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3일 토요일

21세기는 천사의 복음에 의한 교회 최종 연단의 때



왜 "천사가 복음을 가졌다"(계 14:6)고 했을까, 복음을 천사의 활동과 관련시킨 것으로는 이 외의 성경 다른 부분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의 "마지막 때"와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 14장 앞 13장에서는 적그리스도("짐승"으로 표현되어ㅡ네피림으로서 악령의 '씨'이니까)의 출현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고로 이 21세기 사건임은 명백합니다.

기록된 순서가 반드시 시간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설명상 그렇게 앞뒤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늘의 전쟁"(12:7)에서 미가엘이 통솔하는 천사 군단이 사탄 일당을 상대하여 일대 접전을 벌였다는 기록도 마지막 때의 예언서인 계시록에만 나옵니다.

따라서 사탄이 대패하여 그 악당 떼거리가 항구적으로 천상으로부터 추방 당하는 광경이 역시 묘사되어 있는데, 바로 1908년 6월 30일의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사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세상 사람에게는 "퉁구스카 대폭발(tunguska event, tunguska explosion)"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그 후로 1백년 넘게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대충돌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가 없고 뿐만 아니라 당시 이를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길다란 전신주 같은 것이 지상으로 내리꽂히는 것이 보여졌으며 두 눈이 퉁방울 같이 거대한 용이 흐느적거리며(인터넷 검색에서 확인됨) 공중 높이 지나갔다는 진술이 있어 확인되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연 성경에 예언한 대로("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 것이다.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ㅡ계 12:12), 1908년 이후 연속되는 대재앙들이 또한 그 증거입니다. 1917년 시작된 소위 "공산주의 혁명"의 난동으로 희생되거나 숙청된 사람들, 그 외 기아, 강제 노동, 처형, 추방 등으로 인한 사망자를 모두 포함하여 수천만에서 최대 1억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공산주의 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에서는 약 9,4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독감(1918~1919)으로 2천만 명에서 최대 5천만 명(일부 추정치는 그 이상)이 세계적으로 사망했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약 1,500만 명에서 2,200만 명의 사망자, 제2차 세계대전(1939ㅡ45)에서는 홀로코스트와 원자폭탄 투하 등 포함해 7천만~8천5백만 명의 사망자. 소련 대기근(1932ㅡ33)에서 최소 500만 명 이상, 중국 대기근(1959ㅡ61)에 2천만~4천만 명의 추정 사망자라고 합니다. 그 외 간헐적으로 일어난 대소 사건 사고까지 합치면 실로 "땅과 바다는 화 있을 것이다" 한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미루어 볼 때 지금이야말로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14:6,7)ㅡ이 메시지의 때가 바로 지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음 단계>는 바벨론 심판으로서 각종 재앙이 닥치고("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이다 하더라ㅡ14:8), 그 <다음>이 악한 자 곧 적그리스도 출현입니다("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ㅡ14:9).

또 하나님 백성들에 관해서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지금 이후로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하니,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저들의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니 이는 저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다' 하셨다"(14:13) 함이 이루어지고, 또한 "짐승 앞에서 이적을 행하는 거짓 선지자"(19:20)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는"(13:15) 사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계시록은 또한 이 때를 가리켜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추방된)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는다"(계 12:14) 했는데, 천사가 다니엘에게 말해 준 그 "하나, 둘, 반"이란 특이한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21세기 하나님의 교회 연단은 "천사의 복음"이 그 주축을 이룬다고 할 것입니다. 

2025년 12월 12일 금요일

천사의 복음과 바벨론 신학 그 구체적인 핵심적 차이

야고보서는 평이/平易하게 아주 쉽게 성경을 풀이합니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러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아래 요한의 지적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사랑의 행위가 없는) 자는 사망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다"(요일 3:15).

