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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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 14).


성경은 누가 읽어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결론은 우리의 상식에 속합니다. 왜냐 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됨이 아버지 뜻입니다"(마 11:25,26) 하셨기 때문. "어린 아이" 상대로 말씀하시면서 반어/反語 등과 같은 또는 기타 어려운 말을 구사하실 리 만무하신 것입니다.

위의 말씀에서, 용서하지 않는데 "모든 사람과의 화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 즉 삶 자체가 하나님만 섬김, 하나님만 위함을 뜻함이니 곧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고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 :7-9)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나타나지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살아야)"(마 7:21) 영생
구원입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21) 하셨으니까.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까. 다시 말해 나는 주님의 소유,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께서는 나의 것,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우리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이 엄정한 생명의 법칙대로 따르지 않고 제아무리 주님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고 곱백번 믿은들 그것이 구원 받음이 아닙니다. 괜히 구원 받았다 하여 자기만 속이는 꼴입니다. 평생 이렇게 자기를 "구원 받았노라"고 속이다가 마침내 죽고나서야 "속았구나!"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온다고(롬 10:1 7) 내가 믿으니까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런 이기적 욕심 하나에만 매달린 채, 하나님 말씀 자체에 대한 애착이 없어 성경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함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 사랑도 그 말씀 사랑도 아예 없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을 어슬프게 가르치고 어슬프게 배우고 피상적으로 인식한 결과입니다. 사랑은 자율/自律로서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적임을 명심해야.

성경이 칭찬하는 "베뢰아"(행 17:11) 교회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롬 12:11)는 성경의 명령을 무시한 참담한 보응 그 비극적 결말일 뿐입니다.
지금 나의 삶을 사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나 자신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하나님의 뜻읋 행할 수 없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 삶을 비로소 입에 담을 수 있다고(마 7:21) 못박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주님과 하나되기 때문이요, 갑과 을 하나됨의 필수 요건은 갑 안에 을, 을 안에 갑 즉 갑의 소유는 을의 소유,  을의 소유는 갑의 소유됨에 있어요. 더 다시는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육체로 하나됨은 "한 몸"(창 2:24)됨으로서 즉 남펀 몸은 아내 것이 되고 아내 몸은 남편의 소유가 됨입니다(고전 7:4). 자기 몸 자기 것이라 하여 자기 마음대로 해서 다른 이와 육체 관계를 맺으면 그 상대가 비록 창녀(6:16)라 할지라도 이로써 아내 남편 하나됨은 깨어져 무효가 됩니다(마 5:32/19:9).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요 17:10)이라 하실 때 이는 "한 영"(고전 6:17)됨이니, "아버지께서 제 안에,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시어"(요 17:21) 하심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저도 그들을 보내었고"(:1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심과 같이 구원 받은 자의 향후 일체의 (영원한)삶은 각자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머리-몸의 "한 몸">을 이루어 세상에 보내심 받은 영광스러운 대아/大我의 삶의 시작임을 명심해야. "대아"ㅡ지금은 "마지막 아담"이신 우리 주님의 재림이 아직 이뤄지지 않아 죽음의 세상에 처해 있어서 그렇지 우주 만유에 충만해 있는 영광과 생명을 다 함께 하나로서 누리는 그 놀라운 살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들을 위하여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17:19) 하심과 같이, "거룩함"의 본질은 자기 부인 곧 자아중심의 반대 개념으로서 특정 <상태>를 지칭함이라기보다 <매일매시의 삶의 의지>를 가리킴이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짐"(눅 9: 23)이라 하셨듯이. 자연계 동식물과 같은 기계적 삶이 아닌 '자유 의지'의 영적 삶을 영위함일진대 이는 당연지사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국적 견지에서 시야를 넓힐 때 원수 사랑 또는 남의 죄 용서가 그렇게도 "대단한" 것이고 "불가능한" 것일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미친 소리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파송 받은 하나님의 "사신/使臣"(고후 5:20) 또는 대리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20) 하나님의 사람 사랑의 복된 소식을 세상에 전달한다면서 사사로운 이해 관계 따라 희로애락을 나타낸다? 감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일지?

더군다나 나면서부터(아담 범죄 후) "죄의 몸"(롬 6:6)에 포로되어 불가항력으로 나타내는 그들의 언어심사인데도(7:24)? 우리가 그들의 죄의 응징자인가요? 하나님의 심판자로서의 대리인인가요? 국가 권력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심부름꾼)" (롬 13:1-7)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심히 고귀/高貴한 "각 지체 각 부분"(고전 12:27)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를 드러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전도요 기도의 구령/救靈 차원으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스스로 <살기> 위해 세상에 남겨진 무리가 아니라 남들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보내심" 받은 신분임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바로 이 현상에 당시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을 뵙듯 마음에 큰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생명처럼 여기고 부자됨을 최고 목표로삼는 인간 본성/죄성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가히 <경천동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바로 이것이 큰 증거가 되어 이후 야만적인 극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그에 대한 믿음이 가시적으로 드러남을 인식하는 마당이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연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살이의 유화책으로 사탄이 전략을 바꾸어 세상 사랑이 판을 치면서 교회는 이 <사도행전 432>의 영광의 전통을 헌신짝처럼 버리게 되고 오늘에까지 이른 것. "원수를 사랑함"도 "이웃의 죄 용서"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일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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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최고의 강자들(하나님 아들들)이 쓰는 천하무적의 무기(무술)

유한한 우리 인생들이라 그 하는 일도 유한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 이 말씀하시기를, "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1,42) 하셨으니 "몇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