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30일 수요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유무가 아닌 "참고 선을 행함"(롬 2:7) 여부로 가름되는 마지막 심판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 ,23). "미련하다"는 것은 바보 짓을 한다는뜻입니다. 힘이 있어야 남이 알아 주고 돈 세상에 돈이 있어야 최소한 기를 펴고 사람 대우릏 받는데 당장은 "약한 자", "없는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27,28)로 분류되니까.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끼"(고후 13:4) "우리도 그 분 안에서 약함"(:4)은 당연합니다.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라야만 할 것이다" 하셨으니, 그 분의 가신 길,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도 세상에서 알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틈만 나면 없애버리려는 자들이 그 주변에서 떠나지 않았고 제자들이라는 무리들도 "말씀이 어렵다, 누가 듣겠느냐"며 미련 없이 떠나가버리는 현장의 연속이었다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서 세상이 열리면서부터 지금까지 "발꿈치를 물리고 머리가 으깨어짐" (창 3:15)으로써만 끝나게 되어 있는 전쟁이기에 그러합니다. 아담 법죄로 세상이 사탄의 천하로 둔갑되어버리면서 시작된 비극적 참상입니다. 아담의 붛순종에 대한 필연적 형벌 차원에서 시행되는 것이므로 우리 주님 친히 최후 승리자로 세상에 다시 오시어 마침내 군림하시기 전에는 지속될 것이나 그렇지만 때는 이제 종결에 이르러 목전에 다달았습니다.

사탄의 응당한 최후 발악이 불가피해 필자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끝날에 가서 죽임을 당할 것이나(계 13:15/단 12:7) 이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의한 최후 승리의 재판/再版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지 위축될 일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아무나 그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친히 가르치심을 받아 배운 자만이 올 수 있는"(요 6:56- 66) 터라, 베드로의 고백처럼 "영생의 말씀이 있으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는 소수만이 끝까지 떠나지 않는 것이니 이 사정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구원 받는 이가 적느냐는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 하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비좁고 길이 협소하여 찾는 이가 적음"(마 7:13,14)이라 하신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 대체 무엇을 말함이냐. 사람이 아담 범죄로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려 먹고 마시는 것이 유일한 사람 사는 방법인 양 여겨지지만 원래 신령한 몸으로 창조될 때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순종하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탄 마귀처럼 악령으로 풀리는 것뿐입니다. 이제는 영원한 생명의 법칙이 발동되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니 멸망의 장본/張本인 자아중심을 타파하고 하나님만 위함으로써 그 뜻을 따라 이웃도 위하면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신 대로 그 이상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를 모르는 세상은 자기 위주/자기 본위로 (1)종교적인 측면에서 또는 소위 (2)유식/有識 계층이라 하여 또는 (3)황금 만능주의 등등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바, 특별히 (1)에는 "기독교"도 포함됩니다. 바벨론 신학이 여기 속합니다. 주님 당시의 유대인처럼 초능력(기적)을 대개 찾으니 오늘날 하나님으로 자처하여 가장하려는 사탄에게 좋은 먹잇감만 됩니다. 모두 자아중심의 비극적 한계를 일순간도 넘어서지 못해 "자기 부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무조건 반발이니 초대교회 당시나 오늘날이나 세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때라 초능력이 무진장 발호하는 때입니다. 여기 관심이 있는 자마다 사탄의 호구/虎口(범의 아가리) 속으로 자진해 들어가는 꼴이 됩니다. 사람마다 듣기 싫어하는 "십자가 짐(사형수의 위치에 서는 자세)"이나 "자기 부인" 과 같은 말을 마치 일부러 골라서 쓰는 것 같은 성경의 논조이지만 실은 진리와 진실 그대로의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습니다.

하나님 친히 우리 유일의 의존처시라 함은 의타심에서 오는 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법칙을 논함이니 가장 이상향적 삶에서 그 핵심인 사랑에서 상대성의 동시성을 말함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위하며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우리만을 위하심입니다. 그 증거가 우리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나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으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림이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하셨습니다. 이는 생명의 법칙에서의 하나됨을 가리키심입니다. 만유를 주관하는 짝의 법칙에서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가 됨으로 완성됨을 이르심이니 바로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핵심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이시므로 성부께서는 성자를 위하시고 자기를 위하심이 없으시며 이 본을 따리 성자 역시 그러하시니까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하심이지 강요되어 하시는 일이 없으심은 당연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생명의 법칙을 사랑하시어 이를 지키심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성자께는 성부의 "계명"으로 인식되심이 옳습니다.

이 "하나"(요 10:30)됨에서 "한 몸"(창 2: 24)됨도 나오고 우리의 구원에서 주님과의 "한 영"(고전 6:17)됨도 이루어집니다.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머리이시고 그 피조물은 그 몸으로서의 각 지체 각 부분 역할입니다. "마지막 아담"께서 우리 구원 받은 모두의 머리이시고 또한 그 머리되심이 성부 하나님이시니 성자 하나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으로서의 이 "하나"(요 10: 30)됨은, 갑과 을이 짝을 이루었다고 볼 때 "갑 안에 을이 있고 을 안에 갑이 있음"으로써 표현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38) 하심이 그 뜻입니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가리켜 다시 가르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함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14:10)을 의미함이라고 정확히 설명하신 것입니다.

즉 갑 안에 을이 있음은 갑을 통해 을이 움직인다는 뜻이요 이는 바꾸어 말해 갑이 을을 위하고 갑 자신을 결코 위하지 않음을 의미함이니, 그 반대로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짝의 법칙에 기반한 생명의 법칙에서 그 핵심을 밝히시기를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17:10)이라 하신 것이니 성경을 통해 우주 만물 즉 만유의 기본 원리를 이같이 소상히 다 설명하심이라 이보다 더 정확한 하나님 증거/증명이 없습니다.

역시 성경은 남녀 한 몸됨에서도 역시 같은 원리를 적용하여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함"(고전 7:4)이라고 가르칩니다.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같은 설명입니다. 이것이 둘이 짝을 이루어 하나되는 정확한 구조, 얼개(structure)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기를, "네가 (사람으로서)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마 16:23)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시고 사람을 위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함이 항존/恒存의 생명의 법칙 그 불변의 원리이기에 그러합니다.

