라고 미워하게 되어 있지도 않으니,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머리로서의 명령, 계명, 지시]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최고 선[좋은 것]인 줄 앎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 원수를 못갚아 불평불만하지는 않으니 왜냐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원수를 갚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훌륭히 갚아 주실 것이기에 그렇다.


나는 완전히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를 망각 속에 매몰시킴이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무덤에 묻혀 장사 지내짐 그대로다. 과거의 내 삶의 주동이었던 나 자신은 현재 매장되어 있는 결과로써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으로 살아 있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함께 무덤에 묻힌 상태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불가분이다. 따라서 나 자신에 대하여 죽은["죽는"이 아닌] 자기 부인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영생 역시 없다.


모든 것은 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 알아 처리해 주시므로, 우리 자신은 잘 모르기 때문에 원만히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다 잘 아시므로 완벽하게 처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나의 그 원수가 실제로는 바로 나 자신[한 몸의 원리에서 같은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이들은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이므로]일지라도 나는 모르나[모르기 때문에 원수 갚는다는 잘못된 명분 아래 그 '나 자신'을 파괴하는 자멸 행위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것이다.


내 원수라고 해서 내 스스로 원수를 갚아 버린다면 그와 같이 자해(自害) 행위의 비극으로 빠져들게 될 것도, 오로지 나의 일체의 일을 하나님께 일임(一任)하게 되면 그런 비극을 면하기도 하고 예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예가 스데반의 죽음이요 사울의 회개다. 그 사울이 나중에 바울이 될 줄이야 당시는 아무도 몰랐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 것이다. 스데반이 가령 자기 원수를 갚는다고 가정했을 때 바울[사울의 개명(改名)] 역시 그 살인자들 속에 있었으니[행 7:58] 자기 원수라 해서 바울을 원수 갚았다면 바울은 영원히 없는 것이다.

원수 갚는 일만 아니라 일체의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는 하나님 친히 하시는 것이요 나의 몫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 외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스데반은 머리되신 하나님의 지시대로 행하여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행 7:60] 하는 기도로 외친 것이다. 이 "저들" 가운데 바울[당시는 사울]도 포함된 것은 당연하다.

이 부르짖음이 이를 지켜보던 사울의 골수에 깊이 박혀 그 양심을 두고두고 괴롭히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마 그런 고통 때문에라도 사울은 교회 핍박에 남달리 앞장 섰는지도 모르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 결국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그를 회개로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택하심을 따라 된 것이라고 바울 자신이 밝히고 있다.

회개는 내 스스로가 하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나를 회개케 하시지 않고는 즉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못하는 것이다. 이 회개에서도 양면성의 이치는 불변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나를 회개케 하려고 하시나 나 스스로 회개할 의지가 없으면 이 역시 불가능이다. 고로 어느 쪽이든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없다. 반드시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저를 돌이켜 주십시오, 그리하면 제가 돌이키겠습니다[회개하겠습니다]"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생명체를 만드실 때 눈이 앞에만 있고[얼굴이 앞에 있으니] 뒤에나 옆에 있지 않도록 하셨다. 눈이 설혹 온 몸에 붙어 있다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그 무엇도 누구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만은 명백하다. 이와 같이 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없고 내가 이웃하는 상대가 나를 보게 되어 있고 나는 그 상대를 보아 주게 되어 있는 상호 보완의 삶 즉 모두가 머리[창조주 하나님]를 중심하여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지체로서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보아 준다는 것은 위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강력히 시사함과 같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위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 가운데 아로새겨야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으로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으로서는 항상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 외에 즉 한 몸을 이루어 있는 체제에서 머리를 위하고 이웃을 위함으로써 그 머리가 그리고 이웃[나와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모든 이들]이 나를 위해 줌으로써 내가 위해짐 이 외에는 달리 내가 나를 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항상 마음에 각인시킬 일이다.  

