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0일 월요일

모든 기쁨과 평강이 믿음 안에서 나의 기쁨과 평강이 되어

"외모(겉모양 즉 세상에서 인정해 주고 알아 주는 평판)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마 23.9).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우리로 말하면 "어버이"시나 또한 "어버이" 그 이상이심을 재차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그 어떤 어버이도 따라가지 못하는, 비할 바가 아니신 유일무이의 가장 이상적 어버이상/像이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므로 그 "품속"에서의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의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저 막연한 우리의 구원의 대상 정도로 알다가는 구원마저 그 맥을 끊어 놓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과 비례하여 내게 가까이 하신다는 것이니 주님께서도, "나를 보내신 이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요 8.29) 하심으로써 인과 관계가 명확하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의 동반자이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더군다나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나는 주님의 삶을, 주님은 나의 삶을 사시는 관계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으레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이시고 선하시니 인간처럼 하지 않으신다 가볍게 인식하기 쉬우나 실상은 이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식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ㅡ마 7.21/"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ㅡ요 4.34) 우리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양식을 취하지 않을 때 영양실조로 목숨까지 잃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들이 피하지 못했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분을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그러므로....<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것이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다"(히 12.25-29).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해타산으로만 따지는 모든 것을 깨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킴으로"(고후 10.5), "성령의 충만을 받아"(엡 5.18) "모든 기쁨과 평강이 믿음 안에서 충만케 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여 주시기를(롬 15.13)!


2026년 4월 19일 일요일

진리를 사는 자 늘 평안 누리고 그 기쁨 주 안에 늘 넝쳐나노니

노아의 아라라트 산(5137m) 


노아의 950년 생애 도표는 가인과 라멕(창 4.23, 동명이인으로 '셋' 혈통도 있지만 여기는 '가인'계) 살인 사건 이후 인간 생애의 법칙을 하나님이 정하심으로써 그려지는 것으로 연대순으로 하면 유일한 인류 최초의 것입니다. 죽는 때가 아니면 사람이 절대 죽지 않도록 정하신 것이 이 3운법칙입니다. 이런 모든 인생 중 예수님만이 유일무이의 예외이시니 아담은 영원하므로, "마지막 아담"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아담이 죽은 것은 먹으면 죽는 선악과를 스스로 먹어 죽을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먹지 말라 하셨는데 불순종하여 거역한 것. 모든 불복종이 <자기 중심>이므로 죄와 악입니다. <상대 중심>이 의()로움과 거룩함()입니다. 처음부터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할 터이니 너는 네 자신을 위하지 말고 나만을 위하여라" 하셨는데 이같이 '약속'과 '명령(계명)'을 동시에 하신 고로 아담의 범죄는 "언약을 어김"(호세아 6.7)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고전 11.25)이라 하셨으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나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읗 주심과 맞물립니다. "그가 우리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이 어떤 것임)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요일 3.16)고 한 그대로입니다.

고로 자기를 위함은 어떤 경우든 통하지 않고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상대방 중심>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면 <상대 중심>이요 <상대 중심>이 아니면 <자기 중심>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히 12.14)이라 한 이유밉니다.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입니다"(고전 6.17). 이것이 우리의 구원됨입니다.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요 10.30)됨 즉 "합일/" 또는 "일합/一合"(종전의 "3위1체" 개념)이 되는 필수 요건이 따르는 바 그것은 "교차(엇바꿈, 맞바꿈) 소유"입니다. 갑의 것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가리켜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7.21),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 나의 것은 아버지의 것"(:10)이라 하셨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가리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요 14.10)이라 설명하신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갑은 을 안에 있고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되어 갑은 을 안에서 살고, 을 또한 갑 안에 있어 갑의 것은 을의 것 되어 을은 갑 안에서 사는 것이니 말을 바꾸면 갑은 을의 삶을 살고 을은 갑의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맞바꿈의 삶입니다. 남녀 한 몸됨에서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 남편의 몸은 아내의 소유가 됨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구원된 사람은 다시는 자기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의 삶인지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주님은 또 내게 그러하시므로 마치 나만이 주님을 모심과 같이 되어 사람마다 그러하니 주님은 만유에 충만하시기 때문. "공동"의 개념과는 별개이니, 다시 말해 우리 주님은 내게 '공유'가 아닌 '전유/
專有'와 같은 의미이십니다. 몇%가 아닌 100% 전부가 나의 소유가 되십니다. 그래서 365일 24시간 내내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십니다. 내게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이 그러하므로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요 16.7)이라 하신 것. 나만 아니라 믿는 자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일하게 그러하십니다.


