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7일 월요일

멸망의 순간까지도 믿음 있어 구원 받는 줄 착각한 한 달란트 소유자의 엄청난 비극

구원 받은 유일의 증거가 무엇인가

내가 구원 받은 증거가 무엇이냐. 내가 구원되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했는데, 이에 대해 <단 하나>의 대답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느냐, 않느냐? "에 대해 양심껏 자문자답하면 됩니다. 다른 그 무엇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신하면 절대로 아니됩니다.

오직 하나,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죽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主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는 단 하나의 삶의 목표, 보람, 환희이면 충분합니다. 오직 주님, 하나님만을 위함(성자 하나님을 위함이 성부 하나님을 위함이고 성부 하나님을 위함이 성자 하나님을 의함)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요 10: 30)로 계시기에.

바로 이 원리 곧 생명의 법칙을 따라 구원자("예수"의 뜻) 우리 주님과 내가 "한 영" (고전 6:17ㅡ"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됨이 성령 받음이고 구원됨인데, 이렇게 하나됨은 '상대성의 동시성'(상대 곧 짝을 이룬 둘이 동시에 똑같이 움직임ㅡ서로 상대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음으로써)이니, 주님은 오직 나를 위하시고 나는 주님을 위함이 하나님 창조하신 생명과 삶의 불변 구조이기 때문.

이것이 "한 영"됨입니다. "한 몸"(창 2:24)됨은 서로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닌 상대방의 소유가 됨(고전 7:4ㅡ"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主掌, 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함이니")이라,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에 충실하고 철저함입니다.

본질은 같고 성질은 정반대인 특징을 갖는 이 만유의 기본 대법칙에 어긋나는 법질서 문란의 행위이기 때문에, 동성끼리의 일체의 성행위가(성질이 '정반대'가 아닌 똑같으므로)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움만 되는 고로 범죄가 형성되는 것. 성경에 명시된 이 3위1체의 법칙을 모르는 무지/無知 탓에 사람들은 사탄이 부추기는 대로 소위 "동성애", "성소수자" 등 역겨운 말을 지어내며 짐승보다 못한 짓거리를 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 어느 순간에든 전지구적으로 임하실 수밖에 없음을 모두 자각하고 회개해야.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들과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유다서 1:6,7) 했으니, 타락한 천사들 즉 악령들이 무저갱("영원한 결박으로 가두어진 흑암")에 들어간 것을 가리켜,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따라 행하다가> 멸망 당했다고 한 것이니, 동성간 성행위와 같은 것을 "다른 색/色"이라 한 것. 악령들은 이런 짓으로 네피림을 생산했고 하나님께서는 이 불법 행위자들을 무저갱에("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유폐시키신 것.

<본질은 같고 성질은 정반대>라야 짝의 법칙에 따름이 되어 합법(合法)인데 영물과 인간은 <동일한 본질>이 아닌 것이고, 소돔 고모라의 죄는 <정반대의 성질>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 "<다른> 색"이 됩니다. 그리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마 5:32ㅡ"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다"), 배우자가 음행한 일이 없는데도 이혼함 또한 간음 행위가 됩니다.

이미 결혼하여 "한 몸"이 되어 짝을 이루어 있음에도 이를 파기했으니 그러합니다. 이 죄를 회개하여 그 불법을 버리지 않는 한, 아무리 하나님 믿어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현행범/現行犯이니까. 이 모두, 바울 사도가 전도할 때 "믿으면 영생한다" 고 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인간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 (행 17:30)는 말부터 먼저 외친 이유입니다. 

인간의 구원(의 이치)도, 또 영원한 존재로 창조된 영물들이 범죄 않음으로써 자기 생명을 스스로 유지 보존해야 했던 것도, 에덴에서 아담이 창조주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 그 뜻을 순종했어야 마땅한 것도(불행히도 복종치 않았지만), 정하신 법질서를 오로지 따르고 그 뜻을 행함에 생명이 있기 때문. 나를 위하지 않고 머리되신 하나님만을 위하고 사랑하는 그 몸된 지체 그 각 부분으로서의 우리 역할을 다한다는 엄숙한 진실과 진리 곧 생명의 법칙을 따름에 있기 때문.

