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9일 금요일

에녹과 엘리야ㅡ세례 요한을 "엘리야"라 하신 이유 (2ㅡ끝)



 

요약해서 말하면, 왜 에녹과 엘리야 이 둘은 죽음 없이 곧장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이 세상 생애를 마쳤느냐 그 이유가 중요하고 이를 설명하는 것이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던 바로 그 내력이었던 것이다. 즉 메시야 우리 구세주님께서는 아담과 대칭되시는 "마지막 아담"이 되심으로써 우리 구원이 되심을 강조하심이다.  "아담"의 총체적 특성은 그 신령한 몸(죽지 않는)에 있음이다. 바로 여기에 에녹과 엘리야 오직 둘이서만 신령한 몸으로 승천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전자는 "첫 사람 아담"(범죄 전에는 신령한 몸이었으니까)과, 후자는 "마지막 아담"(고난 받으신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심)과 각각 직결된다. 이유 없이 <에녹>과 <엘리야>라는 특이한 존재를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에녹은 아담이 죽은 후 곧이어(아담 사망 후 57년만에) 세상을 <두 번째>로 떠난 인물이었으니(가인/라멕의 살인 사건으로 인한 불상사를 제외하면), 이는 인간이 동물적 육체로서의 죽음이 절대로 정상이 아니라는 실상을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경고이셨던 것.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同行한 의인으로서의 에녹, 죽음을 모르는 영생하는 자로서 세상을 떠나게 하심으로써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신 것. 이 에녹에 대비되면서도 또한 에녹과 같은 경우(죽음 없이 영생하는 자로 세상을 떠나는)가 바로 엘리야.

이 엘리야가 에녹과 대비되는 이유가 바로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세우신 이유라 할 것이니,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기 직전 그 떼에 맞추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메시야 오셨음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는 에녹이 아담의 죽음 직후 세상을 떠난 그 <직후>와 맞물린다. 당시 거의 천년 수명/壽命의 시대에서 57년이라는 세월을 "직전"/"직후"라 해서 어색하지는 않다. 둘 다 "아담"과 직결되는 점에서 공통이다. 에녹은 "첫 사람 아담" 관련이고, "엘리야" 곧 세례 요한은 "마지막 아담" 관련이다.

단 여기서 고려할 것은 첫 사람 아담과 달리 마지막 아담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사람이시니, 이에 걸맞게 엘리야 역시 그런 특이점이 없을 수 없다. 즉 이 마지막 아담에 비하면 <단출할> 수밖에 없는 첫 사람 아담을 상징하는 에녹과 달리, 화려한 경력과 능력과 시대적 사명감에 충만한 엘리야가 이 위치에서 적격이다.

그런데 실제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시대상/時代上으로 그 시간적 격차가 너무 크다. 다시 말해 <엘리야를 세례 요한의 위치에다 끌어놓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세례 요한과 엘리야를 처음부터 동격시/同格하여 예고/豫告하는 것밖에 없어 그래서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의 예언이 불가결인 것이다(말 4:6/마 11:14/요 1:2125).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능력 있는> 엘리야와 비등한 인물로서 <아무 능력의 행사도 없는> 세례 요한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만일 어떤 능력이라도 행하게 되년 메시야 주님의 능력 행하심과 중복이 되고 혼선을 빚음이 되어 메시야적 유일무이의 특출하심이 제대로 드러나실 수 없고 불필요하게 가려지기 때문. 오직 한 가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메시야 구주님과의 공통점>으로서의 특징이 있으니, 그것은 곧 <죄인의 손에 잡혀 고난 받으심>. 바로 이 모습을 세례 요한으로서 따름이 되었으니과연 이로써 충분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훌륭하고 합당한 것은 없는 것이다. 즉 헤롯 왕(사실은 헤로디아였지만ㅡ마 14:3)의 손에 잡혀 투옥되고 끝내는 목이 잘리는 참변을 당한 것.

이와 같이 엘리야와 에녹의 인류사상 단 둘만의 특이한 생애 마지막 장식의 피날레는 이상 설명과 같은 심오한 뜻을 함유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세례 요한과 엘리야와의 <기묘한 얽힘>이야말로 중에서도 가히 백미/白眉라 할 것이다. 에녹은 첫 사람 아담의 죽음의 특질(범죄의 결과물)을 알림이었고, 엘리야는 그런 죽음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마지막 아담의 구주되심을 선포함(우리 위한 고난 받으심을 통해)이었던 것.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그 무엇이든 이와 같이 무의미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혈과 육(flesh and blood)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계승/繼承되지 못하고 썩는 것(자연계 물질의 육체)은 썩지 않는 것(초자연계 물질로서 영생하는 육체)을 계승하지 못한다"(고전 15:50) 한 대로 엘리야와 에녹이 자연계 육체로는 승천할 수 없었음을 되새겨야. 이런 점을 보아도, 세상 종교의 막연한 "구원, 영생"은 허구에 가득 찬 거짓, 논리도 없는 인간의 망상뿐임이 입증되는 것이니 오직 "마지막 아담"을 통한 다시 출생함과 새로 창조됨으로써만 이 썩음과 죽음이 영생으로 회복되는 것임을 세상 모든 사람은 알아야. 이 모두 아담의 범죄로 파탄이 남으로써 인간의 죽음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니, "영적 죽음"이라면 "만유 회복"(행 3:21)이라는 거창한 의미가 있을 수 없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을" 뿐인데 무슨 "만유 회복, 운운"이란 말인가. 죽지 않아야 할 모든 인간의 몸(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문자 그대로 썩어 망가진 탓에 만유 창조가 본질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만유 회복" 인 것이다.