따라서 구원 받았다면서 이전처럼 여전히 자기 중심인 사람 즉 <나란 존재가 없고 오직 주님의 소유라는 의식>만이 살아 있어아 하는데(그대신 주님 친히 나의 소유, 나라는 존재가 되어 계심)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자기 기만으로 일관했다는 명백한 증거인즉 철저히 자기 중심을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풍성한 삶을 적극 선전할 일입니다. 





2026년 4월 15일 수요일

그리스도 안에서 똑바로 딛고 서야 할 우리의 의치

아래 눅 9.57~62 말씀을 이전에 여러 번 게시글로 올렸으나 이 말씀을 이제 다시 대하니 같은 말이지만 또 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하고 누가 말했을 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떡 다섯 덩이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씩 먹이시는 기적을 보고 이 분만 따라가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다 생각했던지 그런 말씀을 드렸는지는 모르나 주님은 "마지막 아담" 즉 인간의 대표로서 인생의 참 실상을 정확히 밝혀 주신 것입니다. 자연계 생물은 하나님 창조해 주신 그대로이나 인간만은 아담 범죄로 자기 고유 영역인 신령한 세계로부터 전락해버려 동물성 육체의 물질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비극의 주인공" 인생. 우리는 똑바른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저로 먼저 가서 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자 이에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창 2.17) 하신 대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대들이니 "죽은 자"이지 그 외 달리 무엇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 '산 자'가 아닙니다. '산 자'로 착각하지 맙시다. 모든 세상 사람이 '산 자'로 스스로를 알고 있는데 헛다리 짚는 정도가 아니라 낭떠러지로 수직 하락하는 위급한 수준에 처해 있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부르짖어야 또 부르짖어야 하는 몹시 다급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임을 의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절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심히 궁박한 처지입니다. 매일 매순이 실제 그러합니다. 이 동물적 육체는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떤 이는 또 이렇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마는 저로 먼저 제 가족을 작별케 허락해 주십시오". 이 경우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ㅡ즉 앞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자 살리는, 살려 눟고 보아야 하는 절박한 순간에, 즉 전쟁 중의 군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수술 환자를 앞에 놓고 딴전을 피우는 집도의/執刀醫와 같은 행위가 용납될 리 만무합니다.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 영적 수술과도 같은 "성령으로 다시 나는"(요 3.5) 일입니다. 사람 목숨은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더욱 더 위급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위치가 바로 그런 절박한 순간에 서 있는 집도의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초심/初心 자세를 한 순간도 잃지 맙시다!


2026년 4월 14일 화요일

주님과 한 영(고전 6.17)으로 연합하여 있는 나

주님께서 몸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심과 똑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으로서는 지금 우리 각자와 함께 마치 사람으로 계시는 것처럼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 계시니 똑같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요 10.30)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어머니 하나님"도 당연히 존재해야 마땅하다며 마귀 노릇을 하지만(이렇게 말함이 마땅한 것은 이런 언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으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ㅡ왜냐면 주님 친히 "아버지"라 하셨으니 그대로 수용하면 되므로)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하는 모든 표현이기에 그런 것. 아담은 남성이니까. 그냥 "어버이"라 해도 무방하겠지만 인간은 성별이 있기에 더욱 어색하므로. "<아버지 품속의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시라 했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면 더 이상 성별이 없으니까(눅 20.35). 동물적 육체가 됨으로써의 성별인 것입니다. 신령한 몸은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다운 아담의 자식 생산 방법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적 육체의 낙이라고는 단순하고 기계적이라 식욕과 성욕뿐이나 신령한 몸의 쾌락은 한낱 "몸"에만 한정되지 않는 영적ㆍ정신적인 것을 총망라하는 무궁무진의 다양성인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마 16.28)가 비록 잠시 잠깐이나마 전개됨을 본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고 있습시다" 란 말이 부지중 튀어나온 것도 그 단적 증거입니다. 디 엘 무디(1837ㅡ99)가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사랑의 파동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순간 그는 도저히 견디지 못해 "주님, 이러다가는 제가 죽습니다. 멈추어 주십시오!" 하는 간청이 터져 나왔고, 찰즈 피니(1792ㅡ1875)도 처음 믿음의 결단을 내렸을 때 그렇게 숲속에서 장시간 기도하고 자기 사무실(변호사)에 돌아와 홀로 앉아 있는데 "사랑의 파도(무디와 같은 표현)"가 물결쳐 오듯 밀려들었다고 합니다. 피니의 경우에는 이 때 주님께서 문자 그대로 옆에 서 계심을 느꼈고 피니는 그 발 앞드려 지난 날의 모든 죄를 낱낱이 자백하며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사람마다 그 표현과 체험이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 앞에 계십니다. 이것만은 불멸의 진실입니다. 성령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2026년 4월 13일 월요일

