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5일 일요일

봄 하늘 저 높이에 종다리(종달새) 노래하듯









지금까지가 '총론'이었다면 그 '본론 및 결론'



fashomo(3운법칙)와 trinia(3위1합)를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류에게 나타내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잎증해주려 하심이 물론 아니니, 이미 그런 차원의 일은 그 "만드신 만물"(롬 1.20)로 충분하기 때문. 오늘날 이렇게 덤으로 다시 나타내어주심은 보다 큰 차원에서이니 "바벨론에서 나오라"(계 18.4) 하시는 "천사의 복음"(14.6) 전파가 시급하여 이를 명령하심이다. 지금까지의 복음 전파에 하자가 없었다면 새삼스럽게 이런 말씀을 내리실 리 없다. 그럼 왜 이전에는 명하시지 않았느냐 묻게 되는데 이전부터 사실은 경고해 오셨던 것으로서 새삼스러운 내용이 아니며, 사람들이 무엄하게 무시해 왔음을 알아야.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을 통해서도 재확인해주셨던 것이니 일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에서 아담의 신령한 몸(죽지 않는) 창조가 명백히 밝혀졌건만 이를 믿지 않고 사탄의 지어낸(인위적인) 거짓말(바벨론 신학)을 여전히 더 따랐던 것. 고로 세상 끝에 재삼 재사 마지막으로 특별한(trinia, fashomo 등) 방법으로 일깨워주심이다.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요 곧 "천사의 복음"이다. 이미 주셨던 말씀의 되풀이이신 것이다. 이 최후 기회도 무시하면 말 그대로 끝. 

고로 다시 반복하거니와 아담의 범죄로 신령한 몸을 잃어 "죽은 자"되어 자기 중심 동물적 본능의 "죄의 몸"이 되었은즉 절대로 죄짓지 말아 자기 중심을 철저히 배격하지 않으면 영생은 꿈도 꾸지 말라는 엄중 경고이신 것이다. 바벨론 신학의 대표적 사례 및 특징이 바로 로마서 7.24를 믿은 후의 바울 사도 자신의 직접 체험이라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살인적 거짓말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개신교 모든 교파가 예외 없이 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있는 것이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극소수 개인 차원일 뿐이다. 기 막힐 일이 아닌가! 어거스틴, 루터, 깗벵 모조리 말 그대로 전멸이다. 어거스틴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세윌이 흐르자 처음 주장을 바꿔버렸고 어거스틴이 그렇게 되자 나머지는 그 본을 따라 도미노식으로 모조리 엎어지니 애닳다! 성한 자가 없이 천국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을 정도의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오늘날 참담함을 극한 기독교계 실태다. 바로 이 때문에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 주님의 나 위하신 죽음은 "대신 죽음"이 아니다. "함께 죽음"이다. 성령이 누구신가. 다름아닌 부활하시어 성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되어 계시는 주 예수님이시다. 성령의 세례는 바로 이 주님을 내 영혼처럼 영원히 내 안에 모심이다. 고로 나는 나 자신 관련해서는 영원히 죽은 자로 있다. "하나"의 개념은 '3위1합'의 '1합'을 말함이다. '1합'에서는 교차/交叉 소유(고전 7.4)가 그 핵심이다. 한 몸에서는 남편 몸이 아내 것이 되어 아내가 주장하고 아내 몸은 남편이 그렇게 한다. "한 영"(고전 6.17)에서는 주님 말씀대로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 저의 것은 아버지의 것" 그리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저는 아버지 안에 있음"(요 17.10, 21)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교차 삶>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즉 갑과 을로서 짝을 이를 때 갑의 삶은 을이 살아주고 즉 을은 갑을 위하고 갑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님 친히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다"(요 15.10)고 하신 바로 그 교차 소유ㆍ교차 삶의 계명이신 것이니 최대한으로 행복하게 사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바탕이다. 즉 나 자신을 위하치 않음이 모두를 위함이며 이는 중국적으로 나를 위함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이 삶의 근본이요 그 기초다. 성경에서 강조되는 "거룩함"이다. 때문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바벨론 신학의 거짓과 속임수에 넘어가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구제불능의 죄인이라 죄인으로 살다가 죄인으로 죽으나 '행함'이 아닌 '믿음'이라는 새 질서를 세우신 덕분으로 영생에 들어간다는 식의 자기 최면으로 급급했으나 천만의 말씀! 신령한 몸일 때는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처럼 또는 아담처럼 불가항력이 아니라 고의적 양자 선택에 의한 범죄인 것임을 명심해야. 동물적 육체가 됨으로써 "죄의 몸"이 되어버렸은즉 이 극명한 차이를 알아야. 때문에 <신령한 몸으로서의 아담 창조>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구원은 다름아니라 이 "죄의 몸의 궤멸"(롬 6.6)에 있음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 영" 됨의 상호 교차에 있는 것. 무턱대고 죄를 눈감아주시어 멀쩡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가게 하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시어 나와 한 영이 되심을 인해 과거 지은 죄가 용서되고(세례 받음으로써의 죄 용서는 내 안에 오심을 전제로 하는 것 ㅡ행 2.38) 주님과 "하나"되어 "새 사람"으로 다시 나게 하셨으니 아것이 "은혜"이고, 그 후로는 당연히 나의 순종이 철저히 요구되는 것인데 왜 이를 간과하고 무시하는가. 

