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7일 월요일

성찬 예식 고찰 (1)

"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이니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으니"(고전11:27-30).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11:31,32).

성찬식 관련한 바울 사도의 언급에서 유달리 관심을 끄는 대목이 이상 인용한 바와 같이, "주님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어...너희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입니다. 심지어 죽는 자도 있다는 지적이니 소홀히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심판과 결부시켜 멸망이라 하지는 않았고 단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바벨론 탈출"이라는 중대 국면을 맞는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마땅히 유의해야 할 일입니. 바울 사도는 성령 충만한 사도로서 그의 영적 안목은 정확하였으며 따라서 진실 그대로입니다. "너희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은" 것을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와 결부시켜 결론을 내려 진단한 것입니다.

주님 친히 이 죄를 묵과(간과)하시지 않고 손보신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여 바울이 전달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아무나 이렇게 단정하여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나타나심>(보이시지 않음에도)을 직접 목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지 않게 <은혜>가 됩니다. 마치 주님을 우리 5감을 통하여 확인함과 같이ㅡ.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의 교회 집회에 동석/同席하시는 주님의 바로 그 명백하신 증거. 그 역사/役事하심의 사실이 구체적으로 증명됨입니다. 이는 매우 귀중한 사실입니다. 더욱 더 의미 있는 것은 이것이 <우회적으로> 알려짐에 있어 그 파급 효과가 극대화됨 그 자체에 있습니다.

즉 "성찬예식에 주님 친히 함께 하심으로써, 자기를 스스로 살피지 않고 무엄하게 '주님의 축복의 잔을 나누어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고 떡을 떼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고전 10:16)한 자를 징계하셨다"는 직접적인 말보다, 이와 같이 간접적으로 바울 사도의 성령 충만함으로써 꿰뚫어 보는 사실 파악에 접하는 은혜라 강력하게 인상에 남고 우리의 뇌리에 와 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 13:8)하십니다. 그 때 당시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과 함께 어디서나 그리고 어느 시각에서나 동행同行 동거/同居하심의 훌륭한 증표로서 위의 대목을 명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같은 아름다운 기억이 되게 합시다.

살아 계시어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는 사람이신 주님. 그러나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으로 우리 모든 각자와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처럼 나와만 계시어 나만 상대하시듯 그렇게 1대1로 계시고 그와 같이 역사하심입니다. 이는 몇 백 번 강조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낼 것"(요 16:7)이라 하신 것입니다. "보내신다" 하심은 지금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골 3:1) 때문입니다("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 소리치니"ㅡ행 7:55,56).

허나 "하나님은 영"(요 4:24)이신지라 만유에 충만하시므로("그리스도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심"ㅡ골 3:11) 성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되신 "우리"("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ㅡ요 14:23)로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 네 하나님(네가 믿는)이 어디 계시느냐?" 묻는다면 나는 당당히 대답합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의 그룹들 위(왕하 19:12) 옥좌/玉座(보좌/寶座)에 앉아 계시고 동시에 바로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이사야 57:15/요 14:23). 우리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심을 알지만, 웬걸 뜻하지 않게 이 성찬식이라는 주님 정해 주신 예식으로 말미암아, 이 <함께 하심>의 구체적 현실적 증거·증명이라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대하여 놀라움과 찬미와 찬탄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3운법칙 관련 최근 발견과 같습니다.

3운법칙은 50여년 전에 그 존재를 알아 왔으나 금년에 들어서야 그 생명(핵심)이 되는 사실 즉 인간 생애를 철통처럼 옭아 매어 두실 수밖에 없는 수단으로서의 3운법칙을 언제부터 왜 무엇 때문에 정하셨는지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시어 하나님이 친히 나타내신 손길이심을 증거·증명하심과 똑같은 놀라움인 것입니다.

그 <언제>는 아벨이 가인에게 살해 당한 후 라멕(창 4:23)이 자기의 죽음을 방어하기 위해 부득불 한 소년을 살해한 뒤부터였고, <왜>는 그와 같이 천년 가까웠던 당시 수명도 지켜내지 못하고 불시에 죽어 나가는 무질서를 막고자 하신 조처이셨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동물적 육체를 처음부터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 범죄로 초래된 죽음과 인간고/人間苦임이 만천하에 입증되었고, "영적 죽음"이란 바벨론 신학의 거짓됨이 오늘날 여지없이 까발려진 것입니다.

