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5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마 6:13).

 
오늘날 인간 세상의 모든 부조리, 불합리, 일체의 악과 죄가 아담 범죄 오직 그 <하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아담만 범죄하지 않았다면 즉 불순종에 빠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하여 유의하고 사랑했다면, 오늘날 죽음과 같은 비극은 절대로 생기지 않았음을 강조하여 깨우쳐 주지 않는 한,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함이 없이는 절대로 "영생, 구원, 운운" 하지 말아야. 전도도 그런 내용이어야.

반드시 "(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2)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의 순서를 따라서만 복음을 제대로 전달해야. 이 말은, 예수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마다 향후로는 일절 아담처럼 죄 짓지 않아야 하고, 불순종하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일구월심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

왜냐 하면 그렇지 않고는 "회개"의 의미가 없으니까. 회개가 없이는 "믿음" 자체가 무의미하고 가장 무서운 <자기 기만>으로만 그칠 것이니까. 오늘날까지 바벨론 신학에서 마귀는 교회를 속여 "구원"을 주먹구구식으로 즉 아무 논리도 없는 사탄의 말장난으로만 두루뭉술 뭉쳐 주입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경고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말씀을 받은 이들만은 그 멸망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왜냐면 나를 죽도록까지 사랑하셨으면 나도 그 분을 죽도록 사랑하여 그 모든 뜻과 말씀에 순종함이 마땅하다는 본성적 양심의 소리는 비록 아이라도 다 들을 수 있기 때문.

그렇지를 않고 단지 '그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서의 영생 구원'이라는 대목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 성향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외 없이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멸의 길에 빠져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설명하듯이 모든 인간이 아담 범죄로 비록 "죄의 몸"이 되어 있기는 하나 "양심"(롬 2:15/요 8:9)이라는 하나님이 설치하신 기계 장치만은 불변으로 작동하기 때문(가룟 유다의 자살ㅡ마 27:45).

고로 현재의 우리 육체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의 몸>도 아니고, <원래의 모습대로 나타나 있을 인간 세상>도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구원 받는 일에서 맨 첫 걸음임을 알아야. 아담의 불순종 즉 범죄로 인하여 애초의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을 빼앗겨 잃어버린 결과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즉 들의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다"(6:28,29) 하신 것.

아담 범죄로 땅까지 저주 받아 오늘낧에는 동식물의 많은 종류가 지상에서 사라져버렸고 그 아름다움의 빛이 바래진 것이야 사실이지만 인간보담은 정상인 것이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라고 찬송을 부르지만 실상인즉 저주 받아 퇴색된 삼라만상이다. 비정상인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 그리고 세상이다.

워낙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창조 솜씨이시기에 이 정도나마 아직도 그 미려/화려한 자태의 흔적을 갖추고는 있는 만물이다. 자연계보다 더욱 상위급에 속하는 에덴의 신령한 초자연계 속성을 가리켜,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하는 문장 표현으로 정평이 나 있는 성경마저,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창 2:9)라 했으니까!

하나님의 애당초 영광의 잔재/殘滓에 불과한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롬 3:23) 상태의 살풍경(아무 볼품 없이 삭막하고 쓸쓸한)에 찌든 이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 구원의 지식에 접하기 시작하는 최초의 일보인 것이다. 그 처참한 피폐상은 현재까지의 인간고/人間苦가 충분히 대변해 준다고 할 것이다.

죽음과 썩음의 자연계 물질의 육성/性으로 인한 인간고의 화신/化身인데다, "죄의 몸"(롬 6:6)으로서의 죄성/性까지 겹쳐 영적 정신적 아수라장의 비극에다가, 또한 악령들의 횡포와 철권 통치에 꼼짝없이 놀아나는 판의 현실이니, 이성 없는 금수/獸의 신세가 외려 부러울 지경이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심으로, 창세 전부터 정하시고 만유의 영원불변 철칙으로 운영하고 계시는 생명의 법칙(창조주 하나님은 그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위함으로 자기 자신을 결코 위함이 없는) 따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친히 사람되어 오셨고, 그 몸 바쳐 자신을 내어 주시고 나 위해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이 벌레 같은 나를 살리셨다. 이 망극하신 은혜로 사랑의 어버이 하나님 품속을 알게 해 주셨으니 영원한 감사 찬송을 영원토록 영원토록 올리옵니다.



(아래 <링크>를 충분히 누르면 "열기"가 나옴)


주기도문 송...바리톤 김주택
https://youtu.be/XVtZmktjhjs?si=1ovDmbPpNKSPGcCU

주기도문 송...Andrea Bocelli
https://youtu.be/Tf1wtzOoXDA?si=TiXmjypyhDpB4JXm

주기도문 송...Jackie Evancho
(당시 11세 미국 소녀)
https://youtu.be/Vg2AsS4CErM?si=fwimvoXKt1w8oap9


2025년 10월 14일 화요일

주기도문 명상 (8)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으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自取하게 될 것이다.


