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일 목요일

3운법칙 관련 매듭 짓는 말

노아의 3운법칙 생애 도표가 명백히 나타남으로써 노아 600세에 노아 홍수가 시작됨이 명시되었으니, 이로써 노아가 천년 가까이 장수한 것도, 대홍수로 당시 세상이 멸망한 것도 역사적 진실임이 훌륭히 입증되었다. 노아의 3운법칙이 이 모두를 증명해 주었으니 이것이 3운법칙의 범접 못할 위력이자 권위이다. 3운법칙은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을 증명해주는데만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3운법칙을 마땅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3운법칙 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3운법칙과 함께 나타난 일찍이 듣도보도 못한 참신한 성경 풀이("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성령"께서 누구이신지 등을 포함해)가 정작 그 핵심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 때"를 당하여 이런 최종적으로 올바른 성경 풀이를 강력히 뒷받침해 주시기 위해 "21세기 표적과 기사"로서의 3운법칙을 하나님께서 오늘날 83억 전체 인류 앞에 등장시켜주신 것이다. 


3운법칙의 놀랍기 짝이 없는 신비스러음은 다음 사실에서도 드러나는 바, 불교계의 거두 효봉 선사(이찬형)는 판사 시절(일제강점기) 동포에게 내린 사형 선고에 양심의 가책과 고뇌를 느껴 1923년 당시 36세에 가족에게도 일절 알리지 않고 법원을 훌쩍 뛰쳐나가, 입고 있던 양복 팔아 마련한 엿판을 메고 3년간 전국을 떠돌다가 이후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그의 활동기(LP)는 출가하던 때부터도 판사였던 때도 아닌 엿장수 엿판 메던 때부터였던 것이다. 양심의 번뇌로부터의 해방이 그 자신에게는 둘도 없는 "전성기"였던 것인데 이것이 여과 없이 그대로 그 3운법칙에 놀랍게도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패턴에 속하는 것이 스웨덴 오페라 가수 Jenny Lind의 경우다. 오페라 무대 전성기에,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던 이것이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의 자기 신앙 양심에 부합치 않다고 여겼고, 사악한 역할도 맡아야 하는 오페라 연기에 큰 회의감을 품었다. 결국 29세 때 1849년 오페라 무대에서 완전 은퇴해버렸다. 오페라 무대를 떠난 후에는 도덕적 양식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느낀 종교 음악(오라토리오)이나 건전한 콘서트 무대만 골라 나갔고, 막대한 공연 수익금을 자선 사업과 교육 기금으로 기부하며 60여년의 평생을 마쳤다. 아름다운 저녁 노을 진 해변에서 성경을 읽는 그를 한 지인이 발견하고, "인기의 한창 절정에 왜 무대를 떠났느냐" 물었더니 제니 린드는 지는 노을을 가리키고 또 자신이 읽던 성경 위에 손을 얹으며"매일같이 이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볼 여유도, 이 성경 읽을 시간도 점점 줄어드는데 어찌 오페라를 그만두지 않겠느냐?"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와 같이 독특한 생애를 보낸 이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그 특이성 따라 그 생애의 3운법칙 활동기/전성기가 꼭 그대로의 판에 짜맞추어져 나타나듯 배열되는 것을 보는 놀라움은 실로 크다. 3운법칙이 기계적이거나 일률적이지 않고 그런 개인적 취향 따라 타인과는 전혀 다른 생애의 궤적이 마치 일부러 보여주기라도 하듯 극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나니 이를 누가 우연의 일치로 돌리랴. 하나님의 직접 손길이심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동서양과 남녀를 막론하고 아주 정직하게 그 사례가 대표적으로 이상과 같이 드러내어져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사람의 LP(활동기/'전성기)는 그런 또래 다른 유명 인사들처럼 판사직 수행이나 무대 활동을 하는 때부터가 아닌 그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진 (놀랍게도) 때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마치 그들 자신이 그런 생애 도표를 스스로 그려내듯이! 어찌 경탄과 경이의 대상이 아닐소냐! 3운법칙으로 이 비밀이 마침내 오늘날 온 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물론 천사들이 그 막강한 초능력으로 다루는 영역이지만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친히 하시는 일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에나 일에나 무엇을 하든 주님의 이름으로 하며(골 3.17), 먹고 마시는 원초적인 일 하나도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함이(고전 10.31) 같은 이치로서, 하나님께서 만유의 머리이시니까 머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또한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와 몸은 상호 관계다.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한다. 


