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4일 화요일

주기도문 명상 (8)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으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自取하게 될 것이다.


"관리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그러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명령이나 부탁을 이행하는 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다.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怒(공분/公憤; 공적인 일에서의 분노)를 인하여만 아니라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公稅(국가/지방 공공단체가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기 위해 국민/주민으로부터 강제 징수하는 국세/지방세 등)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는 것이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 받을 자에게 공세를,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1-7).

예를 들어, 도둑을 붙들었으면 이 사람을 무조건 용서해 줌으로 방면해야 하느냐 아니면 국가가 처리하도록 조처해야 하느냐 등의 양자택일이디. 사회 공동체 <법정의/正義 및 공공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내게 잘못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상충/相衝할 필요는 없다.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로 작정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8:28) 인도하실 터이므로 이에 순종하면 헷갈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나름대로 명분을 내다걸어 교회를 탄압하고 이를 위해 법을 정해 이를 무자비하게 시행할 때는, 그 선악이 분명히 가려졌으므로 그런 악법을 따를 의무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함과 같다. 국법을 준수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그 이름을 앞세워 따르는 것이므로. 때문에 "내가 첫째로 권하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1-4) 하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 11:4). 이는 <우리가 끊임 없이 죄를 짓으니까> "그 죄를 용서해 주십사"가 아닌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죄 짓게 함)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다"(요일 3:8,9).

과거의 모든 죄 다 용서하심 받아 더 다시는 나를 위하는 자아중심이 아니지만, 오늘이라도 누군가가 내게 해를 입히는 것을 못봐주고 마음 속에 재어 두어 악감정을 풀지 않고 서운함이나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 <지난 날의 모든 용서하심이 일체 백지화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5) 하셨기 때문.

이런 경우를 말씀하심이다. 예수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네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눅 24/34) 하시고 본을 보이셨듯이. 스데반이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어,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말을 마치고 잠들었다"(행 7:60) 했듯이.

"천국은 그 신하들과 채무 결산을 하는 어떤 임금과 같으니, 정산할 때 1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는데 갚을 것이 없는지라 왕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고자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조금 참으시면 다 갚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고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신하가 나가서는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불과하나,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큰 액수)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하니 그 동료가 엎드려 빌며 '참아 주시게, 갚겠네' 하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 동료들이 이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게 여겨 왕에게 가서 그 일을 다 말하니 이에 왕이 그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으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어버렸다"(마 18:23-34) 하심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6:25). 각종 손실을 당하고 재해를 입는 등의 이 세상 모든 일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등의 세상 스쳐 가는 수준의 자질구레한 잣단 것일 뿐이다. 우리가 구원된 이후에도 줄곧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세상에 "보내심 받아"(요 20:21)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함 오직 그 때문이다. 하나님 모르던 과거 시절처럼 세상 계속 살라고 하심이 아닌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목숨"이요 "몸"이다. 멸망할 것을 다시 살려 주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안겨 주시고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이 되게 하신 터에, 이 이상 더 우리가 바랄 것이 무엇인가. 황송하옵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여, 은혜로 얻은 생명, 그 <자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이에 비하면, 이 넘치는 은혜의 영생의 희망과 동경하는 바 그 모든 영광의 기대에 비하면, "원수 사랑", "악을 선으로 이김" 등이 무슨 대단한 것도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뿐이다. 세상 자체가 죽음 일색임에도 마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는 것", "삶"으로 오인하는 착각에 휩쓸리다보니, <억울하게> 죽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지, 남 밑지지 않게 세상 살겠다는 이전의 철부지 욕망만 툴툴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먼지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니까. 실상이 그러하니까. 알고 보면 신기루에 불과함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이 하나님 교회에 사탄의 핍박과 환란, 각종 탄압이 가해질 리 만무함을 알아야.  무의미와 허무/虛無 일색인 세상이기에 이에 격이 맞도록 가해지는, 아니, 실제는 엄청난 전화위복의 하나님 은혜로서의 이세상 핍박과 환난(재난)', 환란(재앙)인 것이다.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닌 것이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명'과 '사망' 사이의 격차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물은 곬으로 흐르듯이, 구름은 하늘에서만 떠돌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움일 뿐이다. 오직 <인식 전환>이다. 제대로 인식하고 의연히 말씀대로 따라가면 거칠 게 없다. 죽음("육의 몸", "낮은 몸")은 죽음대로, 생명("영광의 몸", "신령한 몸")은 생명의 참 모습 그대로 직시하여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보 일보 전진해야. 세상은 "만질 것도, 붙잡을 것도, 맛볼 것도 없이, 쓰는 대로 <부패/썩음>"(골 2:21,22)으로만 끝남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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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명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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