인생 삶의 상반성(相反性), 그 '무의미'와 '막중한 가치'


고로 현세에서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 한마디로, 무의미다. 영생함으로써 산 자가 되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죽은 자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오직 회개하여 사는 자가 되는 것, 여기에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10, 20대 아주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공명정대 공정공평하지 못하시다" 말하고 아니면 다른 이들보다 죄가 많아[이 경우 "전생"이 어떻다는 둥 되지도 않은 소리까지 하며] 그렇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풀이해 주셨기 때문이다.


즉 로마[유대인들을 강점하여 통치하던] 총독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여 그 피를 자기네 제물에[우상에게 바치는] 섞은 사건을 누군가 말씀드렸을 때 대답하시기를,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를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말하지만,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명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말하지만,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눅 13:1-5]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죽음을 "망하는 것"이라 하셨다. 죄인으로서 저주 받아 형벌을 당하는 의미인데 어찌 망함이 아니랴.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참혹한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인간의 모습이요 바로 그 그림인 것이다. 즉 '회개하지 않은 자' 곧 죄인으로서의 죽음, 형벌 받아 마땅한[사 53:8] 죽음으로서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죽음이 죄 때문에 온 것임을[첫 사람 아담의 죄 그리고 우리 각자 자신의 죄의 결말-골 2:13/롬 5:12] 말하고, 죄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니 한 몸의 이치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것을 가리킴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죄 짓도록 되어 있는 인간'으로든 '죽는 인간'으로든 그렇게는 만드시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련히 보시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형벌 받아 마땅하고 저주 받아 망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 주심이다. 그러하니 또한 이 십자가 모습은 [우리 각자 개인의 그림일 뿐 아니라] 이 죄 많은 인생들의 세상의 실제 모습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그렇게 빌라도의 군인들에게 "억울하게" 붙잡혀 죽거나 망대가 무너져 "비명횡사하는" 것을 "망하는 것"이라 하신 것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전제로 말씀하신 것임을 명백히 하셨다.


따라서 회개한 경우 다시 말해 구원 받은 사람은 같은 죽음이라도 "망하는 것"["to perish"-요 3:16]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죽음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24] 의미가 되므로 실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환된다. 그러면 당시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망한 것"[즉 죄인으로서 그 죄의 형벌로써]이라 하셨는데, 그들이 앞으로 믿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인데 그렇게 단정하시면 너무 지나친 예단(豫斷)이 아닌가 할 것이다.


첫째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니 하나님은 미리 아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앞으로도 여전히 믿지 않을 것임을 미리 아시지 않고는 그렇게 그 "영혼들을 도로 찾으실"[눅 12:20] 리 없다. 이는 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회개한 사람은 즉시 그렇게 데려가시지 않는 것이 일반화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분부하실 리가 없다.


다시 말해 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 역시 회개할 수 있도록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행 17:30]을 온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받게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보내심 받음"[요 20:21,22]이라 하셨다. 따라서 그와 같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그런 사명을 받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요 앞으로도 계속 회개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아심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천사들은 사람들을 솎아내고 걸러내고 추려내어 데려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연명(延命)해 가는 것이 회개하는 데에만 오직 의미가 있다 했거니와, 따라서 이 의미는 영원 세상을 두고서도 맞바꿀 수 없는 최고 가치를 말한다. 무슨 가치냐 하면 바로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영원한 운명[생명이든 죽음이든]을 내 스스로 결정하는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원한 삶과 죽음이 순전히 나 자신의 손 안에 달려 있어 내 스스로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모골이 송연해지도록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인가.


