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일 목요일

"천사가 가진 복음"의 화려 막강한 배경

<미시세계>에서 우주의 모든 물질에 해당하는 보편적 성질로서의 입자-파동 이중성은 동시에 드러나는 법이 없는 바, 이유는 짝을 이룬 그 둘이 "하나"이기 때문. 이는 <거시세계>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 하신 말씀 그대로의 현상 이라, 이로써 하나님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3위1체"가 오늘날 양자역학에 의해 확증/確證되었으니 바로 그 사례다. 영자역학은 "3위1체"의 현대물리학적 서술/표현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다시,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9-11) 하심으로써 이 엄숙, 엄정한 사실을 재차 확고히 해 주신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그리고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 또한 그러하다. 특별히 이 "한 때, 두 때, 반 때"는 "하나님이 그리시는 그림"으로서의 3운법칙 도식/圖式의 문자형/文字形, 문자화/文字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뿐인가. 3운법칙을 정하신 <때>와 그 <목적> 또한 그림 그리듯 너무나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로써 하나님의 고안, 설계도/設計圖의 오목조목, 아기자기한 풍미/風味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오늘날 사람마다 들여다보고 혀를 내두르는 바도 그것이다. 닐스 보어(1885-1962)의 상보성 원리에서의 "상반/相反은 상보/相補(CONTRARIA SUNTCOMPLEMENTA)"
즉 상합/相合 그대로의 표출이 아닌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요 10.30) 그대로이다.

노자와 다니엘 두 사람 모두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걸쳐 활동했기에 활동 시기가 겹침을 알 수 있다. 공자가 노자를 상면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 노자가 멜기세덱의 변신이라 보는 또 하나의 사유라 하겠다. 즉 다니엘과 노자 모두가 21세기 "마지막 때" 관련된 일을 털어놓은 것이다. 노자가 한 말이 무엇이었던가. 다름아닌 도덕경 42장 25언/言이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沖氣"일 때는 "비어 있는 기운", "氣"이면 "가운데 있는 기운"ㅡ혹자는 氣라고도 하기에).

이 노자를 여기 소개하는 것은 이 25언이 야말로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까닭이다. 노자를 멜기세덱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가 이 25언이 다름아닌 "3위1체" 곧 만유의 기본 대원리 즉 21세기 최대 발견을 명확히 정리하고 있기 때문. 즉 만물은 음과 양의 "하나"됨의 현현/顯現이라는 마지막 부분의 숨은 뜻이 절묘하다. 음으로 보면 음이 양을 업고 있고 양으로 보면 양이 음을 안고 있는 것이 만물이라는 것이다. 음과 양은 짝으로서의 둘이나 "하나"가 되어 있음을 말하는 정확한 표현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해석인 것이다. 3위1체 자체를 모를 때이니까. 노자의 이 "음양"이라는 설명은 이 부분 딱 두 마디로써만 끝내고 그 어디에서도 달리 더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신기하다. 다시 말해, 노자는 여기서 음양론을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3위1체를 예고/豫告하고 있는 것이다.

"3위1체"를 이토록 간결하게 그러나 충실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다른 그 어떤 문헌에서도 구경할 수가 없다. 특별히 "三生萬物"이라는 결구(結句). 바로 ""3위1체'가 만유의 기본 대원리"라는 대사자후/獅子吼이기에.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벧후 1.16) 사실 그대로 피력함이다.

이로써 21세기 이 마지막 때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과 그 복음 말씀의 진실성은 훌륭하게 입증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하나"됨의 구성 요건 즉 짝을 이룬 갑과 을이 "하나"(병)를 이루려면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다. 즉 갑과 을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이는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제 것"(요 27.10)이라 하셨고 "아버지께서 저 안에, 제가 아버지 안에 있어"(:21) "우리가 하나가 된 것"(:22)이라 밝히심 그대로다.

즉 만유의 모든 이치는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 곧 "3위1체"에서 결론지어지는 것. '상대성의 동시성'이다.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생명과 삶의 이치는 <상대방중심>인 것이다. 허나님 계시는 모습이신 3위1체가 그 뿌리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철저히 성부께서는 성자를 위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를 위하심의 일거수 일투족이시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거룩하신("독생자까지 아끼시지 않고 우리 위해 내어 주신"ㅡ롬 8.32) 뜻을 받들어(<성부를 위해>) 당신 자신을 우리 위해 바치셨고, 성부 또한 <성자를 위하셔서> 그러한 성자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성자께서 스스로를 살리신 또는 스스로 부활하시어 다시 살아나심이 아니었던 유일한 이유이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롬 12.19/히 20.30) 하심도 바로 이 이유에서다. 하나님의 심판도 이 상대방중심의 원리원칙에서이시다. 즉 우리의 원수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이다. "3위1체"야말로 하나님의 모습이시요 일하시는 방법이신 것이다. 이 엄정한 진실이 오늘날 마지막 때에 이르러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으로 만천하에 밝혀져 증명된 것이다. 

