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항로의 북극성(polaris)
선장이 항해할 때 북극성을 보고 정확히 방향을 잡아 가듯이 인생 각자는 자기 자신을 운항하는 선장
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거룩한 제사장의 거룩한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
"인자를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여 너희를 버릴 때에는 너희가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reward)이 큼이다"(눅 6.22,23). "주님과 그 복음을 인하여"(막 8.35) "세상이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여 버릴 때" 그 자체가 축복이니,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 것은 하늘에서의 상이 엄청나다"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당하셨고 지금도 그 '몸'된(주님 친히 그 '머리'가 되시므로) 교회를 위하여 또 교회와 함께 받고 계시는 모든 고통 고난에 참여하여 주님의 고난과 함께 함이라는 단순한 그 이유 때문이니, 이것이 굉장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입니다.
일국을 호령하는 왕이나 황제가 한 때 어려움을 겪었을 당시 그 고난에 돔참해 주었던 신하에게 (나중에) 그 공을 포상하여 보답하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그 정황을 참작하면 위의 주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이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롬 8.26)이라 한 대로, 이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탄식"의 고통에 모든 <제사장적 기도>를 하는 기도자는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제사장>적이라 하는 이유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자기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바쳐져 그(들)를 살리는 일을 담당하는)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합리적) 예배>"(롬 12.1)라 한 대로 그런 성격의 간구이기 때문.
여기 "성령"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요 10.30)로 계심이 "성령"이시지만,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신 까닭입니다. '실체'를 대변하는 '형체"이심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함께 참여함(방금 설명한 "주님의 고통 동참/同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한, 심장을 쥐어짜듯 하는 우리의 눈물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산 자"는, 자아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는 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관계와 관계 속에 맞물려 있기에 반드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으로써 상호간 "하나"(요 10.30)됨이 생명 자체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자기 신변에 관련되는 일로 기도 제목을 삼는 경우라도, 반드시 하나님 소유로서의 "나'인 것이지 내것으로서의 '나'가 아닌 까닭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고전 10.31)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과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인지라 이는 실로 형용할 수 없는 막중한 가치이기에, 베드로는 "말씀 전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행 6.4)을 첫쨰로 앞세운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가르치심을 직접 몸으로 느끼면서 배운 이러한 사도들의 지도 아래 세워진 초대교회이기에, 얼마나 기도 생활에 비중을 둔 일상 생활이었는지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서로 분방(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것)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방)하라"(고전 7.1-5) 했던 편지 문구로도 충분히 확인됩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ㅡ부부라도 <방을 나누기까지> 기도를 일상화했던 증거입니다. 오늘날 기도를 게을리하는 우리가 마땅히 귀담아 들어야 할 경고라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했듯 우리는 문자 그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살전 5.17)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삶도 적당히 누리면서 영생의 미래도 보장되는 그런 안일하고 편한 것이 천국 복음이 아닙니다.
자빠졌으니 당장 일어나야 하고 내가 일어났으면 다른 사람도 일으켜 세워 주기에 여념이 없는 그런 절박성으로 특징지어져 있는 것이 지금 이 세상입니다. 악령 원수들이 천하에 넘치게 깔려 있어 하시라도 덮쳐오는, 밀어닥치는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 영적 싸움 마당인 것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마 6.13) 구하라 하심도 같은 뚯잆니다. 사탄이 장악한 세상이 아니라면 "시험과 악"에 대해 이 정도로까지 심각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도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림을 인해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이 있기에 그러하며, "마지막 아담" 안에 있지 않는 한에는 사람마다 "죄의 몸"(롬 6.6)이 되어 있음도 이에("육의 몸"ㅡ고전 15.44/"육신"ㅡ롬 8.13)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한 끊임 없이 올리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기도나 하지"가 아니라, "기도부터 하는" 것을 몸에 익힌 사람이야말로 실로 <복 있는 자>라 할 것입니다.
