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8일 목요일

우리의 영적 전쟁의 속성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생각의 바탕)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잠 4.23). "생명의 근원"이 마음의 생각이니 우리는 이 문구를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속에 아로새겨야 합니다. 여러 번 설명했지만 우리 자신을 철저히 이로써 세뇌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반복합니다. "<마음의 생각>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매일 매사 인도해 주시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제사장 기도로), 항상 기뻐하고(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나는 영원히 혼자가 아니기에 너무나 행복감에 겨워)" 이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 및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8.29/20.21) 하신 말씀으로 충분히 설명됩니다.

"모든 일에(궂으나 좋으나 간에 일체 불문하고), 하나님께 감사함(덮어놓고 감사함이 아니라 365일 24시간 매순간 나를 사랑하시어 눈동자처럼 살피시며 위하시는데도 우리는 오히려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지내는 것이 실상이니까)으로써(살전 5.16-18) 우리는 각자 우리 "마음을 지키는"(잠 4.23) 것입니다.

마음을 지킴이 이렇듯이 중요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므로 원수 사탄의 공격 목표이기도 함은 당연 사실. 고로 이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에서도 확인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절제 있는)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라. 주님께서 가까우시다(오실 때가 가깝다ㅡ이는 <예언>이 아닌 <부단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자주 쓰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이제까지 응답해 주셨으니 계속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기에)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知覺울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빌 4.6).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종말로(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고후 10.5).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주님께 여쭙고 의논하고(에덴에서 여자가 자기 연장자인 아담과 먼저 상의 않고 독단으로 행하여 엄청난 파멸을 자초함과 같이 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하는 지혜스러움입니다. 시험과 유혹과 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성경 시편 영역(Ps. 119.113)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I hate vain(원문엔 없다는 표시로 이탈릭체 표기)  thoughts: but thy law do I love(KJV). 우리말은,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로 되어 있고 일부 영문 번역도 그러하나, 위 설명에서도 보듯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미워한다ㅡto hate thoughts"입니다.

"사람이 생각 자체를 아니한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해서 그렇게 "두 마음, 운운"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본 뜻은 명확합니다. 왜냐년 그 대칭구가 분명히 "<하나님의 법>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생각> 대비/對比 <주님의 말씀>인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 뜻이 명명백백히 드러납니다.

즉 스스로 생각해서 또는 생각나는 대로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자세를 버리고 무조건 주님께 여쭈어 묻고(사람과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것은 귀찮게 여겨 "네가 알아서 해라"로 일관하나, 우리 주님은 반대로 오히려 기뻐하시므로) 오로지 하나님 말씀을 기준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점 우리가 마땅히 머음에 새길 일입니다.

하나님을 과거 믿지 않을 때처럼 그저 막연하게 의식해서는 안됩니다. 똑부러지게 즉 사람되셨으므로 사람 대하듯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할 때도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느라 끙끙댈 필요가 없습니다. 우주보다 크시어 도무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이 되어 주시어, 우리 각자와 가까이 하시게 되었으니 곧 예수님이시라고 설명하면 그가 믿든지 안믿든지 설명은 끝난 것입니다.

3위1체 법칙에서 짝을 이루는 것은 반드시 "하나"(요 10.30) 즉 제3위/가 되어 있는 까닭에 사람되신 성자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성부 하나님의 모습이 되어 계심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또 보이라고 하는 것이냐"(요 14.9).

성자께서 육체(사람)가 되셨으나 그 영만큼은 사람 속성이 아니시고 창세 당시부터서의 성령이시므로("하나님은 영이시니ㅡ요 4.24) 여전히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사람, 사람-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진실과 진리를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은혜 안에서 한없는 느긋함, 든든함, 넉넉함, 그득함, 여유 만만의 기쁨, 평안을 누리고 전파하는 우리가 됩시다.

2026년 1월 5일 월요일

어느 시대에든 기도자는 존귀하다

카나다 피플 쳐치(People's Church)의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가 사도시대 바울 이후 가장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로 지목한 찰즈 피니(Charles Finney) 목사는 변호사로 있을 때(기독교와는 담을 쌓고 지낸 집안에 태어나) 법 관련 참고서로 성경을 자기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가끔 보,던 중, 마음 속에 가끔 파동 쳐 오는 것이, "이 모든 것이 진실이라면 '불이야! 불이야!' 소리 치며 교회당 종각에 매달려 밤낮 없이 종을 쳐대야 할 일이 아닌가"였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이 심적 고뇌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른 아침 사무실 인근 숲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도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바삭 하는 소리가 들리자 피니는 황급히 눈을 떴습니다. 그 순간 "만우주의 창조자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자가 사람 눈치를 보다니!" 하는 자책감이 크게 휘몰아치면서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거의 정오 나절 쯤에 기도가 잦아들면서 피니는 부시시 일어나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사무실로 가니 고객이 마침 찾아 왔습니다. 이 때 피니의 반응은, "이제 저는 예수 그리스도 변호를 맡았으니 다른 데 가보시기 바랍니다"였습니다.