2025년 12월 29일 월요일

단순히 생각하고 쉽게 설명하도록 되어야 (2)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설명해야 하는 것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은 "상대방중심으로 살기"로 모든 사람이 서로 약속하는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에 모두가 나를 위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이상주의 실천은 없는 것입니다. 소위 공산주의가 이상주의인 것만은 사실이나 이렇개 단순히 생각하여 쉽게 설명할 줄을 몰랐기에 "20세기 최대 악마의 화신"으로 전락하는 환멸의 비애를 맛보는 불행을 겪은 것이니 이는 누구나 시인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솔선 수범의 상대방중심으로 나가는 약속 운동을 하는 대신, 미련하게도 강요, 강제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다보니 "이보다 더한 악마 짓을 일찍이 구경한 적이 없다"라는 소리만 듣게 된 것입니다. 쉽게 설명해서 사람마다 성자, 성인이 되자는 약속을 이행하는 솔선수범입니다. 이것은 공허한 헛구호가 아닙니다. 파급력이 확실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창조주 하나님이 정해 주신 "양심"이라는 불문율이 새겨져 있기에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 이 "약속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으로서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는 절대불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은 오늘날 3위1체와 3운법칙으로 충분히 입증되기에 서두에서부터 소개한 것입니다.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 정풍 내지 정화운동이라 해도 좋으나 대국적으로 보면 전도 활동입니다. 오늘 죽울지 모르는 인생인데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니까. 선한 행실을 앞세우는 건전한 전도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영생 구원을 말함이 아니라 3위1체에 의한 생명의 법칙 소개 또는 구체적인 삶의 방향(자아 지향이 아닌 상대방 지향) 제시라 해도 무방하기에 그러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남을 생각하는, 정다운 이웃, 친절한 사람 만들기 운동입니다. 상대방중심이니까 그런 것이야 말하나마나입니다. 세계 평화 운동이기도 합니다. 반복하지만 나 한 사람 나 위하지 않음이 만인의 나 위함의 혜택을 누리게 함으로 전환되어 오는 극적인 역전/逆轉사람마다 맛보고 직접 체험하는 희열을 누리게함이 이 약속의 특점이자 장점인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고 남이 손해 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더 풍성한 삶"(요 10.10)을 향유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합니다. 자기 상대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모두가 나를 위하는 것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나를 위함보다 여러 갑절로 그 수백, 수천, 수만, 수억배로 위해지는 기적 아닌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단 모두가 이 약속 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다 함께 <우리>를 위하는 운동입니다. 전체 인류 사회로 하여금 훈훈한 훈풍에 휩싸이게 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면 여기 노숙자가 있는데 내가 가진 것 다 그에게 주어야 하느냐" 한다면, 부유함 자체를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눅 6.24). 죽음의 세상이므로 이런 동물적 육체(신령한 몸을 잃어버린)로서의 삶이란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시니까(:25-35). 따라서 이런 것을 문제 삼는 것부터가 무의미.

"노숙자, 운운" 하기 전에 자기의 부유함 또는 "세상에서 산다"는 의식부터 즉각 청산함이 시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자기 생명(하나님 앞에서의 영생의 희망과 기대)마저 심각한 위협을 받으니까.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업에 희사할 계획이 되어 있지 않다면 사회 공익 사업에 헌납하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훌(사회 또는 국가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 상대로 구제 활동을 하는 것) 사업체를 설립해 운영하거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설명하도록 되어야

 



