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0일 수요일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 아래 광야의 길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는 것이다"(고전 15:44). '육의 몸→신령한 몸'의 순서/단계는 지금 우리에게만 비로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담 창조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지금의 우리는 그 짝을 이루어 있는 것뿐입니다. 즉 "첫사람 아담"(:45)과 "마지막 아담"(:45)의 대칭성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는 때를 가리켜, "보라...비밀을 말하니 우리가 다 잠잘(그리스도인들의 죽어 장사지내짐을 가리킴ㅡ행 7:60)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이니 나팔 소리가 난즉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할 것"(고전 15:51,52)이라 했습니다. 즉 주님의 재림이 그 <때>입니다.

소위 "휴거"라는 것은, 세상 끝이 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 거의 모든 이들이 죽음을 맞았지만("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마다 죽임을 당하므로ㅡ계 13:15) 그래도 소수 살아 남은 자 중 일부에게만 해당됩니다. 이렇게 공중으로 들려 감을 받는("휴거") 이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현재의 육체 그대로라 천년 왕국(아담 때처럼 천년 가까운 수명을 누리는 시대)에서 자식들을 낳고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멸망의 대상자는 물론 제외하고.

이들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은 절대 다수가 젊은이들로서 장차 천년 왕국을 구성할 인원/人員이기 때문. 여기 속하는 극소수(이사야 13:12) 청춘 남녀는 주님 재림시 멸망은 면한 터이지만 신령한 몸에서는 제외되었으니 구원은 받은 몸이나 주님을 위해 이렇다 할 고난은 받지 않아서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딤후 2:12)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천년 왕국에서 부조/父祖 역할로만 한정될 뿐이고, 왕권/王權 행사의 자격은 없습니다. "천년 왕국"이란 것은 반복 설명이지만,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잠깐 즉 천년간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마지막 심판을 실시했을 필연적 과정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폐기, 유보되었다가 "마지막 아담"께서 "첫 사람 아담"을 이제 대신함으로써 그 순연/順延, 보류되었던 아담의 세상 통치가 지금 비로소 진행됨에 있음을 뜻 합니다.

아담 자신은 비록 범죄하지 않았더라도 그에게서 난 소생들 중에는 분명 선악과에 손대는 자들이 일부 생기게 마련이고 그것도(아담의 통치 중이라) 벼르고 벼르던 끝에 일시에 집단적으로 저질렀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동물적 육체가 생겨나 한 세상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상정/想定한 것이 "마지막 아담"의 이 "천년 왕국"인 것입니다.

일부가 그런 범죄 행위를 했을 것이고 나머지는 그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럴 경우 지금처럼 아담도 신령한 몸일 것이요 또한 가담치 않은 자들 역시 그러한 아담의 소생들이니까 신령한 몸 그대로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 때에도 신령한 몸을 가진 자들은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범죄자들에게 신/神과 같고 왕/王과 같은 존재였을 것.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 터라 "마지막 아담" 즉 사람의 아들들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애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유추/類推를 통해서도 너무나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 받기 전에 소위 "휴거"를 통하여 그 재앙을 비켜 간다는 자아중심적 망상은 아주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이기적이고 저속한 탐욕적인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아 구원된 사람의 특징은,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내고 믿음을 붙들어 주고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합심 기도에 항상 몰입해 있어 그런 넋 나간 잡념에 빠져 있을 여가가 도무지 없으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 1) 바로 이것이 "깨어 있음"(마 24:42, 43/25:13)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일단 구원 받았으니 이는 영구 불변이라 이제는 마음 놓고 태평스럽게 지내도 좋다는 말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고후 13:5)라는 경고만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7) 했듯이 쉬지 않는 상호간의 기도를 역설한 것은,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절절한 경고와 맞닿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로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너희 중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전 11:18/히 10:25/ 3:12,13) 한 그대로입니다. 히브리서도 그 문맥과 내용 등으로 판단컨대 바울 사도의 글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상 모든 것은 구원 받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구약의 핵심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짚트 탈출과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 여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묘사함이요 관련된 모든 경고/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짚트의 압제를 알단 벗어났으니 이는 우리의 <구원 받았음>에 해당합니다.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나 광야 통과는 절대 무시 못하는 <현실>이요 실제 난관이었던 것임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이짚트(애굽)를 탈출한 장정/壯丁(20세 이상)이 60만(출애굽기 38:26)이었는데 그들 중(장정 수에 들지 않은 이후 성장한 나머지는 제외) 실제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오직 둘뿐이었으니 그 함축하는 의미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거짓말은 이같은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전하다", "평안하다"는 말만 남발해 왔고, 그리하여 모든 각종 비극으로 유도해 온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어도 마귀가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범죄 형벌 차원에서도 악령들의 개입이 당연시되니 오호라! 곤고한 인생들입니다. 핍박과 탄압만 아니라 온갖 거짓이 난무합니다. 바벨론 신학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험한 광야 길이 그 명백한 상징입니다. 광야 자체가 이 세상 상징입니다. 사람 살지 못할 황무지 일색이 현세의 가감 없는 특징적묘사입니다.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착각하면 영혼의 영원한 삶을 잃거나 빼앗깁니다. 오직 성령의 "불 기둥, 구름 기둥" (민수기 14:14)의 인도하심 따라 일보씩 조심해서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전도서)

