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7일 수요일

우리 구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삶/생명의 법칙 준수)에 그 핵심이 있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3 -35). "다 마음을 같이하여 인자스러우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는 그 기준이, 이내 곧 사라져 없어지게 될 일시적이고 임시에 불과한 동물적 육체인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정상 세계인 장차 오는 세상의 "신령한 몸"(고전 15: 44), "영광의 몸"(빌 3:21)에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 스스로 <인식 전환>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즉 관심사)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고후 4: 18)하기 때문이니 <가치>와 <무가치>와의 차이입니다. 후자에는 무관심이요 정작 관심사는 전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생명)은 당연히 미래의 영원성에 있지, 찰나적인 이 보이는 세계에 있지 않음은 한밤 중에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한데 어찌하여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이생에 마음과 몸이 매달리고 있는가요?

동물적 육체에 매여 허우적거리는 인생들,연민/憐憫으로 대합시다. "불쌍히 여깁시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용서 못하는 마음은 <생명의 정상>일 수 없으니 버립시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것을 만드셔서 인생들로 완전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죽음이 있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죽음은 짝으로서 "하나" 를 이루기에, 무릇 하나된 것은 동시에 한꺼번에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둘 중 하나로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죽음이 있으면 죽음 일색이지 생명(삶)은 섞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양자역학 실험에서 입자의 성질이 '파동성'을 띄면 그 상반/相反인 '입자성' 은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생명이 반드시 먼저 오지 죽음이 먼저 오는 법도 없습니다. 짝을 이룬 둘은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선후/先後의 질서를 지키게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이는 태초에 성부/聖父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낳으심으로써 만유 창조를 시작하심에서 비롯됨이니, <하나님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창조하신 것을 "낳으셨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성자와 약속(언약)을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너만을 위할 터이니 너도 네 자신을 위하지 말고 나를 위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또한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계명"(요 15:10/10:18)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이 취지를 따릅니다.

이를 가리켜 또한 "하나"(10:30)라고 하는 것이니 육체일 경우 "한 몸"(창 2:24)이라 하여 남녀 한 몸이 되면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 되고 더 다시는 남자의 소유가 되지 않으며(고전 7:4) 여자 또한 그러하고, 영/靈의 경우 "한 영"(고전 6:17)이라 하여 주님과 내가 "합하면"(:17) "내게 사는 것이 주님"(빌 1:21) 이 되어 오직 주님만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으며, 주님은 그 사시는 것이 내가 되어 주님 자신을 위하지 않으시니 그 증거가 바로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인 것입니다. 이 원리로 우리가 구원되었은즉 이 불변의 이치로써 우리 구원이 향유/享有됨으로써 영원히 지속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다시 말헤 하나님 계명에 대한 절대 복종입니다.

이 하나됨이 곧 생명/삶의 법칙이라, 기계적 삶의 자연계 동식물을 제외한 신령한 몸의 모든 초자연계 영물(인간을 포함하여)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이러한 언약 관계에 있기에 성경은 아담 범죄를 설명하여 "언약을 어겼다"(호세아 6:7)고 한 것입니다. 성경을 신약(새 약속)과 구약(첫 언약또는 옛 약속)으로 분류함도 이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새 언약에 속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피로 세우신 것(눅 22:20/히 8:12, 13). 

그러므로 값 없이 은혜의 선물로 거저 받은 구원이라 하여 마치 우주 만유를 무조건 다 얻어 현재 누리게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거의 모든 "구원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착각인데, 생명의 법칙을 준수하는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새 창조임을 모르는 무지무식에서 옵니다. "언약을 어긴" 아담처럼 되면 또는 사탄 및 악령들처럼 자아중심 즉 하나님 위한 삶이 아니고 제멋대로 자기를 위함으로 생명의 영원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 파탄은 필지입니다.


