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8일 월요일

바벨론 신학은 이 양심을 시궁창에 쑤셔 박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벨론 신학은 이 양심을 시궁창에 쑤셔 박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24:15,16).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1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 것이니"(3:9).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딤후 1:3).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함이다"(히 13:18).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다"(벧전 3:16).

2025년 12월 7일 일요일

3위1체의 "3위"의 정체가 "하나"(요 10:30) 곧 사랑의 실체

현재 우리 인간의 유일무이의 목표는 죽는 인생이라고 해서 영생이 아닌 것입니다. 영생하는 인간인데 그렇게 창조되었는데 죄를 지어 즉 "범법/犯法하여"("죄는 불법/범법이다"ㅡ요한1서 3:4) 이런 덧없는 무상/無常 인생 다시 말해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즉 현재와 같이 죽어 썩어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대상이 되어 이런 고통 고난 중에 허덕이고 있는 한없는 고달픔인 것입니다.


고로 "영생"이 아니라 지금 비정상 상태에 빠져 있으니 "정상 회복"이 화급하다고 해야 정답입니다. 이 정상으로 복구되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인 것입니다. 이는 백 번 되풀이해 강조해도 좋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매 순간 이 의식 속에서 지낼 수 있으면 이보다 더 이상적인 것은 없다 할 것입니다. 이 인식 차이가 사실상 굉장한 의미를 지닙니다.

"불법, 범법"일진대 어떤 법(칙)을 어겼느냐인데, '사는 법' 즉 생명의 법칙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녕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냥 살면 되는 것이지 사는 데에 무슨 법이 있느냐 하겠지만 어랍쇼? 나라에 왜 법이 있고 국가 헌법이 있죠? 똑같은 이치입니다. 우주 천하 나 혼자 있는 것이 어니라 단 둘만 있어도 피차간의 암묵적 약속이 필수·필연입니다. 이 언약이 바로 법(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 고로 그 분이 징치하신 양심이란 불문율이 작동함은 당연하고 이는 바로 하나님 실존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를 성문화한 것이 법(칙)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평등하게, 함께, 가장 이상적으로 살 수 있게 짜여진 것이 곧 "사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신 모습을 근거로 해서 기반으로 삼은 것이니 따라서 영원불변입니다. 다시 말해 "3위1체"로 계심이니 여기서 만유의 기본 대원리(우주 만유에 시행·적용되는)로서의 3위1체의 법칙이 나온 것. 생명의 법칙 또한 여기서 나왔으니 이를 정확히 대변하는 것이 디름아닌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한 마디 말씀이야말로 "3위1체"의 핵심으로서 곧 "3위"의 명확한 정체를 밝히심이기에 그러합니다. 이를 또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성경에(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바) 바로 "한 몸" 즉 남녀 육체의 "하나"됨과 관련된 것으로 이를 가리켜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함이라"(고전 7:4) 한 데에서 충분히 밝혀진 것은 놀라운 알입니다.

이로써 "한 영"됨의 원리 더 정확히 말해 "생명의 법칙"이 적나라하게 설명되어진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밝히신 "하나"됨의 구조·얼개·짜임새가 정확하게 가름되어진 것입니다. 즉 갑과 을이 하나되어 병이 되는데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절대로 자기를 위하지 않는 철칙을 따름으로 각자 자기 구실에 충실/충성하는 그 결과가 '병'을 이룸이라는 것입니다. 곧 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 곧 상대방중심을 쌍방이 고수함으로 영원한 "하나"로서의 완벽한 조화·상합/相合을 유지함의 오묘한 이치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고 우리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요일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3:16).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계명"이 바로 이 "3위1체의 법칙"인 것입니다. 사랑의 법칙, 생명의 법칙, 하나됨의 법칙. 짝의 법칙.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도 동일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태양)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다...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38-48).

