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21세기 예언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14:6).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되는 것이니"(스가랴 4:6).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너는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성전 건축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놓는 주춧돌로 건물을 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초석)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으라' 할 것이다" 하셨고"(:7).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殿(성전)의 지대/
地臺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칠 것이다 하셨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 것이다 하셨다"(:9).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건축에서 벽이나 구조물이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10).

"내가 그에게 묻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스가랴 4:11).
"대답하기를 '이는 기름 바르심(성경에서 기름을 바르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나 성별된 장소를 구별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함)을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인, 소유주) 앞에 모셔 섰는 자이다'"(:1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줄 것이니 저들이 굵은 베옷(성경에 슬픔, 애도, 회개를 상징하는 거칠고 불편한 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할 것이다"(계 11:3).

위에 나열한 성경 구절을 종합하면, 이 21세기 "바벨론 탈출"(계 18:4) 및 이와 상대되는 "천사의 복음"(14:6)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바벨론 탈출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온갖 거짓맓>에서 벗어나 애초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다시 복귀함을 말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메시야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친히 가르치셨고 그 후 부활 승천하신 뒤 성령으로 다시 오심으로써(요14:16-18,23) 모든 진리(16:13) 가운데로 인도하신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가르치심>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12 사도들과는 일절 접촉이 없이(배운 것이 없이) 아라비아로 가서(갈 1:17) 거기서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하여, <성경을 통해(성경 외 달리 그 무슨 다른 방법으로든 아니하시고)> 충분히 모든 진리를 섭렵할 수 있게 하심이니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시어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외면하고 다른 소위 "직접 계시" 따위에 빠져드는 순간 마귀의 사이비 이단에 빨려 들어가게 되고 지옥의 냄새가 진동하게 됩니다.

바벨론 신학에서 가장 독소/毒素가 되는 것은 <겉치레의 "구원 확신"> 즉 구원 관련한 일정 공식 같은 것을 만들어 남발하고 세뇌시켜 무더기로 자기 기만에 도취하도록 만듦에 있습니다. 무조건 교회당에 와서 "믿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싸구려식 "영생 구원"입니다.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순종을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란 기괴한 이유를 들어 배제시키고 "로마서 7장"을 믿은 후의 바울 자신의 개인 체험이라고 믿게 하는 등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 없이 무턱대고 "나는 주님의 피 공로를 믿으니까 틀림없이 구원이다" 하게 만들었고 오늘날 적그리스도의 때에 와서는 난데없이 "방언" 소동까지도 벌이며 "나는 성령 받았노라"는 자기 도취에 빠지게 만드는 사탄의 악랄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을 "스룹바벨의 성전 건축"으로 예고/豫告한 이유입니다. 이제 비로소 성령께서 계시게 되는 성령의 성전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산"이라 함은 온 세상을 지배해 온 바벨론 신학을 말하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 운운"은 그동안 이 거짓됨에 가려졌던 하나님의 복음 진리가 "천사의 복음"으로 오늘날 광명을 다시 발하게 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감람나무, 두 증인 등 "둘"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는데 성경 전권을 통해 보기 드문 것으로 "마지막 때" 예언서인 스가랴와 계시록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아 3운법칙 등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가리킴으로써, 오늘날 "천사의 복음"으로 나타나신 말씀의 시대적 배경을 특별히 강조하심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오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2025년 11월 25일 화요일

21세기 성경적 경고 (2)

"세상 삶을 철저히 부정/否定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로 오해할 것이 아니라 이제 알고보면 전혀 무의미한 동물성 육체에 의한 상상하기조차도 끔찍스러운 현재의 소위 "삶"에 매임으로써 영원한 영광의 찬란한 본격적 삶을 대신 놓쳐버린다면 그보다 더 통탄스러운 일이 또 있겠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인 것이다.


둘 다 누리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무리요 억지인 것이다. 때문에 헛된 것을 위하여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것>으로밖에는 더 이상 취급되지 않음을 알아야. 사람들이 헛된 생각과 목표에 매몰되어 갈팡질팡하는 비극적 구렁창에서 그들을 구출해내는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심히 바쁜 경황에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마음이 나누어져 성경의 경고대로 분산되다니! 시간을 낭비하다니! 절대로 용납될 일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의 법칙에서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이요 시간과 정력 일체인데 마치 내것처럼 내 마음대로 하다니! 구원 받은 사람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신 순간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ㅡ요 20:21) 터에 더 할 말이 있으랴.

