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계 17:5)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1)를 가리키며,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5), 그 짐승의 정체로 말하면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8)로서 사도 요한이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겼다>"(:6) 했으며, 나중에는 짐승이 이 음녀를 "미워하여"(:16) 멸젙시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종당에는 바벨론이 사라지게 될 것을 가리켜 계시록은,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18: 2) 했습 니다. 표면으로는 "짐승"이 "음녀"를 없애는 형태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인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 자행된 영적 음란 행위 곧 일체의 악행에 대한 보응이신 것입니다.
이상 서술된 것을 종합하면, 사이비 교회 다시 말해 바벨론 신학의 바벨론 교회가 초대교회 이후 곧장 나타나 "하나님 섬김"을 표방하여 가장하고, 세상 각국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백성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서고, 실질상 적그리스도 행세(하나님 성전에 앉아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짓거리)를 하는데, 때가 오면 지금까지 "복음"으로 위장해 왔던 일체를 한꺼번에 뒤집어 엎고 몌시야 예수 우리 구주님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으로 꾸며 행세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당장 우리가 척결해야 하는 것은 바벨론 신학 곧 황당무계의 모든 사탄의 성경 관련 거짓말과 속임수이므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4) 하심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거짓됨을 통해 사탄이 노리는 바가, <세상 삶의 사랑> 즉 자기 부인을 무시함에 있고 일반적으로 <범죄(불순종)> 행위를 이 세상에서는 불가항력의 그 무엇인 양 인식하게 만들어 자아중심을 버리지 않게 하는 사이비 성경 풀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행함으로 구원 얻음"과 "믿음으로 구원 얻음"으로만 양분시켜 마치 그 양자 택일로써 영생 여부가 가름되듯 그릇 인식시키는 것, 그리고 로마서 7장 24절의 죽음의 탄식을 구원된 자 곧 바울 사도 자신의 직접 체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니, 왕년 에덴에서 치명타를 입히던 간악한 계략 그대로입니다. 혼란과 혼돈으로 뒤범벅된 너무나도 기가 찬 뒤죽박죽, 엉망진창의 소위 신학("계시"가 아닌ㅡ눅 10: 22)입니다.
주님의 경고 즉 스스로 "돌이켜(나는 신학적 지식에 통달해 있으니 "지혜롭고 슬기 있다"는 일체의 자부심을 버려야ㅡ눅 10: 21)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마 18:3)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숨기시는데" 인간이 무슨 수로 감히 구원을 얻는답니까!
21세기 이 세상 "마지막 때"에 거의 2천년만에 맞는 이런 중대한 전환점의 "때"를 예고해 알리심에서, 그 시대적 특이 사항이 결코 없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에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한 "표적과 기사"(요 4:48ㅡ"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가 필수였듯이.
2천년이 가깝도록 이런 언어도단, 어불성설의 사탄의 거짓말에 휘둘려 왔으므로 이런 끔찍한 사탄의 거짓에 포로되었다가 비로소 해방되는 순간의 중대성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이짚트 탈출에 결코 못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의 "표적과 기사"는 과거와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사탄도 지금 적그리스도의 때를 당해 이전 시대의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규모가 더 큰 초능력을 과시할 채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세기 표적과 기사"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다름아닌 3위1체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 개개인의 생애를 눈금 자로 재듯이 엄격한 원리 원칙에 맞추어 재단/裁斷(옷감이나 재목 등을 치수에 맞게 자르거나 다듬는 것)하듯 다루는 것이니, 이야말로 창조자 하나님의 증명/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리요?
이뿐만 아닙니다. 이 법칙이 아담 때부터 시작하는 등 무조건 정해진 것이 아님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데에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부득불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정해졌음이 명백히 드러났으니, 이렇게 정해진 것을 두고 정신 이상이 어니고서야 누가 "우연"이라 하겠나요. 그 정해진 시점과 목적/의도가 100%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 나자말자 살인 행위부터 일어났으니 아우 아벨이 형 가인에게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천년 가까이 살게 되어 있었으니까(이는 아담이 영생하는 신령한 몸이었다는 증거로서 초자연계적 육체의 기운이 서서히 사그라졌다는 설명이 되는 까닭) 3운법칙이 그 때에도 적용되었다면 아벨이 그렇게 100세 미만에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그런 젊은이의 죽음이, 살인자 가인의 4대손인 라넥 때에 다시 일어납니다. 한 젊은이가 창으로 라멕을 공격해 와 상처를 입히며 계속 덤벼들어 자기가 죽을 위기에 이르자 그 "소년"을 죽여버린 것입니다(창 4:23,24). 이 때만 해도 3운법칙을 아직 정하시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정하셨다면, 아담의 아들 셋의 7대손 노아가 950살에 죽었으니까 당시까지만 해도 천년 가까운 장수를 누리는 때라 "소년"의 죽음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기에.