"관리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그러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명령이나 부탁을 이행하는 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다.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怒(공분/公憤; 공적인 일에서의 분노)를 인하여만 아니라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公稅(국가/지방 공공단체가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기 위해 국민/주민으로부터 강제 징수하는 국세/지방세 등)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는 것이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 받을 자에게 공세를,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1-7).

예를 들어, 도둑을 붙들었으면 이 사람을 무조건 용서해 줌으로 방면해야 하느냐 아니면 국가가 처리하도록 조처해야 하느냐 등의 양자택일이디. 사회 공동체 <법정의/正義 및 공공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내게 잘못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상충/相衝할 필요는 없다.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로 작정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8:28) 인도하실 터이므로 이에 순종하면 헷갈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나름대로 명분을 내다걸어 교회를 탄압하고 이를 위해 법을 정해 이를 무자비하게 시행할 때는, 그 선악이 분명히 가려졌으므로 그런 악법을 따를 의무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함과 같다. 국법을 준수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그 이름을 앞세워 따르는 것이므로. 때문에 "내가 첫째로 권하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1-4) 하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 11:4). 이는 <우리가 끊임 없이 죄를 짓으니까> "그 죄를 용서해 주십사"가 아닌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죄 짓게 함)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다"(요일 3:8,9).

과거의 모든 죄 다 용서하심 받아 더 다시는 나를 위하는 자아중심이 아니지만, 오늘이라도 누군가가 내게 해를 입히는 것을 못봐주고 마음 속에 재어 두어 악감정을 풀지 않고 서운함이나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 <지난 날의 모든 용서하심이 일체 백지화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5) 하셨기 때문.

이런 경우를 말씀하심이다. 예수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네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눅 24/34) 하시고 본을 보이셨듯이. 스데반이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어,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말을 마치고 잠들었다"(행 7:60) 했듯이.

"천국은 그 신하들과 채무 결산을 하는 어떤 임금과 같으니, 정산할 때 1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는데 갚을 것이 없는지라 왕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고자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조금 참으시면 다 갚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고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신하가 나가서는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불과하나,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큰 액수)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하니 그 동료가 엎드려 빌며 '참아 주시게, 갚겠네' 하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 동료들이 이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게 여겨 왕에게 가서 그 일을 다 말하니 이에 왕이 그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으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어버렸다"(마 18:23-34) 하심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6:25). 각종 손실을 당하고 재해를 입는 등의 이 세상 모든 일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등의 세상 스쳐 가는 수준의 자질구레한 잣단 것일 뿐이다. 우리가 구원된 이후에도 줄곧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세상에 "보내심 받아"(요 20:21)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함 오직 그 때문이다. 하나님 모르던 과거 시절처럼 세상 계속 살라고 하심이 아닌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목숨"이요 "몸"이다. 멸망할 것을 다시 살려 주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안겨 주시고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이 되게 하신 터에, 이 이상 더 우리가 바랄 것이 무엇인가. 황송하옵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여, 은혜로 얻은 생명, 그 <자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이에 비하면, 이 넘치는 은혜의 영생의 희망과 동경하는 바 그 모든 영광의 기대에 비하면, "원수 사랑", "악을 선으로 이김" 등이 무슨 대단한 것도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뿐이다. 세상 자체가 죽음 일색임에도 마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는 것", "삶"으로 오인하는 착각에 휩쓸리다보니, <억울하게> 죽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지, 남 밑지지 않게 세상 살겠다는 이전의 철부지 욕망만 툴툴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먼지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니까. 실상이 그러하니까. 알고 보면 신기루에 불과함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이 하나님 교회에 사탄의 핍박과 환란, 각종 탄압이 가해질 리 만무함을 알아야.  무의미와 허무/虛無 일색인 세상이기에 이에 격이 맞도록 가해지는, 아니, 실제는 엄청난 전화위복의 하나님 은혜로서의 이세상 핍박과 환난(재난)', 환란(재앙)인 것이다.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닌 것이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명'과 '사망' 사이의 격차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물은 곬으로 흐르듯이, 구름은 하늘에서만 떠돌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움일 뿐이다. 오직 <인식 전환>이다. 제대로 인식하고 의연히 말씀대로 따라가면 거칠 게 없다. 죽음("육의 몸", "낮은 몸")은 죽음대로, 생명("영광의 몸", "신령한 몸")은 생명의 참 모습 그대로 직시하여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보 일보 전진해야. 세상은 "만질 것도, 붙잡을 것도, 맛볼 것도 없이, 쓰는 대로 <부패/썩음>"(골 2:21,22)으로만 끝남뿐이니까.


2025년 10월 11일 토요일

주기도문 명상 (7) ㅡ "<나의> 하나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실 것이다"(야고보서 7:8). 우리 각자가 자기 아버지 하나님/예수 주님을 모시고 있는 까닭에 여기서부터의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시다>고밖에는 더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다. 필자 본인이 독자 어느 분이 모신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 모시고 있는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내가 가까이 하는 대로 각자 모신 하나님이 표현되시기 때문이다.


똑걑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하나 사람(구원된)마다 <자기> 하나님을 모시고 있음이니 이것이 "성령으로 계심"의 의미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니"(요 16:7), 이것이 그 뜻이다. 즉 "유익하다" 하신 의미이다.

