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3일 수요일

천사의 복음ㅡ우리 각자가 써 내려 가는 "출/出바벨론기/記" (1)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인가"(요 6:30) 하고, 믿을 수 있는 특별한 "표적과 기사"(4:48)를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처럼 지금까지 사탄의 거짓말인 바벨론 신학을 아무 의심 없이 태평스럽게 믿어 오다가 "그 모두 거짓말이다" 하고 "천사가 가진 복음"이 등장하니 모두 황당함을 느낌은 당연합니다.

천사의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징 즉 "표적과 기사"는 천사가 정확히 이 21세기 "마지막 때"를 겨냥하여 다니엘에게 미리 고지/告知해 준 3위1체의 도식/圖式을 문자화/文字한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로써 명확히 드러났고 같은 성격(21세기 예언)의 요한 계시록의 "한 때, 두 때, 반 때"(계 12:14)로 재차 강조되어 확인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한 이유를 말하면, 이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신비한 문구가 이 21세기 오늘 이전까지는 무엇을 상징함인지 무엇을 가리킴인지 아무도 제대로 알고 설명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 예언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예언이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소상히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시점입니다. 3운법칙과 동시에 3위1체가 알려지면서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오늘날의 여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둘>의 <하나>됨 즉 "3위1체의 제3위"에 친숙하지 못했던 관계로, 비교적 이 점을 각종 실험으로 대략적으로나마 간파하고 있었던 보어의 결론에 쉽게 동조하지 못하였기에 필자는 "틀렸다" 한 것이고, 그러나 보어도 "몰랐다"고 한 것은 짝의 법칙의 최초 발견자로서의 위업은 달성해 그 공은 가상하지만 이로써 창조주의 실존을 영적으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이를 지적함인 것입니다.

고로 "아인슈타인은 몰랐고 보어는 몰랐네"를 <천사의 3위1체 복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제/表題어처럼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역시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보어가 자신을 상징하는 가문/家門 휘장에 태극도/太極圖(주역의 태극 문양)와 라틴어로 "상반/相反(짝 곧 대칭을 이룸)"은 "상보/補" 즉 "대립적인 것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라틴어 문구(아래 그림)를 직접 도안해서 새겨 넣었다는 사실은, 어느 과학적 서술의 수식/數式에도 뒤지지 않는 위대성과 당당함을 영원성/永遠性으로 구비한 기념비적 금자탑/金字塔으로 후대/後代, 만대/萬代에 세워 준 쾌거/快擧라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불후/不朽역사적 가치로 보기에 아낌 없는 상찬/賞讚을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시면서까지 오늘날 "마지막 때"의 우리들에게 "3위1체"라는 만유의 최고 기본 원리를 가르치신다고 했지만(그렇게 하심으로써 "바벨론 신학"[계 18:4]의 거짓됨을 훼파하시고 "천사의 복음"[14:6]을 드러내심), 오늘날 닐스 보어의 특이한 가문 휘장도 그런 일환(영원한 진리를 <도안>이라는 "그림"으로 설명하는)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교황'이라 불리기도 했던 보어만이 주역을 공부한 것은 아니고, 알버트 아인슈타인, 칼 융,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치, 존슨 얀, 헤르만 헤세, 요한 괴테, 옥타비오 파스 등 각 분야의 서양 지식인들도 관심을 가졌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동양인인 우리도 철학관이나 점집 등을 연상시키는 기호에 불과해 보이고 한없이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주역"이란 것이, 쉽게 이해될 리 만무합니다.

우리처럼 단순히 음양론(더욱 정확히 말하면 노자의 도덕경 42장 25언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로서 대표되는)에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보어는 이같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필생의 업적으로 중요시했었던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가 음양론 즉 노자의 "三生萬物/삼생만물"과 유관함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입니다.