2025년 9월 16일 화요일

흐르지 않는 물은 웅덩이로서 죽어 간다ㅡ"가나안 성도"들에게 주는 성경의 엄중 경고



물은 흘러야 생명이라 정체하여 고이면 썩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받아 내가 구원 받은 것으로써만 정체해 있으면 썩습니다. 구원 받은 것도 "잃거나 빼앗기게"(눅 9:25) 마련이니까. 계속 흘러 보내어야, 즉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구원 받은 것을 이세상에서 길이 보존하는("잃거나 빼앗기지" 않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마지막 때"라 "내 백성아, 거기(바벨론)에서 나와 그(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시는 명령이 임하신 때로서,
전도해낸 사람들을 바벨론 교회에 보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이시고 지도자이신 "마지막 아담"(고전 15:45) 우리 주님께서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시대로서, 주변에 교회다운 교회가 없으면 내가 전도자로서의 책임 완수 차원에서 전도 대상자를 집 또는 적당한 장소에 모여 가르치면 됩니다.

여자면 여자끼리 남자면 남자끼리 가족이면 가족이 모여,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주님께서 친히 계신다" (마 18:20)고 약속하셨으니까. 주님 계시면 성부 하나님 또한 계시니(성부와 성자께서 언제나 "하나이시니"(요 10:30) 하나님께 예배가 이뤄지고 이는 곧 교회의 시작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핍박이 일상화되었던 초대교회는 오늘날의 <북한교회>처럼 "집 교회"(고전 16:19/골 4:15/몬 1:2)가 일반화된 현상이었으니까. 가장 교회다운 교회로서 21세기 오늘날 그 표본으로 세우신 것이 북한교회를 비롯한 <핍박 받는 지하/地下교회들>이니까. 이 점에 항상 유념해 주시기를. 

2025년 9월 15일 월요일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방법

<진리와 진실> 그리고 이와 상반되는 <거짓> 밖에 없는 그래서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뿐인 오직 2분법으로만 가름되는 이 세상이다. 최소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그러하다. 하나님의 실존 여부는 성경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聖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됨이니 그런즉 저들이 핑계댈 수 없다"(롬 1:20) 한 대로, <보이지 않으시는> (볼 수 없는) 창조주는 <보이는> 창조물이 그 유일한 증거/증명이요 해답일 수밖에 없다.


보이는 이 우주만 해도 너무 방대하여 그 한정된 일부분만 눈에 들어올 뿐 나머지는 볼 수 없는데, 이런 피조물도 '볼 수 없으면서' 이 만유를 만드신 만유보다 크신창조주를 '보려 하는' 당신이야말로 지성적인가, 이성적인가를 묻고 싶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인간은 그런 따위 질문을 하지 않는 법이니 이 하나만이라도 명심해 두라.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특징인 가시적 존재이실 수 없고 오직 불가시적 "영"이신 것이다. 피조물은 아무리 "영물" 이라도 예외 없이 가시성/可視에 속한다. 보이는, 볼 수 있는 증거/증명 중 가장 대표되는 것이 오늘날 21세기에 밝혀졌으니 곧 3운법칙으로서, 모든 인간이 하나하나씩 아주 그 정수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간섭되고 강제되어 그 출생에서 죽음까지
철두철미 관할된다는 확실한 증거/증명인데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입이 백개가 있은들 할 말이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시면 그 만드신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그 유일한 것이 성경이다. 바로 이 성경의 <정확한 해석(풀이)>을 위하여 바로 그 증명 증거로서 이 3운법칙이 이제 필요를 따라 세상에 계시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유일무이한 것일진대 그 의미 즉 정확한 해석도 오직 하나일 뿐이니, 이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진리 아니면 거짓, 거짓 아니면 진실, 오직 대칭으로만 나누어지는 취사선택,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이에만 전념하고 그 외 다른 무엇에든 한눈팔지 말 것은, 하나님의 소유인 내 시간을 도둑질하려는 사탄 악마의 획책에 넘어가지 않는 유일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혜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다" (잠 3:18).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할 것이다"(계 2:7). 