우리가 구원 받아 영생하는 것도 영생하시는 주님 친히 나의 삶을 살아주시는 교차 삶의 기본 바탕에서 이같은 머리/몸 관계로 이루어짐이다. 우리 구원 받은 각자를 위해 주님 친히 일일이 내 삶을 살아주심이다. 우리 각자는 또 각자의 신념 따라 나름대로 주님을 위한 주님의 삶을 살아드리는 이 영원한 바탕에서 가히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이 실상을 모르니까 로마서 7장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라는 둥 허튼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바벨론 탈출"의 이 "천사의 복음" 시대에 모든 것은 바벨론 속임수 이전의 원상태 최초의 복음으로 회귀하는 때이다. 처음의 것을 되찾는 시점에 온 것이다. 그리고 중간에 오면서 사탄이 감추어 온 것마저 죄다 밝혀 드러냄이다. 주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때가 박두했음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 한 때가 다하면 원수의 때가 잠시 이르러 전권을 휘두를 것이니 적그리스도의 난장판이 온다. 원수의 최후 발악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난장판이 오기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비시키심이 오늘날의 "천사의 복음"인 것이다. 


바로 이 때를 위하여 3운법칙이 출현한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바벨론 탈출"(계 18.4)을 독려하는 "천사의 복음"(14.6)이다. 그 다음, 다음에 드디어 대망의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이다.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자마다(골 1.24)  마침내 영광의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갈아입을 것이요 천년간 주님과 같이 다스릴 것이다. 이 천년 통치는 아담 범죄로 그간 미루어져 왔던 것으로서 아담을 대신하신 "마지막 아담"께서 이를 모두 회복하시고 아담의 이름으로 비로소 왕좌에 처음 앉으심이다. 그간 인간의 세상이면서도 인간이 다스리는 꼴을 보지 못했다. 마귀가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귀가 감히 빼앗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 스스로가 자기 자리를 자기 범죄로 넘겨준 꼴이었던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보다 자기 수하에 있던 자의 황당한 거짓말을 더 따름으로써 마치 하나님께 순종하듯 망동했기 때문이다. 


수난과 인고/忍苦의 6천년 세월이었으니 드디어 제7일째의 안식이 이제 오는 바 주님의 다시 오심이다. 하나님께서 "6일" 창조에서 7일째 안식하시려다말고 아담 범죄로 모든 것이 폐기되자 다시 인간 창조의 작업을 시작하시어 이제 마치시고 다시 안식에 드시려는 참이시다. 이제는 완벽하여 다시는 되풀이가 없다. 하나님의 이 안식에 들어가는 자 복되다 하리라. "성령께서 이르시기를 '그러하다 저들의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니 이는 저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계 14.13) 예고하신 바와 같다. 끝으로, "바벨론"의 거짓됨을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삼위일체와 성령 관련한 기본적인 무지무식. 심지어 상식 차원의 것마저도 아는 것이 없는 전면 백지화와 같다. 따라서 핵심 부분인 우리의 구원 문제까지도 언저리만 맴돌고 있는 수준. 그 단적 예가 "대신 죽음(Substitutionary Atonement(대속)", "전가(Imputation)" 따위 개념. 이상 둘로서 대별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구원과는 무관한 신학과 교리뿐인 것이다. 


