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31일 일요일

학문적 탐구가 아닌 계시를 통해 (2)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는 인간이 단지 동물적 육체로 전락함에만 그치지 않고죄의 온상/溫床이 되어버린 더 큰 비극에 있습니다. 동물적 육체 자체가, 자연계 생물의 모든 기계 작용(생존에 필수인)의 원동력로서의 바로 자아중심이기 때문. 그러나 말 그대로의 기계적 작동인지라 인간 등 영적 피조물과 같은 자유 의지로 움직임이 없으므로 가인의 아벨 살해와 같은 범죄의 의미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동적 욕구만 일정량 채워지면 그만이기에. 따라서 창조주의 뜻에서 빗나가거나 이를 무위로 돌리는 따위의 일이 없어 처음 창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정상 가동입니다. 다만 아담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 받음으로 인한 후유증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자연계 동물과 다르니원래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지라 선악과를먹은 후의 이 동물적 육체로서의의 자아중심 성향 자체가 바로 죄와 직결되어 그 기폭제 역할을 하는 비극적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는 "욕심"(약 1:15)으로서만 작동되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사람 나자말자 살인죄부터 저지른(가인의 아벨 살해ㅡ그것도 아우가 자기보다 나아 보인다는 열등감 때문에) 것이 그 증거.

이와 같이 아담 범죄후 모든 인간의 육신 자체가 죄의 발화점/發火點이 되어 있는 고로, 가인이 제 아우를 죽여놓고도 "저의 죄벌이 너무 중하니 견딜 수 없습니다...저를 만나는 자가 저를 죽이겠습니다"(4:13 ,14) 하고 호소하자, 하나님이 이를 들으시고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조처를 마련해 주신 것이니, (아담이)선악과를 먹자말자 모든 인간의 몸이 "죄의 몸(the body of sin)"(롬 6:6)이 되어버렸기에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구나!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오호라...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14- 24) 하는 장탄식을 토하게 되는 원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고로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0-22)라 한 것입니다.

이 바울 사도의 설명은, 순종의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니, 조급하게 결론 내리려 하지 말고 찬찬히 앞뒤 문맥을 제대로 살펴야.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을 통해 사탄은 바로 이같은 의미로 슬쩍 돌려 거의 모든 사람을 멸망에 빠뜨려 왔던 것이니 소위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과 "행위(행함)로 얻는 구원"이라는 2분법을 지어내어 "구원"의 의미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혼동시켜버린 것. 행함 없이 무슨 순종이 있고 순종 없이 어찌 생명이 유지된답니까! 창조주의 모든 뜻에 복종함이 피조물된 자의 일차적 책무가 아닌가요!

지금 "죄의 몸"으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는 가장 시급한 것이 <산 자>가 되는 것이지,⁷ 죽은 자로서 그 아무리 순종하여 선한 행위를 한들 일절 무의미함을 바울은 설명한 것입니다. 바로 이 "산 자"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 창조라 합니다. 새로 창조되었다 해서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니니, 창조는 똑같으니까 차별이 없습니다.

고로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경우 사탄 및 악령들처럼 되어 그들과 함께 멸망의 운명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입니다(빌 2:12). 시험 받음은 이 세상에만 한하는 것이며 세상 끝에 "마지막 심판"이 있는 이유입니다. 시험 '기간'과 '장소'로서의 <이 세상>이 종료되면, 다시는 시험이 없으니 인간이든 영물이든 충분히 다 다루어졌기 때문.

우리의 구원(주 예수님의 나 위하신 죽음을 믿음으로써 성령 받아 모심을 인한)은 이같이 <산 자>되기 위함입니다. 죽은 자로서의 "옛 사람" 은 종료되고 "새 사람"으로 다시 출발함입니다. 그런데도 "구원" 자체를 오해하여 마치 <천국 직행>쯤으로 착각하는 이가 거의 전부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아담 창조, 천사 창조와 같은 "새 창조"이니 창조는 똑같고 우리라고 "새 창조"라고 특별 취급해 주시지 않습니다.

똑같이 세상에서 시험 대상이고 아담처럼 불순종일 때 가차 없는 탈락 대상입니다.
아담은 '선악과' 관련인지라 그 죄의 결말이 신령한 몸을 잃는데 그쳤지만, 우리는 모든 지식이 있음에도 이를 멸시한 고의적인 범죄로 분류되니까 악령과 같은 영원 멸망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말씀의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의인"과 "죄인"의 갈랫길을 명확히 갈라내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 :19) 한 바와 같습니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미리 정리해놓기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2:6), "참고 선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영생으로... "당/을 지어...불의를 좇음"(한굴개역은 그러하나 영역으로는 자아중심 "self-seeking"이라 명시)에는 분노로 하신다"(2: 7-9) 한 것입니다. 산 자이니까 순종을 요구하시지, 죽은 자에게 순종을 바라시지 않고 오직 산 자가 되기를 곧
메시야 구세주님을 믿어 구원되기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복종은 구원된 자. 산 자, 성령 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된 자가 그 대상임을 우리 영혼 깊이 아로새겨야.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죄의 몸" 그대로인 채 즉 메시야 우리 주님을 믿어 구원 받음 없이, 제아무리 선행을 하여 순종을 해도(그리스도를 배격한 당시 유대인처럼) 일절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것입니다. 거듭 역섦하지만, 순종의 행위, "참고(인내로써) 선을 행함"(롬 2:7) 자체를 부정한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영생은 선을 행하는 자의 몫이요 영원한 부끄러움의 멸망은 자아중심의 악을 행한 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영원 불변입니다(2 :8-13).

