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1일 화요일

주기도문 명상 (11)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할 것이다"(야고보서 4:7).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이다"(골 2:15).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악/(evil)에서 건져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주님 가르치신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이고 또 인간 아래 격이 낮은 동물들뿐이라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영장/靈長이요 인간 이상 가는 것이 없는 세상으로 보이나 슬프다, 눈은 떴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가 무진장으로 깔려 있고 널려 있는 이 세상인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원수들(창 3:15), 적대자들이다.

눈에 보인다고 득될 것도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없다보니 아무 일도 없는 양 천하태평으로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 더 끔찍스러운 것이다. 코 앞에 온갖 비극적 위험과 위협을 앞두고도 허허허 웃고 지내는 인생들. 처연/凄然하기보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미친 마음"(전도서 9:3)들이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또 있을까. 이 무슨 변괴/變怪인고!

이런 실상을 제대로 아시는 예수 우리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에서,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고 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 성으로 가까이 오시자 성을 보시고는 <우시며>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눅 19:41) 하셨다.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으셨다"(히 5:7).

이 세상은 비애와 고통, 그리고 눈물이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 20:18-21).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26-35).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으니..."(고전 2:4).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 3:18).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시 6:6).

창조주로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사람으로서 우리의 최고 완벽한 본(보기)이 되시고 가장 기본 모습이 되신 주님께서 눈물을 보이셨으니 눈물 없는 이들마다 "우리가 얼마나 정상에서 벗어나 정서상 메말라 있는 비정상인가" 자탄/自嘆해 마지않아야 할 일이다. 우리 믿음의 사표가 되는 바울 사도 역시 그 <눈물>의 목회/牧會적 삶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에 마땅히 유의해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포효하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음이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다"(벧전 5:8,9). 그러한 사탄을 직접 보는 것과 그래서 노상 직접 대하는 것과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런 줄로 인식하는 것과는, 불행히도 현재의 동물적 육체에 처한 우리로서는 하늘과 땅 차이임을 느낀다.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직접 대하면서 대비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격차를 가볍게 여길 때 화가 있다.

우리 앞의 적대자는 365일 24시간 우리를 노리는 자이다. 이 세상이 그의 영역인 것이다. 인간의 세상이 아니다. 사탄의 왕국이다. 그 권세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모든 영광이 그의 것이기에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습니다" 하고 기도하라 하셨으니 마땅히 마음에 둘 일이다. 이는 "세상에게 한 순간도 굴복하지 않도록 해 주십사"의 간구요 그 모든 시험에서부터 지켜 주시기를 갈구함이다.

이와 같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방금 지적한 <눈으로 직접 확인함>과 같은 <대비> 태세를 취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기본 자세가 되므로 우리의 모든 기도 전이나 후에 주기도문을 곁들임이 좋은 것이다. 입에 너무 익숙하므로 그냥 건성으로 외듯 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며 우리 자신을 긍정적 의미로 세뇌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를 쟁취하신 주님과 하나된 우리 각자는 마귀와 당당히 맞서 대적하면 원수는 물러서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함이 병행되어야 함이니, 이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제 성취하심>일지라도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에스겔서 36:36,37)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으로써만 완전하게 결실하는 이치와 같은 맥락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생명의 법칙에서의 '상대성의 동시성'으로 맞아 떨어져야 모든 것이 비로소 통하는 하나님 법질서의 엄숙, 엄정함인 것이다. 우리가 처한 이 자연계에서 자연법칙이 철두철미 빈 틈 없이 운영됨을 보아서도 우리는 충분히 이를 음미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어야"(빌 2:12) 하는 이유다.

우리가 현재 천하무적 막강하신 "마지막 아담"의 나래 아래 위치하여 원수에게 명령할 수 있고 제압할 수 있지만(야고보서 4:7), 그러나 이로써 사탄을 완전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무력화는 그의 멸망을 말함인데 그 종말은 "마지막 심판" 때에야 이루어진다. 주님의 재림 때에도 일시 유폐되어(무저갱에) 활동을 못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 유폐 기간이 끝나면 일시 방면되어(계 20:7) 움직이나 끝내 패망하여 마지막 심판 후 불 못에 던져진다.

그렇다고 사탄이 무의미한 로봇처럼 되어 활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딴에는 잘만 하면 국면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터이다. 이는 사탄이 일개 피조물로서 또는 능력의 한계가 있어 판단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실제 하나님께서 공평공정하게 언제나 만사를 처리하심이다.

사탄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므로 최선을 다하면 돌파구를 열 수 있다고 자신함이다. 실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사탄 자신이 잘 아는 터이다. 마지막 순간 그 직전까지도 그러한 확신 속에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피조물이라고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시는 일을 아니하신다. 자유 의지 아래 충분히 제 역량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 주심이다. 원리원칙에 어긋나니 책망하시고 징벌하시며 멸망에 이르게 하심일 뿐이다.

