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8일 일요일

사람 사는 법ㅡ상대방중심

 

우리는 <사는 법>을 모르고 여태껏 산답시고 살아 왔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되풀이해 강조해 온 대로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보는 눈이 앞쪽에만 있어 자기 앞은 보지만 뒤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검은 드레스 등짝 쪽에 흰 종이 조각이 붙어 있은들 나는 보지 못합니다. 천상 남(이웃)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데, 이럴 바에야 아예 서로 "상대방중심으로 살고 자아중심으로 살지 말자"는 <약속 맺기>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입니다. 상식 차원이니까 특정인 특정 단체 주도로 할 필요는 없고 서로 동조하는 마음인 사람들끼리의 자발적 움직임으로 확산시켜볼 만합니다. 모두 약속하고 이를 의식하여 언행심사 각자 조정해 간다면 바람직한 사회 정화 운동으로도 정착할 듯합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이 여기서 "약속"에 해당됩니다. 서로가 일제히 약속하는 것이니까 약속하는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간다는 특점/장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선행이나 도덕률같은 "나 혼자 힘쓴다"는 부담감도 없고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모두가 위해지는 삶의 지혜>라는 인식 차원에서 시작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못할 것도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믿는 이들이라면 더욱 더 안성맞춤의 전도 수단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이라는 마벨론 신학 척결에서도 행함을 강조함이니까 일조가 되겠습니다.

"저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나를 배신하였다"(호세아 6.7),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첫 사람 사이에 약속부터 먼저 맺어졌다는 놀라운 진실! 우리 주님 친히 밝히신 대로 이 "약속"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나타납니다. 즉 "나는 너를 위할 것이니 너도 나를 위하여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 곧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관계 상호간의 계약이니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그래서 말씀을 "신구약" 즉 약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혼자 삶이 아니요 "함께"의 삶일진대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의 삶이기에 육체의 "한 몸"(창 2.24)에서 남자 몸은 여자의 소유요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로 바뀌어(고전 7.4) 엇갈림의 교차가 이루어짐과 같이 육체 아닌 삶에서도 당연히 같은 양상과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뿐입니다. 

즉 갑과 을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곧 자아중심을 일절 배격하고 철저히 상대방중심입니다. 해난 사고 만나 어쩌다 절해고도에 홀로 남아 살아가야 하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삶은 무조건 상대방 위주라는 불문율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계적 삶의 짐승이 아닌 사람 및 모든 영적 존재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심이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함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요 15.10),  "이를(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10.18) 하신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자아중심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범죄로 인식하는 이유입니다. 자아중심은 간단히 말해 "욕심"(약 1.15)이요 상대방중심은 사랑이니 성경이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가 사랑이 생명(삶)과 직결되어 있음입니다. 사랑의 본은 우리 주님 친히 보여 주신 그대로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니"(요일 3.16). 사랑이 무슨 고매하고 고답적인 것도 아니고 평범한 상식이고 또 당연한 사람 삶의 하나 밖에 없는 방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상대방 위하기 약속 운동>처럼 시의적절한 사회운동은 없습니다. 악인/죄인더러 억지로 "선해져라, 착해지라"는 강요의 말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가장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할 일을 해보라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자아중심을 장려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중심을 겅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공동 약속을 자진자발적으로 하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과거의 이른바 도덕재무장 운동(MRA)과는 다른 차원이면서도 효율성 높은 것입니다. 강압/강제를 하지 않고도 그 몇 갑절의 고단위 실천력을 과시할 수 있는 마력과 매력을 지닙니다. 아울러 이런 것이 창조자 하나님의 원래 부터서의 기본 뜻 즉 "사랑"이심을 선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치신 사랑을 납득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2천년 전애 죽으신 예수("구원자"란 뜻의 히브리어) 우리 주님의 흘리신 피(보혈/寶血) 공로가 어찌 2,000년이나 지나 태어난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일까 의아심을 품는 이들에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따라서 "성부께서는 <성자로 말미암아>라는 뜻이 됨)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자 완전하신 사람이신 바 그 까닭은 사람이 영혼과 육체가 하나되어 있는 이중구조이기 때문. 