다름아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은즉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7- 40)이라 하심과 같으니, 바로 이를 가리킴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법질서는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을 기반으로 하여 창조 시작 당초부터 확립된 것으로서, 만유는 이 법칙대로 세워져(창조되어) 운행되고 있음이니 <법칙대로>ㅡ이것이 바로 과학인 것입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정확히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진실과 진리의 범접 못하는 서슬 푸른 위엄입니다. 인간의 조작, 개입, 거짓이 깃들 틈이 아주 없습니다. 이 점 깊이 명심하시기를.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랑과 삶의 법칙(이와 같이 하나님 존재하시는 모습을 따라 만유 창조와 운행의 기준이 되어 영구 불변으로 확립되어 있는 만유의 법칙)을 따라, 오로지 그 창조물을 위하시고 자기를 위하시지 않으니, 이렇듯 그 머리 역할을 하심대로 그 몸으로서의 우리 피조물 역시 그 본을 따라 오직 하나님만 위하고 사랑함으로써 그 모든 뜻에 복종함을 생명으로 여기니 이것이야말로 삶의 최고 미덕/美德인 것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데 지저분하게 왜 내가 나를 위해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즉 구원되지 못한다는 성경의 거듭되는 강조는, 이상 설명과 같이 나를 위하는 자아중심만 버리면 영생이 보장되는 가장 간단한 일임에도, 아담의 범죄(이상과 같은 상대성의 동시성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그 약속대로 했던)로 모든 인간이 현재 동물성 육체 즉 "죄의 몸"(롬 6:6)이 되어 있는 이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이외 달리 그 어떤 것에든 연계시키면 마귀(이 세상 지배자)의 거짓말임이 입증됩니다.

동물성 육체는 말 그대로 동물의 육체이지 인간이나 영물의 육체가 아닌 것. 전자는 기계적 생명이라, 이렇게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한시적 생명은 자기 중심이라야 즉 자기가 자기를 위해야 당연하고 정상이지만, 이지적 판단을 따라 선악/善惡(좋고 나쁨)을 스스로 구분해 사리를 판별하여 자유 의지로 행동하게 되어 있는 인간에게 그런 "선악을 아는 지식"은 곧바로 기계적 생명체인 동물적 육체가 됨을 의미함이요 자아중심으로도 통하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해 주신 것입니다(이는 당시 아담이 영광의 몸, 신령한 몸이 되어 있었다는 뜻).

고로 이런 "죄의 몸", "죄 있는 육신"(롬 8: 3)이 아담 범죄로 무리하게 인간에게 입혀졌으니까(애초의 창조로 된 것이 아닌 비정상으로) 이런 육체는 마땅히 죽어야 즉 파괴되어야 하는 운명인 것. 파괴된 후에는 다시 살아나야 하며, 그렇게 되어야 애초의 '아담 창조'와 같은 동물적 육체("죄의 몸이 아닌 즉 본능적 자아중심의 기계적 작용이 없는)처럼 되어 명실상부한 새 창조가 우리에게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어 그래서 "은혜"라 하고 "새 창조"라 합니다.

당시 아담의 동물적 육체는 이미 창조된 동물들의 육체와는 모양은 같아도 실질적 내용은 전연 달랐으니, 왜냐면 그런 몸으로 시한부 생명을 유지하며 목숨을 이어 가는 쪽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아담에게 작동하신 적이 없었기에. 일정 기간 후에는 에덴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즉각 변환되는 순간만을 바라보는 대기 상태의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의 아담과 같이 동물성 육체라는 <형상>은 같되, 이같이 <성격>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구원 받은 육체이며, 따라서 새 창조, 신령한 몸으로의 변환을 기다리는(창조 당시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마지막 아담" 우리 주님과 하나됨으로 함께 죽어 "죄의 몸이 멸절"(롬 6:6)되었기 때문. 그리고 함께 부활함으로써 아담 창조 당시의 그 청정무구한 깨끗한 몸처럼 되어 있기에.