혹자는 이러한 논거를 두고,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13)이라 했으니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행함으로 얻는 구원>으로 구별함이 아니냐" 하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다"(엡 2:1) 한 것입니다.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엄청난 차이. 처음에는 죽은 자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롬 5:12) 곧 이제는 산 자가 아니요 죽은 자이니 행함을 강조해서는 안되고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 자>부터 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산 자>로서의 행함(순종)이 비로소 요구되는 순서입니다. 왜 이런 현격한 차이, 당연한 단계와 순서를 간과히느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아담을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 "죄인"으로 "죽은 자"로서 만드실 리가 만무합니다. 거룩한 의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시초부터 완벽 그 자체이니까. 모든 천사도 그와 같이 창조하셨기에 사탄처럼 범죄치 않은 영물들을 가리켜 성경이 "거룩한 천사" 라 함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똑같이 거룩한 천사로 만드셨음에도 범죄를 하게 되니까 사탄과 기타 많은 악령들 곧 그 추종자도 생겨난 것.

이와 같이 아담을 의인으로 만드셨지만 말씀 곧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죽은 자 즉 동물적 육체로 퇴화/변환되어버려 오늘날까지의 이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의인 아담이 이같이 범죄(불순종)로 죄인으로서의 죽은 자가 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것이 즉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는 것이 산 자부터 되는 것즉 이전의 의인 상태로 환원됨인 것.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모든 명령("뜻"ㅡ마 7:21)에 순종하는 "참고 선을 행함"(롬 2:6,7)이 의당히 요구되는 것이며 또한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매시야 우리 주님 오시기 전에는 이 일이 전적으로 불가능했던 것. 그래서 그 어떤 순종의 행위도 무익하다 곧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진실을 바울 사도는 당시 유대교 사상에 미혹되어 교회 내 분란을 일으킨 이들을 훈육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 범죄의 비참한 결과물로서의 "죄의 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죽지 않는 한 절대로 해결이 나지 않는 것임을 성경은 반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죽은 후 다시 살아나는 데에 구원이 있는 것인즉 때문에 메시야 우리 구세주께서 사람되신 것입니다. 즉 육체로 말미암았던 "첫사람 아담"과 대칭으로 유일무이의 구원의 방법으로서 "마지막 아담"이 되심이요 이로 말미암는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입니다.

곧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 /4:24/골 3:10)됨입니다. <육체>로는 남녀 "한 몸"(창 2:24)됨뿐이나 <영>으로는 "한 영"됨이니까 사람마다 차별 없이 "하나"(요 10 :30)됨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성령으로 남입니다. 왜 둘이 짝을 이룬 하나됨이 우리 구원에 필수이냐 하면, 앞서 지적한 대로 그 죽으심만 아니라 그 부활까지 나의 것이 될 수 있어 내가 직접 죽은 것이 되고 내가 다시 사는 것이 100% 사실 그대로 구현되기에 그렇습니다.

무식하고 거짓말투성인 사탄의 바벨론 신학처럼 메시야의 죽으심만이 우리 구원이 아닙니다. (이 혼돈에서 소위 "대신 죽음"이라는 어슬픈 거짓말도 생겨납니다.) 주님의 부활하심까지가 통틀어 우리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구원의 요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에서는 그 "하나" 구성의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상반/相反은 상보/相補"라는 철벽 구조가 자리잡고 있으니 상반은 짝을 이루었다는 것이요 상보는 그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로서 존재하고 움직인다는 것으로 맞추어집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성경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한 몸"(고전 7:4)됨에서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요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됨인 것. "한 영"에서는 삶 자체가 그러하여, 짝을 이룬 갑과 을 둘이서 갑은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만을 위함입니다.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 영원한 이상향적 삶의 완전무결의 방안입니다.

다시 말해 향후로는 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습니다. 자아중심으로 흐른다는 자책과 자기 반성을 하기 무섭게 급격히 자기 부인으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처럼 회개하지 않을 때, 그 미래가 역시 사탄처럼 운명지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바로 여기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빌 2:12)는 경고가 유효한것입니다.

구원을 아직 못받아서 "이루라"가 아니라이미 받은 구원을 "스스로 지키라"입니다. 아담의 경우라면 허나님이 영생하는 자로 창조하신 그 영생의 위치를 지키라는 것, 하나님 말씀에 지극 정성으로 유의하여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주님 분부하신 대로 문을 두드리고 찾고 구하지 않고 남의 덕에 앉혀서만 영생해보겠다는 안일하고 게으른 탓)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 받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최종 단계에 안착한 그런 단순 의미가 아닙니다. 아담 범죄 전 상태 더 정확히 지적하면 새롭게 창조됨으로써 아담의 창조된 순서를 다시 새롭게 밟아가는 과에 있을 쁜입니다.

단지 차이는 아담 당시는 아담 혼자였고 시험하는 자가 없었으나 우리는 심한 적대적 위치에 있어 많은 시험자와 방해하는 자가 있다는 것. 단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충분히 모든 것에 대비되어 있는 상태로서 전혀 부족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말씀과 경고는 명백하시며 불변이십니다.