2025년 9월 14일 일요일

생명의 진리에 이르는 오직 하나의 길로 인도하는 오늘날의 길잡이ㅡ그들이 어디 있느냐

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계 17:5)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1)를 가리키며,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5), 그 짐승의 정체로 말하면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8)로서 사도 요한이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겼다>"(:6) 했으며, 나중에는 짐승이 이 음녀를 "미워하여"(:16) 멸젙시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종당에는 바벨론이 사라지게 될 것을 가리켜 계시록은,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18: 2) 했습 니다. 표면으로는 "짐승"이 "음녀"를 없애는 형태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인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 자행된 영적 음란 행위 곧 일체의 악행에 대한 보응이신 것입니다.

이상 서술된 것을 종합하면, 사이비 교회 다시 말해 바벨론 신학의 바벨론 교회가 초대교회 이후 곧장 나타나 "하나님 섬김"을 표방하여 가장하고, 세상 각국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백성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서고, 실질상 적그리스도 행세(하나님 성전에 앉아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짓거리)를 하는데, 때가 오면 지금까지 "복음"으로 위장해 왔던 일체를 한꺼번에 뒤집어 엎고 몌시야 예수 우리 구주님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으로 꾸며 행세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당장 우리가 척결해야 하는 것은 바벨론 신학 곧 황당무계의 모든 사탄의 성경 관련 거짓말과 속임수이므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4) 하심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거짓됨을 통해 사탄이 노리는 바가, <세상 삶의 사랑> 즉 자기 부인을 무시함에 있고 일반적으로 <범죄(불순종)> 행위를 이 세상에서는 불가항력의 그 무엇인 양 인식하게 만들어 자아중심을 버리지 않게 하는 사이비 성경 풀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행함으로 구원 얻음"과 "믿음으로 구원 얻음"으로만 양분시켜 마치 그 양자 택일로써 영생 여부가 가름되듯 그릇 인식시키는 것, 그리고 로마서 7장 24절의 죽음의 탄식을 구원된 자 곧 바울 사도 자신의 직접 체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니, 왕년 에덴에서 치명타를 입히던 간악한 계략 그대로입니다. 혼란과 혼돈으로 뒤범벅된 너무나도 기가 찬 뒤죽박죽, 엉망진창의 소위 신학("계시"가 아닌ㅡ눅 10: 22)입니다.

주님의 경고 즉 스스로 "돌이켜(나는 신학적 지식에 통달해 있으니 "지혜롭고 슬기 있다"는 일체의 자부심을 버려야ㅡ눅 10: 21)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마 18:3)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숨기시는데" 인간이 무슨 수로 감히 구원을 얻는답니까!

21세기 이 세상 "마지막 때"에 거의 2천년만에 맞는 이런 중대한 전환점의 "때"를 예고해 알리심에서, 그 시대적 특이 사항이 결코 없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에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한 "표적과 기사"(요 4:48ㅡ"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가 필수였듯이.

2천년이 가깝도록 이런 언어도단, 어불성설의 사탄의 거짓말에 휘둘려 왔으므로 이런 끔찍한 사탄의 거짓에 포로되었다가 비로소 해방되는 순간의 중대성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이짚트 탈출에 결코 못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의 "표적과 기사"는 과거와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사탄도 지금 적그리스도의 때를 당해 이전 시대의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규모가 더 큰 초능력을 과시할 채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세기 표적과 기사"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다름아닌 3위1체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 개개인의 생애를 눈금 자로 재듯이 엄격한 원리 원칙에 맞추어 재단/裁斷(옷감이나 재목 등을 치수에 맞게 자르거나 다듬는 것)하듯 다루는 것이니, 이야말로 창조자 하나님의 증명/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리요?