즉 믿음은 마음으로만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몰라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이제는 알았으니(믿었으니) 당연히 순종하여 악(나쁜 것)이 아닌 선(좋은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함이란 뜻입니다. 바벨론 신학 곧 사탄의 거짓말은 이러한 믿음=순종=행위라는 너무나 상식적인 것도 말끔 지워버린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지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면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는, "믿는" 자가 그러하다는 주님의 말씀이신데("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ㅡ요 5:24), 이를 요한이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즉 믿으니까 순종의 행함으로 그 믿음이 드러난다는 의미인 것.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인데 그 <믿음이 순종의 행함으로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너무나 상식적인 이치도 그 옛적 에덴에서처럼 사탄은 바벨론 신학의 황당무계의 거짓말로 뭉개버린 것입니다. 논리에도 맞지 않는 속임수임이 뻔하건만 먹혀들어가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는 아담의 죽음을 "영적"이라고 둘러대는 것과도 관련됩니다. 무척이나 알쏭달쏭한 얼버무리기 표현으로 거짓말의 고수나 즐겨 쓰는 수법의 주절거림입니다.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율법을 행함(순종)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밖에 없었던 모세 시대 개념을 억지로 갖다 붙인 횡설수설의 넌센스입니다. 은혜 시대에 왔으므로 아무도 율법적 행함을 들먹이는 자가 없는데도! 아무리 바벨론 신학자라도 이다지도 분간을 못한단 말인가요!

"선을 행함"("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ㅡ롬 2:6,7)은, 창조 이래 모든 삶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럼 악을 행하란 말인가요. 미워하고 강탈하고 도둑질하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나요.
 
그러하나 아담 범죄로 돌연히 동물성 육체 즉 자아중심의 "죄의 몸"(롬 6:6)이 되어버린 결과로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게"(3:10) 되렇듯 "죽은 자"(마 8:22)는 산 자부터 되는 것 즉 새로 창조됨(성령으로 다시 남)이 시급하고 최우선 순위입니다. 우리의 "구원 받음"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구원만 받으면 무조건 영생 복락이 아니니, 천만의 말씀! 이제야 비로소 <산 자로서의 선을 행함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그 뜻일 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 8:2)되는 것부터가 시급했었는데 이제 해방된 것입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바가 바로 이 의미입니다.

"율법(선행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계명/"하나님의 뜻"ㅡ마 7:21)이 육신("죄의 몸")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죄와 사망의 법" 즉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옴으로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세!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었던ㅡ롬 7:23,24) 그것을 하나님은 (해결)하심입니다.

곧 죄(자아중심의 동물성 육체 때문인)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하심으로써(사형에 처하시어ㅡ우리 위한 죽으심) 이제 이 육신(저아중심의 죄의 몸)을 따르지 않고(주님의 이 죽으심이 내 죽음 즉 나와 함께 하나되어 죽으심이라 내가 죽었은즉) 그 영(성령)을 따라 행하는(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주님과 "하나", "한 영"됨으로써 다시는 자아중심이 어닌 상대방중심, 하나님 중심이기에ㅡ요 10:30/고전 6:17)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이 사탄 지배하의 악한 세상에서 "참고 선을 행함"ㅡ롬 2:7)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3,4)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 받음"은 하나님 앞 <산 자>로서 마땅한 <사랑과 순종의 "선을 행함"으로써 영원무궁 삶을 향유함에 있는 것이지, 그냥 무턱대고 영생 누림이 아님(선행이든 악행이든 무조건 죽지 않고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닌)을 명확히 다시 밝히는 바로서 재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은 증거, 그 열매가 무엇이냐 물을 때 서슴지 않고 나오는 답변이 자아중심이 아닌 하나님중심일 수밖에 없는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선행의 결론이 "영생"(:7,10)입니다.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2) 한 그대로입니다.    

무지의 암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해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신성한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

더 이상 바벨론 신학과 바벨론 교회의 종살이에 매여 있지 맙시다. 사탄의 멍에일 뿐입니다. 왜 에덴을 자연계 동산이라고 부질없는 고집을 부리시나요? 에덴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있어("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ㅡ창4:16) 그것이 근거라고요?


"에덴"아라는 말이 금기어가 아닌 이상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쫓겨나 그 옛 추억의 황금 복지 에덴을 그리면서 얼마든지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지 않나요? 그것도 무슨 잘못인가요? 에덴의 강 이름 유프라테스(현재의 메소포타미아 강)도 마찬가지입니다("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ㅡ창 2:14). 지명만 아니라 강명도 얼마든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지요.

성경(구약)은 분명히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못박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우셔서 자연계 동산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하시겠나요.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으니"(이사야 51:3).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뭇가지"(에스겔 31:9).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움으로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다"(에스겔 28:13,14). "두로왕/"을 타락한 그룹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자연계 동산에 무슨 영물 그룹(cherub)이있답디까?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스랍을 상징함인 듯)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3:24) 했는데, 천사도 아닌 막강한 스랍/그룹을 동원하심은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 인간 관련해 협잡질을 못하게 아예 차단하심입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에덴 족속"(왕하 19:12)도 있고 사람 이름도 있다고 해서("요아의 아들 에덴"ㅡ대하 29:12) 성경의 에덴이 실제 자연계 동산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앞서의 설명대로 스랍과 그룹이 진을 칠 수 있는 영계(초자연계)가 에덴 동산인 것입니다.