오직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시 가인을 대하심(앞서 지적한 바처럼)과 같은 자세를 우리에게도 요구하신다는 점입니다. 즉 악인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그 악을 이기고 용서하며 원수를 사랑함입니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것같으나 사실을 알고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명시하셨듯이 우리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죄도 결단코 용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 흘리신 보혈/寶血로써 이미 나의 모든 죄가 씻겨져 다 남김 없이 용서되어 구원 받은 것이라 즐거워하지만 오늘 이 시간 누구에게든 용서 않는 앙금이 내 마음에 남아 있는 한 나의 죄는 그대로 있고 따라서 구원도 없으니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잃거나 빼앗기는"(눅 9:25) 비극적 참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것만큼은 유동적이라 나의 향후 태도에 전적으로 달렸은즉 세심한 주의가 요망됩니다.

주님 친히 본울 보이시며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알지 못해서 저지르는 향동입니다" 하셨습니다(눅 23:34). "알지 못해서" ㅡ"죄의 몸"(롬 6:6)이 됨으로 인한 비극적결말. 스데반도 죄인들의 돌에 맞아 숨지면서 가장 먼저 그들의 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함을 잊지 않았습니다(행 7:60). 원수 갚으려는 마음, 용서하지 않는 마음 모두 자아중심과 직결되므로 깨끗이 그야말로 황급히 버려야 합니다. 나를 위한 일체의 일은 하나님 몫이지 절대로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다"(롬 12:19) 하심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은 본디부터 별 수 없이 연약하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 곧 멸망시키는 바벨론 신학입니다. 우리는 새 피조물이니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완벽합니다. 강하고 거룩하게 만드시지 결코 약하게 만드신 일이 없으니까. 천하 무적/無敵 "마지막 아담"과 "한 영" (고전 6:17)을 이루어 있기 때문. 하나님 안에서 <강하심>이  세상에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고후 13:4) 것으로 나타난 사실을 우리는 모름지기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도 불가능한 일도 놀랄 일도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어리석은 마음만 버리면 그러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당연히 불가능하나 그 대신 이 한 세상 찰나적으로 잠깐 반짝하자마자 곧장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비애의 영원무궁 속으로 함몰함뿐임을 의식할 때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눅 21:19)이라 하신 경고는 너무나 당연시됩니다.

주님의 나 위하신 죽음은 죄인 사형수의 죽으심이기에 십자가 상의 고난 받으심이었던 것. 그 당시 사형수는 십자가에 못박는 처형 방식이었기에. 우리 인간의 죄와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런 처지의 모습이기에, 바로 이것이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편 7:11) 앞에서의 범죄 타락한 인간의 진정한 실상이기에 그러합니다. 이 실상을 감히 누가 바꿀 것입니까! 누가 감히 변경하여 고칠 것입니까! 우리 각자는 너무 안일하게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 실제 모양새와는 완전 동떨어진 것입니다. 결론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생명 아닌 죽음이라 고난 고통의 처절한 아우성의 불길 속에서 한 사람 두 사람 건져 끌어 올리는 구출의 절박한 현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속에 들어가야 물속에 빠진 자를, 불속에 들어가야 불속에 갇힌 자를 구원해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눈 앞에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은 철저히 실상이 가려진 채로의 겉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되어 지극한 영광을 누릴 피조물이 느닷없이 죽음을 맞아 비참한 몰골로 추락해버렸는데 오죽하겠나요.

성경은 이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롬 8:22)이라 했습니다. 모든 인생들과 함께. 그나마도 구원되지 못한 인생들의 장래는 더 비극적이고 처참하여 그 명칭이 영원한 "불 못"(lake of fire)입니다. 다시 지적합니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히 12:29)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 8). 이 하나님의 품성은 만유의 기본 질서로서의 3위1체 법칙(짝의 법칙)으로써만 이해됩니다. "상반은 상보"로서 짝을 이룬 양자/兩者는 둘이 아닌 하나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이라,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반대 개념이 존재하게 마련. 모순이 아니라 '질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엄/엄위(severity)가 있으니 또 그 정반대인 사랑이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인지라 둘이 동시에 드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양자역학 실험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는 그대로입니다. 전자가 드러나면 후자는 자취도 찾아 볼 수 없고, 후자가 나타나면 전자가 또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면 철두철미 나를 위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역시 그러하시다는 증거가 나 위한 십자가 고난이시니까.)

오로지 사랑만이 있는 것같이 나타나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오로지 위엄의 잔혹성만 있는 것처럼 나타나십니다. 따라서 사랑 일변도로만 생명의 법칙대로 나가면 마치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사랑으로 진행되는 법입니다(롬 11: 22). 우리의 선택에 좌우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만이 불변일 것이요 이와 반대로 나가면 역시 그와 반대로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사물의 이치입니다.