짐승은 육체뿐인 단일 구조인 반면 하나님은 영("하나님은 영이시니"ㅡ요 4.24)으로서의 단일 구조이신지라 광대무변의 우주 "안에(in)", "관통해"(through), 그리고 "위에"(above) 계심입니다. 때문에. "우주(만유)보다 크시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되심은 이전에는 육체가 당연히 없으셨으나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위해 친히 한 처녀의 몸(태중/胎中)에 들어오시어("영이시니까 자유자재하심) 사람되는 달 수를 다 채우신 뒤 세상 밖으로 나오심으로써 영원히 육체를 입게 되시어 사람이 되셨지만 그 영은 시람의 영이실 수 없고 하나님의 영 그대로라 그래서 사람-하나님, 하나님-사람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셔도 이전처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되심은 불변이셨으니(때문에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 고통을 성부 하나님 친히 그대로 남김 없이 다 함께 받으심ㅡ분리되어 계심처럼 보이나, 바로 이런 것이 "영"이신 특징ㅡ사람되실 순간에서만 분리되셨다가 30년쯤 후 우리와 하나되심의 의미와 목적으로 세례 요한에게 세례(이 경우 물을 뿌림이 아닌 물에 잠기심)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 비둘기 형상처럼 강림하심으로 다시 이전처럼 "하나"되심) 육체만 새로 생기셨지 영(성령)으로서는 여전하시어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이렇게 육체를 따라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육체로는 성부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영으로는 육체로 계시는 모습 그대로 믿는 각사람(자아중심을 회개하고 상대방중심으로 살기로 작정한)에게 선물로서 그 속에 계시니까 당시 갈릴리 호수가를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던 그 때(지금은 신령한 몸이시지만) 그대로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로서 "한 영"(고전 6.17)으로 나와 함께 계시니 주님의 죽으심 곧 내 죽음이요 주님의 부활 곧 내 부활인 것.

본디로 돌아가, 이처럼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상호 작용이 삶이요 생명입니다. 성자("마지막 아담")께는 성부께서 머리시요 우리에게는 "마지막 아담"께서 머리이십니다. 여자(아내)에게는 남편이 그 머리입니다. 먼저 나고 나중 난 순서/질서를 따름입니다(이 경우 "평등"이란 말을 쓴다면 무식의 극치가 되는 것). 짐승에게는 이 머리와 몸의 상호 작용이 기계적으로 되지민 자유의지의 인간인 고로 앞서의 설명대로 "언약(약속)"과 "계명"으로 작동되는 차이인 것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상대방중심의 철칙인 것입니다. 영원불변입니다. "자기 부인" 즉 상대방중심만 통하고 자아중심은 어떤 경우에서나 증오의 대상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하심이 주님을 위한 상대방중심, 그리고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이라는 자아중심의 가증스러움을 말씀하심인 것입니다.


2026년 2월 7일 토요일

21세기 하나님 기적의 장엄한 "구경거리"

