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의 메시야
(For behold darkness)
https://youtu.be/TWMn2LcAi3M?si=qOMhZEhvK1B1y4Tz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이다"(롬 4:25).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5:9).
앞서의 글에서도 누차 강조했지만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나 위한 주님의 죽으심>때문만이 아닙니다. 고로 바벨론 신학의 상투어처럼 주님의 "나 대신하신 죽음"이 나의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두 구절만 보아도,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해" "살아나신 것"이라 했으며, 그 흘리신 피 곧 그 죽으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즉 죽으신 후의 살아 계심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우리의 생명(영생)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몸은 머리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바로 그 구조/체제입니다. 우리 인간의 신체도 그렇게 얽어져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 몸만 그럴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또한 그 피조물로서 "머리와 몸"(고전 11:3)의 관계로써 존재하도록 정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머리/몸으로서의 짝의 "하나"(요 10:30) 관계를 "생명(삶)의 법칙"이라 헙니다.
이 법칙에서 짝을 이룬 그 어느 쪽도 자기가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으로 철칙을 삼습니다. 생명(삶)의 영원한 불문율이자 질서입니다. 모든 악과 범죄는 이를 어김에서 비롯됩니다(요일 3:4). 이렇게 진실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은 너무나 간명합니다. 그 이치대로 준수해 나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길을 두고 뫼(산)로 가랴".
나 위하신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과거에 지은 나의 옛 죄 청산(히 9:15)과 더불어 앞으로 죄 짓게 할 "죄의 몸 멸절"(롬 6:6)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는 주님 친히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하나되심으로써만 구체화, 현실화되는 까닭에 <나 위하신 죽음>만 아니라 <나 위하신 부활>도 필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나와 이렇게 "하나", "한 영"이시기 위해서는 "3위1체"의 필연성을 따라 나와 짝을 이루셔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첫사람 아담"과 <한 몸>을 이루어 <같은 한 육체>의 사람이 됨과 같은 이치로,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과 각자 제각기 <같은 한 성령>으로 <한 영>을 이루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이니 그러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라고 구분하신 것입니다.
고로 주님과의 "한 영"이 됨은 그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것이 됨과 함께 "성령으로 나는" 의미까지 지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만 또 그치지 않고 우리 각자 주님과의 3위1체 짝을 이룬 "하나"(요 10:30)로서 영원한 생명의 법칙 준수에 의한 영생의 바탕을 이루어 누림으로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꾸어 말해 주님과 "합함"으로 인한 주님과의 "한 영"됨이 나를 신령한 몸이 되게 하는 즉 영생 구원으로 인도되는 기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과 무관한 단지 나 위해 죽으신 사실만으로써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연속이므로 로마서 7장의 장탄식/長歎息 즉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가 더 이상 발 붙일 틈이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과거의 일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으로서 "성령으로 사는"(갈 5:25) 지금이니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로마서 7장이 구원 받은 후의 바울의 체험이라"는 바벨론 신학의 쇠사슬을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넉넉히 이김(승리/극복/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고전 15:57) 것입니다.
오직 말씀하신 대로 <믿어> 순종하고 <믿은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 사탄의 불필요한 거짓말에 놀아나 버둥대는가ㅡ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야의 불말/화마/火馬처럼 내달릴 때입니다. 주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역사/役事라도 내가 믿지 않는 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俗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은 속된"(롬 14:14) 것으로 나타나는 조화를 부리는 법이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으면 충분히 역사될 일도 역사/役事되지 않는 법입니다. 믿는 자에게 "로마서 7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것이 실재한다고 믿으면 희한하게 그렇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죄의 몸"이 "멸해졌지만", 의심하는 자에게는 여전히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들을 알며 저들은 나를 따른다. 내가 저들에게 영생을 주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저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니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요 10:27-29).
"누가 나를 단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이시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이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사탄이 지배하는 이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ㅡ골 1:24) 함과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김>이다. 내가 확신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공중의 악령)들이나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을"(롬 8:34-39)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