참고로, 나를 함께 살리시고 "또 함께 일으키셔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에서, 우리가 지금 땅에 있는데 어찌 동시에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느냐 한다면, 주님께서 육체로는 하늘에 계시나(행 3:21) 성령으로는 지금 우리 각자와 함께 땅에 계시므로 성령으로 나와 "한 영"(고전 6:17)으로 존재하심이라, 나는 비록 몸으로는 땅에서 주님과 떨어져 있지만 영(성령)으로는 하나라, 현재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사람이신 주님이 바로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바로 그 주님과 똑같은 모습이시기에 이는 내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시라 몸은 떨어져 있으나 하나님이신지라 그 영이신 성령으로는 만유에 충만하시기 때문. 따라서 나도, 주님과 하나인지라 만유에 충만해 그 어디서든 주님과 함께 있는 실질적 효과를 누리고 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사탄에게 명령하면(약 4:7/마 16:23) 사탄이 황급히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명했으니까, 주님 친히 명령하심이기 때문.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었고 그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 이전의 죄의 몸, 죄의 육신이 아닌 것이니 명실상부하게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斷罪하셨다"(롬 8:3)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지니는 의미입니다. "죄의 몸(육신)"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의 차이입니다.

"육신"은 인간의 자아중심적 성향, "죄의 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의 몸,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은 동물적 육체이기는 하지만, "죄의 몸/육신"이 아니고 "죄와 사망의 법"(8:2/7:23,25)이 작동되지 않는 즉 나를 지배하지 못하는 "새 생명", "새 사람"의 전혀 새로운 몸인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므로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이 다 이러하다"(요 3 :8) 하심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말을 바꾸면, 이 몸은 (1) 앞서 설명한 대로 신령한 몸이 되기 직전(에덴에 들어가기 전)의 아담의 몸, (2) 현재 구원 받은 우리의 몸, (3) 세상에 계시던 때의 "마지막 아담"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2)와 (3)의 공통점은 성령께서 계시는 몸이라는 특징.

여기서 육체로 계실 때의 우리 주님의 몸을 부연 설명하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몸인 마리아의 태를 통해 육체를 입으시고 나신 예수님이시니 우리와 같은 죄의 몸이 아니시냐?" 하겠지만, 성령('주님의 몸'과 대립되는 '주님의 영'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시고 하나님으로서의 영 곧 성령이시니까)을 모신 육체이므로 성령께서는 '죄 있는 정결치 못한 육체'에는 계실 수없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그러면 마리아의 죄의 몸(예수님께 물려진)이 성령으로 어떻게 되었기에 그렇게 변환되었느냐 하겠는데, 첫째, "성령의 능력을 인함"이라 해도 하자는 없습니다. 또한, 둘째로, "동정녀 탄생이시니까 그러하다 즉 인간의 씨(seed)는 남성으로부터 나오는 부계/父系 쪽이니까 따라서 죄의 몸도 남자의 인자/因子가 가미됨으로써 형성되는 반면 모든 모태/母胎는 원천적으로 깨끗하고 순수한 것으로서 바로 이러한 동정녀의 태를 통하셨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설명을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스스로 믿는다면 최우선으로 부단/不斷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즉 자아중심인지 아닌지를 깨어 살피는 경성/警醒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아중심과는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 아담의 자아중심과 악령들의 범죄가 그들의 몸이 죄이 몸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구원된 사람도 똑같습니다.

먹고 마시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도 나 자신을 위함이란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한 그대로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도 같은 뜻입니다. 이 시험 많은 세상에 시험하는 자가 포효하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노린다고 했으니까(벧전 5:8).