여성 생애 3운법칙(한국서 22년간 봉사한 서서평 미국 선교사)

 










여성 생애의 3운법칙

프랑스의 18세 소녀 잔 다아크는 13세 때 "신의 음성"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가 활동기 개시.
스웨덴 오페라 가수로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끌어 모았고 자선사업에 기부도 많이 했으나 독실한 자기 
신앙생활에 지장이 된다 하여 그 화려했던 무대를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뛰쳐나올 때부터가
놀라지 말라, 그 활동기(LP) 시작이었으니!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상 그와 똑같은 사례가 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이효봉 선사. 일제의 국권 침탈 시대에 판사로 재직 중 한 독립운동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번민 끝에 법복을 벗어 팽개쳐버리고 엿장수가 되어 전국 방랑을 시작한 그 시점부터그 활동기가 시작되었음을 그의 파쇼모(3운법칙) 생애 도표가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성 생애 3운법칙 적용 사례를
여기에 가끔 올려 놓겠습니다.
위 제목에 분석 여성의 이름을 올려 두겠습니다.)




서서평 (Elisabeth Shepping, 1880~1934
ㅡ54세에서 3개월 모자람)
•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아 트라우마.
• 조선 와서 서구 생활 완전 포기, 무명 저고리·고무신 신고, 월급 전부를
 가난한 이·한센병 환자·고아·창녀들에게 씀.
• 유품: 동전 2개 + 찢어진 담요 반쪽. 장례식엔 천대받던 사람들이 통곡.
• →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문구처럼, 부와 명예 포기하고 무상·고뇌 속 헌신한 삶.

셰핑은 간호사로서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후 미국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했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 동안 봉사하였다.
간호사로서 셰핑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치료하려는 선교사로서 간호, 신학, 교육에 대한 지식을 결합했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그녀는 한국 병원에 간호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결국 그녀가 32세 때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에 합류하여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2년 전인 1910년에 일본 제국이 한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정부와 대부분의 사회는 약자들을 더욱 방치했다. 그 결과, 구걸하는 사람, 한센병 환자, 병든 환자의 수가 증가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셰핑은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1911년에 지원했고, 1912년 2월 20일 32세에 선교 여행을 떠나 여생을 그곳에서 봉사하는 데 바쳤다.
간호
1912년부터 1934년까지 셰핑은 광주, 군산, 부산, 서울 등 한국의 여러 지방에서 일했다. 특히 셰핑은 "여성, 과부, 고아, 한센병 환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셰핑은 간호 활동에 가장 큰 우선순위를 두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그녀는 광주제중원, 구암 예수 병원, 세브란스병원, 그리고 한국의 다른 병원들에서 일했다. 간호사로서 그녀는 간호사들을 훈련하고 감독하는 책임도 맡았다. 셰핑은 한국에서 건강과 교육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간호 교과서를 출판하고 번역했다. 그녀가 저술한 간호 교과서 중 일부는 간호 교과서, 실습 간호 연구, 간호 지침서, 단순 위생법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1923년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의 설립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0년간 회장으로 재직, 대한간호협회의 국제간호협의회 가입에 성공했다.
교육
간호 외에도 셰핑은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한국에 학교를 설립했다. 예를 들어, 셰핑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성경학교인 '닐'성경학교를 설립했는데, 한때 매년 3~4만 명의 여성을 교육했다. 이 학교는 나중에 한일장신대학교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설립부터 그녀의 사망까지, 셰핑은 이 학교에서 5~6과목을 직접 가르쳤다. 그녀가 다룬 주제 중 일부는 읽기, 쓰기, 찬송가, 성경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에 질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의학과 간호도 포함되었다. 교육을 장려하는 동안, 셰핑의 주요 헌신은 여성들을 기독교로 교육하여 효과적인 성경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셰핑은 '이일'이라는 여성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이 스스로를 부양하고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셰핑은 누에를 키우고 여성들에게 바느질 방법을 교육하여 학교가 자립할 수 있도록 했다. 낮에는 교사였지만 밤에는 전도 행사를 열고 여성들을 전도사로 훈련시켰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기독교인으로서 더 강한 정체성을 확립, 성경을 전파하는 데 힘을 얻었다.
한국 문화에 동화하기를 힘써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달리, 셰핑은 한국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한국 사람들과 동일시했다. 셰핑은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녀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증명된다. 그녀는 전통 한국 의상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했으며, 한국의 풍습, 문화, 신념을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셰핑을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외국인"이라고 불렀다. 셰핑은 한국에서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34명의 가난한 과부들과 함께 살았고, 13명의 딸을 입양했으며, 된장국과 보리밥만 먹고, 함석 지붕이 있는 흙집에서 살았다. 이는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와 분리된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았던 선교사들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셰핑은 자신의 이름을 서서평으로 바꾸고 일본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수립했을 때도 오직 한국어로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했다. 셰핑은 1934년 사망할 때까지 22년간 한국에서 봉사했으며,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시신을 세브란스병원에서 해부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유산
셰핑은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광주에서 흡연, 음주, 매춘에 대한 금지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셰핑은 닐 성경학교(앞서 언급)와 같이 그녀가 설립한 학교에 다니는 여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문맹이었고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여성 교육은 제한적이었고, 셰핑은 한국 여성들에게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고자 했다. 닐 성경학교는 그 지역의 여성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을 졸업한 많은 여성들은 계몽 운동과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였다. 셰핑은 여성 교육과 문해력을 증진함으로써 여성 계몽의 사심 없는 선구자로 여겨졌다.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모임은 셰핑을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사랑의 제자인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후예"라고 평가했다. 2017년에는 그녀의 봉사하는 삶을 다룬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었다.
(이상 전문, "서서평" 관련 인터넷에서 옮겨 옴)


