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4일 금요일

그대의 영적 바로미터는 어떤 수준인가?

 성경의 핵심 가르침이라 하여 "구원은 믿음으로"는 등의 주장은 그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 바을 사도의 구원론에서 "참고 선을 행함"을 "영생"(롬 2.7)과 직결시켜 놓고 또한 그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6)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13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로마서 2장 전체가 이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3장에 와서는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였다.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밝힘이다. 즉 하나님이 만인간을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어 오직 율법(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영원불변의 원칙이나, 그래서 아담 범죄 전에는 이 원칙이 적용되었으나 아담 자신부터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통에 "모든 사람이 죄인"(3.23)이라 "선을 행하는 자가 없어 하나도 없으니"(3.12) 어이하랴! 바로 그래서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본디 원칙은 일단 유보하고 당장 급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이라는 <원상태 회복>이다. 


그러나 만인간이 "죄 아래 있어"(:9)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20) 이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수단이 아닌 "죄를 깨닫게"(:20) 하는 역할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담 범죄로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알아야 죄인으로서의 "옛 사람"(롬 6.6)을 벗어나 새로 창조된 "새 사람"(엡 2.15/4.24 )이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새 창조는 즉 새 피조물됨은 필연적으로 의인됨이니 하나님이 죄인을 창조하시는 법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하나님의 계명에 복종)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3.20)는 결론. 따라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행위의 법으로써가 아닌 오직 믿음의 법으로"(:27)써다. 창조는 하나님의 단독 영역이라, 선물이지 그래서 우리는 감사히(은혜이시니까) 받는 것뿐이다. "고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28).  

단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으니(이것이 이 글의 요점)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렇다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31)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새 창조를 위해서는 믿음만이 필요하나 창조된 다음에는 당연히 우리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야 당연 상식이 아닌가. 행함이 없이 무슨 순종이 있으며 사랑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이 사탄의 바벨론 신학의 거짓에 넘어가 하나님의 계명 지킴(순종) 즉 <행함> 자체를 아예 폐기해버리는 망동을 저지르고 있다. "도리어 율법(하나님의 계명)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고 한 바울 사도의 추상 같은 경고를 어찌하여 감히 무시하려드는가! 멸망을 자초하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수차례 같은 내용으로 게시물을 올리는 것은 워낙 사안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이 "은혜(믿음)"와 "복종(행함)"("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ㅡyour own salvationㅡ을 <이루라>ㅡwork outㅡ빌 2.12)을 잘 구분하여 이해를 하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나는 성경을 안다"고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바로미터(barometer)'임을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 4.6).

2026년 7월 23일 목요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쇠사슬을 완전히 끊어내지 않는 한 구원되지 못한 것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轉嫁(imputation)된 것은 아니고 그 범죄의 결과가 "죽은 자"(마 8.22)됨 즉 신령한 몸을 빼앗기고 동물성 육체가 됨이었으니까, 동물은 자기 본능에 의한 자기 중심(기계적 작용에 의해 생존하므로 이는 필수 사항)의 그 동물적 특성은 자유의지의 인간에게는 "죄의 몸"(롬 6.6)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나(이를 사람들은 "원죄"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나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다시 말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대로 내 안에 친히 오시어(성령으로) 나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심을 인하여, 그 죽으심과 부활이 "교차 소유(mutual posession)"로 내 죽음 및 부활이 되는 막중하신 은혜로 완전히 "멸해져"(:6) 파괴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 받음 즉 정상 회복입니다. 반복하지만 우리 구원은 애당초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던 신령한 몸(아담 범죄로 상실했었던)으로의 완전 복귀인 것입니다(현재의 몸의 실상은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 실황을 믿음으로 보고 기뻐하는 차이는 명백한 것). 