전도서 3:11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 성)을 "사모하는"영원 마음을 주셨다고 되어 있는데(한글개역), 영원성의 신령한 몸을 아담 범죄로 잃었으니까 그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론이라 생각하면 그뿐이나, 혹여라도 처음부터 인간을 이같은 죽는 육체로 만드셨다는 근거로 삼을까 저어하여 몇 자 적는다면, "사모한다" 함은 우리말 번역자의 의역/意譯일 뿐 58개 영역(BIBLEGATEWAY) 모두 단순히 "생각하게 만드셨다" 정도이고, "영원(eternity)"이란 것도 28개 역본만 그렇고 나머지 군데에서는 "세상" 등으로 달리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래 인용 게시물을 참고하시기를.

"마지막 때"로서 21세기 지금 이 시점은 "바벨론"(계 18:4)의 모든 거짓된 사탄의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처음부터 계시된 복음 그대로를 가감 없이 전달할 때입니다. 아담의 여자와 "뱀"과의 에덴 대화를 두고 "뱀이 무슨 인간과 통화하느냐" 따위의 신화/神話와 같은 인상을 사탄은 만들어 주어, 성경 자체를 아주 지능적으로 폄훼하여 성경을 멀리하게 해 교회에 최대 타격을 입혔던 것입니다.

3위1체에 대한 몰이해는 물론이고, "처음부터 인생에게 인간고를 안겨 주신 하나님"(아담 범죄로 야기된 동물적 육체로서의 현재의 비극임에도 도리어 하나님께 뒤집어 씌움으로써ㅡ"영적 죽음"이라 하여)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하나님과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든 장본이 되어 온 "바벨론 신학". 사탄에게 장단만 맞추어 온 일체의 짓거리를 이제부터는 헌신짝처럼 버려야,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여겨야, "날마다 분노하심"(시편 7:11)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에 보조를 맞추지 않는 자 무릇 누구든지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2025년 9월 7일 일요일

세상 최고의 강자들(하나님 아들들)이 쓰는 천하무적의 무기(무술)




유한한 우리 인생들이라 그 하는 일도 유한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 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1,42) 하셨으니 "몇 가지"가 아닌 "한 가지"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다"(요 12:47)하신 대로 주님을 머리로 모신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머리께서 하신 대로 하고 본을 보이신 대로 따를 뿐 달리 다른 무엇을 생각하여 "염려하고 근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로 우리도 "사람 살리는" 알에만 오로지 전념합시다. 몸 자체가 죄만 짓도록 되어 있는 기계적 움직임만 가능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깁시다.

아담 범죄의 결말로서의 이 선천적인 악함은 <죄인으로서의 하나님 앞 회개>의 경우에만 유용할 뿐 일체 쓸모 없는 것이라 오직 구제책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는 것뿐입니다. 즉 우리가 절대적으로 무조건 순종하게 되어 있는 머리이신 우리 구세주 예수("구세주"라는 의미)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나의 것으로 전폭 수용하는 믿음으로써, 이 "죄의 몸"의 쇠사슬을 아주 끊어버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에 있읍니다.