이 서서평 선교사는 FS(아브라함형)에 해당되어
활동기가 30년(53×4/7)입니다. 생애 연보가 약사이기에 자세하지 않아 언제부터가 활동기 개시인지는 불분명하나 이전의 카톨릭 신앙을 버리고 장로교회 나가는 동료 간호사 소개로 "큰 깨우침을 받았다" 했고 그 후에 의료 전도와 선교에 관심이 깊어졌다 했으니 그 때부터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주제는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뿐

무엇보다 중요한 자녀 양육에 공을 들여야 하는 여성의 생애는 남성에 비해 대외적 활동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파쇼모 생애 도표상으로 드러나는 그 형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특점을 지닌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독신으로서 특정된 일에 몰두할 때는 당연히 그 윤곽이 선명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율곡은 신사임당의 4남3녀 중 셋째였고 맞딸은 어머니처럼 모든 면에 출중했다는데 그러나 율곡울 낳을 때부터 신사임당의 활동기(LP)가 시작되었음이 드러나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의 18세 소녀 잔 다아크는 13세 때 "신의 음성"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가 활동기 개시.

스웨덴 오페라 가수로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끌어 모았고 자선사업에 기부도 많이 했으나 독실한 자기 신앙생활에 지장이 된다 하여 그 화려했던 무대를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뛰쳐나올 때부터가 놀라지 말라, 그 활동기 시작이었으니!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상 그와 똑같은 사례가 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이효봉 선사. 일제의 국권 침탈 시대에 판사로 재직 중 한 독립운동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번민 끝에 법복을 벗어 팽개쳐버리고 엿장수가 되어 전국 방랑(한 3년간)을 시작한 그 시점부터가 그 활동기 시작이었음이 그의 파쇼모(3운법칙) 생애 도표는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는 것이다. 뒤에 승려가 되는 그 때부터가 아닌 것이다. 이 3운법칙을 파쇼모 즉 "신의 법칙"이라 하는 이유다. 점복(점술)이 아닌 것이다. 이런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기는 유사이래 처음이다. 창조주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 증명인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이 "마지막 때"에나 나타날 수 있는 "표적과 기사"(요 4.48)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바벨론에서 시급히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고(계 18.4) 새삼스럽게 "천사가 가진 복음"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 주시는 것과 정확히 맞물려 있어 설레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 중 하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삶울 살았는지 아니면 그 둘이 그렇게 될 줄 아시고 그렇게 일정 규격에 맞추어 주셨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다. 



제니 린드는 18세가 되던 1838년에 데뷔하고 
11년 후인 1849년 29세에 무대를 떠난다. 
그 때부터가 그 생애의 활동기. 
일반적 개념과는 완전 거꾸로다. 
그 스스로가 기꺼이 무대를 버려 
후련하다는 듯 
털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3운법칙을 
주저 없이 하나님과 결부시키는 
확실히 근거 있는 이유이다. 
인생들이여, 시끄럽다. 
여러 소리 말라. 
하나님 계시는 것 
하나만 알아도 족하다.
하나님 말씀 듣고 
영생 길만 찾으라!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있는
유일한, 오직 한 가지 이유이니까!
그리스도인들이여, 이 사연을 
주변에 널리 알려라!
혼자 영생하리라고는 
꿈에도 마음 먹지 말라!
전도하지 않는 자에게 영생은
아예 해당하지를 않으니까!







모든 기쁨과 평강이 믿음 안에서 나의 기쁨과 평강이 되어

" 외모(겉모양 즉 세상에서 인정해 주고 알아 주는 평판)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