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4일 수요일

"잘 있거라 세상아 나는 가노라" 하는 소위 "휴거"의 헛된 꿈에 젖지 말고 단 몇이든 구원해내고자 죽을 각오로 주님 일 하다가 주님 맞을 준비해야

 










현재 세계 인구가 77억인데

성령으로 거듭 난, 구원받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1억은커녕 10만이라도 족히 될까ㅡ

1천만의 숫자라도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러나 그 구원될 자를 위해 우리는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전달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 사람의 참된 구원을 위한 평생의 고초도 감지덕지해야 합니다.

거의 77억 인구가 결딴나버리는 전무후무한 환난을 당해 

우리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히 5:7)해야 합니다.


언젠가 누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내가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언제 한 번 교인의 장례식에 갔었는데

거기서 교인들이 태연히 희희덕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만정이 떨어지더라. 소름까지 끼칠 정도였었다."

고인이 천국 갔을 것이 확실하니까 슬퍼할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죽임을 당했을 때

형제들이 그 때 기뻐 뛰놀며 찬송을 불렀던가요?

대성통곡을 했습니다ㅡ"크게 울었다"입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던가요? "경건한 사람들"(행 8:2)입니다.

나는 휴거되어 들려 올라갈 것인데 무슨 걱정이냐 하는 이들은

자기의 휴거보다 남은 이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노심초사(고후 11:28)할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묻혀 사느라 너무 바빠서ㅡ. 





삶: 사람 사랑

 












2020년 11월 3일 화요일

가장 핵심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ㅡ

 










속임수, 거짓, 가짜 등은 법질서를 입에 올리는 법이 없습니다.

마귀가 만들어내는 세상 종교 역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인 복음(福音)(희소식)도 그런 범주에 넣으려고

사탄은 용을 써 왔습니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식의

아주 공짜로 구원되는 듯한 인상을 주려고 했던 것이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본연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니 곧 짝의 법칙에 의한 생명의 법칙입니다.

성경에 죄를 정의하여 "법을 어기는 것"(요일 3:4)이라 했습니다.  

의인(義人)은 법질서 준수자, 하나님께서는 법질서 확립자.

만물 만상은 법칙 따라 올아가고 모든 생물은 법질서 따라 살고.

메시야 예수님의 우리 위한 십자가 죽으심에 의한 구원도

짝의 법칙(대칭 원리)에 근거한 생명의 법칙 따라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진실, 진리이고

고로 이 자체가 거짓이 있을 수 없다는 확증이기도 합니다. 

모든 거짓, 속임수는 피조물들의 악한 작품, 그래서 불법입니다.





천국, 지옥 보았다고 믿는다면 그럼 이제껏 하나님 말씀은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런 불신자가 천국 지옥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결론이니 <믿음은 오직 말씀에서 온다>(롬 10:17)

 






그러므로 아무리 이름 있는 자라도

천국, 지옥을 보았다는 것으로써 전도하는 자는

진리에 바로 서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니 조심할 일이다.

천국이 있음을 확인했으니 그 천국을 사모하도록 유인하거나

지옥이 무서운 줄을 알아 그 지옥을 피하기 위함이 목적이라면

"진리 사랑"(살후 2:10)과는 거리가 멀므로 강제, 간섭이 된다.

아담이나 영물(靈物)들이 하나님의 죄의 징벌을 몰라 범죄한 것이 아니다.

진리를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 헛된 꿈을 꾸는 자아중심이 된  것.


창조를 믿어도 창조주를 머리로 하는 생명의 법칙을 모르면

그래서 몸과 머리 관계의 둘이 하나됨을 모르면 그 믿음과 지식이 무의미다.

창조를 부인해도 신기루에 그친다.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난파선이다. 

양면성의 동시성인 생명의 법칙은 짝의 법칙이 그 모태(母胎)이다. 



2020년 11월 2일 월요일

이세상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제1 현안 과제가 무엇인가ㅡ정확히 짚어내면 아래와 같으니 세상 사람들아 여기에 당신네 사활이 달렸다

 










자면서도 깨면서도

먹으면서도 마시면서도

오직 할 말은, "다시 나야 하고 새로 창조돼야 한다".

웃으면서도 울면서도

다투면서도 친하면서도

오직 우리 의식은, "다시 나야 하고 새로 창조돼야 한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혼자 있든 함께 있든

오직 우리의 주제는, "다시 나야 하고 새로 창조돼야 한다".

사람도 가고 세상도 가고

이합집산은 되풀이하지만

마침내 끝이 올 것이니 "다시 남으로 새로 창조돼야 한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좋아도 좋은 것이 아니니

오직 "다시 남으로 새로 창조돼야 한다".

"다시 남으로 새로 창조되기" 위해 세상이 있건마는

이 세상 왕이요 신/神인 악마는 마치 사람 사는 세상인 양

수 천년을 속여 왔지만 보라! 심판의 때는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고하노니, "다시 남으로 새로 창조되어야 한다"!