이뿐만 아닙니다. 이 법칙이 아담 때부터 시작하는 등 무조건 정해진 것이 아님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데에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부득불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정해졌음이 명백히 드러났으니, 이렇게 정해진 것을 두고 정신 이상이 어니고서야 누가 "우연"이라 하겠나요. 그 정해진 시점과 목적/의도가 100%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 나자말자 살인 행위부터 일어났으니 아우 아벨이 형 가인에게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천년 가까이 살게 되어 있었으니까(이는 아담이 영생하는 신령한 몸이었다는 증거로서 초자연계적 육체의 기운이 서서히 사그라졌다는 설명이 되는 까닭) 3운법칙이 그 때에도 적용되었다면 아벨이 그렇게 100세 미만에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그런 젊은이의 죽음이, 살인자 가인의 4대손인 라넥 때에 다시 일어납니다. 한 젊은이가 창으로 라멕을 공격해 와 상처를 입히며 계속 덤벼들어 자기가 죽을 위기에 이르자 그 "소년"을 죽여버린 것입니다(창 4:23,24). 이 때만 해도 3운법칙을 아직 정하시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정하셨다면, 아담의 아들 셋의 7대손 노아가 950살에 죽었으니까 당시까지만 해도 천년 가까운 장수를 누리는 때라 "소년"의 죽음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기에.

가인의 4대손인 라멕 이후에야 3운법칙을 정하셨음이 명백하니, 노아의 생애가 SN유형임이 드러났기 때문. 즉 라멕 이후에 3운법칙을 정하셨다는 것은, 라멕의 살인 사건으로 인간은 더 이상 자율/自律에 맡겨서는 안되고 그 생애를 강제로 규제하시어 최소한 구원될 수 있는 기회만은 보장해 주실 필요성에서 비로소 3운법칙을 정하셨음이 입증되는 까닭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에도 3운법칙(왜 3가지 종류이냐 하면 만유가 3위1체의 구조로 되어 있고 또 이 체제로 움직이는 까닭이고 또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3운법칙이기 때문)을 정하실 수도 있지만, 가인의 4대손에 이르기까지 미루시고 3운법칙을 정하시지 않은 것은 같은 살인이라도 가인과 라멕의 경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전자에서는 아담이 동물성 육체가 됨으로 인한 자아중심적 본능이 원인이었지만 후자에서는 남을 미워하여 없애버리려는 악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자기를 위해서도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강요되는 살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강제력의 불가피성이 드러나자 라멕 이후부터 모든 인생들을 3운법칙이라는 일정 틀 안에 묶어 놓으신 것이고 죽을 때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목숨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처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상황에서는 "우연"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고 단 한 구석도 발 붙일 틈이 없습니다. 서로 죽이지 않더라도 불의/不意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고 불시의 자연 재해만 해도 엄청난데 모든 개개인을 철저히 감시 대상으로 삼아 죽을 때 외에는 절대 죽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초능력(설사 천사들을 동원하시어 그 작업을 수행하게 하신다 해도)에만 해당되는 것이야 삼척동자라도 능히 이해할 수 있을 일이니까.

더군다나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 즉 3위1체의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 운용이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소한의 구원 받을 시간만이라도 확보해 주시기 위함이라 했지만 네피림은 악령의 분신이기에 구원 자체가 불가능해 해당되지 않으나, 네피림의 직접적 식별은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 때문에라도 무릇 인간으로 태어난 자는 3운법칙에서 예외가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산되어 나오거나 철도 들지 않아 영아로 죽는 경우 네피림인 것이 확증되므로 이런 간접적 식별은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죽지 않으면 또 네피림이 아니라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장수하는 네피림도 많으니 모든 것은 하나님의 관장/管掌 아래 있습니다.

네피림을 식별할 수 없으니까, 유달리 악하다고 해서 또는 천성이 선하게 보인다 해서 또한 이렇다 저렇다로 단정 짓지 못합니다. 극악한 사람 중에도 구원될 사람이 있고 성인으로 추앙 받아도 네피림(히브리어로 단수가 아닌 복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기 전 회개가 선행됨이 필수이므로 선을 행함이 의인됨의 절대 요건임은 불변아라 할 것입니다(롬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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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18:3).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더구나 아담 범죄로 죽고 썩는 그래서 아주 비천한 동물적 육체로서 오셨으니 오로지 나를 위해 물불을 가리시지 않는 일편단심 사랑으로 그렇게 피조물의 형태가 되심도 불사하신 것입니다.