모든 창조의 최고 절정 그 완성품으로서 인간이 창조되어 영생하는 존재로 완결되었기에 7일째 날 쉬셨는데(안식), 하나님이 다시 일하실(창조를 다시 시작) 정도가 됐으니(요 5:17) "영적 죽음"이면 인간의 영(혼)만 손보시면 될 일이지 만유까지 손대실 필요가 없지 않은가! 삶을 누리도록("산다"는 것은 자연계 동물이 아닌 인간은 영생을 의미) 창조되었는데, 죽는 존재로 돌연 변이를 일으키는 사고가 생겨났으니 이로 인해 땅까지 저주를 받았기 때문(창 3:17)에 "만유 회복"인 것이다.

마귀는 "구원"을 아주 괴상망칙한 것으로 그 의미를 변질시켜 마치 "영생(구원)"만 얻으면 모든 것이 종료된 것처럼 엉뚱하게 고깔을 뒤집어씌워 놓아 바벨론 신학이라는 거짓말을 지어냈건만 인생들은 무작정 피동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그런 줄로만 아는 참담함만 먹고 마시고 취하여 인사불성이 된 이 비절참절의 비극이여!

"구원받아" 당장 지금 죽어도 영생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 하여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영생이라는 주먹구구식 사고방식에만 온통 지배되고 있다. 성경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지금 "죽어 있다"(골 3:3)고 하지 않았는가! 메시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있는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살아나셨지만 그러나 "감추어져"(:3) 계신다. 주님의 부활/승천이 "감춰져" 있음은 나도 "함께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그 <부활 승천>은 감춰지고 <죽어 무덤에 있는 것>만 드러나져 있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더 다시 죽은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우시고 망극하신 하나님 은혜로 다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감춰졌으니까 당장 감각되는 것은 <죽음>이지 <생명과 삶>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주님과 나)의 부활/승천이 드러나질 때에는 반드시 초자연계 몸으로써이지 이 자연계 육체로써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 뜻을 말함이다.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무릇 "동물적인 육체"는 일체가 인간에게는 "죽음"인 것이니 이래서도 항상 강조되는 것은 "인식 전환" 이다.

바꾸어 말해 이 자연계 몸은 <죽음의 대명사>라는 것. 메시야께서 오심으로 이 의미가 정말 제대로 살아난 것이다. 메시야 오시기 전에는 온 천지가 암흑(행 26:18)이라 분간을 못했었다. 이제 "마지막 아담" 이 오심으로써 <아담>의 실상이 드러나자 모든 사연도 대낮처럼 밝혀져 정상적으로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다. 이 자연계 육체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무덤"이라는 것을. 우리(아담과 나)의 죄로 인한 형벌로서의 죽음이란 측면 외에도, 이와 같은 본원적 의미의 죽음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난 것.

<형벌>만의 의미라면 죽음으로 죄값이 치러진 이상 우리가 이제는 삶을 누리는 자가 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헌데, 여전히 "죽은 자"다. 범죄 전 아담의 모습을 대변한 에녹과, 범죄 후 아담의 모습이 되어 죽으시고 장사지낸 다음의 부활로 정상적인 아담을 회복하신 "마지막 아담"의 모습을 미리 대변한 엘리야의 대조적이고 대칭적인 연관성을 구현한 것을 제외하고는 노아, 욥, 아브라함, 모세 등 모든 인생이 "죽은 자" (마 8:22)로서의 형상인 것.

그 사실이 세상에 오신 "마지막 아담"으로 확인되었다는 것뿐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 누구든 주님 다시 오심으로써 아담 본시(범죄 전)의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됨으로써만 이로 말미암아 "산 자"로서의 모습으로 비로소 정상화되는 것이다. 

엘리야는 우리 주님께서 "영광의 몸",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실 때 역시 그런 몸으로 모세와 함께 나타나는데, 주님은 이 변형/變形됨을 "인자가 그 왕권/王權을 가지고 오는 것"(마 16:28),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막 9:1), "하나님의 나라"(눅 9:27) 등의 의미로 표현하셨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0,21) 하심 그대로의 뜻.

다시 말해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라고 하여 별도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인간(아담)을 창조하신 대로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삶(생명) 자체를 말씀하심이 이로써도 확인된다. 고로 우리 "구원" 은 비로소 영광의 몸으로 변천하는 상황을 가리킴이 아니라 아담이 범죄 전 누렸던 신령한 몸으로의 복귀, 환원임을 오늘날 백번 강조해도 좋다.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으로서의 이러한 몸은,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경계를 순간적으로 무너뜨리고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조화를 부리는 특징이 있으니 주님의 부활하신 몸으로도 증명된다. 부활로 몸을 일으키실 때는 줄곧 초자연계 속성을 나타내시면서도 제자들 앞에서는 (나중 바울 사도에게 나타내셨던) 현란하고 눈부신 광채의 모습은 보이시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 물질계에 속한 육체는 그런 초능력이 없다. 썩어 사라지도록만 되어 있는 구조이기에 그렇다. 이런 헛되고 한심한 것에다 목숨을 걸고 버둥거리는 더더욱 "한심한" 인생들이여! 생명과 구원의 창조주 하나님께 시급히 돌이키라! <흙>의 육체에는 "내일/來日"이란 것이 없다. "오늘"이 영원할 줄로 속아 가는 <착각>만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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