2025년 11월 16일 일요일

우주의 나이 (2)

우리가 아는 낮과 밤의 개념은 창세기 "6일" 창조에서의 "낮과 밤"과는 전연 별개입니다. <창조에서의 날짜>로 제4일째가 되는 날 현재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일자가 정해지는 지구의 자전·공전이 정상으로 가동되었다는 것(창 1:14)이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의 이런 밤과 낮이 정해진 것도(그 때까지의 "밤과 낮"은 <창조에서 세어 가는 날짜> 기준) 태양과 달이 비로소 그 때 빛을 발했다는 의미로서, 해와 달이라는 말 대신에 "두 큰 광명"이라고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별들을 만드셨다"(:16)도 우리말 성경 번역자의 오해에서 나온 것으로, 영역에는 "만드셨다"는 말이 없고 그냥 "별들"이라고만 적고 있는 바, 이는 "두 광명"이라는 말과 직결되어 "별빛도 그 때 비쳐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는 지구의 자전·공전이 없었다는 의미. 그 전의 세계는 파멸 상태였으니까.

<창조의 날 수>에서의 "하루"가 우리가 아는 태양력으로 도대체 몇 년을 의미함인지 우리가 현재로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1만년인지 아니면 1억년 단위인지 또는 다른 무엇인지. 그 3일 째가 되는 날 마지막에 식물이 생성되었는데 아직 태양광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시기였으니까 태양광이 아닌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생겨난 그 빛이,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가능케 했다는 것만 압니다.

염두에 둘 것은, 이 시점은 "6일" 창조 이전 이미 스랍과 그룹 창조의 세계가 "물로써 망한"(벧후 3:6) 직후였다는 것. 이런 사실들에 우리가 굳이 매달릴 이유는 없습니다. 신령한 몸이 아닌 지금으로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창조의 내력>이라는 사실로만 충분히 만족하니까. 

2025년 11월 15일 토요일

우주의 나이


우주의 나이가 가장 최근의 계산으로 약137.98±0.37억 년이라 하니 노자/老子의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 이생삼/二生三 그리고 그 후속편 즉 삼생만물/三生萬物에 겨우 해당되는 때입니다. 다시 설명하지만 도/道는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일/一은 무엇이냐, 창조를 시작하시면서부터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이렇게 <창조 전의 하나님>과 <창조 후의 하나님>으로 분리해서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풀이한 것은 노자가 처음입니다.


"一生二"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낳으심으로써 비로소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그 순서를 가리킴입니다. 즉 그렇게 모자간/母子間이 되심으로써 비로소 짝을 형성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짝을 이루시되 그냥 둘로 계시지 않고, 원래 하나로서 홀로 계셨으니까 그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시려는 복고/復古, 오늘날의 동물로 빗대어 쉽게 생각하자면 귀소/歸巢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여기가 3위1체의 시발점/始發點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실체이신 성부 하나님의 형체, 형상이시니까 성자께서 창조를 시작하시니(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하신 것으로 표현되심) 바로 137억 년 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전제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137억 년 전부터 만드시기 시작한 것이 이 광대한 우주이고 그 후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스랍과 그룹들 창조에 착수하셨으며, 또한 마치셨습니다. 당시 "6일" 창조의 예와 동일하게 자연계와 영계를 대칭적으로 함께 만드셨는데, 영계 생물 중 그룹 하나가 악심을 품고 방자해지므로 그 후유증으로 당시 세계는 파괴되는데, 물론 자연계만 그러했고 영계는 그대로 남았으니 우리에게 친숙한 대로의 "에덴'입니다.

그렇게 파멸에 이른 역력한 흔적이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대로의 기록입니다.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水面에 운행하셨다"(창 1:2)입니다. 물 위에 움직이셨다 함은 "6일" 창조의 서막을 의미합니다. 물로 망한 세상 대신 불로 망할 세상을 다시 만드심입니다. 영적 존재는 자유의지를 따라 활동하므로 선악간에 판별 짓는 시험 기간이 필수이고 따라서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6일" 창조 이전에 이미 물은 존재했고 땅은 그 물 속에 풀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까 그대로 되어 육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하늘과 땅)는 우리가 <현재 아는 대로의 천지>를 말합니다.