고로 성경에서 말하는 정확한 의미의 "회개"는 이 영원불변의 삶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자아중심으로 치달은 일체의 언행심사/言行心思를 지칭함입니다. 자아중심은 동물적 육체의 특성입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니까 생명 유지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창조의 기반이 되어 있는 인간이나 영물들은 이지적 판단에 의해 자유의지가 작용하므로 그런 자아중심의 동물적 본능이 해당되지 않음은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몸은 머리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상호 작용의 유기체  이 자연 순리대로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도 당연히 이 원리를 따름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당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머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시는 이치입니다. 머리와 몸은 하나, 한 몸이니까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고전 12:26)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아직도 이 "함께 하는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땅히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의 숫자가 다 채워져야 다시 말해 더 이상 구원될 사람이 없는 그 때에서야 이 해산/解産의 산고/産苦는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오늘날 주님의 재림 때가 박두했습니다. 그 순간까지는 주님의 <머리>로서의 "남으신 고난"을 그 <몸>된 교회 일원으로서의 "내 육체에 채워야"(골 1:24)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롬 8:22) 때입니다. 이런 형편에 "부/富, 성부/聖富(예수전도단에서처럼), 운운" 하는 것마다가 헛소리요 멸망으로의 유인질인데 이를 영적으로 분별 못하고 무작정 그 감언이설에만 끌려 따라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관심사는 영적 부유함이지 세상 물질적 풍요가 아닙니다. 그것은 멸망의 지름길일 뿐입니다.

멸망으로 유인하는 바벨론 신학의 특징은 죄를 희석시켜 그 물타기 작전으로 죄가 선명히 드러나지 않게 하는 술책에 있습니다. 세상 사랑을 회석시켜 그 간교한 사악함이 드러나지 않게 함입니다. 바벨론 신학 척결에서 욧점은 죄를 죄로 바로 알아 차단시키고 "참고 선을 행함"(롬 2:7)으로써 "영생에"(:7) 이르게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6) 때문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이 "행함"을 말살시켰습니다. 이로써 성경을 폐쇄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고후 5:10)이라는 경고의 성경을 무용지물로 격하시킨 그 나머지 미신 나부랭이를 "복음"이랍시고 부둥켜 안고 영원 멸망으로 빠져들게 만든 것입니다. 행함은 순종입니다. 행함으로써 순종이 이루어지는 고로,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가겠습니다' 하다가 가지 않고 둘째에게 가니 '싫어요'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냐"(마 21:28-31)는 말씀으로 순종의 행함이 핵심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순종 않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담의 범죄와 기타 모든 피조물의 불의/불법이 하나님의 계명 즉 영원한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불순종에 있음을 누가 부인하리요. 그러나 바벨론 신학은 그 궤변으로 이를 말살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처음부터 믿음이 아닙니다. 절대적 순종인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범죄가 이루어져 동물적 육체가 되니 이런 육체 자체가 인간에게는 "죄의 몸"(롬 6:6)의 작동인지라 이 해결책의 일환으로 "믿음"에 의한 구원인 것이지 원래는 순종 곧 "행함"이 핵심 골자인 것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나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때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다"(마 7:21-27).

믿음이 있으니까 "선지자 노릇도 하여 말씀을 전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며 주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성경에 밝혀 놓으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반드시 인도해 주시니까. 성경을 항상 가까이함이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필자도 유력 교파 선교사 주관의 신앙 월간지 번역 일을 한 때 맡아보며 고금의 세계 교계 유명 인사들의 저술을 섭렵해 보았습니다. 성경을 직접 읽을 필요가 없다고 그 때는 확신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죠지 뮬러와 같이 믿음의 역사를 시작해보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나름대로 결심하며 성경을 새로이 읽게 되면서 변화가 왔습니다. 얼마나 성경을 잘못 읽었는지 잘못 알고 있었는지 따라서 얼마나 잘못 전도를 했는지 뼈아프게 자각하는 순간이 왔던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의 차이는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아담 범죄로 인한 동물적 육체로 되돌아간 죄의 몸 때문에 순종을 할 수 없다가 "믿음"으로 구원된 후 비로소 순종이 가능해짐으로써 당연히 요구되는 순종 즉 "행함"을 따져 "영생" 여부가 마지막 심판대에서 가름되기 때문입니다(2:6). 순종은 위의 주님 가르치심에서도 확인되듯 자유의지로 결정되는 것이라, 아무리 순종할 수 있어도 내 자신 이를 싫어해 아니하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니까.

뿐만 아니라 바벨론 신학은 로마서 7장의 탄식을 믿음에 들어온 바울 자신의 체험이라는 거짓말까지 토해내어 이 세상에서는 부득불 죄짓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많은 영혼을 멸망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세상 삶을 사랑하여 살고자 하니 또한 죄짓게 되는 것입니다. 한없이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그 심판대에서 "믿음" 유무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날강도 같은 거짓말에 속아 자기 생명(은혜의 믿음으로 얻은)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눅 9:25) 말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마귀를 가리켜 "온 천하를 속이는 자"(계 12:9)라 했듯이 지금 지구상의 모든 기독교가 이 속임수의 마수/魔手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처참한 실상입니다. 한시바삐 이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을 믿는다면서 성경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 관심을 두지 않는 참담함입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탈바벨론"을 외치니 누구 하나 제대로 귀를 기울여 듣는 자가 없는 상황에서 다음의 주님 말씀만 인용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이 모든 전파의 말씀이 오늘날 성령의 말씀이심을 믿으시기를. 그렇지 못하겠거든 이 말씀과 함께 보여진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라도 믿으시기를! 모세가 처음 하나님 앞에서,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않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할 것입니다"(춭애급기 4:1) 하니,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셨습니다. 3운법칙 등은 사람의 머리로 알아낸 것이 아니며 알아낼 수 있는 성격의 일도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모세 지팡이"라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자문자답하시기를.

주님은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신 다음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오시어 각 시대 모든 교회 하나님 군대의 모든 전투를 진두 지휘하실 것임을 미리 밝히심이니 때문에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21세기 표적과 기사"가 그런 예입니다.


