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항로의 북극성(polaris)
선장이 항해할 때 북극성을 보고 정확히 방향을 잡아 가듯이 인생 각자는 자기 자신을 운항하는 선장
2025년 11월 29일 토요일
21세기 "천사의 복음"의 핵심은 "3위1체"에 있어
오늘날 전도는 성경도 허나님도 모르는 이들을 상대함과 더불어, 믿는다면서도 자기 몸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있지 않아 뜬 구름만 잡듯 하는 <이름만의 "기독교인">들 대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바벨론 신학과 달리 모든 점에서 면모를 쇄신한 "천사의 복음"들 전해야 하기 때입니다. 이 21세기 천사의 복음은 강력한 "21세기 표적과 기사"가 그 배경임을 알리면 말씀을 듣는 자에게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만유의 기본 원리로서의 3위1체 바로 그 도식을 천사가 오늘날을 직접 예고/豫告하며 다니엘에게 2,500년 전 알렸던 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이기에, 이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중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 역시 21세기 지향/志向 예언서답게 이 기이한 <문자화/文字化된 도식>을 성령의 감동으로 역시 함께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계 1214).
"이는 힘으로 되지 않으며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된다"(스가랴 4:6) 하신 첫머리 말씀대로 성령께서 이 대목의 주제/主題이십니다. 지금까지 "3위1체"라는 말은 많았으나 정작 그 뜻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으니, "바벨론 신학"에 철저히 가려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셋이 되실 리는 만무하다고 해서 그냥 <3면(세 모습을 지니신)의 한 분 하나님> 정도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렵기만 하다"는 사탄의 부추김에 장단만 맞추는 꼴이 되는 슬픈 현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 그대로의 뜻일 뿐입니다. 장차 닥쳐야 실감할 수 있는 예언적 성격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낳으셨다"고 성경에 명시된 그대로 하나님은 모자(부모 자식)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요 14:28) 하신 대로입니다. 단, 둘로서 계시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하나"(10:30)로서 계시기 때문에 이 이치를 만유 창조와 운영의 기본 원리로 삼으신 관계로, 마귀는 이 핵심 진리를 여러 거짓말로 감추려 했던 것입니다.
상보성 원리에서 닐스 보어(1885-1962)가 갈파함으로써 상반/相反은 상보/相補(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유명 문구에서 드러나듯 인과율/因果律이 입증되어(파생자와 피/被파생자의 관계) 이 특이한 3위1체의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까지 약방의 감초처럼 마귀가 써먹어 왔던 무신론, 회의주의 등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최고 원인으로서의 창조주가 입증되시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인과율 붕괴 가능성"을 말하는 이들은 예컨대 양자역학에서 매우 미시적 영역에서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사성 원자의 붕괴는 <예측 불가능한> 확률적 현상으로 나타나 인과율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고들 합니다. 또 특수상대성 이론에서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은 인과율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특정 사건에서 <인과관계의 뒤바뀜>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두 경우 다 "상반'이 되어 있는 둘이 "상보'가 됨 더 정확히 간단히 말해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 존재함 즉 "3위1체"의 근본 이치를 외면함에서 오는 혼돈일 뿐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다룸도 아니고 "특정 상황에서의 다른 원리가 적용됨"도 아닌 것입니다.
21세기 "천사의 복음"이라는 천사들의 획기적 거사/擧事와 용단/勇斷에 의해(하늘 전쟁에서의 승리로 악령들을 제압하여 더 이상 거짓말로 인간 세상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ㅡ계 12:7-9) 모든 막혔던 물꼬가 트이게 된 오늘입니다. (진리가 드러났다뿐이지 사탄의 거짓말이 이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님).
사탄이 이렇게 세상을 장악하게 된 것은, 아담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따르기보다 사탄의 거짓말에 더 복종해 그를 경배한 꼴이 되어, 연약해 빠진 동물성 육체가 됨으로써 막강한 신령한 몸을 박탈 당하자 벌어진 (종전까지의) 위계질서의 비극적 전복/顚覆 내지 도치/倒置 결과인 것입니다.
즉 아담 아래 있던 영물들이 일부 하극상을 함으로써 아담을 시해/弑害한(아담이 사탄의 거짓말대로 따른 결과 죽은 자 곧 동물적 육체로 돌변하여 종전의 신령한 몸을 상실했으므로)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 및 그 아래 악령들의 인간 세상 지배는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기도 하여 요지부동이었는데, "마지막 때"를 당해 "마지막 아담"의 등장을 계기로 비로소 천사 군단이 행동할 여유가 생긴 까닭에, 그나마도 힘 겨루기를 통해 이겨야만 가능한 까다로움을 천사들은 극복한 것이니, 이것이 21세기 "천사의 복음"(계 14:6)의 시동/始動입니다.
