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나님 계심을 알고 그 만유 주관하심을 확신할진대, 한 가지 확고부동의 기준이 서 있음을 보는 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실 때 공평공정을 기하신다는 것. 따라서 사람마다 적용 잣대가 서로 다른 듯이 보일 때 그것은 임시적 과도기 현상이고 일시일 뿐이라 정상(영원성)이 아니고 비정상이라 한 때 스쳐 지나감뿐이라는 증거.
둘째는, "천국"과 "불 못"은 영원한 양면성임과 같이, 고로 불변의 진실임이 자체 증명이 됨과 같이, 짝의 법칙은 영원 불변의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즉 생명과 죽음은 대칭을 이루고 그 중간도 없고 그 외 달리 무엇이 있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처럼 생명이라 인식되는 것과 죽음으로 보이는 것이 한데 뒤섞여 있듯이 보일 때, 그것은 죽음 일색일 뿐 "뒤섞인" 것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짝을 이룸은 반드시 인과, 주종, 선후, 대소 관계를 이룹니다. 서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대등하면 애시당초 짝이 형성되지를 못합니다. "남녀 평등"은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짝을 이룬 둘은 동시에 창조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자연계 생물의 양성 생식에서 수컷에게서 암컷이 나온 것입니다. 다 알다시피 먼저 '본'을 뜨고 그 다음에 그 '짝'이 되는 것을 맞춤과 같은 이치입니다.
처음부터 뒤섞였다는 것은, "본"이 되는 것이 제 구실을 못했다는 의미이므로 원본은 폐기되고 그 짝이 되었던 것만이 남게 됨이며 고로 다시 새로 작업하여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실상을 생명 아닌 죽음으로만 인식하는 유일한 설명입니다. 아담 범죄로 죽음 일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죽음'과 '비정상"인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고, 오직 장차 빛날 생명의 하나님 일에만 몰두하는 것만이 다가올 생명의세대에 참여하는 오직 하나뿐인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의 "죄의 몸" 이 "죽음"으로 끝나고 "부활"로 새로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위 설명처럼 현재의 모든 세계가 죽음과 "저주"(창 3:17)로 덮여 있고 주님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는 변함 없는 상태임을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으니까 이를 항상 명심하고 혹여라도 착각함이 없어야 합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 <인식 전환>입니다. 세상과는 차별되는 성경(하나님 말씀)적 인식 오직 하나뿐. 육지에서는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고 바다에서는 가라앉지 않는 우리의 유일한 보루/堡壘(fort)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과 "연합한"(고전 6:17) "한 영"(:17)됨입니다. '머리'되신 주님과 우리가 이렇게 <한 몸>으로서의 '몸"이라 "하나"(요 10:30)되어 있으니 주님이 영원불변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단 지금은 천하가 죽음과 저주 일색인데다 하나님의 "매일 분노하심"(시 7: 11) 아래 있는 "때"(전도서 3:1)인지라,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골 1:24) 것이 필연인즉 이에 항상 유의해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24)입니다. 세상에서 갖가지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음은 이 때문입니다. 인내로 기쁨으로 맞아야. 이 "바벨론 탈출"의 세계적인 말씀 전파 다음 순서로는 반드시 스데반의 순교와 같은 죽음("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ㅡ계 13:15)이 닥칠 것이니 이에 대비해야.
이와 같이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어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그 영(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오시어 영원히 함께 계시니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에서 우리 둘은 완전 하나됨이라, 양자역학적으로 표현하면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이 각각으로 나타나는 조화를 부리는 것같지만 엄연히 <둘이 하나>로서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만 아니시고 성자와 더불어 성부 친히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신 것이니 주님이 나와 하나되어 계심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송("할렐루야")!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 받음이 구세주 우리 주님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 오셨음과 똑같다(요 20:21) 하셨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하신 대로 <머리>되신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같은 사명을 띠고 우리도 파송됨인즉 악을 응징하고자 함이 아니요 나 자신을 온통 바쳐서라도 사람들을 구출해내고자 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음은 악을 응징하는 심리이지 구출하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취지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분부를 내 멋 대로 무시함은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중심 즉 자기가 자기를 위하려는 모든 욕구는 생명 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욕심"(약 1:15)이요 악이요 죄의 원천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내 이웃이 전적으로 나를 위함에 있으므로 내가 나를 위하면 1로서 그치나 내 이웃이 1억이면 1억배로 내가 위해지는 까닭에 가장 이상향적 삶의 방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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