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3일 목요일

주님 오시기 전 나타날 엘리야는 우리 모두의 각자를 가리켜

주님 초림 때 엘리야의 능력으로 임했던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능력을 나타내기커녕 오히려 죄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주님 재림 때도 마찬가지. 21세기 능력의 엘리야는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신 우리 모두 각자이니 우리 각 사람을 통해 주님 <친히 역사하심>이다.





21세기는 "절대적 진리" 활성화의 초입 단계

 


모든 인간이 만유의 기본 대원리로서의 3위1체의 법칙(짝의 법칙)을 기반으로 작동되는 3운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음이 21세기 오늘날 확증되었으니, 이 거창한 검증 작업은 셈(산술)을 할 줄 아는 초등생 정도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유사 이래 초유의 대충격, 대사건에 오늘날 21세기인 모두가 직면해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지금까지의 "과학적 주장"을 뒤집어 엎고 진리의 "절대성"을 부여하고 보증한다는 폭탄 선언이 이 "마지막 때에 
"탄생한 것이다. 인간 생애를 낱낱이 해부하는 연구이니까 "인간학" 또는 "인류학"이면 충분할 것을 왜 굳이 "신/神인학"이라 하느냐 한다면,  성경과 깊은 관련이 있어 그 존재 가치가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3운법칙의 절대적 필요성과 그 정해진 시점(때)을 확정해 놓고 있어 이 사실을 무시하고는 3운법칙 자체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둘(성경과 3운법칙)은 불가분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종전의 "신학"이라는 개념을 이 "신인학"에 종속 병합시켜 학문다운 학문으로서 새 출발할 것을 감히 권면하는 바이다. "신학"이란 것은 처음부터 어폐가 있으니 성경 이해는 창조주 하나님의 직접 "계시"(마 11:27)에 의함이지 인간의 학문적 분야가 아예 될 수 없다는 그 특성 때문이다. 따라서 신인학은 신론에서 종전의 "신학"을 논하고 그리고 3위1체의 법칙을 양자역학의 연구 결과와 병행하여 심도 있게 다루고, 인간론에서 3운법칙의 다양한 인간 생활 지배 양상을 다각도로 연구 주제로 삼아 통째로 묶어 진행될 것이므로 자못 흥미진진한, 신선한 측면을 촉발시키게 될 것임을 장담하는 바이다. 


3운법칙 연구가 그 주류가 되는 신인학은 그 시초부터가 "계시"였음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3운법 칙의 도식/圖式을 형성하는 3운법칙의 구조도/構造圖가 성경  중 21세기 "마지막 때"를 지목하는 부분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라는 특이한 문구의 예언으로 이미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이나 이 21세기 "마지막 때"를 겨냥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아래는 AI가 정리한 것



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12ㅡ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그 분 안에서 약하나...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우리가 <은혜>로 <값 없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 죽어 있던 내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이니 창조는 하나님 홀로 하시는 작업이지 피조물과는 전연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죽었던 자가 산 자로 생겨났다는(1) 단순히 그것만으로 전부가 아닌 것이다.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산 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2) 되는 그 첫 걸음을 내어딛는 출발점이라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

즉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일절 위하지 않고 나의 상대(하나님과 및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내 이웃" 즉 믿음의 형제자매)를 오로지 위함이다. 이런 짝(대칭)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한 몸을 구성함이고 "명령(계명)"과 "순종"으로서의 상부상조/相扶相助인 것이다. 일방적인 것은 처음부터 숫제 존재하지를 않는다.

지금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은 (1)만 취하고 (2)는 버리는 아무 쓸모 없는 빈 껍데기였던 것으로 모든 사람을 속임이었다.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된"(마 18:3) 이들만 제외하고는. 이 생명의 법칙은 사람 삶의 상식선에 머무는 것이지 무슨 심오하고 고매한 것도 아니다. 상호간의 약속이 중요하고 한 번 약속은 변함 없이 충실히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생명이다.

