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는 인간이 단지 동물적 육체로 전락함에만 그치지 않고죄의 온상/溫床이 되어버린 더 큰 비극에 있습니다. 동물적 육체 자체가, 자연계 생물의 모든 기계 작용(생존에 필수인)의 원동력로서의 바로 자아중심이기 때문. 그러나 말 그대로의 기계적 작동인지라 인간 등 영적 피조물과 같은 자유 의지로 움직임이 없으므로 가인의 아벨 살해와 같은 범죄의 의미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동적 욕구만 일정량 채워지면 그만이기에. 따라서 창조주의 뜻에서 빗나가거나 이를 무위로 돌리는 따위의 일이 없어 처음 창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정상 가동입니다. 다만 아담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 받음으로 인한 후유증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런 자연계 동물과 다르니원래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지라 선악과를먹은 후의 이 동물적 육체로서의의 자아중심 성향 자체가 바로 죄와 직결되어 그 기폭제 역할을 하는 비극적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는 "욕심"(약 1:15)으로서만 작동되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사람 나자말자 살인죄부터 저지른(가인의 아벨 살해ㅡ그것도 아우가 자기보다 나아 보인다는 열등감 때문에) 것이 그 증거.
이와 같이 아담 범죄후 모든 인간의 육신 자체가 죄의 발화점/發火點이 되어 있는 고로, 가인이 제 아우를 죽여놓고도 "저의 죄벌이 너무 중하니 견딜 수 없습니다...저를 만나는 자가 저를 죽이겠습니다"(4:13 ,14) 하고 호소하자, 하나님이 이를 들으시고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조처를 마련해 주신 것이니, (아담이)선악과를 먹자말자 모든 인간의 몸이 "죄의 몸(the body of sin)"(롬 6:6)이 되어버렸기에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구나!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오호라...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14- 24) 하는 장탄식을 토하게 되는 원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고로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0-22)라 한 것입니다.
이 바울 사도의 설명은, 순종의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니, 조급하게 결론 내리려 하지 말고 찬찬히 앞뒤 문맥을 제대로 살펴야.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을 통해 사탄은 바로 이같은 의미로 슬쩍 돌려 거의 모든 사람을 멸망에 빠뜨려 왔던 것이니 소위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과 "행위(행함)로 얻는 구원"이라는 2분법을 지어내어 "구원"의 의미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혼동시켜버린 것. 행함 없이 무슨 순종이 있고 순종 없이 어찌 생명이 유지된답니까! 창조주의 모든 뜻에 복종함이 피조물된 자의 일차적 책무가 아닌가요!
지금 "죄의 몸"으로 죽어 있는 상태에서는 가장 시급한 것이 <산 자>가 되는 것이지,⁷ 죽은 자로서 그 아무리 순종하여 선한 행위를 한들 일절 무의미함을 바울은 설명한 것입니다. 바로 이 "산 자"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 창조라 합니다. 새로 창조되었다 해서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니니, 창조는 똑같으니까 차별이 없습니다.
고로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경우 사탄 및 악령들처럼 되어 그들과 함께 멸망의 운명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입니다(빌 2:12). 시험 받음은 이 세상에만 한하는 것이며 세상 끝에 "마지막 심판"이 있는 이유입니다. 시험 '기간'과 '장소'로서의 <이 세상>이 종료되면, 다시는 시험이 없으니 인간이든 영물이든 충분히 다 다루어졌기 때문.
우리의 구원(주 예수님의 나 위하신 죽음을 믿음으로써 성령 받아 모심을 인한)은 이같이 <산 자>되기 위함입니다. 죽은 자로서의 "옛 사람" 은 종료되고 "새 사람"으로 다시 출발함입니다. 그런데도 "구원" 자체를 오해하여 마치 <천국 직행>쯤으로 착각하는 이가 거의 전부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아담 창조, 천사 창조와 같은 "새 창조"이니 창조는 똑같고 우리라고 "새 창조"라고 특별 취급해 주시지 않습니다.