원수 갚고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죄를 용서하지 않는) 따위의 일은 우리의 소관사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 하실 몫인즉,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등의 "참고 선을 행함"(롬 2:7)에만 전심전력을 다합시다. 바로 이것이 사탄 마귀를 한 번에 내리찍어버리는 천하무적의 철퇴이니까. 왜 이 좋은 무기를 버리고 다른 것을 찾느라 전전긍긍 야단인가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현자에 불과한 이솝도 "해와 바람의 힘 겨루기ㅡ길 가는 행인의 외투 벗기기" 우화를 말하지 않았던가요. 하나님은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장치하신 양심의 초능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양심"이라는 급소를 치는 전술전략으로써 선으로 악을 이기는 현책/賢策을 오늘날 세상에 크게 퍼뜨림에 앞장 섭시다. 그들이 복 받아 거듭 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원수 위한 기도"(원망과 증오 대신)를 힘씁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들들만의 모습입니다(눅 23:34).

2025년 9월 5일 금요일

3운법칙의 경이/驚異 및 그 막강한 생명력은 그 정해진 시기와 목적이 명확히 밝혀짐에 있다



지금은 주님 재림이 임박한 때로서 악마와 그 일당들의 최후 발악이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믈들이니까 초능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인 줄 아는 우리 믿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런 지식이 전혀 없는 세상 사람들은 악령들의 속임수 횡포에 대책 없이 휩쓸리고 요동치는 상황이니 여기 덩달아 놀아나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 시간을 낭비함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초능력을 "고도로 발달한 문명, 운운" 하며 소위 "외계인" 소동으로 위장하기에 그렇습니다. 어디까지 확장될는지, 아마 그런 "외계인에 의한 지구 창조" 정도로 확대되지 않을까,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결국 자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성경으로 애초 세상에 나타나신 창조주 하나님의 확실성 및 그 검증은 오늘날 21세기 3위1체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으로 완료/완성되었음을 항상 명념합시다. 인간의 모든 생애 하나하나가 모두 3가지 유형(3운법칙에 따른)으로만 철통 관장 지배되고 있음을 저학년 초등생 정도의 셈법을 아는 이면 누구나 <직접 검증 확인할> 수 있도록 완전 개방되어 있음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점이 우선 가장 특출한 그 자체 증명의 하나입니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런 특이성이야말로 사상 초유의 전무후무한 유일 사례라 하겠습니다. 창조주의 손길이 친히 움직이심을 목도하게 되는 그 놀라운 증거입니다. 금상 첨화로, 이 3운법칙이 왜 정해졌는지 그 정해진 <때>가 성경에 무언중에 밝혀짐으로써 그 설정된 <목적> 또한 동시에 대낯같이 그림처럼 밝혀져 최근 완전 공개되었다는 것은 경약 그 자체입니다.

마치 모세 시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비할 정도의 직접 들려지는 3운법칙 관련 설명이시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3운법칙은 처음 아담 때로부터 설정된 것이 아니고 가인의 아벨 살해를 거쳐 라멕(창 4:23)의 "소년" 살인 행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하셨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이 8,9백세였으니까 "소년"이라면 50~100살 정도였는지 모르나, 최소한 노아 때까지는 모든 인류가 팔구백년 훌쩍 넘겨 살았던 당시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라멕 이후 즉 라멕의 "소년" 살해 사건이 있게 되는데 바로 그 사건 뒤 3운법칙이 청해진 것임이 확인되는 바 왜냐 하면 950년 수명의 노아 생애 도표가 산뜻한 SN유형으로 확실하게 정해져 있음을 보기 때문. 따라서 아벨과 예의 그 "소년" 외에는 아담부터 노아까지 인류는 천년 가까이 살았으니까 "소년" 살해자 라멕 이전까지만 해도 3운법칙이 정해져 있지 않았음은 명백한 사실이 됩니다. 이유는 "소년"이 죽었으니까. 그러나 노아가 3운법칙 따라 생애를 마쳤으므로(950세로 장수했어도) 3운법칙으로 인간의 죽는 때를 정하신 그 <때>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아무 목적 없이 3운법칙이 설정되어 인간 수명이 철저히 통제될 리가 만무한 것. <특정 시기>에 정해졌으니까 <특정 목적>이 있게 마련. 다시 말해 사람의 죽는 때를 강제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강제하시느냐 하면 죽을 때가 오지 않으면 '사람'으로든 '사건'으로든 사람 목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처하심입니다.

이 <사람 죽는 때 정해짐>이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때를 따라 정해져 실현된다면 그 실현시키는 주체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니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달리 그 어떤 설명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이성과 지성이면 모든 인류에게 통하는 확고무오의 설명인 것입니다. 바로
<성경으로만 알려지신 하나님>이십니다.