81장에 걸치는 노자  도덕경의 핵심 사상으로 언급되는 것이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이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삶"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노자'라는 인물을 '멜기세덱'적 관점에서 고찰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창조하신) 대로만 따르고 거기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생명(영생)>이라는 유일한 결론에 금방 이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비극도 그렇고, 우리 주님 예수(히브리어로 "구원자"의 뜻) 메시야로 말미암는 21세기 현재까지의 "새 창조"도 이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말씀, 그 뜻대로만 따르면 일체의 잡다한 인생 문제가 일거에 해소된다는 사자후/獅子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3위1체' 시대 이 21세기의 "전도서"(Ecclesiastes)라고 노아 도덕경을 명명해도 무방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일체의 인위적 작용(유위/有爲) 즉 범죄·자아중심을 떨쳐 버리고(무위/無爲), "자연/自然"(상대방중심·하나님중심) 곧 창조주 하나님과 그 말씀 곧 계명 지키기("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ㅡ요 14:23)로 되돌아가 그 "뜻대로만 하면"(마 7:21) 그야말로 만사 형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게 되면, "자연무위"란 말은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공허한 메아리만 되기 때문. 왜냐, 생긴 그대로 가만 두고 그냥 지낸다 해봅시다. "문명의 발달"은 기약할 수조차 없게 되지 않나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머리를 굴려 "유위"에 "유위"를 거듭했기에 오늘날의 과학시대를 마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노자의 "무위자연"을 하나님의 창조와 결부시켜 일체의 인위적인 헛됨과 연결시키지 않고는 말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용(사탄·마귀)은 부질없이 아담을 했던가요? 하나님이 "6일"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아담을 세우신 것은 용/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을 위하심 곧 그들에게 덕을 끼치기 위함 곧 하나님의 사랑의 <최선>이셨던 것입니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주신 것을 왜 <최악>처럼 여겨 듣지를 않고 그 반대로 행하는 "有爲"를 범하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 정하신 대로 시키시는 대로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롬 8:28)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쓸 데 없는 짓을 해요? 모든 죄악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자아중심의 더럽고 구차한 "욕심"("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인 것입니다.

무신론도 그렇고, 불교나 이슬람교 등 세상 종교도, 인간의 각종 범죄 행위도(창조주 하나님의 붊문율인 양심을 어겨 가면서도 저지르니까) 모두 <인위적인> 것,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마치 각자 자기가 하나님인 양 우겨대는 "유위/有爲"가 빚어내는 해독이요 자초하는 비극입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인들이여,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3운법칙 등으로써 완벽하게 자기를 증거하셨다!"가 21세기 "천사의 복음"의 서두/序頭입니다. "천사의 복음"을 알리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 땅, 바다,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계 14:7)고 함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악령이든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든 3운법칙이나 3위1체와 같은 "표적과 기사"는 일절 나타낼 재간이 없기에 그러합니다. 홀로 창조주께서만이 나타내실 수 있는 유일무이의 "표적과 기사"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큰 이적을 행하여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할망정"(계 13:13) 이 21세기 표적과 기사와 같은 내용은 유일무이한지라 되풀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애를 낱낱이 "3위1체"를 따라 세 갈래로만 구분하여 빈 듬 없이 갈라낼 수 있나요. 그리고 그렇게 철통같이 나타나도록 정하신 <그 때>와 <그 이유>가 성경상으로 입증되어 드러나도록 할 수 있나요. 그 어느 천재일지라도 또는 아무리 초능력을 동원하더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3운범칙의 기본 틀 즉 3위1체의 도식/圖式이 이미 2,500년 전 다니엘 선지자(예언자)에게 천사로 말미암아 "한 때, 두 때, 반 때"로 예고된 것이었고, 다른 예언서 요한의 계시록으로도 재차 확인된 것입니다. 이 2천5백년 전의 시점/時點 역시 도덕경의 노자가 등장했던 바로 그 무렵입니다. 이와 같이 역시 21세기에 등장하게 되어 있는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과 3운법칙은 모든 것이 정확히 맞물려 있어 그 중량감을 더해 줍니다. 이런 것을 그 누가 모방하겠나요.