일국을 호령하는 왕이나 황제가 한 때 어려움을 겪었을 당시 그 고난에 돔참해 주었던 신하에게 (나중에) 그 공을 포상하여 보답하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그 정황을 참작하면 위의 주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이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롬 8.26)이라 한 대로, 이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탄식"의 고통에 모든 <제사장적 기도>를 하는 기도자는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제사장>적이라 하는 이유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자기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바쳐져 그(들)를 살리는 일을 담당하는)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합리적) 예배>"(롬 12.1)라 한 대로 그런 성격의 간구이기 때문.
여기 "성령"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요 10.30)로 계심이 "성령"이시지만,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신 까닭입니다. '실체'를 대변하는 '형체"이심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함께 참여함(방금 설명한 "주님의 고통 동참/同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한, 심장을 쥐어짜듯 하는 우리의 눈물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산 자"는, 자아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는 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관계와 관계 속에 맞물려 있기에 반드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으로써 상호간 "하나"(요 10.30)됨이 생명 자체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자기 신변에 관련되는 일로 기도 제목을 삼는 경우라도, 반드시 하나님 소유로서의 "나'인 것이지 내것으로서의 '나'가 아닌 까닭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고전 10.31)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과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인지라 이는 실로 형용할 수 없는 막중한 가치이기에, 베드로는 "말씀 전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행 6.4)을 첫쨰로 앞세운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가르치심을 직접 몸으로 느끼면서 배운 이러한 사도들의 지도 아래 세워진 초대교회이기에, 얼마나 기도 생활에 비중을 둔 일상 생활이었는지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서로 분방(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것)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방)하라"(고전 7.1-5) 했던 편지 문구로도 충분히 확인됩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ㅡ부부라도 <방을 나누기까지> 기도를 일상화했던 증거입니다. 오늘날 기도를 게을리하는 우리가 마땅히 귀담아 들어야 할 경고라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했듯 우리는 문자 그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살전 5.17)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삶도 적당히 누리면서 영생의 미래도 보장되는 그런 안일하고 편한 것이 천국 복음이 아닙니다.
자빠졌으니 당장 일어나야 하고 내가 일어났으면 다른 사람도 일으켜 세워 주기에 여념이 없는 그런 절박성으로 특징지어져 있는 것이 지금 이 세상입니다. 악령 원수들이 천하에 넘치게 깔려 있어 하시라도 덮쳐오는, 밀어닥치는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 영적 싸움 마당인 것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마 6.13) 구하라 하심도 같은 뚯잆니다. 사탄이 장악한 세상이 아니라면 "시험과 악"에 대해 이 정도로까지 심각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도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림을 인해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이 있기에 그러하며, "마지막 아담" 안에 있지 않는 한에는 사람마다 "죄의 몸"(롬 6.6)이 되어 있음도 이에("육의 몸"ㅡ고전 15.44/"육신"ㅡ롬 8.13)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한 끊임 없이 올리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기도나 하지"가 아니라, "기도부터 하는" 것을 몸에 익힌 사람이야말로 실로 <복 있는 자>라 할 것입니다.
2025년 12월 25일 목요일
마귀가 기도를 적극 방해하는 이유
<말씀> 전파는 하나님의 인생 구원의 복되고 은혜스러운 말씀(복음)을 이제까지 듣지 못한 사람에게 처음 알리는 역할입니다. 즉 전도인 것입니다. 고로 교역자 또는 설교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들 목회자에게 걸맞는 것은 하나님의 양떼들 개개인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 중에 받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적절한 메시지> 전달에만 한합니다. 오늘날 "설교자"로서 허구한 날 같은 내용에 불과한 것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바벨론 신학 바벨론 교회의 잔재일 따름입니다. <사이비 교역자> 여부가 대체적으로 여기서 판가름됩니다.
