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3일 화요일

자아중심 아닌 상대방중심은 관점/인식 차이 및 의지 유무로 좌우될 뿐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과 바벨론 신학(사탄의 거짓말)의 차이는 <초대교회 4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공용/共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ㅡ행 4.32)에서 당장 드러납니다. "영광의 몸"(빌 3.17)/ "신령한 몸"(고후 15.44)이 아닌 동물성 육체의 특징은 <자아중심>의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 내지 집착>("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ㅡ눅 14.33)에서 완연히 드러나집니다.


그러나 구원 받음의 증거는 <상대방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이므로("우리 중에 누구든 자기 위해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ㅡ롬 14.7-9), 초대교회는 당연히 그 증거로서 <행 432>가 두드러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칭 "교회"로서, 우리가 아는 한 이 소중한 초대교회 전통을 따르는 데라고는 단 한 군데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무엇이냐, 초대교회와 오늘날 교회가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니 이는 전자는 "자기 부인"의 하나님 중심이요 후자는 자아중심이라는 그런 극명한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위 "교회"는, "자기 소유"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구원 받았다는 증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그 뜻인가요? 그러합니다.  <달리 설명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 432>는 눈 씻고 찾아 볼려야 볼 수 없고 구경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이 현상에 대한 유일한 풀이가 있다면,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에 사로잡혀 "구원 받았다" 하지만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다"고 하나 믿는 것이 전연 아니었다는 것.

"저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ㅡ롬 2.6-9)을 버리는 자"(디도서 1.16)라는 판단 기준에서 벗어날 재주가 없습니다. <행 432>라는 초대교회적 "행위"는 구경도 할 수 없으니,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을 못합니다.

자아중심이 죄의 정체요 뿌리입니다. 성경에서 정확히 집어 말하는 "욕심"("<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ㅡ약 1.15)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관된 상대방 중심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본능적> 삶이 아닌 <이지적> 삶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능적이고 기계적 삶은 짐승에게만 해당됩니다.

"해당된다"라는 말은 애초 하나님의 창조 결과로서 처음부터 그렇게 작동되도록 정해져 있는 정상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기계 작용은 생존을 위한 최적 작동으로 그 이상의 욕구는 없으니까 그래서 그 자체가 선/善(좋은 것)("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ㅡ창 1.31)인 것입니다. 짐승의 욕구는 단지 생존을 위한 기계 작용이므로 하나님 창조 의도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좋은(선한) 것입니다.

허나 인간 등 영적 존재는 그 지향하는 바가 이 기본 욕구에만 머물지 않고 무한정입니다. 용(뱀)이 아담을 <시기하여> <미워하고> 종내에는 <살인>("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ㅡ요 8.44)까지 하게 되어 범죄자가 된 것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무릇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피조물일일진대 모름지기 상대방 중심으로 행해야 한다는 <삶과 생명의 법칙>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은 그 기본 바탕이 언약/言約, 약속에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인 것입니다. "내가 너를 창조한 것은 내가 전적으로 너를 위할 수 있고 나를 위함이 아니니까, 고로 너는 네 자신을 위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내가 너를 전폭적으로 위해 주므로) 오직 나만을 위함으로써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 내 명령/계명("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있는, 머무는, 사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ㅡ요 15.10)을 따라 네 이웃들을 위하는 언행심사 일체로 임하는 상대방 중심으로만 나가고 자아중심은 일절. 배척하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중심"과 '자아중심'을 분명히 가려서 행동하는 것이 어른과 아이, 짐승과 사람,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과의 <하늘 땅의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마귀의 거짓말로서 인생들을 속여 멸망시킴이 목적이므로 이런 엄숙한 이치를 감추기에 급급하여 <자아중심> 일변도의 "하나님 시인(믿음)", "구원 받음" 심지어는 "하나님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황당무계까지 지어내어 퍼뜨린 것이 오늘날까지의 역사입니다.

애초 인간 창조의 기본이셨던 신령한 몸의 특색은 자유·평등입니다. 기계적 작용인 짐승들의 동물성 육체처럼 죽음에 얽매이지 않고 굶주림, 헐벗음 등등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자유를 똑같이 누리니까 평등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동물성 육체라는 일대 참사/慘事, 대형 사고를 만나 "죽은 자"(마 8.22)가 되어 있는 아수라장 속에서의 고통 고난의 아우성 가운데에서나마 삶의 흉내라도 내겠다면 모름지기 이 평등, "평균"(고후 8.13,14)케 하려는 노력, 본보기만큼은 교회가 나타내어야 마땅하고 이는 상식에 속합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행 432>에 힘썼고 충실했던 것입니다.

