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냄새나는 밑거름(퇴비)
얼마든지 짓밟히고 분뇨처럼 여겨지고(사실상 분뇨이니까)
맨구석에 항상 처박혀 겉돌기만 하는 존재이지만
오직 농부이신 주님께는 귀하디 귀한 존재임을 자랑하노라
"내 자랑을 두고 담대히 말하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농작물 수확(새 생명 창조)에 필요불가결한 것이 비료이니까.
주님의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우는 극한 영광이니까ㅡ
나는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냄새나는 밑거름(퇴비)
얼마든지 짓밟히고 분뇨처럼 여겨지고(사실상 분뇨이니까)
맨구석에 항상 처박혀 겉돌기만 하는 존재이지만
오직 농부이신 주님께는 귀하디 귀한 존재임을 자랑하노라
"내 자랑을 두고 담대히 말하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농작물 수확(새 생명 창조)에 필요불가결한 것이 비료이니까.
주님의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우는 극한 영광이니까ㅡ
이공을 죄로 얽어맨 정유년 왜장 가등청정(加藤清正, 카토오 교마사)건도
왜군이 함정을 파놓고 우리 수군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음인데
적군의 전략을 알 리 없는 조정은 호기로만 알고 출동 명령만 내리나
이공이 선뜻 이에 응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전란 중에는 장수의 재량에 맡겨야 하는데 민간인들이 권세만 부리고
앉아서는 명령 불복종죄로 다스리려고 한 것입니다.
무식했다기보다 이를 이공 제거의 절호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인식도 없는 자들이 "이공이 원균과 전공을 다투었다" 하지만
원균은 애당초 자기 병력 모두 없애버리고(적에게 넘어간다고 해서)
단지 자기 한 몸 실어 피신시킬 배 하나만 끌고 나온 터라
전투도 제대로 치를 생각조차 없었고 오직 자기가 탄 그 한 척 병선은
이공이 격파한 왜선들에서 떨어져 나간 적병들의 머리만 베는데 활용,
"내가 이렇게 싸워 이만큼 전과를 거두었다"는 허위 보고 작성에만
번번이 열을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군사도 배도 없으니 하는 짓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음은 당연합니다.
이공은 이러한 원균의 행위를 그 난중일기에서 한탄하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악마의 세상이라 이기주의만이 세력을 피우는 때라 마귀가(눅 4:7)
"내게 절하면 이 부귀영화가 다 네것이다" 한 것이 허언이 아닙니다.
사람의 양심은 작동되기에 "정의, 정의"를 외치지만
그것도 악인들에게 악용 당하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이니
이런 세상을 사랑하여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한 통속이라는 단죄를
면치 못할 것이므로 주님은 엄중히 경고를 내리신 것입니다(요 12:25).
사람들은 "나 하나쯤 그런다고 해서"의 타성에 젖어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치도 않은 과소평가입니다.
나 하나쯤 달라진다고 해서 국가, 사회가 달라지겠느냐
또는 나 하나쯤 잘못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겠느냐 어쩌겠느냐ㅡ.
"나 하나만이라도!"야말로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고귀함입니다.
이공 순신 한 사람이 홀로 나라를 지탱했음은 청사에 빛납니다.
그가 들어 원균 한 사람 때문에 박살이 나는 국가 운명을 건졌고
그 틈에 의병들이 처처에서 일어날 수 있었고 권율의 관군도 그러했고
명나라 군대도 왜의 칩입을 겨우 면하자 원병이랍시고 설친 것입니다.
이공이 있었기에 한반도만 아니라 중원 천지를 전화에서 막았습니다.
바다의 길목을 지켰다는 특수 환경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람'입니다.
나라 관문의 수문장이었다는 위치가 원균으로 하여금
한반도 전체를 말아먹을 뻔했던 경우와 대조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공의 의/義로움은 <한 몸>으로서의 국가 유기체에서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충성으로 임했다는데 있습니다.