비록 찰라 같은 세상이나 이 세상에서의 나의 처신에 달려 있으므로,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고후 5:8] 하였고,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하는 까닭에 이같이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10,11] 하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장차 오는 영원한 세상을 좌우하게 될 전생(前生)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만이 전생이고 그 이전에는 일절 전생이라는 것이 없었다. 삼위일체의 원리로서 분명 그러함을 단언하게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윤회, 환생, 소위 전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별종[악령들의 후손]인 '네피림"[앞에서 설명한]에 한해서이니 그들의 죽은 영혼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런 것을 빌미로 우리 전체 인간이 그런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미인(美人)도 젊고 건강할 때에만, 그리고 한낱 한 꺼풀의 피부 차이다. 이것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한 때뿐인 영화(榮華)다[벧전 1:24,25]. 온갖 징그러운 내장들을 얇은 피부 하나로 감싸고 있다가 어쩌다 그 피부가 상하거나 다치거나 일그러지고 하다못해 이빨 하나라도 빠져 없어졌을 때 또는 그 몸이 어떤 물리적 압박을 받아 찌그러지거나 화상(火傷)에 노출되어 형체가 달라졌을 때 그 흉물스러움을 누가 감당하리요.


힘으로 치면 산짐승, 들짐승, 물 속에 사는 짐승보다도 못해 그런 동물들에게 찢겨지고 부러지고 하는 것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다. 덩치가 크다고 그들에게 당하는 그런 것도 아니니,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겨우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미물로서의 병원균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날에도 허약하게 그 생명은 무너진다. 하나님께서 이런 허약하고 어설픈 모양새로 인간을 만드실 리 없다. 완전하고 온전히 아름다운 그리고 죽어 썩지 않는[immortal] 존재로 만드셨으나 인간 스스로 이런 죽음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처한 현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함이니 즉 범죄의 결과 죽은 자로서 저주와 형벌을 받아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이와 같은 비극적인 정경을 그대로 나타내심이다. 바로 그 그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죽으심과 장사 지내지심이 나의 죽음과 장사(葬事)가 될 리 없다. 단순히 '나를 구원하시고자 나를 위해 죽으시는' 모습으로서의 일면으로만 착각할 것이 아니라 양면 그대로 정확히 볼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를 모르고 모든 실상을 알지 못해서 살려고 하고 그래서 더 가지고 풍성히 누리려는 욕심에서 염치 없이 덤비는 것이니, 인생의 의미는 간단히 정리하면 죽음이라는 한마디뿐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개함으로써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오직 시급하다. 죽은 자의 굴레를 벗어나 산 자가 되는 조건으로서 회개를 강조하신 것이다. 나 위해 죽으셨다는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살[영생] 수 있기 때문이니, 왜냐면 이렇게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 첫 사람 아담의 범죄 때문이고 그 결과로 우리 역시 죄를 지은 응보이기 때문이다[롬 5:12/골 2: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 즉 사람이 되게 하시어 우리 위해 죽으시게 하신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 얻게 하심에 우선(優先)하여 먼저 우리 각자가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심 [행 3:26]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이 '절대적 전제 조건인 회개'[2:38]를 무시한다. 그래서 특정 사실을 사실로서 시인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 줄로 착각하니, 이는 우리를 구원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 곧 종교 교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자기류(流), 자기식(式)으로 해석해 버려 자멸에 이른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스스로의 인간 개혁의 의지를 강조하는 일반인들이나 불교도들의 빈축을 사게 만들고 성경까지 비방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들로 구원 얻게 하는 일에 오히려 결정적 거침 돌이 되어 방해하는 악역(惡役)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의타심을 조장하는 아주 몹쓸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 스스로 되어 있는 실태인데도 이 사실에 눈 뜨지 못한다. 고로 시급한 것은 똑바른 인생관, 세계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인데도 성경을 아예 읽으려고 하지 않으니 어이 하리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죽은 자'들이 움직이고 걸어 다니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영원한 본격적인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그 입구에 각자 위치해 있다. 이 현실이 기절할 만한 사실들이건만 이를 볼 줄 모르니 어찌 하랴. 그래서 복음 전파를 그리스도께서는 "눈 뜨게"[행 26:18] 하는 것이라 하셨다. 의사가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을 우리는 인술(仁術)이라 한다. 영원한 생사를 가름하게 할 눈을 뜨게 하는 것은 더욱 더하게 어진 덕을 베풂이다. 인생 중에 이보다 더 보람찬 일은 없다.


