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0일 화요일

그림 한 편으로 일람하는 유사이래 최초의 장관/壯觀ㅡ"21세기 표적과 기사"

그림 한 편으로 일람하는 유사이래 최초의 장관/壯觀ㅡ"21세기 표적과 기사"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킬 때 바다는 둘로 갈라져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양쪽의 바다 벽>으로 어마무시하게 갈라진 것이 아니라 멀찍이 갈라져 <두 해변>을 이루었던 것이기에 바로왕의 이짚트 기병들은 겁 없이 홍해 가운데로 뛰어든 것. 장관은 이 때 벌어졌으니 산더미 같은 바다가 순식간에 덮쳐 왔으니까.

"21세기 표적과 기사"는 "그림 한 편"이라 말했나?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가 그것인데 방금 말한 모세의 기적 그 압축판이라 한다면? 홍해라 해도 이 너른 광대무변의 우주에 비하면 손바닥 안에 든 그림 한 편보다 더 작다고 볼 때 규모가 크고 작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이 평가되지 않고 하나님의 움직이심 그 움직이신 모습으로써 기적 여부가 가려져야 마땅하다는 점에 기준을 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래는 이 그림을 처음 대하는 이들을 위한 설명이다.

먼저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의 생애 도표로 눈을 돌려보자. 모든 인간의 생애는 딱 세 가지 SN, FS, OT의 3유형으로 나눠지는 바 셋으로만 분류된다 함은 "한 때, 두 때, 반 때"에 따른 것이기 때문. 어째서 "모든 인간"이라 단정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3운법칙의 얼개(structure) 즉 그 구성 요소인 LP, DP, JP가 각 유형 FS, OT, SN에 따라 1, 1×2, 1÷2가 나타내는 도식/圖式("3위1체"의 도식)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너무나 놀라운 특이한 사실 때문(아래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의 생애 도표에서 보듯). 즉 이 세 마디, "한 때, 운운"은 1, 1×2, 1÷2의 문자화/文字化로서 천사(천사가 다니엘에게 나타나 21세기 예언을 하면서 이 말을 했기에)의 언어 기교/技巧인 것. 왜 이런 기교를 부렸느냐 하면 목적이 분명하니 21세기 무대에 등장하여 전개될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을 미리 알림이었던 것.

그런데 이를 예고/豫告하여 알리되 이 복음의 전주곡/前奏曲에 해당하는 "표적과 기사"(요 4.48)를 대표적으로 묘사하는 묘수/妙手를 두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다름아닌 바로(아래 그림에서 설명하듯) 3위1체의 도식/圖式. 이 "3위1체"의 뜻은 지금에야 완연히 밝혀졌지만 "짝을 이룬 둘은 <들>로서가 아닌 반드시 <하나>로서 나타난다(존재한다)"인 것. 이것을 현대 물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상보성 원리(또는 양자역학)로서 이를 최초로 발견한 이가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이며 이렇게 <만유의 법칙>의 윤곽을 세상에 최초로 알린 공로를 감안할 때 역대 최고의 물리학자라 주저 않고 단정해도 좋을 인물. 그가 논파한 "상반/相反은 상보/相補(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명언에 해당하는 것이 또한 1(상보), 1×2와 1÷2(상반)이기 때문. 1은 짝을 형성하기 전의 상태, 2는 짝의 형성, 3은 3위1체이니 이제는 짝으로서의 '둘'이지만 본디의 "하나'로서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속성이라 설명해도 무방할 것이다.

거듭 말이지만 노자(도덕경 42장 25언)의 "道生一("道가 1이 되었다"란 말은 창조 이전의 하나님이 비로소 "창조주 하나님"이 되셨다 즉 "창조를 시작하셨다"의 의미) 一生二(그 첫 시작으로서 독생자 하나님을 만드심/낳으심으로써 짝을 이루셨다) 二生三(짝으로서의 '둘'이시지만 '둘'로 계시지를 않고 본디 홀로 계시던 모습대로 '하나'로 계심의 조화를 이루시니 마치 별다른 세 모습의 제3자의 존재처럼 되시므로 이를 통틀어 "3위1체"라 한다) 三生萬物(이 3위1체의 이치를 기본/기반으로 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따라서 이 3위1체를 만유 운행/운영의 기본 법칙으로 정하셨다)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닐스 보어가 자기 가문 휘장에 아주 당당히 태극 문양과 함께 '상반'은 상보'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바로 그 이유)".