지금도 이러한 이상향적 삶은 상호간 사회 계약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소위 "공산주의" 이념이란 것이 이래서 생겨난 것이나 본질은 무시한 채 형식으로만 급조된 탓에 <모래 성/>의 시행착오만 되풀이하고 독재자들의 노리개감으로만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본질이란, 생명의 법칙에서 그 핵을 이루는 "자기 부인" 즉 자기를 위하지 않는 철저한 이타주의의 상호 협약이다. 이것은 자진자발적인 사랑에 기초하는 것이지 강제와 억압으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애초 하나님 창조에서의 생명(영생)도 이러한 "언약"(호세아 6:7)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인생을 죽음의 파경으로 몰아넣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불순종)도 이 "언약의 어김"(:7)이다. 주님께서는 이 언약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도 하셨으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처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셨고,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다"(10:18) 하심과 같다.

창조 때부터의 원리원칙은 그러하나 아담 범죄로 인해 생명의 신령한 육체가 망가져 현재는 "죄의 몸"(롬 6:6)으로 전락한 죽음의 육체라 새로 창조됨의 "성령으로 다시 남"(요 3:3,5,6,8)이 없이는 전적인 무의미로 그칠 따름이기에,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롬 3:20)이라 한 것이다. "죄의 몸"(롬 6:6)이 시퍼렇게 남아 그 "죄와 사망의 법"(8:2)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기에 이와 같이 자아중심인 이상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일체의 복종, 선행 등이 일절 무의미한 것이다.

영생에 대한 욕심뿐인 자아중심 일색이라 아무리 선행을 하여도 복종을 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의인이 아닌 것이다. 성경대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롬 2:13)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실"(:7,10) 그런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저주스러운 "죄의 몸"이 박살나버려 무덤에 장사지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

주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하는 "하나"(요 10:30)로서의 "한 영"(고전 6:17)됨이 없고는, 다시 말해 내 이름으로 나 위해 죽으셨다가 나 위해 다시 살아나신 주님 친히,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 영 즉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시는 원래 모습의 성령으로 내 안에 친히 임하시어 영원히 내 영혼처럼 계시고 내 영혼과 하나되심이 없으면, 나의 "죄의 몸"은 "멸/지지"(롬 6:6) 않고 나는 죽지 않은 것이다.

내가 죽어 무덤에 장사지내지는 역사적 사건이 내 안에 구현됨이,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하나"로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므로 바로 이로써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3:16)가 제대로 적응되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율법의 행위"는 예수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은혜가 깡그리 무시되고 자아중심이 여전하게 살아 있는 채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자 함"인 것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그리고 그 편지글(성경에 수록된 대로의 모든 사도 서신)에서 지적하는 바 "행위 구원"론은, 예수 우리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모세의 율법에 속하는 "할례" 등을 주장하는 교회내에 침투해 온 유대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질타였던 것.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죄 용서하심 받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원도 한도 없이 훌륭히 다 마무리된 것이지 또 무슨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모세 시대의 법을 다시 지키려 함은 예수님 믿음을 무용지물로 돌리려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바울 사도 당시에 그랬다는 것이고 지금은 거의 무의미한 내용인 것이니 지금이야 어느 누가 모세 율법, "할레" 등 관련해 입이라도 뻥끗하는가.

바울 서신은 말 그대로 2천년 전의 바울의 편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시 교회 상황 따라 그려진 일종의 삽화/插畫(우리에겐 거의 무의미한) 정도라고 해 둘. 진리만은 영원불변이기에 성경으로는 전혀 손색이 없으나 지금 지적한 부분만큼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 복음의 내용이란 처음부터 간명한 것이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님이다. 성경은 버리고 사람의 말과 생각을 더 따른 결말의 혼동, 혼돈일 뿐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가르치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 모두 부디 명심할 일이다. 로마서라 해서 특별히 난해한 것도 아니다. 오직 모든 허물은 우리가 <성경에 유념하지 않았다>는 여기에만 귀착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농간이 발 붙일 틈이 없게 된다.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교회 혼란도 없었을 것이다.

2025년 10월 21일 화요일

주기도문 명상 (11)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할 것이다"(야고보서 4:7).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이다"(골 2:15).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악/(evil)에서 건져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주님 가르치신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이고 또 인간 아래 격이 낮은 동물들뿐이라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영장/靈長이요 인간 이상 가는 것이 없는 세상으로 보이나 슬프다, 눈은 떴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가 무진장으로 깔려 있고 널려 있는 이 세상인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원수들(창 3:15), 적대자들이다.

