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8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4)

다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절박한 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함>이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않고 길쌈도 아니한다"(마 6:26,28) 하신 말씀의 내용과는 다소 온도 차를 느낄 수 있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는"(:31) 않으나, "일용할 양식 주시기를" 구해야 함이니, 이는 동물적 육체로서의 자연계 짐승은 원래 창조하신 그대로의 모습이건만 인간은 전혀 다르기 때문.

애초 동물적 육체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이 창조된 것이 영생하는 존재로 변환되기 위한 그 1단계였기에, 그 2차 단계로 영혼을 주신 것이고, 3차 단계로 에덴으로(인간 아담을 위해 거기 특별한 동산을 창설하신 후) 인도하시어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 즉 영원성의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먹지 말라고 엄금하신("먹으면 죽는다"고 하심으로써) 선악과를 먹음으로 도로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린 비극이다. 그러나 이는 이전 자연계 물질에 속했던 동물성 육체로의 <환원>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던 원래의 "영광의 몸"(빌 3:21)을 <아주 잃어버리는> 일대 참사/慘事라 이 둘은 차원이 다르다.

선악과 나무 열매의 "선악" 관련 "지식"의 의미 즉 "좋고(선/善) 나쁨(악/惡)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은 동식물들의 육체에 기계(자동)적으로 작동되는 놀라운(인간의 지능을 훨씬 뛰어넘는) 기능을 장치해 두심으로써 그들 생물이 자신에게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기피하게 하시어 한정된 기간 스스로 자기 목숨을 유지해 가는 그런 기능을 말한다.

인간 또한 그 육체만큼은 똑같은 구조/체제다. 인간 신체의 작동에 비교적 친숙해 있는 의료 관계자들도 떼로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우연 발생이기에는 너무나 조밀하고 치밀한 인체 조직의 작동 체계를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몸>과는 별도의 <영>이 있어 이 영은 자유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지라 그런 선악 관련 식별("지식")은 도리어 자아중심으로만 작동될 뿐 모든 악과 죄의 근원으로서의 온상/溫床 역할이기에 동물성 육체(아담 범죄의 결과물)로 야기되는 2중, 3중고/重苦인 것이다.

짐승은 먹고 마시고 생식/生殖하는 것으로써 자기 자신(종/種)을 유지 보존함뿐이나 인간은 영/靈인지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창 1:27/5:1/약 3:9) 관계로 영구히 죽음과 썩음이 없도록 신령한 속성의 몸으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독립된 존재라, 하나님 친히 "부자/父子" 관계로 <머리와 몸>의 짝을 이루시어 그 "하나"(요 10:30)되심으로써 생명(삶)의 법칙을 친히 확립하심과 같이 우리 또한 똑같이 스스로 이를 준수함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신 것.

즉 자연계의 생물처럼 자기 위주/본위의 <자아 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의 사랑으로써만 이 생명의 법칙은 운용됨이니하나님 계시는 모습인 '3위1체'가 그 기반인 것이다. 곧 나를 위하는 것은 남인 것이고 나 자신이 아니며 따라서 나도 남을 위하는 일관성을 시종 고수함이 생명이다.

짐승은 본능적 욕구를 채움으로 그치나, 인간은 이성적/理性的 사랑으로써 <짝으로서의 "하나"(요 10:30)됨>을 따르니 이 법질서 준수가 영원한 삶/생명인 것. 나 자신 나를 위하지 않는 대신 즉 나를 소유하지 않는 대가로 나 외의 모두를 내 것으로 소유하여 누리는 가장 이상향적 삶의 유일무이의 방법이 되는 것.

자아중심은 무리하게 억지로 빼앗고 훔치고 억압하여 내 것으로 겨우 차지해도, 그나마 일부 곧 부분적으로 누리는 것으로 그치지만, 자기 부인으로 출발하는 상대방 중심은 자기를 탈탈 비우는 <무소유>에서 <만유 소유>로 귀착하는 최대 최고의 지혜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반면, 그 피조물로서의 나는 나의 일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됨이라 그래서 우리 구원도 "하나님이 그 피 값으로 사신 교회"(행 20:28/계 5:9)로 표현됨과 같다.