우리가 현재 받는 <하나님 앞 사형수>로서의 모든 고난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을 "내 몸에 채움"이니 잠자코 감사히 <인내>하여 수용함이 바로 사랑의 영역입니다. 달리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달리 다른 생각에 사로잡힐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 무한한 장래는 <사랑의 생명>뿐이니까. "원수 사랑" 도 그렇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시니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일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계속)

2025년 8월 29일 금요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학문적 탐구가 아닌 계시를 통해 순수한 은혜로 알아지는 것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 다시 말해 동시에 거짓을 말씀하실 리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영생)을 창조하시지 동시에 죽음을 창조하실 리 없습니다. 다시 말해 죽는 존재로서 인간(아담)을 처음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은 창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모순이요 따라서 무의미한 말로 끝납니다. 그런 것은 거짓말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처음 창조하신 것인데,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 신령한 몸을 "잃었고" "빼앗긴"(눅 9:25)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런 동물적 육체가 된 것인데 이 경우, "동물적 육체로 환원되었다"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이유는 애시당초 아담의 동물성 육체(나중에 에덴에 들어가서 신령한 몸으로 진화/변환된)와, 범죄 후의 동물성 육체(범죄로 그 신령한 몸을 잃어버림으로써 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

즉 예컨대 발람의 경우 앞에 길을 가로막고 있는 영물(천사)을 보지 못했으나 나귀의 눈에는 확실히 보여 길을 피하려고 했음과 같습니다(민수기 22:31). 이는 하나님 창조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로서 아담이 일단 동물적 육체를 벗어나 신령한 몸으로 정착되었으므로 다시 동물적 육체로 되돌아갈 일이 없이 일단락된 때문. 따라서 아담의 불순종(범죄)에 의한 동물적 육체는 순수한 돌발 사태로서 별도의 사건이었던 것임에 유의해야 합니다.

때문에 이를 가리켜 성경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 한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고의 원인으로서 썩고 죽게 마련인 동물적 육체로 삽시간에 퇴화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왜 유식한 척 잘난 체하여 "영적" 죽음이라는 토를 부질없이 다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교만, 오만방자함에서 비롯됩니다. 인류의 최초 범죄도 "하나님의 거짓말에 속지 않고 그래도 나는 똑똑하다"는 여자의 허영심을 악마가 부추겼기 때문(창 3:4- 6).

다른 말로 바꾸면, 영생 구원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마 18:3) 절대로, 결단코 불가능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어린 아이들에게만 나타내시고"(마 11:25) 남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알고 있다는 자만심에 겨워 있는 자들에게는 일부러 "숨기신다"는 무서운 사실부터 직면해야 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의 주인공만 될 운명뿐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이런 어린 아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간단 명료한 언어로 일부러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에 늦게나마 소스라치게 깨달아 아는 자만이 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단 한 명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교만할 줄 모릅니다. 말씀 그대로 사실 그대로 수용하고 그 단도직입적 본성을 따라 믿고 순종할 따름입니다. 타고 난 겸손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런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하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가 죽으면 무조건 영생 구원인가 하겠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아담 범죄로 모든 인간은 "죄의 몸"(롬 6:6)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사탄의 거짓말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혼동시킴에서도 드러나

오늘날 21세기 "바벨론"(계 18:4) 탈출을 명령하심은 사탄의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에서 벗어나라 하심입니다. 그 가장 핵심되는 것이 인간읗 처음부터 "죽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말도 되지 않는 궤변입니다. 왜 말이 될 수 없느냐, 죽음은 생명의 반대 개념으로서 서로 양립해 짝을 이루기 때문. 반대되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생겨날  수 없음이니, 상반되는 '진실'과 '거짓'이 동시에 말해질 수 없는 선후/先後, 인과/因果, 주종/主從 관계에 있기에 그러합니다. 창조주의 권역/圈域은 오직 생명입니다. 피조물에 속한 것이 죽음임을 명심해야. (자연계 생물의 "죽음"은 범죄로 죽음을 맞은 인간을 빗대어 묘사함일 뿐이지 실제는 죽음이 아니라 일종의 신진대사이니, 고양이, 개 등은 지금도 처음 창조된 그 모습 그대로 불변입니다.


거짓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처럼 죽음은 생명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라 이렇게 상반되는 것을 동시에 창조하실 리 만무한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창조는 "오직 진실", "오직 생명"이라는 데에서만 의의가 있는 법이니 두 번 다시 "인간은 죽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탄의 거짓말을 추종하지 말 것을 지금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엄중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을 감히 거짓말로 둔갑시키는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심판 아래 가차 없이 처단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눈 감아 주셨으나 이제 시대가 변했습니다. 만물은 반드시 "때"(전도서 3: 1)를 따라 작동합니다. 

2025년 8월 27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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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명이 일정하게 고르지 않고 들쑥날쑥인 것 자체가 모든 인생을 원도한도 없도록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증거임을 재차 강조

 21세기 "바벨론 탈출"(계 18:4)에서 사탄이 지금까지 숨겨 온 '진실'과 '진리"를 알리는 것이 메시야 우리 주님의 <몸된 교회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의 각자 책무입니다. 그 외의 그 무엇이든 즉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 무의미하고 시간 낭비의 무익한 일일 뿐입니다. 내 시간 즉 내가 마음대로 하는 나의 소유가 아닌 주님께 영원히 바친 <하나님의 시간>이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한 때나마 이세상에서 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나의 시간, 나의 운동력이 아닌 것이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난 모든 구원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일관된 <오직 단 하나의> 자세인 것입니다.