세계 어디서든 <장소와 거리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든 <인종과 그 사람됨됨이를 막론하고> 똑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임마누엘"ㅡ"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다)>으로 계시는 까닭에 그러하고 또 동시에 처음부터<"영이신 하나님"ㅡ요 4:24>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러하시다.

이 게시글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웃 사촌"을 언급했듯이 사람으로서의 특성 그대로이시기에 그러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만유 안에 계시어 충만하시므로 얼마든 각자 안에 오심으로 함께 하시기에 <각자가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계시는 까닭에 그러한 것이다.

시편 139편이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예언함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합니다"(시 139:6)로 시인/詩人이 노래한 그대로다. 아무리 남이라도 자주 만나 교류하면 친형제간보다 가깝지만 그러한 "사귐"(요일 1:3,6,7)이 없을 때 친형제라도 남보다 못함과 같음이다. 이와 같은 <사람 사이>이기에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으로 착각하는 이기주의적 자세로는 영원히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없음을 엄중 경고하는 바이다.

 

주기도문 명상 (6) ㅡ 구원의 3단계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사람이 동물성 육체로 전락함으로써 자초하게 된 재앙은 1). 죽음과 <일체의 인간고/人間苦> 초래, 2). 자아중심이 선천적 본능이 되어버림으로 인해 평생 불가항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롬 8:2/7:24)의 철통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됨, 3). 아담의 범죄는 본의 아니게 사탄 마귀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른 결과가 됨을 인해 사탄의 인간 세상 통치/지배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3중고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논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된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이유다. 상대가 용서를 빌든 않든 나로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우리 주님처럼 또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팔매질에 숨을 거두면서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는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곧 "저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저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ㅡ눅 11:4)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5)이다.

아담 범죄로 인한 이 육의 몸을 인해 우리가 선천적인 죄인 즉 무조건 멸망의 운명일 뿐 아니라 악령들의 쉴 새 없는 시험을 받아 그 충동질에 의해서도 범죄를 하게 되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사탄처럼 스스로의 선택을 따라 된 악인도 있겠지만 그런 사정은 하나님만 아시지 우리의 소관사는 아니다. 우리는 갑, 을, 병, 정 가리지 않고 용서해 줄 따름.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라"(요 12:47)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20:21)을 받은 것은 새상의 악을 처단하는 심판자로서가 아니라(하나님은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심판권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마 7:21) 위함이니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 즉 구원의 복음 말씀을 듣고 믿어 온전한 순종에 이르도록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함"이 유일의 관심사일 뿐이다. 이 점에 변동이 있을 수 없다.

고로 문제 해결은 간단한데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가? 천만에. <죄의 몸>으로서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가 손 끝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실상을 모르는 유대인들이 그래서 무턱대고 "선을 행하겠다" 하고 "순종하겠다" 하니 행함으로(행위로)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바울 사도는 거듭거듭 강조하며 깨우치려 한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다.

왜? 하나님 친히 그 새 창조로 우리 위해 다 이루심이기 때문에! 창조는 홀로 하나님의 역사/役事이시지 피조물이 끼어드는 법이 있던가? 창조는 창조주만 하시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새 창조"의 일을 하시는가? 친히 죽으심으로써다. 우리 위해 친히 죽은 자가 되심으로써다. 죽음 가운데 머물러 무덤에 드신 다음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다.

그러나, 잠깐! 죽으시기만 하면 (구원의 역사가) 끝나는 줄로 알고 <성경읗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무식한 말을 하기에 바쁘지만, 그 역시 "천만에"다. <부활하심>이 덧붙여져야 나도 "죽은 자"를 벗어나 비로소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거의 모두 이 "부활"을 간과하는데, 그리 되면 "죽으심"마저 무의미하게 됨을 왜 진작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죽으심>은, 아담 범죄로 인한 동물성 육체의 최종 마감/종결, 그리고 또한 "죄의 몸"이 멸절(롬 6:6)됨, 그리하여 향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시작, 그리고 지나간 모든 죄 용서하심의 실질적 바탕이 됨이나, 그렇다고 구원과 직결되지는 않음이니 오직 <전/단계>일 따름이다. <중간 단계>로 넘어가는 엄연한 순서가 있으니 그것이 <부활>이다.

전단계는 이 후속 단계를 위한 준비 단계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부활은 <최종 단계>를 위한 제2 준비 단계다. 뻔하지 않은가ㅡ'죽음'으로써 일이 저질러졌으니 의당히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써 마무리되어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아무리 유의미한 것이라 해도 그저 죽음으로만 그칠 뿐. '부활'로써만 그 <유의미>가 살아나는 것.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바울 사도는 이를 또 거듭 강조한다. 마치 오늘날의 혼돈과 혼탁을 예견이나 하듯이ㅡ.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니(:17,18). 보라! 죽으심만으로는 우리 구원이 될 수 없음을 말하지 않는가! 부활이 떠받쳐 주어야 비로소 완결임을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읗 모르는 사람들"이라 했고, 이런 사람들이 버벨론 신학의 혼돈과 혼탁의 주역/主役들인 것이다. 왜 성경을 모르느냐,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계시"가 아닌 엉뚱하게도 "학문" 취급하여 남들이 써놓은 주석서 따위만 붙잡고 늘어지려 하니 잘못 해석은 고사하고 무엇 풀이한 것이라도 있다 싶으면 불문곡직 대책 없이 줄줄이 도미노식으로 따라 넘어가는 판이다. 한 번 그렇게 쓰러지면 반영구적으로 다시는 일어날 줄 몰랐던 것이 바벨론 신학이었다.