앞으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낼 아무리 기상천외의 초자연계적 기적이라도(성경은 사탄이 "거짓 기적"도 섞어 속인다고 했으니까ㅡ살후 2:9) 이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적의 유형이 다르고 질적으로도 차이가 있어서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이 행하는 것은 초자연계 신령한 몸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초능력 수준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인간이 워낙 <초라한 동물성 육체>이기 에 이런 초능력에 한 때나마 기절초풍 넋을 잃고 허둥댈 뿐입니다.

"무위자연"을 다시 강조합니다. 왜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것처럼 마치 하나님도 없어 스스로가 하나님인 것처럼 자기 판단으로 일을 저지름으로써 자멸/自滅의 길을 택하느냐 말입니다. 괜한 엉뚱한 교만이 들어 그런 것입니다. 속말로, 죽으려고 "환장해서" 그런 것인갸요.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하셨으면 그 "원수 사랑"이 내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해요?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잠 4:23)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요일 5:3)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거짓말하신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원수 사랑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고,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강조하셨듯이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모든 용서하심도 일체 무효가 됩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ㅡ마 6:12). 이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를 <매일> 올리는 이유입니다. 용서 않고 원수 갚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이 기도에서 확인되듯 내 죄는 용서가 안되고 나의 구원도 유야무야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까닭입니다.

아담 범죄로 "죄의 몸"이 되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가인이 첫 살인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벌하시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의 원하는 것까지 들어 주시고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신"(창 4:15) 것입니다. 과부 사정 과부가 알고 홀애비는 홀애비가 안다 하듯 똑같이 "죄의 몸"(롬 6:6)으로 태어난 터에 나와 똑같이 새 창조로 새 사람 되기까지 기다려 줄 마음도 없는가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이러하신대 우리가 무엇인데 심판하고 벌 주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롬 12:19). 원수 갚겠다 는 생각은 자아중심이요 자아중심으로써 영광의 몸으로 되돌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3) 하시는 선고와 함께 영생 구원에서 영원 낙오자가 됩니다. 바벨론 신학은 이런 모든 하나님의 엄정한 뜻을 묵살해버린 것이니, 소위 "행함으로 얻는 구원" 등의 핑계를 달아 주어 아담처럼 죄에 빠지게 하여 영생 구원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아 온 것입니다. "은혜의 믿음으로 구원 받았노라",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자기 기만의 핑계로 헛되이 천국 소망을 가지며 무수한 사람이 멸망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약하다" 타령에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세상 살라"는 말이 없어요. 외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는 말씀뿐입니다. 이유는 명백하니 이 "죽은 자"("죽은 자들로 저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ㅡ마 8:22)의 세상에서는 죽음뿐이지 생명이 있음으로써 사는 데가 아닌 것입니다.

<애초 신령한 몸으로 살다가 범죄 탓에 "죽은 자"로 전락해 이런 인간고에 휘말리는 동물적 육체가 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천사의 복음"과, "바벨론 신학"("처음부터 이런 걸레같은 허접스러운 육체로 창조된 인간이니까 하나님의 예정하심 따라 믿음으로 구원 받아 어쨌든 재주껏 구불텅거리며 살다가 영생에 들어가면 그만이다")과의 현저한 차이를 분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 생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했으면 벌써부터 알아채고 대비했어야 할 일입니다. 대비커녕 무식무지의 난장판이었음이 2천년 기독교회사로 드러난 바벨론 신학인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소스라쳐 깨어날 때입니다. 동물성 육체의 한없는 고달픔에다 왜 사탄의 거짓말의 멍에까지 짊어지고 야단입니까.