하나님 친히 나를 대신해 나를(영원토록) 위하시는데, 감히 내가 나를 위하다니! 하나님처럼 완전무결하게 나 자신을 위할 수 있나요? 자기 부인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족 그 모든 구성원의 사랑과 위함을 독차지하는 지름길인데(이 말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동시에 말할 수 있으며 여기에 단 '한 오리 거짓말'도 끼일 수 없는 순수한 진실과 진리 그대로임), 누가 감히 이 화려 찬란한 생명길을 업신여길 것입니까ㅡ"미친 마음"(전 9:3)을 품지 않고서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좋아해서 기쁘게 하는 일인데 누가 막을 수 있나요? 자연만물의 아름다움은 혹 싫증이 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의 아름다우심은 영원을 통해 싫증이 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진실을 믿는 것임을 똑바로 인식해야! 하루하루 순간순간 이러한 하나님 의식이 우리 믿음임을 깊이 마음 속에 아로새겨야! 성령 충만했던 사도 베드로가 당시 성령 강림하심(행 2:25)을 묘사했던 것이 시편 16:8이었으니 즉 <매순간> 나를 대하시어 나를 붙들어 주시는 하니님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시편 구절은 장차 임하시게 될 성령의 영광스러우신 모습이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어버이 마음의 하나님 사랑을 의식하지 않는 그 어떤 생각이든 그 생각 자체를 미워함이 마땅합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뜻.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님의 법을 사랑합니다"(시편119:113)는 Biblegateway 56개 영역본(구약이 그렇고 신약은 63개 번역본) 중에 50개 번역이 우리말 번역과 같이 되어 있고 나머지 6개 번역이 KJV 계통(3개 번역)을 포함해 "헛된 생각"이라 번역되어 있는 바, 그나마 모두 일치하게 "헛된(vain)"이란 말이 원어에는 없는 것임을(영어의 이탈릭체) 표시해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론은, 원문에 "생각을 미워한다"라고 되어 있음이 확인됩니다.

50개 영역의 번역자들 모두 "사람이 어떻게 생각 자체를 미워할 수 있느냐" 하는 성급한 견해였기 때문인데, 그나마 원문을 따라 "생각"이라 한("두 마음 품은 자"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번역자들도 같은 관점이었기에 "헛된"이란 말을 억지로 끼워 넣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KJV가 항상 정확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다른 중요한 부분에서 오역을 하고 있기 때문. 즉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고전 11:18)에서 "교회에 모인다(come together in the church)"와 "교회로서 모인다"(come together as a church)의 차이에서 그렇습니다.

전자는 교회당 특정 건물에 집합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중에 있다"(마 18:20) 하신 대로, 두 셋이라도 "마지막 아담"이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것으로 교회가 형성된다는 뜻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이는 대로, 이런 "집 교회"(고전 16:19/골 4:15/빌레몬 1:2)는 지금 북한교회가 그 강력한 실례/實例입니다.

"내가 생각들(thoughts)을 미워하고 주님의 법을 사랑합니다"에서, "주님의 법을 사랑함"이란 말이 곧이어서 떠받쳐 주지 않는다면 위의 번역들이 타당성이 있다 하겠지만, "하나님의 법(말씀)을 따라 모든 생각을 통제함이 옳음은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생각이 자아중심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외려 사탄의 시험 수단으로 전락/농락될 수 있기에 마음에 경계하며 미워합니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깊이 마음에 새겨야!

성령으로 <매순간> 나를 대하시는 나의 주님을 나도 매순간 대하여 뵙고 경배하는(성자 경배는 성부 경배로 직결)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첫 걸음. 당시 사도 베드로가 직접 성령으로 뵈웠던 그리고 그 목숨 다하기까지 뵙던 마지막 아담 우리 주님의 모습이셨던 것이니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모습 바로 성령의 의미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사람> 주님(임마누엘)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시고 '우리 각자와 또한 하나'이신 위치에 계실 것이기에, 인간의 중보자(서로 적대적인 둘 사이에 개입하여 갈등을 해소하는 중재자) 역할을 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심이었던 것(딤전 2:5/히 8:6).

사람되신 성자 하나님이 곧 성부 하나님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꼭 그대로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을 호호백발 노인으로 표현한 그림은 성경에 대한 무지 탓. 사악한 사탄의 거짓말투성이인 바벨론 신학의 잔재. 뇌리에서 깡그리 지워 없애야. 노인 즉 늙음은 동물적 육체의 특징이니까. 즉 죽음으로 가까이 간다는 증거.

왜 매일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일부러 힘들게 하시느라 즉 영생의 가치를 알고 진정으로 원하는지 여부를 다루어보시고자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라(사형수로서 사형장에 임하는 자세가 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원은, '아담 범죄로 완전 망쳐진(영생하는 존재로 존귀하게 만드셨는데도 동물처럼 되었으니까) 인간 창조'를 "새로 창조하시는 것"이므로, 모든 창조가 그러하듯 창조자의 순수한 선물인 것. 선물은 말 그대로 거저 주는 것이라 어떤 조건도 달지 아니하십니다.