노자 당시 세상은 "3위1체"를 아직 알지도 못했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대 환경인데 이와 같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3위1체가 만유법칙임을 이렇듯 유창한 명구명언으로 일목요연하게 설파해 놓았으니 그래서 노자를 멜기세덱의 변신으로 확인하는 것. 성경대로 하면 멜기세덱은 현재 유일무이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현존 인물이 되어 있으니까. 에녹과 엘리야는 신령한 몸으로의 변환은 있었으나(따라서 죽음을 보지 않음) 지금도 세상에 남아 있는 현역/現役은 아닌데 멜기세덱만은 죽음 이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따라서 초능력을 십분 발휘) 전신/前身 아담의 1차 변신/變身이고 2차 변신이 노자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3운법칙과 3위1체는 상호 검증 관계에 있다고 말함이니, 다시 말해 이 둘은 이로써 자체 증명이 되므로 별도로 검증 작업이 필요치 않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면(이 도식을 "3위1체 도식"이라 하는 이유) 3운법칙은 3위1체의 도식 그대로를 구현하고 있는 3위1체의 대표적 '적용예'이고, 3위1체는 그 도식이 말해 주듯 3운법칙의 기본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두 때"와 "반 때"는 1×2, 1÷2와 똑같은 <상반>의 모습. 2를 <곱하기>와 <나누기>로 갈랐으니까. 이는 갑, 을, 병 도식에서 갑과 을이 병을 각기 반분/半分해 있음과 정확히 맞물린다. 반분되어 있는 병이 서로 좌와 우로 반대로 나누어져 있으니 즉 갑과 을은 <상반>이요 병은 <상보>의 모습 그대로다. 작은 그림이지만 이렇게 그 내용을 볼작시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는가! 이런 섬세한 그러나 정확한 초자연적인 초능력의 표현력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작용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적이라 하는 것이다. 천사 말이 났으니말이지만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두가 하나님의 행하심, "하나님의 기적"이신 것이다. 같은 초능력이라도 악령들은 자아중심이라 "자기 이름으로 한다" 즉 "제 것으로 말한다"(요 8.44)고 설명하신 것과 확실히 대비된다.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는 것이 같은 뜻.

요셉의 생애(아래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인간 생애(OT, SN형에서만)에서 그 JP의 의미를 설명하는 세계 유일의 근거가 아이들 좋아하는 읽을거리처럼 재미나게 씌어진 기록이 이 요셉 일대기다. 성경 기록자가 아니, 하나님께서 심심하셔서 이런 삽화 같은 이야기를 성경에 끼워 넣으신 것이 아니다. 오직 목적이 이 21세기 마지막 때에 나타내실 "그림 한 편"의 특이한 아니, 기상천외의 JP, LP, DP를 설명하시고자 하심이다. 이것을 "당치도 않은 억단"이라 보는가? 어떻게 보든 자유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마지막 때 "천사의 복음" 전파에 절대 불가결인 "천사의 21세기 표적과 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대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 "JP"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이 JP를 설명하는 세계 유일무이의 문서가 이 요셉의 생애 설화인 것이다.

요셉은 그 JP에서 LP, DP가 각각 17년, 13년으로서 도합 30년이다. LP가 17년인 것은 늙은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은 햇수이기 때문. 다시 말해 17세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다가 형들의 못된 시기심에 걸려 넘어져 그 후 13년간을 일어서지 못하다가 30세에 바로왕의 꿈 해몽 덕택에 일약 이짚트 제국의 제2인자로 등극하니 참으로 꿈같은 "꿈의 인생"이다. 그의 생애 분석에 따르면 40년간 그 자리에서 세도를 부리며 이짚트 전국을 호령한 것이다. 요셉의 JP에서 LP, DP가 각각 17년, 13년인 것은 30년의 JP에서 각각 4/7, 3/7이니 이는 인간 생애 유형 중 하나인 FS형의 닮은꼴 곧 축소형 그대로다. FS형의 LP, DP가 각각 4/7, 3/7이기 때문이다.

JP가 FS형의 닮은꼴/축소형이라는 것은 놀랍게도 다름아닌 3위1체 도식에서의 1, 1×2, 1÷2 그대로를 나타냄이다. 즉 갑과 을이 병을 각기 상반되게 반분/半分해 가지는 형태를 곧이곧대로 반영시킴인 것이다(아래 그림)! 가감 없이 쏙 빼닮은 그대로인 것이다. FS형은 JP가 없고 OT, SN형에만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솜씨이고 기적, "표적과 기사"이지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더 있다. 모세의 생애가 대표하는 OT형을 보면 3등분의 아주 말끔하고 말쑥한 세련된 모습이다. FS형도 7등분으로서 JP 없는 LP, DP가 각기 4/7, 3/7이다. 3과 7은 원래부터 신/神의 숫자로 알려진 누구에게나 낯익은 것이지만 이 7등분도 3등분(OT형)의 우아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3가지 유형 모두 "마디(절/節)"가 있는데(이 "마디"라는 것의 정체가 달리 다른 뜻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다) FS형은 56마디, OT와 SN형은 똑같이 57마디이다. 바로 이 점에서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 즉 OT와 SN형은 같은 57마디로써 대칭을 이루어 상반/相反이다. 따라서 FS형은 상보/相補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상반"으로서의 OT와 SN형이 걸작이니 OT는 앞서의 설명대로 어느 모로 보나 단정/의연하여 귀태가 나는데 SN형은 그 반대다(아래 그림의 모세와 노아 생애 도표 참조). 한 마디로 "지저분" 그 자체다. 난데없이 19라는 숫자가 어디서 굴러 왔는가 말이다. 다른 것은 다 1, 3, 4, 7로 퍽이나 익숙한 꽉 짜여진 잘 다듬어진 모습인데 "19"라니! 어디서 굴러 온 돌멩이란 말인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있어도 너무나 명백하게 마치 "글(또는 숫자) 그림"처럼. 다시 말해 그 "지저분함" 자체가 답이요 설명일 줄이야! 얌전한 것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으니 흉물일 수밖에는! 왜 뒤집어 놓았느냐? 상반/相反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오직 이 이유 하나뿐인 것.