똑같이 세상에서 시험 대상이고 아담처럼 불순종일 때 가차 없는 탈락 대상입니다.
아담은 '선악과' 관련인지라 그 죄의 결말이 신령한 몸을 잃는데 그쳤지만, 우리는 모든 지식이 있음에도 이를 멸시한 고의적인 범죄로 분류되니까 악령과 같은 영원 멸망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말씀의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의인"과 "죄인"의 갈랫길을 명확히 갈라내어,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 :19) 한 바와 같습니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미리 정리해놓기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2:6), "참고 선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영생으로... "당/黨을 지어...불의를 좇음"(한굴개역은 그러하나 영역으로는 자아중심 즉 "self-seeking"이라 명시)에는 분노로 하신다"(2: 7-9) 한 것입니다. 산 자이니까 순종을 요구하시지, 죽은 자에게 순종을 바라시지 않고 오직 산 자가 되기를 곧
메시야 구세주님을 믿어 구원되기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복종은 구원된 자. 산 자, 성령 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된 자가 그 대상임을 우리 영혼 깊이 아로새겨야.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죄의 몸" 그대로인 채 즉 메시야 우리 주님을 믿어 구원 받음 없이, 제아무리 선행을 하여 순종을 해도(그리스도를 배격한 당시 유대인처럼) 일절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것입니다. 거듭 역섦하지만, 순종의 행위, "참고(인내로써) 선을 행함"(롬 2:7) 자체를 부정한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영생은 선을 행하는 자의 몫이요 영원한 부끄러움의 멸망은 자아중심의 악을 행한 자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영원 불변입니다(2 :8-13).
혹자는 이러한 논거를 두고,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13)이라 했으니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행함으로 얻는 구원>으로 구별함이 아니냐" 하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다"(엡 2:1) 한 것입니다.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엄청난 차이. 처음에는 죽은 자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롬 5:12) 곧 이제는 산 자가 아니요 죽은 자이니 행함을 강조해서는 안되고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 자>부터 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산 자>로서의 행함(순종)이 비로소 요구되는 순서입니다. 왜 이런 현격한 차이, 당연한 단계와 순서를 간과히느냐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아담을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 "죄인"으로 "죽은 자"로서 만드실 리가 만무합니다. 거룩한 의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시초부터 완벽 그 자체이니까. 모든 천사도 그와 같이 창조하셨기에 사탄처럼 범죄치 않은 영물들을 가리켜 성경이 "거룩한 천사" 라 함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똑같이 거룩한 천사로 만드셨음에도 범죄를 하게 되니까 사탄과 기타 많은 악령들 곧 그 추종자도 생겨난 것.
이와 같이 아담을 의인으로 만드셨지만 말씀 곧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죽은 자 즉 동물적 육체로 퇴화/변환되어버려 오늘날까지의 이같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의인 아담이 이같이 범죄(불순종)로 죄인으로서의 죽은 자가 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것이 즉 발등에 떨어진 불 끄는 것이 산 자부터 되는 것즉 이전의 의인 상태로 환원됨인 것.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모든 명령("뜻"ㅡ마 7:21)에 순종하는 "참고 선을 행함"(롬 2:6,7)이 의당히 요구되는 것이며 또한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매시야 우리 주님 오시기 전에는 이 일이 전적으로 불가능했던 것. 그래서 그 어떤 순종의 행위도 무익하다 곧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진실을 바울 사도는 당시 유대교 사상에 미혹되어 교회 내 분란을 일으킨 이들을 훈육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 범죄의 비참한 결과물로서의 "죄의 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죽지 않는 한 절대로 해결이 나지 않는 것임을 성경은 반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죽은 후 다시 살아나는 데에 구원이 있는 것인즉 때문에 메시야 우리 구세주께서 사람되신 것입니다. 즉 육체로 말미암았던 "첫사람 아담"과 대칭으로 유일무이의 구원의 방법으로서 "마지막 아담"이 되심이요 이로 말미암는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입니다.