비록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21세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천사의 복음" 시대 삶/생활 양식/樣式("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ㅡ마 19.21)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여 힘써야 마땅한 줄로 압니다. 우리 주님 분부하신 대로이니 지체 없이 앞 다투어 행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믿음", "구원 받음''이 이 순간에라도 말짱 물거품으로 끝남을 부디 명심해야.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미신/迷信 아니, "바벨론"의 올무, 함정, 덫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소위 "잘 믿음"은 "십일조" 충실히 내는 따위의 '무의미"를 가리킴입니다. 10분의 1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나의 1백%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나의 구원 받음입니다. 주님 친히 자기의 전부 즉 100%를 내게 주심으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니까.

바로 이것이 "한 영"(고전 6.17)됨 즉 "하나"(요 10.30)됨으로서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이 "하나"됨의 구조는 "한 몸"(창 2.24)됨과 같으니, 즉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 남편 것은 아내의 소유됨과 같아,  "한 영"에서는 삶/생활 자체가 그렇게ㅈ 되는 것 곧 <상대방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 중심이 "거룩함"(성결)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했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14) 했으니, 하나님을 아무리 시인한다 해도 자아중심이면 "행위로는 부인함"(디도서 1.16)이니까 모든 것이 도로무공/徒勞無功(십일조 열심히 내고 교회 집회 열심히 나가도 헛되이 애만 쓰고 아무런 보람이 없음)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든 사람 사랑이든 말로만 끝나면 위선/僞善(겉치레)이요 자기 기만이지만 행위("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 누구든 그에게 '평안히 가라, 따뜻이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ㅡ약 2.15-17/요일 3.18)가 따름으로써 그 진정성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그윽한 데서 생명수 샘물 강물되어 흐르네(중복게재ㅡ앞당겨 놓음)

 


                                                                       이안삼(1943-2020)

   

"내 마음 그 깊은 곳에"...이안삼의 최대 히트곡에 접목시킨
"내 마음 그윽한 데서"

이안삼은 "독실한 기독교인"⁸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성가곡 '선하신 목자'를 작곡하며 음악계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얻기 시작했고 이 곡은 그의 전체적인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평가받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자비량 선교 활동에 동의하며 해외 활동에도 참여한 기록이 있다. 그를 추억하는 음악계 인사들은 그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억하며, 그의 음악적 영감이 신앙과 깊이 닿아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내 마음 그윽한 데서"

1.
내 마음 그윽한 데(에)서 내 마음 그 깊은 데(에)서
생명 샘(계 7:17)물 강물(요 7:38)되어 흘러 흘러 넘치네
주님 안 '늘 평안'(요 14:27)되어 
주님의 '늘 기쁨'(15:11/17:13)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넘치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내 영혼 그윽한 데서 내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  "그윽하다"→ 깊숙하고 고요하다. 잔잔하고 은근하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찬송가 412장에서. 


"나의 영혼이 주님을 가까이 따르니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 63: 8).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시 73: 23). 주님의 오른 손이 나의 오른 손을 붙잡으시면 자연스럽게 주님의 왼손이 나를 감싸 안으심이 됩니다. 나는 항상 내 옆에, 앞에 계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오른손은 항상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니, 주님 친히 내게 그와 같은 힘이 되어 주심입니다.


"하나님, 저를 위하시는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우리말 번역 단순히 "제가 주님의 생각을 보배롭게 여긴다"와는 달리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저를 위하시는 주님의 생각이 보배스러우시다"의 뜻).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으신지요. 제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습니다"(시 139:17,18).


"내 마음 그 깊은 곳에"란 가곡은 그 음조가 강의 흐름을 연상시킨다고 느껴집니다. "강물"이라면 우리에게는 성령과 관련된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 유명합니다(요 7:38). 영역으로는 "rivers"로 되어 있으니 그 풍성함을 직감하게 됩니다. 성경에 "주님께 노래한다"는 또 다른 풍성한,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잊기 쉬운 의미가 있습니다. 365일 24시간 내 앞에 성령으로서 서 계시는, 인생 중에서도 당연히 가장 아름다우신 모습의 주님(행 2:25). "성령" 이라는 말은, 또 아버지 하나님 친히 그렇게 계셔 주시는 형상이시기도 하다는 뜻. 3위1체 법칙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게 된 놀라운 실상입니다. 즐거운 노래가 없을 수 없지요.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다"(:26)가 그것입니다.