57(마디)=3×19(OT형)
57(마디)=19×3(SN형)
3×19의 뒤집힘이 19×3인 것이다
(아래 그림 모세와 노아 생애 참조).
19개 마디의 3등분이 OT형.
3개씩 마디의 19등분이 SN형.
이렇게 설명이 되도록 일부러 짜 맞춘 것이
하나님 솜씨,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어떤 무엇이 "21세기 표적 기사"란 말인가!
"최소한 인간의 손길은 닿지 않았다".
이것이 "기적"의 정의/定義다.
"천사의 복음"과 직결되었으니
악령의 초능력은 아니다.
끝으로 닐스 보어가 "상반은 상보"라는
명구를 세상에 선물로 남긴 것은
역사적이요 기념비적인 것이다.
노자의 "3생만물"과 맞먹는다 하리라.
세계 교회는 이들에게 사의를 표해야.








교회 중의 "믿음 연약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


바울 사도 역시 교회 중 "믿음이 연약한 자"(롬 14.1)가 있음을 인정했고 또한 그런 형제자매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고 했으며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3)이라 했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니 그가 세움을 받을 것이요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께 있음"(:4)이라 했습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김이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것이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5-8)이라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9,10)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아 다시[거듭] 나 성령 받아 모신) 중 "믿음이 자라가는"(살후 1.3) 과정 중인 형제자매도 없지 않아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중에 "신령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도 있어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실상도 밝혔습니다. 즉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가 있음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 할 정도였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행함이 아니냐"(고전 3.1-3) 한 것입니다. 


고로 모두가 일제히 완벽한 상대방중심으로 변하여 자아중심은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사정이리요. 그러나 이런 현상을 당연시함을 경계하여 교회에 대하여 엄중 경고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다"(:16,17) 했습니다.


이 세상은 사실대로 말하면 일대 난장판입니다. 영광의 신령한 몸이었던 아담이 졸지에 물컹물컹한 썩을 짐승의 육체가 되는가 하면, 인간 세상이 "미친 마음"투성이인 악령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탓입니다. 그들의 등쌀에 6천년래 안정을 찾지 못하는 가엾다, 너 인생이여! 그나마도 속아 넘어 가 여기가 삶의 본고장인 양 들떠 밤낮 저들끼리 아귀다툼을 일삼는구나! "하나님은 없다"는 악령들의 말장난에 맥없이 놀아나는구나! 이 모두 아담의 죄 곧 자아중심이 벌어들인 날벼락입니다. 생명의 상대방중심을 헌신짝처럼 여긴 메서운 대가요 보응입니다. 어찌 할꼬! 어찌 할꼬!