영적 훈련/단련을 거치지 않은 오늘날 대부분 교회 담임자들이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여기에 속하는 것이 무척이나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들에게는 <교역자> 생활이 "더러운 이/利"(딤전 3.8/디도 1.7,11/벧전 5.2)를 탐내는 즉 편한 직장 생활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사귐("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ㅡ요일 1.3)은 기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말씀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으로써는 우리의 <영적 위치> 즉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정확히 자리잡아 있는지 여부가 진단되어 가름되는 것뿐입니다. 이 극명한 차이를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요구되는 진정한 일꾼은 기도자이지 설교자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같습니다. 기도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 한해 설교자의 진가/眞價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이러한 영적 안목으로 자기 교회 교역자들을 위한 "쉬지 않는"(살전 5.17) 기도에 임해야 마땅한 것이니,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고 영적 거장/巨匠인 바울 사도마저 끊임 없이 형제들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2025년 12월 24일 수요일
2025년 12월 23일 화요일
인간은 의인으로 성인(聖人)으로 선하게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었다
'자아중심'이 만악의 근원이고 그와는 정반대인 '상대방중심'이 만복의 근원임이 밝혀졌으니 이것은 3위1체에서 나온 것이요 3위1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유를 창조하셨으니 이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리/事理입니다. 이로써도 오늘날 21세기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實存은 훌륭히 완벽하게 입증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탄의 거짓말 바벨론 신학을 척결하는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웅장/雄壯함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불교 등 세상 종교와도 물론 맥이 닿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맥락을 이어 받은 것도 아니라고 함은 초대교회가 시작함과 거의 동세에 바벨론 신학 즉 악마의 거짓말이 준동/蠢動했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와 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바울 사도가 심히 놀라워 헸던 바로 그대로입니다.
그리하여 에덴, 아담이 초자연계 속성임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영적 죽음" 따위 해괴한 속임수가 지금까지 기독교계를 지배해 왔던 것울 감안한다면, "천사가 가진 복음"이라는 독자적 개념이 등장할 만도 합니다. "3위1체"라는 소위 신학자들의 용어조차 이미 등장한 지 2천년 세월을 거쳤지만 그동안 무지/無知 속에 갇혀 있다가 오늘에서야 빛을 보게 된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 할 것입니다.
"자아중심이"니 "상대방중심"이니 하는 개념도 3위1체 기반의 생명의 법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상대성의 동시성'입니다. 정반대의 성질로서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요 10.30)를 이루는 바 이 "하나"됨의 요건이 있으니 갑은 갑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 상대인 을을 위하며 을 역시 그러한 것이니 이 명확한 현상은 남녀 "한 몸"(창 2.24)됨에서 검증된 것입니다("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함이니"ㅡ고전 7.4).
이는 오늘날 미시세계에서의 양자역학으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즉 입자성과 파동성은 둘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고 반드시 둘 중 어느 하나만 나타남이니 이는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기 때문에 그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상대방중심은 애오라지 다음과 같은 여건하에서만 완전하게 성립한다는 결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시인할 것, 이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생이 죽은 자가 되었고 그 범죄 이유가 자아중심이었으므로 이 자아중심을 뉘우치는 "회개"가 급선무임을 각자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에게만 한해서 만인간에게 해당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 친히 사람되시어 우리 위해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있으시니, 각자 이 사실을 믿고서 성령으로 임하시는 그 분을 자기 몸 안에 자기 영혼처럼 모실 것, 이것이 세번째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임하여 오시는 이유는,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가 되어 신령한 몸을 잃어 영생이 불가능하게 되었기에 애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던 처음 창조는 폐기시키고 새 창조를 받기 위함입니다.
성령으로 오시는 그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이유는, 그 분과 "합하여"(고전 6.17) "하나" 곧 "한 영"되기 위함이니 이로써 그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고 그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태동/胎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으로 끝난 후에는 동시에 새 생명 새 사람으로 다시(거듭) 나 새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이 일이 가능하게 하심입니다.
