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4일 토요일

성령으로 나는 것 (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다시 나야겠다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 때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이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다"(요 3.6~8). "육으로 난 것은 육, 영으로 난 것은 영"으로 분명히 대비시키셨으니, "육으로 남"과 같이 구체적인 것이지 "성령으로 다시 남"을 추상적인 무엇으로 여길 일이 아니다. 즉 회개→세례→죄 용서→성령 세례. 오직 관건은 "회개"이다. "회개"가 확실해야 죄 용서→성령 세례로 연이어지니까. "육으로 남"은 네피림과 관계될지라도, "성령으로 다시 남"에서는 일절 그런 것이 없는 것은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 초대교회 당시는 성령 세례 받은 증거로서 자기가 전혀 모르는 외국어("방언")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입에서 나왔고 예언도 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표적이 필요치 않으니, 초대교회 당시처럼 회개만 철저하면 그런 "증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가 강조되지 않고 투철하지 못하니 네피림도 얼마든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 세례는 받아도 죄 용서→성령 세례로 이어지지 않음은 당연하다. 스스로 "죄 용서" 받았노라 자부해도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 기만으로 그친다. 회개만 충분히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이를 강조하는 오늘날 세상이 아니니 교회가 실은 교회가 아니고 믿는 형제라 하나 실은 "형제"가 아닌 것이 오늘날 바벨론 시대다.


바벨론 신학이 판치는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 교회와 같은 핍박 중의 교회>가 언제나 정답이니 이 점을 항상 명심해야. 세계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남한에도 가나안("교회 안나가") 교인이 수백만이 된다고 하니 이런 이들은 북한 교회처럼 운영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로서 모임이 없이 혼자 신앙생활할 수 있다고 절대 생각하지 말 것이다. 교회당도, "목사 안수 받은" 사람도 요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교회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 북한 교회가 그 증거다. 신앙 동지끼리 두셋만의 모임이면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계실 것을 약속하셨고(마 18.20) 하나님 계시면 거기가 바로 성전이니까! 그리고 핍박은 주님 말씀대로(요 15.20) 이세상 특징이니까. 그래서 북한교회가 오늘날 교회의 표본이라 하는 것이다. 모퉁이돌 북한선교회 http://cstone.today/CHxLj에서 에서 소개하는 79세(당시 나이) 목자(목사가 아님)가 이끌었던 65명의 북한교회야말로 세계 어디에다 소개해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아무리 죽을 곳이라도 찾아가는 아름다운 믿음의 분보기, 얼마나 은혜스러운 교회였던가! 남한으로 도피할 기회가 확실히 있어도 먼저 기도하여 하나님께 여쭙고 그 결과 뜻이 아니란 확신이 오자 <탈출해 왔던 북한 땅>으로 지체없이 되돌아가 전원 순교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의 영원한 사표이다.

성령 세례룰 받음으로써 성령으로 남이다. 초대교회 당시는 시초이기 때문에 그런 성령 받은 증거가 필요했지만 그 후로는 회개만 온전하면 성령께서 반드시 임하시게 됨이 확증되었으므로 계속 그러한 증거를 나타내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나의 회개가 철저하고 층분하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 이상으로 요구되는 것은 없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니까 미흡히 여기시면 얼마든 언제든 말씀해주시며 인도해주시는 것이다. 북한 교회와 같이 <목숨을 걸고 믿는 자세>이면 하나님께서 아시고도 남지 모르실 리 없으니까. 단지 여기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성령 받아 모시어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된 바로 그 증거만이 요구됨이니, 곧 자기 증심이 아닌 상대(하나님) 중심의 근본적 삶의 자세의 180도 전환이다. 이 "증거"만이 우리 각자가 반드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타나지 않고는 안되는 증거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한 바로 그대로다. 바울 사도의 어조는 아주 단호하다. 주님 친히 기도 중에 말씀하신 대로, 갑 안에 을이 있고 을 안에 갑이 있다 함은 갑의 소유가 을의 소유요 을의 소유는 갑의 소유 즉 "교차(맞바꿈, 엇바꿈) 소유", "교차 교류"의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이다. 을도 마찬가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임이다"(롬 14.7,8). 

성령으로 나는 것 (1)

"성령으로 남"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니 사람이 다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 3.1-17) 즉 영생할 수 있다 하셨으니, 여기서 "물과 성령"(:5)이라 하심은 아담 범죄가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 말씀 순종보다 더 따름이 돼 사탄을 더 높인 격이라 악마를 하나님 대접한 꼴이어서(주님이 죄인들에게 마귀를 "너희 아버지"ㅡ8.38-41라 하셨듯이) 그 순간부터 세상이 악마의 천지가 되니(눅 4.6) 악령들이 그 인간 세상 통치 차원(때문에 불법이지만 잠정 묵과됨)에서 그 씨들을 대량 퍼뜨려 현재 인류가 두 종류이기 때문. 즉 "불(영/)"의 속성인 "네피림"(창 6.4) 족과

"물(육신의 속성)"에 해당하는 아담의 씨(후대들). 당연히 네피림은 구원이 불가능이므로 사람이 "물로 나야" 한다 하신 것. 네피림은 죽어 망령이 되어도 그 속성상 아담의 씨(영혼)가 가는 곳에는 갈 수 없어 이런 "더러운 귀신"(마 12.43)들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유리방황하다가 언간 육체 안에 들어가 말썽을 일으키거나 저들만의 모종 규칙성을 따라 소위 "환생"하기도. "윤회", "전생" 따위의 말들도 이래서 생겨난 것. 