그래도 모든 피조물의 어버이신지라 인간 구제를 위해 친히 죽음의 진창 속으로 뛰어드신 창조주 하나님. 전체 인류와 "하나"되심의 3위1체 이치로 개개인을 원래 창조하신 그 신령한 몸으로 되돌리시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이 되신 후에 성령으로 각자 안에 임하시어 해당 인간의 영혼과 "한 영"(고전 6.17)으로서의 "하나"를 이루시면 그 사람 역시 똑같이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 따라 "그렇게 죽고 부활하는" 몸이 됨으로써 범죄 전 아담의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복귀되는 고로 이를 "성령으로 나는(출생하는)" 것이라 하고 "새 창조"라 하는 것이며 그래서 "구원 받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한 영"으로 "하나"를 이루는 여기에 구원의 핵심이 있습니다. "대신 죽음" 따위의 무식한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읽고 오직(사람의 생각에서 난 신학 서적이나 설교집이 아닌 성경만) 명상하며 "성령의 가르치심"(요 16.13)에서 오는 "계시"를 갈망하면 아니가르치실 이유가 없습니다. "문을 두드려러, 그러면 열린다" 하심은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열리는 법이 없다"는 바로 그 말씀. 자동적으로 알아지고 베우는 법은 없습니다. 두드려야, 찾아야, 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과 한 영, 하나되어 구원이 되는 까닭에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기에 이렇게 됨에는 엇바꿔(맞바꿔) 즉 상호 교환하여 상대의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얽혀지는> 것이니, 이것이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인 3위1체에서 "3위"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3위"가 결성되는 요건입니다. 어려운 말도 아니고 상식 차원입니다. 즉 남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면 남편의 몸은 아내의 소유요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가 똑같은 이치입니다. 어느 쪽이든 자기 몸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다른 이성과 별도로 관계할 때 둘의 하나됨은 와해되고 이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고전 7.4). 이상 설명대로의 육체적 관계일 때 그렇게 갈라질 수 있고(마 19.9) 기타 다른 사유로는 이혼은 일체 불허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한 몸"에서처럼 모름지기 삶이란 것은 "한 영"으로서의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이런 관계 형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저절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이니까. 바꾸어 말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모든 인간이 한 분 <머리(창조주)>를 모신 한 <몸>으로서의 각 지체 각 부분을 구성한 "하나"로서 가장 이상향적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님과 내가 짝(창조주와 피조물)을 이룬 것과 같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짝(파생하신 이와 파생되신 이)을 이루심이니 만유는 이렇게 짝(대칭)으로 빈 틈 없이 구성된 것이라 이래서 '3위1체'를 "만유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요 무릇 삶이란 것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법질서로 영위되는지라 성부 하나님을 위시해 일체의 존재가 상대방중심이요 생명의 세계에서는 자아중심을 찾아보려야 볼 수 없고 멸망과 죽음의 세계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실상이 바로 그러한 자아중심입니다. 고로 새 창조로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골 3.10)/된 자는 모름지기 상대방중심 일색의 인생관이니까 여전히 옛 버릇대로 자아중심인 자는 무릇 그 누구든 자기의 구원됨 여부를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자아중심이면서도 여전히 구원 받았다 고집한다면 자기 기만의 비극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확한 진단입니다. 무조건 믿으면 무조건 구원이라는 사탄의 고색창연한 옛 에덴 거짓말의 바벨론 신학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2026년 2월 9일 월요일

북한교회 100년 수난/受難의 의미(계 12.2,5) 의 의미(계 12.2,5)



 










성경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교회에 치명타를 입혀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 하시고 새삼스럽게 "천사가 복음을 가졌다" 했는데 사탄이 옛 에덴에서처럼 어떤 거짓말로 속여 왔으며, 이제 천사로 말미암아 드러나진 "거짓 아닌 진실"된 복음이 무엇이냐 할 때, "천사의 복음"이라는 말 그대로 그 내용이 하나님께로서 나왔다는 증거/증표가 반드시 필요한 바(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므로) 그래서 "천사의 복음을 위한 <표적과 기사>"가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사의 표적과 기사"라는 두드러진 특징이 있어야 하는데 이 두 가지 요건에 맞는 것이 바로 "한 때, 두 때, 반 때"인 것입니다.

이 21세기를 지목하는 다니엘 예언에 그리고 역시 이 21세기 마지막 때 예언인 요한 계시록에 똑같이 등장하는 어구로서 다니엘서에 명백히 천사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어 "천사의 표적과 기사"와 관련된 것으로 결론 짓는 것이며, 아니나다를까 3운법칙 도식/圖式과 직결되기에 그렇다면 이 일련의 사실을 세상에 알리면서 나타낸 성경적 진실이 다름아닌 "천사의 복음"이라 단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주된 내용이 무엇이냐 할 때 이미 누차 밝혔지만 소위 "영적 죽음", "대신 죽음", "로마서 7장이 바울 사도 자신의 믿은 후 개인 체험" 등의 거짓말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이런 거짓말을 믿고 있는 한 3운법칙 등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아무리 믿고 성경의 진실성을 아무리 확신해도 말짱 안개/연기처럼 사라져버릴 무의미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도 이해할 단순 명료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사탄은 이와 같이 그 거짓말로 아주 복잡하고 난해한 듯 보이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영적"이라고? 감히 "적/的"이라는 말이 어디서 튀어 나온단 말인가요! 사탄이야 원래 습성이 그렇다 치더라도 이를 그대로 물려받아 앵무새인 양 되뇌는 신학자들! 그것도 성경에 정통한 양 반성의 기미 없는 백해무익의 존재들.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성경을 학문시하여 접근한 순간부터 이미 나락으로 굴러 떨어짐을 눈치 채지 못
한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눅 10.21). 무서운 말씀이 아니신가요! 일부러 "숨기시다"니! 기절초풍할 일이 아닌가요! 이를 마지막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면 이 시간 지나면 평생 가야 돌이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대신 죽음"에서는 나의 자아중심이 티끌만치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천국문은 티끌만큼도 내 앞에서 열려지지 않습니다. "대신 죽으심"이 아니라 나와 "함께 죽으심"입니다. 그러하신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니 나와 완벽하게 "합하여"(고전 6.17) "한 영"(:17) 곧 "하나"(요 10.30)가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죄의 몸은 멸해져(파괴되어)"(롬 6.6) 자아중심의 쇠사슬은 <나의 믿음 따라>(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풀어지고 힘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의 "오호라"의 장탄식은 "죄의 몸"에 사로잡힌 단말마의 비명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몸"의 자아중심은 신령한 몸을 잃고 동물성 육체로 전락함으로 빚어지는 당연 결과입니다. 동물은 기계적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본능 작용이니까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아담의 죽음이 "영적 죽음"이면 하나님이 일부러 아담을 창조하실 때 범죄의 틀("죄의 몸") 안에 가두어 두셨다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해석이 되니, 사탄은 이렇게 성경을 그 거짓말로써 한낱 우스꽝스러운 걸레 수준으로 만든 꼴이 되는데 왜 이를 간과하는 것인가요!