이로써 처음 창조되었던 대로 상대방중심의 의롭고 선한 존재로서의 거룩함으로 창조됨이 새로이 이루어져 영원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주님은 오직 나만 위하시고(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미 증명하셨음) 나는 이렇게 다시 난 순간부터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으로써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소유물)"(롬 14.8,9)이 됨입니다.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는 즉시 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다시 나게 되는 우리 각자는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으로 나는(요 3.6) 것이기에, 우리 각자 개개인이 다 마치 아담처럼 개별적으로 단독 창조됨과 같은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시던 때의 형용을 해 보이시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요 20.22) "성령을 받으라" 하셨으니, 아담이 당시 그렇게 하나님 친히 내쉬시는(아담의 코에ㅡ창 2.7) 숨("생기")으로 영(혼)이 조성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후에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된 것처럼 우리도 성령 받아 새로 창조됨 즉 다시 남으로 인하여 신령한 몸을 입음 즉 영생이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동물적 육체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지으심 받은 후 에덴에 한 동산을 창설하신 다음 아담을 거기 두심으로써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었던 그 동일한 과정을 밟음을 밝히심으로써,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신 것입니다. 즉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일제히 순식간에 신령한 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새 창조가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일렽의 과정이 그림처럼 묘사되었으니, 어찌 성경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무책임한 말을 한단 말입니까! 단 현재의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낳고 낳음으로 생겨나는지라 2천년이 소요된 것이나, 신령한 몸 변화는 주님 오심과 맞추어 순식간에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 받음이 위의 설명처럼 새 창조이니까, 아담이 창조될 당시 선하고 의로운 자, 거룩한 자였던 것과 같이 무릇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는 자마다 모름지기 상대방중심,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함이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하나님 믿음", "구원의 확신" 등은 일체가 자기 기만에 그칠 뿐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이 중대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믿으면 구원"이라고만 속여 온 것입니다. 그런 것은 백날 외쳐보아야, 백날 믿어보아야 구원이 아닙니다. 크게 경각심을 가져 마땅한 일입니다.
자아중심 아닌 상대방중심은 관점/인식 차이 및 의지 유무로 좌우될 뿐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과 바벨론 신학(사탄의 거짓말)의 차이는 <초대교회 4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공용/共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ㅡ행 4.32)에서 당장 드러납니다. "영광의 몸"(빌 3.17)/ "신령한 몸"(고후 15.44)이 아닌 동물성 육체의 특징은 <자아중심>의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 내지 집착>("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ㅡ눅 14.33)에서 완연히 드러나집니다.
그러나 구원 받음의 증거는 <상대방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이므로("우리 중에 누구든 자기 위해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ㅡ롬 14.7-9), 초대교회는 당연히 그 증거로서 <행 432>가 두드러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칭 "교회"로서, 우리가 아는 한 이 소중한 초대교회 전통을 따르는 데라고는 단 한 군데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무엇이냐, 초대교회와 오늘날 교회가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니 이는 전자는 "자기 부인"의 하나님 중심이요 후자는 자아중심이라는 그런 극명한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위 "교회"는, "자기 소유"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구원 받았다는 증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그 뜻인가요? 그러합니다. <달리 설명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 432>는 눈 씻고 찾아 볼려야 볼 수 없고 구경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이 현상에 대한 유일한 풀이가 있다면,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에 사로잡혀 "구원 받았다" 하지만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다"고 하나 믿는 것이 전연 아니었다는 것.
"저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ㅡ롬 2.6-9)을 버리는 자"(디도서 1.16)라는 판단 기준에서 벗어날 재주가 없습니다. <행 432>라는 초대교회적 "행위"는 구경도 할 수 없으니,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을 못합니다.
자아중심이 죄의 정체요 뿌리입니다. 성경에서 정확히 집어 말하는 "욕심"("<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ㅡ약 1.15)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관된 상대방 중심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본능적> 삶이 아닌 <이지적> 삶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능적이고 기계적 삶은 짐승에게만 해당됩니다.
"해당된다"라는 말은 애초 하나님의 창조 결과로서 처음부터 그렇게 작동되도록 정해져 있는 정상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기계 작용은 생존을 위한 최적 작동으로 그 이상의 욕구는 없으니까 그래서 그 자체가 선/善(좋은 것)("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ㅡ창 1.31)인 것입니다. 짐승의 욕구는 단지 생존을 위한 기계 작용이므로 하나님 창조 의도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좋은(선한) 것입니다.