눈에 보인다고 득될 것도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없다보니 아무 일도 없는 양 천하태평으로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 더 끔찍스러운 것이다. 코 앞에 온갖 비극적 위험과 위협을 앞두고도 허허허 웃고 지내는 인생들. 처연/凄然하기보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미친 마음"(전도서 9:3)들이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또 있을까. 이 무슨 변괴/變怪인고!

이런 실상을 제대로 아시는 예수 우리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에서,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고 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 성으로 가까이 오시자 성을 보시고는 <우시며>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눅 19:41) 하셨다.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으셨다"(히 5:7).

이 세상은 비애와 고통, 그리고 눈물이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 20:18-21).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26-35).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으니..."(고전 2:4).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 3:18).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시 6:6).

창조주로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사람으로서 우리의 최고 완벽한 본(보기)이 되시고 가장 기본 모습이 되신 주님께서 눈물을 보이셨으니 눈물 없는 이들마다 "우리가 얼마나 정상에서 벗어나 정서상 메말라 있는 비정상인가" 자탄/自嘆해 마지않아야 할 일이다. 우리 믿음의 사표가 되는 바울 사도 역시 그 <눈물>의 목회/牧會적 삶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에 마땅히 유의해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포효하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음이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다"(벧전 5:8,9). 그러한 사탄을 직접 보는 것과 그래서 노상 직접 대하는 것과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런 줄로 인식하는 것과는, 불행히도 현재의 동물적 육체에 처한 우리로서는 하늘과 땅 차이임을 느낀다.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직접 대하면서 대비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격차를 가볍게 여길 때 화가 있다.

우리 앞의 적대자는 365일 24시간 우리를 노리는 자이다. 이 세상이 그의 영역인 것이다. 인간의 세상이 아니다. 사탄의 왕국이다. 그 권세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모든 영광이 그의 것이기에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습니다" 하고 기도하라 하셨으니 마땅히 마음에 둘 일이다. 이는 "세상에게 한 순간도 굴복하지 않도록 해 주십사"의 간구요 그 모든 시험에서부터 지켜 주시기를 갈구함이다.

이와 같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방금 지적한 <눈으로 직접 확인함>과 같은 <대비> 태세를 취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기본 자세가 되므로 우리의 모든 기도 전이나 후에 주기도문을 곁들임이 좋은 것이다. 입에 너무 익숙하므로 그냥 건성으로 외듯 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며 우리 자신을 긍정적 의미로 세뇌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를 쟁취하신 주님과 하나된 우리 각자는 마귀와 당당히 맞서 대적하면 원수는 물러서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함이 병행되어야 함이니, 이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제 성취하심>일지라도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에스겔서 36:36,37)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으로써만 완전하게 결실하는 이치와 같은 맥락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생명의 법칙에서의 '상대성의 동시성'으로 맞아 떨어져야 모든 것이 비로소 통하는 하나님 법질서의 엄숙, 엄정함인 것이다. 우리가 처한 이 자연계에서 자연법칙이 철두철미 빈 틈 없이 운영됨을 보아서도 우리는 충분히 이를 음미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어야"(빌 2:12) 하는 이유다.

우리가 현재 천하무적 막강하신 "마지막 아담"의 나래 아래 위치하여 원수에게 명령할 수 있고 제압할 수 있지만(야고보서 4:7), 그러나 이로써 사탄을 완전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무력화는 그의 멸망을 말함인데 그 종말은 "마지막 심판" 때에야 이루어진다. 주님의 재림 때에도 일시 유폐되어(무저갱에) 활동을 못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 유폐 기간이 끝나면 일시 방면되어(계 20:7) 움직이나 끝내 패망하여 마지막 심판 후 불 못에 던져진다.

그렇다고 사탄이 무의미한 로봇처럼 되어 활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딴에는 잘만 하면 국면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터이다. 이는 사탄이 일개 피조물로서 또는 능력의 한계가 있어 판단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실제 하나님께서 공평공정하게 언제나 만사를 처리하심이다.

사탄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므로 최선을 다하면 돌파구를 열 수 있다고 자신함이다. 실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사탄 자신이 잘 아는 터이다. 마지막 순간 그 직전까지도 그러한 확신 속에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피조물이라고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시는 일을 아니하신다. 자유 의지 아래 충분히 제 역량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 주심이다. 원리원칙에 어긋나니 책망하시고 징벌하시며 멸망에 이르게 하심일 뿐이다.

