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없이 곧장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변환해 하늘로 오른 오직 두 사람 엘리야와 에녹. 에녹을 가리켜 한 말0]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ing with God")" 인데,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의식/意識의 일상 생활>이었다는 것. 이는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고 정상적"이었다"는 함의가 스며 있음이니 항상 대면하여 보는 사람 중의 어느 누가 아니라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을 그렇게 의식했던 이유를 밝히심이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그 핵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눅 11:2) "뜻이 하늘에서 이룸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마 6:10)이다.
왜냐면 생명 자체이신지라 생명 아닌 죽음의 현장인 이 세상에서는 곧바로 우리 구원의 방법 즉 그 "길"(요 14:6)로 통하시기에 더욱 그러하신 것. 무엇보다 영원한 진리에 터전하신 것이기에. 하나님께 향하는 우리의 기도는 "당장 코 앞에 떨어진 불 끄기"로서의 속성인지라, 그만큼 절절한 것으로서 가장 먼저 언급되어 우리 의식을 지배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그 뜻", "그 나라"인 것. 이는 우리의 실질적 욕구에 따름이니 극히 자연스러운 순서임을 항상 인식해야.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우리 구원자로만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생활에서 우리의 존재와 직결시키는 것이 하나님이시고, 그 뜻을 알고 따르고 찾아 구하는 것(마 7:21)이 생명인 줄을 알아야. 인생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세계가 하나님과 직통 직결되는 신령한 몸에 있음을 의식하고 사모하며 동경함이어야.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눅 9:27)라, "주님 친히 그 왕권/王權을 가지고 오심"(마 16:28)이라,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함"(막 9:1)이라는 뜻으로 하셨듯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과 의식은 세상 주변에서만 맴돌 뿐 자아중심을 벗어남에서 진전이 없는 끔찍스러운 꼴을 당함이니 어찌 "두렵고 떪"(빌 2:12)이 없으리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것이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8,29).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하시어 이루신 값 없이 선물로 거저 주신 은혜의 구원이라는 인식만으로 철딱서니 없고 버릇 없는 손주녀석 할아버지 수염 당기듯 하는 행위에 거의 2천년간 물들어진 오늘날까지의 바벨론 신학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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