우리 위해 즉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이루셨다고 그것이 곧장 우리 구원으로 정착하고 일단락되는 것이 아니다. <전단계>, <중간 단계> 다음이 <최종 단계>다. 이 최종 단계야말로 오늘날까지 감추어져 온 제2의 핵심인 것이다. 제1핵심은 물론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가 없으면 마치 음식은 장만했는데 이를 담아 먹을 그릇이 없음과 같이 된다.

성경을 읽으려 하지 않고 엉뚱한 데 가서 서성거린 결과로 이 중요 부분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성경을 그저 읽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 말씀하셨듯이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마음의 자세로 임해야 "성령의 친히 가르치심"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숨기신"(눅 10:21 것인데 어찌 알 수 있으랴.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막 7:6-8) 하신 그대로다.

그러면 그 <최종 단계>는 무엇이냐. 아직은 말하자면 그림의 떡으로만 그쳤을 뿐인데, 실제 떡으로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무엇이냐. 그림은 떡이 실재한다는 그 설명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 내 것으로 적응되어야 명실공히 구원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주님 친히 나와 "하나"(요 10:30)되심으로써 가능하다. '사람'으로서 나 위해 죽으시고 나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이제는 '하나님'으로서 내 안에 내 영혼처럼 되어 오심으로써만 더 이를 데 없는 완벽한 "하나"로서의 구원 그 구조/체제다. 즉 더 이상 '그림의 떡'이 아니다. '떡' 자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부터 "3위1체"의 "하나"로 계셨고 이렇게 계시는 모습을 따라 이를 만유 기본 원리로 정하시어 만유를 창조하셨고 주재 주관하시므로 인간 구원도 이 이치대로 하심이 당연 사리/當然事理다. 이 "하나"로서의 모습이 성령이신 것이다. 이 "이름"(마 28:19)은 고유명사처럼 활용되지는 않고 성부 하나님의 영도, 성자의 영도 다 성령이시나("하나님은 영"이시므로ㅡ요 4:24), 특별히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시대와 달리 일반적으로 성부와 성자로 "하나"되어 계심을 의미함이다.

이렇게 예수 우리 주님 친히 성령으로서 믿는 각 사람에게 임하심이니, 엄밀히 말해 이것이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가 이루어짐이라 <최종 단계>로서의 우리 구원인 것이다. 물 세례(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되므로 이것을 "구원 받음"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성령의 세례",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직접 영접함"이 필수가 됨이니,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바벨론 신학에 매여 이 성령 받아 모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니 오늘날에서야 밝혀진 것. 다만 유의할 것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경고하신 대로, 어린 아이의 특징은 절대적 신뢰(믿음)와 사랑(순종)에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필수 지식이 없어도 이상 두 가지만 겸비해 있으면 성령께서 예외 없이 임하여 오셨고 구원 받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고를 하셨던 것이나, 이런 지식도 없고 "어린 아이 같음"도 없을 때 진정 재앙만이 있었으니ㅡ.

이와 같이  '짝의 법칙'에서는 이 "하나"(요 10:30)됨이 "3위1체"에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음양론에서는 음양조화라고 부르면 되겠고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 "얽힘"이나 "중첩" 현상이 이에 해당된다. "3위1체"에서 "3위/三位"에 해당한다. 짝을 이룬 둘이 따로따로 놀지 않고 "하나"를 이룸으로 만물의 대칭적 아름다움(對稱美)도 보장됨이니, 이같이 "상반/相反은 상보/補"로 종결되고 영원 불변. CONTRARIA SUNT COMPLEMENTA.

이와 같이 동물성 육체(이 "동물성 육체"라는 표현에 대해 혹자는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나 우리는 이 진실을 강조하고 우리 자신을 세뇌시킬 필요가 있어)로 인해 또는 악령들의 충동질에 넘어가 불가항력으로 모든 인류가 악인 행세를 하는 등 난장판을 이루니, 다시 말해 "알지 못하고"(눅 23:34) 행하는 악이니까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모두를 용서해 주어야 마땅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며 선으로, 선행/善行이라는 무기로 무찔러 장쾌하게 이겨야 하는 것.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의인 아벨을 죽인 가인의 죄를 벌하시는 대신 도리어 불쌍히 여기시어 그 소청대로 이루어 주심으로 본을 보이셨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심판자로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며"(골 1:24)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주님처럼 사람들을 멸망에서 건져내려는 일편단심뿐인 것. 구약시대의 권선징악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상벌/賞罰 관련한 인생의 초보 학습인 것이다. 신약시대에서 아담 범죄 등 모든 실상과 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짐에 대한 사전/事前 교육 차원.