이 모두에 대해 간단히 즉석 대답할 수 있으니 "대신 죽으심"이 아니라 "함께 죽으심"이요 "함께 부활"이다. "내가 여전히 죄 짓는 죄인으로서 구원됨"이 아니라 "나 위해 죽으신 주님이 내 안에 영(성령)으로 오시어 친히 나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심으로써의 구원됨(이것이 "성령 세례" 또는 성령 받음)이니 "한 영"이든 "한 몸"이든 무릇 "하나" (요 10.30)됨은 모름지기 '교차 소유'라 주님과 하나됨은 교차 삶이므로 구원 받음의 결론(열매, 증거)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롬 14.7-9)이라 함에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우리의 구원은 주님과 "합하여 한 영"됨의 교차 소유에 있으니까ㅡ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현재 신령한 몸은 아니나 장차 신령한 몸이 될 자)와 산 자(신령한 몸이 이미 되어 있는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다"(:7-9) 한 그대로다. 고로 여전히 죄짓고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인 즉 구원 받은 자의 직접 체험아라 믿는 것은 그 자체가 구원되지 못한 증거이니 대오각성 지금 곧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갈 일이다. 




2026년 9월 29일 화요일

교회에 보내는 사도 서신 인삿말에서 "성부", "성자"와 달리 "성령"의 이름이 번번히 빠지는 이유


이번 게시글에서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부분도

없잖아 있을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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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창조하시어 나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시고 따라서 더 잘 위하시는 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시니 내가 굳이 나를 위하지 않아도 되니까 공연히 자기를 위하는 쓸데없는 헛수고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같은 피조물로서의 사람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상대해주는 내 이웃이 나란 존재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인식하니 나를 위함에서도 그러한 내 이웃이 나 자신보다 더 잘 나를 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이십니다. 모두가 한 "머리"(대상 29.11/대하 13.12)이신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각 지체 각 부분"(고전 12.27)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 모두를 위함과 동시 그들 모두의 위함을 받습니다. 내가 사랑하면 그만큼 나도 똑같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빈 틈 없이 짜여진 구조요 완벽한 체계입니다. 바로 이 완벽한 짜임새(구도)로 최초의 언약(약속)과 계명이 지켜진 것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셨으니, 이를 주님 친히 밝히신 그대로입니다(요 15.10ㅡ"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즉 "내가 너를 위하여 너를 위하는 것은 네 자신이 아닌 나이니까 너는 네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고 그대신 오직 나만 위하라"이시므로 "내가 너를 위한다"는 <약속>과 동시에, "너는 네 자신을 위하지 말라"는 명령 곧 <계명>이신 것입니다. 한 편 성경은 이와 관련해 