이런 엉뚱한 거짓말의 합리화를 위해 "바벨론"은 에덴도 자연계 동산이라, 로마서 7장은 구원된 바울의 개인 채험이라, 한 번 일단 구원 받아 놓으면 영원 불변으로 보장되는 것이라는 따위 논리에도 어긋나는 갖가지 거짓말을 덕지덕지 겹겹으로 덧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어쭙잖게 세상 <학문>("신학")으로 둔갑시켜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마귀 일당의 요란한 난장판의 가설무대인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이는 주님의 말씀에 반신반의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 역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2천년 전통의 바벨론 신학의 역사가 스가랴 예언처럼 "태산/泰山"으로 군림해 있기에 그러합니다.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ㅡ오늘날 "천사의 복음"에서는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인하여"로써 대체됩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아직 주님 다시 오시기 전이므로)의 <일>이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천사의 여러 기적(홍해가 갈라지는 등)은 악령들도 할 수 있을 뿐더러 거짓된 속임수까지 가세되므로 더욱 엄청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21세기 표적과 기사만큼은 사탄이 모방할 수 없음을 앞에서 강조했습니다. 단순한 신령한 몸으로서의 초능력과는 완전 별도의 영역이기에. 이러한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힘입어 "천사의 복음"에 착념합시다.

다시금 정리하면, 초대교회 그것도 사도 바울 당시였건만 사람들은 "신속히" 진리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따름을 바울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갈 1:6) 기괴하기 짝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하물며 2천년 세월을 훌쩍 넘긴 오늘이겠나요. 사탄이 지배 통치하는 세상임을 증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악령들의 지배와 선동이 아니고는 그렇게 "신속히" 바울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까지 바울의 가르침에서 떠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게 됨을 계기로 모든 진실 진리가 바로 드러나게 되려면 그동안 지구인들을 속여 지배해 왔던 세력을 강제로 꺾어야 하겠기에 이 "마지막 때" 영/들간의 대판 싸움이 불가피함을 "마지막 때"를 총정리하는 예언서 요한 계시록에 이미 예고되었던 것입니다(계 12:7-9). 미가엘 천사 군단과 사탄 일당의 대접전입니다.

그 결과로 빛을 보게 된 것이 의당히 "천사의 복음"일 수밖에 없고, 이 천사의 복음으로 인하여 사탄의 그간 자행되어 왔던 갖가지 거짓말이  드러나져 성경의 잘못 이해되어 오던 여러 부분이 바로잡아지게 됨은 필연입니다. 일례로, 지금까지 천사와 그룹/스랍 등을 혼동하여 동일시해 온 것인대 엄연한 별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랍/그룹은 하나님이 친히 부리시는 영들(하나님이 "그룹을 타고 날으심"ㅡ삼하 22:11/시 18:10)입니다.

반면 천사들로 말하면은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후사/後嗣)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이라 헸으니 아담에게 도우미(helper) 역할을 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창조되었던 영물들인 것입니다("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ㅡ창 2:15-19). 이미 "5일"째 되는 날 모든 동물의 창조를 마치셨는데 또 창조를 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 따라서 그런 동물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역시 더욱 언어도단.

계시록에 "4생물", "24장로"란 말이 나옵니다(계 5:8/19:4). 또한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어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11) 했으니 미가엘 등 천사들은 생물과 장로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네 생물이 날개가 여섯이라(이사야 6:2/계 4:8) 했고 24장로가 4생물과 동급으로 이 부분의 계시록에 서술되어 있은즉 "장로"는 그룹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그룹(cherub) 하나가 있어(겔 28:14-16) 이 총중에서는 제외됨으로써 지금은 무저갱에 들어가 아바돈 또는 아볼루온(계 9:11)이라는 이름으로 격리된 상태에 놓인 자인데, 24장로가 그룹들이라면 그럼 타락 이전에는 25그룹(장로)이었던가, 25(홀수)와 24(짝수, "4생물"과 맞대응되는 것같은)의 숫자가 좀 어색해 보이는 듯하나 현재로는 더 자세한 무엇을 알고자 함은 불필요한 것.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것은 그냥 간과함이 좋습니다.    
      (계속)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호세아 6:3)

"주 예수 그리스도("3위1체"에서의 제2위)의 은혜와, 하나님("성부 하나님"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 제1위)의 사랑과, 성령

(닐스 보어의 "상보/補"[상보성 원리]에 해당하시니 제3위)의 교통(친교·교제·교감/commumion)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으시기를"(고후 13:13ㅡ개역한글).