우리 구원을 <전단계>, <중간 단계>, <최종 단계>로 나누어 고찰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그저 그런 관념상의 교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의 실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미쳐 갑은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만을 위하는 생명의 법칙에 그 운영의 운명이 직결되어 있음을 강력히 경고함에 목적이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고전 4:20)이다. 


2025년 10월 8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5)

1865-67, 스웨덴 대기근


히브리서는 모세의 특징을 "<
보이지 아니하는> 분(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히 11:27)는 것으로 규정했다. '은혜의 성령 시대'에 있는 우리들로서 특별히 이 "마지막 때" 주님 다시 오시는 시점 우리라고 이에 뒤질 수 없고 모세보다 못할 수 없다. 21세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크신 은혜를 입고 있는가! 2천년간 거의 무지의 황무지 상태에 있던 "3위1체" 하나만 해도 그렇다. 양자역학이라는 최신 과학 지식에 힘입어 그 소상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된 우리들 모두가 아닌가! 그만큼 지식면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워졌고 친숙해졌다는 의미다. 가일층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유감 없이 세계 만방에 전달하는 매개 도구로서의 우리가 되어야.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히 사람이 되어 오시기 위해 완전히 여자의 태/를 통하여 오셨다. 따라서 '몸'은 사람이시고 '영'으로만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은 영"이신지라 하나님으로서의 원래 모습은 그대로이시고 변함이 없으시다. 단지 이제는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그 차이만 있다 할까.

또 하나 우리와의 약간 차이는 우리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우리처럼 성별/性別의 지배를 받으신 것이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 천사들과 똑같은(눅 20:35,36) <완전한> 모습으로 계심이니, "완전하다" 함은 "영광의 몸"(빌 3:21), "신령한 몸"(고전 15:44)을 말하는 것이다.

범죄 전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는 현재와 같은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초자연계 초능력의 광채로 둘러 쌓여 현재의 동물적 육체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성별의 의식이 없었다. 지금은 동물적 육체의 근성으로 원시적인 식욕, 성욕에만 매달려 삶의 낙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는 듯이 되어 있지만,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는 그런 단세포/單細胞적 취향 대신 진정한 생명의 멋과 맛을 한도 없이 누리는 황홀경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낙의 연속이었기 때문.

원래 아담 홀로였을 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독생자를 "낳으실" 때와 같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주려 하심이었지, 자녀 생산과 번식이 목적이 아니셨던 것이다. 만일 그러했다면 아담 창조를 끝내시기가 무섭게 곧장 여자를 창조하셨겠지만 그러지 않으셨으니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야 여자를 만드시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반드시 자연계 생물과 같은 암수 양성 결합으로써가 아닌 초능력으로 인간은 생식하고 번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담 범죄로 동물성 육체가 되면서 동물과 같은 형태와 양식으로 전락한 것이다. 벗은 것 즉 벌거숭이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창 2:25/3:7,10) 본능 작용이 여기 기인한다. <죄의식>과도 연관되어 <비정상>임을 자각함에서 유래된 것이다.

동물적 육체의 "낮은 몸"으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초능력으로 진행되는지라 아담 부부에게서 나는 자식들은 성별 없이 "천사와 동등"(눅 20:36) 급의 몸으로 생산되었을 것이요 아담 부부 역시 단순한 남녀 결합이 아닌 "신령한 몸"다운 초능력적 조처로 천사들의 각종 도움을 받아 자식들을 세상 밖으로 얼마든 배출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초능력"이라 함은 자연법칙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본디로 돌아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3)에서 3위1체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 관련해 조금 더 논한다면, 성경에 인간을 창조하시는 대목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26)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 하나님 즉 두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창조의 역사에서 최초의 "짝"을 이루심이다. 그리고 짝의 법칙(3위1체 법칙)의 시발점/始發點이 되신 것이다. 짝을 이룬다는 것은 짝을 이룬 그 둘이 "하나"(요 10:30)가 된다는 의미로서 성경에서 뜻하는 <3위1체>라, 만유의 근간이 됨을 오늘날의 물리학이 밝히고 있음이니 이는 시의적절하고 또한 당연한 귀결이다.

이 "3위1체"를 만유 창조와 운영의 근본으로 삼으신 것이다. 미립자의 미시세계에서 그 명확한 증거가 20~21세기 오늘날 양자물리학(양자역학)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이 사실 즉 "3위1체"를 기반으로 하신 우주 만상의 주재/主宰를 밝혀,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 계심을 최후 확정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3운법칙(fashomo/파쇼모)의 기반이 바로 이 3위1체의 법칙임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자께서 만유를 창조하셨고(요 1:3/골 1:16) 성부께서는 "그(성자)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히 1:2). 성부, 성자 두 분이 "하나"(요 10:30)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하나"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서 성질이 정반대의(서로 짝을 이룬) 두 개념이 하나의 개념으로 융합해 있음을 이중슬릿 실험으로 입증한 오늘날의 양자역학이 있는 것이다. 성질이 상반/相反이다보니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다. 그러나 "하나"로서의 상보/인지라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이런 2중성을 띠고 있는 구조다.