허나 인간 등 영적 존재는 그 지향하는 바가 이 기본 욕구에만 머물지 않고 무한정입니다. 용(뱀)이 아담을 <시기하여> <미워하고> 종내에는 <살인>("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ㅡ요 8.44)까지 하게 되어 범죄자가 된 것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무릇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피조물일일진대 모름지기 상대방 중심으로 행해야 한다는 <삶과 생명의 법칙>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은 그 기본 바탕이 언약/言約, 약속에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인 것입니다. "내가 너를 창조한 것은 내가 전적으로 너를 위할 수 있고 나를 위함이 아니니까, 고로 너는 네 자신을 위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내가 너를 전폭적으로 위해 주므로) 오직 나만을 위함으로써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 내 명령/계명("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居하는[있는, 머무는, 사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ㅡ요 15.10)을 따라 네 이웃들을 위하는 언행심사 일체로 임하는 상대방 중심으로만 나가고 자아중심은 일절. 배척하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중심"과 '자아중심'을 분명히 가려서 행동하는 것이 어른과 아이, 짐승과 사람,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과의 <하늘 땅의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마귀의 거짓말로서 인생들을 속여 멸망시킴이 목적이므로 이런 엄숙한 이치를 감추기에 급급하여 <자아중심> 일변도의 "하나님 시인(믿음)", "구원 받음" 심지어는 "하나님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황당무계까지 지어내어 퍼뜨린 것이 오늘날까지의 역사입니다.
애초 인간 창조의 기본이셨던 신령한 몸의 특색은 자유·평등입니다. 기계적 작용인 짐승들의 동물성 육체처럼 죽음에 얽매이지 않고 굶주림, 헐벗음 등등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자유를 똑같이 누리니까 평등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동물성 육체라는 일대 참사/慘事, 대형 사고를 만나 "죽은 자"(마 8.22)가 되어 있는 아수라장 속에서의 고통 고난의 아우성 가운데에서나마 삶의 흉내라도 내겠다면 모름지기 이 평등, "평균"(고후 8.13,14)케 하려는 노력, 본보기만큼은 교회가 나타내어야 마땅하고 이는 상식에 속합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행 432>에 힘썼고 충실했던 것입니다.
비록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21세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천사의 복음" 시대 삶/생활 양식/樣式("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ㅡ마 19.21)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여 힘써야 마땅한 줄로 압니다. 우리 주님 분부하신 대로이니 지체 없이 앞 다투어 행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믿음", "구원 받음''이 이 순간에라도 말짱 물거품으로 끝남을 부디 명심해야.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미신/迷信 아니, "바벨론"의 올무, 함정, 덫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소위 "잘 믿음"은 "십일조" 충실히 내는 따위의 '무의미"를 가리킴입니다. 10분의 1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나의 1백%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나의 구원 받음입니다. 주님 친히 자기의 전부 즉 100%를 내게 주심으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니까.
바로 이것이 "한 영"(고전 6.17)됨 즉 "하나"(요 10.30)됨으로서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이 "하나"됨의 구조는 "한 몸"(창 2.24)됨과 같으니, 즉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 남편 것은 아내의 소유됨과 같아, "한 영"에서는 삶/생활 자체가 그렇게ㅈ 되는 것 곧 <상대방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 중심이 "거룩함"(성결)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했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14) 했으니, 하나님을 아무리 시인한다 해도 자아중심이면 "행위로는 부인함"(디도서 1.16)이니까 모든 것이 도로무공/徒勞無功(십일조 열심히 내고 교회 집회 열심히 나가도 헛되이 애만 쓰고 아무런 보람이 없음)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든 사람 사랑이든 말로만 끝나면 위선/僞善(겉치레)이요 자기 기만이지만 행위("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 누구든 그에게 '평안히 가라, 따뜻이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ㅡ약 2.15-17/요일 3.18)가 따름으로써 그 진정성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그윽한 데서 생명수 샘물 강물되어 흐르네(중복게재ㅡ앞당겨 놓음)
"내 마음 그 깊은 곳에"...이안삼의 최대 히트곡에 접목시킨
"내 마음 그윽한 데서"
(이 곡과 가사는 독자 여러분이 개인적으로만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고 공식 발표는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저작권에 저촉되기 때문임을 감안해 주시기를)
이안삼은 "독실한 기독교인"⁸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성가곡 '선하신 목자'를 작곡하며 음악계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얻기 시작했고 이 곡은 그의 전체적인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평가받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자비량 선교 활동에 동의하며 해외 활동에도 참여한 기록이 있다. 그를 추억하는 음악계 인사들은 그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억하며, 그의 음악적 영감이 신앙과 깊이 닿아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1.