강물은 흐느적 흐느적 흐느끼며 흘러가는 것이라기보담은 흥에 겨워 신나게 몸을 구을며 즐겁게 노래하면서 활기 차게 흘러가는 것이 제격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마음 속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가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곡조가 아주 시원스럽게 강의 유동/流動을 묘사하고 있어 그냥 두자니 아깝기에ㅡ. 특정 성경 구절들을 마음에 새기는 것에 치증하는 쪽으로 다듬었습니다. 모든 찬송 찬미가도 가급적 그런 특색을 지님이 마땅하다 봅니다.


(아래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악보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노래는 박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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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0일 토요일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의식 없이 단지 영생만 욕심 내는 자에게 구원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 시점 화급한 자아진단 (2)


"점진적인 창조" 또는 "진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는 한 번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창조는 항구적입니다. 영원히 존속 못할 것이면 아예 처음부터 창조하시려는 마음부터 품지 않으셨을 것이니까. 단 한 번만의 창조이고 영속적이어야 할진대 인간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 즉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셨다는 결론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런데 인간 창조가, 처음부터의 첫 창조가 아니고 여러 생물(먼저 식물 그리고 다음이 동물)을 창조하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최종 작품이셨기에, 즉 동물의 여러 육체를 만들어 가셨던 연장선상에서의 인간의 동물적 육체이었기에, 침펜지 등 유인원 창조에 연이은 순서의 인간 창조이셨던 것.

여기에 영적 요소를 첨가시키신 것이 우리 영혼의 조성이셨고("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ㅡ창 2.7) 그러신 다음 처음 창조하셨던 영계(초자연계 즉 물질 세계와 대칭)로 인간을 옮기시어 거기서 영적 속성을 갖추게 하셨으니 거기서 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쳤던 것이기에 이런 2중성을 상징하는 생명과 나무(아담의 신령한 속성을 대표하는)와 선악과 나무(애초의 자연 물질계 속성 대표)를 아담이 거처하는 그 에덴의 "동산"에다 지어 놓으시고 후자에의 접근을 엄금하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현재의 신령한 몸>이 즉각 취소되고 <이전의 동물성 육체>로 환원되어버릴 위험이 있었기에.

그러나 아담이 이 경고를 무시, 선악과에 손대어 ,아닌게 아니라 동물성 육체로 회귀되어버리자 방법은 단 하나. 아담과 대칭이 되는 또다른 아담을 설정하시어 그로 말미암아 인생들이 원래의 인간 창조의 모습(신령한 몸으로 영생하는 존재)대로 회복하게 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죽은 자"로서의 동물성 육체를 이런 까닭으로 <물려받아,서> 태어나는 운명의 인간을, 이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의 영(혼) 즉 성령("마지막 아담"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을 <물려받아> 다시 나게(거듭 나게) 하는 방법으로써, 망가져버린 <옛> 인간 창조를 이러한 <새> 창조로 뒤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우리가 현재 사람(인자/人子)인 것과 같은 이치로 "마지막 아담"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신자/子)됨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함이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함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킴입니다. 즉 "하나님의 씨"라 고 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하나"(요 10.30)되어 계심을 말하는 고로,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만 아니라 동시에 성부 하나님 친히 또한 내 속에 임하심이므로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 곧 "양자/子"(롬 8.15,23/9:4)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남녀 불문)됨이요("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 우리가 지금은("<지금>"이라고 고쳐야) 하나님의 자녀라...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영광의 몸, 신령한 몸의 모습) 같을 줄 아는 것...

"그 안에 거처하는(있는, 사는, 행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함이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한 것이다...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남이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ㅡ요일 3.1-10), 따라서 양자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음이 판명될 때는 파양/罷養이 되는 위치임은 당연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실로 서릿발 같은 경고인 것입니다("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goodness)>와 <엄위/嚴威(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다"(롬 11.20-22).

죄짓지 말라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죄를 지으면 즉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마귀에게 속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까! 이제까지의 바벨론 신학에 의한 소위 "구원"은 주님과 "함께", "하나"됨을 말하지를 않고 난데없는 "대신 죽음"만 반복하여 "주님 죽으신 덕분에 나는 그 대신 산다"는 식의 거짓말만 반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따로, 나 따로"이므로, <성경과 반대>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음"(행 2.38)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 친히 내 속에 내 영혼처럼 오시어 영원히 나와 "연합하심으로써"(롬 6.3-5/고전 6.17) 단수의 홑사람(나 하나, 혼자)이 아닌 복수의 겹사람(주님과 함께 "하나"로서의 둘)으로 영원히 내가 존재함입니다.