크게 당혹감에 휩싸인 손님이 황망히 떠난 후 피니에게는 성령의 세례가 임했는데 그 양상은 이러했습니다. 즉 주님 친히 그 옆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서 계셨을 뿐인데 피니는 그 영혼으로 이를 느낀 것입니다. 피니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며 그 입에서는 이제까지의 모든 죄가 낱낱이 고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부터 피니는 그 표정 하나로도 사람들을 죄 자백으로 휘몰아 넣는 성령 충만의 능력으로 일관해 갔던 것입니다.

특기할 것은 이 피니의 사역에는 다니엘 내쉬(Daniel Nash, 1763-1837)라는 막강한 기도 사역자가 항상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피니가 29세의 나이로 회개한 후 복음 전선에 즉각 뛰어들 때 내쉬목사의 나이는 이미 50대). 내쉬는 한 작은 교회 목회(Episcopal priest)에서 어느 정도 잘 나가는 편이었고 아메리카 인디안들 상대로 선교 활동도 했지만 피니의 회심/回心 무렵 심각한 안질에 걸려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리던 중 지금까지의 미적지근했던 믿음생활을 회개한 후로 피니의 사역을 위한 남다른 성령 충만의 기도(금식과 더불어) 사역에만 7년간 오로지 집중하다가 세상을 뜬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Abel Clary)가 있어 합심 기도했는데, 내쉬는 설교 대신 기도로써 피니의 강력한 복음 전도 사업에 전력으로 힘을 다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에는 반드시 기도 사역자를 정하시어 동역/同役하게 하신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아 세상이 원수의 지배 아래 있으니까




 

초대교회 당시 만신창이로 얻어 터지면서도 복음을 전한 바울처럼 오늘날도 외쳐야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사탄의 옛 "에덴/아담"[창 3:4,5]식 거짓말)의 폐해는, 그릇된 구원론 즉 <행위(행함)는 무조건 부정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주장의 속임수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율법(계명)의 행위(순종 즉 계명을 지킴)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교회 내에서 분탕질을 일삼았던 할례 등 "모세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니, 즉 <모세 율법이 생겨난 이유>를 밝힘인데 사탄이 이를 악용해 "말씀 혼잡"(고후 2.17/4.2)을 시킨 것.


고로 오늘날 "천사의 복음"(계 14.6) 전파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주력해야 마땅합니다. 믿음은 순종을 유발시키기 위한 조건일 뿐이니, 다시 말해 순종은 오직 "산 자"와만 관계된 일로서 "죽은 자"와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죽었는데 무슨 "순종"이 필요한가요? 할 수나 있는가요?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독생자 하나님의 죽으심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면서까지), 오로지 이 "산 자"되게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 자"로서의 순종이라 이 순종이 우리를 하나님 앞 의인/義人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니"(롬 2.13)가 바로 그 뜻입니다. 이 뜻을 모르는 이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데(5.1) 이 무슨 소리냐" 하고 어리둥절해 하겠지만. 문장 독해력이 문제이지 아무  어려운 것도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순종을 해야지, 양부의 말을 듣지도 않는데 양자로 입양될 수 있나요? 당장 파양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양자"(롬 8.15,23/9.4)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 그 말씀하시는 모든 분부는 피조물의 생존에 절대 불가결인 생명의 법칙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을 영원토록 향유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방법인 것입니다.

곧 상대방중심 즉 "사랑" 다시 말해 주님 설명하신 대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즉 "사랑"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ㅡ마 22.37-40)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머리>로서의 본을 보여 주었으니 그 <몸>으로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바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생명 아닌 죽음의 마약/독극물을 지금까지 주입시켰으니 그 결과야 물으나마나입니다. 오로지 주님이 엄중 경고하신 대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ㅡ마 18.3) 자들만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본성으로 움직입니다. 엄마 품에서 생육되니까. 그래서 엄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엄마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이 생명 자체인 줄 터득했으니까.