뱀을 "지혜롭다"(마 10:16)고 창조주이신 주님 친히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지상의 뱀과 에덴의 용은 대칭이다. 자연계 물질의 속성 그대로 초자연계 영적인 것과 짝을 이룬다. 자연계 동물과 짝을 이룬 것이 에덴에서 창조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창 2:19)인 것이다.

이미 각종 동물은 제4, 제5일째 되는 때 창조를 마치신(창 1:20,24,25) 연후다. 고로 에덴에서 또 똑같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2:19)를 만드실 리 만무다. 이전 것과는 별개의 생물이니 곧 영물/靈物임을 뜻한다. 에덴이 영계라는 것이 이로써도 입증된다. 성경을 읽어도 성령께서만이 친히 가르치심인 줄 의식하는 것이 필수다.

영계로서 초자연계 속성인 에덴에 자연계의 동물들이 그 짝(대칭)으로 용/등 영물/靈物을 갖춤과는 별개로, 인간은 그 대칭성적 존재인 영혼을 자기 몸 안에 갖추게 된다. 즉 우리의 영(혼)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자연계 동물(짐승)과 같은 모양새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뱀을 지혜로운 습성으로 만드신 그대로 그 짝인 에덴의 용/도 창조하신 것인데 이 영특함(지혜스러움)이 도리어 교만으로 작용하게 되어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인 아담을 시기하기에 이른다. 하극상으로 시해/弑害하기까지 하는 망동을 부린 것이니, 즉 거짓말로 여자를 꾀어 선악과를 먹도록 부추긴 것이다. 여자와 뱀 다시 말해 교회와 사탄 간의 "원수"(3:15)됨이 이로써 발단된 것.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신령한 몸을 잃고 동물성 육체가 되기가 무섭게 신령한 광채는 사라지고 벌거숭이가 됨으로써 옷(의복)의 유래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고귀한 신분의 아담인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도록"(눅 12:27) 창조하실 리는 만무하다. 이로써도 아담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음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

그럼에도 인간이 처음부터 이런 동물적인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놀아남으로써 전도의 문이 크게 막혔던 것이니, 이런 비정상적인 육체로 인한 인간고/人間苦가 엄청난 것이라, "이런 고통을 인간에게 끼친 하나님"읊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주를 마음 깊이 신뢰할 수 있느냐"는 회의론에 빠지게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21세기 오늘날 "마지막 때" 모든 전도자는 모름지기 성경대로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띄고 있다.

우리가 "마지막 아담"과 하나를 이룬 교회로서 아담 고유의 절대적 권한과 권위로 사탄 일당을 제압하지만, 아담 범죄 전과는 달라 사탄의 세상 통치권(첫사람 아담에게서 넘겨 받은ㅡ눅 4:6)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각종 핍박과 시험의 대상이 됨은 필연이요 불변이니 이에 유의해야. 그런즉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골 2:15)하셨은즉 주님을 머리로 모시어 그 몸된 교회로서의 우리 역시 동일한 행보로 초지일관해야.

즉 <주님과 같이> 십자가 고난, 죽음의 고통으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고난 고통과 직결되니까. 그리고 성경은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골로새 3:3,4)이라 했으니까.

때문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하였다. 즉 "우리의 돌아보는 것(관심사)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고후 4:18)이다. 세상사, 세상 사랑은 가시적인 것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이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다. 물질로서 썩는 것이요 시한부다. 신령하여 영원무궁한 몸으로 애초 창조되었었던 우리 인간의 속성이 아닌 것이다.

자기 속성도 아닌 짐승의 속성인 한낱 썩는 물질에 불과한 그런 구차한 목숨에 연연하고 관심을 두는 것은 처음부터 영광의 몸으로 우리를 창조해 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엄청난 불경스러움이 됨을 왜 눈치채지 못하나! 애초 이렇게 구차하게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다면 탓할 것이 없으려니와 처음부터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른 사고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가증스럽게 보시는 범죄의 결과>로 이런 꼴이 되었는데도 이걸 두고 세상사, 세상 사랑으로 세상에서 희희낙락, 시시덕거리다니! 이는 하나님의 맹렬하신 "분노"(시 7:11)의 불길에 기름 붓기인 줄 알아야. 내가 하나님 위치에 있다고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뻔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신명기 4:24), 이 둘은 "하나"이다. 물질의 파동성과 입자성 2중 구조에서와 똑같이 그 원리대로, "사랑"이 나타나면 "소멸하는 불"이 나타나지 않고 후자가 나타나면 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둘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쪽이든 마치 그 전체가 그것뿐으로만 인식된다는 뜻이다. 소멸하는 불로 드러나시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무자비한 폭군처럼 시종일관하시어, 자비와 인애는 그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의미로 정착됨을 의미하는데, 이를 깊이 마음에 담아 두어야! 