환영(幻影)을 보고 환상(幻像) 속에서만 살고 있는 인생들이다. 허위의 현상(現象), 영상(影像)인데도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환상이고 환영이다. 눈 앞에 분명 어른거리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니 사막의 신기루다. 이 세상은 사막과 같은 광야임을 성경은 몇 번이나 강조해서 나타내 주어 경고하고 있는가.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통하는 여정(旅程)을 잡았고, 생명의 왕[주인, prince-행 3:14]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알렸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그 소식을 전하여 외쳤다.


그리스도 친히 광야로 나가셔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시험 받으셨음을 성경은 확인해 주고 있지 않는가. 사막이나 광야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이 세상이 바로 그러함을 성경은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어 오직 회개하여 산 자가 되는 것이 급선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것이 오늘날 이 세상과 인생이 지니고 있는 진실이다. 이 믿음 및 회개의 의미가 너무나 선명하기에,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 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행 20:21] 것이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가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히 6:1]임을 양 갈래로 명백히 하였다. 그런즉 산 자가 되었으면 죽은 자의 일에 더 이상 가담하지 말 것이며[사회 개혁, 정치 운동 등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그것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눅 9:62)] 오직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산 자의 일에만 전념할 일이다. 그 이상으로 인간 생활에 기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처지로서 이 세상에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다. '죽은 자'의 세상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은,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히 2:14]과의 접전(接戰) 상태에 돌입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 끝나기까지 이 치열한 전쟁은 지속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아름답고 살 만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 실상인즉 모든 아름다움과 대립[대치]되는 누추한 자기중심의 추(醜 )함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 것은 수한壽限)이 차 정해진 때를 따라 죽는다기보다,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었으므로 이제는 영원히 살기 위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죽은 자'의 탈을 벗으려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냐 아니면 회개하지 않아 망하는 것이 되어 영원한 죽음으로 이제는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냐 하는 것으로 가름되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얼마를 지체하든지 오직 그 기간은 이 양 갈래 중 어느 하나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한 의미 외에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경우, 젊은 나이로 죽는 것은 더 오래 살아보아야 회개할 의사도 의지도 없음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기에 일찍 데려가신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회개하지 않고도 장수하며 사는 악인도 있는데 그 경우에는 또 다른 사유가 있다.


왜냐면 악인이라 해서 일률적으로 단명(短命)하게 되면 이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강제, 간섭이 된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악인의 형통은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악인들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드는 함정이요 덫이요 올무, 올가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함과 같다.


3운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인되었으나 그런 철칙이 사람이 나기 전부터 미리 정해지는지, 사람 살아가면서 확정되는 것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복합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단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인간 생애를 좌지우지하신다는 사실이고, 때문에 이와 같이 강제되는 삶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니 이 현실이 이와 같이 3운법칙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 생각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왜 강제되지 않으면 안되느냐 하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이유 없이 마음대로 죽인 데에서 드러남이니, "죄를 다스리라"[창 4:7] 하셨지만 가인 스스로 죄를 다스릴 수 없음이 드러났으니[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어느 인간도 죄를 다스릴 수 없음이 드러난 것이다-롬 7:24/8:2] 하나님 친히 통제를 하셔야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로 세상이 공멸(共滅)하는 것만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정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인즉 그렇게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만은 보장되어 있어야 하므로 가인처럼 짬도 없이 죽이고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3운법칙에 의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죽을 때가 되어야 죽도록 하셨으니, 다시 말해 인간 마음대로 인간 생명이 좌우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하시고 있다는 증거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 3운법칙이다. 그런즉 이생에서의 생사(生死)와 활동만은 철저히 통제되나 영원한 생사는 각자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르고 그 자유 선택에 철저히 좌우되는 것이니 이를 혼동하지 말 것이다.


이 지식이 없으므로, 통제된 이 세상 삶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영원한 운명은 간과하는 치명적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이회장의 경우처럼,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돈으로 나의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지 못한다. 역부족이요 엄청난 한계가 있다. 천하의 권력을 쥐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하심과 같다.