2025년 7월 28일 월요일

내 마음 그윽한 데서

"나의 영혼이 주님을 가까이 따르니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 63: 8).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시 73: 23). 주님의 오른 손이 나의 오른 손을 붙잡으시면 자연스럽게 주님의 왼손이 나를 감싸 안으심이 됩니다. 나는 항상 내 옆에, 앞에 계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오른손은 항상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니, 주님 친히 내게 그와 같은 힘이 되어 주심입니다.


"하나님, 저를 위하시는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우리말 번역 단순히 "제가 주님의 생각을 보배롭게 여긴다"와는 달리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저를 위하시는 주님의 생각이 보배스러우시다"의 뜻).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으신지요. 제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습니다"(시 139:17,18).


"내 마음 그 깊은 곳에"란 가곡은 그 음조가 강의 흐름을 연상시킨다고 느껴집니다. "강물"이라면 우리에게는 성령과 관련된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 유명합니다(요 7:38). 영역으로는 "rivers"로 되어 있으니 그 풍성함을 직감하게 됩니다. 성경에 "주님께 노래한다"는 또 다른 풍성한,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잊기 쉬운 의미가 있습니다. 365일 24시간 내 앞에 성령으로서 서 계시는, 인생 중에서도 당연히 가장 아름다우신 모습의 주님(행 2:25). "성령" 이라는 말은, 또 아버지 하나님 친히 그렇게 계셔 주시는 형상이시기도 하다는 뜻. 3위1체 법칙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게 된 놀라운 실상입니다. 즐거운 노래가 없을 수 없지요.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다" (:26)가 그것입니다.

강물은 흐느적 흐느적 흐느끼며 흘러가는 것이라기보담은 흥에 겨워 신나게 몸을 구을며 즐겁게 노래하면서 활기 차게 흘러가는 것이 제격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마음 속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가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곡조가 아주 시원스럽게 강의 유동/流動을 묘사하고 있어 그냥 두자니 아깝기에ㅡ. 특정 성경 구절들을 마음에 새기는 것에 치증하는 쪽으로 다듬었습니다. 모든 찬송 찬미가도 가급적 그런 특색을 지님이 마땅하다 봅니다.


                    "내 마음 그윽한 데서"

1.
마음 그윽한 데(에)서 내 마음 그 깊은 데(에)서
생명 샘(계 7:17)이 강물(요 7:38)되어 흘러 흘러 넘치네
주님 안 '늘 평안'(요 14:27)되어 
주님의 '늘 기쁨'(15:11/17:13)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넘치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영혼 그윽한 데서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  "그윽하다"→ 깊숙하고 고요하다. 잔잔하고 은근하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찬송가 412장에서.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박세원

2025년 7월 26일 토요일

 왜 "성모 마리아"인가. "성모"가 무슨 필요인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 무슨 아쉬운 점이라도 있으시기에 그 야단인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성별로 구분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성별은 생식과 생육 번성을 위한 피조물들의 동식물적 구분일 뿐이다. 애초의 인간도 신령한 몸(동물성 육체로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이후 다음 단계로 영원한 영혼을 조성하심으로써 거기 상합/相合되게 죽지 않는 육체로 변환되도록 영계인 에덴에다 인간의 보금자리를 정해 주심으로써)으로 창조된 까닭에 초능력적 생산 방법으로 일정한 솟자로만 인간이 생성되도록 한정하신 고로, 애당초 자연계 동식물처럼 성별로 구분되지 않는 영물 즉 천사들처럼 온전한(신령한) 육체였음이다(눅 20:35, 36).


아담만이 남녀 구분이 되어 있었으니 이는
동물에서부터 하나님 형상으로 진화되었다는 상징적 의미만이 있음뿐이었다. 자식 생산도 천사들의 도움으로 초능력으로 넉넉히 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여자가 생겨남은 생식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파생자(성부)와 피파생자(성자)로서의 하나이심과 같은 의미로 짝을 이뤄 존재하기 위함인 것.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니까 이는 당연 논리. 그러나 동물적 육체로 퇴화(아담 범죄로)되면서 불가피하게 오늘날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남성 의미의 대명사로 호칭되심은 인간의 형용으로 표현되실 필요성에서 인간은 모두 성별로 나타내어지니까 아담을 기준함뿐이다. 아담이 처음에 성별 없이 존재했었으니까. 성별이 있었다면 아담 창조 즉시 여자도 그 후속 조처로 창조됨이 당연 순서겠지만 그렇게 하시지 아니한 것이다. 바로 그 증거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형용으로 표현하면 엄부/嚴父와 같으시면서도 지극히 자모/慈母와 같으신 것. 성부나 성자나 모두 성품이 그러하시다. 그러면 충분하시고도 남지, 무엇에 부족하시기에 그런 불경/不敬의 극치를 이루는가! "성부", "성자"에다 또 "성모"라니! 어찌 신성 모독이 아닌가!

이 괴이 망칙한 거동에 반발하는 같은 기독교인들을 국가 권력을 빙자해 박해하여 죽이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이 무슨 해괴한 변태란 말인가! 이는 로마 카톨릭(천주교)의 경우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면서"(요 16:2) 살인을 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 똑같다. 그 대표적 사례가 깔벵(Calvin)이다. 스위스 주네브에서 "국가 권력"으로(국가 통치랍시고 나댄 것 자체가 반성경적이니, 사탄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국가를 형성한다면 그 종노릇이란 뜻 하나도 분간 못한단 말인가!) 살인 행위를 자행하고도 양심적 자책 하나 없었다. "물에 몸을 담그는 의식이 아니면 성경적 세례 의식이 아니라"는 주장을 죄로 엮어 물에 빠뜨려 죽이는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모두 바벨론 신학의 거짓과 속임수 그 부끄러운 무지/無知의 결말들이다.