2020년 11월 1일 일요일

성경을 사람이 결단코 지어낼 수 없다는 그 독보적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 또 하나 있으니ㅡ

 






사람이 지어낸 것이라면

메시야 예수님 혼자 우리 위한 고난 다 당하셨다 하

그 고난을 교회도 담당하도록 남겨 두셨다고

복잡하게 말할 줄을 모른다. 

거짓말이기 때문에 단순 밋밋하고

진리이기에 복잡 오묘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이기에 이해하기 복잡하고

진리이기에 알아듣기가 지극히 간명하다. 

법칙을 따라 그리고 진실을 따라 큰 가닥만 따라가면

실타래 풀리듯 슬슬 잘도 풀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가 다시 세상에 와야만 하는가?" 하고

무갈 제국 영걸 아크바르(Akbar)가 물은 것도

성경에 관심이 많고 또 그 판단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다.

그가 성경을 직접 읽었더라면 반드시 아래 질문도 했을 것.

즉 "왜 그리스도의 남은(덜 채운) 고난이라 했는가?" 

천주교 신부들이 기독교교리 강론에서 "재림"이란 말을

꺼냈기 때문에 당장 던진 질문이었다. 

영원히 존재했어야 하는 아담이 죽은 까닭이라는 이유를

당시 천주교가 지금도 그렇지마는 알 리가 없다. 

세상 종교의 특징은 "이 세상 살기도 하고 영생도 얻고"이다.

진상(眞相)은, "아담이 죽었기 때문에 악마가 세상을 차지했은즉

악마 지배의 세상은 결코 살 곳이 못되고 

하루바삐 본시의 영광의 몸으로 회복하는 것만이

유일의 관심사"라고 시종여일하게 주장함에 있다. 

썩는 시한부 육체로써 살려는 것이야말로 "미친"(전 9:3) 것 아닌가.


성경이 지어낸 것이면 메시야의 몸된 교회가 

세상에서 시종일관(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핍박의 대상이라

설정해 두지를 않으며 더군다나 마귀가 이 세상에서

두목 노릇을 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 상상도 못한다.

바벨론인 로마 카톨릭이 하는 행사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악마가 이세상 왕이라는 성경적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까지 행해 온 것처럼 세상에서 소위 신권(神權)을 빙자하고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 권력을 쥔(죽음의 권세까지 장악한)

사탄과 한 통속이 된다는 것이야 어린애라도 알 수 있기 때문.

성경에 명명백백하게 씌어져 있어도 무시하고서 그러할진대

처음부터 거짓말로 지어내는 것이라면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다.


자아중심은 스스로 약하고 천하고 낮아지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그런 식으로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니까 하실 수 있다고

한정시켜버리고 우리 인간은 그 덕에 그 "은혜" 하나로 

강한 자, 부귀한 자가 된다는 것으로 종결시키면 "훌륭한" 종교다.

강력과 부귀의 영광을 미래(죽고나서)에만 결부시키지 않고 

바로 현재 삶과 연관시키지 않으면 거의 아무도 믿을 자 없기 때문.

그럼에도 오늘날처럼 성경을 제대로 믿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것은

의와 선을 다시 말해 "진리를 사랑하기"(살후 2:10) 때문이고

이런 사람들을 미리 아시고 택정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진리 자체를 사랑하니까 일시적(이세상에서의)인 약함, 천함, 낮음을 

개의치 않는 것은 당연하고 이런 모든 것이 또한 합리적이기 때문.

바로 이런 것이 이성적 존재인 인간과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의 차이.

이런 합리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담의 육체적(영적이 아닌) 죽음

및 범죄(말씀 무시)로 인해 사탄 아래 노예가 된 현 인간 세계이다.

이 두 가지(인간의 죽음과 악마의 인간 지배)는 

이러한 인과 관계가 아니고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건마는

마귀는 막무가내로 속였고 또 인간은 대책없이 무조건 따른 것이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끌려가게 되어 있는

자연계 육체의 상대적 열악성은 이로써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아직도 종교에 머물고 성령을 받지 못한(구원되지 못한, 거듭 나지 않은)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죄는 불복종이요 이는 하나님과 원수됨이기에(롬 8:7/약 4:4) 그러하다.

불복종과 "주님"은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 상극일 따름이다.

"주님"은 그냥 부르는 명칭이 아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마 7:21),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않느냐"(눅 6:46) 하심과 같다.

철저한 노예이되, 단지 내 스스로 하는 사랑의 노예라는 것만 다르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친구로서의 노예라는 것이다(요 15:15)

말씀하신 대로 행함, 그 뜻대로 행함이 없이 주님이라 하면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사이가 원만하여 지금이라도 천국 가는 줄로 믿는다면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으로서 자기 기만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는 것은 겸손도 아무것도 아니다. 불신뿐이다.

말 그대로 죄인일 뿐이니 죄인 곧 불순종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구원 받은 것도 아니니 하나님의 명령대로 회개를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의 뜻(지시)대로 하지 않는 자가 어찌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랴.

아버지의 뜻은 곧 아들의 뜻, 우리의 직접 머리가 되시는 분의 지시인데

이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가 어찌 몸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겠는가.


마귀는 그 "바벨론" 신학으로 많은 종교인(기독교인)들을 양산했다.

