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이사야 9:2)ㅡ메시야 송가
https://youtube.com/playlist?list=RD3V_ZZ6ENu-E&playnext=1&si=REM-j1FDmEIqvpQK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소유/所有)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즉 "바벨론을 벗어나라" 하심은 <바벨론 교회>의 모든 거짓말을 떨쳐버리고 그 거짓말을 믿음으로써 천연덕스럽게 멸망의 죄를 짓고도 영생 구원이라 믿는 미신(주님 경고하신 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신 대로의 모든 인위적 교리ㅡ마 15:8,9)에서 화급히 탈출해 나오라 하심입니다.  
사탄의 이 세상 통치는, 에덴에서 아담을 죽였던 그 동일한 거짓말을 퍼뜨림을 주무기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온갖 핍박의 환란을 일으킴은 일시적 위협으로 냉탕 온탕울 번갈아 쓰는 악마의 수법입니다. 박해는 외려 견딜만 하다 해도, 거짓말에 걸려 넘어지게 하면 그것은 필살/必殺로 끝나기에 더욱 여기에 마귀 사탄은 집중합니다. 세상 시작되자마자 지금까지 그러했고 특별히 주님 오신 후의 이 2천년 기간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미 누차 설명하여 강조했재만 "믿음"과 "행함"의 주제에서 마귀는 그 맹렬한 독아/毒牙를 번뜩이고 있습니다. "구원 빋았음을 확신한다"는 표방 아래 자행되는 이 사탄의 교리에 극소수의 택하심 받은 자 외에는 거의 전부 휩쓸려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원 운명의 생사/生死가 지금 이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따르느냐 아니면 "넓은 대로와 큰 문"의 사탄의 인기 높은 거짓말을 아담 부부처럼 더 순종해서 끌려가느냐 그 분깃점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행하라 명령하심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행할 수 없음을 스스로 절감하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자들은 일률적으로 일관되게 속여 온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는 대목을 사탄은 악용하는 것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지만 왜 <율법 아래> 있을 때(메시야 주님 오시기 전)와 <은혜의 믿음 아래> 있을 때(주님 오신 후)를 혼동하고 구별을 못하는 것인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지금 이 대목은 후자가 아닌 전자 관련인 것을 왜 모르나요.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믿음으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 받음>은 새 창조를 말함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창조하실 리 없잖아요? 다 의인이고 다 거룩한 자들인 것입니다. 인간이든 영물(천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태로 우리도 복귀하니까 즉 새로 창조하심이기 때문에,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의롭고 거룩한 자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무엇이 요구되겠나요?
당연히 우리로서는 순종이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향후의 삶에서 필수이기에 그렇습니다. 몸이 머리의 지시에 불복하고 제멋대로 놀아나는 꼴을 감히 상상할 수 있나요? 기계적 작용인 동물과 달리 사람이나 천사는 영적 존재이기에 자유의지로 스스로 알아서 그렇게 한다는 그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치하신 양심이나 지성적 판단에 의해 충분히 관련된 선악(좋고 나쁨을 구별해 인식하는)의 지식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지로 생명의 법칙에 불복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며, 반면 동물들은 기계적인지라 불복종하는 일도 없거니와 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담도, 사탄 등 악령들도, 이 자기 판단 따라 스스로 행동하여 죄를 지은 것이며 그 당연한 보응을 받은 실례인 것. 
그러므로 인간의 새 창조는, 아담 이후 모든 후대가 다 영생이 불가능한 동물적 육체가 되었은즉, 영생하는 자로 먼저 창조됨이 최우선이고, 그래서 은혜로 그렇게 창조됨을 가리켜 "구원"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구원되었다"고 무조건 영생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창조나 아담 때의 창조나 창조는 같은 것이니까, 검증하는 절차로서의 <시험>이 불가결인 것입니다.