그 좋은 사례가 있다. 중원 천지를 통일하고 난 진시황은 천하가 내 세상이라고 자못 흐뭇해 있는데 어느 날 변방으로부터 한 사신(使臣)이 와서 긴밀한 이야기가 있다고 좌우를 물리쳐 달라기에 그리 해놓고는 바짝 귀를 갖다 대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시퍼런 단검의 검광(劍光)이 품속에서 번쩍거리자 혼비백산이 되어 몸을 피하느라 기둥과 기둥 사이로 피해 가며 초주검이 된 채 진땀을 빼는 한 바탕 소동을 벌인 후로는 정치에는 완전히 맛을 잃어버렸다.


모든 정사(政事)를 팽개친 뒤로는 오로지 불로장생하게 한다는 소위 선도(仙道)에만 깊이 빠져 헤매다가 여생을 마쳤다. 천하를 얻어도 목숨이 붙어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 죽고 나서 무슨 소용인가. 진시황은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모든 인생이 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한없는 비극이다. 진시황처럼 반드시 천하 통일을 해야 깨닫는다는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이요 우스운 일이다.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바가 되니, 현재 이와 같이 '죽은 자'[자연계에 속한 몸]가 되어 있는 우리의 비극적 현실과 결말이 이토록 엄청나다. 누차 설명이지만, 우리가 "죽은 자"[마 8:22]라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기에 그런 것이니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시한부 생명이기 때문에 영생 자체가 불가능하다. 신령한 영적 몸이 되어 있으면 죽을 리가 없다. 죽지는 않으나 범죄의 경우 그 대신 멸망이다.


고로 영생하도록 창조되어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변하였으니[범죄함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경우처럼 멸망의 운명을 스스로 만든 결과보다는 구원의 기회만은 남아 있으니 그 기회를 잡아야 하는 데에 유일한 의미가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따라서 이 자연계에 속한 생명은 언제든 죽게 되어 있는지라 ‘죽은 자’이다. 영생하게 되어 있던 자가 시한부 생명의 상태에 놓였으니 그것은 죽음의 상태이지 살아 있는[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은 영생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상태는 아닌 것이다.


죽어도 짬도 없다. 갓 태어나 죽기도 하고 10, 20대에 죽어가는 인생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어찌 ‘죽은 자’가 아닌가. 짬도 없이 죽어 나가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경고다. 갓나서 죽어가는 인생으로써는 "너도 이와 같이 갓나서 죽는 인생과 아무 차이가 없다. 너도 이처럼 갓나서 죽었어야 할 인생이다" 하시고, 10대에 죽는 인생으로써는 "너도 10대에 죽었을 수 있었지만 이와 같이 지체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는 "남 보기에 억울하게 죽는" 인생을 가리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한다"는 경고만이 유효함을 나타내심과 같다[눅 13:1-5]. 다시 말해 이 세상 인생 삶에 일체의 의미가 없고 오직 "회개하는" 데에만 유일한 의미가 있음을 밝히심이다. 그러면 무의미하면 무의미한 것이지 '막중한 가치'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죽은 자'이니까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그러나 '죽은 자'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부터 탈피하여 산 자로 스스로 전환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이 세상이므로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한번 선택으로 영원한 삶을 결정하고 스스로 이룰 수 있으니까 막중한 가치라는 것이다.


