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는 보호막으로서의 창살,
악한 자에게는 야수성에 제동을 거는 창살,
이래저래 3운법칙이라는 쇠창살 안에서
자유 없는 삶이 삶인가!
동물적 자아중심은 한 마디로 구제 불능인 것이다.
아무리 과학 문명의 이기利器가 발달해보아야
그 기술을 남 해치는 데에만 활용하기에 바쁘다.
이기로서의 꿀맛은 잠깐이고
곧장 흉기로 둔갑하기에 신속하다.
안하무인으로 버젓이 그 흉악함을 기념비처럼 세운 것이
저 악명 높은 미 조지아주 "가이드스톤즈".
이쯤되면 가히 간이 배 밖으로 나올 정도다.
금력 앞에서는 천하 인간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니까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대담무쌍한 악인의 배짱의 본보기.
세계 인구가 80억이든100억이든 5억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도살 처분하겠다는 것이다.
"미안하다, 우리들만 살아 남겠다"이다.
그 5억은 또 인간 로봇처럼 백프로 조종 가능하므로
노예처럼 부리며 살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자아중심의 민망하기 짝이 없는
더도 덜도 아닌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다.
유일한 구제책은 새 창조뿐.
메시야 아담의 십자가 죽으심에 의한 성령으로 다시 남뿐.
이것이 오늘날 21세기 "천사가 가진 복음" 전도다
(계시록 14:6).
이 무지막지한 동물적 자아중심에 대비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법칙의 우아함과 미려함, 신선함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런 유토피아적 구상을 해 본 적이 없다.
이 이상향적 삶은 반드시 영원한 머리와 몸의 관계를 말함인데
창조주를 부정하는 마당에 머리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만무다.
하나님을 말해도 영생이 "공짜"라는 자아중심적 욕심만 알아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의 법칙에 눈 뜰 여유가 도시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 찬연한 영광이 짝의 법칙에 의해 드러났다.
자아중심에서는 "나(자아)"란 것이 단 1뿐이라
그래서 욕심 내고 싸우고 뺏고 훔치고 별의별 짓 다 했지만
생명의 법칙 따라 살기로 약속한 이가 가령 일억명이라면
그 나라 국민으로서의 나는 1 X 100,000,000이다.
모두가 다 나를 사랑하여 나 위하는 사람들만 존재하니까.
서로가 그렇게 이웃을 위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런 것이다.
고로 메시야 아담 예수님 믿는 뜻은 이 <사랑의 약속>에 있다.
머리되신 창조주 하나님과 약속함으로써 이 약속은 이뤄진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옛 약속과 새 약속의 약조의 책이다.
우리 위해 피 흘리시어 죽음까지 맛보신 어른(머리)께서
"나의 피로써 너희들과 세우는 언약"이라 선언하심에서
시작된 이 꿈의 이상향은 목하目下 차질 없이 건립 중이니
세상 모든 사람들아, 빠짐 없이 다투어 달려 나오라!
시간적 여유는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는 큰 자든 작은 자든 섬김을 받고자 하는 이는 없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도 없고 모두가 다 섬기려는 자뿐이고
아무리 발톱같은 위치에 있어도 모두가 다 나를 위하고
머리되시는 분께서도 "가장 많이 섬기시는" 이시니까.
산다는 것이 섬기고 위하는 것이라 섬김 자체가 낙이니까.
이 생명의 법칙에 의한 이상향 건설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발설한 역사가 없으니
사탄의 거짓이 그동안 세상을 지배해 왔을뿐더러
(고로 오직 목적이 "거저 챙기는 영생"에만 집중되어 있기에)
머리 되시는 허나님의 자기부인적 사랑(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모두가 똑같은 자기 부인으로 일제히 약속에 들어가게 되는뎨
성경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이를 구현함이 불가능하기 때문.
①창조주시라야 하고 ②죽으셔야 하고(우리를 사랑하심으로)
③죽으신 다음 부활하셔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요건을
한꺼번에 완벽하게 도무지 채울 수가 없기 때문.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훌륭하게 120퍼센트로 드러나는 것이다.
일한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것은
창조주시든 피조물이든 불가능한 일이니
오직 삼위일체 법칙(짝의 법칙)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법칙을 따라 부활하셨고
우리도 우리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아니고는
이 법칙의 절묘한 운행을 구경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21세기에 성경의 이 유일무이의 독보적 가치가 드러난 것이다.
죽었으면 죽은 것으로 나타나야지 그것이 달리 다른 의미로
"죽었지만 살아 있고, 살았지만 죽은 것"이라는 말이
훌륭하게 통함이니 "둘이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3위1체 법칙의 진수眞髓이다.
자연과학자는 이런 놀라운 사실에 대해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아인슈타인)는 말 밖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계 존재 인간의 현시점의 슬픈 한계다.
이세상에서도 이런 삶의 이치를 따라 못할 것도 없다.
바로 메시야 아담을 머리로 모신 공동체인 교회에서 하면 된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렇게 했다. 그래서 기록하기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용共用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만찬식을 거행하며...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4-4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4:32).
그러면 지금은 왜 교회가 그렇게 하지 않느냐.
대답은 간단하다. 지금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않는다는 것은 교회 자체의 문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불복종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감히 교회라 할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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