단지 문제는, (1) 아담 범죄로 현재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서의 동물적 육체가 되어 죽은 자가 되었고, 이 사망의 권세를 악마 사탄이 쥐고 있어(아담 스스로 사탄의 거짓말을 따름으로써 악마를 도리어 상전/上典으로 대접한 꼴이 되어 거꾸로 그 수하/手下가 되었은즉) 악마(인간이 아닌)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2) 믿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이마다 성령 받아 구원됨이 순식간이므로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요일 3:1, 2) 즉 하나님의 상속자라 마땅히 해야 할 아버지의 일을 <이런 죽음의 세상>에서 수행해야(요 20:21,22) 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함이요 우리 인간의 원수인 사탄의 권세와 마주쳐 싸우며 일한다는 데 있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써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2)를 분명히 마음에 두시기를. 순종은 하나님의 뜻 실천입니다. 순종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구원 받아) 때문입니다. 아
버지께 복종하지 않는 아들은 없으니까. 내가 하나님 아들이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 아들로서의 행보는 순종으로 시종일관 됩니다. 때문에,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 7:21) 하신 것.

혼동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걸핏하면 혼동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간단명료한 이치에다, 이를 설명하시는 말씀의 그 표현까지도 아주 단순합니다. 만인 상대의 구원이니까. 신학자 또는 교역자, 설교자를 통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음(성경을 읽음)에서, 그 말씀을 믿음에서 옵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서(나를 그 피값으로 사시어 나를 소유하신 따라서 나는 그 소유하신 종으로서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는)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롬 10:8-10)ㅡ얼마나 단순한가요. 어린 아이도, 일자 무식자도 알아듣습니다. 만인 상대의 구원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친히 이미 이루신 것이라 그래서 거저 주시는 것을 그저 믿으면 되니까!

선물로 거저 주시는 것 그저 믿고 받아 챙겨 감사하고 기뻐 뛰놀면 끝나는 "구원"입니다. "믿을" 줄도 몰라요? "들을" 줄도 모르나요? 먹으면 되고 마시면 끝나는 일이거늘! 이다지도 간단한 일이 인생 구원인데, 무슨 학문이 필요하며 뭘 연구한다는 말인가요! 신학이, 신학자가, 신학교가 무슨 필요가 있나요! 이 경우 신학"은 마치 "어떻게 먹는가?", "어떻게 마시는가?" 하여 "음식/飮食학"을 만들어 놓고 "음식학자", "음식학교", "음식학생", "음식학박사"를 만들어 내는 따위 미치광이 놀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요?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성경은 교과서요 성령께서 그 유능하신 유일하신 가정교사시라는 정도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성경은 신학이란 말을 입도 뻥끗한 적이 없습니다. 학문이 아닌 "계시" (마태 11:27)라고만 강조하셨을 뿐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25) 하셨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나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학문을 하지 "어린 아이들"이 무슨 학문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는 "감추시고 숨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고야 말았고 지금도 불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이시니!

"바벨론 신학"이니 "한신학"이니 하는 것도, "참깨들깨 다 노는데 아주까린 못노나" 식의 "한데 어울려 말해보자꾸나"일 뿐입니다. "진리와 진실을 설파함에서 아무렴 어때? 신학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구원 받아 하나님 애초 창조하신 대로 영생하면 그만이고 그것만이 시급한 인생 현안, 유일 과제인데!"입니다. 신학하세요. 신학교를 세우는 것 흠 잡지 않아요. 다만, 진리와 진실을 알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알아야 하며 그렇지 않고는 백년 가야 알 도리가 없다는 정확한 정보만을 알립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 운영의 좋은 지침을 성령으로 세워 주었는데, 그것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니...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主가 되려 하심...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롬 14:5-10)이라 한 데에서 잘 드러납니다.

