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촌"이란 말이 있듯이 매일이다시피 눈으로 보며 대면하다보면 없는 정/情도 생기게 마련인 것이 인생. 그렇지 못하면 있던 정도 끊어진단다. 이것이 동물적 육체의 <5감/感>의 한계다. 영혼을 지닌 인간이라 동물적 육체로써가 아닌 신령한 몸으로써 최종 창조가 완결된 이유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감>이 필수인 영혼의 보유자이니까.
그래서 "영적"이란 말 그대로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원성울 지녀 불사불멸일 뿐더러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으로 사물을 인지함이 아닌 초자연계 능력으로써 능히 하나님과 직통, 완벽하게 소통했던 아담이었다. 그랬건만, 범죄로 이같이 죽음에 이르는(죽음의) 저급한 육체로 전락/顚落한 결과가 현재와 같은 숨 막히는 양상의 "낮은 몸", "육의 몸"이다.
이렇다보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도, <눈에 보이는 인간>만큼에도 그 느끼는 정감/情感 정도가 훨씬 미치지를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관련한 모든 것.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 생명 아닌 죽음이 지배하는 때인 고로 아주 가끔씩 일시적으로라도 하나님 관련한 생명의 희락을 맛보는 것이 가능하냐 하면 그조차도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실정이라, 성령 세례 받을 때 썩 드물게 영적 황홀경을 맛보는 경우가 사람 따라 없지는 않으나 잠시 그 한 때뿐 지속되지는 못하니 말해 무엇 하리요.
게다가 악령들의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방해 공작으로서의 거짓과 속임수가 쉴 새 없이 난무하는 2중3중의 난관에 직면해 있는 실상이 어닌가! 이렇게 완전히 버림 받은 죽음의 파멸 상태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감각적인 것만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관련해서는 완전히 남남처럼 되어 있음을 소스라치게 깨어나듯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시급한 첫째 과제이거늘 그런데도 신령한 몸은 박탈 당하고 동물적 육체의 굼벵이 신세로만 구불텅거리니!
그런즉 말의 요점은,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첫머리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 그 "뜻"과 그 "나라" 관련으로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절실하다. 왜냐ㅡ우리 인간의 정작 삶/생명이란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요 1:18)에서 시작되고 또한 머물며 그렇게 해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아기에게는 엄마 품속이 바로 생명이요 삶 그 자체임을 감안할 때 당연히 그러한것이다. 만유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는 "품속"의 아기이심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음에랴.
이러한 실정을 제대로 깨닫고 만유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이러한 생명의 법칙 따라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리며 가장 이상향적인 그 나라를 흠모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고 널리 선전/전파함으로써 실제 실현시킴에 이바지하는 외 달리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 소원 그리고 바람의 최고 결정/結晶인 것.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최대한의 돌파구가 마련되어 있기는 하나, 이 실제 상황만은 우리가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하나라도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받들고 무엇보다 "쉬지 말고 기도함"이 요구되는 것(살전 5:17). 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 하심이다. 사람은 자주 대면함으로써 더 가까워지듯 현재의 우리 처지로서 "품속"으로서의 하나님과 가까워짐은 <기도로써의 대면>을 통함이기에 그러하다.
당시는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이었기에 즉 우리의 "죄의 몸이 멸/滅하기"(롬 6:6) 이전이라 "<마음>에는 원이나 <육신>이 약하다"는 (:41) 말씀을 하셨지만 지금은 십자가 죽으심의 승리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마침내 등극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 선포하셨으니, 주님을 머리로 모신 몸으로서의 교회 그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된 우리 각자로서 180도 반전/反轉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고로 "머리"의 "몸"으로서 동일하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행사하여 발휘할 수 있기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8-20) 하신 분부를 받들고 있음이요 고로 1이를 수행하는 데에만 전심전력을 다할 잏이다.
믿어야 하는 것. 아무리 사실은 그러해도 이를 믿지 않는 한 한낱 공허한 아지랑이 한낱 허공에 뜬 구름 조각으로 끝날 뿐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우리 믿는 이들이 성경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믿는 중에서도 더 확실히 믿기 위해서다.
요컨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빌 1:21) 이 엄숙한 사실이 중요하고 핵심인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셨으니까 다시 말해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생명의 법칙에 따라 영원히 나만을 위하시는, 나의 삶 자체가 되어 계시는데 더욱이나 이제는 완전한 사람이신지라 사람(구원되어 각각 성령 받아 모신)마다 "내 하나님", "나의 주님"(마치 천지 우주 <오직 나와만> 함께 계시듯 하는 모습)으로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가까운 이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도 실상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계심이다. 가까운 정도를 따라서 "더 사랑", "덜 사랑"의 차이가 나게 마련이라면 그 "차이"에서 단연 으뜸이시다. 이 복된 사실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가볍게)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는 것이다" 하신 말씀에서도(마 6:24) 확인된다. 둘 다 사랑하지 못할 바에야 나머지 하나는 버림을 받는 것이고 결국 이는 "미워함"이라는 결론일 수밖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10:37) 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성령론에서 아들께서 어떠하시면 아버지께서도 그러하시니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시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심과 같다.
이러하신 하나님이시니, 인간으로서 다른 그 어떤 인간이나 사실보다도 하나님을 알고 의식하여 공경하며 그 뜻을 사랑하여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
드는 것 이상 가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은 없기에 주기도문에서 아것이 당연히 첫머리에 명시된 것이니 이를 우리도 마음에 아로새겨 둠이 사탄과의 이 세상 전쟁에서 확고한 교두보 확보인 것이다.
