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1일 토요일

주기도문 명상 (6) ㅡ 구원의 3단계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사람이 동물성 육체로 전락함으로써 자초하게 된 재앙은 1). 죽음과 <일체의 인간고/人間苦> 초래, 2). 자아중심이 선천적 본능이 되어버림으로 인해 평생 불가항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롬 8:2/7:24)의 철통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됨, 3). 아담의 범죄는 본의 아니게 사탄 마귀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른 결과가 됨을 인해 사탄의 인간 세상 통치/지배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3중고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논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된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이유다. 상대가 용서를 빌든 않든 나로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우리 주님처럼 또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팔매질에 숨을 거두면서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는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곧 "저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저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ㅡ눅 11:4)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5)이다.

아담 범죄로 인한 이 육의 몸을 인해 우리가 선천적인 죄인 즉 무조건 멸망의 운명일 뿐 아니라 악령들의 쉴 새 없는 시험을 받아 그 충동질에 의해서도 범죄를 하게 되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사탄처럼 스스로의 선택을 따라 된 악인도 있겠지만 그런 사정은 하나님만 아시지 우리의 소관사는 아니다. 우리는 갑, 을, 병, 정 가리지 않고 용서해 줄 따름.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라"(요 12:47)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20:21)을 받은 것은 새상의 악을 처단하는 심판자로서가 아니라(하나님은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심판권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마 7:21) 위함이니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 즉 구원의 복음 말씀을 듣고 믿어 온전한 순종에 이르도록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함"이 유일의 관심사일 뿐이다. 이 점에 변동이 있을 수 없다.

고로 문제 해결은 간단한데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가? 천만에. <죄의 몸>으로서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가 손 끝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실상을 모르는 유대인들이 그래서 무턱대고 "선을 행하겠다" 하고 "순종하겠다" 하니 행함으로(행위로)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바울 사도는 거듭거듭 강조하며 깨우치려 한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다.

왜? 하나님 친히 그 새 창조로 우리 위해 다 이루심이기 때문에! 창조는 홀로 하나님의 역사/役事이시지 피조물이 끼어드는 법이 있던가? 창조는 창조주만 하시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새 창조"의 일을 하시는가? 친히 죽으심으로써다. 우리 위해 친히 죽은 자가 되심으로써다. 죽음 가운데 머물러 무덤에 드신 다음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다.

그러나, 잠깐! 죽으시기만 하면 (구원의 역사가) 끝나는 줄로 알고 <성경읗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무식한 말을 하기에 바쁘지만, 그 역시 "천만에"다. <부활하심>이 덧붙여져야 나도 "죽은 자"를 벗어나 비로소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거의 모두 이 "부활"을 간과하는데, 그리 되면 "죽으심"마저 무의미하게 됨을 왜 진작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죽으심>은, 아담 범죄로 인한 동물성 육체의 최종 마감/종결, 그리고 또한 "죄의 몸"이 멸절(롬 6:6)됨, 그리하여 향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시작, 그리고 지나간 모든 죄 용서하심의 실질적 바탕이 됨이나, 그렇다고 구원과 직결되지는 않음이니 오직 <전/단계>일 따름이다. <중간 단계>로 넘어가는 엄연한 순서가 있으니 그것이 <부활>이다.

전단계는 이 후속 단계를 위한 준비 단계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부활은 <최종 단계>를 위한 제2 준비 단계다. 뻔하지 않은가ㅡ'죽음'으로써 일이 저질러졌으니 의당히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써 마무리되어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아무리 유의미한 것이라 해도 그저 죽음으로만 그칠 뿐. '부활'로써만 그 <유의미>가 살아나는 것.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바울 사도는 이를 또 거듭 강조한다. 마치 오늘날의 혼돈과 혼탁을 예견이나 하듯이ㅡ.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니(:17,18). 보라! 죽으심만으로는 우리 구원이 될 수 없음을 말하지 않는가! 부활이 떠받쳐 주어야 비로소 완결임을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읗 모르는 사람들"이라 했고, 이런 사람들이 버벨론 신학의 혼돈과 혼탁의 주역/主役들인 것이다. 왜 성경을 모르느냐,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계시"가 아닌 엉뚱하게도 "학문" 취급하여 남들이 써놓은 주석서 따위만 붙잡고 늘어지려 하니 잘못 해석은 고사하고 무엇 풀이한 것이라도 있다 싶으면 불문곡직 대책 없이 줄줄이 도미노식으로 따라 넘어가는 판이다. 한 번 그렇게 쓰러지면 반영구적으로 다시는 일어날 줄 몰랐던 것이 바벨론 신학이었다.