137억년 전부터 우주가 생겨났다면 우리가 아는 우주는 자연물질계인 고로 그러면 그 때 불가시적인 영계도 만드셨느냐 묻는다면, 영계와 자연계의 대칭성은 생물이 존재할 때에 한해서만 언급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제외됩니다. 당시의 영계 관련해서는 성령(3위1체)으로 계시는 하나님 이상으로는 그 무엇도 상정/想定할 수 없는 그리고 필요치도 않은 때였으니까.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벧후 3:5)을 설명하면, 하나님 말씀 한 마디에 얼렁뚝딱 무슨 부자방망이처럼 그 무엇이 갑자기 생겨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 말씀 성취를 목표하여 한 방향으로 작동된다는 뜻입니다. 금방 되느냐 아니면 오래 걸리느냐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주 창설에 무슨 137억년이나 소요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과심사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현시점에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2025년 11월 14일 금요일

오늘날 220만 가나안 성도들을 주님이 성찬예식을 통해 책망하시다

"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이니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11:27-30).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1:31,32).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11:26). 

성찬식을 거행함으로써 주님을 기념하고 그 죽으심을 다시 세상에 오시는 날까지 세상에 알려 전달하는 임무에 충성하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이 거룩하신 명령을 어기고 무슨 구원 받은 자의 행동이 나온단 말인가요.

교회를 당장 시작하세요. 하나님께서는 21세기 교회의 본을 북한교회를 통해 오늘날 보여 주고 계십니다. 북한교회의 본을 따르면 됩니다. 북한교회처럼 척박한 환경도 아닌데 왜 가만히 앉아만 있는가요. 그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는 것입니다. 유투브 "북한 할아버지"를 얼마든지 참고할 수 있습니다. 79세 목자/牧者의 69명 교회 이야기입니다. 이 북한교회는 온 세계 교회 활동의 모본이 지금 
되어 있습니다.

https://youtu.be/Pqyn6_Livsk?si=0LB5BssCdHjfNhXJ

2024년 기준 개신교인 1/3(약 31%)이 "가나안" 성도(교회 출석 않는 신자). 약 226만 명으로 추정(2023년 1월 조사). 이는 2012년 10.5%에서 2017년 29.3%를 거치는 지속적 증가 추세. 특히 19세~29세 청년층의 가나안 성도 비율이 45 %(AI).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라 천국 삶을 위해 <일하는> 직업장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크다"(마 11:11).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해 두신 나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ㅡ창 1:26)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험한 꼴로 되어버린 것임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이 꼴사나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사랑은 곧장 멸망으로 통하는 것이니까.

멸망하는 이유는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킴이 되니(요일 2:15)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극도로 가증스러운 것이 이 동물적 육체이기에. 왜냐면 이런 동물적 육체로 인간을 만드신 적이 없으니까. 아담의 범죄로 애당초의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을 빼앗겨 잃어버림으로 된 결말이라 하나님 보시기에  그지없이 흉한 몰골이라 그런 것입니다.

마치 정성들여 만들어놓은 창작 예술품을 무참히 망가뜨려 놓은 바로 그런 현재의 참상이라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한 것이니 이에 각별히 신경 쓸 일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베풀어지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도적 배신 행위가 되는 무서운 결말을 낳는 까닭입니다.

더군다나 아담의 이 끔찍한 범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파충류 뱀(자연 물질계)의 영계 영물로서의 일개 피조물인 용의 거짓말을 더 믿고 따른 결과가 되어 이 용을 마치 하나님처럼 추종한 의미란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dragon) 마귀의 거짓말에 무릎 꿇어 엎드린 꼴이 되어 새상 통치권을 통째로 사탄에게 넘겨 준 결말로서의 아담 처사이므로 그렇습니다. 이같이 범죄자 사탄의 나라가 되어버린 현재의 이 세상이다보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추호라도 일어나서는 안될 일입니다. 섶(불에 잘 타는 섶나무)울 지고 불로 뛰어드는 재앙을 자초함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모든 것과 천국(애당초 인간의 몸을 신령한 속성이 되게 하시어 영원 불멸의 영광의 몸으로 입히신)의 차이를 극명하게 주님은 밝혀 주신 것이 "여자가 낳은 자 중 최고로 큰 이가 세례 요한이지만(왜냐면 메시야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난 선구자이기에)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미치지 못한다"고 명백히 차별을 두신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격차입니다. 현재의 이 동물적 육체가 영광의 신령한 몸에 비해 그러한 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립시다. 거듭 강조하지만 세상 사랑은 "매일 분노하시는"(시 7:11)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켜 드리는 소행 외 아무 것도 아님을 명심하여 우리의 의식을 지켜 나갑시다.