참고로, 우리가 "세례"라 할 때는, 세례 베푸는 방식(몸을 물에 잠기게 하느냐 아니면 물방울로만 적셔 주느냐로 따지는)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의미를 강조하여, <"죄를 씻는"(행 22:16) 예식>의 의미로서 "세례/洗禮"라 한다. 이는 영어 "baptism"이헬라어 원음을 따서 칭함과 같은 취지다.
그러나 성경은 몸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말하고 또한 뜻함이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의미함이라, 죽음의 대표적 상징은 노아 대홍수로 인한 인류 멸망이기 때문이다(벧전 3:20,21/벧후 3:6,7 참조).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지만 이를 행사하는 것은 인간인지라 이 고유의 아담 통치권이 아담 범죄로 원수 사탄에게 송두리째 넘겨져(눅 4:6) 사탄 아래 악인들이 대부분 주물럭거리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 참혹사/慘酷史로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지속될 슬픈 운명이다. 아담의 <죄값>인즉 <형벌> 차원인지라, 감히 누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위 "기독교"의 같은 기독교인 박해가 이와 같이 악용됨이 모두다 원수 악마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원망하거나 의아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는 오직 "인내하고 오래 참고 견디는"(눅 8:15/21:
19/롬 5:3,4/15:4,5/살전 1:3/살후 1:4/ 3:5/딤전 6:11/딤후 3:10/딛 3:2/히 10: 36/12:1/약 1:3,4/5:11/벧후 1:6/계 2: 2,19/3:10/13:10/14:12. 이상은 "인내", 아래는 "오래 참음". 고전 13:4/고후 6:9/갈 5:22/엡 4:2/골 1:11/3:12/살전5:14 /딤전 1:16/딤후 3:10/4:2/히 6:12,15/약 5:10/벧전 3:20/벧후 3:9,15. 다음은 "견디고". 계 2:3) 것만이 하나님 뜻이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까.

다시 말해 흔히 쓰는 말로서 "정의의 맛을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알이지 이를 개인적으로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든 의탁하신 일이 없으시다. 국가 차원에서만 가능하므로(롬 13:4), "내가 첫째로 권하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딤 전 2:1,2)이라 한 것이다. 이 세상 삶을 사랑하여 누리겠다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상 행동이 보장되는 합리적 세상사가 영위되도록 하나님 앞 제사장의 위치에서 올리는 간구를 뜻함인 것이다.

사탄의 지배 아래에서 국가 권력이 정정당당하게 행사되기보다 악인들의 도구가 되는 예가 더 많았던 것이 현실이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오늘날 20세기 이후 사탄의 최후 발악으로 인류사상 가장 악질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 소위 "공산주의" 폭동이자 망동이다. 한국은 지금 이 소용돌이 속의 한 가운데에 있다. 이 난동은 용이 하늘에서 영구 추방된 시베리아 퉁구스카 대충돌(성경을 무시함으로써 천지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대폭발"이라 맹신하고 있지만) 사건이 일어난 1908년 직후 곧장 나타난 것이다. 인류사상 모든 대소 전쟁과 분란을 통틀어도 이 공산당의 행패 그 야만성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계 12:12) 함과 같다. 그러한 "분냄"이 목불인견의 끔찍하고 참혹한 재앙의 연속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악당들의 "공산/共産"이라는(한국에서는 "주체 사상"이라는 미사여구까지 겹쳐) 꿀 발린 선전 선동으로 멋모르는 대중 특별히 젊은이들이 유혹되어 피에 주린 아귀처럼 날뛴 것이니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 정확한 증인이요 증언이다.

이 살인마들의 특징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에 있다. 무신론을 아예 간판으로 내어걸고 덤비니 당연 결과다. 바꾸어 말해 양심이나 도덕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속임수와 거짓말도 그들 사이에서는 당연시되고 있다. 또한 그런 악의 부류들이 여기 합세하고 있다. 한국의 2025년 현재 상황이 딱 그 복사판이다. 어느 국가든 "공산당"을 입 밖에 내지 않고도 또는 노골적으로 그런 명칭은 붙이지 않더라도 그런 집단(국가)과 동조 결탁하는 부류(소위 "좌파"란 이름으로 호칭되는 정당 따위)들은 악이라고 분류하여 아예 배척해야 마땅한데 이런 역사적 추이를 분간 못하고 그들의 부추김에 맥없이 놀아나고 있는 것이 비극의 화근이다.

아담이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른 결과로서의 범죄이기에 그 통치권이 사탄에게 넘겨진 것은 사실이지만, 만유 주재의 하나님이시라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므로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고 아담의 세상 통치권을 지금은 사탄이 행사한다는 그 차이뿐이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왕과 관련해서, 다니엘이 그 손자 벨사살 왕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라"(단 5:21)고 일갈했듯이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심이다.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라는 의미가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 그 뜻을 이루심이라 얼마든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마 18: 19). 단 둘. 두 사람만 합심해도 크나큰 위력이 발휘된다. 하나님의 말씀이시요 <약속>이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단 두 사람이라도.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다.

⁹그러나, 그 둘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이니까 제자들은 스승을 전심전력으로 심복/心服하여 전적으로 본 받는 자이다. 입맛대로 말씀을 골라 가며 "믿는" 자가 절대로 아니다.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듣겠느냐"(요 6:60) 하지 않는다. 고로 이 점에서는 사람이 문제다.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롬 14:7)는 무리 속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제자"다.