단 "영으로서의 하나님"(요 4.24)께서 사람되시어 영원히 육체를 입으심인지라 이는 어떤 의미냐 하면, <육체이신 사람>으로서 <내 육체 안에> (마치 영혼처럼) 내 안에 계심입니다. 육체인 사람이 내 육체 안에 있을 수 없지만 오직 한 분 내 주님만 홀로 가능하십니다. 창세/創世 이래 이 유일무이의 색다른 현상이 바로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됨으로써 내 "<죄의 몸>은 멸해져"(롬 6.6) 완전 결딴나버려 망가지는 것이, 성령으로 주님 친히 내 안에 임하여 오시는 순간 엄연한 역사적 사실(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심은 <주님과 "하나", "한 영" 됨>으로서의 내 부활이 되어 영원히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친히 입증해 보이신 대로 나만 위하시는, 이같은 '삶과 생명의 영원한 법칙'으로 영원히 고착화되니,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으로 완전히 바꿔짐이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갈 5.25) 것이요 "성령으로 행함"(:25)입니다. 이 효과가 어떤 것이냐 하면, 복제/複製된 "나"라는 인간이 이 만우주에 가득 차 있는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나와 하나되신 주님이 그렇게 만유로서 맘유 안에 계시니까! "풍성한 생명"(요 10.10)이 이런 것입니다. 그득하고, 너넉하고, 푸짐하고, 든든하고, 느긋하고...무엇이라 가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쩨쩨하게 궁색하개 변변찮게 이 세상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만우주의 상속자다운 행동거지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각자로서 <겸손히> 세상에 <군림>합시다.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으며...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쫓겨 다니며, 떠돌며, 헤매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巖穴(바위)과 토굴/土窟(흙을 파낸 큰 구덩이)에 몸을 숨기는 환란을 당했으나"(히 11.35-38) 건들건들 유유자적함으로 다 소화해낸 것은,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행 9.31) 나간 때문입니다.

하나님 친히 나의 구원 자체가 되심이니 이는 바로 사람되심 즉 "마지막 아담"이 되심인데 그렇게 "마지막 아담" 되심 그대로, 사람의 육체가 되어 계시는 그대로 내 안에 오심을 가리켜, "나의 구원 받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사람의 육체"라 하는 것은 현재의 이 몸과 같은 동물적 육체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직접 목격한 대로, 동물성 육체는 당장 눈이 멀어버리는, 정오의 해보다 더 강하게 발산되는 영광의 광채(행 26.13)의 신령한 몸이니까, 180도로 인식전환을 해야 합니다. 


2025년 12월 18일 목요일

이 시점 화급한 자아진단




성경 해석 그 중에서도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의 우리 위하신 죽으심에서 문제의 본질이 어디 있느냐 하면 "성령" 관련 몰이해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중대한 결함에 있습니다. 말을 바꾸면, "3위1체"에 대한 무지/無知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마 28:19)이신(또는, "~으로 계신") 줄은 알지만 그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지금까지는 몰랐기에, "한 분 하나님이시나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경우에는 성자 혹은 성령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말까지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서의 모자/母子(하나님은 성별이 없으시기에 대표적인 남성으로 통일시켜 "부자"라 해야 하지만 부드러운 어감/語感을 위해) 관계이시나, 두 분이 "하나"(요 10.30)로 계심이 "성령"이신 사실을 몰랐기에 빚어지는 혼돈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밝혀진 것이지만, 이 "하나"라 함은 3위1체의 "제3위"를 뜻합니다. 즉 성질로서의 상반/相反을 이룬 짝은 반드시 "하나"로서 상보/존재하고 활동함을 의미합니다. 여기가 만유 이치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와 성자의 "하나"되심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이시기에 성령을 "성부"시라 해도 맞고 "성자"로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요 14.9) 하셨고,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임하여 오심을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14.23)이라 하신 것이며, "하나"이시니까 복수가 아닌 3인칭단수로 표현되시어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함이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혜사/保惠師(Comforter)"시라고도 하셨는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26)이라 하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주님 자신을 가리키심이기도 하기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17)이라 하시어, 다름아닌 당시 제자들이 항상 뵙고 함께 거처하시던 주님 친히(우리 위한 죽으심 및 부활하심 후에) 그 제자들 각인에게 임하여 오실 것인 바 이 곧 성령이심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구원과 관련된 일체의 사실 즉 나 위하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구체화하고 현실화함이 단지 이론만으로써가 아닌 실제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내가 주님을 실제 내 안에 성령으로 모심으로써) 나와 "하나"(10.30)를 이루시어 "한 영"(고전 6.17)이 되심으로써만 비로소 달성됨에 있다는 이 핵심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고 그 부활하심이 나의 실제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됨으로써 나의 <구원 받음>이 성립되고, 동시에 상대성의 동시성(일방적인 것은 없어ㅡ은혜의 새 창조이기는 하지만 사랑 즉 "하나"됨에 의한 창조이니까 상호 작용)이므로,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언행심사 일체 그리고 내 몸과 영 및 나의 삶 자체가 주님께 바쳐져 주님의 소유가 됨입니다. 나를 "피로 사심"(행 20.28/
고전 7.23)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는 육체로 "한 몸"(창 2.24/마 19.5)이 됨에서 아내의 육체가 남편의 것, 남편의 육체가 아내의 소유가 되는 맞바꿈과 똑같은 것입니다(고전 7.4). 그래서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개역한글/개역개정의 잘못된 번역이니 "위하여"로 고쳐야)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대신하여(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한 것입니다.