 




2026년 2월 8일 일요일

21세기 오늘 이 시점의 특징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린 아담(호세아 6.7)이다. 다른 언약이 아니라 자아중심이 아닌 하나님중심 즉 상대방중심으로 살겠다는 애초의 약조를 파기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던 것이 이런 엄청난 재앙을 불러들인 것. 그 결과 처음의 동물적 육체로 도로 돌아가버린 것이 현재와 같고 이제 하나님의 인간 창조가 결딴나버렸으니 부득불 새 창조에 임하시게 됨이고, 우리가 여기 호응하는 것을 가리켜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옛 창조나 새 창조나 창조의 원리는 매한가지. 단지 차이는 이제는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를 따라 육(체)으로 나는(출생하는) 것이 아니고 '육'과 대칭인 '영/靈"으로 상대성(대칭성) 원리를 따름이며, 그 구체적 방법은 창조주 친히 사람되심으로 새로운 아담으로 등장하셔서 내 영혼과 "하나"(요 10.30) 즉 "한 영(고전 6.17)이 되심으로써다.


다시 말해 친히 "첫 사람 아담"으로서의 죽음(십자가에 달리심)을 죽으신 후에 "마지막 아담"으로서(다시 살아나시어) 영원히 계시는 고로, 누구든지 하나님 계심을 뒤늦게라도 믿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죄를 회개하고 세례 받음으로써 모든 죄 용서하심이 되면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시는 "마지막 아담"과 한 영이 되기에 주님 다시 세상에 오시는 날 아담이 애초 창조되었던 그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회복되는 것. 다만 유의해야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고난 받은> 경우에 한하고("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니"ㅡ골 1.24) 그렇지 못하면 이 때의 "주님과 함께 다스림"(롬 8.17)의 부활에서는 제외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한 고난도 받게> 하심"(빌 1.29).

육신적인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죽음의 세상, 사탄이 "이 세상 신"으로서 지배하여 핍박을 능사로 삼는 이 세상에 주님을 머리로 모신 몸의 지체로 사탄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영광은 자못 큰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세상 다스리심에 동참하게 된다. 때문에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를 악평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다. 저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유한 자들이여!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다"(눅 6.22-24).

전투가 한창 치열한 전쟁 마당인데, "위로"가 웬 말이냐! "하나님 축복"이 웬 말이더냐! 자다가 봉창 두드려도 분수가 있지. 군법회의 회부감이 아닌가! "상대방중심의 삶의 자세는 좋으나 그럼 거지를 만나면 무조건 잠 재워 주고 입을 것, 먹을 것 다 챙겨 주라는 말인가" 하겠지만, 게을러 거지가 되었다면 무조건 위함이 "선행"일 수 없지만 신병이나 기타 이유로 만부득이 그리 되었다면 대책을 강구해 줌이 사람 도리일 것이다. 상식 차원에서 판단할 일이다. 상대방중심은 하나님 정하신 삶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 최고 지혜다. 기계로 치면 윤활유 역할이다. 논쟁거리로 삼을 일은 못된다. 이에는 만인간의 어버이 창조주 하나님의 "머리"로서의 의미가 막중하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집단이기주의로 금방 변질되므로 백약이 무효다.

3운법칙, 만유의 대법칙(3위1체)이 엄연히 존재하기에 21세기 오늘날 이 시대는 미증유의 <하나님 인식 시대>다. 이 시류/時流를 타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망동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이전의 무신론 시대의 색깔과는 판연히 달라졌다. 어린 아이일지언정 3운법칙의 인간 생애 도표만 한 번 보아도 하나님의 실존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게 될 정도다(이 기회를 100% 활용하여 기도와 전도에 임할 때). 여기 한 몫 거드는 것이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 그의 상보성 원리(만유의 법칙인 3위1체의 물리학적 관점에서의 세계 최초 발견)에 얼마나 확신에 찼으면 자기 가문 휘장에다 태극 문양과 "상반/相反은 상보/"라는 라틴어 문구를 도안해 당당히 새겨 넣었을까! 그러니 이러한 일련의 "하나님 증명"은 오늘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정 사실로 확고히 자리를 굳힌 것이다. 임박한 적그리스도의 출현마저 이 <유례 없는 증명>에 그 확실성을 더해 주는 터이다. 하나님의 증명이 이토록 완벽하지 않다면 하나님으로 자처하고 감히 세상에 나타날 엄두라도 내겠는가! 





