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5일 토요일

도무지 우리 (영혼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현재의 자연계 육체, 자연계 속성의 삶

 













바울 사도가 여기서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은,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라" 한 것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신 바로 그 말씀과 같은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이세상을 당시 에덴의 선악과나무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성령의 감동으로 선악과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다"(창 3:6)는 표현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으로 똑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에서 바울 사도는 명명백백히 창세기의 "죽음"을 "썩음"이라 정의
/定義한 것.
물론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풀이'라기보다 '이해'이나 <바벨론 신학>이
너무나 비상식적인 '해석'으로 "영적 죽음"이라 세뇌시켜 왔기 때문에
재삼, 재사 강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황하고 허망한 일입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거의 2천년이 가깝도록 헛되이 믿어 온 것이
더욱 허탈감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맹성을 촉구하여 마지않습니다.
아담의 죽음은 "영적 죽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명시한 대로 "썩음"입니다.
따라서 에덴은 자연계 동산이 아니라 영적 세계 곧 초자연계였고
거기 몸 담아 살게 될 아담 역시 초자연계 속성의 즉 신령한 육체였습니다.
영생이란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존재함을 말합니다.
교인들을 다시 가르치세요. 성령의 명령하시는 바입니다.
여전히 고집 부려 "영적인 죽음, 운운" 할 경우에는
하나님 말씀 감히 무엄하게 가감한 죄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실"(계 22:19) 것입니다.
오늘날 이같이 진리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죄 없을지도 모르나
이제 대낮같이 밝혀진 이상 당신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헤치는 자"(마 12:30)라 하신 대로
이것 아니면 저것일 것이지 생명과 죽음 오직 양자택일만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언급한 것은 "세상의 초등 학문" 즉
율법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려들지 모르나, 
그렇다면 되묻고 싶은, "썩음"과 "학문"이 무슨 연관성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골 2:20)라 하여 "세상"과 연계시킨 것입니다. 
즉 자연계 물질로 이루어진 이세상 현세적 삶의 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림자"적인 세상 율법을 "실체"이신 마지막 아담의 가르치심과 대조시켜
범죄 전 아담의 초자연계 몸의 초자연계 속성의 세계로 복귀되는 의미를 배경으로 해
그런 온전한 세계에 부합하는 온전한 가르치심의 성격을 논하면서
"초등 학문"에 견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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