그 대신 한번 잘못 선택으로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결과를 내니 천만 근과 같은 무게의 의미를 지니는 이 세상이 아닌가. 앞서의 설명대로 이 세상이 '오는 영원한 세상'의 전생(前生)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 할 것인가. 세상이 이런 신기루[사막의]가 되어 있음은 그 목적이 있으니 악인들을 걸러내고 솎아내고 추려내기 위한 덫이요 올무요 함정이라 한 그대로다. 이런 것이 없으면 악인이 걸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도 되는구나, 이기주의로써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편하구나 하도록 만들어 거기 빠지고 걸려 들게 되도록 일정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생에 이르게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데에 함몰되는 어리석음이 당연히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죽음인 줄은 냉철한 이지(理智)로써 사물을 읽을 줄 아는 이라면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에 대한 속임수로 전생, 윤회, 환생 등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른다면 인생이 일찍 그렇게 죽고 혹은 억울하게 그렇게 죽는다면 그것은 형벌인 것이니, 형벌이라면 그 형벌을 당하는 자가 자기의 잘못을 알아야 그런 형벌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전생을 말하는 이들이 전생에서의 자기 허물[잘못]을 알고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하는 말이 있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내가 이런 변을 치르는가" 하는 등의 말들이 모두 이런 사실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죄의 형벌을 받을 때는 반드시 어떤 죄로 인해 그 당연한 대가로서 형벌을 받는지를 알아야 하고 따라서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 동일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알지 않는 한 형벌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를 형벌의 결과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고로 이로써도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어낸 허무 맹랑한 거짓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복음과 '자기 스스로 복을 짓고 화를 짓는다'는 세상 종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명백한 차이니, 곧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에 의한 구원을 먼저 받은 다음 스스로 복을 짓든지 화를 짓든지 하는 데에 있어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구별되어 있는데 반해 세상 종교는 머리만 있거나 몸통만 있는 기형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만을 강조하든가 아니면 스스로의 행위에만 역점을 두어 몸 없는 머리, 머리 없는 몸이 되어 있음이다.


전자에 속하는 것이 개신교의 교리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불교이고 천주교 역시 후자에 속한다. 성경의 경고와 같이 "자기 구원을 스스로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라는 점에서 표현은 같을지 모르나 내용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세상 종교는 자기 자신의 구원이 목표로서 여전히 자기를 위해 사는 삶 일변도로 나가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하지 않음은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일절 살지 않는 것이 "자기 구원을 이룸"의 본질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들어 이웃을 위해서[머리되시는 하나님을 먼저 위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니 완전 자유인으로서의 위치이다. 왜냐면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여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 말씀을 전심전력으로 좋아하는 까닭이다. 그 대신 자기 원하지 않는 불의와 불법에 더 다시는 얽매이지[롬 7:24] 않는 자유함이[8:2] 완연하다.


어느 쪽이 진실로 진정한 의요 선인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자기 구원을 목적하고 그 수단으로 선행을 염두에 두니까 그 선은 어디까지나 위선임을 누가 모르랴. 선이 선 되기 위해서는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도 결코 자기 구원을 목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위함에서 즉 욕심에서 모든 죄가 파생한다[약 1:15].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을 때는 어찌 되느냐 하면, "자기의 구원을 이루지" 못함이 된다. "결국 자기의 구원 목표가 아니면 무엇인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믿음으로써 구원 얻었는데 그 구원된 결과로서의 그러한 열매가 없으니 말은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거나 아니면 중도에 그 믿음을 버린 까닭이 입증됨이다.


즉 믿으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고후 5:15] 되어 있는데 자기를 위해 살아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7:21]. 과거의 믿음의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즉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고 말씀의 대언자(代言者)가 되어 선지자의 역할을 했어도 현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으므로 그 믿음을 버린 까닭이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므로, 사랑은 항상 현재를 기준하지 과거도 미래도 그 표준을 삼지 않는다.


고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처음 믿음을 지키고 "처음 사랑"[계 2:4]을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한결같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함이어야 한다는 경고이다. 이는 당연하니 사랑의 현재성(現在性)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사랑은 변치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항상 현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지금 현재 사랑하느냐 여부만을 묻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오직 현재라는 것은, 소출이 풍성해진 부자가 곡간을 더 크게 지어 자기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고 여러 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려 하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16-20] 하셨다는 비유 말씀으로 성경은 확증하고 있다. 또한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1년을 체류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겠다 하는 이들이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약 4:13,15] 함과 같다.