한 "날을 중히 여겨" 그것을 "안식일"이라고 지키든, 아니면 자기 자신의 일체가 주님께 바친 것이라 하여 "모든 날을 같게 여기든"(:5), "형제"(:10)라는 즉 '구원 받은' 증거는 "자기를 위하여 살거나 자기를 위하여 죽거나 하는 자 없이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7 ,8) 데에 있으니 이 기준에만 맞으면 되고, 여기서 벗어나 다른 견해 차이로써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면"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이니(:10) 이를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껏 이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 조금의 견해 차가 있어도 갈라지고 헤어지고 남 보듯이 하고. 이 경우 기도 응답조차 즉 하나님과의 교류도 불가능임을 알아야. "심판"(:20)의 대상마저 돼 있으니까!

내가 주님을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어 구원하셨으니 이는 열매 맺기를 바라신 때문. 즉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각자 이룸으로 그 뜻을 행함이니 곧 사랑과 삶의 법칙대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으로써 모든 사람이 각기 행복한 삶의 극대화를 누림입니다. 이는 누구나 다 생명의 법칙대로 상대만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달성되는 일입니다. 기계처럼 돌아가듯 빈 틈 없이. 바로 이것이 선/善과 의/義를 행함입니다. 삶 자체,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선을 행함"(롬 2:7)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이렇게 자기 역량 따라 열매를 맺히는 것이어서 바로 이것이 달란트 비유(마 25:28)입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그 처음 받은 달란트 이상으로 더 증식시키지 못한 경우 그 처음 가진 것마저도 빼앗긴다는 것(눅 9:25). 자아중심이 그 화근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행함, 행위가 없으리요. 그것이 생명인데. 생명 없으면 죽은 것. 하나님은 산 자(움직여 열매 맺는)를 창조하셨지 죽은 자를 만드시지 않은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으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요 15:7,16)이라 하셨으니까. 열매가 없으면 진정한 기도 응답도 없어요. 위의 말씀이 그것 아닌가요?

이 "과실을 맺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2) 하셨으니 우리의 순종 즉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 10)이라 하신 대로 "계명 지킴"입니다. 여기서는 "믿음" 단계가 아닙니다. 그 단계는 이미 지났고 지금은 그 믿음의 열매 맺는 단계인 것입니다. 순종 즉 "행함(행위)"의 단계입니다.

이는 주님은 내 안에, 내 안에 주님 계시어 둘이 서로 하나됨으로써 나는 주님만 위하고 나를 위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을 것"(마 21:43)이라 하신 그대로입니다. 말을 바꾸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움이니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아는"(마 7:19,20) 법입니다. 즉 "믿음" <유무>는 그 "행함" <여부>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야고보 2:20),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6).

여기서 각자가 받는 달란트는 상대를 위하는 상대방 중심으로 일관하는 하나님의 계명 지킴입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하고 따라서 그 위하는 상대방의 뜻을 행함(마 7:21)이니까 하나님의 계명 즉 생명의 법칙을 지킴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 34) 하신 그대로입니다.

아담은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이 "달란트를 뺏긴"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입니다. 고로 구원 받은 즉시 선행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아중심이면 선행이 불가능입니다. 고로 달란트는 허나님 친히 내게 본으로 보이신 사랑입니다. 즉 나를 위해 전부를 다 바치신 사랑으로 된 구원 즉 새 창조인 것입니다. 곧 성령으로 다시 남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되신 주님을 위해서만 살아(주님이 나를 위하신 것처럼) 하나님 뜻대로 행함 곧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서의 생활 자체가 생명이므로, 말로만 주님이라 한다고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엄중 경고하신 것입니다(마 7:21). 이와 같이 선행을 함으로써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말씀에 복종하라는 말씀을 정직하게 진실대로 가르치는 야고보서,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등을 애초 신구약 성경 66권으로 처음 정할 때에 모조리 제외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행함을 강조한다는 이유이니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요하는 인상으로 비쳐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주님 말씀도 제해버려야 할 것인가요. 이런 자가당착에 빠져 궤변을 일삼은 것이 "바벨론 신학"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아는 것은 소위 "기독교 신학". 하나님 친히 "숨기시는데" 알 도리가 있나요.

