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서 보듯이 "마지막 때"인 이 21세기를 정확히 겨냥한 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인데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한 때(1), 두 때(1×2), 반 때(1÷2)"로서의 "한 때(상보/相補), 두 때(상반/相反a), 반 때(상반/相反b)"임이 드러나 세잎클로버 형태의 도식/圖式을 분명히 형성한다고 하겠다. 이 도식이야말로 삼위일체, 상보성원리, 3운법칙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3운법칙이 특별히 그러하니 왜냐면 이 법칙의 짜임새(형태, 구조) 자체가 이를 빼닮아 있기 때문이다(그림). 신기하기 짝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같이 짜맞추어 놓으셨다 해도 누가 무엇이라 하겠는가. 하나님의 손길이실진대는 분명 뜻이 있으시기 때문이니 다름아니라 이 3운법칙을 "21세기 하나님 증명/증거" 다시 말해 명실상부한 "21세기 표적과 기사"로 삼으심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내신다는 것은 오늘날 모든 사람이 현재 실상을 똑바로 깨달아 멸망치 않고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심이다(벧후 3.9). "바벨론"(계 18.4)으로부터 벗어나 "천사의 복음"(14.6)을 듣는 것이 오늘날 화급한 당면 과제이기 때 문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성경을 제대로 인식하여 현재의 진상을 똑바로 알고 진리를 깨달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사탄의 농락질에 얽매여 현금의 절박한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은,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나 그렇지 못한 자나 매일반이니, 이를 다른 말로 요약하건대 오늘날 왜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하는지 그 까닭을 모르고 있다는 것. 단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겠다"는 막연한 본능적 욕구뿐이다. "멸망 않고 영생하겠다"ㅡ과연 그런가? 아니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정답은,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가 되었은즉 <산 자>가 되고자 함"ㅡ 이것이다. 오늘까지 원수 사탄이 지어낸 맹랑한 거짓말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소위 "영적 죽음"이라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소위 "기독교 신학"의 조어/造語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전적으로 이질적 개념이다. 죽음이면 죽음 단 하나의 의미뿐이지 "영적"이란 수식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단 말인가! 아담의 죽음을 기독교 신학에서 영적 죽음이라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자들은 아담의 죽음을 '영적 죽음'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의 마감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담의 죽음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경고하셨으나, 아담이 육체적으로 즉시 죽지 않고 930세까지 살았기 때문미다. 이 간극을 그들은 '영적 죽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구체적이고 신학적인 이유"로그들은 다음 세 가지를 말한다.
● 1. 하나님과의 관계적 분리(생명의 근원으로부터의 단절)이니, 즉 기독교에서 영적 생명의 본질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 죄를 지은 순간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 그 즉각적인 결과로서의 육체적 죽음은 시간이 흘러 찾아왔지만, 하나님과의 영적 연결이 끊어지는 죽음은 죄를 지은 그 순간 즉시 일어났다는 것.
● 2. 죄의 보편성과 인류의 타락(원죄)이니 영적 상태의 유전이다. 즉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아담 한 사람의 영적 죽음은 그의 모든 후손(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다. 즉 전적 타락인데 그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단절된 영태, 즉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나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거나 구원할 수 없는 영적 무능력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
● 3.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연성이 강조됨인데 재창조의 필요성이라는 것. 문제가 단순히 육체의 질병이나 수명의 한계가 아니라 '영적 죽음'이기 때문에, 구원 역시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영혼의 거듭남(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한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대속으로서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으로 죽었던 인간을 다시 살리는(영생)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기 위해 아담의 영적 죽음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마디로, 위의 세 가지는 교묘한 "말씀 혼잡"(고후 2.17/4.2)이다. "영적 죽음"이라는 말로써 아담의 죽음(의 의미)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사탄적 꼼수를 부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인간을 하나님이 죽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사탄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인 것이다. "처음부터"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 없으셔도 아니고 심술궂은 분이시라 그러하실 턱도 없다. 원래부터 거짓말은 이치에 맞는 말일 수가 없다. 사탄이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꾈 때, "인간이 혹 하나님처럼 될까 걱정이 되시어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거짓말을 하신 것"이라고 온통 되지도 않는 말을 나불거렸던 것과 같다. 이런 자가 인간 위에 올라 지금 인간을 주물럭거리고 있는 것은, 아담 스스로 하나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더 믿고 그리하여 사탄을 추종한 결과로 빚어진 결과일 따름이다. 즉 아담의 죄의 결과라 그 형벌 차원에서 하나님도 이러한 결말을 유지하심이다. 고로 정상적인 새 시작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밝히는 대로 따라야. 즉 "영적 죽음"이 아니니 아담 범죄로 비로소 죽음이 온 것으로(롬 5.12) 범죄 전에는 죽는 몸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즉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사탄은 이 핵심을 뭉개버렸다. 따라서 문제만 무성하게 남발되고 답은 원천 봉쇄된 것이다. 초점이 없다. 허공에 매양 떠다니는 구름 뭉치와 같았던 컷이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있다"(눅 17.21) 하신 그대로, 신령한 몸이 곧 천국이고(마 16.28/막 9.1) 그렇게 되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심에 있다. 그래서 "천국은...너희 안에 있다" 하신 것. 다시 말해 지금은 정상의 몸이 아니니 아담 범죄로 "산 자"가 아닌 "죽은 자"가 돼 있기 때문이다. 산 자부터 되는 것이 급하고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두고 주님께서 경고하시기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3 ,14) 하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눅 13.24)이라 하신 것이다. 즉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씀"은 동믈적 육체의 이 세상 삶을 의식적으로 멀리함이다. 그러니 세상에서는 고달플 수밖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를 외면한다. 그러나 결말은 멸망이다. (고달파도 이 세상 잠시 한 때뿐인 것을!)
영생으로 "들어가려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은" 이유다. 영생하고는 싶은데 그대신 세상 삶은 접어야 하니 양자택일이라 당장 눈 앞의 일을 따르다보면 영생 관련해서는 낙오자로 도태되는 비극적 종말이구나! 올곧은 인생관으로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뎌야! 눈 앞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멀리 내다보아야! 나 자신을 위함(동물적 본능으로)이 아닌 하나님(생명의 주이신)을 사랑함이 생명인 줄 깊이 마음 속에 아로새겨야! 나를 위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 몫으로 되어 있으니까! 바로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 증명하시지 않았던가! 영원히 입증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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