나 자신 오직 하나님의 소유가 됨으로써(주님의 소유 곧 그 죽으심과 부활이 내 소유가 되어 나의 죄 용서와 내 영혼 구원의 바탕이 이뤄졌으므로)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위하여 "그 뜻을 행하는"(마 7:21) 것이 내게는 생명, 삶 그 자체이기에 단지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하고"(딤전 6:8), 그 이상 잘 먹고 잘 입으려 함은 자아중심인지라 죄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명령을 따라 생업/生業은 가지되 그 목적이 부자되어 잘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삶의 <때>도 아니요 삶의 <터전>도 아닌 오직 "죽음"의 <시기>와 그 <장소>일 따름이기에. 그래서 "그 죽음의 십자가 제각기 지고, 같은 십자가를 진 나를 따라오라"(눅 9:23)고 명령하신 것. 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움"(골 1:24)이라 한 것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삶'도 "생명'도 아닙니다. 죄가 수반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이 세상은 한결같이 죄와 고통이 떠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담 범죄 후 지금까지 인간 세상은 삶과 생명이 되어 본 역사가 없습니다. 몰라서, 사탄에게 속아서, 삶이요 생명인 줄 착각해 왔을 따름입니다. 고로 전도는 이 기본되는 실상을 제대로 정직하게 세상에 알리는 일입니다. 이 진실을 터득 못하고 여전히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살고 부자로 지내다가 영생도 얻는다는 멍상 자체가 그 평생에 구원된 역사가 없었다는 즉 성령 받아 모신 적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삶과 생명에는 반드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르시게 마련. 아담이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할 때 그렇게 축복하셨고 노아 대홍수로 세상을 멸절하시고 노아의 8식구로써 세상이 다시 시작되게 하실 때도 그렇게 축복하신 것이나, 아담 때의 축복은 말 그대로의 축복이시지만, 노아 당시의 축복은 <삶 자체>를 <생명>으로 인정해 주심이 아니라, 멸절이 아닌 <생존> 즉 특정 목적을 위해 시한부로 목숨만 간댕거릴 정도로 붙여 두심만을 의미하는 극히 제한적 "복 베푸심"이었던 것.

왜냐면 아담 범죄로 생명은 사라지고 죽음이 대신하게 된 까닭.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창 3:17)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사람으로서의 영광을 잃고(눅 9:25) 땅의 사람으로서 동물적 육체로 변환된 것은 고사하고, 땅을 토대로 하여 살아야 하는 그 "땅"마저 저주를 받았으니 진실로 발붙일 데가 없는 오늘날까지의 철저한 파국 아래 갇힌 인생들임을 이로써도 확인하게 됩니다.

범죄 전에는 아담이 하늘의 사람으로서 신령한 몸이었으나 그래서 애초 창조된 대로의 땅의 영광에 경탄을 금치 못했었는데, 지금은 황폐된 폐허로서의(저주 받아) 땅이 현재 우리가 아는 이 지상 세계입니다. 저주 받지 않았을 때의 자연계 영광은 아담 부부 외에는 그 어떤 인간도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변치 않는 속성의 영계(초자연계)만 제외하고는 나머지 하나님 창조의 피조물 세계는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된 것입니다.

단 찰나적인 삶이나마 생명의 맛을 보게 하실 의향이셨다면 아담 당시의 인생들은 천년 가까이 수명을 누리게 하시는 불평등/불공정을 조장하실 리 만무합니다. 지금까지도 똑같이 8,9백수를 누리게 하셨을 것입니다.그렇게 아니하신 것은, 아담 시대인들의 특징이 아담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생하도록 된 충만한 기력/氣力이 얼마간 잔존해 있었고 그 힘이 서서히 시간을 두고서 쇠퇴해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증거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생을 천년 가까이 생존시키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2025년 8월 24일 일요일

오늘날 21세기 성령으로 난 것인지 여부를 가름하는 척도는 단 하나

 오늘날 21세기 성령의 역사하심의 특징은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기록한 말씀"(고전 4:6) 위주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高尙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17:11,12). 오늘날은 사탄의 최후 발악으로 하나님으로서 자처하여 가장하는 때이므로 <초자연적> 능력 나타내기를 극성스럽게 모방하는 시대입니다.


"방언", "신유/神癒" 등이 이에 속하고 요즘 성행하는 소위 "임사/체험"이 그런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죽었는데 어떠어떠한 체험을 하고 나니 다시 살아나게 되어 이에 전달한다" 따위. 주님의 재림이 박두한 확실한 증거로서 마귀가 최후 발악을 하여 하나님으로 자처해 가장하는 때라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모든 것이 "성령"의 이름으로 나타내어지시는 진실된 하나님 역사라면 반드시 21세기 "바벨론 탈출"(계 18:4)의 하나님의 분부 메시지와 연동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즉 인간(아담)을 애초 영생하는(죽지 않는) "신령한 몸"(고전 15:44), "영광의 몸"(빌 3:21)으로 창조하셨는데도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이렇게 동물적 육체가 되었음을 알리게 마련인 것입니다. "한 성령", "한 하나님", "한 주"(엡 4:4,5,6)이시기 때문. 