이 세계가 대칭성으로 양립하는 양면의 세계임을 알려야 합니다. 보이는 가시적 물질세계뿐인 줄 착각하는 미망에서 세계 사람들이 벗어나도록 하는 선각자 구실을 합시다. 악령들의 농간으로 너무 무식 무지의 어두움 가운데 방황했습니다. 

2025년 12월 11일 목요일

아직도 구태의연한 바벨론 신학의 복음 아닌 복음을 말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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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 모두 죽은 자들이니까 산 자가 되도록(산 자로 복귀되도록)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는데 왜 "너희(구원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했는가? 왜 또 "죽었다"고 말하느냐? 아담 범죄로 인해 신령한 몸을 잃어버려 하나님이 애당초 산 자로 창조하셨던 그 창조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두루뭉술 어정쩡 어중간한 상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산 자가 아니면 죽은 자일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 아담이 범죄로 죽음으로써 이전의 그 신령한 몸을 잃고 현재와 같은 동물적 육체로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은 자"라 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고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신령한 몸 즉 완벽한 육체로써 살지 않는 한 절대로 "산다"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연속일 뿐이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이런 인식으로 시종일관하기를 요구하심은 당연하십니다. 동물이야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생명이기에 죽는 것과 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생명이지만 인간(아담)은 처음에는 동물성 육체를 바탕으로 "하나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나 다음 단계로 실제 하나님의 형상답게 영생하도록 영혼을 다시 조성해 넣으셨기(아담의 코를 통해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때문에 신령한 몸이 아니고서는 '사람'이란 요건에 들어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애초 창조된 사람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한 번 태어났다가는 죽는 존재이므로 도저히 원래의 "사람"이라 할 수는 없고 그 대신에 "죽은 자"("산 자"가 아닌)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강조하지만, 현재의 인간을 우리는 "죽은 자"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 사용하는 것이(주님 친히 본을 보이시어 말씀하신 것처럼ㅡ마 8:22), 이 "천사의 복음" 시대인 21세기 우리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견지할 온당한 자세라 할 것입니다.

21세기 전도법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왜냐면 이렇게 강조하면 듣는 이마다 황당하다 싶어, "당신 미쳤어? 왜 멀쩡한 사람을 두고 죽었다고 해?" 하고 그 이유를 묻개 되고 자연히 전도의 대화는 시작될 테니까. 우리는 또 진실 그대로를 피력함이니까 꿇릴 이유도 없습니다. 이 중요 핵심 진실을 혼자만 알고 전달하지를 않는다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고전 9:16) 한 바울 사도의 말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새기 복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영생하도록 만드셨다 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고/人間苦에 대한 완벽한 설명의 답변이 되니까 바로 "천사의 복음"(계 14:6)이요 이제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어처구니 없는 "영적 죽음"이란 궤변을 단번에 격파하는 철퇴가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 어버이 자정의 하나님이신데 이렇게 이유 없이 육체적 고통 중에 인생을 방치해 두실 리가 있나요? 일론 머스크를 위시해 많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 아닌가요? 입을 닫아 둘, 도리어 이 질문 앞에 쩔쩔 맬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는 새로 등장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부터 전파되었던 것이나 사탄이 초능력의 세상 지배권(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넘겨 받은"ㅡ눅 4:6,7)으로 재빨리 손댐으로써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했던 바울 사도 생전에 그 지경이 났으니 하물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말해 무엇하리!

그러고도 2천년 세월이 지났으니! 이것이 세상 실상입니다. 세상을 제멋대로 주물러놓은 것입니다.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은 "하나님 통치하는 세계인데 감히 피조물 사탄이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에 손대다니" 하고 철부지 소리만 하겠지만, 손댄 것이 아니지요. 에덴에서처럼 거짓말을 해놓고 꼬드긴(여자를 꼬드긴 것처럼) 것이고 세상은 여자처럼 넘어간 것입니다.

