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67, 스웨덴 대기근
히브리서는 모세의 특징을 "<보이지 아니하는> 분(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히 11:27)는 것으로 규정했다. '은혜의 성령 시대'에 있는 우리들로서 특별히 이 "마지막 때" 주님 다시 오시는 시점 우리라고 이에 뒤질 수 없고 모세보다 못할 수 없다. 21세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크신 은혜를 입고 있는가! 2천년간 거의 무지의 황무지 상태에 있던 "3위1체" 하나만 해도 그렇다. 양자역학이라는 최신 과학 지식에 힘입어 그 소상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된 우리들 모두가 아닌가! 그만큼 지식면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워졌고 친숙해졌다는 의미다. 가일층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유감 없이 세계 만방에 전달하는 매개 도구로서의 우리가 되어야.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히 사람이 되어 오시기 위해 완전히 여자의 태/胎를 통하여 오셨다. 따라서 '몸'은 사람이시고 '영'으로만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은 영"이신지라 하나님으로서의 원래 모습은 그대로이시고 변함이 없으시다. 단지 이제는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그 차이만 있다 할까.
또 하나 우리와의 약간 차이는 우리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우리처럼 성별/性別의 지배를 받으신 것이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 천사들과 똑같은(눅 20:35,36) <완전한> 모습으로 계심이니, "완전하다" 함은 "영광의 몸"(빌 3:21), "신령한 몸"(고전 15:44)을 말하는 것이다.
범죄 전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는 현재와 같은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초자연계 초능력의 광채로 둘러 쌓여 현재의 동물적 육체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성별의 의식이 없었다. 지금은 동물적 육체의 근성으로 원시적인 식욕, 성욕에만 매달려 삶의 낙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는 듯이 되어 있지만,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는 그런 단세포/單細胞적 취향 대신 진정한 생명의 멋과 맛을 한도 없이 누리는 황홀경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낙의 연속이었기 때문.
원래 아담 홀로였을 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독생자를 "낳으실" 때와 같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주려 하심이었지, 자녀 생산과 번식이 목적이 아니셨던 것이다. 만일 그러했다면 아담 창조를 끝내시기가 무섭게 곧장 여자를 창조하셨겠지만 그러지 않으셨으니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야 여자를 만드시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반드시 자연계 생물과 같은 암수 양성 결합으로써가 아닌 초능력으로 인간은 생식하고 번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담 범죄로 동물성 육체가 되면서 동물과 같은 형태와 양식으로 전락한 것이다. 벗은 것 즉 벌거숭이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창 2:25/3:7,10) 본능 작용이 여기 기인한다. <죄의식>과도 연관되어 <비정상>임을 자각함에서 유래된 것이다.
동물적 육체의 "낮은 몸"으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초능력으로 진행되는지라 아담 부부에게서 나는 자식들은 성별 없이 "천사와 동등"(눅 20:36) 급의 몸으로 생산되었을 것이요 아담 부부 역시 단순한 남녀 결합이 아닌 "신령한 몸"다운 초능력적 조처로 천사들의 각종 도움을 받아 자식들을 세상 밖으로 얼마든 배출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초능력"이라 함은 자연법칙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본디로 돌아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3)에서 3위1체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 관련해 조금 더 논한다면, 성경에 인간을 창조하시는 대목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26)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 하나님 즉 두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창조의 역사에서 최초의 "짝"을 이루심이다. 그리고 짝의 법칙(3위1체 법칙)의 시발점/始發點이 되신 것이다. 짝을 이룬다는 것은 짝을 이룬 그 둘이 "하나"(요 10:30)가 된다는 의미로서 성경에서 뜻하는 <3위1체>라, 만유의 근간이 됨을 오늘날의 물리학이 밝히고 있음이니 이는 시의적절하고 또한 당연한 귀결이다.
이 "3위1체"를 만유 창조와 운영의 근본으로 삼으신 것이다. 미립자의 미시세계에서 그 명확한 증거가 20~21세기 오늘날 양자물리학(양자역학)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이 사실 즉 "3위1체"를 기반으로 하신 우주 만상의 주재/主宰를 밝혀,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神(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 계심을 최후 확정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3운법칙(fashomo/파쇼모)의 기반이 바로 이 3위1체의 법칙임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자께서 만유를 창조하셨고(요 1:3/골 1:16) 성부께서는 "그(성자)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히 1:2). 성부, 성자 두 분이 "하나"(요 10:30)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하나"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서 성질이 정반대의(서로 짝을 이룬) 두 개념이 하나의 개념으로 융합해 있음을 이중슬릿 실험으로 입증한 오늘날의 양자역학이 있는 것이다. 성질이 상반/相反이다보니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다. 그러나 "하나"로서의 상보/相補인지라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이런 2중성을 띠고 있는 구조다.