2025년 8월 18일 월요일

세상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 된 무서운 실상으로부터 깨어나지 않는 한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대오각성은 기대 난망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하신 것입니다. 완벽하시다 함은 한 번에 처리하시어 완성하시지, 두고두고 딘계별로 정하시거나  그런 과정의 기간을 두시어 쉬엄쉬엄 하신다거나 또는 지체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령 처음에는 인간을 동물적 육체로 일단 만드셨다가 다음 단계로 그 추이를 보아 신령한 육체로 진화 또는 변환시키신다거나 하는 일이 없으시다는 뜻. 인간(아담)은 이미 그런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즉 모든 동물 창조의 절정(킅라이맥스)이 사람 창조이셨으니까. 이러한 인간을 다른 동물과는 완연히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으니까.


이런 형상으로 만드신 목적이, 이미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물을 관할하게(창 1:26, 28/2:15) 하심이었으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닮도록 아담에게 영원성의 영혼을 조성하셨고(2:7) 이 영원한 영혼에 걸맞게 영계/靈界인 에덴에다 특별한 동산을 창설하시어 아담을 거기 두심으로써 "신령한 몸"(고전 15:44), "영광의 몸"(빌 3:21)으로 진척되게 하신 것이니까.

자연계 물질의 몸은 그러하신 목적에 신령한 세계에 부적합한 것이기에. 나중에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범법/犯法으로 먹게 되어 다시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림으로 인해 그 영계(초자연계)로부터 부득불 추방/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이 "흙으로 돌아가는"(3:19) 허무한 육체였던 것입니다. 같은 동물적 육체라도 아담이 에덴에 들어가기 전과, 들어간 후 추방되어 나온 다음의 것이 또 완연히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정상>이고 후자는 <비정상>이라는 현저한 간격입니다.

그 결과의 한 가지 예로서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정상적인> 동물의 육체로서 발람의 나귀는 영물/靈物(천사)을 즉각 알아본 반면 <비정상의> 발람의 인간 육체는 그 천사가 초능력으로 눈을 "밝게 해 줌"으로써만 비로소 그 천사가 칼을 빼어 들고 서 있음을 목도한 것입니다(민 22:31).

고양이가 귀신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도 높은 민감성을 지녀 예로부터 "영물"이라는 소리를 들어 오는 것도 이에 기인하는 것이라 보겠고, 구미/歐美의 동영상에 NSO(Nephilim Soul Orb, 네필림의 망령 즉 귀신의 본체)가 떼를 지어 희끄무레한 구체/球體로 난잡스럽게 떠돌아 다니는 장면에서 고양이가 유달리 한 쪽 구석을 유난히 계속 응시하는 특이 현상을 보임도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까마귀가 귀신을 본다"는 우리 속설/俗說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이상 설명은 인간이 애초부터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것이지, 잘대로 이런 나약한 즉 '죽음'의 표적이 되고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뿌리가 되는 동물적 육체로 만드시지 않았다는 확고부동의 증거인 것입니다. 사탄의 악마적인 거짓말이 지어낸 속임수인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 사실부터 마귀는 <이 세상 통치 차원>에서 속였던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라"(게 18:4) 하시는 하나님의 21세기 먕령은 바로 이런 악랄한 바벨론 신학의 척결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시작되면서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참담한 비극적 실상이 아담 범죄호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크게 나누어 인간의 동물적인 육체요 사탄의 이 세상 지배 즉 무차별적 인간 압제/압박인 걱입니다. 엎친 데에또 덮친 격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이 처처에서의 아우성이 끊이지 않는 목불인견의 아수라장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는 천국길이 너무나 험난한 것입니다. 

2025년 8월 7일 목요일

요약해서 "바벨론 탈출"이 무엇인가 (2)

 



소돔/고모라 탈출이나 "바벨론 탈출"이나 탈출의 성격은 같으니 역사는 되풀이된다ㅡ주님의 엄중하신 경고도 반복되신다



"바벨론 탈출"


21세기 "바벨론 탈출"(계 18:4)의 시점에 즈음하여 오늘날 올바른 복음 전파가 가능하도록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애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셨다. 능력 많은 즉 초자연계 존재로 초능력을 구사하는 천사들이라도 그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아니다. 그 실례가 바로 용/龍이니 곧 자연계 생물의 뱀에 해당된다. 그를 만드신 주님께서 "뱀이 지혜롭다"(마 10:16) 하셨은즉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 그런 창조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아닌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의미는 실로 대단하다.

그런 하나님의 <대리자>로 아담을 만드시면서 죽어 썩어 흉물스러운 해골 뼉다귀로 남을 자연계 물질의 육체로 만드셨겠는가! 차라리 그렇게 하실 바애야 인간을 하나님 형상으로 만드실 생각부터 아니하셨을 것이다. 썩어 흉하게 진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꼴불견을 대할 때마다 피조물(영물들)은 하나님을 그와 같은 것으로 연상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 사람들아! 그리도 생각이 없는가! 그리도 철부지하여 아담을 썩는 육체로 만드셨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이제껏 농락당하는가! 정신 똑바로 차릴 일이다!

하나님은 그 지으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실"(창 1:26) 목적으로 아담을 지으셨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 영광의 몸으로 만드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현재의 모든 인간고/人間苦는 아담이 범죄하여 처음의 동물적 육체로 되돌아가버린 탓, 오직 그 이유 밖에 없다. 처음에는 모든 자연계 생물 창조의 절정(클라이맥스)으로서의 육체였기에 그러했으나 사람 안에 영원성의 영혼을 조성하시면서 거기 걸맞도록 에덴에 별도의 보금자리("동산")를 창설하시어 거기서 신령한 몸(영광의 몸)으로 아담을 진화/進化, 변형, 변신시키신 것이다.