당시 성령 충만 중에 베드로가 성령 강림하심을 설명하여,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심이다'"(행 2:25) 한 것처럼 "성령의 교통하심"은 나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항상 내 앞에 계심을 뵙는" 것이니 시편 139편 또한 이 너무나 복된 사실을 가리킴입니다.

"항상 내 앞에 계심"은, 다시 말해 "주님께서 저의 전후를 두르시며(안으시며) 제게 안수/按手(제 머리를 쓰다듬으심)하셨습니다. 이 지식이 제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제가 능히 미치지 못합니다"(139:5, 6)의 대목이 대표적으로 이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게 그 어떤 인간 관계보다 더 가까우신 사실을 우리는 명념할 일입니다. <보이시지 않는다>는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보이는> 사람보다 소원한 감을 느낀다지만ㅡ.

메시야 우리 주님을 가리켜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사야 9:6)시라 함과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킴이 아니요 성자 하나님을 지칭함인즉, 나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6) 곧 창조주이신 까닭입니다. 현재로는(천국에서는 천사들처럼 되어 성별이 없으나ㅡ눅 20:34,35) 사람은 남자 아니면 여자인지라 부모도 그러한즉 어버이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때 대표적으로 "아버지"(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었던 그 위계 질서를 따라)시라 하는 것이니 오해함이 없기를.

나 위해 죽으시도록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 친히 나에게만 와 계시는 모습이 <성령으로 오심>입니다. 사람은 육체라 오직 한 사람과만 상대 가능하니까.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존칭어를 쓰심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어 오심이므로 즉 일면으로 아버지 친히 오심이 되기에)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또 다른 일면으로는, 주님의 영 곧 주님 자신이시기에) 것이니"(요 16:7).

<사람>으로서는 오로지 한 사람을 상대로 내게만 와 계시나, 성령으로 즉 <하나님>으로 오심인즉 모든 믿는 사람에게 똑같이 그렇게 그 사람에게만 와 계심입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유익"이라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와 계시는데 그 중에 나도 포함된다"와, "문자 그대로 나에게만 와 계신다"는 것과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2025년 11월 29일 토요일

나는 죽었고 내 생명 감춰져 있으니 굳이 <찾으려> 말 것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주님의 것이 내 것이 되어 돌아오는 철칙

 


부자는 스스로를 없는 자 되게 해야 천국 들어가


 

21세기 "천사의 복음"의 핵심은 "3위1체"에 있어


글을 올리기 전에, 전에 한 번 얘기를 했지만, 필자의 한자 사용은 습관이 되어서가 아니고 한자의 유사 발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한글 전용의 우리나라 학생이 일본, 중국 등의 학생보다 문장 독해력(이해도)이 상당히 뒤쳐진다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에서 일단 손실입니다. 글 쓰는 사람 처지에서도 보통으로 느끼는 당혹감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장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부득불 쓰고 또 그렇게 쓰다보니 어떤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 싶을 때 내친 김에 또 쓰기도 합니다. 양해해 주시기를.

오늘날 전도는 성경도 허나님도 모르는 이들을 상대함과 더불어, 믿는다면서도 자기 몸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있지 않아 뜬 구름만 잡듯 하는 <이름만의 "기독교인">들 대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바벨론 신학과 달리 모든 점에서 면모를 쇄신한 "천사의 복음"들 전해야 하기 때입니다. 이 21세기 천사의 복음은 강력한 "21세기 표적과 기사"가 그 배경임을 알리면 말씀을 듣는 자에게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만유의 기본 원리로서의 3위1체 바로 그 도식을 천사가 오늘날을 직접 예고/豫告하며 다니엘에게 2,500년 전 알렸던 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이기에, 이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중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 역시 21세기 지향/志向 예언서답게 이 기이한 <문자화/文字된 도식>을 성령의 감동으로 역시 함께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계 1214).