백이면 거의 백사람이 이상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줄 아시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심이니 이는 우리가 별 수 없는 죄인임을 단지 자각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변명하겠지만(바벨론 신학이 그렇게 말하도록 부추겨),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생각일 뿐입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여기 이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라고 주신 이 동물적 육체가 아님을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하고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눈으로 늘 자주 대하는 것이 사람이라 하나님보다 사람이 내게 더 가까운 줄 착각하겠지만 천만에! 우리를 친히 지으신 바 어버이 이상의 자정/姿情이요 인자/仁慈시기에 하나님을 "품속"(요 1:28)으로 묘사했듯이 하나님 이상 가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 주님의 나 위하신 고통의 죽으심으로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 역사적 진실로서 영원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마 22:37)이라 하심이 바로 이를 근거하심입니다.

"천사의 복음"(계 14:6)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을 새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상대성의 동시성입니다 3위1체의 세계에서 일방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칭성 원리를 따라 상대성입니다. 앞에서 "한 몸", "한 영", "하나"됨에서 설명했듯이 똑같이 항상 동시에 작동합니다. 이것이 "3위" <하나>됨의 뜻입니다. 

2025년 12월 6일 토요일

바벨론 신학의 "행위/행함"과 성경의 "순종"



 

마귀의 어처구니 없는 말씀 혼잡ㅡ"행함/행위"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포상·보답)하시고"(롬 2:7)ㅡ이것이 "순종"으로서의 <행위>이다. 왜 "율법의 행위"("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이다"갈 2:16)와 혼동하는가! 너무나 명백하므로, 혼동할 이유가 없다. "율법의 행위"는 바울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 예수님의 죽으심이 필요 없이 종전대로 율법에 순종하면 구원된다는 또는 예수님도 믿되 모세 율법도 함께 행해야 한다는 주장(실질적으로는 둘 다 똑같은 것)을 말함이다.


이 둘이 하늘과 땅의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도 이를 분간 못해,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ㅡ디도 3:5)를 <롬 2:7>의 "참고 선을 행함"으로서의 <순종>과 혼동한다는 말인가! 혼동할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혼동도 아래 사실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그 진상이 단박 드러난다. 즉 우리는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이다. 죽은 자가 자기를 위해ㅡ자기 구원을 위해 무엇 하나 손가락 하나라도 꼼지락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한 것이다.

고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 있는 것은 새 창조 즉 성령으로 다시(거듭) 나는 방법 외에는 전무한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의로운 자, 거룩한 자로서 단장되어 출발하는 법이니까! 죄인으로 창조하실 리 만무하니까.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나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 됨이니 이는 다름아닌 나와 하나되시려고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친히 성령으로 내 영혼처럼 오시어 나와 영원히 하나되심이기에 그 죽으심이 내 죽음되고 그 부활 내 부활되어 문자 그대로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탄생함이다. 그래서 새 영혼처럼 내 안에 임하심이 아닌가!

이렇게 산 자가 되어 생명을 구가하게 되니 당연히 산 자(아담처럼 아담과 함께 죽음으로서의 몰락 밖에 없던 과거 상태와 달리)로서의 행함 즉 행위 다시 말해 하나님의 양자들이 된 아들로서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 생명이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렵고 복잡할 것 일절 없는 것이다. 혼동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됨은 우리 사후/死後도 아니고 어느 특정 기간을 지나서도 아니고 성령을 선물로서 은혜 안에서의 믿음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됨이니까!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심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심 그대로이시므로 성부 친히 또한 내게 임하심이기에 그래서 말씀으로 나를 아들로 "낳으심"("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것"ㅡ약 1:18)이다. 그러니 "참고(악마가 지배 관할하는 세상이라 갖가지 장애와 고난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은혜로 힘 주심을 따라) 선을 행한다"(롬 2:7) 한 것이다.

이렇게 자명/自明한 것을 가지고 사탄은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사람들을 속여 멸망으로 빠뜨려 왔었다. 물론 성경적으로 말하면 미리 택하심을 따라 택하심 받지 못한 이들이 속아 넘어갔다고 말하면 될지 몰라도 하여간 사태는 이러하므로 바벨론에서 탈출하라 분부하심인 것이다. 