그래서 "심판의 부활"(요 5.29)이라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멸망자는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다음 불 못으로 들어간다는 뜻. 즉 "생명의 부활"(:29)이 있음과 동시에 반드시 "심판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심판 받아 멸망에 들어가는데 구태여 부활해야만 하느냐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이유가 분명히 있으니 <처음부터 모든 인간을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 또한 성경이 하나님 친히 하신 말씀이시지 인간이 지어내고 꾸며낸 거짓말이 아니라는 훌륭한 그 막강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람은(거짓말에 통달/通한 사탄 마귀라 할지라도) 이런 거짓말은 못합니다. 주님은 진실이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말씀하심입니다. 이렇게 동물성 육체가 아닌 신령한 몸으로 인간을 지으셨지만 사탄이나 그룹(cherub) 등 영물이나 아담의 범죄처럼 자기 중심의 악심을 품을 수 있어 범죄가 성립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성경의 하나님 계명이 성문율이고, 불문율이 또한 있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양심입니다(롬 2.15 /요 8.9). 따라서 성경은 몰랐더라도 양심의 가책은 받을 수 있기에, 범죄는 그마저 외면했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외심이 있는 사람들은 백부장 고넬료(행 10.35 )처럼 구원 받도록 하나님이 권고하여 인도하시기에, "나는 몰랐노라" 핑계대지 못하는 법입니다.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로 팽팽히 맞섰을 정도로 이상 두 가지 인간 심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구원의 길은 만인간에게 명백히 개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무조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일방적 압박감에만 내쫓기는 것이 아니고 양심상 가책도 동시에 받는지라(가룟 유다의 예에서도 보듯ㅡ마 27.3~5),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있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이같이 인간은 죄의 본성(아담 범죄로 인한)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자발적 행위'의 양면성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죄의 몸"(롬 6.6) 및 "죄와 사망의 법"(8.2)을 말함과 동시, "오호라!"(7.24) 하는 장탄식이 있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사람 평생 그렇게 갈등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 종식되어 성령으로 말미암는 최종 승리로 끝나 막을 내리게 되어 있는 것이니 더 이상 바벨론 신학의 거짓에 놀아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니 그러므로...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고전 15.57, 58)이라 함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써(성령의 세례) 그리스도 친히 내게 임하시어 구원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거듭) 남"(요 3.3,5,8)입니다. 아담의 육신으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마지막 아담"으로는 그 영 곧 하나님의 영을 받아 모심으로써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나는(출생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히지 않았다면 신령한 방법에 의해 그 신령한 몸을 물려받아 영생했겠지만 아담 범죄로 그 영광의 몸을 상실하였기에 하나님 친히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사람이 되신 후 그 영(사람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신령한 영광의 몸이 되도록 조처하신 것이 우리 구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주님 친히 내 안에 내 영혼처럼 오시어 완전히 나와 "합하시어 한 영"(고전 6.17)이 되어 계시기에 그리하여 "교차 소유",  "교차 삶"에 따라 더 다시는 과거처럼 죄지을 자기 중심의 바탕이 아니므로 "거룩하고"(벧전 1.16) "완전해진"(마 5.43) 것으로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죄의 바탕이 아니니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고의적으도 불순종하지 않는 한 그러합니다. 이 "고의적인" 불순종에는 세상(삶)을 사랑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경고하신 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눅 13.24) 않고 세상에 휩쓸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믿음의 헝제들을 위하여, 복음 전도자 등 하나님의 일에 매진하는 일꾼들을 위해, 그리고 바울 사도가 당부했던 대로ㅡ "내가 첫째로 권하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심이다"(딤전 2.1~4) 함과 같습니다. 이같이 기도하는 기도자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영적으로 "깨어 있다"(마 26.41/막 14.38/눅 21.36/엡 6.18) 할 것입니다.


2026년 7월 22일 수요일

바벨론을 탈출하라는 천사가 전하는 복음의 골자 (4)

기도를 부탁 드리는 의미에서

이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일의 성취 여부는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움직이심 여부는 오로지