"이는 힘으로 되지 않으며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된다"(스가랴 4:6) 하신 첫머리 말씀대로 성령께서 이 대목의 주제/主題이십니다. 지금까지 "3위1체"라는 말은 많았으나 정작 그 뜻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으니, "바벨론 신학"에 철저히 가려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셋이 되실 리는 만무하다고 해서 그냥 <3면(세 모습을 지니신)의 한 분 하나님> 정도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렵기만 하다"는 사탄의 부추김에 장단만 맞추는 꼴이 되는 슬픈 현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 그대로의 뜻일 뿐입니다. 장차 닥쳐야 실감할 수 있는 예언적 성격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낳으셨다"고 성경에 명시된 그대로 하나님은 모자(부모 자식)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요 14:28) 하신 대로입니다. 단, 둘로서 계시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하나"(10:30)로서 계시기 때문에 이 이치를 만유 창조와 운영의 기본 원리로 삼으신 관계로, 마귀는 이 핵심 진리를 여러 거짓말로 감추려 했던 것입니다.

상보성 원리에서 닐스 보어(1885-1962)가 갈파함으로써 상반/相反은 상보/(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유명 문구에서 드러나듯 인과율/因果律이 입증되어(파생자와 피/파생자의 관계) 이 특이한 3위1체의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까지 약방의 감초처럼 마귀가 써먹어 왔던 무신론, 회의주의 등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최고 원인으로서의 창조주가 입증되시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인과율 붕괴 가능성"을 말하는 이들은 예컨대 양자역학에서 매우 미시적 영역에서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사성 원자의 붕괴는 <예측 불가능한> 확률적 현상으로 나타나 인과율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고들 합니다. 또 특수상대성 이론에서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은 인과율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특정 사건에서 <인과관계의 뒤바뀜>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두 경우 다 "상반'이 되어 있는 둘이 "상보'가 됨 더 정확히 간단히 말해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 존재함 즉 "3위1체"의 근본 이치를 외면함에서 오는 혼돈일 뿐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다룸도 아니고 "특정 상황에서의 다른 원리가 적용됨"도 아닌 것입니다. 

21세기 "천사의 복음"이라는 천사들의 획기적 거사/와 용단/勇斷에 의해(하늘 전쟁에서의 승리로 악령들을 제압하여 더 이상 거짓말로 인간 세상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ㅡ계 12:7-9) 모든 막혔던 물꼬가 트이게 된 오늘입니다. (진리가 드러났다뿐이지 사탄의 거짓말이 이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님).

사탄이 이렇게 세상을 장악하게 된 것은, 아담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따르기보다 사탄의 거짓말에 더 복종해 그를 경배한 꼴이 되어, 연약해 빠진 동물성 육체가 됨으로써 막강한 신령한 몸을 박탈 당하자 벌어진 (종전까지의) 위계질서의 비극적 전복/顚覆 내지 도치/倒置 결과인 것입니다.

즉 아담 아래 있던 영물들이 일부 하극상을 함으로써 아담을 시해/弑害한(아담이 사탄의 거짓말대로 따른 결과 죽은 자 곧 동물적 육체로 돌변하여 종전의 신령한 몸을 상실했으므로)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 및 그 아래 악령들의 인간 세상 지배는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기도 하여 요지부동이었는데, "마지막 때"를 당해 "마지막 아담"의 등장을 계기로 비로소 천사 군단이 행동할 여유가 생긴 까닭에, 그나마도 힘 겨루기를 통해 이겨야만 가능한 까다로움을 천사들은 극복한 것이니, 이것이 21세기 "천사의 복음"(계 14:6)의 시동/始動입니다.