따라서 그 특징은 성경적으로 잘 표현되고 있으니,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성자/로 나타나신 것으로 인식해도 좋고 동시에 성부/聖父로 인식해도 옳다. 이는 주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씀으로써 충분히 확인되었으니 앞글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요 14:9).

이와 같이 "하나"로서의 '머리'와 '몸'은 확고부동의 삶의 이치요 둘은 불가분인지라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1억의 1억배가 모여 있어도 마치 한 사람과 같은 "하나"라는 가장 이상향적 법질서가 확립되는 세상이 꾸려지게 마련이다. 이렇듯이 창조주 하나님 친히 내게(우리에게)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시므로 이 영광스러운 생명의 법칙에서 우리의 가장 첫째 가는 소원의 기도도 하나님을 위하는 하나님 관련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소원, 간구, 희망 사항 등 일체가 그 첫머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되심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과, "하나님의 나라" 임함과 관련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순서다. 이렇듯이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인 짜임새로 되어 있기에 이 하나님 뜻을 따르기만 하면 즉 그 "뜻을 행하면"(마 7:21) 되는데도 자아중심으로 용은 아담을 시기하여 제거하려 헀으며 아담 부부는 머리이신 하나님 및 그 말씀을 소홀히 여겼으니 그 대가/代價가 오늘날의 비극.

그리고 "죽게 된다" 하신 경고대로 인간이 모두 동물적 육체가 되니 당장 이 "낮은 몸"(빌 3:21), "육/의 몸"(고전 15:44)의 유지 보존에 불가결한 "먹을 양식"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창조시 먹고 마시지 않아도 전혀 무관하게 생명을 구가/謳歌할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 영광을 빼앗겨 우선 당장 먹고 살아남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담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은 상황에서랴. 땅만 아니라 땅에 사는 동식물까지 고통이 아닌가. 저주 받은 땅에서 무슨 풍성한 먹거리가 생겨나겠는가!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릏 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처참하게 기근과 아사자가 인류역사상 생겨났던가.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주님 재림 때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을 동물적 육체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면> 이런 기근 소동이 생겨날 리가 없음을 알아야.

자연계 동식물이야 자연 조정(번식 수/의 다과/多寡 조절)이 때때로 필수 불가결이라 하지만, 인간은 영이 있어 독립적 존재이기에 미리 그 숫자만큼의 적정 수준으로 식/생활 환경이 엄정히 보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이 이런 "낮은, 육의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그렇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하시지를 않았던 것이다. 아담 범죄라는 돌발 사고/事故로 인해 이런 혼돈과 혼란은 필연적이게 된 것. 이런 점에서도 인간의 이 동물적 육체는 아담 범죄에 따른 "돌연변이"임이 확인된다.

하나님의 피조물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이렇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필수불가결이요(비단 구원 때문만 아니라) 절대적 의미를 지니심을 우리는 마음에 아로새겨야. 만물의 머리이시기에 이 머리의 부재/不在는 삶 자체의 붕괴, 불가능으로 직결되기에. 특별히 인간에게 그 머리되심이 절대적 의미를 지니심이니 그 중요성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상향적 삶이란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개별적 언약/言約 관계에 들어감이므로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관계는 이렇듯 막중한 것이다.

신령한 몸은 먹고 마심은 단지 식도락/食道樂을 위함일 뿐 생사 문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니 그야말로 영원한 자유의 향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만인 공유요 공용인지라 따라서 역대 교회 전통은,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행 4:32) 바로 이것인데, 바벨론 신학의 거짓이 교회를 장악함으로써 오늘날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되었으니, 지금 시급한 과제는 이 '교회적 영광'을 되찾는데 있다. 말을 바꾸면 이런 실천이 없으면 이름만 "교회"이지 실제는 아닌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을 무시하는 자리에 계실 리 만무한 것이다.

주기도문 명상 (4)

다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절박한 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함>이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않고 길쌈도 아니한다"(마 6:26,28) 하신 말씀의 내용과는 다소 온도 차를 느낄 수 있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는"(:31) 않으나, "일용할 양식 주시기를" 구해야 함이니, 이는 동물적 육체로서의 자연계 짐승은 원래 창조하신 그대로의 모습이건만 인간은 전혀 다르기 때문.

애초 동물적 육체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이 창조된 것이 영생하는 존재로 변환되기 위한 그 1단계였기에, 그 2차 단계로 영혼을 주신 것이고, 3차 단계로 에덴으로(인간 아담을 위해 거기 특별한 동산을 창설하신 후) 인도하시어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 즉 영원성의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먹지 말라고 엄금하신("먹으면 죽는다"고 하심으로써) 선악과를 먹음으로 도로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린 비극이다. 그러나 이는 이전 자연계 물질에 속했던 동물성 육체로의 <환원>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던 원래의 "영광의 몸"(빌 3:21)을 <아주 잃어버리는> 일대 참사/慘事라 이 둘은 차원이 다르다.