나와 "하나"(요 10:30)되심, "한 영"(고전 6:17)이 되셔야, 그래서 내 영혼처럼 영원히 내 안에 계셔야 아담 범죄의 동물적 육체를 벗어나 인간을 애초 창조하신 대로의 "신령한 몸"(고전 15:44), 영생하는 육체로 내가 환원, 복귀(이것이 "구원")될 수 있기 때문. 성자 하나님께서 그리 하셨으나, 성부 하나님 또한 똑같은 십자가 고난/고통을 당하셨으니 성부자/父子께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자께서 처녀의 태/胎에 들어가실 때만 분리되어 계셨고, 이후 약 30년 뒤 성자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성부의 성령이 성자에게 임하심으로써(마 3:16) 다시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부자('낳으신 자'와 '낳음을 받으신 자' 곧 '낳아지신 자'로서의 '짝') 관계로 "하나"되심을 만유의 으뜸 가는 법질서로 정하시고 만유의 창조와 운영의 최고 기준으로 삼으시니 이를 "3위1체의 법칙" 또는 "짝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며, 이렇게 세상에 비로소 알려짐이야말로 21세기 "마지막 때"의 최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되시어 나와 함께 하나되어 영원히존재하시니 우리 주님보다 내게 가까운 사람이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가리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 하셨으니,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내 가족도 나 위해 사람되신 주님의 '가까우심'에 견줄 수 없는 실상 그대로를 밝히심입니다. 

단순히 우리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시니 영원한 이상향적 삶의 최대 행복의 뿌리요 원천/源泉으로서의 '생명(삶)' 그 자체이신 까닭입니다. '진리'와 '진실' 그 자체이시고 모든 '문제 해결' 그 자체이신 까닭입니다(요 14: 6).

단지 지금 이 시점만은 "사망의 권세"(히 2:14)를 잡은 자가 일시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인지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골 1:24) 하는 때이지만 이 역시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여자의 해산의  때를 인한 근심"(요 16: 21) 정도이니 그래서 "참고"(롬 2:7) "견디는"(마 10:22) "소망(희망) 중의 인내"(살전 1:3)에 불과할 뿐인즉 조금도 위축될 일이 없습니다. 악령들과의 전쟁 중이니까 최후의 승리만이 유일한 답이 되는 것이니까.


"내 마음 그윽한 데서"

1.
내 마음 그윽한 데서 내 마음 그 깊은 데서
생명 샘(계 7:17)이 강물(요 7:38)되어 
흘러 흘러 넘치네
주님 안 '늘 평안'(요 14:27)되어
주님의 '늘 기쁨'(15:11/17:13)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넘치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내 영혼 그윽한 데서 내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이안삼 곡에 맞추어
https://youtu.be/GtBP-sSlAJQ?si=4hpzRSBaGyFvqlSL

2025년 9월 10일 수요일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 아래 광야의 길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는 것이다"(고전 15:44). '육의 몸→신령한 몸'의 순서/단계는 지금 우리에게만 비로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담 창조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지금의 우리는 그 짝을 이루어 있는 것뿐입니다. 즉 "첫사람 아담"(:45)과 "마지막 아담"(:45)의 대칭성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는 때를 가리켜, "보라...비밀을 말하니 우리가 다 잠잘(그리스도인들의 죽어 장사지내짐을 가리킴ㅡ행 7:60)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이니 나팔 소리가 난즉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할 것"(고전 15:51,52)이라 했습니다. 즉 주님의 재림이 그 <때>입니다.

소위 "휴거"라는 것은, 세상 끝이 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 거의 모든 이들이 죽음을 맞았지만("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마다 죽임을 당하므로ㅡ계 13:15) 그래도 소수 살아 남은 자 중 일부에게만 해당됩니다. 이렇게 공중으로 들려 감을 받는("휴거") 이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현재의 육체 그대로라 천년 왕국(아담 때처럼 천년 가까운 수명을 누리는 시대)에서 자식들을 낳고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멸망의 대상자는 물론 제외하고.