반면 원균의 경우 사사로운 승패 여부에만 매달린 이기적 판단에서
승산 없는 전투는 일찌감치 포기함이 좋다는 막된 생각의 화신(化身)이라
때문에 그 많은 병선(兵船)을 다 자침 (自沈)시키고 병력을 자진 해산시키고
몸만 빼어 뭍으로 오르다가 이공의 승전 소식에 도주를 멈춘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그런 이기주의는 득커녕 해만 끼쳐 이공을 축출
자기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앉아 필경에는 조선수군이 전멸됩니다.
한 몸에서의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의 충실한 역할 수행이 바로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의와 선입니다. 어느 지체도 자기를 위하지 않아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자기 위함이 자아중심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도 이기적인 욕심을 비난합니다.
그 폐해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아중심이 미증유의 전란에서
그 본색을 드러내고 또한 자기 역할 충실이 그 진가를 발휘하되
그 가시적 교훈이 너무나 또렷하기에 원균, 이순신을 논함뿐입니다.
죄는 한 마디로 이런 사사로운 자기 의식, 의/선은 공공(公共) 의식이니
죄는 자타 공멸의 지름길이고 의와 선은 그 반대라 건설적입니다.
죄 그리고 의와 선 모두 그 결말이 뻔하여 이해함에 혼동이 없습니다.
고로 이런 자아중심(모든 죄과의 뿌리)을 "회개하라"(행 17:30)
명령하심이요 이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당연한 분부이십니다.
죄란 것은 나 하나의 파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체 파멸입니다.
암세포는 그 자체로만 끝남이 아니고 전이를 통해 전체 파괴입니다.
그 한 편 드라마의 영상(映像)을 임진란의 이공과 원균을 통해
본다는 것은 후세의 우리로서는 크나큰 축복입니다.
세계적으로 내놓아도 이만한 충실한 내용의 시청각 교육이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의 교훈이 이에서 더 지나지 않습니다.
마귀는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겨 옴으로써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왔고
아담 한 사람의 암적인 죄로 전체 인류가 암환자가 되어 옴을 감추고
죄는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안지을 수 없고 때문에 그런 죄 가운데서도
용서받고 영생에 이른다는 가당치도 않은 거짓의 허무맹랑한 교리를
만들어 퍼뜨려 거의 모든 교회를 파멸로 몰아부친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tn.co.kr/_ln/0104_202010220041501126
하나님께서 세상을 즉 세상의 인생들은 사랑하시어(요 3;16) 위하여 사람되심으로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셨으나 지금도 그 은혜와 사랑은 불변이시나 이 세상 삶의
구조는 아담 범죄로 버리심을 받아 오늘날도 역시 불변이시라는 성경적인 근거를
설명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요 살인자인 악령(요 8:44)이 "이 세상 신"
(고후 4:4)이 되어 있는 것도 하나님이 이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이라는 증거입니다.
범죄가 악마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들의 세상에서 왕 노릇한다는
(요 14:30)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인생들이 모두 죄인되어 버리심
받았기 때문에, 그보다도 아담 자신이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어
그 앞에서 스스로 무릎 꿇어 자기의 상전/上典으로 모신 격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도
"이 모든 세상 부귀영화가 내게 <넘겨진> 것"(눅 4:6)이라고 당당하게 말한 것이고
이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버리셨기 때문에 또한 악마가 자기 왕국으로 지금껏 유지
해온 것입니다. 이미 저주 받은 세상이고(창 3:17) 세상 죄인들을 대하여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십니다(시 7:11). 고로 이 세상의 한 가지 유일의 의미는 우리 위하여
사람되시고 사형수의 죽음을 당하신 은혜를 입어 성령(아담의 육신과 대칭/對稱의
위치에 계신)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것뿐입니다. 이 이상으로 나간다면
범죄가 구성됩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세상 삶을 말씀 무시하고서(아담처럼) 사랑
한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회개"(행
17:30)에는 이 세상 삶을 사랑하는 범죄도 함께 포함됨을 마땅히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세상은 아담에게 선악과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