"값 없이" 구원됨은 새 사람으로 창조되기까지다. 창조는 하나님 단독 역사이시기 때문. 이 창조로 내가 다시 난 후로는 의당히 나의 순종이 필수인 것이다.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하면(순종하면) 영생"(롬 2.6~11)이라 못박은 것.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은 "그 행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응되는"(:6) 것이다. 바울 사도는 다시 쐐기를 박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계명)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13).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마땅한 순종(마 21.31)이 곧 "율법/계명 행함"이요, "참고 선을 행함"(:7)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믿음'으로 구원된 것은 죄로 죽었던 자가 새 창조하심 받아 새 사람으로 출발함이요 이는 아담 창조와 똑같은 것이다. 다만 차이는 아담은 신령한 몸이었고 우리는 아니라는 것뿐. 우리는 신령한 몸 대신 성령 세례 받아 주님을 직접 모심이라 실질적으로 아담에 비해 못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해 더 다시는 <불가항력으로 죄지을 수밖에 없는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안에 막강하신 사람 예수님을 직접 모셨으니까! 오직 단 한가지, "한 영"으로서의 <교차 소유>의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 이는 아담의 범죄 또는 악령들의  범죄와 똑같은 범주에 들고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서슬푸른 엄중 경고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경고는 아담에게도 천사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졌었던 동일한 내용이다. 단지 우리에게 특별히 더 엄중한 것으로 비쳐지는 이유는 우리 구원이 너무나 지극하신 사랑과 은혜의 결실이었기에 그 반동에 의함이라는 것뿐이다.  

간결하기 둘도 없는 구원의 진리를 마귀의 얼토당토않은 "말씀 혼잡"(고후 2.17/4.2)에 넘어가 유야무야로 뒤바꾼 어리석음에서 세계의 모든 교회는 한시바삐 벗어나야. 불순종이 죄이다. 로마서 7장이 믿은 후의 바울 체험이라면 하나님은 불순종의 아들만 두신다는 망상이 아닌가?


                                                                                                    닐스 보어가 직접 도안해 그려 넣은 가문 휘장
















기도로써 세계 교회의 본이 된 한반도 교회사/史

영적 전쟁에서 <설교자>가 어린 아이 같다면 

<기도자>는 완전무장으로 싸우는 어른으로 

비유될 수 있음을 명심합시다. 

이는 설교자가 기도에 별 관심이 없을 때를 말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기도와 말씀 전함"
(행 6.4)이라 하여 기도를 우선시할 때만
비로소 목회자/교역자답다 할 것이니,
오늘날 교회 강단에 선 어린 아이들 너무 많아 
이 점 유심히 살펴 대비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어린 아이>를 데려 오는 
실수를 하지 말 것이며 
일단 <어른>을 모셔 왔으면 그 설교 듣고자 하기 전 
먼저 교역자 위한 기도부터 시작해 
<어린 아이 교인>됨을 면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미국 영적 대각성 1차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미국 신학자 조나산 에드워즈 목사는
3일3야 금식 기도후 일요 예배 때 힘없이
설교 원고만 읽어 내려가는데도 
청중석 여기저기서 "날 붙들어 주! 지옥불이다!"란 
비명 탓에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명성 드높은 1907년 한국 대부흥운동은 
장감 미국인 선교사 20여명의 4개월에 걸친 
합심 기도(처음 한 달은 정오 한 시간, 
다음 석달은 오후 4시부터서의  
(개별적으로 원하는 경우 저녁 식사 시간까지도)
기도 결실이었습니다. 
세계적 명성을 얻는 "한국교회 새벽기도회"도 
이 때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새벽 기도회는 한반도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1907년 대부흥의 도화선이 된 선교사들은 하루에 1시간 이상씩
    정오 기도회를 가졌으며,
    부흥이 임박했을 때는 오후 4시부터 저녁 식사 전까지
    자유롭게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이들은 4개월 이상 교파를 초월해 매일 모여
    한국의 영적 부흥을 간구했습니다.
    이들이 주도하거나 함께 한 구체적 기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오 기도회:
    평양 지역의 장로교 및 감리교 선교사들은 매일 정오에 모여
    1시간씩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오후 기도 모임:
    일부 선교사가 한 달간 기도해도 효과가 없다며
    개별 기도를 제안했으나,
    대다수는 기도를 이어가기로 결의하고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기도 시간을 오후 4시부터 저녁 식사 전까지로 변경했습니다. 
    철야 및 통성 기도:

    1907년 1월 장대현교회 사경회에서는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 등의 인도 아래
    전 회중이 소리 내어 함께 부르짖는 통성 기도가 도입되었고,
    이후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철야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새벽 기도회:
    선교사들의 연합 기도와 더불어
    당시 길선주 장로가 주도한 새벽 기도회가
    부흥의 중요한 영적 자양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