주의할 것은 이와 같이 네피림 족속은 언제 어디서나 무작위로 모태 속에 일단 들어가면 인간으로 태어나므로(물론 인간이 눈치채지 못하게 가임기간을 엄밀히 산출하여 들어가는 것) 형제간이라도 얼마든지 섞일 수 있는 관계로 혹 네피림이라는 사실이 썩 드물게나마 드러난다 하더라도 즉 그런 의혹이 생겨도 절대로 부모와는 연계시킬 일이 아님. 아담 범죄가 파생시킨 결과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는지 알고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것.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어 마음에 근심하셨다"(창 6.6) 한 기록이 실감 나는 대목. 또한 한 가지 더 유의할 것은 "내 자신이 혹 네피림이 아닌가" 하는 쓸 데 없는 기우인데 이는 "내가 혹 택함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네피림을 식별하지 못하게 되어 있음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즉 택하심이나 네피림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야. 그런 것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 그런 모든 것은 사탄이 일부러 심어주는 망상에 불과하고, 성경대로 내가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으니까. 


2026년 3월 31일 화요일

거꾸로 말하느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했던 바울 사도가 언제 또 갑자기 변하여,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아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한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으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음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세!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4ㅡ24) 하고 탄식했더냐!

로마서 7장을 바울 자신의 믿은 후 체험이라 하는 자들에게 묻노니 답하라! 어느 쪽이 바울이냐? 믿음의 초기일수록 믿음에 불타고 시간이 갈수록 혹 식어지면 식어지는 법이다. 너희는 거꾸로 말하느냐! 

일부러 설명하려 들지 않는 데에서 성경의 진실성은 다시금 드러나는 것


마귀가 애당초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을 지어낼 때부터 아담이 처음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음을 가리워 감추고, 현재의 이런 "자연계 믈질의 육체로 애초 만들어졌다"고 속여 놓은 다음 진화론 등 소위 "과학적 사실" 따위로 둔갑시킨 것으로써 교회를 마구 뒤흔들 계략이었던 것인데, 과연 많은 사람들이 이 수작에 속절 없이 끌려 넘어가 "믿음에 관해 파선했던"(딤전 1.19) 것입니다. 주님이 경고하신 말씀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어린 아이의 순수성에서 오는 본성적 사랑과 믿음(신뢰)대로 "그렇거나 말거나 변함이 없는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랑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인 이들만이 영적으로 살아 남았던 것. 그러나 21세기 오늘날 3위합1(trinia) 및 3운법칙(fashomo)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지 않는 영생자로 창조하심이 드러나자(사실 이것이 상식 차원에서도 너무나 온당하고 합리적 판단) 국면은 180도 전환이 됩니다. 따라서 "3운볍칙이 진화론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든 거짓된 것들의 족쇄가 풀어지고 진화론과 같은 것이 더 다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됨을 지칭함입니다. 진화론도 진화론 나름이니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무신론적 진화론 즉 진화론을 핑계대고 무신론을 끌어들여 고집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소위 "영적 죽음"이라는 황당무계 헛소리도 이제는 "천사가 가진 복음"의 등장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될 운명입니다. 처음 믿음에 들어올 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선하시고" "사랑"이시라면 왜 인간에게 이런 고되고 허접 쓰레기 육체를 주시어 인간고/人間苦가 이다지도 심하냐"며 의혹을 품고 선뜻 믿음에 들어서지 못했었는데, "아담의 죄 때문"이라는 속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한 우리의 불찰이야말로 엄청나게 큰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이런 인간고가 왔는데도 하나님만 원망했습니다. 이제는 "천사의 복음" 전파로 그런 헛된 망념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될 전망입니다. 

또한 이 시점 우리가 확인하고 즐거워해야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 친히 그 "마지막 아담"(고전 15.45) 되심을 증명하심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 또 다시 오심입니다. 그 오시는 이유/목적이라고 해서 성경 그 어디에도 밝혀 눟은 바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또 성경의 <진실성 증명>이 됩니다. 지어낸 것이라면 반드시 지지콜콜 설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절 설명이 없습니다. "마지막 아담"이시기 때문이라는 <굉장한 의미>의 설명이 필요한 대목인데도! 따라서 이런 설명이 전혀 없음으로 해서 무갈제국 영걸 악바르의 끈질긴 질문에도 당시 천주교 신부들은 한 마디도 대답 못해 쩔쩔매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심이 "마지막 아담"으로서 오심이었기에 아담이 그 죽음으로 채 이루지 못했던 인간세계 통치 차원에서의 "마지막 아담"의 천년 왕국이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나는 것 (2)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다시 나야겠다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 때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이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다 "(요 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