선악과 나무 열매의 "선악" 관련 "지식"의 의미 즉 "좋고(선/善) 나쁨(악/惡)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은 동식물들의 육체에 기계(자동)적으로 작동되는 놀라운(인간의 지능을 훨씬 뛰어넘는) 기능을 장치해 두심으로써 그들 생물이 자신에게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기피하게 하시어 한정된 기간 스스로 자기 목숨을 유지해 가는 그런 기능을 말한다.

인간 또한 그 육체만큼은 똑같은 구조/체제다. 인간 신체의 작동에 비교적 친숙해 있는 의료 관계자들도 떼로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우연 발생이기에는 너무나 조밀하고 치밀한 인체 조직의 작동 체계를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몸>과는 별도의 <영>이 있어 이 영은 자유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지라 그런 선악 관련 식별("지식")은 도리어 자아중심으로만 작동될 뿐 모든 악과 죄의 근원으로서의 온상/溫床 역할이기에 동물성 육체(아담 범죄의 결과물)로 야기되는 2중, 3중고/重苦인 것이다.

짐승은 먹고 마시고 생식/生殖하는 것으로써 자기 자신(종/種)을 유지 보존함뿐이나 인간은 영/靈인지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창 1:27/5:1/약 3:9) 관계로 영구히 죽음과 썩음이 없도록 신령한 속성의 몸으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독립된 존재라, 하나님 친히 "부자/父子" 관계로 <머리와 몸>의 짝을 이루시어 그 "하나"(요 10:30)되심으로써 생명(삶)의 법칙을 친히 확립하심과 같이 우리 또한 똑같이 스스로 이를 준수함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신 것.

즉 자연계의 생물처럼 자기 위주/본위의 <자아 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의 사랑으로써만 이 생명의 법칙은 운용됨이니하나님 계시는 모습인 '3위1체'가 그 기반인 것이다. 곧 나를 위하는 것은 남인 것이고 나 자신이 아니며 따라서 나도 남을 위하는 일관성을 시종 고수함이 생명이다.

짐승은 본능적 욕구를 채움으로 그치나, 인간은 이성적/理性的 사랑으로써 <짝으로서의 "하나"(요 10:30)됨>을 따르니 이 법질서 준수가 영원한 삶/생명인 것. 나 자신 나를 위하지 않는 대신 즉 나를 소유하지 않는 대가로 나 외의 모두를 내 것으로 소유하여 누리는 가장 이상향적 삶의 유일무이의 방법이 되는 것.

자아중심은 무리하게 억지로 빼앗고 훔치고 억압하여 내 것으로 겨우 차지해도, 그나마 일부 곧 부분적으로 누리는 것으로 그치지만, 자기 부인으로 출발하는 상대방 중심은 자기를 탈탈 비우는 <무소유>에서 <만유 소유>로 귀착하는 최대 최고의 지혜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반면, 그 피조물로서의 나는 나의 일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됨이라 그래서 우리 구원도 "하나님이 그 피 값으로 사신 교회"(행 20:28/계 5:9)로 표현됨과 같다.

이렇게 각자가 하나님-사람, 사람-하나님을 중보자/仲保者로 모셔 <'머리'와 '몸' 관계>를 형성해 <한 영>과 <한 몸('머리'와 '몸'으로서>을 이룸인즉 이와 같은 "하나" (요 10:30)됨은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요 17:10)이라 하신 그대로 주님의 것은 나의 것, 나의 것은 주님의 것으로 또한 나타나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과연 우리의 실생활이 그러한가 자문자답할 일이다. 말로써는 그리고 자기 딴에는 아무리 "구원 받은" 확신이 철석 같아도, "나무는 그 열매로 판별한다"(눅 6:44)는 주님의 엄중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바울 사도가 여기서 지적한 것이 바로 "열매" 유무이다. "하나님의 일"에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나 자신의 욕심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면 자기 기만일 따름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 10:38) 하신 대로, 나도 주님 안에,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이 구원이다. 주님 친히 내 안에 계셔 나와 "한 영"으로 "하나"이시니까 나를 위하신 그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어 죄 용서를 받은 것이다.과거 자아중심의 <나>란 존재가 죽어 없어졌다. 없는데 왜 있는 듯이 내 욕심, 나의 욕망 그대로인가.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과는 달리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노라"고 자기를 속여 온 것뿐이다. 믿으면 믿는 것일 뿐이지 믿으려고 <애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믿음과 사랑과 순종의 <스승>, <본>으로 "어린 아이"를 자주 언급하시어 강조하셨다. 어린 아이를 따라 하면 된다. 단 한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부지런히 문을 두드려야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면 찾게 되고 얻게 되고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법칙임과 동시 약속이다.

나만 문을 두드림이 아니요 주님 친히 나의 "문을 두드리신다"(계 3:20). 예수(히브리어로 "구세주, 구원자"의 뜻)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해 오심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Comforter, Helper)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함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처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요 14:16-18) 하심과 같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하셨으니까 먼젓번의 보혜사는 예수님이시기에 "보혜사"의 뜻이 금방 드러난다. 단 육체가 아니신 성령으로 오시는 똑같은 <바로 그 예수님>이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라 하신 말씀이 그 확고한 증거. 그러면 왜 "성령이 오신다" 하시고,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라" 하셨는가? 어떤 "유익"인가?