"안개 같다"는 말은 성경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있는 이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성경은 여기서 생명의 영원한 법칙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를 설명하여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 4:15] 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모든 일에 현재를 기준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 생활이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겠다" 해야 하는 데에 있음을 말한다.


즉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각자를 위해 주시는 하나님[우리의 머리되시는]을 위함에 있는 까닭에, 그런 자세로서는 현재에만 충실을 기함이 옳은 것이요 그 이상의 생각은 사실상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는 자세를 "악한 것'[:16]으로 성경은 단정한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라"[:17]고 함과 같다. 머리를 위하고 그리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 함께 지체된 이웃을 위하는 것이 최고 선이요 모든 선의 기본이 되는 까닭이다.


현재가 언제나 그 핵심인 사랑의 나라인 천국에서와 같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원리가 이 세상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법칙이 되어 있음은 변함이 없다. 이 원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가운데에서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한 이 세상이 '현재'인 것은, 이 세계가 자연계에 속하여 시한부 생명이라 일률적으로 특정 수명(壽命)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내일[보장 받은 미래] 자체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이 짬없이 죽어 나가는 것이 그 증명이다. 그리고 과거는 단지 그런 '현재'가 남긴 족적(足迹, 足跡)일 뿐이다. 그래서 주님 가르치시는 기도에서도 "오늘 저희에게 일용(日用)할 양식을 주십시오[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하게 된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이라 내일을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아니라 삶 자체가 사랑에 있어 사랑은 항상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현재'를 비유로 말하면 컴퓨터를 앞에 놓고 문서 작성을 할 때 양손은 항상 자판[keyboard]의 기본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 기본 위치가 '현재'이다. 손이 이 기본 위치에 항상 놓여져 있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음과 같이 우리의 삶도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직 '현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므로 내가 현재의 하나님 뜻을 행할 때 나의 미래는 자연적으로 보장이 되게 마련이다.


이것이 영원한 미래를 사는 비결이다[마 7:21]. 현재가 언제나 삶의 중추(中樞)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 본보기다. 그래서도 그를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 한다. 즉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 즉 죽이라는 '현재의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였다. 미래를 계산하지도 않았고[이삭이 없으면 대를 어떻게 이을 것인가 하는 염려 등] 과거를 따지지도[약속하셨음에도 왜 그렇게 뜻이 바꾸어졌는지 등으로] 않았다.


현재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이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최고, 최선이 되는 줄 알기 때문이었다. 현재로서 만족인 것이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자기 본 고향을 떠나 낯선 나그네 길로서의 여생(餘生)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하나님께 자기의 미래를 완전히 일임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신뢰의 결과였다. 그렇지 않다면 한 곳에 정착하기 위해 성(城)을 쌓고 나라를 세우는 등 이방인들이 하던 것처럼 미래를 구축하려고 했을 것이지만, 하나님 친히 아브라함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모두가 되어 계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현재'의 하나님이심을 아브라함은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니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요 항상 현재이다. 과거에 살았다는 것도 무의미하고 미래에 장차 살 것이라는 것도[이 세상에서는] 불확실 그 자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의 하나님'이시다. 과거에 한정해서 또는 미래에 국한해서 인식할 일이 아니다.


현재보다 더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 가장 가깝고 현실적인 것이 나의 현재 상태다. 바로 이 현재에 하나님께서 위치해 계심이다. 우리의 구원 받음도 현재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되어 있다는 데에 핵심이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이 유효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산 자가 되어 있는 '현재'가 영속된다는 뜻이다. "몸의 구속"[롬 8:23]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믿음과 순종이 지속될 때 몸이 구속되는 것이다.


현재를 기준하지 않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순종도 현재에 속한다. 과거에 아무리 순종을 잘 했어도[마 7:22] 현재 순종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겔 33:13]. 현재의 순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앞으로는 순종을 하겠다"고 다짐해도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래서 현재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죄인으로 있는 한 다시 말해 "육신대로 살고"[롬 8:13] 있는 한 이 사람은 영원히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천국에 가서는 순종할 수 있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천국에는 죄인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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