영원히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는 영원 세상이다. 자아중심의 세상은 이 한 때만으로써 영원히 끝나고 그 후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불 못에서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고 아니면 캄캄한 암흑 천지에서(시뻘건 불꽃만 한 곳에 이글거릴 뿐 그 주변은 전부가 칙칙한 암흑 천지이니까)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토해내며 슬피 울고 고통 중에 이를 갈아부치는 멸망 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자아중심이다.

이런 자아중심의 현재 세상에서는 살고자 하는 자마다 나 자신도 자아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자아중심은 멸망뿐이다. 이세상은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하는 것을 바울 사도는 "아내/남편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남편에게서 놓였느냐, 남편/아내를 구하지 말라, 아내/남편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은 매입해들인 물건이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는 말로써 표현했을 뿐이다.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왔다면 그 후 종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어도 그냥 종으로 지내라 한 것도 당시 노예가 들끓는 사회에서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활용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인으로서가 아닌 같은 종으로서, 더 친근하게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로지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 물심 양면으로 쏟아 부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고 구원의 복음 전달 그리고 구제 등 선행에 힘씀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써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는"(고전 10:33) 것이 만사/萬事 그 표준 척도인 것이다. 이생에서나 내생에서나 항구불변의 상대방중심이다.

우리가 망각하기 쉬운 21세기 성경적 경고 (1)

여기 오늘날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성경의 경고가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결혼하지 않은》나와 같기를 원한다. 그러나《강요함은 아니니》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어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7,8).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7:20).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주님 섬김에 이용하라)"(:21).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처녀《우리말 번역이 잘못되었으니, "처녀"가 아니라 남녀 불문 동정/貞(virginity) 상태를 의미》에 대하여는 내가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는 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니> 나는 너희를 아끼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다. 너희가 염려(심적 분요/갈등) 없기를 원한다(주님을 섬기는 일에).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분요(심적 갈등)함이"의 잘못된 표기》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다. 누가 자기의 동정《"처녀 딸"이 아님》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여길 때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할 일이다. 이는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결혼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자기 동정을 지키기로》 마음에 작정해도 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자기 동정을 지키지 않음도 잘하거니와 자기 동정을 지킴은》더 잘하는 것이다"(ㅡ:38).

세상에! 자기 처녀 딸의 혼사/婚事를 부모가 결정 간섭하다니! "하나님 믿는 자들은 모두 이렇게 미개야만인의 생각도 하는 것들인가" 하지 않겠는가! 성경 번역자들이 이런 양식/良識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니!

성경에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온 경우라면 향후 그 종노릇을 벗어나 자유인이 될 기회가 오더라도 그냥 종노릇을 계속하라는 뜻이니 자유인이 아닌 종의 신분이라는 부자유함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특수 상황을 고려함이 하나님 섬기는 자로서 충분히 고려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이 세상 삶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 섬김이 구원 받은 자의 제1차, 2차, 3차 목적이니까!

필자도 이 성경 대목을 읽으면서 혼자 지낸다는 바울 사도의 논리에 동조하고 그래서 88년간의 "독처"로서 동정을 지키고 있다. 생활상 불편은 그렇다 치고 어쨌거나 오늘까지 왔는데 또 한 가지는, "바울 사도의 충심 어린 권고를 나도 교회 앞에서 한다면 바울처럼 자신도 그러해야 즉 솔선 수범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당장 적그리스도가 문 앞에 이르고 환난 날이 당시 코 앞에나 닥친 것처럼 얘기하니 혹자 이를 바울의 착각이라 탓할지 모르나, 바울 등 사도들의 서신이 성경으로 인정된 만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러한 경우 예언적 요소를 반드시 지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21세기 오늘날도 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일진대 우리에게는 딱 맞아 떨어지는 <예언>의 경고가 아닌가. 

먼저 <기도자>가 되지 않고는 <설교자>도 영적 놈팡이(직업 없이 빈들거리며 노는 남자)에 불과

 

(여기 "기도자"는 본격적으로 기도에 힘쓰는 자를 의미)




2025년 11월 24일 월요일

하나님 그리시는 그림으로서의 21세기 표적과 기사

 전에도 설명했지만 3운법칙, 3위1체 법칙(짝의 법칙) 등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그림 설명"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로써 천사가 다니엘에게 알려 준 3위1체 법칙 도식/圖式 자체가 그러하니까. 왜 "그림"이냐 하면 초등학생이나 그런 수준의 일반인에게 만유의 기본이 되는 엄청난 사실을 알림에는 단순한 그림 밖에는 없으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남녀노소 유식무식을 막론하고 만인 상대이니까! 인간 생애가 56, 57개 마디(절/로 나누어지는 모양새의 3운법칙 생애 도표도 훌륭히 그런 맥락입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천사의 말 자체가 회화/繪畫적인 기교/技巧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21세기 오늘날 "천사의 복음"(계 14:6)을 상징하고 이와 직결됩니다. 이 검증 작업의 핵심은 초등생의 산술(셈하기) 수준이면 누구든 얼마든 역사적 인물들의 생애를 3운법칙의 3가지 형태 분류를 따라 분석하여 3운법칙의 진위/眞僞 여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각종 진리와 사실은 검증 방법이 다른데 21세기 짝의 법칙 등은 이러한 독특한 방법이라는 그 차이뿐입니다.