사람(구원된)마다 예수님을 직접 모시게 되는 바로 그 "유익". 이 얼마나 굉장한 사실, 의미인가! 그러면 육체가 아닌 그 영으로 오시기에 성령으로 오심인가? 아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오심이라 그러하신가? 아니다. "함께"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 오심이다. "함께"와 "하나"가 어떻게 다른가.

"하나"이실 경우 똑같은 한 모습이시나 성자 하나님으로 보면 틀림 없으신 예수 우리 주님이시고, 성부 하나님으로 보면 역시 틀림 없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다. 이는 <착시 현상>도 아니고 무슨<요술>도 아니다. 실상 그대로를 설명함이다. "함께"에는 이런 의미가 전혀 없다. 주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 9) 하신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키심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1:18) 함도 당연히 이를 가리킴이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뵌 것이다. 우리가 뵐 수 있게 성자와 더불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라, 아멘"(딤전 6:15,16)으로 못박았는데 이는 왜인가?

성자 하나님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는"(골 3:11) 분이시다. 이 광대무변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지라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은 상식에 속한다. 또 성부께 관해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요 14:28)이라 하셨다.
성경은 또 "만유 안에 계시고(in all) 만유를 관통해 계시고(through all) 만유 위에 계신(above all)"(엡 4:6) 분으로 성부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만유보다 크신"(요 10:29) 하나님을 무슨 수로 본다는 말인가.

일부러 사람 형상이 되시어 나타나시면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경우 사람이라 하지 하나님이라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아닌게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땅 위에 서신"(욥기 19:25) 것이다. 욥은 이 사실을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여 그 오심을 찬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람으로만 취급하여 결국 십자가에 달리심을 당하셨다.

이런 여러 사정을 미리 감안하시어 볼 수 없으신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창 1:26) 인간을 만드시어 하나님의 모습답게 즉 <흉한 모습으로 썩어 죽는> 육체가 아닌 <광채로 나타나는> 신령한 몸으로 입히셨던 것. "6일 창조"로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도록"(:26) 창조하신 인간 곧 하나님의 대리자로 친히 세우신 <하나님의 상징>이 앙상한 백골로 썩어 문드러지는 흉측한 모습의 "하나님 형상"이 되도록 방치하시는 하나님으로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일을 당연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당신이라면 그런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는 허물을 면치 못하리라" 할 때, 당신은 이 말을 지나치다고 책하겠는가.


 

2025년 10월 6일 월요일

주기도문 명상 (3)



죽음 없이 곧장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변환해 하늘로 오른 오직 두 사람 엘리야와 에녹. 에녹을 가리켜 한 말0]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ing with God")" 인데,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의식/意識의 일상 생활>이었다는 것. 이는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고 정상적"이었다"는 함의가 스며 있음이니 항상 대면하여 보는 사람 중의 어느 누가 아니라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을 그렇게 의식했던 이유를 밝히심이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그 핵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눅 11:2) "뜻이 하늘에서 이룸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마 6:10)이다.


왜냐면 생명 자체이신지라 생명 아닌 죽음의 현장인 이 세상에서는 곧바로 우리 구원의 방법 즉 그 "길"(요 14:6)로 통하시기에 더욱 그러하신 것. 무엇보다 영원한 진리에 터전하신 것이기에. 하나님께 향하는 우리의 기도는 "당장 코 앞에 떨어진 불 끄기"로서의 속성인지라, 그만큼 절절한 것으로서 가장 먼저 언급되어 우리 의식을 지배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그 뜻", "그 나라"인 것. 이는 우리의 실질적 욕구에 따름이니 극히 자연스러운 순서임을 항상 인식해야.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우리 구원자로만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생활에서 우리의 존재와 직결시키는 것이 하나님이시고, 그 뜻을 알고 따르고 찾아 구하는 것(마 7:21)이 생명인 줄을 알아야. 인생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세계가 하나님과 직통 직결되는 신령한 몸에 있음을 의식하고 사모하며 동경함이어야.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눅 9:27)라, "주님 친히 그 왕권/王權을 가지고 오심"(마 16:28)이라,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함"(막 9:1)이라는 뜻으로 하셨듯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과 의식은 세상 주변에서만 맴돌 뿐 자아중심을 벗어남에서 진전이 없는 끔찍스러운 꼴을 당함이니 어찌 "두렵고 떪"(빌 2:12)이 없으리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것이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8,2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하시어 이루신 값 없이 선물로 거저 주신 은혜의 구원이라는 인식만으로 철딱서니 없고 버릇 없는 손주녀석 할아버지 수염 당기듯 하는 행위에 거의 2천년간 물들어진 오늘날까지의 바벨론 신학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주기도문 명상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마 6:13).   오늘날 인간 세상의 모든 부조리, 불합리, 일체의 악과 죄가 아담 범죄 오직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