이런 사실 즉 사탄의 이 세상 지배를 모르니까 바벨론 신학의 정체를 알 리가 없고,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에서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 말씀에 거짓말 같은 것으로 손대랴" 하며 사탄이 대놓고 세뇌시키는 대로 허무하게 맹종했던 것이 오늘날과 같은 파탄을 낳은 것입니다. 이제는 시급히 깨어날 때입니다.
사탄이 나꿔챈 통치권은 하나님의 이 세상 지배가 아닌 세상 모든 피조물의 수장/首長/으로 세우신 아담의 인간 세상 지배권("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ㅡ창 1:26)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탄의 왕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현세의 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요일 2:15).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요 12:25)이라고 엄중 경고하신 이유입니다. 소위 "기복 신앙" 즉 하나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멸망의 확실한 지름길 외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 주 예수님께,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니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인즉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는 고로 당신이 내게 절하면(나의 자아중심을 따르면) 다 당신 것이 될 것"(눅 4:5-7)이라 했던 근거이기도 합니다. "나의 이 뜻을 거스르는 그 누구든 이 세상에서 결단코 볕 볼 날이 없을 뿐더러 그 정반대인 고통 고난뿐임을 각오해 두라"는 당당한 위협인("마지막 아담"에게 소속되어 있는 그 누구를 향해서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헛된 꿈이니 이것이 바로 "미친 마음"(전도서 9:3)인 것입니다. 구약(유치원생 수준의 예비교육)과 신약(성인으로서의 실생활)도 구분 못하는 무지 속에 갇혀 있음은 성경을 읽지 않은 탓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축복, 운운" 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共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초대교회의 본보기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관심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질했던("도둑질하는"은 오역ㅡ개역한글)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했는데 가난 구제는 국가도 못당한다는 말도 있듯이 베풀다보면 나 자신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는"(히 13:3) 것이 마땅한 세상인즉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렇게 나의 안위만 생각할 마음이 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아중심이기에 그렇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믿는 자의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의 부자와 거지 행색의 여타 사람들을 빗대어 말씀하심입니다.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하셨으니까. 부자의 죄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다"는 오직 그것입니다. 죄명은 이 세상에서 "위로를 이미 받아버렸다"(눅 6:24ㅡ"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것. 부유하게 교회당을 번듯하게 세워 올리고 최고급 자가용을 자랑스럽게 굴리고 다니는 소위 "교역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뒤쫓고 있으니 한시바삐 깨어나세요!
미국의 오랄 로버츠라는 한 이름 날리던 소위 "신유 부흥사"는 생전에 곧잘 하던 소리가, "나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증거로 일부러 자가용을 여러 대 구입하여 번갈아 타고 다닌다"였습니다. 당시는 미국만 해도 자가용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냈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물성 육체로서의 만 가지 고초(인간고)에서 해방되는 것이 천국 곧 "신령한 몸"(고전 15:44)이자 "영광의 몸"(빌 3:21)으로의 복귀/復歸/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않고 자아중심으로 자기 생각대로 했기 때문에 아담이 영생을 잃고 현재와 같은 동물성 육체가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구원 받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ㅡ마 7:21)에 있음을 확증적으로 단정하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 아니니, 믿음으로서의 "은혜", "선물"은 우리가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가 되어버렸은즉 새 창조를 받아 산 자부터 되고보는 것이 급선무라 그렇습니다. 창조는 다 <선물>이지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
새 피조물로 거듭 난 다음의 단계가 필수이자 필연이니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 즉 순종 다시 말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무조건 "믿음" 일변도로만 끝낼 뿐인 사탄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아무리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거듭 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 치더라도 상대방중심/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그 나물에 그 밥, 그것이 또 그것이기에,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아예 임하시지를 않습니다. "성령으로 날"(요 3:5,6) 수가 없으니, 한 마디로 불가능입니다. 이 자기 기만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음을 "확신한다"지만 허공에 떠 사라지는 메아리 같은 허무로 끝나고 있으니, 다시 자기를 살펴 여의치 못하면 새로 확실히 시작하여 출발하시기를!