오직 하나님을 섬겨 위하는 삶으로 일관하여 충성합시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위하고 세상의 영적 각성을 위한 제사장적 기도 및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아리어 전달하는 일 그리고 선한 직업을 가져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의 일("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
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ㅡ엡 4:28)에 힘쓸 일입니다. 세상 낙에 대해서는 마치 금식하는 것과 같은  자세를 취함이 하나님 앞에 마땅한 일입니다.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라 천국 삶을 위해 <일하는> 곳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구원 확신"에서 탈출해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다"(살전 5:9,10).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은 다시 말해 그릇되게 믿는 것은(믿음이 그릇되다는 것은 말로는 믿는다 하나 실제는 믿지 않고 "믿는 것"처럼 자신을 속인다는 뜻) 우리의 "구원" 관련입니다. "구원"이라면 죽느냐 사느냐의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입니다. 이보더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렇게 크나큰 문제임에도 이를 그르치다니! 놀라 눈을 번쩍 뜰 일입니다.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가 하고.

구원은 <죽음>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문제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삶의 원리와 법칙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범죄했기 때문에 죽음이 와 생명을 잃어버려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으니까! 성경에 죄는 "불법"(요일 3:4) 곧 범법 즉 생명의 법칙대로 아니한 결과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이 무엇인가요? 간단히 말하면 "사랑"입니다. 풀어서 말할 것이면 3위1체 법칙에서 "하나"(요 10:30)됨입니다. 만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을 따라 "짝(제1위)"으로서의 둘로써 "하나(제3위)"됨에 있습니다. 이 3위가 필연이요 그리고 조화/調和입니다. "짝"이라 함은 상반/相反 즉 성질이 정반대임을 뜻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파생한(파생시킨) 자와 파생된(파생 당한) 자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자/母子 관계 다시 말해 인과/因果입니다. 이것이 질서요 법(칙)입니다. 만유(무릇 존재하는 것)는 이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습니다. 이 "하나됨"이 상보성 원리에서의 상보/補이니 CONTRARIA SUNT COMPLEME NTA.

"상보" 곧 "하나"됨에서는 그 <하나>됨의 여건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성경에 남녀(아내/남편) "한 몸"됨을 설명하여 "남자의 몸은 여자가 주장하고(그 주인이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가 된다 즉 엇바꿈(서로 마주 바꿈)이라 한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닌 "한 영"(고전 6:17)에서도 똑같은 이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삶의 엇바꿈입니다. 갑과 을 둘일 때 갑의 삶은 을이 살아 주고(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것.

각자 자기 자신의 삶을 살면 자기만의 1뿐으로 그치지만 그래서 나 아닌 남의 것을 탐내고 빼앗고 훔치고 그래서 싸우고 죽이고 결국 공동 파멸로 끝나게 마련이지만, 자아중심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상대방중심에서는 나 아닌 남이 1억이라면 그 1억 모두가 나를 위하므로 1의 1억배로 내가 위해지니 탐내고 빼앗고 훔치고 싸우고 죽임으로써 결국 공동 파멸에 이르게 되는 대신 완전히 그 반대가 됩니다. 죽음이 아닌 그 반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생명(삶)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릇 존재하는 이마다가 나를 비롯해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니 성경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유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마 16:24)는 명령은 이 때문에 내리신 것입니다. 이상향적 삶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말함입니다. 머리와 몸의 기계적 삶도 이 이치입니다. 머리가 몸을 위하고 몸이 머리를 위함으로써만 하나로서의 삶이 영위되는 한 개체로서의 생명이 유지되니 생명의 법칙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피조물을 위하십니다. 창조의 첫 출발로 독생자를 낳으심으로 짝을 이루심이 그 시작입니다. 노자가 "一生萬物"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피조물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는 차원에서(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심 같이 내 이웃도 똑같이 위하시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기쁘시게 해 드림이 나의 삶이므로) 이웃을 위하니 어느 모로나 나 자신은 절대로 위해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당면한 고통도 이 이치를 따름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 죄인이 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 모습이니까 한 몸으로서 나 홀로 예외일 수 없는 것.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니"(고전 12:26).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사함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심도 순수히 이 하나, 한 몸의 원리로 하심입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마찬가지.

우리 구원이 <죽음>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것은 죽었으니까 그저 살아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지 못해 아담이 죽었으니 구원됨은 반드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엄연한 조건부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답게 사는 것은 "한 몸"처럼 "한 영"으로의 삶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주님과와 합하여 한 영으로"(고전 6:17) 살기 위함입니다. 이 삶은 구원 받은 즉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이같은 삶으로 열매가 이루어져 맺혀지지 않을 경우 그 구원은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엄중 경고인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를 일이다"(마 16:24) 하신 그대로입니다. 나의 구원받은 삶은 주님 위해 사는 상대방 중심의 "새 사람"(엡 2:15/4:24/골 3:10)의 "새 생명"(롬 6:4)이고 더 이상 자아중심의 죽음이 아니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다"의 뜻입니다.