따라서 그 특징은 성경적으로 잘 표현되고 있으니,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성자/聖子로 나타나신 것으로 인식해도 좋고 동시에 성부/聖父로 인식해도 옳다. 이는 주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씀으로써 충분히 확인되었으니 앞글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요 14:9).
이와 같이 "하나"로서의 '머리'와 '몸'은 확고부동의 삶의 이치요 둘은 불가분인지라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1억의 1억배가 모여 있어도 마치 한 사람과 같은 "하나"라는 가장 이상향적 법질서가 확립되는 세상이 꾸려지게 마련이다. 이렇듯이 창조주 하나님 친히 내게(우리에게)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시므로 이 영광스러운 생명의 법칙에서 우리의 가장 첫째 가는 소원의 기도도 하나님을 위하는 하나님 관련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소원, 간구, 희망 사항 등 일체가 그 첫머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되심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과, "하나님의 나라" 임함과 관련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순서다. 이렇듯이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인 짜임새로 되어 있기에 이 하나님 뜻을 따르기만 하면 즉 그 "뜻을 행하면"(마 7:21) 되는데도 자아중심으로 용은 아담을 시기하여 제거하려 헀으며 아담 부부는 머리이신 하나님 및 그 말씀을 소홀히 여겼으니 그 대가/代價가 오늘날의 비극.
그리고 "죽게 된다" 하신 경고대로 인간이 모두 동물적 육체가 되니 당장 이 "낮은 몸"(빌 3:21), "육/肉의 몸"(고전 15:44)의 유지 보존에 불가결한 "먹을 양식"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창조시 먹고 마시지 않아도 전혀 무관하게 생명을 구가/謳歌할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 영광을 빼앗겨 우선 당장 먹고 살아남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담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은 상황에서랴. 땅만 아니라 땅에 사는 동식물까지 고통이 아닌가. 저주 받은 땅에서 무슨 풍성한 먹거리가 생겨나겠는가!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릏 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처참하게 기근과 아사자가 인류역사상 생겨났던가.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주님 재림 때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을 동물적 육체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면> 이런 기근 소동이 생겨날 리가 없음을 알아야.
자연계 동식물이야 자연 조정(번식 수/數의 다과/多寡 조절)이 때때로 필수 불가결이라 하지만, 인간은 영이 있어 독립적 존재이기에 미리 그 숫자만큼의 적정 수준으로 식/食생활 환경이 엄정히 보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이 이런 "낮은, 육의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그렇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하시지를 않았던 것이다. 아담 범죄라는 돌발 사고/事故로 인해 이런 혼돈과 혼란은 필연적이게 된 것. 이런 점에서도 인간의 이 동물적 육체는 아담 범죄에 따른 "돌연변이"임이 확인된다.
하나님의 피조물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이렇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필수불가결이요(비단 구원 때문만 아니라) 절대적 의미를 지니심을 우리는 마음에 아로새겨야. 만물의 머리이시기에 이 머리의 부재/不在는 삶 자체의 붕괴, 불가능으로 직결되기에. 특별히 인간에게 그 머리되심이 절대적 의미를 지니심이니 그 중요성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상향적 삶이란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개별적 언약/言約 관계에 들어감이므로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관계는 이렇듯 막중한 것이다.
신령한 몸은 먹고 마심은 단지 식도락/食道樂을 위함일 뿐 생사 문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니 그야말로 영원한 자유의 향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만인 공유요 공용인지라 따라서 역대 교회 전통은,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행 4:32) 바로 이것인데, 바벨론 신학의 거짓이 교회를 장악함으로써 오늘날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되었으니, 지금 시급한 과제는 이 '교회적 영광'을 되찾는데 있다. 말을 바꾸면 이런 실천이 없으면 이름만 "교회"이지 실제는 아닌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을 무시하는 자리에 계실 리 만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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