2025년 12월 5일 금요일

멜기세덱이 오늘날 21세기에 크게 부각되어야 하는 이유


멜기세덱이란, 바로 <아담이 살아난 것>을 말함이라 전에 지적한 적이 있기는 하나 이를 오늘날 "천사의 복음" 시대에 본격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싶어 다시 씁니다. 6천 살(6,000세/歲)이 된 현존 인물인데도 21세기 오늘날 "천사의 복음" 시대에 그냥 덮어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저촉되는 문제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다"(히 5:11-6:20) 했으니 제대로 설명하면(ㅡ해도) 능히 알아들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 하고는 더 이상 설명 않고 지나갔으니 지금까지 사탄의 사악한 거짓말의 "바벨론 신학"이 판쳐 온 지가 2천년이 흘렀는데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라는 결론이니 "천사의 복음" 시대에서는 싫든 좋든 마땅한 공론화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으로 "완전한 데 나아갈 일이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할 것"(히 5:11-6:20)이라 했으니 정히 때는 이제 온 것입니다. "아비,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히 7:3) 멜기세덱이니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역사가 없지요. 아담 외에는.

우리 주님께서 "멜기세덱의 빈차/班次(계열, 제사장 직무 수행에서의 차례/순서 등을 의미)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 함은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위해 즉 범죄로 죽어 없어진 "아담"의 빈 자리를 채우시려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니, 모든 면으로 아담과 같이 되셔야 마땅함을 의미하기에 그러합니다.

아담이 왜 또 제사장 역할이어야 하느냐 하면(아담으로서는 죽어 없어진 존재이고 별도의 이름으로서의 멜기세덱이나) 아담을 인해 모든 인간이 "죄의 몸"(롬 6:6)으로 돌연변이해 있어 하나님 앞 죄인인지라 그 중간의 조정자로서의 위치이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아담 스스로 범죄한 것이면 이런 자리가 결코 어울릴 수가 없지만 여자와 한 몸이 되어 있는 운명적인 측면이 감안되어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4)고 성경이 판단함과 같은 까닭에, 여자의 죄에 동참(이는 몸된 교회를 위한 머리로서의 메시야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으심의 예표/豫表 같은 것)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자처럼 일단 죽음에는 이르렀으나 멜기세덱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났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 제사장 구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은 에녹과 엘리야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과 관련된 의미의 부활이지만 멜기세덱의 경우는 아담 자신이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아예 죽음을 보지 않음은 아니고 일단 죽은 다음의 부활함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 에녹, 엘리야 모두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반으로 한 "죽음으로부터의 승리"("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독을 뿜어 내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ㅡ고전 15:55-57)인 것.

"생명의 끝도 없다"고 결론이 난 맬기세덱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으니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 즉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에 이제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성의 영혼을 주셨는데도 썩어 없어지는 동물적 육체를 주셨다고 말하는 "미친 마음"(전도서 9:3)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하나님을 그렇게 이상한, 이해 못할 분으로 세상 앞에 광고해 놓고는 양심의 가책도 없어요? 아담 범죄 이후 사탄이 인간 세상읗 지배하면서 그 원수의 거짓말에 우리는 이같이 한없이 놀아난 것을 창피스러워하는 마음도 없나요? 이제는 그런 정처 없는 방황을 끝낼 때입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존재는 하고 살아 있는 인물이지만 아담으로서는 "범죄자"요 "죽은 자"로서 역사적으로 종결되었고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아담으로는 인식되지 못하므로 히브리서 기록자(여러 가지 정황으로 바울 사도로 인정되는)가 "듣기에 둔하다", "어렵다", 어린 아이", "장성한 자가 아니다" 등 우회적인 표현으로만 일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신학으로써 사탄 역시 필사적으로 막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껏 그루빔(cherubim, 그룹의 복수형) 중 하나로 속여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본 자로 인식시켜 왔는데, 왕년에 아담의 보좌역(천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 위상에 치명타가 된다는 판단에서 그러했던 것. 그러나 거짓말로 온통 속여 온 사탄의 새력을 한 판 싸움에 실력으로 꺾어버리고 "천사의 복음"을 확립한 천사들 앞에서는 모든 것이 여지 없이 폭로되는 오늘날 순간입니다.