또 유의할 것은, 이른바 "통성"기도는 합심 기도를 깨뜨리는 독소임을 알아야. 각자가 모두 자유 기도로 돌입할 수도 있으므로 "합심"의 의미를 일거에 무너뜨려놓기 때문이다. 합심 기도에서 대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므로 그와 같은 인도를 확신 못하는 경우 절대로 입을 열지 말아야.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간구와 소원을 올리는 것이 <합심>이기 때문이다. 자유로 하는 개인적인 기도는 각자 홀로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인즉 함께 모일 때는 마땅히 지양되어야 하는 것.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이다. 기도 집회 인도자는 이러한 분위기를 적절히 파악하는 것이 요긴하므로 영적 통찰력이 요구된다.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은 '말씀 전파'에 앞서 항상 '기도'를 중시했음이 베드로의 언변 중에 은연히 그러나 확실히 묻어남을 확인할 수 있다(행 6:4). 주님께서 얼마나 기도에 힘쓰셨는지 복음서를 읽는 자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기도의 뒷받침이 없이는 모든 말씀 전파는 무위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이름 있는 설교자보다 이름 없는 기도자가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우위/優位에 위치했음을 각 설교자는 명심하기를. 설교자가 설교를 잘해서 유명세를 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기도를 일심으로 해 준 덕에 그 결과임을 알아야. 필자의 말씀 강해도 여러분의 기도에 절대적으로 힘입음이요 기인/起因함이다. 먼 훗날 오늘날의 이 바벨론 탈출의 역사/役事를 평가함에서 단연코 이 기도에 충성한 여러분들께서 상위/上位에 위치하실 것이다. 말씀 전파자는 단지 말씀을 받은 대로 세상에 알리기를 힘쓰느라 날밤을 새는데 그치지만 기도자는 직접 악령들과 맞닥뜨려 단병전/單兵戰을 벌이는 역전/歷戰의 투사 /鬪士들이기에 충분히 그러하다. 이렇듯이 외압/外壓을 막아 주었기에, 필요한 내적/內的 충실을 도모할 수 있었음이다.

전지전능 하나님이시니까 인간의 힘을 빌리실 필요가 있느냐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하고 간딘히 판단해버릴 사람이 많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약하셔서가 아니라 우리도 함께 동참한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함"에 있어, 생명의 법칙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위해 드리고 우리 일은 하나님께서 해주심이기에 그러하다.

때문에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 것이다"(에스겔 36:36,37). 다시 강조하거니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 위하여 이루시마고 분명 약속하셨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같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자세가 필수임을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같은 일을 두고도 하나님으로서는 우리를 위하심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심으로써 "하나"로서의 완전 조화를 이룸이니 곧 상대성의 동시성. 사랑은 항상 동시에 움직이는 법. 이 얼마나 화려한 <아름다움>인가! 이 이상향적 삶의 구조에서 사랑의창조주 하나님 친히 유일하신 구심점이 되신다. 그 절대 불가결성의 요인이 되신다.
만인간과 '머리'와 '몸'의 관계를 형성하신 바탕 위에서만 이상향적 사회가 능히 넉넉히 구축됨이다. 아담 범죄 전 세상이 이에서 출발했건만 아담 범죄로 한꺼번에 무산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친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재차 솔선수범해 보이심으로써('머리'로서) 그 '몸' 을 이룬 각자의 심벽/心壁에 이 생명의 법칙을 각인해 두셨으므로 생명과 영광의 역사는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구체적 방안이 세상 어느 종교를 통해서도 밝혀진 역사가 없다. 성경을 믿는다는 교회마저 초대교회의 가르침에서 "신속히 떠나"(갈 1:6) 바벨론 신학에 물듦으로써 그저 막연히 영생, 구원만을 줄창 외쳐 왔으니, 바울 사도 생전시에도 그러했거늘 하물며 사도들의 부재 중의 오늘에 와서야 말해 무엇하리.

입법, 사법, 행정부가 썩었으면 호국 간성인 군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썩었는데 군이라고 성할 리 없다. 기백도 없을 뿐더러 죄편향의 사상에 감염되어 문드러진 지 이미 오래다. 교회도 썩었다. 성경에 어찌하여 구약시대로부터 "남은 자" (롬 9:27/이사야 10:22)라는 표현이 등장했겠는가! 사탄의 광기가 곳곳에 스며 있기에 그 혼란상이 처처에서 불거져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서두에서부터 지적했듯 최후 발악 중의 악마라 천하가 그 난장판이다. 모든 원인은 여기에 있다. 오직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깨닫는 자가 이 시대 주역/主役일 수밖에는 없다. 그 숫자가 얼마이든 상관 없다. 역사상 숫자의 다과/多寡를 논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기드온을 통한 전쟁에서 3만2천명의 모군/募軍 중에 수천명도 아닌 수백명 즉 그 1/100로 한 줌 밖에 안되는 숫자로 확 줄이셨다. 300명 용사로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언제든 적군의 기습이 예상되는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가정하고 목이 마를 때 취할 수 있는 자세를 연출해보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전투 태세가 되어 있는> 자가 그 정도였다는 얘기다.

이것이 하나님 이루시는 역사/役事이시고 그 역사/歷史이다. 합심 기도를 외치는 이유이다. 묵묵한 순종만이 답이다. 이에 대한 각자 각성만이 유일의 해결책임을 단언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누가복음 10:27). 단 "두 사람"(만 되어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님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이다"(야고보서 1:6-8).




2025년 7월 15일 화요일

365일 예배 (2)

"저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다"(고후10:12).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모든 판단의 기준/표준을 삼아야지, 그렇지 않으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기의 어리석음과 무의미뿐. 자기 기만의 자살 행위. 곧 사탄이 노리는 바다. 이 세상이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은 사탄이 깔아 놓은 온갖 덫과 함정, 올가미 올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이다"(롬 5 :12). 죄가 먼저냐, 사망이 먼저냐. 죄를 지어 사망이 왔으니 죄를 짓던 그 순간은 "영적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는 말이 된다. 죽음을 "영적"이라고 하니까 하는 소리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데 어찌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영적 죽음"이란 사탄의 거짓말에 매몰되어 천하없는 바보 노릇만 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욕되게 해 왔다는 것을 우리가 이제는 알겠는가! 이제는 정신이 번쩍 드는가! 


"영적 죽음"이라 함은 아담이 범죄 전에도 죽게 되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그 뜻이다. 때문에 아담 범죄의 결과인 "죽음"을 "영적"인 것이라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 황당한 거짓말을 갖다 붙인 것이다. 즉 인간을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만드심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 전제하고 다음 말을 이어가는 것인데ㅡ. 

죄를 지은 것은 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가. 모든 사람의 육/肉이 그 한 사람에게서 나온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음이 "영적"이라면 어째서 "육"이 아닌 "영/靈"인데도 유전되어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너희는 말하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냐' 하는구나.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갈 것"(겔 18:19,20)이라는 하나님의 엄하신 말씀을 에덴에서의 마귀처럼 거짓말로 무시하여 버리는 세대여! 어찌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을 면할까보냐!