2025년 10월 20일 월요일

주기도문 명상 (1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것으로 종결된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상대성'의 '동시성'이다. 사랑에서는, 상대를 이룬 쌍방이 동시에 움직인다.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만 강조하여 왕창 속인 것이다.


사랑은 짝을 이룬 둘의 "하나"(요 10:30)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 하나됨의 의미를 성경은 "한 몸"(창 2:24/고전 6:16)의 하나됨으로써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즉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主掌(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니"(고전 7:4) 이를 어기면 붋의, 불법이 되어 간음자가 되고 멸망에 이르는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죄 곧 <하나님 창조와 그 창조물 운영의 법질서에 어긋남>에서는 경중의 차별이 없고 지극히 작은 일 하나도 지극히 큰 범죄 행위와 똑같은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다. 똑같은 자아중심이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한 몸"의 "하나"됨과 대칭되는 것이 "한 영"(6:17)됨인 바, 여기서 적응되는 법질서를 가리켜 <생명(삶)의 법칙>이라 한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은 갑의 소유가 되어 피차간 똑같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짝을 이룬 자기 상대를 위한다. 머리와 몸은 짝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짝이다. 파생/派生한 자와 파생된 자로서의 대칭. 이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이 물질 세계에서 상보성 원리로 표현되는 바 "상반/相反은 상보/輔"(CONTRARIA SUNT COMPLEMENTA)인 것이다.

이와 같이 짝의 법칙이 만유의 기본 대법칙이 되는 이유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獨生子를 낳으심으로써 창조를 시작하심에 있으니 '실체'와 '형체'를 형성하심이다. 형체(형상)는 여럿이 필요하지 않고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 그래서 파생자와 피파생자. 몸과 머리. 고로 성자 하나님께서 만유를 창조하셨고(요 1:3,10),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로 말미암아 창조하셨다>(히 1:2)라고 말하게 되는 것.

자연/물질계가 있으니 초자연계 즉 영/靈계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또 영물이 생존하는 바, 후자는 불변이요 영존하는 불가시/不可視성이나, 전자는 가시적이며 파괴되기도 하고 다시 조성되기도 함이니 "6일" 창조는 전자에 속한다. 반면 에덴은
후자 속성으로서 스랍(seraphim)과 그룹(cheruphim)은 "6일" 창조 전 피조물로, 당시 창조되었던 '영계'가 "6일" 창조까지 존속됨을 말하고 바로 그 세계를 가리킴이다(에스겔 28:13-18).

"6일" 창조 전에 이미 "땅"과 "물"(창 1:2)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그 증거다. 하나님 창조의 "천지"(:1) 곧 하늘과 땅은, 1:8의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다" 할 때의 그 "하늘", 1:10에서 "뭍을 땅이라 칭하시다"의 그 "땅"을 가리킴이다. 성경이 애매모호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읽는 탓이다. 선입 관념에 사로잡혀 <우리 식>으로 읽으려고 덤비는 데에 명백한 허물이 있다.

"물"과 "땅"이 "6일" 창조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 즉 그 이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은 만유의 기본 원리 다시 말해 짝(대칭)의 법칙에서 확인된다. 망하는 세계와 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세계와의 대칭이다. 망하는 세상은 물로 망하는 세상과 불로 망하는 세상과의 대칭이다. 영원불변의 세계는 그 자체가 영원하므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불로 망하는 세상에 속한다.

이는 베드로가 잘 설명하고 있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창 1:9,10)...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벧후 3:5-7). 베드로가 여기 지적한 "물의 넘침"은 노아 홍수를 말함이 아니다. "스랍"과 "그룹" 즉 "계명성(새벽별)"들의 세상을 말함이다. 그 때 그룹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 반역하여(겔 28:13-18). 바로 이 그룹으로 인한 파멸이 "물의 넘침"인 것이다.