선악/善惡 즉 자기에게 <좋고> <나쁜>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 "선악 분변의 지식"(2 :9,17)인 것이며 이는 자연계 동식물이 하나님이 장치하심을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하고 작용하는 생존 본능을 말함이다. 그러나 이 선한 본능은 인간에게 적용되면 자아중심의 의미이기에, 악의 근원으로 작동될 수밖에 없어 이것이 로마서 7장에 설명하는 바 "죄와 사망의 법"(롬 8:2)인 것이다.

신령한 몸인 사람(아담)은 이런 본능적 지식이 아닌 사랑의 자유 의지로써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그 모든 뜻대로 사는 삶이라 생명의 법칙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 사람(아담) 등 영물은 그 영적 펀단으로 오직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으로 영위되는 삶이니 영물(천사)들도 그 모든 초능력의 지식으로 아담을 보좌함이 목적이었던 것. 아담은 또한 그 통치력으로 영물들을 위함이었다. 즉 그들의 화합과 조화의 구심력이었다.

이와 같이 동물적 육체로서 당하는 모든 고통이 동물적 육체가 됨으로 인한 것이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음이다" (롬 5:12). 이 얼마나 단순 명료한 전도의 메시지인가! "고로 죄로써 이런 불행의 표적이 되어버렸으니 절대로 죄짓지 말라, 아담이 사탄에게 끌려 이 꼴이 되어 세상이 이 악마의 판도/版圖라 마귀의 천하가 되었은즉 어리석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일(영원한 가치와 보람의)만을 하라"ㅡ이 얼마나 이치에 맞는 복음(영생할 수 있는 구체적 생활 지침)인가.

하나님을 사랑이라 선전하면서 현재의 인간고를 설명 못해 결과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고해/苦海의 근본인 양 역선전해대는 꼴이니 이 무슨 난장판인가! 뒤죽박죽인가!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어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에만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나도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리라는 결의의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된"(마 18:3) 이들 외, 누가 이치적으로 판단해 설득되어 확신에 이를 정도로 전도가 되겠는가말이다!  사탄이 얼마나 박장대소 하며 좋아하겠는가!

자연계가 있으니, 이 자연계 존재 자체가 초자연계가 존재한다는 바로 그 정확무오의 증거다. 이것이 짝의 법칙 그 특성 중 하나다. 가시 세계가 있음 자체가 비가시적 세계 엄존의 확증이다. 결과가 있으니 원인은 천하 없어도 있게 마련이다. 바보 짓으로부터 탈피하라. 사탄의 거짓말로부터 탈출하라고(계 18:4) 오늘날 명령하신다!

이것이 모든 복음 전도와 교회 설교의 뼈대다. 여기서 벗어난 그 무엇이든 가증스러운 사탄의 거짓말에 장단 맞춤이요 그 나팔수 노릇이다. 이제까지는 몰라서 그랬다고 치자. 그러나 오늘날 21세기는 "바벨론 탈출"이라는 명명백백하신 하나님의 뜻이 백일하에 드러나셨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명령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으로 모든 것은 가름되어질 것이니 명심하시기를. 이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거든 밤을 새워서라도 성경을 탐독하며 얍복강의 야곱처럼 씨름 하시라! 그리고 양단간의 결단을 하시라! 영원한 운명이 여기서 좌우됨이니까!

그리고 그 사마리아 "수가"(요 4:5)사람들처럼 되시기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42). 특정인을 두고 "아무개 말을 믿기 때문에 나도 믿는다"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이런 소리가 있기에 '과연 그런가 하고'(행 17:11) 성경을 다시 읽고 살펴본 결과 확신을 얻어 이에 전한다"가 정상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자세이다.


삼문자(영문 알파벹 F, V, Z, L 등의 표기)

 

삼문자/森文字(Sam Alphabet)에서, 된소리(ㅆ, ㄸ, ㅃ 등) 낼 때처럼 2중자음/쌍자음(동시에 또한 이응을 "보조자음"으로 활용)을 만들어 쓰면V=ㅇㅂ, F=ㅇㅍ, Z=ㅇㅈ, L=ㅇㄹ 또는 ㄹㄹ,TH(three)=ㅇㅅ, TH(the)=ㅇㄷ 등으로 영문 알파벹을 나타낼 수 있다.

기타 문자의 알파벹도 한글 자음으로 표기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때 위와 같은 형태로 2중자음이나 쌍자음을 민들어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쓰지 않는 훈민정음의 네 글자를 굳이 복원시킬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다. 이와 같이 이응 자음을 보조자음으로 활용하면(모음에서 보조모음을 활용하듯) 현재의 자음 14개로써 충분하고 더 늘일 필요가 없다.

자모음의 형태는 단출할수록 좋고 갯수가 많다고 반드시 이로운 것은 아니기에. 삼문자에서 이 같이했으나 자음들을 폭넓게 활용함으로써 빚어지는 혼동은 그 사이에 보조모음을 끼워 넣어 식별이 용이하게 할 수 있으니, 예컨대 "ㅋ ㅗ ㅇ ㅇㅂ ㅜ(kongfu) 이면 "ㅋ ㅗ ㅇ ㅣ(보조모음) ㅇㅂ ㅜ"가 되게 함으로써 해결이 된다. 보조모음은 모음을 오직 보조하는 것이니까 자음 사이에 끼어드는 법이 없으므로 <자음 식별 역할>임을 곧장 알아차리게 된다. 따라서 삼문자의 보조모음은 모음과 자음에 두루 쓰이는 팔방미인 격이라 하겠다.