따라서 "참고 선을 행함이...영생"(롬 2.7)임을 재차 강조해야 합니다. "믿음=구원(영생)"은 이미 거친 전단계이고, 마지막 끝 마무리 단계가 순종의 행함, 행위인 것입니다. 야고보가 거듭 거듭 경고한 대로 아무 짝에도 소용 없이 헛되이 믿어 자기를 속이고 멸망에 들어가는, 만고에 없는 미련한 자, 마귀에게 꺼둘리고 휘둘리는 자가 되지 말라고 온 세상에 경고해야 합니다. 

2026년 1월 3일 토요일

죽음의 세상인즉 죽음의 질서에 보조를 맞춤이 안전의 터전


 

"나를 따르라"(요 12.26)ㅡ필승 강군의 특징은 지휘관의 진두 지휘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감)"(골 2.22). 부패로 결국 돌아가는 것은 무조건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 즉 동물성 육체와 관련되는 일체의 것 그리고 사탄의 지배권 아래 예속된 이 세상 자체.

영원한 영혼답게 육체도 영원한 것이어야 제격인 것이 인간 속성인데도, 영혼은 영원하고, 그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육체는 부패하여 사라져버리는 것이고ㅡ"이건 무슨 코미디(단지 <웃길> 목적으로 <유머>에 중점을 두는 일체의 것)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이거 대체 뭐야?", 사람마다 이렇게 말하도록 만든다면 하아ㅡ이런 신성모독도 없다.

창조주를 아주 우습게 보는 결과를 낳기에 따라서 무신론, 진화론 등 어처구니없는 궤변들을 뱉아놓기에 딱인 바탕인지라 사탄이 낄낄대며 "영적 죽음"이란 말을 일부러 만들어 낸 줄은 모르고, 어리석디어리석은 인생들은 이 불경스러운 언사들을 무작정 따라 하기에만 바빴던, <맹랑하고, 이치에도 맞지 않고, 깜찍하고 당돌하고, 허망한> 바벨론 신학의 그동안의 행패였었다.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에 눈 뜬 이라면 모름지기 각성하여 사탄의 이 패악질에 한 순간이라도 가담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만을 전달해야. 인간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시어 신령한 몸으로 공중이든 해중/海中이든 자유자재로 번개처럼 내왕할 수 있게 하셨으나, 첫 사람 아담이 수하/手下 영물의 거짓말에 휘말려 그 엉큼한 계략에 넘어가 본디의 위계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사탄의 발 아래 기어 들어간 오늘날 만고에 없는 수치스러운 망동이 연출된 것이다.

내 영혼아, 진실을 전하라! 원수의 일방적 행패질에 아랑곳 말고 진리만을 외쳐라. 그러다가 죽으면 죽는 것이다. "죽는 것도 유익*(빌 1.21)이 여기 해당한다. 죽음의 각오 없이 전사/戰士되는 법이 없다.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바울을 위시해 초대교회 사도들은 죽기를 한하고 복음 전파자의 사명울 다한 본보기다. 우리의 사령관("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a Leader and Commander, KJV]를 삼았으니"ㅡ이사야 55.4)이신 주님의 독전/督戰 호령도 똑같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4,25).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그(사탄)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계 12.24,25).

영적 전쟁은 혈과 육으로써의 전쟁처럼 일진일퇴의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초반전'과 '후반전' 두 갈래로써만 나누어진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seed, 씨)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창 3.15)이라 하심 그대로다.

즉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이 먼저이고 "머리를 상하게 함"이 나중인데 이 <나중>이야말로 종결인 것이다. 다시 말해 뱀에게 발꿈치가 물리는 고통이 온 다음에 그 머리를 으깨어버리는 순서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필히 요구되는 것이 오래 참음, 견딤, 인내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이다"(눅 21.19) 하셨으니 즉 인내가 없이는 구원이 성사되지 못함을 단언하심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안일한 생각만 주입시켜 온 것이 바벨론 신학의 허망함인 것이다. 성령께서는 오늘날 환난 중의 북한교회를 통하여 이상 말씀을 확증하시고 있는 것이니 우리가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야.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 <인내로써 결실하는> 자이다"(눅 8.15).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다"(롬 15.4).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競走를 경주하며"(히 12.1). 



우리의 영적 전쟁의 속성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생각의 바탕)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잠 4.23). "생명의 근원"이 마음의 생각이니 우리는 이 문구를 금지옥엽/ 金枝玉葉 처럼 속에 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