(5ㅡ끝)




리가 하나님 계심을 알고 그 만유 주관하심을 확신할진대, 한 가지 확고부동의 기준이 서 있음을 보는 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실 때 공평공정을 기하신다는 것. 따라서 사람마다 적용 잣대가 서로 다른 듯이 보일 때 그것은 임시적 과도기 현상이고 일시일 뿐이라 정상(영원성)이 아니고 비정상이라 한 때 스쳐 지나감뿐이라는 증거.


둘째는, "천국"과 "불 못"은 영원한 양면성임과 같이, 고로 불변의 진실임이 자체 증명이 됨과 같이, 짝의 법칙은 영원 불변의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즉 생명과 죽음은 대칭을 이루고 그 중간도 없고 그 외 달리 무엇이 있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처럼 생명이라 인식되는 것과 죽음으로 보이는 것이 한데 뒤섞여 있듯이 보일 때, 그것은 죽음 일색일 뿐 "뒤섞인" 것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짝을 이룸은 반드시 인과, 주종, 선후, 대소 관계를 이룹니다. 서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대등하면 애시당초 짝이 형성되지를 못합니다. "남녀 평등"은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짝을 이룬 둘은 동시에 창조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자연계 생물의 양성 생식에서 수컷에게서 암컷이 나온 것입니다. 다 알다시피 먼저 '본'을 뜨고 그 다음에 그 '짝'이 되는 것을 맞춤과 같은 이치입니다.

처음부터 뒤섞였다는 것은, "본"이 되는 것이 제 구실을 못했다는 의미이므로 원본은 폐기되고 그 짝이 되었던 것만이 남게 됨이며 고로 다시 새로 작업하여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실상을 생명 아닌 죽음으로만 인식하는 유일한 설명입니다. 아담 범죄로 죽음 일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죽음'과 '비정상"인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고, 오직 장차 빛날 생명의 하나님 일에만 몰두하는 것만이 다가올 생명의세대에 참여하는 오직 하나뿐인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의 "죄의 몸" 이 "죽음"으로 끝나고 "부활"로 새로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위 설명처럼 현재의 모든 세계가 죽음과 "저주"(창 3:17)로 덮여 있고 주님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는 변함 없는 상태임을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으니까 이를 항상 명심하고 혹여라도 착각함이 없어야 합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 <인식 전환>입니다. 세상과는 차별되는 성경(하나님 말씀)적 인식 오직 하나뿐. 육지에서는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고 바다에서는 가라앉지 않는 우리의 유일한 보루/堡壘(fort)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과 "연합한"(고전 6:17) "한 영"(:17)됨입니다. '머리'되신 주님과 우리가 이렇게 <한 몸>으로서의 '몸"이라 "하나"(요 10:30)되어 있으니 주님이 영원불변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단 지금은 천하가 죽음과 저주 일색인데다 하나님의 "매일 분노하심"(시 7: 11) 아래 있는 "때"(전도서 3:1)인지라,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골 1:24) 것이 필연인즉 이에 항상 유의해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24)입니다. 세상에서 갖가지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음은 이 때문입니다. 인내로 기쁨으로 맞아야. 이 "바벨론 탈출"의 세계적인 말씀 전파 다음 순서로는 반드시 스데반의 순교와 같은 죽음("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ㅡ계 13:15)이 닥칠 것이니 이에 대비해야.

이와 같이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어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그 영(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오시어 영원히 함께 계시니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에서 우리 둘은 완전 하나됨이라, 양자역학적으로 표현하면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이 각각으로 나타나는 조화를 부리는 것같지만 엄연히 <둘이 하나>로서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만 아니시고 성자와 더불어 성부 친히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신 것이니 주님이 나와 하나되어 계심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송("할렐루야")!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 받음이 구세주 우리 주님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 오셨음과 똑같다(요 20:21) 하셨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하신 대로 <머리>되신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같은 사명을 띠고 우리도 파송됨인즉 악을 응징하고자 함이 아니요 나 자신을 온통 바쳐서라도 사람들을 구출해내고자 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음은 악을 응징하는 심리이지 구출하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취지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분부를 내 멋 대로 무시함은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중심 즉 자기가 자기를 위하려는 모든 욕구는 생명 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욕심"(약 1:15)이요 악이요 죄의 원천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내 이웃이 전적으로 나를 위함에 있으므로 내가 나를 위하면 1로서 그치나 내 이웃이 1억이면 1억배로 내가 위해지는 까닭에 가장 이상향적 삶의 방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2025년 9월 4일 목요일