이들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은 절대 다수가 젊은이들로서 장차 천년 왕국을 구성할 인원/人員이기 때문. 여기 속하는 극소수(이사야 13:12) 청춘 남녀는 주님 재림시 멸망은 면한 터이지만 신령한 몸에서는 제외되었으니 구원은 받은 몸이나 주님을 위해 이렇다 할 고난은 받지 않아서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딤후 2:12)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천년 왕국에서 부조/父祖 역할로만 한정될 뿐이고, 왕권/王權 행사의 자격은 없습니다. "천년 왕국"이란 것은 반복 설명이지만,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잠깐 즉 천년간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마지막 심판을 실시했을 필연적 과정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폐기, 유보되었다가 "마지막 아담"께서 "첫 사람 아담"을 이제 대신함으로써 그 순연/順延, 보류되었던 아담의 세상 통치가 지금 비로소 진행됨에 있음을 뜻 합니다.

아담 자신은 비록 범죄하지 않았더라도 그에게서 난 소생들 중에는 분명 선악과에 손대는 자들이 일부 생기게 마련이고 그것도(아담의 통치 중이라) 벼르고 벼르던 끝에 일시에 집단적으로 저질렀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동물적 육체가 생겨나 한 세상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상정/想定한 것이 "마지막 아담"의 이 "천년 왕국"인 것입니다.

일부가 그런 범죄 행위를 했을 것이고 나머지는 그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럴 경우 지금처럼 아담도 신령한 몸일 것이요 또한 가담치 않은 자들 역시 그러한 아담의 소생들이니까 신령한 몸 그대로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 때에도 신령한 몸을 가진 자들은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범죄자들에게 신/神과 같고 왕/王과 같은 존재였을 것.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 터라 "마지막 아담" 즉 사람의 아들들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애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유추/類推를 통해서도 너무나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 받기 전에 소위 "휴거"를 통하여 그 재앙을 비켜 간다는 자아중심적 망상은 아주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이기적이고 저속한 탐욕적인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아 구원된 사람의 특징은,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내고 믿음을 붙들어 주고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합심 기도에 항상 몰입해 있어 그런 넋 나간 잡념에 빠져 있을 여가가 도무지 없으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 1) 바로 이것이 "깨어 있음"(마 24:42, 43/25:13)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일단 구원 받았으니 이는 영구 불변이라 이제는 마음 놓고 태평스럽게 지내도 좋다는 말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고후 13:5)라는 경고만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7) 했듯이 쉬지 않는 상호간의 기도를 역설한 것은,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절절한 경고와 맞닿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로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너희 중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전 11:18/히 10:25/ 3:12,13) 한 그대로입니다. 히브리서도 그 문맥과 내용 등으로 판단컨대 바울 사도의 글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상 모든 것은 구원 받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구약의 핵심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짚트 탈출과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 여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묘사함이요 관련된 모든 경고/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짚트의 압제를 알단 벗어났으니 이는 우리의 <구원 받았음>에 해당합니다.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나 광야 통과는 절대 무시 못하는 <현실>이요 실제 난관이었던 것임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이짚트(애굽)를 탈출한 장정/壯丁(20세 이상)이 60만(출애굽기 38:26)이었는데 그들 중(장정 수에 들지 않은 이후 성장한 나머지는 제외) 실제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오직 둘뿐이었으니 그 함축하는 의미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거짓말은 이같은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전하다", "평안하다"는 말만 남발해 왔고, 그리하여 모든 각종 비극으로 유도해 온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어도 마귀가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범죄 형벌 차원에서도 악령들의 개입이 당연시되니 오호라! 곤고한 인생들입니다. 핍박과 탄압만 아니라 온갖 거짓이 난무합니다. 바벨론 신학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험한 광야 길이 그 명백한 상징입니다. 광야 자체가 이 세상 상징입니다. 사람 살지 못할 황무지 일색이 현세의 가감 없는 특징적묘사입니다.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착각하면 영혼의 영원한 삶을 잃거나 빼앗깁니다. 오직 성령의 "불 기둥, 구름 기둥" (민수기 14:14)의 인도하심 따라 일보씩 조심해서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삶/생명의 법칙 준수)에 그 핵심이 있어

"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 18:33 -3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