지금은 성령 시대다. 구약시대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메시야 우리 주님 친히 성령으로 믿는 각 사람 안에 앞앞이 임해 오시어 가르치시기에(요 14:16,26), "너희는 주님께 받은 바 기름 부으심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므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으심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시는 그대로 주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요일 2:27)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라 하시어 1인칭으로 나타내시지 않고 "보혜사(Comforter)"시라 하여 3인칭 단수로 설명하심은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요 10:30)로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이시니까 단수이시다. "우리" (14:23/창 1:26)라 하실 때는 1인칭 복수. 이와 같이 세밀히 밝혀 말씀하시니 이야말로 성경의 진실성의 확고부동의 자체 증명이시다.

"성령의 음성 듣기", "성령의 직접 인도 따르기" 따위의 오늘날 적그리스도 때 사탄의 신종 수법/新種 手法을 경계해야. 소위 "신사도운동", "오순절파", 예수 전도단, 방언 등등이 그런 종류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성령(보혜사)께서는 "기록한 말씀 밖에"(고전 4:6) 다른 방법을 쓰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 지척에서 손 가까이 얼굴을 맞대시고 인도/지도하심 이상 가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2025년 7월 12일 토요일

문 두드림과 찾고 구함은 365일 예배의 하나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함이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는 이 말씀으로써 사람들은 자기 구원의 확신 근거로 삼고 있다. 이미 정해진 과거사로 말씀하셨으니 달리 변경될 리 없다는 것이다. 단지 조건은 성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면 이 "듣고" "믿음"의 본질로서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보면,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으니 내가 곧 생명의 떡"(요 6 :47)이라 하신 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다"(:56) 하시니 제자들이 말씀이 어렵다고 수군대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64) 하셨다. 이 말씀에, 12제자만 남기고 거의 다 떠나버렸다. "어려운" 것을 이해할 리 없고 이해를 못하는데 "믿을" 리 만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복음 말씀을 듣는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니고 이해를 못하면 말끔 헛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잘 알다시피 거의 2천년 전통의 거짓말인 바벨론 신학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 사정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결론은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44,65) 하심에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즉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아버지께 듣고 배우지 않고는 구원의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다(:44,45,65). 우리가 "성경을 항상 가까이하자"고 반복하여 강조하는 이유다. 주님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데 "아버지께 듣고 배운다" 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 중 한 구절 또는 몇 대목에만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사이비 이단에 쉽게 빠져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바벨론 신학의 맹독균/猛毒菌이 온 천하를 집어 삼킨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진짜 부자되고 싶으세요? 지갑을 하나님과 친하게 하세요"라는 "예수전도단"의 실로 해괴한 소리를 들어도 선뜻 분별 의식이 들지 않는 것이다.   (계속).

2025년 7월 10일 목요일

생각과 행동이 단순해야ㅡ"어린 아이 같이 되라" 하심이 바로 이 뜻이니까



"마르다, 마르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눅10:41,42). Biblegateway 63개 영역본에서 7군데만 개역한글처럼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식의 의역/意譯을 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관련한 한 가지 생각만 하며 세상에서 <살 수> 있느냐" 하는 "내가 더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망령된 자만심의 결과다.

여기서 주님은 이 세상에서 <산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포함하신 것이건만 미련한 인생은 끝까지 자기 고집이다. 죽은 자(동물들의 기계적 삶으로서의 식욕, 성욕만으로 그치는)임을 자각하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오직 살겠다(애초 창조될 때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는 절박함에서 순간순간을 이어 가는 행보/行步라야 정상인 것이다. 나 자신 구원되었으면 다른 사람 즉 내 이웃의 구원이 이제는 최대 유일의 관심사가 됨이 당연하여 일상 "먹고 마심"(고전 10:31)도 바로 이를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마 7:21).

"왕의 재정"이라는 저술로 지금 세상 기독교의 인기 몰이를 하는 "예수전도단" 간사라는 이는 "진짜 부자되고 싶으세요? 지갑을 하나님과 친하게 하세요"라는 슬로건으로 세상 사랑을 부추기고 있으니 실로  경악할 일이다. 결국 목적이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겠다는 토설/吐說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와 함께 일한다는 예수전도단 전대표라는 목사 역시 "이 세상을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돈입니다. 크리스천들도 돈에 종속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로 '주인 바꾸기 운동'을 한다는데, 이런 "자세히 보니 놀랍다"는 이제 겨우 중학생 1학년 짜리 철부지나 입에 담을 하나마나한 황당한 소리를 새삼스럽게 꺼내니 그의도가 뻔하지 않은가. 소위 "성부"(부자되는 것을 외람되게 <성결>로 단장시켜)로써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 사랑" (딤전 6:10)을 주님 사랑으로 바꿔치기 미화시키겠다는 사탄이나 할 법한 신성 모독이 아닌가!

이 세상은 죽음 일색인지라 세상을 장악한 사탄이 이 죽음의 권세를 행사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교회가 "마지막 아담"의 신부로서 원수 사탄과 격전 중에 더구나 원수의 영역 안에 있어 그 수난/受難은 일관되다. 따라서 원수의 핍박의 표적이 되어 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핍박이 부분적으로 한정되고 또는 일시적인 것은 오직 원수의 전략에 의할 뿐이지 고삐를 늦춘 적이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 2천년간 현재 핍박 당하고 있는 북한 등지의 지하교회가 정상적 교회 운영의 기준/표준이 되도록 설정해 주신 것으로 인식하면 틀림 없다.