우리 위해 즉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이루셨다고 그것이 곧장 우리 구원으로 정착하고 일단락되는 것이 아니다. <전단계>, <중간 단계> 다음이 <최종 단계>다. 이 최종 단계야말로 오늘날까지 감추어져 온 제2의 핵심인 것이다. 제1핵심은 물론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가 없으면 마치 음식은 장만했는데 이를 담아 먹을 그릇이 없음과 같이 된다.

성경을 읽으려 하지 않고 엉뚱한 데 가서 서성거린 결과로 이 중요 부분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성경을 그저 읽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 말씀하셨듯이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마음의 자세로 임해야 "성령의 친히 가르치심"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숨기신"(눅 10:21 것인데 어찌 알 수 있으랴.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막 7:6-8) 하신 그대로다.

그러면 그 <최종 단계>는 무엇이냐. 아직은 말하자면 그림의 떡으로만 그쳤을 뿐인데, 실제 떡으로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무엇이냐. 그림은 떡이 실재한다는 그 설명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 내 것으로 적응되어야 명실공히 구원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주님 친히 나와 "하나"(요 10:30)되심으로써 가능하다. '사람'으로서 나 위해 죽으시고 나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이제는 '하나님'으로서 내 안에 내 영혼처럼 되어 오심으로써만 더 이를 데 없는 완벽한 "하나"로서의 구원 그 구조/체제다. 즉 더 이상 '그림의 떡'이 아니다. '떡' 자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부터 "3위1체"의 "하나"로 계셨고 이렇게 계시는 모습을 따라 이를 만유 기본 원리로 정하시어 만유를 창조하셨고 주재 주관하시므로 인간 구원도 이 이치대로 하심이 당연 사리/當然事理다. 이 "하나"로서의 모습이 성령이신 것이다. 이 "이름"(마 28:19)은 고유명사처럼 활용되지는 않고 성부 하나님의 영도, 성자의 영도 다 성령이시나("하나님은 영"이시므로ㅡ요 4:24), 특별히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시대와 달리 일반적으로 성부와 성자로 "하나"되어 계심을 의미함이다.

이렇게 예수 우리 주님 친히 성령으로서 믿는 각 사람에게 임하심이니, 엄밀히 말해 이것이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가 이루어짐이라 <최종 단계>로서의 우리 구원인 것이다. 물 세례(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되므로 이것을 "구원 받음"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성령의 세례",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직접 영접함"이 필수가 됨이니,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바벨론 신학에 매여 이 성령 받아 모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니 오늘날에서야 밝혀진 것. 다만 유의할 것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경고하신 대로, 어린 아이의 특징은 절대적 신뢰(믿음)와 사랑(순종)에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필수 지식이 없어도 이상 두 가지만 겸비해 있으면 성령께서 예외 없이 임하여 오셨고 구원 받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고를 하셨던 것이나, 이런 지식도 없고 "어린 아이 같음"도 없을 때 진정 재앙만이 있었으니ㅡ.

이와 같이  '짝의 법칙'에서는 이 "하나"(요 10:30)됨이 "3위1체"에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음양론에서는 음양조화라고 부르면 되겠고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 "얽힘"이나 "중첩" 현상이 이에 해당된다. "3위1체"에서 "3위/三位"에 해당한다. 짝을 이룬 둘이 따로따로 놀지 않고 "하나"를 이룸으로 만물의 대칭적 아름다움(對稱美)도 보장됨이니, 이같이 "상반/相反은 상보/補"로 종결되고 영원 불변. CONTRARIA SUNT COMPLEMENTA.

이와 같이 동물성 육체(이 "동물성 육체"라는 표현에 대해 혹자는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나 우리는 이 진실을 강조하고 우리 자신을 세뇌시킬 필요가 있어)로 인해 또는 악령들의 충동질에 넘어가 불가항력으로 모든 인류가 악인 행세를 하는 등 난장판을 이루니, 다시 말해 "알지 못하고"(눅 23:34) 행하는 악이니까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모두를 용서해 주어야 마땅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며 선으로, 선행/善行이라는 무기로 무찔러 장쾌하게 이겨야 하는 것.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의인 아벨을 죽인 가인의 죄를 벌하시는 대신 도리어 불쌍히 여기시어 그 소청대로 이루어 주심으로 본을 보이셨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심판자로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며"(골 1:24)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주님처럼 사람들을 멸망에서 건져내려는 일편단심뿐인 것. 구약시대의 권선징악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상벌/賞罰 관련한 인생의 초보 학습인 것이다. 신약시대에서 아담 범죄 등 모든 실상과 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짐에 대한 사전/事前 교육 차원.

우리 구원을 <전단계>, <중간 단계>, <최종 단계>로 나누어 고찰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그저 그런 관념상의 교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의 실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미쳐 갑은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만을 위하는 생명의 법칙에 그 운영의 운명이 직결되어 있음을 강력히 경고함에 목적이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고전 4:2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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