여러 성도의 합심 기도로 좌우됨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우주 철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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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자기를 부인하라 하신 것은 "교차 소유에 의한 삶"을 말씀하심입니다. 미국 MRA(도덕재무장) 같은 데서 "철저한 자기 부인"을 표방하며 한 때 '자기 말살'과 같은 것처럼 이해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지 않고 오직 내 상대만을 위하니 자기 부인이지만 그대신 남이 나를 위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니("서로 사랑하니") 내가 더욱 더 위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더 풍성한 생명"(요 10.10)이 이런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계명"에서(앞선 글) 설명한 대로 "너를 위하는 것은 나이니 너는 나만 위하라" 분부하심과 같습니다. 이것이 '교차 소유'의 '교차 삶'의 근원 그리고 기본입니다. "3위1합"에서의 "하나"(:30)됨이니 육체의 "한 몸"(마 19.5)에서는 아내의 몸이 남편 소유가 되고 남편의 몸이 아내의 것이 되는 것이며(고전 7.4), 주님과의 "한 영"(고전 6.17)에서는 삶 자체가 그러하여 주님은 나의 삶을 사시고(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이 그 중거) 나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가 됩니다. 각 사람의 상대는 같은 사람으로서의 자기 이웃이 아니라 첫째가 그러므로 하나님이시고, 그 다음이 하나님 친히 사랑하시는 같은 사람으로서의 내 이웃으로서의 순서가 됩니다. 고로 우리가 구원 받기 전 "회개해야" 하는 것이 이렇게 하나님 위하지 않고 이웃 위함 없이 나 자신만 위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니 사망인 것입니다"(약 1.15). 언제 어디서나 가장 이상향적으로 사람 사는 방법은 이러한 교차 삶에 있음을 우리 모두 마땅히 마음에 새겨야. 


EVERYBODY IN PROMISE(EIP/아이피) move-ment 곧 "너,우리,나"(또는 "너우나" 또는 "너우리나") 운동을 그러한 교차 삶의 맛보기로서의 범세계 사회운동으로 세계 전도 차원에서 보급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 슬로건(영문)은 "FIRST for you, for ALL, ABUNDANCE for me."입니다. 즉 " 먼저, 우리 모두, 풍요 번영"입니다. 영문에서 밝혔듯이 사람마다 자기가 대하는 상대를 먼저 생각해주고(당장 내 눈 앞에 니타나 직접 보여져 인식하게 되는 대상이기에) 이렇게 자의식보다 타인 의식이 먼저라 제1차 관심 대상으로 모두가 약속이나 하듯 마음이 일치하게 되면(그렇게 하기로 각자 마음에 품어ㅡ가벼운 약속처럼 이 운동을 확산/확대시켜 나가면) 결국 내게도 그 감화력이 영향을 끼쳐 그런 <사회 분위기>를 체감하게 되니 종국적으로는 나도 그 훌륭한 수혜자가 된다는 논리로 안착하게 됩니다. 거대한 약속으로서의 어떤 부담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마음 속의 <동감> <의식> 정도로 자진자발적으로 확장해 가는 데에 이 운동의 생명 또는 강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기초 작업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면 "세계 평화"라는 거창한 목표도 그리 어려운 과제로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만드시고 통할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그 첫걸음이라는 데에서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오늘날 나만 구원 받으면 그만이라는 팽배한 자기 중심적 비뚤어짐에서 자기 교화/敎化의 기대 효과도 어느 정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유가 3위1합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고 1합이 그 핵심으로서 교차 소유가 그 생명일진대 자아중심은 우리 뇌리에서 아주 도태시켜야 마땅합니다. 위의 슬로건에서 상대 곧 <너>를 가장 앞세우고 <나>를 맨나중에 위치시킴에서도 이는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불신자 상대의 사회운동 및 전도운동(복음 활동) 차원일 뿐이지 구원 받은 사람들의 "계명 지키는"(요 15.10) 것과는 전적으로 별개입니다. 구원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자기 구원을 자기 스스로 자기 손으로 없애 치우는 망동이 되니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your own salvation,KJV)을 이루어"(빌 2.12) 갈 일입니다.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마땅한 순종을 바울 사도는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순종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니까. 무화과나무에 무화과 외에 달리 다른 것이 달려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열매와는 아랑곳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만 끼고 앉아 있록 속인 것이 바벨론 신학입니다. 


자기 중심은 온갖 죄악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사물을 제대로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하는 원흉이기도 합니다. 교만해져 타인을 멸시하게 되니까 그 타인이 비록 진리를 말한들 귀기울여 들을 마음이 없는 것이 자기 중심입니다. 그래서도 자멸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롬 12.13).

눈 어두운데다 세상까지 어두운 2충3중고의 처량한 인생들이여

 






그대의 영적 바로미터는 어떤 수준인가?

  성경의 핵심 가르침이라 하여 "구원은 믿음으로 "는 등의 주장은 그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 바을 사도의 구원론에서 "참고 선을 행함"을 "영생"(롬 2.7 )과 직결시켜 놓고 또한 그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