인간 수명이 지금처럼 단축된 시점은 노아 대홍수 이후입니다. 홍수 이전에는 아담(930세), 므두셀라(969세), 노아(950세) 등 다 8,9백 년 수명이었지만 홍수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노아의 아들 셈이 600세로 죽자 그 후손들의 수명 역시 점차 줄어들어 아브라함은 175세까지만 생존했습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지만, 이 시기 일반적 평균 수명은 7,80세 정도였습니다(시 90:10)

인간 수명이 아담 때는 천년 가까이었다가 세월이 갈수록 자연적으로 짧아져 오늘처럼 된 것이 아니니, 애초 천년 가까운 수명이 하나님 정하신 것이면 즉 하나님의 뜻이면 세월이 오래 되었다고 변동이 생기는 일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은 인간(아담)을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즉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는데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마 8:22) 곧 현재의 동물성 육체로 전락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신령한 몸의 기력이 결딴나버리면서 그 막강했던 기운이 세월 따라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과정의 자취였던 것입니다. "그래 그게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이냐! 어쨌거나 구원만 받았으면 된 것 아니냐!" 혹자는 그렇게 말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바벨론 신학"과 "천사의 복음" 그 차이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곧바로 생사 문제인 바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바벨론 신학(사탄의 거짓말)을 죽음이라 하는 것은, "믿기만 하면 영생 구원"이라고 뭉뚱그려 밑도 끝도 없이 얼렁뚱땅 얼버무림에 있습니다. 이는 아주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생명은 이와 아주 판이합니다. 아담의 "범죄와 죽음으로 인해" 구원이 불가결하게 되었은즉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범죄하지 말아야> 영생으로 복귀되는데 지금 당장 "죽은 자"이므로 가장 먼저 "산 자"부터 되는 것이 시급하고 이에는 새로 창조됨이 필연이라 따라서 이 하나님의 선물을 은혜로써 믿고 받기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 산 자로 회복된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아담의 범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다는 자유의지의 결단) 그 "뜻을 행하기"(마 7:21) 시작함이 필수"요 이것으로 구원이 보장된다"는 바로 이런 인식 차이가 핵심이고 여기서 정작 생사가 가름된다는 점입니다.

죽음의 바벨론 신학에서는, 믿어 일단 새 창조만 되면 그것을 끝이요 완성이라고 단정해버리므로 이것이 속임수요 멸망의 함정인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덮어버리니 죽음의 <결과>는 백날 가야 봉합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만 될 것뿐입니다. 전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모든 인간을 거짓말로 꾀어 멸망의 함정으로 내어모는 사탄의 책략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사는 존재로 처음부터 창조되지 않고 우리처럼 한낱 덧없는(더덥는ㅡ발음에 주의, "너무 순간적이어서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무상/無常 인생으로 만들어졌다면 결단코 멜기세덱으로 변신하여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깁시다.

영원 불변의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라는 말이 생겨날 수가 없음을 상기/想起합시다.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2) 라고 하며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4)면서 감히 일개 인간, 한 <사람>임을 명시하면서까지!

그리고 또한 명심합시다. 자연계 동산인데 사람이 먹으면 영생하게 되는 신령한 나무가 존재함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나요! 하나님 말씀 그것도 첫머리 창세기에!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그러면 그 한 마디 거짓말은 이후 모든 기록이 되어 나오는 것도 다 거짓말이라는 <선언>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니 거짓이 아니라면 진실일 수밖에 없고, 진실이니까 만유의 기본 원리가 짝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일 수밖에 없고, 이 <상반/相反은 상보/
補>에 따라 자연계 물질과 더불어 영체/靈體인 초자연계로서 에덴이라는 "하나님의 동산"("하나님의 동산 에덴"ㅡ에스겔 28:13/31:9)이 이미 창조되어 있었고 그 에덴 동편에 또 아담을 위해 한 "동산을 창설"(창 2:8)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는 표현이 연달아 두 번 중복되어 강조됩니다. 이런 에덴의 특성상 아담이 신령한 몸이 아니고는 거기가 아담의 보금자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는 것은 처음의 자연계 동물성 육체("6일" 째에 동물 창조를 마치시고 맨나중에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은즉)가 에덴의 신령한 속성으로 즉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음을 의미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에 의해 한 번 결정하심은 영원불변이라 아담은 영생하는 자로 정착되었던 것입니다