(4)




아담 범죄 이후 우리의 육체 자체가 썩음과 죽음의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온상/溫床인 동물성 육체일 뿐만 아니라, "죄의 몸"(롬 6:6)인지라 죄의 화약고/火藥庫인데다, 엎친데덮친격으로 사람(아담)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닌 "원수"(창 3:15) 사탄 과 그 일당인 악령들(네필림과 그 죽은 망령들인 많은 귀신도 포함)에게 그 통치권이 "넘겨진"(눅 4:6) 상태라 365일 24시간 그들이 인간 세상에 군림하여 그들에게 시달리는 참담한 나날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과 속임수도 그 일환으로 성경은 가리켜 마귀가 "온 세상을 꾄다(속인다)"(계 12: 9)'고 한 것. 따라서 악령들이 우리(하나님께 속한)가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방치해 둘 까닭이 없습니다. 반드시 못살게 집적이게 되어 있는데도 이런 현실을 뭇하고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고 꿈꾸는 절대 다수ㅡ완전히 사탄 아래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계시는 터라 모든 것을 회복하심이 필연이지만, 만유는 "때"(전 3:18)와 순서를 따라 진행되므로 주님의 재림이 시작되어야 멸실 공히 그 통치권이 정식 발효되기에 지금은 인내로써 기다려야 합니다. 정작 복이 있는 자는 이러한 이들입니다.

불신자도 세상을 "고해/苦海"라 했으니까말 다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두고 절대 "사람 삶의 세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해,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은 그럴수록 어리석게 도 살려고만 무턱대고 발버둥치는 것. 우리는 그렇게 헛되이 발버둥침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 사람들을 구원해 건져 올리는 "사람 낚는 어부"(마 4:19) 일에 열중함이 현재 유일한 낙입니다.

그런즉러므로 때마다 우리가 피차간 강조하는 것은 세상 삶의 낙(그나마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에 한눈파는 일이 없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자는 것입니다.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 것은 오로지 썩음으로만"(골 2:21,22/창 3:3) 종결되는 이 세상이라, 스스로 멸망에 빠져 들어가는 지름길 밖에 더 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아니까.

우리의 구원은 가장 먼저 이 "죄의 몸"부터 척결함이 첫째 순서이고 이는 이 육체가 죽어 망하는 것으로만 해결되기에 주님 메시야(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허나, 죽음으로만 끝나면 아무 의미(소용)가 없고(고전 15:14- 18), 그 죽음에서 부활해야만 새 창조가 되는 까닭에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됨으로써 이 일이 완성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에서 그 흘리신 피가 내 죄를 씻는 보배로우신 피(보혈)이기에 내 죄가 용서되고 그 부활로써 나는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서의 "새 창조"(고후 5:17)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이론만으로 써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그 영(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내 안에 내 영혼이 있듯이) 친히 나와 "하나"
(요 10:30) 곧 "한 영"(고전 6:17)이 되심이니까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성령이 누구시며 3위1체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이제까지는 이 사실을 몰라도 그래서 제대로 설명을 못해도, 참으로 회개하고 참으로 믿으면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신지라 성령(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로 계심)께서는 임하여 오셨고 우리 구원에 일절 하자가 없었던 것. 남녀노소 불문이므로, 어린 아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회개와 믿음이 없이 저절로 구원 얻는 일이 없는 것은 인간이 타고나는 것이(시편 51:5) "죄의 몸"이므로 이 죄의 몸이 "멸/滅해져야"(롬 6:6)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아 또는 믿지 않고 세례 받지 않은 어린 아이가 죽으면 멸망인가? 그가 구원 받으려면 충분히 철들어 복음을 이해하고 세례를 받을 정도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구원되지 못한 것입니다.

소위 "유아세례" 등은 무의미한 인위적 종교 교리에 해당하는 것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노아 홍수 당시 죽은 자들도 회개하여 믿어 구원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영으로...전파하셨으나"(벧전 3:19/4:6) 이런 유아들이 그 죽은 자들의 세계에 가서 복음을 듣게 되는지 여부는 미상이요 우리가 궁금히 여길 대상은 아닙니다.