내 삶 자체가 주님의 소유라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그러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그리고 엄중한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무릇 "나는 구원 받았노라" 하는 이라면 모름지기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 주님만을 위하는 일상생활이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전처럼 자아중심일 때는 예외없이 자기를 속임이요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된 알도 없거니와 성령 받아 모신 역사도 없다는 최종 결론입니다.

여기서 유일한 해결책은 즉각적 회개입니다. 이모저모 자기를 합리화하려 하지 말고 자아중심 즉 주님 위해 살지 않았음을 뉘우쳐 차후로는 어떤 경우에도 여하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 중심, 상대방 중심의 순종으로 나아가리라는 무조건적 결단입니다. 이것만이 이 순간 가장 안전한 방안입니다.     (계속)

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참고 선을 행함으로 영생


"참고 선을 행함"이 "영생"(롬 2.7)이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10)이다. 반복한다; "참고 선을 행함"="영생"(롬 2.7).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영광과 존귀와 평강". 여기에는(하나님 말씀으로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믿음"="영생",
"믿음으로 의롭게 됨"= "영광과 존귀와 평강" 등의 말은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이미 <전단계>이기에!
지금은 그 때를 훨씬 넘어 <최종 단계>다!
언제까지 제자리 걸음만 되풀이하려는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하나님의 영원하신 계명 곧 가장 이상향적 삶을 약속하여 지향하는 생명의 법칙 다시 말해 더 다시는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의 사랑으로 "하나"됨 즉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함>ㅡ요 10:30/고전 6:17/고전 7:4)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주님과 내가 명실공히 하나, 한 영됨으로써).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법칙)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6-18).

이런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실현 가능한) 이상적인 삶의 방법은 지금까지 그 어느 세상 철학도 종교도 가르쳐본 역사가 없으니 이유인즉 "3위1체"의 오묘한 이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 "머리"로서의 창조주 하나님 아래 모두가 그 "몸"의 "한 몸"("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니"ㅡ고전 12:26) 역할을 하게 되면 각자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 사람마다가 다 나를 위해 주는> 구조/체제인지라 모든 사람이 마치 나 자신처럼 되어 나를 위해 주므로 이보다 더 이상적 삶은 없는 것.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불가결성은 여기서도 훌륭히, 완벽히 입증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만인간울 품어 주는(3위1체의 생명의 법칙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이 없이는 이상향적 삶이 도무지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 이같은 이치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김으로써만 각자 자기 모든 이웃을 예외 없이 사랑하여 섬길 수 있기에. 바로 이런 이치를 바벨론 신학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거짓말로만 일관했기에. "구원"과 "사랑", "영생"은 말만 했을 뿐 이런 "하나"됨은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선을 행함"(롬 2:7)은 일절 배제했기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생명의 법칙을 사랑하여 나타내는ㅡ사랑의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입증하는)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ㅡ이렇게 명령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임이 명백하고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 못을 박으셨는데 대관절 무슨 재주로 천국에 가려는가? 



자아중심 아닌 상대방중심은 관점/인식 차이 및 의지 유무로 좌우될 뿐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과 바벨론 신학(사탄의 거짓말)의 차이는 <초대교회 432>( "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 通用 (공용/ 共用 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