내 마음 그윽한 데(에)서 내 마음 그 깊은 데(에)서
생명 샘(계 7:17)물 강물(요 7:38)되어 흘러 흘러 넘치네
주님 안 '늘 평안'(요 14:27)되어
주님의 '늘 기쁨'(15:11/17:13)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넘치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내 영혼 그윽한 데서 내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 "그윽하다"→ 깊숙하고 고요하다. 잔잔하고 은근하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찬송가 412장에서.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내 영혼 그윽한 데서 내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 "그윽하다"→ 깊숙하고 고요하다. 잔잔하고 은근하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찬송가 412장에서.
"나의 영혼이 주님을 가까이 따르니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 63: 8).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시 73: 23). 주님의 오른 손이 나의 오른 손을 붙잡으시면 자연스럽게 주님의 왼손이 나를 감싸 안으심이 됩니다. 나는 항상 내 옆에, 앞에 계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오른손은 항상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니, 주님 친히 내게 그와 같은 힘이 되어 주심입니다.
"하나님, 저를 위하시는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우리말 번역 단순히 "제가 주님의 생각을 보배롭게 여긴다"와는 달리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저를 위하시는 주님의 생각이 보배스러우시다"의 뜻).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으신지요. 제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습니다"(시 139:17,18).
"내 마음 그 깊은 곳에"란 가곡은 그 음조가 강의 흐름을 연상시킨다고 느껴집니다. "강물"이라면 우리에게는 성령과 관련된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 유명합니다(요 7:38). 영역으로는 "rivers"로 되어 있으니 그 풍성함을 직감하게 됩니다. 성경에 "주님께 노래한다"는 또 다른 풍성한,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잊기 쉬운 의미가 있습니다. 365일 24시간 내 앞에 성령으로서 서 계시는, 인생 중에서도 당연히 가장 아름다우신 모습의 주님(행 2:25). "성령" 이라는 말은, 또 아버지 하나님 친히 그렇게 계셔 주시는 형상이시기도 하다는 뜻. 3위1체 법칙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게 된 놀라운 실상입니다. 즐거운 노래가 없을 수 없지요.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다"(:26)가 그것입니다.
강물은 흐느적 흐느적 흐느끼며 흘러가는 것이라기보담은 흥에 겨워 신나게 몸을 구을며 즐겁게 노래하면서 활기 차게 흘러가는 것이 제격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마음 속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가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곡조가 아주 시원스럽게 강의 유동/流動을 묘사하고 있어 그냥 두자니 아깝기에ㅡ. 특정 성경 구절들을 마음에 새기는 것에 치증하는 쪽으로 다듬었습니다. 모든 찬송 찬미가도 가급적 그런 특색을 지님이 마땅하다 봅니다.
(아래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악보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노래는 박세원)
https://share.google/yxkwFrIIF9L0iIMo3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trinia/224120513831
https://twitter.com/
trinia5.blogspot.com
피드 구독하기:
덧글 (Atom)
-
"내 마음 그 깊은 곳에"...이안삼의 최대 히트곡에 접목시킨 "내 마음 그윽한 데서" 이안삼은 " 독실한 기독교인"인으로 알려져 있 었으며 성가곡 '선하신 목자' 를 작곡하며 음...
-
종전 명칭인 DPA pix를 ADAM pix로 변경하였습니다 . ADAM은 Angel and Devil's Actual Manifestati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