아무리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거듭 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 치더라도 상대방중심/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그 나물에 그 밥, 그것이 또 그것이기에,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아예 임하시지를 않습니다. "성령으로 날"(요 3:5,6) 수가 없으니, 한 마디로 불가능입니다. 이 자기 기만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음을 "확신한다"지만 허공에 떠 사라지는 메아리 같은 허무로 끝나고 있으니, 다시 자기를 살펴 여의치 못하면 새로 확실히 시작하여 출발하시기를!
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21세기 예언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14:6)."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되는 것이니"(스가랴 4:6).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너는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성전 건축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놓는 주춧돌로 건물을 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초석)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으라' 할 것이다" 하셨고"(:7).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殿(성전)의 지대/
地臺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칠 것이다 하셨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 것이다 하셨다"(:9).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건축에서 벽이나 구조물이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10).
"내가 그에게 묻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스가랴 4:11).
"대답하기를 '이는 기름 바르심(성경에서 기름을 바르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나 성별된 장소를 구별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함)을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인, 소유주) 앞에 모셔 섰는 자이다'"(:1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줄 것이니 저들이 굵은 베옷(성경에 슬픔, 애도, 회개를 상징하는 거칠고 불편한 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할 것이다"(계 11:3).
위에 나열한 성경 구절을 종합하면, 이 21세기 "바벨론 탈출"(계 18:4) 및 이와 상대되는 "천사의 복음"(14:6)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바벨론 탈출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온갖 거짓맓>에서 벗어나 애초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다시 복귀함을 말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메시야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친히 가르치셨고 그 후 부활 승천하신 뒤 성령으로 다시 오심으로써(요14:16-18,23) 모든 진리(16:13) 가운데로 인도하신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가르치심>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12 사도들과는 일절 접촉이 없이(배운 것이 없이) 아라비아로 가서(갈 1:17) 거기서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하여, <성경을 통해(성경 외 달리 그 무슨 다른 방법으로든 아니하시고)> 충분히 모든 진리를 섭렵할 수 있게 하심이니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시어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외면하고 다른 소위 "직접 계시" 따위에 빠져드는 순간 마귀의 사이비 이단에 빨려 들어가게 되고 지옥의 냄새가 진동하게 됩니다.
바벨론 신학에서 가장 독소/毒素가 되는 것은 <겉치레의 "구원 확신"> 즉 구원 관련한 일정 공식 같은 것을 만들어 남발하고 세뇌시켜 무더기로 자기 기만에 도취하도록 만듦에 있습니다. 무조건 교회당에 와서 "믿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싸구려식 "영생 구원"입니다.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순종을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란 기괴한 이유를 들어 배제시키고 "로마서 7장"을 믿은 후의 바울 자신의 개인 체험이라고 믿게 하는 등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 없이 무턱대고 "나는 주님의 피 공로를 믿으니까 틀림없이 구원이다" 하게 만들었고 오늘날 적그리스도의 때에 와서는 난데없이 "방언" 소동까지도 벌이며 "나는 성령 받았노라"는 자기 도취에 빠지게 만드는 사탄의 악랄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을 "스룹바벨의 성전 건축"으로 예고/豫告한 이유입니다. 이제 비로소 성령께서 계시게 되는 성령의 성전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산"이라 함은 온 세상을 지배해 온 바벨론 신학을 말하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 운운"은 그동안 이 거짓됨에 가려졌던 하나님의 복음 진리가 "천사의 복음"으로 오늘날 광명을 다시 발하게 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감람나무, 두 증인 등 "둘"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는데 성경 전권을 통해 보기 드문 것으로 "마지막 때" 예언서인 스가랴와 계시록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아 3운법칙 등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가리킴으로써, 오늘날 "천사의 복음"으로 나타나신 말씀의 시대적 배경을 특별히 강조하심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오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2025년 11월 25일 화요일
21세기 성경적 경고 (2)
"세상 삶을 철저히 부정/否定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로 오해할 것이 아니라 이제 알고보면 전혀 무의미한 동물성 육체에 의한 상상하기조차도 끔찍스러운 현재의 소위 "삶"에 매임으로써 영원한 영광의 찬란한 본격적 삶을 대신 놓쳐버린다면 그보다 더 통탄스러운 일이 또 있겠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인 것이다.