언제든 되풀이 말해도  지겹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 우리 복음(구원의 희소식)입니다. 복음의 배경은 아담 범죄에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로 죽지 않아 우리가 "죽은 자"(마 8.22)가 아니라면 구원 자체가 필요 없었을 테니까. 고로 반복하지만  아담 범죄의 실상, 그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담의 "신령한 몸"을 빈번하게 언급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죽음"이면 죽음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이 "죽음"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자는 것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실제 죽음이 닥쳐야 비로소 죽음이 아니고  죽을 날("때")만 앞두고 있는  이 동물성 육체 자체를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인간이 애시당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나마도  정해진 날수를 따라  사람 목숨이 붙어 있다가  시람마다 꼭 그 시간에 임해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지부식간에 불현듯 당하는 시도 때도 짬도 없이 닥치는 변고, 이것이 죽음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이 21세기에 밝혀진 "3운법칙"에 의해서 "3위1체" 또는 노자/老子의 "3생만믈/三生萬物(이 역시 동일하게 "3위1체"를 의도적으로 지적함이지만)"의 3이란 숫자를 따라 엄밀히 수학적 규칙성에 의해 정해진 날수만큼만 사람(18,9세 넘은) 목숨이 붙어 있다가 사람마다 꼭 그 죽는 시간에 임해서 죽는 아주 희한한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는 다름아닌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생애를 낱낱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확증됨입니다.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인간 명줄이 하나님께 매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마 28.19)으로 계심에시 비롯되는 이 "3위1체"를 따라 만유 창조를 하시고 만유 운행을 하심으로써 이를 "만유의 법칙(the Universal Law)" 또는 "짝의 법칙", "3위1체의 법칙"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모법/母法으로 한 대표적 자법/子法이 3운법칙인 것입니다. 그래서 3운법칙과 3위1체 법칙은 상호 검증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이 두 법칙의 자체 증명이기도 합니다. 오눌날 영자역학 실험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의 2중성"과 "양자 얽힘, 영자 중첩"이란 것이 모두 이를 가리킴이 드러났습니다. 상보성 원리의 "상반/相反은 상보/"  또한 여기서 나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친히 계시는 모습을 근본 또는 기원울 삼아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그 충분한 논리성이 보장되는 설명이 됨으로써 확고부동의 토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만나서야 그 빛됨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생명과 죽음 사이도 마찬가지지만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어떠한 것인지도 우리는 모르고 있는 참담함에 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아담 부부의 애초의 "신령한 몸"을 체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만큼 실제 그 답답함이야 한량이 없습니다. 동물성 육체에서 오는 한계성(질병이라든가 불의의 사고 등)으로 그저 막연히 느끼는 정도입니다. 동물들처럼 힘이 있는 동안에는 뛰놀다가 기력이 차츰 쇠진하면 "이젠 죽는구나" 비로소 체감하는 인생이긴 하나 짐승과는 마땅히 달라야. 사람과 짐승의 기본적 차이는 무엇이냐, 창조주 하나님을 인지하는 영적 능력 유무입니다. 즉 영혼의 있고 없음입니다. 사람은 있고 짐승은 없습니다. 영혼이 있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교제가 가능하나 짐승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 세상이 죽음이다, 인생은 죽은 자이다" 하시니 그런 줄로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고 달리 생각할 것 없습니다. 단,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그 권위만큼은 절대적입니다. 즉 아무리 그럴 듯하고 화려 찬란한 삶처럼 보이고 인식되어도 죽음이라 하시니 죽음이지 그 외 다른 의미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은 자"라 말씀하시니 그래서 "구원 받으라"는 것입니다. 죽어 폐기되었으니 새로 창조하심을 받음입니다. 왜 즉은 자이냐, 하나님 창조물로서의 인간은 영생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자연계 육체로는 영생을 못합니다("혈과 육[현재의 인간 육체 즉 피와 살]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하는 것이다"ㅡ고전 15.50). 신령한 몸이라야 썩지 않으니까 영생하는 몸입니다. 신령한 몸은 자연계 물질의 몸과는 달리 그 초능력으로 자연계 물질의 몸으로도 자유자재 변환이 가능한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그러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면 완전히 뒤바꿔진 새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때 가서는 우리가 지금은 도통 몰랐던 영계(비가시성의 초자연계)의 모든 비밀도 죄다 드러날 것이나 그러나 그 전에 악령들이 전지구로부터 일소되는 과정 속에서 많은 악인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어 또한 사라져, 사람들이 마치 보석인 양 희소하게 되는 큰 재난이 닥칠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그에게 원수 노릇을 한 죄인들이 숙청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고로 이 시간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사람들의 대대적 회개와 믿음의 새 결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절대 다수 또는 거의 전부가 적그리스도 우상 앞에서의 경배를 거부한 대가로 그 숫자가 얼마가 되든 순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 다시 오심에 때맞춰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되어 <휴거>되는 이들과 합칠 것입니다. 휴거는 주님 다시 오시는 때 그 이전에는 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순교를 각오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3운법칙을 끝으로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습니다. 현재 이 썩는 육체의 인간 생애가 죽음을 맞는 그 <죽음의 때>가 철통 같이 3가지로 엮어진다는 사실까지 마지막으로 알게 해 주셨으니 과연 인류 6천년 역사의 끝간 데까지 왔습니다. 사탄이 지배한 역사의 6천년. 하나님이 새 창조의 작업을 계속하신 의미로 "6잂창조"와 같은 의미의 6천년이고 7천년째 되는 때 주님 다시 오심으로써 "안식"에 해당되는 "천년 왕국"입니다. 