그런즉 방금 지적한 "성부", "왕의 재정" 따위는 현실에서 벗어난 잠꼬대에 불과한 사탄의 책략에 장단 맞추기일 뿐인 한심한 작태의 꼭두각시 놀음이다. 단호히 배척해야 마땅하다. 이 시간에라도 북한과 같은 핍박이 덮쳐 모든 교회가 지하로 잠입해 들어간다면 그 모든 것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 아닌가! 그런 일시적인 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이요 인도일 수가 있는가! 거의 모든 교회가 바벨론화되어 있다는 증거가 그런 반/비성경적 현상의 노출인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시국에서는 핍박이 없다. 사탄이 탄압의 손을 일부러 놀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타락/멸망은 필연이기에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음이다.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2025년 7월 9일 수요일

경고ㅡ천국은 "어린 아이들"(마 19:14)과 같은 자의 것이니 "어린 아이들"에게만 진리가 "계시"(11:25,27)되기 때문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요 8:29). 내가 구원 받았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였으나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 이제 산 자가 되었은즉 산 자로서 마땅한 움직임이 나타나야 함은 필연인데 그
<움직임>이 인간이나 영물과 같은 이지적 피조물에게는 그 이성적 판단에 상응하는 것이 생명의 법칙에 대한 자발적 순응인 것. 자연계 생물과 같은 기계적 순응과는 차원부터 다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음은 새 창조를 말함이니, 지금 내가 죽었으니까 영으로 나서 살아나는 것이 시급하여(요 6:63) 그래서 "성령으로 난" (3:6) 것이나, 단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 순간적으로 이루어짐이요, 그 때까지는 이 동물적 육체에 머물러 있음이 불가피한 것이라 나머지 구원될 이들의 숫자가 차기까지 기다림입니다.

이는 첫 사람 아담이 흙으로 처음 동물적 육체로 창조된 후 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기 위해 에덴에 들어가기 전 일시 대기 상태에 있었던 것과 같은 양상/상태인 것입니다. 당시 아담이 동물성 육체로 있었으나 죽은 자가 아닌 엄연히 산 자였던 것과 같이 우리도 현재 그러합니다.

우리가 신령한 육체로 변환됨은 "마지막 아담" 영광의 우리 주님께서 재림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나시는 순간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신령한 몸은 아니지만 그래서 비록 동물적 육체 그대로이나, 새로 창조된 터라 이는 아담이 처음 흙으로 지으심 받아 에덴(하나님이 새로 "창설하신")에 들어가기 전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불꽃" 중에 임하신다 함은 동물성 육체의 형체로(신령한 몸이시지만) 오신다는 뜻. 현란한 광채의 빛으로 오심(다메섹으로 가던 사울[후에 바울]에게 처음 나타나신 때처럼)과는 별개의 형체이십니다. 고로 우리가 현재 알기로는 인간이나 영물과 같은 영적 존재로서의 신령한 몸은 세 가지 형태로 변신됨을 알 수 있습니다. (1) 빛의 옷에 둘러싸인 몸, 다음은 동물과 같은 자연계에도 속하는 몸인 바 이는 (2) "불꽃 중에" 나타나는 형상과 (3) 순수히 동물과 같은 몸의 모양새로 나타나는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사탄은 아담을 항구적인 동물적 육체로만 되게 유인한 죄과로 더 이상 (1)빛으로써가 아닌 (2)로써만 <항구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고, 나머지 악령들 및 천사들처럼 (3)도 포함된 경우는 단 한 번, 인간(남자)으로 변신 자식(네피림의 하나)을 생산했던 때이니, 장차의 적그리스도로 예정되어 있는 자를 낳기 위함이었습니다(창 3:15).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 함은 실제로 그렇게 직접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악령들이 그런 식으로 인생들을 속인다는 것을 총칭해서 한 말입니다.

본론으로 되돌아가,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 하심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 강조해 온 "상대성의 동시성" 즉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를 이룸>의 3위1체 법칙을 기반으로 하는 생명(삶)의 영원한 법칙을 말씀하심입니다. 다시 말해 무룻 살아 있는 자는 서로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의 사랑으로 하나로서 결속되는 만고불변의 이상향적 삶의 원리를 말씀하심입니다. 이 원리를 어긴 것이 사탄 및 악령들의 범죄요 아담의 불순종이며 우리가 처음 복음을 믿을 때의 회개 주제/主題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속임수는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만을 강조함으로써 거의 모든 기독교 교인을 멸망으로 몰아간 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7장이 <믿어 거듭 난 바울 자신의 체험>이라는 등의 생사람 잡는 갖가지 거짓말을 꾸며내는 등 과거 에덴에서의 아담 부부에 대한 살인 행위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 하나님은 왜 이런 악을 방치하시느냐 모두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창조의 모든 현상은 철두철미 인과성/因果性에 의해 관장됨을 알아야.

"주님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니...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음이니 어찌 원망하랴...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른다...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린다"(예레미야 애가 3:33,39- 50)에서 확인되듯이, 아담의 죄, 우리의 죄의 당연한 보응이니 곧 사탄의 이 세상 지배/압박인 것입니다(눅 4:6).

고로 주님 친히 경계하심과 같이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된"(마 18:3) 자만이 구원에 들어가고 오만하여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를 지혜 있는 자로 여겨 소위 "신학"이라 해서 "계시"가 아닌
학문으로서만 의존했던 모든 이들은 멸망을 면하지 못한 비극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하고 떨어야"(빌 2:12) 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마 11:25,26).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27). 

2025년 7월 8일 화요일

온 세상이여! 반복한다! 바벨론에서 급히 탈출하라(계 18:4)!

온 세상이여! 반복한다! 바벨론에서 급히 탈출하라(계 18:4)!


이제는 이미 다 아시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되풀이해 지투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이 아담/에덴의 초자연계 특성이다. 다시말해 에덴은 자연계 동산이 아니요 신령한 세계였기 때문에 생명과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었고 따라서 이전처럼 성경의 이 대목을 신화/神話 따위로 치부한 것은 하나님과 그 말씀인 성경에 대한 크나큰 불경/不敬 헹위인즉 우리는 즉각 이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며, 아담은 이 에덴에 들어가 그 곳의 신령한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 자연계 물질의 몸이 신령한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어 있었던 터라 생명과/果가 아닌 선악과를 먹지 말라 주의를 주신 것이다.


