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相反은 상보/相補 그리고 상합/相
合. 그러면 선과 악이 상반인데 이 둘은 상보 또는 상합인가? 진리와 거짓이 상반인데 그렇다고 이 둘이 상합이고 상보인가? 고로 여기서 반드시 전제/前提할 것이 있게 된다. 즉 3위1체의 법칙이 창조물이라는 것이니 다시 말해 저절로 우연히 생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만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창조주께서 가장 먼저 그 아들을 낳으시고 본질(본체)과 형체로서의 짝(대칭)을 이루신 다음에, 자기의 형상으로서의 이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성자께서는 성부의 <이름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서 삶(생명)의 법칙이 비롯되고 비로소 상보/상합이 이루어지니 주님 말씀하신 바 곧 "하나"(요 10:30). 이 곧 창조주의 모습이시니 이를 가리켜 "3위1체"라 함이니 영원 불변이다.
바로 이 법칙으로써 만유를 창조하셨고 현재도 이 원리를 따라 만유를 운행하심이다. 즉 생명의 법칙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절 용납이 되지 않으니 죄악시되는 것. 생명이 아닌 죽음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생명'과 '죽음'의 대칭 관계를 이루어 '상합'/'상보'를 이루게 됨(이 우주를 구성하는 양/兩 기둥이라는 측면에서)이니, 영원한 생명 세계와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서의 "불 못"으로 확인되는 바가 그것이다. 거짓말 등 악을 행한 자는 '죽음'에 소속되니, '생명'과 상반이다.
<생명의 법칙>.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골 3:17) 의미를 여기서 충분히 음미하게 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것도 같은 맥락. 하나님께서 나만 위하시니 나도 하나님만 위하고 나를 일절 위하지 않는 이것이 '삶'이요 '영생'이다.
'하나님 의식'이야말로 생명의 환희요 쾌락인 것이다. 하나님 친히 "생명"이시니까. "하나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니까. 그러면 지금 내가 '하나님 의식'인데 왜 그런 넘치는 기쁨의 감흥을 피부로 느낌이 없느냐 한다면, 지금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너희가 죽었고"ㅡ골 3:3)의 때이기에 생명이 "감추어져"(:3) 있음이다.
죽음의 때인지라 오직 생명의 일은, 구세주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태어나 새로 창조되고 나 자신 그렇게 된 다음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구원의 희소식(복음)을 듣게 하여 믿어 구원 받게 하는 것 외 달리 무엇이 있을 수 없음이 확실한 것이다.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이 죽음의 때를 생명으로 착각하지 말라, 자아중심의 죄와 악을 범하지 말라고 성경이 끊임 없이 경고함이 이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알고 믿는답시고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마 7:21)고 엄중히 경고하심이 이를 말씀하심이다.
이 세상을 삶이라 착각하여 축복 받아 잘 살다가 영생한다는 망상은, 에덴에서 여자를 꾀어 전체 인류를 도탄에 빠뜨린 사탄의 해묵은 그리고 끈질긴 속임수, 거짓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허잡한 되풀이일 뿐이다. 절대로 이 경고를 허수히 가볍게 듣지 말 일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감추어져" 있으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거짓된 이 세상에서 악령들이 꽉 차 방해하는 틈서리에서 성경 외에서는 전혀 듣지 못한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우리 자신을 말씀으로 세뇌시키기 위해서.
과거 모세 시대에도 말씀이 임하실 때 시내산에서처럼 산이 갈라지고 불꽃이 튀것만때만 아니라, 엘리야 당시처럼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세미한 소리"(왕상 19:11 12)로 당신의 말씀을 나타내신 것처럼 오늘날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 4:6) 하시는 때이니 각별히 조심할 일. "신사도운동"이니 "하나님 음성 듣기" 등 따위의 야단스러움은 전혀 필요치 도 않고 실족거리만 될 것뿐이다.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골 3:17), 주님 친히 하시듯이 하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여"(고전 7:32)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고후 5:9) 것으로써 충분한 것이고 그것이 전부이다. 주님도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同行한 것처럼(창 5:24), 내 주님(나와 똑같으신 사람으로서의)과 기거/起居 동작을 24시간 함께 하여 "나를 세상에 보내신ㅡ이것이 우리 구원 받음의 의미이니까ㅡ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먹을 양식"(요 20:21/롬 14:7-9/요 4:332-34이라 유일한 생명의 낙 그 자체임을 마음에 아로새겨 항상 유의해야.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ㅡ"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임이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ㅡ"나의 먹을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여 이런 말씀들이 내 마음 생명수로 흘러흘러 넘치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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