* 삼문자 표기에서, "아우어"의 발음은 영문 "ah, uh, eh"와 같고 "아ㅜㅓ"의 발음은 영문 "our"와 같으므로 명확히 구별이될 수 있다. 한글 표기로는 이런 차이를 나타낼 수 없다.

* 삼문자는 초성/중성/종성의 구조가 아니므로 한글처럼 ㄲ, ㄸ 등으로 독립된 자음처럼 만들지 않고 그냥 해당 자음을 연달아 표기해 나가면 된다. ㄲ→ㄱㄱ,
→ㄷㄷ, →ㅈㅈ, →ㅂㅂ, →ㅅㅅ.

* 이상과 같이 자음이 많이 나열되는 결과라 문자 식별이 어렵지 않을까 싶지만, 모음의 형태가 "상반/相反은 상보/相補"라는 짝의 법칙을 따라 각 모음의 꼬리가 예외 없이 모두 하늘 아니면 땅을 가리켜 뻗어 있는 고로 그런 염려는 기우에 속한다.
유일하게 꼬리가 없는 것이 "보조모음"이다.

* 삼문자의 "삼/森"은 "3위1체"의 3을 상징하여 나무 "목/木"이 셋으로서 세 발(3각/脚을 형성하고 있다. 안정성을 상징한다. 3위1체의 "3" 곧 짝을 이룬 둘의 "하나"(요한복음 10:30)됨을 가리키니 그 '중심/中心'인 것이다. 여기서 장절/章節까지도 1030 즉 '1'과 "3'이라 기억하기도 좋으니 만물의 조화는 이 3위1체의 "하나"됨에 있음이다.

이 하나됨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 그러니 말 다 한 것이다. 여기서 소위 수비학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것에 던혀 관심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존재하시는 모습으로서의 3위1체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만유 창조와 운행의 기본율/基本律 즉 만유의 기본 대법칙으로서의 3위1체의 원리 곧 짝의 법칙을 말함이다. 짝의 법칙은 성경의 근간/根幹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神(성령)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한류 바람을 타고 한글의 과학성의 위대함에 전세계가 비로소 눈 뜨고 있는 오늘날 각 민족과 종족이 자기 언어를 문자화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가히 그 절정에 있다. 이 한글을 기반으로 한 삼문자이니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 전달에 그 일익/一翼을 담당할 줄로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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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5일 화요일

요약해서 "바벨론 탈출"이 무엇인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 것(소유/所有)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다" (롬 14:7-9).

"이를 위하여"ㅡ여기가 핵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닙니다. 여기 그런 말은 없으니까. 그 대신 "우리를 자기 것(소유)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우리가 아는 터에, 다음 결론을 내립니다. 즉 구원된 자는 주님의 소유가 되고 주님의 소유가 됨이 곧 구원이라고.

이는 사랑으로 하나됨을 말합니다. 이를 성경은 "한 영"(고전 6:17)됨이라 표현합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주님과 "하나"(요 10:30)가 됨을 의미하고 이 "하나"는 주님의 말씀,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제것"(17:10)이라 하신 그대로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나의 죽음이 또한 주님의 것이 됨으로써 주님께서 동물적 육체가 되시어 나 위한 죄인의 죽으심을 죽으신 것.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이 다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여 영생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이 나의 것이 되어 있음과 같이 나 자신도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값(주님이 나 위해 흘리신 생명의 보혈/寶血) 주고 나를 사들이심으로써 나를 자기 소유로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인 바, 그러면 묻겠습니다. 현재 구원된 나의 삶이 주님의 것입니까?

자아중심인가요, 아니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고 확언할 수 있는지어느 쪽인가 분명히 대답합시다! 이제까지 이런 측면에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나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여전히 살아가면서 말만 "나는 구원 받았다"며 좋아했다는 것인가요? 그 러면 단정코 결론을 내립니다. 당신은 구원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그말씀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인데, 이 동일한 말씀으로 확정적으로 단언하거니와 당신은 자기 기만/欺瞞으로 일관해 왔을 따름입니다. 초자연적 현상을 나타내어 소위 "방언"도 하고 "능력을 나타내어도"(마 7:22) 심판대 앞에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23) 하시는 선고만 받을 것임을 이 자리에서 단언합니다.

판단 기준은 명확합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써 누구나 판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 나타내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하셨습니다(눅 6: 43,44). 열매는 자기 자신도 남도 속일 수 없고 정직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아 온 자아중심이 그 명명백백한 증거입니다. "로마서 7장이 그리스도인의 불가피한 삶이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것이 부정 못하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 모든 거짓과 속임수의 "바벨론"에서 화급히 탈출하시기를(계 18:4)!

  

세상 최고의 강자들(하나님 아들들)이 쓰는 천하무적의 무기(무술)

유한한 우리 인생들이라 그 하는 일도 유한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 이 말씀하시기를, "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1,42) 하셨으니 "몇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