둘 다 누리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무리요 억지인 것이다. 때문에 헛된 것을 위하여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것>으로밖에는 더 이상 취급되지 않음을 알아야. 사람들이 헛된 생각과 목표에 매몰되어 갈팡질팡하는 비극적 구렁창에서 그들을 구출해내는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심히 바쁜 경황에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마음이 나누어져 성경의 경고대로 분산되다니! 시간을 낭비하다니! 절대로 용납될 일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의 법칙에서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이요 시간과 정력 일체인데 마치 내것처럼 내 마음대로 하다니! 구원 받은 사람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신 순간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ㅡ요 20:21) 터에 더 할 말이 있으랴.
영원히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는 영원 세상이다. 자아중심의 세상은 이 한 때만으로써 영원히 끝나고 그 후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불 못에서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고 아니면 캄캄한 암흑 천지에서(시뻘건 불꽃만 한 곳에 이글거릴 뿐 그 주변은 전부가 칙칙한 암흑 천지이니까)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토해내며 슬피 울고 고통 중에 이를 갈아부치는 멸망 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자아중심이다.
이런 자아중심의 현재 세상에서는 살고자 하는 자마다 나 자신도 자아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자아중심은 멸망뿐이다. 이세상은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하는 것을 바울 사도는 "아내/남편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남편에게서 놓였느냐, 남편/아내를 구하지 말라, 아내/남편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은 매입해들인 물건이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는 말로써 표현했을 뿐이다.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왔다면 그 후 종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어도 그냥 종으로 지내라 한 것도 당시 노예가 들끓는 사회에서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활용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인으로서가 아닌 같은 종으로서, 더 친근하게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로지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 물심 양면으로 쏟아 부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고 구원의 복음 전달 그리고 구제 등 선행에 힘씀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써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는"(고전 10:33) 것이 만사/萬事 그 표준 척도인 것이다. 이생에서나 내생에서나 항구불변의 상대방중심이다.
우리가 망각하기 쉬운 21세기 성경적 경고 (1)
여기 오늘날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성경의 경고가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결혼하지 않은》나와 같기를 원한다. 그러나《강요함은 아니니》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어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7,8).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7:20).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주님 섬김에 이용하라)"(:21).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처녀《우리말 번역이 잘못되었으니, "처녀"가 아니라 남녀 불문 동정/童貞(virginity) 상태를 의미》에 대하여는 내가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는 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니> 나는 너희를 아끼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다. 너희가 염려(심적 분요/갈등) 없기를 원한다(주님을 섬기는 일에).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분요(심적 갈등)함이"의 잘못된 표기》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다. 누가 자기의 동정《"처녀 딸"이 아님》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여길 때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할 일이다. 이는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결혼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자기 동정을 지키기로》 마음에 작정해도 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자기 동정을 지키지 않음도 잘하거니와 자기 동정을 지킴은》더 잘하는 것이다"(ㅡ:38).
세상에! 자기 처녀 딸의 혼사/婚事를 부모가 결정 간섭하다니! "하나님 믿는 자들은 모두 이렇게 미개야만인의 생각도 하는 것들인가" 하지 않겠는가! 성경 번역자들이 이런 양식/良識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니!
성경에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온 경우라면 향후 그 종노릇을 벗어나 자유인이 될 기회가 오더라도 그냥 종노릇을 계속하라는 뜻이니 자유인이 아닌 종의 신분이라는 부자유함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특수 상황을 고려함이 하나님 섬기는 자로서 충분히 고려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이 세상 삶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 섬김이 구원 받은 자의 제1차, 2차, 3차 목적이니까!
필자도 이 성경 대목을 읽으면서 혼자 지낸다는 바울 사도의 논리에 동조하고 그래서 88년간의 "독처"로서 동정을 지키고 있다. 생활상 불편은 그렇다 치고 어쨌거나 오늘까지 왔는데 또 한 가지는, "바울 사도의 충심 어린 권고를 나도 교회 앞에서 한다면 바울처럼 자신도 그러해야 즉 솔선 수범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당장 적그리스도가 문 앞에 이르고 환난 날이 당시 코 앞에나 닥친 것처럼 얘기하니 혹자 이를 바울의 착각이라 탓할지 모르나, 바울 등 사도들의 서신이 성경으로 인정된 만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러한 경우 예언적 요소를 반드시 지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21세기 오늘날도 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일진대 우리에게는 딱 맞아 떨어지는 <예언>의 경고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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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명칭인 DPA pix를 ADAM pix로 변경하였습니다 . ADAM은 Angel and Devil's Actual Manifest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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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가 심하여 한 달 넘게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이전처럼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우리의 합심 기도로만 이루어집니다. 여러 형제자매의 합심 기도로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