때문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고후 13:5)라 한 것입니다. 고로 나의 현재 삶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요 4:34)라고 말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 받았다는 사실부터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엄정 엄숙한 현실 앞에 마주 서야 하는 것입니다.

2025년 11월 11일 화요일

스가랴서의 "두 감람나무"와 계시록의 "두 증인"이 가리키는 오늘날의 "3위1체"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움직이나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아니하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武器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원수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強力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깨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고후 10:3-5).


정신 무장, 이념 무장, 사상 무장인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관련한 철통 같은 지식과 그 말씀으로 완전 무장해 튼튼한 닻(anchor)을 드리움으로 인해 천하가 휩쓸려 풍비박산되어 난장판이 벌어지는 그 어떤 광풍/태풍에도 요동치지 않는 은혜의 확고부동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오늘날 3운법칙 등으로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 증명과 증거와 더불어 여러 은혜의 성경 지식입니다.

이것은 이제 처음 드러내심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시하신 바이나 사탄의 바벨론 신학 등 <거짓말>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감추어졌던 셈인데 이제는 최종적인 "하늘의 전쟁"(계 12:7-17)을 통하여 완연히 드러나진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아들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이라 성경이 설명한 대로, 원래 아담의 휘하로서 사탄 등 악령들은 하극상으로 배신 반역하였지만 나머지는 끝까지 충성하는 근왕군/勤王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물론 첫 사람 아담이 지금은 아담이 아닙니다.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끝난 것입니다. 창조주 친히 이 아담(범죄한)의 공석/空席을 메우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신 이상 무너졌던 모든 진용과 체제가 완전 복구된 마당인 터에 이제는 영광의 재림하심과 세상 통치만 앞두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분발만이 남았습니다. 기도와 전도에 전심전력을 다할 때입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줄 것이니 저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할 것이다.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 11:3,4). "두 선지자"(:10). "그 등대/燈臺 곁에 두 감람나무"(스가랴 4:1-14). "금 기름을 흘려 내는 두 금관 옆의 감람나무 두 가지"(:12).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14).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고 스가랴 선지자가 물었을 때 천사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되는 것>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될 것이다!> 그가 머릿돌(성전 건축에서)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으라> 할 것이다 ...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殿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칠 것이다> 하셨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 것이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건축 현장에서 벽이나 기둥을 세울 때 똑바로 수직으로 쌓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4-10).



여기서 스룹바벨은 이 "마지막 때" 하나님의 성전("성령의 전"ㅡ고전 6:19) 재건/再建의 대대적 신앙 부흥 운동을 말함(상징)이라 확신합니다. 정확히 말해, 오늘날의 "바벨론 탈출"(계 18:4)의 역사적 순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잘 나오지 않는 즉 이 대목에서만 강조되고 있는 <둘>이라는 표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두 증인", "두 선지자", "기름 발라 주심을 입은 두사람"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유독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똑같은 의미로서의 둘만을 강조하니까 이는 "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때" 출현이니까 오늘날 21세게 "표적과 기사"인 "3위1체" 관련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이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실로 기묘한 어구가 나타나는데 이 "마지막 때" 예언인 다니엘서 7:25, 12:7 그리고 같은 내용의 예언서 요한 계시록 12:14에 역시 인용되어 있는 바로서, 이는 다름아닌 문자화/文字한 "3위1체" 도식/圖式인 것입니다. 바로 아래와 같습니다.



3운법칙의 구조식도 이 도식을 그대로 닮은 것 즉 복사판인 것입니다.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림에서는 이런 그림보다 더 나은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를 위해 이런 놀라운 것을 예언으로써 미리 마련해 두셨다는 것 자체가 21세기 "표적과 기사/奇事"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요 4:48) 하셨고, "두 사도가...주님을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님께서 저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시어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행전 14:3)고 했으며, 바울 사도가 "나의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행 12:12)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은 스가랴서에 이미 예언된 대로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 11:4)임을 명백히 한 이상 특정 개인을 지칭한 것이 아닙니다. 고로 오늘날 우리는 이 "3위1체"와 직결되는 알체의 사실을 확신을 갖고 중단 없는 기도 중에(살전 5:17ㅡ"쉬지 말고 기도하라") 널리 알려 이 마지막 때의 성령 역사/役事에 총력을 기울일 일입니다. 

성찬 예식 고찰 (1)

"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이니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