이런 사실 즉 사탄의 이 세상 지배를 모르니까 바벨론 신학의 정체를 알 리가 없고,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에서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 말씀에 거짓말 같은 것으로 손대랴" 하며 사탄이 대놓고 세뇌시키는 대로 허무하게 맹종했던 것이 오늘날과 같은 파탄을 낳은 것입니다. 이제는 시급히 깨어날 때입니다.

사탄이 나꿔챈 통치권은 하나님의 이 세상 지배가 아닌 세상 모든 피조물의 수장/首長/으로 세우신 아담의 인간 세상 지배권("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ㅡ창 1:26)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탄의 왕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현세의 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요일 2:15).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요 12:25)이라고 엄중 경고하신 이유입니다. 소위 "기복 신앙" 즉 하나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멸망의 확실한 지름길 외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 주 예수님께,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니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인즉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는 고로 당신이 내게 절하면(나의 자아중심을 따르면) 다 당신 것이 될 것"(눅 4:5-7)이라 했던 근거이기도 합니다. "나의 이 뜻을 거스르는 그 누구든 이 세상에서 결단코 볕 볼 날이 없을 뿐더러 그 정반대인 고통 고난뿐임을 각오해 두라"는 당당한 위협인("마지막 아담"에게 소속되어 있는 그 누구를 향해서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헛된 꿈이니 이것이 바로 "미친 마음"(전도서 9:3)인 것입니다. 구약(유치원생 수준의 예비교육)과 신약(성인으로서의 실생활)도 구분 못하는 무지 속에 갇혀 있음은 성경을 읽지 않은 탓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축복, 운운" 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共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초대교회의 본보기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관심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질했던("도둑질하는"은 오역ㅡ개역한글)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했는데 가난 구제는 국가도 못당한다는 말도 있듯이 베풀다보면 나 자신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는"(히 13:3) 것이 마땅한 세상인즉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렇게 나의 안위만 생각할 마음이 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아중심이기에 그렇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믿는 자의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의 부자와 거지 행색의 여타 사람들을 빗대어 말씀하심입니다.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하셨으니까. 부자의 죄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다"는 오직 그것입니다. 죄명은 이 세상에서 "위로를 이미 받아버렸다"(눅 6:24ㅡ"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것. 부유하게 교회당을 번듯하게 세워 올리고 최고급 자가용을 자랑스럽게 굴리고 다니는 소위 "교역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뒤쫓고 있으니 한시바삐 깨어나세요!

미국의 오랄 로버츠라는 한 이름 날리던 소위 "신유 부흥사"는 생전에 곧잘 하던 소리가, "나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증거로 일부러 자가용을 여러 대 구입하여 번갈아 타고 다닌다"였습니다. 당시는 미국만 해도 자가용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냈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물성 육체로서의 만 가지 고초(인간고)에서 해방되는 것이 천국 곧 "신령한 몸"(고전 15:44)이자 "영광의 몸"(빌 3:21)으로의 복귀/復歸/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않고 자아중심으로 자기 생각대로 했기 때문에 아담이 영생을 잃고 현재와 같은 동물성 육체가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구원 받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ㅡ마 7:21)에 있음을 확증적으로 단정하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 아니니, 믿음으로서의 "은혜", "선물"은 우리가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가 되어버렸은즉 새 창조를 받아 산 자부터 되고보는 것이 급선무라 그렇습니다. 창조는 다 <선물>이지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
새 피조물로 거듭 난 다음의 단계가 필수이자 필연이니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 즉 순종 다시 말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무조건 "믿음" 일변도로만 끝낼 뿐인 사탄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아무리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거듭 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 치더라도 상대방중심/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그 나물에 그 밥, 그것이 또 그것이기에,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아예 임하시지를 않습니다. "성령으로 날"(요 3:5,6) 수가 없으니, 한 마디로 불가능입니다. 이 자기 기만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음을 "확신한다"지만 허공에 떠 사라지는 메아리 같은 허무로 끝나고 있으니, 다시 자기를 살펴 여의치 못하면 새로 확실히 시작하여 출발하시기를! 