더 이상 알 것도 없고 이로써 하나님의 살아 계심도 유감 없이 확증되었고 그 말씀이신 성경의 진실성도 아울러 입증되었습니다. 기도와 복음 전도에 오로지 힘쓸 일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훌륭한 도구(연장)인 이 3운법칙과 3위1체 등을 알게 해 주셨으니 이는 천군만마를 얻음이라 용기백배 하나님 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진군/進軍합시다. 

3운법칙과 3위1체를 오늘날 인생들에게 알리심에서 "21세기 표적과 기사"에 포함되는 것이 "한 때(1), 두 때(1×2), 반 때(1÷2)"로서의 예고/豫告인 것입니다. 즉 "천사가 가진 복음"을 이 마지막 때 전달함에서 그 "표적과 기사"로 이와 같은 도식/圖式까지 천사는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아래 그림). 3운법칙의 얼개 자체가 이 도안을 빼닮고 있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 역시 유사이래 최초의 희한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장엄한" 구경거리입니다. 모세의 홍해 기적에 못지 않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기에는 일반이니까!







2026년 2월 6일 금요일

아담의 범죄로 이런 인간고가 왔는데도 하나님만 원망했었네

 


"천사가 가진 복음" 태동/胎動의 산실/產室 북한교회



<"천사가 가진 복음" 태동/胎動의 산실/북한교회> 박해 역사 100년

북한 교회가 일본 강점기와 공산주의 정권 아래에서 세계 최장기간, 가장 극심한 핍박을 받아 왔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ㅡ
1. 핍박의 역사적 배경(100년 가깝다는 주장)
•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강요 (1930년~1945):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이에 저항한 주기철 목사 등 많은 신앙인이 투옥되거나 순교했습니다.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 교회가 이 핍박의 최전방에 있었습니다.
• 공산 정권의 종교 말살(1945~현재): 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선 공산 정권은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도구'로 규정하고 체계적으로 핍박했습니다. 6·25 전쟁 전후로 많은 성직자가 납북되거나 피살되었으며, 교회가 폐쇄되었습니다.
• 지하교회화(약 80년):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약 80년간 북한 교회는 지하로 숨어들어 '지하교회(카타콤)' 형태로 신앙의 명맥을 이어왔으며,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장기간의 박해>입니다. 
2. 세계 최악의 박해 국가
• 국제오픈도어선교회 등 전문 기관들의 조사에서 북한은 20년 넘게 세계 기독교 박해국 (부동의 1위) 위치에 있습니다.
• 유엔 보고서 등은 1950년대 200만 명이 넘었던 북한의 기독교 인구가 정권의 조직적 박해로 사실상 말살되어 극소수만 남았다고 지적합니다. 

일본 신사참배 강요(1930년대)부터 시작되어 1945년 이후 공산 정권의 지속적인 교회 탄압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현재까지 8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고 있어, '100년에 가까운 세계 최장기 핍박'이라는 표현은 북한 교회가 겪은 극심한 고난의 역사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타당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다름아닌 바로 21세기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산고/產苦의 산실/產室이었던 것입니다. 북한 교회를 위한 끊임 없는 기도가 우리의 본무/本務입니다.

 

진화론을 통째로 배척하는 이유

 


사람 사는 법ㅡ상대방중심

  우리는 <사는 법>을 모르고 여태껏 산답시고 살아 왔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되풀이해 강조해  온 대로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보는 눈이 앞쪽에만 있어 자기 앞은 보지만 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