사람 사는 법ㅡ상대방중심

 

우리는 <사는 법>을 모르고 여태껏 산답시고 살아 왔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되풀이해 강조해 온 대로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보는 눈이 앞쪽에만 있어 자기 앞은 보지만 뒤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검은 드레스 등짝 쪽에 흰 종이 조각이 붙어 있은들 나는 보지 못합니다. 천상 남(이웃)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데, 이럴 바에야 아예 서로 "상대방중심으로 살고 자아중심으로 살지 말자"는 <약속 맺기>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입니다. 상식 차원이니까 특정인 특정 단체 주도로 할 필요는 없고 서로 동조하는 마음인 사람들끼리의 자발적 움직임으로 확산시켜볼 만합니다. 모두 약속하고 이를 의식하여 언행심사 각자 조정해 간다면 바람직한 사회 정화 운동으로도 정착할 듯합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이 여기서 "약속"에 해당됩니다. 서로가 일제히 약속하는 것이니까 약속하는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간다는 특점/장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선행이나 도덕률같은 "나 혼자 힘쓴다"는 부담감도 없고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모두가 위해지는 삶의 지혜>라는 인식 차원에서 시작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못할 것도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믿는 이들이라면 더욱 더 안성맞춤의 전도 수단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이라는 마벨론 신학 척결에서도 행함을 강조함이니까 일조가 되겠습니다.

"저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나를 배신하였다"(호세아 6.7),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첫 사람 사이에 약속부터 먼저 맺어졌다는 놀라운 진실! 우리 주님 친히 밝히신 대로 이 "약속"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나타납니다. 즉 "나는 너를 위할 것이니 너도 나를 위하여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 곧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관계 상호간의 계약이니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그래서 말씀을 "신구약" 즉 약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혼자 삶이 아니요 "함께"의 삶일진대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의 삶이기에 육체의 "한 몸"(창 2.24)에서 남자 몸은 여자의 소유요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로 바뀌어(고전 7.4) 엇갈림의 교차가 이루어짐과 같이 육체 아닌 삶에서도 당연히 같은 양상과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뿐입니다. 

즉 갑과 을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곧 자아중심을 일절 배격하고 철저히 상대방중심입니다. 해난 사고 만나 어쩌다 절해고도에 홀로 남아 살아가야 하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삶은 무조건 상대방 위주라는 불문율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계적 삶의 짐승이 아닌 사람 및 모든 영적 존재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심이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함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요 15.10),  "이를(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10.18) 하신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자아중심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범죄로 인식하는 이유입니다. 자아중심은 간단히 말해 "욕심"(약 1.15)이요 상대방중심은 사랑이니 성경이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가 사랑이 생명(삶)과 직결되어 있음입니다. 사랑의 본은 우리 주님 친히 보여 주신 그대로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니"(요일 3.16). 사랑이 무슨 고매하고 고답적인 것도 아니고 평범한 상식이고 또 당연한 사람 삶의 하나 밖에 없는 방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상대방 위하기 약속 운동>처럼 시의적절한 사회운동은 없습니다. 악인/죄인더러 억지로 "선해져라, 착해지라"는 강요의 말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가장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할 일을 해보라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자아중심을 장려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중심을 겅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공동 약속을 자진자발적으로 하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과거의 이른바 도덕재무장 운동(MRA)과는 다른 차원이면서도 효율성 높은 것입니다. 강압/강제를 하지 않고도 그 몇 갑절의 고단위 실천력을 과시할 수 있는 마력과 매력을 지닙니다. 아울러 이런 것이 창조자 하나님의 원래 부터서의 기본 뜻 즉 "사랑"이심을 선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치신 사랑을 납득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2천년 전애 죽으신 예수("구원자"란 뜻의 히브리어) 우리 주님의 흘리신 피(보혈/寶血) 공로가 어찌 2,000년이나 지나 태어난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일까 의아심을 품는 이들에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따라서 "성부께서는 <성자로 말미암아>라는 뜻이 됨)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자 완전하신 사람이신 바 그 까닭은 사람이 영혼과 육체가 하나되어 있는 이중구조이기 때문. 