아니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그 영혼들이 네피림일 수도 있다는 것. 죽은 망령으로 떠돌던 네피림 즉 귀신이 무차별적으로 아무 산모의 태에나 들어가 사람 태어나는 달수를 채우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 비일비재니까. 어뗜 사유로든 철도 들지 않았는데도 요사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네피림은 원천적으로 구원이 불가입니다. 악령의 씨에 불과하니까. 이렇게 해서 네피림이 재차 생겨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윤회", "전생", "환생" 등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죽은 자의 세계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있는지라 충분히 구원될 기회가 있으니 굳이 세상에서 복음 전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는 악하고 미련한 생각을 혹 품는 자가 있겠으나, 바울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전 9:6) 했으니, 반드시 전도 활동은 수행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대한 명백한 불순종과 정면 도전이 되므로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 찍혀 그 결말은 영원 "불 못"일 뿐입니다.

전도 활동이 다름 아닌 사람 살리는 목적인즉 만나는 사람마다 그 대상이고 이 일에는 교회를 운영하는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더구나 "양 무리의 본"(벧후 5:3)이어야 하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또한 이 전도 활동에는 불신 세상을 위한 끊임 없는 제사장적 기도가 수반되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는 열아홉 전후 나이에 출가한 후 7년 뒤 과부 된 지 84년 넘게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긴 우리의 기도의 사표/師表입니다(눅 2:36:37).

그리고 주님이 경고하신 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눅 9:26)이는 경고 말씀 역시 불변입니다. 사탄 아래 있는 세상이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그 추종자에게는 시종일관 적대적이고 우호적이었던 역사가 없으니까. 우호적인 듯 싶어도 올무와 함정이라 약화시키려는 음모일 뿐이니까.

적과 싸우되(창 2:15) 우리는 적지/敵地에 위치하기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으며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고귀한 자)가 많지 않다"(고전 1 :26)고 한 이유입니다. 이 세상이 사탄의 적지/敵地입니다. 하나님 편은 당연히 막강하지만 현재 눈에 보이어 인식되는 것은 모조리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나타나기에 이는 당연지사로서 수용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써만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일임을 우리 각자는 자기 위치에서 명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이 평등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보내심 받아 세상에 오신 "주님의 일을 하는"(15:58) 위치입니다. 맡겨진 일에는 오직 충성만이 요구됩니다(4:2).

'왕이 말하기를,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을 것이다." 혹이 왕에게 고하기를 "엘리사가 도단에 있습니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말이 끄는 전투 수레)와 많은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밤중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다.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을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 보니 군대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부르짖기를 "아아, 주인님, 우리가 어찌 할까요!" 엘리사가 대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 하고 기도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원하오니 이 종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 주십시오" 한즉,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 주시므로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꽉 차 있어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다'(왕하 6:13-17).

오늘날의 엘리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어 365일 24시간 함께 하시는 만유의 주재 하나님이신 성령이십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요 14: 16)이라 약속하심과 같습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어도 살고, 지는 것같아도 최종적으로 이기고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는 일시적으로 비록 "약하고 천하고 없는 자"(고전 1:26-31)의 모습이나. 엘리사의 종의 경우처럼, 우리들의 부홣하신 주님처럼,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계속)

2025년 9월 1일 월요일

(3)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 14).


성경은 누가 읽어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결론은 우리의 상식에 속합니다. 왜냐 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됨이 아버지 뜻입니다"(마 11:25,26) 하셨기 때문. "어린 아이" 상대로 말씀하시면서 반어/反語 등과 같은 또는 기타 어려운 말을 구사하실 리 만무하신 것입니다.

위의 말씀에서, 용서하지 않는데 "모든 사람과의 화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 즉 삶 자체가 하나님만 섬김, 하나님만 위함을 뜻함이니 곧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고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 :7-9)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나타나지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살아야)"(마 7:21) 영생
구원입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21) 하셨으니까.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까. 다시 말해 나는 주님의 소유,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께서는 나의 것,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우리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이 엄정한 생명의 법칙대로 따르지 않고 제아무리 주님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고 곱백번 믿은들 그것이 구원 받음이 아닙니다. 괜히 구원 받았다 하여 자기만 속이는 꼴입니다. 평생 이렇게 자기를 "구원 받았노라"고 속이다가 마침내 죽고나서야 "속았구나!"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온다고(롬 10:1 7) 내가 믿으니까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런 이기적 욕심 하나에만 매달린 채, 하나님 말씀 자체에 대한 애착이 없어 성경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함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 사랑도 그 말씀 사랑도 아예 없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을 어슬프게 가르치고 어슬프게 배우고 피상적으로 인식한 결과입니다. 사랑은 자율/自律로서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적임을 명심해야.