여기서 가장 의의가 깊고 따라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아 마땅한 것은 삶과 생명의 법칙이 이에서 파생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당연 귀결로서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상식적이어야 할 이 일이 너무나 오랫동안 감추어져("무시되었다"고 해야 오히려 옳은 표현일 듯)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생명의 법칙(다른 말로는 "사랑의 법칙" 또는 "하나"됨의 법칙ㅡ여기서 "하나"는 요 10.30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을 어김이 죄("범법/犯法, 불법"ㅡ요일 3.4)요 따라서 아담의 자아중심이 그것이고, 악마 사탄의 범죄가 그러하고, 주님의 우리 위한 희생 제물되심도 이에서 비롯되는(상대방중심으로서의 "의"ㅡ"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 것",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 2.29/3.7) 것인만큼 성경의 핵심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역설해 온 대로, 죄와 악은 <자아중심>이요 그 반대인 의와 선을 행함은 <상대방중심>입니다. 이와 같이 나를 위하지 않고 일관되게 남을 위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 즉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어 있으면 예외없이 그러하니, "우리 중 누구든 자기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소유)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된 모두를 가리켜 성경"은 성인("saint")"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성도/聖徒"라 되어 있는데 제대로 된 번역이라면 "성자들",  "성인들"이라 해야 마땅합니다. 마치 단지 <명칭>만으로서의 "성인"인 양 아주 그릇된 인식을 심어 놓은 것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기독교"의 실태였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런 고로 "참고 선을 행함이 영생"(롬 2.7)이라 한 것인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2.16)는 말을 엉뚱한 데에다 갖다 붙여(마귀의 농단인 바벨론 신학), 믿은 다음의 핵심인 순종의 행위마저 무조건 부인하여 배척해버리는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절대 다수를 지금까지 멸망으로 유인해 들인 것.

이런 "바벨론"으로부터 화급히 틸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ㅡ계 18.4)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심판 전의 경고이신 것입니다. 만유는 상반/相反(대칭/對稱)입니다. 이것 아니면 반드시 저것일 뿐이니 그 선택은 각자의 자유 의지로써 좌우됨인즉 이 경고를 절대로 가볍게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또한 상반이니까 반드시 인과/因果 관계라 창조된 세계요 창조주 하나님이 관할하시는 세계임이 명백함을 이해함은 상식 수준입니다. 자기 의지로써 각자의 선택에 따른 정당한 응보/應報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대로 살아야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님을 3위1체는 가르칩니다. 그 가리키는 방향은 모든 사람에게 덕이 되어 이득이 되는 <상대방중심>입니다.

이 상대방중심이야말로 이상향적 삶을 꿈 꾸는 모든 이지적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입니다. 곧 3위1체에서의 '제3위"의 의미로서 모든 아름다움의 본질입니다. 대칭미/對稱美는 성경 고전 7.4의 "한 몸"(창 2.24) 기능/機能이 그 대표적 설명입니다. 즉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이요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소유.

갑과 을 둘이 "하나"로서 "짝"을 이루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합니다. 이것이 상대방중심인 고로 쌍방 어느 쪽도 자아중심일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자기를 위해 주는 상호간의 관계이니까. 이것이 하나님 정해 주신 삶과 생명의 법칙 즉 사람이든 영물/靈物이든 두루 통하는 <사는 법>인 것입니다.

아무리 "구원 받음을 확신한다" 해도,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하신 대로 여전히 이기주의적 욕심대로 하여 자아중심이면 이율배반이라 자기를 속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계 14.6)이 이를 지적합니다. 고로 21세기 복음 전파는 <여기서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니 무턱대고 "믿음으로 영생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자아중심의 길로 잘못 들어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아담 범죄이므로, 이러한 "죄의 몸"(롬 6.6)으로부터의 해방이 영생/구원앤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하나, 한 영이 된 증거는 상대방중심의 마땅한 삶이라는 것을 함께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이비요, 속이는 자 사탄적일 수밖에 없고, 여전히 바벨론의 <죄와 재앙>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중심>의 살인마적 죄악과 <상대방중심>이라는 원래부터의 사람 사는 법 즉 상식 차원의 기초 지식부터 전파해야 마땅합니다. '상대방중심'은 최소한의 기본 도덕율인 것입니다. 소위 율법폐기론(Anitinomianism)이든 율법주의(Legalism)든 백해무익의 부질없는 말장난으로 사탄의 주구 노릇일 뿐입니다.

"혼잡하게"(고후 2.17/4.2) 말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서 왜 "구약에 나오는 도덕법, 십계명"을 들먹이며, "칭의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죄가 거의 언급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는 표현이 잘 사용되지 않는다" 등 해괴한 말이 왜 나돌아야 하느냐입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마 18.3),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막 10.15)입니다.

