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12ㅡ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그 분 안에서 약하나...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우리가 <은혜>로 <값 없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 죽어 있던 내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이니 창조는 하나님 홀로 하시는 작업이지 피조물과는 전연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죽었던 자가 산 자로 생겨났다는(1) 단순히 그것만으로 전부가 아닌 것이다.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산 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2) 되는 그 첫 걸음을 내어딛는 출발점이라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

즉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일절 위하지 않고 나의 상대(하나님과 및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내 이웃" 즉 믿음의 형제자매)를 오로지 위함이다. 이런 짝(대칭)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한 몸을 구성함이고 "명령(계명)"과 "순종"으로서의 상부상조/相扶相助인 것이다. 일방적인 것은 처음부터 숫제 존재하지를 않는다.

지금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은 (1)만 취하고 (2)는 버리는 아무 쓸모 없는 빈 껍데기였던 것으로 모든 사람을 속임이었다.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된"(마 18:3) 이들만 제외하고는. 이 생명의 법칙은 사람 삶의 상식선에 머무는 것이지 무슨 심오하고 고매한 것도 아니다. 상호간의 약속이 중요하고 한 번 약속은 변함 없이 충실히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생명이다.

지금도 이러한 이상향적 삶은 상호간 사회 계약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소위 "공산주의" 이념이란 것이 이래서 생겨난 것이나 본질은 무시한 채 형식으로만 급조된 탓에 <모래 성/>의 시행착오만 되풀이하고 독재자들의 노리개감으로만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본질이란, 생명의 법칙에서 그 핵을 이루는 "자기 부인" 즉 자기를 위하지 않는 철저한 이타주의의 상호 협약이다. 이것은 자진자발적인 사랑에 기초하는 것이지 강제와 억압으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애초 하나님 창조에서의 생명(영생)도 이러한 "언약"(호세아 6:7)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인생을 죽음의 파경으로 몰아넣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불순종)도 이 "언약의 어김"(:7)이다. 주님께서는 이 언약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도 하셨으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처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셨고,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다"(10:18) 하심과 같다.

창조 때부터의 원리원칙은 그러하나 아담 범죄로 인해 생명의 신령한 육체가 망가져 현재는 "죄의 몸"(롬 6:6)으로 전락한 죽음의 육체라 새로 창조됨의 "성령으로 다시 남"(요 3:3,5,6,8)이 없이는 전적인 무의미로 그칠 따름이기에,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롬 3:20)이라 한 것이다. "죄의 몸"(롬 6:6)이 시퍼렇게 남아 그 "죄와 사망의 법"(8:2)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기에 이와 같이 자아중심인 이상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일체의 복종, 선행 등이 일절 무의미한 것이다.

영생에 대한 욕심뿐인 자아중심 일색이라 아무리 선행을 하여도 복종을 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의인이 아닌 것이다. 성경대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롬 2:13)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실"(:7,10) 그런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저주스러운 "죄의 몸"이 박살나버려 무덤에 장사지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

주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하는 "하나"(요 10:30)로서의 "한 영"(고전 6:17)됨이 없고는, 다시 말해 내 이름으로 나 위해 죽으셨다가 나 위해 다시 살아나신 주님 친히,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 영 즉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시는 원래 모습의 성령으로 내 안에 친히 임하시어 영원히 내 영혼처럼 계시고 내 영혼과 하나되심이 없으면, 나의 "죄의 몸"은 "멸/지지"(롬 6:6) 않고 나는 죽지 않은 것이다.

내가 죽어 무덤에 장사지내지는 역사적 사건이 내 안에 구현됨이,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하나"로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므로 바로 이로써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3:16)가 제대로 적응되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율법의 행위"는 예수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은혜가 깡그리 무시되고 자아중심이 여전하게 살아 있는 채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자 함"인 것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그리고 그 편지글(성경에 수록된 대로의 모든 사도 서신)에서 지적하는 바 "행위 구원"론은, 예수 우리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모세의 율법에 속하는 "할례" 등을 주장하는 교회내에 침투해 온 유대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질타였던 것.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죄 용서하심 받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원도 한도 없이 훌륭히 다 마무리된 것이지 또 무슨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모세 시대의 법을 다시 지키려 함은 예수님 믿음을 무용지물로 돌리려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바울 사도 당시에 그랬다는 것이고 지금은 거의 무의미한 내용인 것이니 지금이야 어느 누가 모세 율법, "할레" 등 관련해 입이라도 뻥끗하는가.

바울 서신은 말 그대로 2천년 전의 바울의 편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시 교회 상황 따라 그려진 일종의 삽화/插畫(우리에겐 거의 무의미한) 정도라고 해 둘. 진리만은 영원불변이기에 성경으로는 전혀 손색이 없으나 지금 지적한 부분만큼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 복음의 내용이란 처음부터 간명한 것이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님이다. 성경은 버리고 사람의 말과 생각을 더 따른 결말의 혼동, 혼돈일 뿐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가르치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 모두 부디 명심할 일이다. 로마서라 해서 특별히 난해한 것도 아니다. 오직 모든 허물은 우리가 <성경에 유념하지 않았다>는 여기에만 귀착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농간이 발 붙일 틈이 없게 된다.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교회 혼란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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