성경이 칭찬하는 "베뢰아"(행 17:11) 교회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롬 12:11)는 성경의 명령을 무시한 참담한 보응 그 비극적 결말일 뿐입니다.
지금 나의 삶을 사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나 자신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하나님의 뜻읋 행할 수 없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 삶을 비로소 입에 담을 수 있다고(마 7:21) 못박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주님과 하나되기 때문이요, 갑과 을 하나됨의 필수 요건은 갑 안에 을, 을 안에 갑 즉 갑의 소유는 을의 소유,  을의 소유는 갑의 소유됨에 있어요. 더 다시는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육체로 하나됨은 "한 몸"(창 2:24)됨으로서 즉 남펀 몸은 아내 것이 되고 아내 몸은 남편의 소유가 됨입니다(고전 7:4). 자기 몸 자기 것이라 하여 자기 마음대로 해서 다른 이와 육체 관계를 맺으면 그 상대가 비록 창녀(6:16)라 할지라도 이로써 아내 남편 하나됨은 깨어져 무효가 됩니다(마 5:32/19:9).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요 17:10)이라 하실 때 이는 "한 영"(고전 6:17)됨이니, "아버지께서 제 안에,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시어"(요 17:21) 하심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저도 그들을 보내었고"(:18),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하심과 같이 구원 받은 자의 향후 일체의 (영원한)삶은 각자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머리-몸의 "한 몸">을 이루어 세상에 보내심 받은 영광스러운 대아/大我의 삶의 시작임을 명심해야. "대아"ㅡ지금은 "마지막 아담"이신 우리 주님의 재림이 아직 이뤄지지 않아 죽음의 세상에 처해 있어서 그렇지 우주 만유에 충만해 있는 영광과 생명을 다 함께 하나로서 누리는 그 놀라운 살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들을 위하여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17:19) 하심과 같이, "거룩함"의 본질은 자기 부인 곧 자아중심의 반대 개념으로서 특정 <상태>를 지칭함이라기보다 <매일매시의 삶의 의지>를 가리킴이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짐"(눅 9: 23)이라 하셨듯이. 자연계 동식물과 같은 기계적 삶이 아닌 '자유 의지'의 영적 삶을 영위함일진대 이는 당연지사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국적 견지에서 시야를 넓힐 때 원수 사랑 또는 남의 죄 용서가 그렇게도 "대단한" 것이고 "불가능한" 것일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미친 소리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파송 받은 하나님의 "사신/使臣"(고후 5:20) 또는 대리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20) 하나님의 사람 사랑의 복된 소식을 세상에 전달한다면서 사사로운 이해 관계 따라 희로애락을 나타낸다? 감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일지?

더군다나 나면서부터(아담 범죄 후) "죄의 몸"(롬 6:6)에 포로되어 불가항력으로 나타내는 그들의 언어심사인데도(7:24)? 우리가 그들의 죄의 응징자인가요? 하나님의 심판자로서의 대리인인가요? 국가 권력이 "하나님의 사자/使者(심부름꾼)" (롬 13:1-7)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주님의 '몸'된 교회의 심히 고귀/高貴한 "각 지체 각 부분"(고전 12:27)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를 드러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전도요 기도의 구령/救靈 차원으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스스로 <살기> 위해 세상에 남겨진 무리가 아니라 남들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보내심" 받은 신분임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바로 이 현상에 당시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을 뵙듯 마음에 큰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킨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생명처럼 여기고 부자됨을 최고 목표로삼는 인간 본성/죄성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가히 <경천동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바로 이것이 큰 증거가 되어 이후 야만적인 극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그에 대한 믿음이 가시적으로 드러남을 인식하는 마당이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당연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살이의 유화책으로 사탄이 전략을 바꾸어 세상 사랑이 판을 치면서 교회는 이 <사도행전 432>의 영광의 전통을 헌신짝처럼 버리게 되고 오늘에까지 이른 것. "원수를 사랑함"도 "이웃의 죄 용서"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일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