이렇게 각자가 하나님-사람, 사람-하나님을 중보자/仲保者로 모셔 <'머리'와 '몸' 관계>를 형성해 <한 영>과 <한 몸('머리'와 '몸'으로서>을 이룸인즉 이와 같은 "하나" (요 10:30)됨은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요 17:10)이라 하신 그대로 주님의 것은 나의 것, 나의 것은 주님의 것으로 또한 나타나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과연 우리의 실생활이 그러한가 자문자답할 일이다. 말로써는 그리고 자기 딴에는 아무리 "구원 받은" 확신이 철석 같아도, "나무는 그 열매로 판별한다"(눅 6:44)는 주님의 엄중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바울 사도가 여기서 지적한 것이 바로 "열매" 유무이다. "하나님의 일"에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나 자신의 욕심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면 자기 기만일 따름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 10:38) 하신 대로, 나도 주님 안에,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이 구원이다. 주님 친히 내 안에 계셔 나와 "한 영"으로 "하나"이시니까 나를 위하신 그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어 죄 용서를 받은 것이다.과거 자아중심의 <나>란 존재가 죽어 없어졌다. 없는데 왜 있는 듯이 내 욕심, 나의 욕망 그대로인가.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과는 달리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노라"고 자기를 속여 온 것뿐이다. 믿으면 믿는 것일 뿐이지 믿으려고 <애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믿음과 사랑과 순종의 <스승>, <본>으로 "어린 아이"를 자주 언급하시어 강조하셨다. 어린 아이를 따라 하면 된다. 단 한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부지런히 문을 두드려야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면 찾게 되고 얻게 되고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법칙임과 동시 약속이다.

나만 문을 두드림이 아니요 주님 친히 나의 "문을 두드리신다"(계 3:20). 예수(히브리어로 "구세주, 구원자"의 뜻)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해 오심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Comforter, Helper)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함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처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요 14:16-18) 하심과 같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하셨으니까 먼젓번의 보혜사는 예수님이시기에 "보혜사"의 뜻이 금방 드러난다. 단 육체가 아니신 성령으로 오시는 똑같은 <바로 그 예수님>이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라 하신 말씀이 그 확고한 증거. 그러면 왜 "성령이 오신다" 하시고,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라" 하셨는가? 어떤 "유익"인가?

사람(구원된)마다 예수님을 직접 모시게 되는 바로 그 "유익". 이 얼마나 굉장한 사실, 의미인가! 그러면 육체가 아닌 그 영으로 오시기에 성령으로 오심인가? 아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오심이라 그러하신가? 아니다. "함께"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 오심이다. "함께"와 "하나"가 어떻게 다른가.

"하나"이실 경우 똑같은 한 모습이시나 성자 하나님으로 보면 틀림 없으신 예수 우리 주님이시고, 성부 하나님으로 보면 역시 틀림 없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다. 이는 <착시 현상>도 아니고 무슨<요술>도 아니다. 실상 그대로를 설명함이다. "함께"에는 이런 의미가 전혀 없다. 주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 9) 하신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키심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1:18) 함도 당연히 이를 가리킴이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뵌 것이다. 우리가 뵐 수 있게 성자와 더불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라, 아멘"(딤전 6:15,16)으로 못박았는데 이는 왜인가?

성자 하나님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는"(골 3:11) 분이시다. 이 광대무변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지라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은 상식에 속한다. 또 성부께 관해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요 14:28)이라 하셨다.
성경은 또 "만유 안에 계시고(in all) 만유를 관통해 계시고(through all) 만유 위에 계신(above all)"(엡 4:6) 분으로 성부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만유보다 크신"(요 10:29) 하나님을 무슨 수로 본다는 말인가.

일부러 사람 형상이 되시어 나타나시면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경우 사람이라 하지 하나님이라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아닌게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땅 위에 서신"(욥기 19:25) 것이다. 욥은 이 사실을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여 그 오심을 찬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람으로만 취급하여 결국 십자가에 달리심을 당하셨다.

이런 여러 사정을 미리 감안하시어 볼 수 없으신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창 1:26) 인간을 만드시어 하나님의 모습답게 즉 <흉한 모습으로 썩어 죽는> 육체가 아닌 <광채로 나타나는> 신령한 몸으로 입히셨던 것. "6일 창조"로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도록"(:26) 창조하신 인간 곧 하나님의 대리자로 친히 세우신 <하나님의 상징>이 앙상한 백골로 썩어 문드러지는 흉측한 모습의 "하나님 형상"이 되도록 방치하시는 하나님으로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일을 당연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당신이라면 그런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는 허물을 면치 못하리라" 할 때, 당신은 이 말을 지나치다고 책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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