다 같은 그리스도 군단/軍團에 소속되어 있어도 그 역할에서 남녀 차이가 있으니 신체적으로 "더 연약한 그릇"(벧전 3:7)인 여성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 선지자"(눅 2:36)의 본을 따라 주로 기도에 역점을 두고 이에 치중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고 합당하다고 보아야. 또한 성경적인 것이다. 말씀 전파에서는 남성에 비해 어느 정도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라 그러하다. 기도의 중요성은 말씀 전파와 쌍벽을 이룬다. 오히려 베드로 사도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무하리라"(행 6:4) 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를 앞세웠다.
세상 만사 특별히 인간사/事 그리고 인류사/史 복잡다단한 것 같지만 사실상 너무나 간단 명료한 것. 이 모든 혼돈은 인간의 원수 악령 사탄(고유명사가 아닌 "적대자/敵對者"란 의미의 별칭)의 농단 때문. 더 간결하게 말해, 아담 범죄로 빚어진 결과물이다. 아담의 애당초 신령한 "영광의 몸"(빌 3:21)이 죽음 즉 물질에만 국한되는 육체로 강등/降等되었기 때문.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 이런 몸은 무의미그 자체. 문자 그대로 죽음일 따름이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고난만 가중/加重될 것뿐. 단단한 땅위로 걸어다니다가 어쩌다 실수로 발을 헛디뎌 길 옆 깊은 물 웅덩이에 빠졌다 할 때, "어허, 기분 좋다! 오랜만에 신기한 체험을 해보는군!" 하고 물에 떨어진 채로 철버덩거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에 빠지기가 무섭게 거기서 벗어나려는 생각 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전자와 후자로 나눌 때 이것은 비유이니, 신령한 몸을 잃어버리고 이 동물적 육체가 죽음의 결과임을 알게 된 이상 우리가 향후 취할 생활 자세를 바로잡아 줌인 바, 세상 사랑과 관심사를 일절 끊고 오직 주님 일에 전심전력으로 임하느냐(후자) 아니면 여전히 이전 세상 일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던 그대로이냐(전자), 전자일 경우 이는 "미친 마음"(전도서 9:3)으로 낙인 찍혀 천국 노정/路程에서 영구 탈락만이 운명 지어질 뿐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대로의 우리 염원과 우리의 실제 생활에 어떠한 괴리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이 곧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듦"(눅 18:17)이요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천국 입국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 은혜의 선물로서 믿음으로 값 없이 얻는 영생 구원이 바로 이를 전제/前提하고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됨은 예외없이 하나같이 생명의 법칙(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만을 위함으로써 쌍방 다 자기 자신을 결코 위하지 않는)을 준수하기로 되어 있는 "언약"(호세아 8:1) 관계에 들어감이기에 그러하다.
이 성경적 사실 곧 하나님의 계명("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ㅡ요 15:10) 지킴은 없이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인위적 교리 즉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거짓말을 더 믿어 로마서 7장 24절을 "구원 받은 바울의 체험"이라는 둥 허탄한 소리를 하는 자마다 "헛되이 믿는"(고전 15:2/고후 6:1) 것이니, 너무 늦기 전에 경고를 받을 일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장사지내진 것이니 이론적으로만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 주님 그리스도 친히 그 부활하신 몸으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문자 그대로 "한 영"(고전 6:17)으로 하나되심이 "성령을 선물로 받음"(행 2 :38/ 10:45), "성령 세례"(행 1:5/11:16/고전 12:13),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해 모심"(고후 1:22)인 것이다.
이같이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 사는 것은 주님의 생명과 삶 즉 주님 친히 날의 소유가 되심으로써이니(그 증거가 나 위하신 죽음이라 이렇게 한 번 이루심은 영원 불변), 나의 삶과 죽음 또한 영원히 그와 같이 주님만을 위함이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한 그대로다.
이런 필수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 그 어떠한 "은혜로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이든 자기 기만이요 인위적 교리에 불과하고 무의미할 뿐 오직 바벨론 신학의 속임수일 따름이다. "구원 받았다"는 "신앙 고백"의 거의 전부가 오늘날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모든 사람은 대오각성해야.
이 3위1체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의 법칙 즉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는 각자의 의지 여하로써 결정될 일이지 다른 요소는 일절계입될 여지가 없다. 주님 친히 명백히 하신 대로 주님께 대한 사랑 유무 그 여하로써만 좌우될 뿐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요 14: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15). "나를 사랑치 않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함이니"(:24).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식으로 주님을 오해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됨을 왜 눈치 채지 못하나.
그런 경우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안개 잡으려는 듯 손만 내어밀어 흔드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해 못하는, 그래서 빈 말을 곧잘 하는 상대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거짓말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23)ㅡ이 구절은 우리 각자 안에 성령으로 오심을 말씀하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뜻대로 행할"(마 7:21)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도 않는데 어찌 그것을 "회개"라 하겠는가! 회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의요 결연한 실천이 아닌가. 회개하는 자만이 세례 받고 세례 받아 죄 용서 받은 깨끗한 마음에야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물론(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핵심 부분이다) 이 순종은 평소 이전 같으면 나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심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 나의 것이 되는 순간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내가 행사하는 내 소유가 되어 주심으로 100% 가동되기 때문.
모든 기도의 특징과 핵심은 다음 사실에 있다. 즉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 것이다"(에스겔 36:36,37) 하심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신 그 약속을 우리 위해 이루시려 하고, 우리는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그와 같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가 <동시에 양손바닥 마주쳐 소리 나는> 이치대로 반드시 하나님 보좌/寶座 앞에 상달/上達되어야 하는 생명의 법칙에서의 필연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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