약해서가 아니고 악해서입니다. 약한 것은 악한 것으로서 성경은 규정합니다. 허물과 불찰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이십니다. 인간을 약한 자로 만드신 적이 없으시니까. 언제나 자아중심에 휘말려 지내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련해서는 게으름도 자아중심이요 무식무지도 자아중심이 그 뿌리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꺼낸 적이 없는데 새삼스레 '영생하게 되어 있었던 아담의 신령한 몸, 운운' 하면 이상하게 들리지 않겠느냐?" 하고 이 내용으로 복음을 말하기를 꺼린다면, 분명히 단언컨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게 되리라"(마 10:33)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신지 아닌지 그것만 각자 자기 심중에 판단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면 지체없이 목숨을 걸고라도 그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막 8:38) 하신 말씀과 같은 결과로 되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니까. 이 "천사의 복음"이 진리라는 증거는 이와 관련된 그 증표에 있으니 다름아닌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가 그것입니다. 이 도식/圖式 따라 3운법칙, 3위1체 등이 밝혀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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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최고 으뜸의 낙을 삼아 "항상 기뻐함"(살전 5:16)이 나의 힘/운동력(느헤미야 8:10)

하나님을 최고 으뜸의 낙을 삼아 "항상 기뻐함"(살전 5:16)이 나의 힘/운동력(느헤미야 8:10). "아버지 품속"(요 1:18)의 의미.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신다"(요 8:29).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상대성의 동시성입니다. 하나된 둘은 함께 동시에 움직임이 그 하나됨의 특징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은혜인 줄로만 착각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거저 은혜로 선물로서 믿으면 되는 구원으로만 생각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주의에 흘러 우리 구원을 우리 자신 스스로가 망칠 뻔한 것입니다.


물의 성질 그리고 그 생명은 흐름에 있어 흘러 보내지 않으면 고여 썩게 마련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은 모름지기 흘러가는 데가 있어 그리로 방향을 정하듯이 그래서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듯 
나 쪽으로가 아니라 항상 나 밖의 상대방 쪽을 택하여 일향/一向 일진/一進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항상 상대방중심입니다. 이를 생명의 법칙이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3위1체 법칙에서의 "3위"적 작용 즉 "하나"됨(사랑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이제까지 그저 막연히 사랑은 사랑일 뿐이라고만 인식해 왔지만, 이와 같이 엄밀히 법칙임이 명확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어느 것 하나 빈 틈이 없고 아리송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원리원칙대로 하시니까 우리도 100%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 앞에서 만인 균등입니다. 여기 진정한 자유가 깃듭니다.

물론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요일 4:19)입니다. 주종 관계이니까. 본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심이니"(요 5:19) 하심과 같습니다.

노동을 해도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상대(남)를 위함입니다. 모두가 다 그러하니까, "우리"를 위함입니다. 공산주의(인류의 오랜 염원/숙원으로 인식되어)가 이상은 거창하게 보였지만 실패한 것이 이같은 공동체 의식 결여에서 온 것입니다. 3위1체에서의 핵심되는 부분으로서의 "하나"(요 10:30)됨에 대한 무식무지 때문입니다. "한 몸"의 원리에서 보듯이 갑은 을의 것, 을은 또 갑의 것이 되는 이치를 간과함입니다.

이것이 짝을 이룬 둘의 "제3위"로서의 관계 형성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갑 안에 을이 있으면 을 안에 갑이 또 있어 갑의 것은 을의 소유이고 을의 소유는 갑의 것입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설명을 해 오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14:10)이라 하셨고, 또한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17:10)이라 하심이 모두 이 대원리를 말씀하심입니다.

나만 구원 받으면 끝난다는 자아중심에서 이제는 탈피해야 합니다. 애당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 창조주 아래에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머리로 모셔, 만민이 그 몸의 지체로서 평등하게 소중한 한 부분씩 이루어 있음을 말함이니까.

여기서 만인 구원설을 피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이요 그 뜻을 따르지 못함으로 현재의 비극이 빚어졌은즉 본시 형태로 돌아가자는 호소인 것입니다. 자아중심을 버리고 너나 없이 상대방중심인 생명의 법칙에 순응하자는 아주 단순한, 누구나 이해하기에 어려울 것이 없는 구체적 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셔서 확립해 주신 영원 불변의 것으로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하신 그대로입니다.




21세기는 천사의 복음에 의한 교회 최종 연단의 때

왜 "천사가 복음을 가졌다"(계 14:6)고 했을까, 복음을 천사의 활동과 관련시킨 것으로는 이 외의 성경 다른 부분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의 "마지막 때"와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 14장 앞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