2025년 12월 4일 목요일

멜기세덱-老子신학 또는 멜기세덱신학론/論

멜기세덱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성경이 유일하게 "거짓말 같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신화 같은" 언급 속에 나오는 인물인데 성경에 그런 신화/神話가 있을 수 없으니 유일하게 신비한 존재라 하겠고, 인간 중에 유일성을 띄는 사람은 오직 아담이니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 한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유일무이하게 
6천 살을 먹은(6,000세/) 오직 한 사람의 생존 인물인데 이 멜기세덱이 노자/老子로 변신하여 다시 그 역사적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 절대로 이상히 여길 횡설수설은 아니니, "영적 죽음"이란 황당한 거짓말에 대척하여 "천사의 복음"을 전하는 오늘날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훌륭한 근거로 삼읍시다. 그래서 "영적 죽음"이란 황당한 거짓말을 쳐부수는 무기/武器로서 이 노자가 멜기세덱이라는 <사실>을 적극 활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킵시다. 그래서 21세기 천사의 복음 전파의 역군/役軍으로 맹활약합시다!

이는 모든 면에서 아주 이상적인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 전파가 계시에 속하지 신학일 수 없고 "신학"은 바벨론 신학의 잔재/殘滓일 뿐이나, 이 경우에서만큼은 예외로 "멜기세덱신학" 또는 독창적인 "한국 신학"(K-theology)으로 세계 만방에 고하여 활용합시다! 마지막 때이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영혼들을 깨우치고 구원해 내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할 때이니까!

누구시든 앞장 서서 공론화시키세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필자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누구든지 주인입니다. 주체의식을 가지고 뛰어듭시다.  

2025년 12월 3일 수요일

춭바벨론기 (2)

21세기 "천사의 복음"(계 14:6)의 하늘 표징으로서 2,500년 전 천사가 다니엘 예언자에게 미리 예고해 준 바로서의 "한 때와 두 때, 반 때"(단 7:25/12:7)라는 기기묘묘한 수수께끼는 5백년이 지난 후의 요한 계시록(같은 21세기를 지목한)에 의해서 또한 재차 확인 절차를 마쳐(계 12:14) 드디어 오늘날 21세기에 때 맞추어 세상에 드러났으니 주님 재림을 코 앞에 둔 바로 이 시대 지금까지의 2천년 해묵은 "바벨론 신학"을 드러내어 그 거짓됨을 파헤치고 있는 이 시점입니다.


고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고 하시는 엄중 경고와 함께 전달되는 종전과는 딴판의 성경 풀이에 일절 동요 없이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재삼재사 강조합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의 천사의 표징과 똑같은 내용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그 진실성이 자체 증명되고 있음입니다.

이는 교회사상 처음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요 성령으로 이미 각 사도들로 말미암아 전파된 것이었고 교회가 이로써 육성되어 나갔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기를"(갈 1:6) 되풀이하던 끝에 완전히 이질화가 되어버린 탓으로 이렇듯 오늘날 "천사의 복음"이 대두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자연 물질계로 국한된 것일 수 없고 짝의 법칙 따라 대칭성을 이루는 완벽한 작품인데 반해 사탄의 옛 에덴 동산에서의 수법 따라 거짓말을 농/하여 에덴·아담을 자연계 물질로만 한정시켜 창조하신 것으로 "온 천하를 속인"(계 12:9) 것입니다. 그 간악한 거짓말의 한 가지 두드러진 예입니다. "영적 죽음"이라든가, "우리를 <대신하신> 죽음"이라든가 등등의 파멸에 이르는 끔찍한 거짓말들입니다. 우리 각자 진실된 복음 전도인이 되십시다. 이 모든 거짓의 미혹으로주터 헤어나오도록 기도의 제사장직 수행에 앞장 섭시다.        (계속)



성경은 처음부터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도 같은 원리를 따라 완성하심을 아래 말씀으로써 달려가는 자라도 충분히 알아보도록 밝혀 두신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성령)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다"(이사야 34:16).

바벨론 신학은 이 양심을 시궁창에 쑤셔 박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벨론 신학은 이 양심을 시궁창에 쑤셔 박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 "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