항상 강조하는 대로 만인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친히 나타내시는 솜씨이실 수밖에 없으니 이 자체가 실로 기적으로서 가히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경지라 할 것입니다. 너무나 생생한 "표적과 기사"(요 4:48ㅡ"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이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도, 희한하게도 인류사 최초로 <그림으로 나타내시는> 표적과 기사>.

21세기 "마지막 때" 경이/驚異로서, <그림>으로서의 "표적과 기사". 그 대단원의 막이 이와 같이 화려하게 내려집니다. 온 세계 구석구석이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은혜의 최종적인 복음의 광채입니다. 우리 모두 주체적으로 참여합시다! 하나님의 분부이십니다. 




2025년 11월 23일 일요일

계시

하나님은 우리가 시각 청각 등 5감으로 인지 인식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피조물이 아닌, 만유에 충만하신 창조주이시기에 "하나님은 영"(요 4:24)이신 때문입니다. 같은 창조물이라도 영물/靈物들만은 그 <초능력>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아담 역시 그러하였고, 그에게서 나는 모든 인류 역시 아담과 똑같으므로 영적 존재로서 그러한데, 단지 몸만은 아담 범죄로 동물성 육체로 전락한 죽은 자가 돼버려 범죄 전 아담의 초능력을 항구적으로 상싫한 결과 하나님마저 인식 못하게 되었다는 사연.


그래서 필요하게 된 것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요 4:48)이라 친히 말씀하신 대로의 각종 초자연적 현상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쇄술도 발달하고 영상 관련 기술도 괄목할 만합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면 세계 방방곡곡에 삽시간에 전파됩니다. 적그리스도 "악한 자"가 이런 수단을 동원해서 하나님으로 자처하여 온 세상을 속이고 일거에 장악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오늘날 "마지막 때" 시급한 범세계 "바벨론 탈출"(계 18:4)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표적과 기사"는 무엇이냐. 기적이란 것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나타냄이니 바꾸어 말해 그 기적과 더불어 나타내어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라는 확인의 표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 저들(사도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시어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던"(행 14:3) 것입니다.

오늘 21세기 말씀 전파는 "바벨론에서 나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분부에 따른 것이므로 더욱 중요한 국면을 맞습니다. 거의 2천년간(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탄식한 대로 초대교회가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바벨론 신학을 신속히 마귀가 퍼뜨린 까닭에) 동안 세상을 장악해 왔던 사탄의 온갖 거짓말을 들추어내는 미증유의 대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운법칙을 비롯하여 그 관련된 모든 것을 "21세기 하나님 친히 증거하심의 표적과 기사"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항 대로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나타냄이라, 그 기적과 더불어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라고 확인해 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바 절대적 필연성이라 할 것입니다.

단지 차이는, 종래의 표적 기사는 모세의 지팡이든 모세 자신이든 이를 나타내어 주게 되어 있는 매개체가 필요한데 비해, 이 21세기 경이/驚異는 전혀 그런 것과 무관하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 누구든지 이를 담아 날라 주고 퍼뜨려 주면 끝나는 초대강력의 폭발력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별히 3운법칙은 하나님께서 이를 정하신 이유와 시기(때)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는 놀라운 측면이 있어 압권이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고로 바꾸어 말하면 이를 홍보하는 각자가 이 일련의 사실을 직접 알아낸 발견자로서의 위치라는 점을 확고히 단언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리고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일개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연구 결과도 아니고 지적 능력과도 전연 무관합니다. 하나님 친히 계시해 주시니까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뿐이니 어느 누구든 그 계시의 대상자이지 어느 한 개인에게 특정적으로 계시해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라 전제하고 마치 자신이 처음 발견자인 것처럼 인상을 주는 것이 되어도 전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 누구나 평등하고 동일하니까! 한 아버지가 여러 아들을 두고 있어 똑같게 상속시켜 주는데 여기에 그 어떠한 하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아들을 불러 모으시고 알려 주시는 것이 모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제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눅 10:22).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21세기 예언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