"아담은 언약을 어겼다"(호세아 6.7)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동일한 <약속과 계명>인데 아담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따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두 하나님(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문제가 생겨 최초의 인간 범죄입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과의 약속도 계명도 아담은 (처음부터)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완전 파탄이 나버린 인간 창조라(이 아담 범죄로 모든 인간이 죽었은즉ㅡ골 3.3/롬 5.12) 새로 다시 창조하시되 '3위1합'(종전의 "삼위일체")의 짝의 법칙에 의한 "영(성령)으로 나는"("육으로 나는" 것과는 대칭인)으로 나게 하는 방법 밖에 없어 부득불 이를 위해 하나님 친히(모든 피조물의 어버이로서의 하나님 사랑과 은혜는 형용할 길이 없어) "마지막 아담" 즉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는 나와 함께 죄인 사형수처럼 형벌 받는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죽은 자로서의 나와 하나되신 부활하심을 통해 또한 나를 부활한 자 즉 산 자로서 하나되게 하심으로 나를 살리려 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 무한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세상에 오시기 전과 후를 구분하여 그 전단계가 "구약"시대, 후속 단계가 "신약"시대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상 설명과 같은 '언약 및 계명'에서의 그 변천사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해두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 관련 올바른 지식입니다. 바벨론 탓에 성경 해석이 지금까지 중구난방이 었는데 성경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벨론이 무엄하게 침범을 못합니다. 고로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부자지간이십니다. 혹자는 삼위일체(오늘날 바벨론을 벗어나 정확히 말하면 "삼위일합") 관련 무지를 인해 하나님을 동등하시다 하는데, 부자 관계이시며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보다 당연히 "크심"(요 4.28)입니다. 이 모두 "말씀 혼잡"(고전 2.17/4.2)에 속하니 경계해야.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요 10.30)로 계심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 개념은 상보성 원리에서 "상보/相補"입니다. 하나님 계시는 모습의 "3위1합"을 창조와 그 모든 운영 원리로 삼으셨다는 강력한 증거인 것입니다. 미시세계가 이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거시세계 즉 만유의 원리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니 이는 오늘날 양자역학으로 드러난 진실임을 명심해야. 다시 말해 만유는 짝으로 되어 있고 이 짝의 특징은 그 둘의 "하나"됨인 것입니다. 상반/相反(성부와 성자) 즉 크시고(파생/하셨고) 작으심(파생되심)의 대칭을 이루셨고(contraria), 상보/相補(성령, complementa)로서 존재하심입니다. "상반"으로 짝을 이루셨으니까 대등하시지 않습니다. 어버이 자식 관계가 어찌 동등인가요? 성경에 씌인 대로 읽어 이해하면 되고 성경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알기 어려우면 멜기세덱의 경우처럼 솔직하게 "어렵다"(히 5.11)고 안내해주는 성경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내해 준 것도 이제는 다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세기 "마지막 때"에 와서 이해 못하는 성경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3운법칙도 나타내어 주셨으니까 더욱 그러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세상 끝이 다가왔으니까. 성경대로 하나님은 "독생자"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따로 두 분으로 계시지 않고 "하나"로 계심이 핵심의 특징이십니다."성령"이시라 할 때는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요 10.30)되어 계심을 말하고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이시니까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입니다. '3위1합'에서 둘이 하나일 때는 "교차 소유"로써 그렇게 됩니다. "한 몸"으로 하나일 때 아내 몸은 남편의 것, 남편의 몸은 아내의 소유가 되는 것이 그 예입니다(고전 7.4).  이와 대칭되는 "한 영"(고전 6.17)에서는 일상 삶에서 철저히 그렇게 됩니다. 고로 우리 구원 받음의 결과물은 반드시 주님을 위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롬 14.7)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것(믿기 전의 자기 중심과 같은)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함이 "생명" 그 자체라고 인식함이 옳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머리"와 "몸"의 "약속(언약)과 계명" 관계가 이루어져 영원히 이것이 우리 구원의 본질인 것입니다. 둘이 "합하여 한 영"(:17) 즉 "상반이 상보"라는 원리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목숨 즉 자기 전부를 다 바쳐 죽은 나를 살리셨으니 친히 내 안에 계셔 나와 하나가 되심으로써입니다. "우리 중에" 즉 구원 받은 자 중에 "누구든지"이니까 "구원 받았다"면서 아직도 여전히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태껏 단 한 번이라도 구원 받은 역사가 없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한 점 거짓도 의혹도 있을 수 없는 성경적 결론이니 우리 모두 각자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구원 못받았으면 지금 당장 모든 죄 회개하고 주님과 "합하여 한 영"됨의 '교차 삶'을 살면 됩니다. 오직 문제는 여기에 동의하지를 않고 이의를 제기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친히 명령하신 "바벨론 탈출"(계 18.4) 순종 여부가 여기서 가려집니다.


3운법칙 관련 매듭 짓는 말

노아의 3운법칙 생애 도표가 명백히 나타남으로써 노아 600세에 노아 홍수가 시작됨이 명시되었으니, 이로써 노아가 천년 가까이 장수한 것도, 대홍수로 당시 세상이 멸망한 것도 역사적 진실임이 훌륭히 입증되었다. 노아의 3운법칙이 이 모두를 증명해 주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