곧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 /4:24/골 3:10)됨입니다. <육체>로는 남녀 "한 몸"(창 2:24)됨뿐이나 <영>으로는 "한 영"됨이니까 사람마다 차별 없이 "하나"(요 10 :30)됨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성령으로 남입니다. 왜 둘이 짝을 이룬 하나됨이 우리 구원에 필수이냐 하면, 앞서 지적한 대로 그 죽으심만 아니라 그 부활까지 나의 것이 될 수 있어 내가 직접 죽은 것이 되고 내가 다시 사는 것이 100% 사실 그대로 구현되기에 그렇습니다.
무식하고 거짓말투성인 사탄의 바벨론 신학처럼 메시야의 죽으심만이 우리 구원이 아닙니다. (이 혼돈에서 소위 "대신 죽음"이라는 어슬픈 거짓말도 생겨납니다.) 주님의 부활하심까지가 통틀어 우리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구원의 요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에서는 그 "하나" 구성의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상반/相反은 상보/相補"라는 철벽 구조가 자리잡고 있으니 상반은 짝을 이루었다는 것이요 상보는 그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로서 존재하고 움직인다는 것으로 맞추어집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성경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한 몸"(고전 7:4)됨에서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요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됨인 것. "한 영"에서는 삶 자체가 그러하여, 짝을 이룬 갑과 을 둘이서 갑은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만을 위함입니다.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 영원한 이상향적 삶의 완전무결의 방안입니다.
다시 말해 향후로는 죄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습니다. 자아중심으로 흐른다는 자책과 자기 반성을 하기 무섭게 급격히 자기 부인으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처럼 회개하지 않을 때, 그 미래가 역시 사탄처럼 운명지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바로 여기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 (빌 2:12)는 경고가 유효한것입니다.
구원을 아직 못받아서 "이루라"가 아니라이미 받은 구원을 "스스로 지키라"입니다. 아담의 경우라면 허나님이 영생하는 자로 창조하신 그 영생의 위치를 지키라는 것, 하나님 말씀에 지극 정성으로 유의하여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주님 분부하신 대로 문을 두드리고 찾고 구하지 않고 남의 덕에 앉혀서만 영생해보겠다는 안일하고 게으른 탓)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 받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최종 단계에 안착한 그런 단순 의미가 아닙니다. 아담 범죄 전 상태 더 정확히 지적하면 새롭게 창조됨으로써 아담의 창조된 순서를 다시 새롭게 밟아가는 과정에 있을 쁜입니다.
단지 차이는 아담 당시는 아담 혼자였고 시험하는 자가 없었으나 우리는 심한 적대적 위치에 있어 많은 시험자와 방해하는 자가 있다는 것. 단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충분히 모든 것에 대비되어 있는 상태로서 전혀 부족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말씀과 경고는 명백하시며 불변이십니다.
오직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시 가인을 대하심(앞서 지적한 바처럼)과 같은 자세를 우리에게도 요구하신다는 점입니다. 즉 악인의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그 악을 이기고 용서하며 원수를 사랑함입니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것같으나 사실을 알고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명시하셨듯이 우리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죄도 결단코 용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 흘리신 보혈/寶血로써 이미 나의 모든 죄가 씻겨져 다 남김 없이 용서되어 구원 받은 것이라 즐거워하지만 오늘 이 시간 누구에게든 용서 않는 앙금이 내 마음에 남아 있는 한 나의 죄는 그대로 있고 따라서 구원도 없으니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잃거나 빼앗기는"(눅 9:25) 비극적 참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것만큼은 유동적이라 나의 향후 태도에 전적으로 달렸은즉 세심한 주의가 요망됩니다.