이제 곧 닥칠 "불사름"은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 및 악인(죄인)들의 난동을 인함이니, "마지막 심판"으로 막을 내린다. 사탄 등 악령들은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과 속성이 똑같은 영물로서 단지 죄를 지어 악을 행했기 때문에 "악령"이라 하는 것분이다. 인생들 중에 악인이 있고 의인이 있듯이.

"아담 영상/影像(ADAM pix)"이 그 증거. 거룩한 천사들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므로 필자의 스맡폰에 찍힌 것은 반드시 한 악령의 육체의 일부이나 "천사와 악령의 실질적 현현/顯現(Angel and Devil Actual Manifestations)이라 이름 붙인 이유다. 천사도 그 신령한 몸의 육질/肉質은 똑같기 때문이다.

만유가 짝으로 되어 있음은 미시세계 실험(양자역학)에서 모든 물질이 파동성과 입자성의 2중으로 구성되었다는 널라운 사실이 오늘날 전자의 2중슬릿 실험으로 밝혀짐으로써 확증되었으니, 그 '상반'성은 '상보'성임이 즉 짝에서의 "하나"임이 제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구현되지 않고 반드시 둘 중 어느 하나만 나타나기 때문인ㄷ데 이것이 그 확고한 증거다. 이것은 3위1체로서 "하나"이지 않고는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마지막 때" 거의 2천년 해묵은 사탄의 바벨론 신학 그 사악한 거짓을 드러내시고 처음부터 말씀하신 복음의 진리 그 확고부동의 기반을 밝혀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덴이 자연게 한낱 동산이 아니고 영계를 말함이며 그 가운데 한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서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영원히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영생을 빼앗겨 잃게 된 그 직접 원인인 불순종 척결에 오로지 집중함이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우리 모습이었던 "영광의 몸"(빌 3:21)으로 회복하자는 일념뿐이니 나 먼저 그 복귀의 첫 걸음을 시작했으면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도 그렇게 되도록 그 목적으로 "보내심"(요 20:21)을 받음인고로 이것이 아직도 이 어색한 구차한 몸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다. 이런 실상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나 이 죽음의 세상 살겠다고 난리고 아우성이지 이제 하나님의 막중하신 은혜로 모든 진실에 눈 뜬 우리 중에 누가 이 죽음의 세상살이에 감히 연연하겠는가.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專念하기 위해 우리 각자는 이 세상 일정 기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이 세상에 남아 있으려면 "영광의 몸", "신령한 몸"으로는 불가능하다. 생명의 몸으로는 이 죽음의 세상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득불 죽음의 몸으로 죽음과 어울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골 3:3)이라 한 것이다. 예수 우리 주님께서 애초 그러하셨듯이.

그 분과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고전 12:26ㅡ"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스러워지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니")을 이룬 우리이니만큼 당연히 그러하다. 이 육신 및 이 세상과 관련되어 부유하다는 "부자/字"를 입에 올리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그 뜻을 행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영적 부유함이야 말해 무엇하리요마는 비록 새상에서 3환/環법칙(3자간경제순환/三者經濟循環 법칙)을 따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눅 6:38) 하신 대로 "죄인의 재물이 의인을 위하여 쌓이는"(잠언 13:22) 일이 있어도, 여기서 "의인"의 정의/定義는, "없는 자에게 베풂으로써 자기는 없는 자가 되는 것"에 있으니 혼돈스러워하지 말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생활이 "평균"(고후 8:13 14)하게 하심에 있다. 삶의 평준화이므로, 초대교회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유/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행 4:32). 크고 작음(으뜸과 버금)의 차이는 있어도, 누가 보다 많은 사람을 보듬고 섬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다(막 10:44).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구하라" 하신 그 "시험"에 이 세상 사랑이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사탄은 "내게 절하라(눅 4:5-7), 그래서 자아중심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쉬지 않고 유혹하는 것이다. 

2025년 10월 15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마 6:13).

 
오늘날 인간 세상의 모든 부조리, 불합리, 일체의 악과 죄가 아담 범죄 오직 그 <하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아담만 범죄하지 않았다면 즉 불순종에 빠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하여 유의하고 사랑했다면, 오늘날 죽음과 같은 비극은 절대로 생기지 않았음을 강조하여 깨우쳐 주지 않는 한,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함이 없이는 절대로 "영생, 구원, 운운" 하지 말아야. 전도도 그런 내용이어야.