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21세기 예언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14:6).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되는 것이니"(스가랴 4:6).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너는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성전 건축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놓는 주춧돌로 건물을 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초석)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으라' 할 것이다" 하셨고"(:7).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殿(성전)의 지대/
地臺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칠 것이다 하셨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 것이다 하셨다"(:9).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건축에서 벽이나 구조물이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10).

"내가 그에게 묻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스가랴 4:11).
"대답하기를 '이는 기름 바르심(성경에서 기름을 바르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나 성별된 장소를 구별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함)을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인, 소유주) 앞에 모셔 섰는 자이다'"(:1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줄 것이니 저들이 굵은 베옷(성경에 슬픔, 애도, 회개를 상징하는 거칠고 불편한 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할 것이다"(계 11:3).

위에 나열한 성경 구절을 종합하면, 이 21세기 "바벨론 탈출"(계 18:4) 및 이와 상대되는 "천사의 복음"(14:6)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바벨론 탈출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온갖 거짓맓>에서 벗어나 애초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다시 복귀함을 말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메시야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친히 가르치셨고 그 후 부활 승천하신 뒤 성령으로 다시 오심으로써(요14:16-18,23) 모든 진리(16:13) 가운데로 인도하신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가르치심>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12 사도들과는 일절 접촉이 없이(배운 것이 없이) 아라비아로 가서(갈 1:17) 거기서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하여, <성경을 통해(성경 외 달리 그 무슨 다른 방법으로든 아니하시고)> 충분히 모든 진리를 섭렵할 수 있게 하심이니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시어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외면하고 다른 소위 "직접 계시" 따위에 빠져드는 순간 마귀의 사이비 이단에 빨려 들어가게 되고 지옥의 냄새가 진동하게 됩니다.

바벨론 신학에서 가장 독소/毒素가 되는 것은 <겉치레의 "구원 확신"> 즉 구원 관련한 일정 공식 같은 것을 만들어 남발하고 세뇌시켜 무더기로 자기 기만에 도취하도록 만듦에 있습니다. 무조건 교회당에 와서 "믿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싸구려식 "영생 구원"입니다.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순종을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란 기괴한 이유를 들어 배제시키고 "로마서 7장"을 믿은 후의 바울 자신의 개인 체험이라고 믿게 하는 등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 없이 무턱대고 "나는 주님의 피 공로를 믿으니까 틀림없이 구원이다" 하게 만들었고 오늘날 적그리스도의 때에 와서는 난데없이 "방언" 소동까지도 벌이며 "나는 성령 받았노라"는 자기 도취에 빠지게 만드는 사탄의 악랄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을 "스룹바벨의 성전 건축"으로 예고/豫告한 이유입니다. 이제 비로소 성령께서 계시게 되는 성령의 성전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산"이라 함은 온 세상을 지배해 온 바벨론 신학을 말하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 운운"은 그동안 이 거짓됨에 가려졌던 하나님의 복음 진리가 "천사의 복음"으로 오늘날 광명을 다시 발하게 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감람나무, 두 증인 등 "둘"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는데 성경 전권을 통해 보기 드문 것으로 "마지막 때" 예언서인 스가랴와 계시록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아 3운법칙 등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가리킴으로써, 오늘날 "천사의 복음"으로 나타나신 말씀의 시대적 배경을 특별히 강조하심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오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천사의 복음ㅡ우리 각자가 써 내려 가는 "출/出바벨론기/記" (1)

  "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인가"(요 6:30) 하고, 믿을 수 있는 특별한 "표적과 기사"(4:48)를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처럼  지금까지 사탄의 거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