초대교회에서 3위1체 관련해 지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혼란 중에 헤맨 것도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아는 것으로 충분했고,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전 2.11) 했으니, <'사람' 따로 '사람 속에 있는 영' 따로>로써 <'하나님' 따로 '하나님의 영' 따로>를 설명했은즉 그렇게만 알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성부"와 "성자"의 구분도 없이 무턱대고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미신과 망념에는 사로잡히지 않은 것입니다.




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거룩한 제사장의 거룩한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

"인자를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여 너희를 버릴 때에는 너희가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reward)이 큼이다"(눅 6.22,23). "주님과 그 복음을 인하여"(막 8.35) "세상이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여 버릴 때" 그 자체가 축복이니,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 것은 하늘에서의 상이 엄청나다"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당하셨고 지금도 그 '몸'된(주님 친히 그 '머리'가 되시므로) 교회를 위하여 또 교회와 함께 받고 계시는 모든 고통 고난에 참여하여 주님의 고난과 함께 함이라는 단순한 그 이유 때문이니, 이것이 굉장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입니다.

일국을 호령하는 왕이나 황제가 한 때 어려움을 겪었을 당시 그 고난에 돔참해 주었던 신하에게 (나중에) 그 공을 포상하여 보답하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그 정황을 참작하면 위의 주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이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롬 8.26)이라 한 대로, 이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탄식"의 고통에 모든 <제사장적 기도>를 하는 기도자는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제사장>적이라 하는 이유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자기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바쳐져 그(들)를 살리는 일을 담당하는)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합리적) 예배>"(롬 12.1)라 한 대로 그런 성격의 간구이기 때문.

여기 "성령"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요 10.30)로 계심이 "성령"이시지만,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신 까닭입니다. '실체'를 대변하는 '형체"이심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함께 참여함(방금 설명한 "주님의 고통 동참/同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한, 심장을 쥐어짜듯 하는 우리의 눈물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산 자"는, 자아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는 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관계와 관계 속에 맞물려 있기에 반드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으로써 상호간 "하나"(요 10.30)됨이 생명 자체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자기 신변에 관련되는 일로 기도 제목을 삼는 경우라도, 반드시 하나님 소유로서의 "나'인 것이지 내것으로서의 '나'가 아닌 까닭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고전 10.31)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과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인지라 이는 실로 형용할 수 없는 막중한 가치이기에, 베드로는 "말씀 전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행 6.4)을 첫쨰로 앞세운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가르치심을 직접 몸으로 느끼면서 배운 이러한 사도들의 지도 아래 세워진 초대교회이기에, 얼마나 기도 생활에 비중을 둔 일상 생활이었는지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서로 분방(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것)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방)하라"(고전 7.1-5) 했던 편지 문구로도 충분히 확인됩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ㅡ부부라도 <방을 나누기까지> 기도를 일상화했던 증거입니다. 오늘날 기도를 게을리하는 우리가 마땅히 귀담아 들어야 할 경고라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했듯 우리는 문자 그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살전 5.17)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삶도 적당히 누리면서 영생의 미래도 보장되는 그런 안일하고 편한 것이 천국 복음이 아닙니다.

자빠졌으니 당장 일어나야 하고 내가 일어났으면 다른 사람도 일으켜 세워 주기에 여념이 없는 그런 절박성으로 특징지어져 있는 것이 지금 이 세상입니다. 악령 원수들이 천하에 넘치게 깔려 있어 하시라도 덮쳐오는, 밀어닥치는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 영적 싸움 마당인 것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마 6.13) 구하라 하심도 같은 뚯잆니다. 사탄이 장악한 세상이 아니라면 "시험과 악"에 대해 이 정도로까지 심각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도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림을 인해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이 있기에 그러하며, "마지막 아담" 안에 있지 않는 한에는 사람마다 "죄의 몸"(롬 6.6)이 되어 있음도 이에("육의 몸"ㅡ고전 15.44/"육신"ㅡ롬 8.13)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한 끊임 없이 올리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기도나 하지"가 아니라, "기도부터 하는" 것을 몸에 익힌 사람이야말로 실로 <복 있는 자>라 할 것입니다.

"천사가 가진 복음"의 화려 막강한 배경

<미시세계>에서 우주의 모든 물질에 해당하는 보편적 성질로서의 입자-파동 이중성은  동시에 드러나는 법이 없는 바, 이유는 짝을 이룬 그 둘이 "하나"이기 때문. 이는 <거시세계>에서, " 나와 아버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