뱀을 "지혜롭다"(마 10:16)고 창조주이신 주님 친히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지상의 뱀과 에덴의 용은 대칭이다. 자연계 물질의 속성 그대로 초자연계 영적인 것과 짝을 이룬다. 자연계 동물과 짝을 이룬 것이 에덴에서 창조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창 2:19)인 것이다.

이미 각종 동물은 제4, 제5일째 되는 때 창조를 마치신(창 1:20,24,25) 연후다. 고로 에덴에서 또 똑같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2:19)를 만드실 리 만무다. 이전 것과는 별개의 생물이니 곧 영물/靈物임을 뜻한다. 에덴이 영계라는 것이 이로써도 입증된다. 성경을 읽어도 성령께서만이 친히 가르치심인 줄 의식하는 것이 필수다.

영계로서 초자연계 속성인 에덴에 자연계의 동물들이 그 짝(대칭)으로 용/등 영물/靈物을 갖춤과는 별개로, 인간은 그 대칭성적 존재인 영혼을 자기 몸 안에 갖추게 된다. 즉 우리의 영(혼)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자연계 동물(짐승)과 같은 모양새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뱀을 지혜로운 습성으로 만드신 그대로 그 짝인 에덴의 용/도 창조하신 것인데 이 영특함(지혜스러움)이 도리어 교만으로 작용하게 되어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인 아담을 시기하기에 이른다. 하극상으로 시해/弑害하기까지 하는 망동을 부린 것이니, 즉 거짓말로 여자를 꾀어 선악과를 먹도록 부추긴 것이다. 여자와 뱀 다시 말해 교회와 사탄 간의 "원수"(3:15)됨이 이로써 발단된 것.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신령한 몸을 잃고 동물성 육체가 되기가 무섭게 신령한 광채는 사라지고 벌거숭이가 됨으로써 옷(의복)의 유래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고귀한 신분의 아담인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도록"(눅 12:27) 창조하실 리는 만무하다. 이로써도 아담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음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

그럼에도 인간이 처음부터 이런 동물적인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놀아남으로써 전도의 문이 크게 막혔던 것이니, 이런 비정상적인 육체로 인한 인간고/人間苦가 엄청난 것이라, "이런 고통을 인간에게 끼친 하나님"읊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주를 마음 깊이 신뢰할 수 있느냐"는 회의론에 빠지게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21세기 오늘날 "마지막 때" 모든 전도자는 모름지기 성경대로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띄고 있다.

우리가 "마지막 아담"과 하나를 이룬 교회로서 아담 고유의 절대적 권한과 권위로 사탄 일당을 제압하지만, 아담 범죄 전과는 달라 사탄의 세상 통치권(첫사람 아담에게서 넘겨 받은ㅡ눅 4:6)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각종 핍박과 시험의 대상이 됨은 필연이요 불변이니 이에 유의해야. 그런즉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골 2:15)하셨은즉 주님을 머리로 모시어 그 몸된 교회로서의 우리 역시 동일한 행보로 초지일관해야.

즉 <주님과 같이> 십자가 고난, 죽음의 고통으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고난 고통과 직결되니까. 그리고 성경은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골로새 3:3,4)이라 했으니까.

때문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하였다. 즉 "우리의 돌아보는 것(관심사)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고후 4:18)이다. 세상사, 세상 사랑은 가시적인 것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이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다. 물질로서 썩는 것이요 시한부다. 신령하여 영원무궁한 몸으로 애초 창조되었었던 우리 인간의 속성이 아닌 것이다.

자기 속성도 아닌 짐승의 속성인 한낱 썩는 물질에 불과한 그런 구차한 목숨에 연연하고 관심을 두는 것은 처음부터 영광의 몸으로 우리를 창조해 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엄청난 불경스러움이 됨을 왜 눈치채지 못하나! 애초 이렇게 구차하게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다면 탓할 것이 없으려니와 처음부터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른 사고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가증스럽게 보시는 범죄의 결과>로 이런 꼴이 되었는데도 이걸 두고 세상사, 세상 사랑으로 세상에서 희희낙락, 시시덕거리다니! 이는 하나님의 맹렬하신 "분노"(시 7:11)의 불길에 기름 붓기인 줄 알아야. 내가 하나님 위치에 있다고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뻔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신명기 4:24), 이 둘은 "하나"이다. 물질의 파동성과 입자성 2중 구조에서와 똑같이 그 원리대로, "사랑"이 나타나면 "소멸하는 불"이 나타나지 않고 후자가 나타나면 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둘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쪽이든 마치 그 전체가 그것뿐으로만 인식된다는 뜻이다. 소멸하는 불로 드러나시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무자비한 폭군처럼 시종일관하시어, 자비와 인애는 그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의미로 정착됨을 의미하는데, 이를 깊이 마음에 담아 두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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