짐승은 육체뿐인 단일 구조인 반면 하나님은 영("하나님은 영이시니"ㅡ요 4.24)으로서의 단일 구조이신지라 광대무변의 우주 "안에(in)", "관통해"(through), 그리고 "위에"(above) 계심입니다. 때문에. "우주(만유)보다 크시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되심은 이전에는 육체가 당연히 없으셨으나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위해 친히 한 처녀의 몸(태중/胎中)에 들어오시어("영이시니까 자유자재하심) 사람되는 달 수를 다 채우신 뒤 세상 밖으로 나오심으로써 영원히 육체를 입게 되시어 사람이 되셨지만 그 영은 시람의 영이실 수 없고 하나님의 영 그대로라 그래서 사람-하나님, 하나님-사람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셔도 이전처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되심은 불변이셨으니(때문에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 고통을 성부 하나님 친히 그대로 남김 없이 다 함께 받으심ㅡ분리되어 계심처럼 보이나, 바로 이런 것이 "영"이신 특징ㅡ사람되실 순간에서만 분리되셨다가 30년쯤 후 우리와 하나되심의 의미와 목적으로 세례 요한에게 세례(이 경우 물을 뿌림이 아닌 물에 잠기심)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 비둘기 형상처럼 강림하심으로 다시 이전처럼 "하나"되심) 육체만 새로 생기셨지 영(성령)으로서는 여전하시어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이렇게 육체를 따라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육체로는 성부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영으로는 육체로 계시는 모습 그대로 믿는 각사람(자아중심을 회개하고 상대방중심으로 살기로 작정한)에게 선물로서 그 속에 계시니까 당시 갈릴리 호수가를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던 그 때(지금은 신령한 몸이시지만) 그대로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로서 "한 영"(고전 6.17)으로 나와 함께 계시니 주님의 죽으심 곧 내 죽음이요 주님의 부활 곧 내 부활인 것.

본디로 돌아가, 이처럼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상호 작용이 삶이요 생명입니다. 성자("마지막 아담")께는 성부께서 머리시요 우리에게는 "마지막 아담"께서 머리이십니다. 여자(아내)에게는 남편이 그 머리입니다. 먼저 나고 나중 난 순서/질서를 따름입니다(이 경우 "평등"이란 말을 쓴다면 무식의 극치가 되는 것). 짐승에게는 이 머리와 몸의 상호 작용이 기계적으로 되지민 자유의지의 인간인 고로 앞서의 설명대로 "언약(약속)"과 "계명"으로 작동되는 차이인 것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상대방중심의 철칙인 것입니다. 영원불변입니다. "자기 부인" 즉 상대방중심만 통하고 자아중심은 어떤 경우에서나 증오의 대상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하심이 주님을 위한 상대방중심, 그리고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이라는 자아중심의 가증스러움을 말씀하심인 것입니다.


2026년 2월 7일 토요일

21세기 하나님 기적의 장엄한 "구경거리"