가인의 4대손인 라멕 이후에야 3운법칙을 정하셨음이 명백하니, 노아의 생애가 SN유형임이 드러났기 때문. 즉 라멕 이후에 3운법칙을 정하셨다는 것은, 라멕의 살인 사건으로 인간은 더 이상 자율/自律에 맡겨서는 안되고 그 생애를 강제로 규제하시어 최소한 구원될 수 있는 기회만은 보장해 주실 필요성에서 비로소 3운법칙을 정하셨음이 입증되는 까닭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에도 3운법칙(왜 3가지 종류이냐 하면 만유가 3위1체의 구조로 되어 있고 또 이 체제로 움직이는 까닭이고 또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3운법칙이기 때문)을 정하실 수도 있지만, 가인의 4대손에 이르기까지 미루시고 3운법칙을 정하시지 않은 것은 같은 살인이라도 가인과 라멕의 경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전자에서는 아담이 동물성 육체가 됨으로 인한 자아중심적 본능이 원인이었지만 후자에서는 남을 미워하여 없애버리려는 악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자기를 위해서도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강요되는 살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강제력의 불가피성이 드러나자 라멕 이후부터 모든 인생들을 3운법칙이라는 일정 틀 안에 묶어 놓으신 것이고 죽을 때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목숨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처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상황에서는 "우연"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고 단 한 구석도 발 붙일 틈이 없습니다. 서로 죽이지 않더라도 불의/不意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고 불시의 자연 재해만 해도 엄청난데 모든 개개인을 철저히 감시 대상으로 삼아 죽을 때 외에는 절대 죽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초능력(설사 천사들을 동원하시어 그 작업을 수행하게 하신다 해도)에만 해당되는 것이야 삼척동자라도 능히 이해할 수 있을 일이니까.
더군다나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 즉 3위1체의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 운용이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소한의 구원 받을 시간만이라도 확보해 주시기 위함이라 했지만 네피림은 악령의 분신이기에 구원 자체가 불가능해 해당되지 않으나, 네피림의 직접적 식별은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 때문에라도 무릇 인간으로 태어난 자는 3운법칙에서 예외가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산되어 나오거나 철도 들지 않아 영아로 죽는 경우 네피림인 것이 확증되므로 이런 간접적 식별은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죽지 않으면 또 네피림이 아니라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장수하는 네피림도 많으니 모든 것은 하나님의 관장/管掌 아래 있습니다.
네피림을 식별할 수 없으니까, 유달리 악하다고 해서 또는 천성이 선하게 보인다 해서 또한 이렇다 저렇다로 단정 짓지 못합니다. 극악한 사람 중에도 구원될 사람이 있고 성인으로 추앙 받아도 네피림(히브리어로 단수가 아닌 복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기 전 회개가 선행됨이 필수이므로 선을 행함이 의인됨의 절대 요건임은 불변아라 할 것입니다(롬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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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18:3).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더구나 아담 범죄로 죽고 썩는 그래서 아주 비천한 동물적 육체로서 오셨으니 오로지 나를 위해 물불을 가리시지 않는 일편단심 사랑으로 그렇게 피조물의 형태가 되심도 불사하신 것입니다.
나와 "하나"(요 10:30)되심, "한 영"(고전 6:17)이 되셔야, 그래서 내 영혼처럼 영원히 내 안에 계셔야 아담 범죄의 동물적 육체를 벗어나 인간을 애초 창조하신 대로의 "신령한 몸"(고전 15:44), 영생하는 육체로 내가 환원, 복귀(이것이 "구원")될 수 있기 때문. 성자 하나님께서 그리 하셨으나, 성부 하나님 또한 똑같은 십자가 고난/고통을 당하셨으니 성부자/聖父子께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자께서 처녀의 태/胎에 들어가실 때만 분리되어 계셨고, 이후 약 30년 뒤 성자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성부의 성령이 성자에게 임하심으로써(마 3:16) 다시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부자('낳으신 자'와 '낳음을 받으신 자' 곧 '낳아지신 자'로서의 '짝') 관계로 "하나"되심을 만유의 으뜸 가는 법질서로 정하시고 만유의 창조와 운영의 최고 기준으로 삼으시니 이를 "3위1체의 법칙" 또는 "짝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며, 이렇게 세상에 비로소 알려짐이야말로 21세기 "마지막 때"의 최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되시어 나와 함께 하나되어 영원히존재하시니 우리 주님보다 내게 가까운 사람이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가리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 하셨으니,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내 가족도 나 위해 사람되신 주님의 '가까우심'에 견줄 수 없는 실상 그대로를 밝히심입니다.
단순히 우리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시니 영원한 이상향적 삶의 최대 행복의 뿌리요 원천/源泉으로서의 '생명(삶)' 그 자체이신 까닭입니다. '진리'와 '진실' 그 자체이시고 모든 '문제 해결' 그 자체이신 까닭입니다(요 14: 6).
단지 지금 이 시점만은 "사망의 권세"(히 2:14)를 잡은 자가 일시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인지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골 1:24) 하는 때이지만 이 역시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여자의 해산의 때를 인한 근심"(요 16: 21) 정도이니 그래서 "참고"(롬 2:7) "견디는"(마 10:22) "소망(희망) 중의 인내"(살전 1:3)에 불과할 뿐인즉 조금도 위축될 일이 없습니다. 악령들과의 전쟁 중이니까 최후의 승리만이 유일한 답이 되는 것이니까.
"내 마음 그윽한 데서"
1.
내 마음 그윽한 데서 내 마음 그 깊은 데서
생명 샘(계 7:17)이 강물(요 7:38)되어
흘러 흘러 넘치네
주님 안 '늘 평안'(요 14:27)되어
주님의 '늘 기쁨'(15:11/17:13)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넘치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내 영혼 그윽한 데서 내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이안삼 곡에 맞추어
https://youtu.be/GtBP-sSlAJQ?si=4hpzRSBaGyFvqlS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