주님 친히 본울 보이시며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알지 못해서 저지르는 향동입니다" 하셨습니다(눅 23:34). "알지 못해서" ㅡ"죄의 몸"(롬 6:6)이 됨으로 인한 비극적결말. 스데반도 죄인들의 돌에 맞아 숨지면서 가장 먼저 그들의 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함을 잊지 않았습니다(행 7:60). 원수 갚으려는 마음, 용서하지 않는 마음 모두 자아중심과 직결되므로 깨끗이 그야말로 황급히 버려야 합니다. 나를 위한 일체의 일은 하나님 몫이지 절대로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을 것이다"(롬 12:19) 하심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은 본디부터 별 수 없이 연약하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라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 곧 멸망시키는 바벨론 신학입니다. 우리는 새 피조물이니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완벽합니다. 강하고 거룩하게 만드시지 결코 약하게 만드신 일이 없으니까. 천하 무적/無敵 "마지막 아담"과 "한 영" (고전 6:17)을 이루어 있기 때문. 하나님 안에서 <강하심>이 세상에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고후 13:4) 것으로 나타난 사실을 우리는 모름지기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도 불가능한 일도 놀랄 일도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어리석은 마음만 버리면 그러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당연히 불가능하나 그 대신 이 한 세상 찰나적으로 잠깐 반짝하자마자 곧장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비애의 영원무궁 속으로 함몰함뿐임을 의식할 때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눅 21:19)이라 하신 경고는 너무나 당연시됩니다.
주님의 나 위하신 죽음은 죄인 사형수의 죽으심이기에 십자가 상의 고난 받으심이었던 것. 그 당시 사형수는 십자가에 못박는 처형 방식이었기에. 우리 인간의 죄와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런 처지의 모습이기에, 바로 이것이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편 7:11) 앞에서의 범죄 타락한 인간의 진정한 실상이기에 그러합니다. 이 실상을 감히 누가 바꿀 것입니까! 누가 감히 변경하여 고칠 것입니까! 우리 각자는 너무 안일하게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 실제 모양새와는 완전 동떨어진 것입니다. 결론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생명 아닌 죽음이라 고난 고통의 처절한 아우성의 불길 속에서 한 사람 두 사람 건져 끌어 올리는 구출의 절박한 현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속에 들어가야 물속에 빠진 자를, 불속에 들어가야 불속에 갇힌 자를 구원해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눈 앞에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은 철저히 실상이 가려진 채로의 겉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의 모양과 형상으로 창조되어 지극한 영광을 누릴 피조물이 느닷없이 죽음을 맞아 비참한 몰골로 추락해버렸는데 오죽하겠나요.
성경은 이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롬 8:22)이라 했습니다. 모든 인생들과 함께. 그나마도 구원되지 못한 인생들의 장래는 더 비극적이고 처참하여 그 명칭이 영원한 "불 못"(lake of fire)입니다. 다시 지적합니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히 12:29)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 8). 이 하나님의 품성은 만유의 기본 질서로서의 3위1체 법칙(짝의 법칙)으로써만 이해됩니다. "상반은 상보"로서 짝을 이룬 양자/兩者는 둘이 아닌 하나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이라, 사랑이 있으면 반드시 그 반대 개념이 존재하게 마련. 모순이 아니라 '질서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엄/엄위(severity)가 있으니 또 그 정반대인 사랑이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인지라 둘이 동시에 드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양자역학 실험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는 그대로입니다. 전자가 드러나면 후자는 자취도 찾아 볼 수 없고, 후자가 나타나면 전자가 또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면 철두철미 나를 위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역시 그러하시다는 증거가 나 위한 십자가 고난이시니까.)
오로지 사랑만이 있는 것같이 나타나시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오로지 위엄의 잔혹성만 있는 것처럼 나타나십니다. 따라서 사랑 일변도로만 생명의 법칙대로 나가면 마치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철저하게 사랑으로 진행되는 법입니다(롬 11: 22). 우리의 선택에 좌우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만이 불변일 것이요 이와 반대로 나가면 역시 그와 반대로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사물의 이치입니다.
우리가 현재 받는 <하나님 앞 사형수>로서의 모든 고난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을 "내 몸에 채움"이니 잠자코 감사히 <인내>하여 수용함이 바로 사랑의 영역입니다. 달리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달리 다른 생각에 사로잡힐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그 무한한 장래는 <사랑의 생명>뿐이니까. "원수 사랑" 도 그렇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시니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일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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