이제는 감연히 떨치고 일어설 때이다. 명실공히 "마지막 아담"의 지체가 될 때다.

머리이신 우리 임금, 주인, 나를 소유하신 소유주 하나님(요 20:28)이신데도

"예수, 예수"ㅡ"님"자는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이 된 지 오래다.

철없기는 영미/英美인도 마찬가지. 지저스(Jesus), 지저스(Jesus), 아이 이름 부르듯 한다.

친밀한 뜻에서 그렇게 한다지마는 득보다 실이 많은 잘못된 인식이다. 

바울 사도는 그의 목회 서신(히브리서를 포함해)에서 반드시 "주/主"란 명칭을 붙였다.

예외가 있다면, 진리의 설명 과정에서 한두 번 "예수"라고 한 적 외에는.

바울 사도는 우리보다 더 "친밀감"을 못느껴 그러했던가?


사랑 일변도의 하나님으로만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꼿꼿한 충절의 절대 복종만이 요구되는 바, "소멸하는 불"(히 12:29/신 4:24)이시다.

마귀의 거짓말 농간으로 인해 지금껏 잘못 배우고 잘못 인식하는 것이다.  

령의 감동감화하심을 사모하며 성경을 직접 부지런히 읽는 것 외에는

이 2천 년 가까이 덕지덕지로 끼어 돌같이 굳어져버린 때를 씻어 내기가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이러한 상황을 지적해주는 이가 거의 없기(마귀에게 세뇌 당하여) 때문이다.

오직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친히 가르쳐 나타내 주시지 않고는ㅡ.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육체 인생들을 마귀가 철저히 거짓으로 통제한 때문.

이 마귀의 철통같은 지배를 뒤집는 일은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도함(유 1:20/엡 6:18)

다시 말해 "마지막 아담"을 통한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찾는 자가 찾고, 구하는 자가 얻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고 약속하셨다.

 

여러 번 시험에서 하나님의 두려우심과 그 진노를 보면서도 범죄함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장정의 수효가 60만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 우 둘.

이 사실이 상징하는 바에 유념하라고 바울 사도는 되풀이해 경고했었다.

하나님의 한량 없으신 은혜로 구원은 받았으니까 그래서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니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고 영물 중 악령들처럼 영원 멸망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험은 짧은 이세상으로만 한정된다.

이 세상은 바로 이 시험 기간으로서의 의미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 치더라도 그 후대들만은 영물들이 악령, 천사로 가름되듯

갈라지게 마련이므로 이런 시험의 때는 "마지막 심판"과 함께 불가피한 것이다.  

이 과정이 완료된 때부터 영원 생명의 세계와 영원 고난 고통의 세계 즉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세계와 그 반대인 하나님의 위엄과 진노의 세계로 대칭된다. 

사탄이 거짓말로 속였어도 아담의 경우처럼 자업자득이다. 누구 탓 아닌 내 탓이다.


처음 창조의 "옛 사람"은 홑(단/單)사람이니 나 홀로이다.

반면 새 창조로써 "마지막 아담"과 머리/몸 관계를 형성해 있는 "새 사람"은

영혼(성령 곧 주님)과 육체(나 자신)의 대칭으로 된 "한 영"(고전 6:17)이므로

겹(복/複)사람이니 영원히 주님과 <하나된 둘>(둘로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령(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신 "마지막 아담"-요 10:30) 곧

"아들과 아버지를 모시고"(요이 1:9) 있는 새로 창조된 존재인데  

어찌 그 몸이 "하나님의 성령"(고전 6:19)이 아닌가!


고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해야"(갈 6:25) 함이니

사이비 집단이나 성경대로 따르지 않는 소위 "기독교"마다 

십자가 지신 "마지막 아담"과는 동떨어진 세상의 부, 귀, 영, 화를 추구한다.

화려한 치장(천주교의 성당, 사제 복장), 웅장한 건물(교회당) 등등.

사이비 이단 "신천지교"의 행사에 교주의 차림새, 군대식 사열까지 받는 따위 등.

알아야 하는 사실은 지금도 "마지막 아담"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이시니

그 교회를 통하여 그러하시다. 머리 쪽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나 

발바닥 쪽은 여전히 그 "남으신 고난"(골 1:24)을 통해 

이 세상에서의 그러한 모습이시라 할까.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뒤쫓으라(눅 9:23/14:27) 하신 것이다.  

현재 그러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형상이신 까닭이다. 


짝의 법칙에서 머리는 몸의 것이요 몸은 머리의 것이다.

몸으로 보면 몸이고 머리로 보면 머리이며 둘은 불가분이다.

머리이신 주심께서 하나님 우편의 영광 가운데 계시나 동시에 위치하신 곳은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그 몸된 교회 가운데다. 

같은 이치로, 고난 받는 그 몸된 교회로서의 우리는 현재 

하나님 우편에 있어(엡 2:6) "마지막 아담"의 신부(新婦)로서 그 위세 막강하다.

현실적으로 그러하다. 단 "주님을 위한 고난 받음"(빌 1:29) 즉

그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움"(골 1:24)은 "약한"(고후 13:4) 데에서 이루어지므로

현재까지의 교회 수난사(受難史)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