반드시 "(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2)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의 순서를 따라서만 복음을 제대로 전달해야. 이 말은, 예수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마다 향후로는 일절 아담처럼 죄 짓지 않아야 하고, 불순종하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일구월심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

왜냐 하면 그렇지 않고는 "회개"의 의미가 없으니까. 회개가 없이는 "믿음" 자체가 무의미하고 가장 무서운 <자기 기만>으로만 그칠 것이니까. 오늘날까지 바벨론 신학에서 마귀는 교회를 속여 "구원"을 주먹구구식으로 즉 아무 논리도 없는 사탄의 말장난으로만 두루뭉술 뭉쳐 주입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경고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말씀을 받은 이들만은 그 멸망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왜냐면 나를 죽도록까지 사랑하셨으면 나도 그 분을 죽도록 사랑하여 그 모든 뜻과 말씀에 순종함이 마땅하다는 본성적 양심의 소리는 비록 아이라도 다 들을 수 있기 때문.

그렇지를 않고 단지 '그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서의 영생 구원'이라는 대목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 성향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외 없이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멸의 길에 빠져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설명하듯이 모든 인간이 아담 범죄로 비록 "죄의 몸"이 되어 있기는 하나 "양심"(롬 2:15/요 8:9)이라는 하나님이 설치하신 기계 장치만은 불변으로 작동하기 때문(가룟 유다의 자살ㅡ마 27:45).

고로 현재의 우리 육체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의 몸>도 아니고, <원래의 모습대로 나타나 있을 인간 세상>도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구원 받는 일에서 맨 첫 걸음임을 알아야. 아담의 불순종 즉 범죄로 인하여 애초의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을 빼앗겨 잃어버린 결과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즉 들의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다"(6:28,29) 하신 것.

아담 범죄로 땅까지 저주 받아 오늘낧에는 동식물의 많은 종류가 지상에서 사라져버렸고 그 아름다움의 빛이 바래진 것이야 사실이지만 인간보담은 정상인 것이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라고 찬송을 부르지만 실상인즉 저주 받아 퇴색된 삼라만상이다. 비정상인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 그리고 세상이다.

워낙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창조 솜씨이시기에 이 정도나마 아직도 그 미려/화려한 자태의 흔적을 갖추고는 있는 만물이다. 자연계보다 더욱 상위급에 속하는 에덴의 신령한 초자연계 속성을 가리켜,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하는 문장 표현으로 정평이 나 있는 성경마저,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창 2:9)라 했으니까!

하나님의 애당초 영광의 잔재/殘滓에 불과한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롬 3:23) 상태의 살풍경(아무 볼품 없이 삭막하고 쓸쓸한)에 찌든 이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 구원의 지식에 접하기 시작하는 최초의 일보인 것이다. 그 처참한 피폐상은 현재까지의 인간고/人間苦가 충분히 대변해 준다고 할 것이다.

죽음과 썩음의 자연계 물질의 육성/性으로 인한 인간고의 화신/化身인데다, "죄의 몸"(롬 6:6)으로서의 죄성/性까지 겹쳐 영적 정신적 아수라장의 비극에다가, 또한 악령들의 횡포와 철권 통치에 꼼짝없이 놀아나는 판의 현실이니, 이성 없는 금수/獸의 신세가 외려 부러울 지경이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심으로, 창세 전부터 정하시고 만유의 영원불변 철칙으로 운영하고 계시는 생명의 법칙(창조주 하나님은 그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위함으로 자기 자신을 결코 위함이 없는) 따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친히 사람되어 오셨고, 그 몸 바쳐 자신을 내어 주시고 나 위해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이 벌레 같은 나를 살리셨다. 이 망극하신 은혜로 사랑의 어버이 하나님 품속을 알게 해 주셨으니 영원한 감사 찬송을 영원토록 영원토록 올리옵니다.



(아래 <링크>를 충분히 누르면 "열기"가 나옴)


주기도문 송...바리톤 김주택
https://youtu.be/XVtZmktjhjs?si=1ovDmbPpNKSPGcCU

주기도문 송...Andrea Bocelli
https://youtu.be/Tf1wtzOoXDA?si=TiXmjypyhDpB4JXm

주기도문 송...Jackie Evancho
(당시 11세 미국 소녀)
https://youtu.be/Vg2AsS4CErM?si=fwimvoXKt1w8oa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