그러면 새 창조로서 영생하는 자로 복귀되었으면 왜 지금 첫사람 아담처럼 신령한 영광의 몸이 아니냐 하겠는데, 아담도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출발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즉 아담도 동물성 육체로서 하나님 형상과 모양으로 처음 창조된후 다음 단계로 영원성의 영혼이 조성된 것이며, 그 결과로 신령한 몸이 될 필요성 내지 필연성에서 에덴에다 아담 위해 한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 아담을 두심으로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모심은, 아담에게 영(혼)이 처음 조성되었음(창 2:7)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 난다" (요 3:3,5,6) 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그 몸으로 이루시고 나와 하나되심을 위하여 예수님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을 가리킵니다. <몸>은 사람이시나 <영>은 하나님이시므로 또 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로 계시는 까닭에 넉넉히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각 사람이 성령으로 나는 것은 아담이 처음 영이 조성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복하는 의미와 같기에 "새 창조"라 하는 것이며(각 사람마다 마치 아담 창조를 되풀이함과 같아), 이제는 육체로 나는 것(이미 첫사람 아담으로 인해 동물적 육체는 받아 있으므로)이 아닌 "성령으로 다시 나는"(3:3,5,6) 것입니다. 
이는 맨처음 아담이 동물적 육체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애초 창조되어 있었던 모습 그대로이고, 이후 아담 속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 내쉬심으로 아담에게 영(혼)이 생겨나고 이로써 에덴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순서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같이 성경의 기록 하나하나가 빈 틈 없이 짜여진 진실 그대로임이 입증되고 있음은 놀라운 일입니다.
때문에 주님 부활 후 제자들을 "향하시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20:21) 하셨으니, 이는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 그대로를 재연/再燃해 보이신 것으로서, 부득불 새 창조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하심을 극적으로 증명해 보이심이라, 이 역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니 때때로 음미하여 우리 믿음을 새롭게 활성화할 일입니다. 
재삼/再三 강조하지만, 이는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에서 단연 압권입니다. 창세기 아담 창조의 광경에서의 극적인 순간을 창조주 친히 그것도 부활이라는 극적인 순간에 극적으로 친히 묘사해 나타내어 주셨으니까! 그것도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으신 채! 성경이 꾸며낸 것이라면, 천하의 거짓말쟁이 사탄이라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일입니다. 진실이 뚝뚝 묻어나는 성경의 명장면의 이 최고봉을 우리는 수시로 기억하고 수시로 입 밖에 내어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기리고 찬양할 일입니다.
반복하거니와, 아담의 그 영의 조성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의 성령 받아 모심입니다. 또 아담의 육체에 영이라는 새 존재가 들어찼어도 금방 신령한 몸이 되지 않고 별도로 에덴에다 한 동산을 창설하셨던 것과 똑같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 재림 때 우리도 신령한 몸으로 즉각 변형됩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후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일을 온전히 이루신 것처럼, 우리 각자도 새 창조를 받아 구원된 즉시 "보내심을 받은"(20:21) 터이므로, 주님처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4:34)고 말할 수 있는 꼭 그 위치에 지금 있다는 이 엄숙한 사실 앞에 마음을 가다듬읍시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주님을 위하는, 주님의 사랑의 종으로 섬기는 것으로서, 머리되신 주님 친히 머리로서 우리를 위하시고 종으로 선기심과 영원히 맞물리는 생명의 법칙 준수인 것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는 것이다"(눅 22:27). 
그러므로 진정한 사람 삶은 머리되시는 우리 주님을 위시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종으로 섬기고 동시에 똑같이 섬김을 받는 가장 이상향적 삶의 향유임을 알았으니, 항상 주님의 평안과 기쁨을 내것으로 삼고 그 생명수가 흘러 넘치는 넘쳐 흐르는 강들("rivers")이 되게 합시다. 그 환희와 희열의 풍성함을 이 지구상의 현재 죽음의 때일망정 만판으로 누리고 주변을 흥건히 적시는 우리 각자의 심령이 되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