구원자("예수"의 뜻) 우리 주님이 나 위해 죽어 주신 은혜를 믿어 내가 구원되었으니 지금 나는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입니다. 산 자이니까 당연히 산 자로서의 움직임, 행동, 순종의 행위가 따르게 마련.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구원되는 것이라면 물론 이 세상에서 절대 복종(아들로서 아버지께, 종으로서 주인에게)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믿는 이 시간, 순간에 새 피조물이 되었으니까, 어버지의 아들되고 주인을 새로 모신 종이니까 순종의 행위가 의당히 요구되는 것.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할 것이다"(:21,23) 하신 대로, 이와 같이 구원 받은 대로 순종의 행위를 당연히 나타낼 의지가 없는 자에게 성령께서는 아예 임하시지도 않음을 단언하신 것. 그런 사람은 아예 구원조차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행함이 없고 말만으로 "사랑한다" 하는 자는 위선자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그런 거짓말로 구원 받아 천국 가려는 것이 바벨론 신학입니다. 구원 받은 것은 성부 하나님의 아들됨이라고 성경은 못박습니다. 성자 하나님께 종이 됨을 명백히 했습니다. 백 번 강조할 일입니다.

믿음(구원 받음) 즉시 순종의 행위가 요구되는 것인대도 이를 부정하는 이런 모든 "미친 마음"(전도서 9:3)의 원인은 앞서 지적한 대로 사탄이 이 세상 지배자로 있기 때문. 즉 사탄의 "말씀 혼잡"(고후 2:17/ 4:2)의 기만 행위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사탄 탓만 할 것이 아니니, 항상 거기에는 우리 자신의 오만과 말씀 무시, 불신이 그 밑바탕인 것입니다.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마 15:9) 하신 대로 소위 "신학"을 믿은 결과입니다. 정확히 말해 바벨론 신학의 마귀의 거짓말의 궤변. 에덴에서의 아담 비극 그 6천년 묵은 되풀이, 반복입니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 하심은 이와 같이 자기 할 일, 자기 몫을 다하라는 말씀이시니 남이 나를 대신해서 순종할 수 없습니다. 무식한 바벨론 신학은 "메시야께서 우리의 순종을 대신한다, 운운" 하는데 어불성설. 그런 "대신 복종"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과 삶의 기조/基調가 사랑이고 선행이고 상대방 중심이라 자아중심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은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에서만 성립되므로 우리와 똑같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계시는 머리이신 주님을 따라 일거수 일투족인 우리의 행함, 행위임을 알아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고전 12:26) 이치를 따라 기꺼이 주님과 같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주님과 함께(머리와 몸 관계이니까)>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골 1:24)인 것. 창조주 하나님 친히 이런 모양새이시니까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롬 8:22)입니다. 마귀 지배하의 지금 새상이기에 하나님의 일의 수행 방법이 그러하므로 그 방법을 말씀하심이 십자가 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때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여"(계 21:8) 즉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막 8:33) "물러서면"(히 10:38, 39) 한 때 구원 얻었다고 기뻐하던 그 생명(영생) 그대로 무사하겠나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하신 대로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게 됨이 당연함을 앞에서 여러 말씀에서 확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딤후 2:12)이기에.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디도 1:16)이기에.
 
그러므로 세례 받기 전, 회개가 진정 착실하게 이루어졌는지, 세례 받는 자도 주는 자도 진중해야 합니다. 확신 있게 행동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속임이 되고 하나님도 속인 자로서 낙인 찍힐 수 있습니다. 세례 받는 것을 우습게 알고 미루어서도 안되고(오늘 이 시간 이후 교통사고라도 생겨날지 그 누구도 모르기에) 그렇다고 서둘러도 안되니 성령 받아 모심과 직결되어 자기 구원과 관계되기 때문.

회개가 확실해야 순종도 확실해짐이니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모든 구원 문제, 고통 고난이 오지 않았던가요.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런 처참한 인생고가 있는가 그 해답인 것입니다. 소위 "영적 죽음"이란 거짓말의 폐해가 이토록 큰 것입니다. 성경적 진실을 말하지 않는 거짓됨이 이렇게도 뒤죽박죽, 엉만진창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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