언제든 되풀이 말해도  지겹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 우리 복음(구원의 희소식)입니다. 복음의 배경은 아담 범죄에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로 죽지 않아 우리가 "죽은 자"(마 8.22)가 아니라면 구원 자체가 필요 없었을 테니까. 고로 반복하지만  아담 범죄의 실상, 그 "죽음"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담의 "신령한 몸"을 빈번하게 언급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죽음"이면 죽음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이 "죽음"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자는 것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실제 죽음이 닥쳐야 비로소 죽음이 아니고  죽을 날("때")만 앞두고 있는  이 동물성 육체 자체를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인간이 애시당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나마도  정해진 날수를 따라  사람 목숨이 붙어 있다가  시람마다 꼭 그 시간에 임해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지부식간에 불현듯 당하는 시도 때도 짬도 없이 닥치는 변고, 이것이 죽음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이 21세기에 밝혀진 "3운법칙"에 의해서 "3위1체" 또는 노자/老子의 "3생만믈/三生萬物(이 역시 동일하게 "3위1체"를 의도적으로 지적함이지만)"의 3이란 숫자를 따라 엄밀히 수학적 규칙성에 의해 정해진 날수만큼만 사람(18,9세 넘은) 목숨이 붙어 있다가 사람마다 꼭 그 죽는 시간에 임해서 죽는 아주 희한한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는 다름아닌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생애를 낱낱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확증됨입니다.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인간 명줄이 하나님께 매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마 28.19)으로 계심에시 비롯되는 이 "3위1체"를 따라 만유 창조를 하시고 만유 운행을 하심으로써 이를 "만유의 법칙(the Universal Law)" 또는 "짝의 법칙", "3위1체의 법칙"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모법/母法으로 한 대표적 자법/子法이 3운법칙인 것입니다. 그래서 3운법칙과 3위1체 법칙은 상호 검증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이 두 법칙의 자체 증명이기도 합니다. 오눌날 영자역학 실험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의 2중성"과 "양자 얽힘, 영자 중첩"이란 것이 모두 이를 가리킴이 드러났습니다. 상보성 원리의 "상반/相反은 상보/"  또한 여기서 나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친히 계시는 모습을 근본 또는 기원울 삼아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그 충분한 논리성이 보장되는 설명이 됨으로써 확고부동의 토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만나서야 그 빛됨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생명과 죽음 사이도 마찬가지지만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어떠한 것인지도 우리는 모르고 있는 참담함에 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아담 부부의 애초의 "신령한 몸"을 체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만큼 실제 그 답답함이야 한량이 없습니다. 동물성 육체에서 오는 한계성(질병이라든가 불의의 사고 등)으로 그저 막연히 느끼는 정도입니다. 동물들처럼 힘이 있는 동안에는 뛰놀다가 기력이 차츰 쇠진하면 "이젠 죽는구나" 비로소 체감하는 인생이긴 하나 짐승과는 마땅히 달라야. 사람과 짐승의 기본적 차이는 무엇이냐, 창조주 하나님을 인지하는 영적 능력 유무입니다. 즉 영혼의 있고 없음입니다. 사람은 있고 짐승은 없습니다. 영혼이 있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교제가 가능하나 짐승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 세상이 죽음이다, 인생은 죽은 자이다" 하시니 그런 줄로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고 달리 생각할 것 없습니다. 단,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그 권위만큼은 절대적입니다. 즉 아무리 그럴 듯하고 화려 찬란한 삶처럼 보이고 인식되어도 죽음이라 하시니 죽음이지 그 외 다른 의미일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은 자"라 말씀하시니 그래서 "구원 받으라"는 것입니다. 죽어 폐기되었으니 새로 창조하심을 받음입니다. 왜 즉은 자이냐, 하나님 창조물로서의 인간은 영생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자연계 육체로는 영생을 못합니다("혈과 육[현재의 인간 육체 즉 피와 살]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하는 것이다"ㅡ고전 15.50). 신령한 몸이라야 썩지 않으니까 영생하는 몸입니다. 신령한 몸은 자연계 물질의 몸과는 달리 그 초능력으로 자연계 물질의 몸으로도 자유자재 변환이 가능한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그러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면 완전히 뒤바꿔진 새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때 가서는 우리가 지금은 도통 몰랐던 영계(비가시성의 초자연계)의 모든 비밀도 죄다 드러날 것이나 그러나 그 전에 악령들이 전지구로부터 일소되는 과정 속에서 많은 악인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어 또한 사라져, 사람들이 마치 보석인 양 희소하게 되는 큰 재난이 닥칠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그에게 원수 노릇을 한 죄인들이 숙청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고로 이 시간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사람들의 대대적 회개와 믿음의 새 결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절대 다수 또는 거의 전부가 적그리스도 우상 앞에서의 경배를 거부한 대가로 그 숫자가 얼마가 되든 순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 다시 오심에 때맞춰 부활의 영광을 입게 되어 <휴거>되는 이들과 합칠 것입니다. 휴거는 주님 다시 오시는 때 그 이전에는 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순교를 각오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3운법칙을 끝으로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습니다. 현재 이 썩는 육체의 인간 생애가 죽음을 맞는 그 <죽음의 때>가 철통 같이 3가지로 엮어진다는 사실까지 마지막으로 알게 해 주셨으니 과연 인류 6천년 역사의 끝간 데까지 왔습니다. 사탄이 지배한 역사의 6천년. 하나님이 새 창조의 작업을 계속하신 의미로 "6잂창조"와 같은 의미의 6천년이고 7천년째 되는 때 주님 다시 오심으로써 "안식"에 해당되는 "천년 왕국"입니다. 

더 이상 알 것도 없고 이로써 하나님의 살아 계심도 유감 없이 확증되었고 그 말씀이신 성경의 진실성도 아울러 입증되었습니다. 기도와 복음 전도에 오로지 힘쓸 일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훌륭한 도구(연장)인 이 3운법칙과 3위1체 등을 알게 해 주셨으니 이는 천군만마를 얻음이라 용기백배 하나님 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진군/進軍합시다. 

3운법칙과 3위1체를 오늘날 인생들에게 알리심에서 "21세기 표적과 기사"에 포함되는 것이 "한 때(1), 두 때(1×2), 반 때(1÷2)"로서의 예고/豫告인 것입니다. 즉 "천사가 가진 복음"을 이 마지막 때 전달함에서 그 "표적과 기사"로 이와 같은 도식/圖式까지 천사는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아래 그림). 3운법칙의 얼개 자체가 이 도안을 빼닮고 있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 역시 유사이래 최초의 희한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장엄한" 구경거리입니다. 모세의 홍해 기적에 못지 않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기에는 일반이니까!







그림 한 편으로 일람하는 유사이래 최초의 장관/壯觀ㅡ"21세기 표적과 기사"

그림 한 편으로 일람하는 유사이래 최초의 장관/壯觀ㅡ"21세기 표적과 기사"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킬 때 바다는 둘로 갈라져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양쪽의 바다 벽>으로 어마무시하게 갈라진 것이 아니라 멀찍이 갈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