이렇게 형벌을 받은(창 2:15) 사탄을 제외하고는 악령들은 모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정상적인 비가시적 형체 그대로다. 이러한 신령한 몸은 그 초능력으로 수시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연계 물질(가시적)에 속한 형태로든 비가시적 형태로든 자유자재로 스스로를 변형시킬 수 있다. 고로 이 모든 영물들은 아담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형상으로는 얼마든 자기를 나타낼 수 있다. 부활하신 직후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 이전의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제자 앞에 나타나신 것이 그러한 예라 할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순간 이미 주님의 몸은 신령한 몸이셨기에 육중한 무덤의 돌 문도 거뜬히 통과해 밖으로 나오셨고 몸을 일으키실 때 그 머리를 겹겹이 감았던 수건도 친히 그 손으로 푸실 필요 없이 그냥 몸을 일으키시는 즉각 마치 안개처럼 빠져 나오셨기 때문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시신을 쌌던)와 함께 놓이지를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다"(요 20:7)고 제자들은 증언한 것이다. 승천하실 때도 여러 제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지켜 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곧장 하늘로 오트시게 된다.

사탄(용)의 몸도 신령한 몸은 그대로이나(그래서 중력의 법칙을 완전 무시 우주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나) 자연계 물질로서의 특성인 가시성/可視性만은 벗어날 수 없는 유일무이의 영물이 된 것이니, 아담의 신령한 몸이 가시적인 동물적 육체로 전락되도록 유인했던 사악함에 대한 응분의 조처/형벌로서의 하나님의 진노, 저주이셨던 것. 곧 "종신토록 흙을 먹음"(창 3:14)의 결말이었던 것이다.

사탄이 이렇게 될 줄 몰라서 아담이 동물적 육체가 되게 계략을 세운 것은 아니다. 사탄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설마 하나님이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히 12: 2) 피조물 인간을 위해 친히 인간이 되어 주시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자기를 표준하여 확신컨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못하리라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벌 주시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즉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일을 마무리하실 것이 틀림 없다고 자신했던 것이나 결과는 완전히 뜻 밖이었다. 하나님은 원리원칙을 따라 용에게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니 이는 다름아니라 하나님 친히 인간을 위해 피조물로서는 상상도 못할 자기 부인의 길을 따르시겠다는 즉 흙으로서의 범죄 후 아담과 같은 동물적 육체로 친히 죽어 주시기로 하신 확고한 의지 표명이셨던 것이다.

이는 사탄의 예상을 완전 빗나간 것이었다. 이리하여 영물 중 유일하게, 마치 아담이 그 범죄로 종전의 화려 찬란했던 빛의 옷이 벗겨지고 <알몸뚱이>로 드러나 누더기 같은 스스로 만든 옷을 겉치게 된 것과 똑같은 모양새로, 사탄 역시 똑같이 <뻘거숭이>로 전락하게 만드신 것이 현재의 사탄의 유일한 가시적 형체로서의 몸의 특징인 것이다. 이 실상을 마음 깊이 아로새겨 오늘날의 '바벨론 신학'의 독아/毒牙에서 벗어나야. "아담의 죽음이 <영적>인 것이고 육체적이 아니라"는 거의 2천년 묵은 황당무계에서 탈피, 탈출해야!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에서 두 <알몸뚱이>와 <뻘거숭이>의 유사성/類似性의 대조/對照라는 유일한 <괴변/怪變>임을 명심해야. 이는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도 아니요 순수하게 사탄과 아담의 범죄 탓인 것이다.

모든 신령한 존재는 불이 그 상징이다. 주 님의 재림도 "그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심"(살후 1: 7)이라 하였고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使役者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히 1:7) 함과 같다. 용 사탄도 그 몸이 불꽃이고 그 입에서는 불이 토해진다. 그러나 더 이상 현란한 광채로는 둘러 싸이지 않고 자연게 물질로 된 육체의 '가시성'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명명백백한 사실에 근거하여 모름지기 21세기 복음 전도자들은 성경대로 역사적인 <바벨론 탈출>(계 18:4)을 선언해야 하며, 충실히 진실과 진리를 따라 복음을 선포함을 시대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함이니 즉 에덴과 아담의 애초 속성이 자연계가 아니요 초자연계이고 육/肉이 아니고 영/靈임을 외쳐야 하는 것이다. 이 중차대한 시대 소명을 외면하는 자마다 가차 없이 탈락될 것임을 엄중 경고하는 바이다.

인간(아담)의 몸을 "흙"으로 돌아가도록 만든 마귀 사탄이므로 마귀 역시 동일하게 "흙"을 먹게 하시는 형벌로 인간고/人間苦와 같은 고통을 당해보게 하셨으니 하나님 친히 "흙"으로서의 사람되시는 판이신데 당연 귀결이 아닌가! 창조주 친히 고난 받으시니 만물이 다 고통 중에(롬 8: 22) 있음은 너무나 지당한데 이런 세상에서 삶을 꿈꾸고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조용기'식 넋두리에 빠진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인 줄 왜 모르는가! 

2025년 7월 6일 일요일

NASA의 용 (5)





NASA의 용 촬영물 관련해 첨부하고 싶은 말은, 만약 그 셔틀 디스카버리호(STS105)가 무인이 아닌 <유인> 우주선이었다면 결코 용은 찍혀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탄은 지금까지의 유일무이의 관심이 사람들이 구원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데 있으므로 이것이 세상 통치의 주목적인지라 단 한 명의 우주 비행사 즉 인간(그가 아담의 씨이든 네필림이든 상관 없이)이 우주에 나가 있어도 사탄의 촘촘한 빈 틈 없는 연락망에 걸려 있어 직접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벧전 5: 8)이다. 지금 이 NASA 사진은 용이 아주 한적하게 움직이거나 작동을 멈추어 잠시 쉬고 있거나 그런 상태인 것이다. 만약 유인우주선이면 그 동선이 사탄에게 보고되므로 혹시 자기가 피사체가 될 수도 있다 하여, 이런 유유자적 한가한 자세일 수가 절대로 없다는 뜻.

그가 네필림 양산/量産을 꾀한 것도 이런 인간의 정보 수집 연락망 구축을 위함인 것. 네피림의 망령이 귀신들이니까 귀신들이 그런 작업을 수행하는 것. 마귀의 지령을 따라 위해/危害를 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마귀는 신으로서 초능력을 발휘하지만 피조물이라 온 우주에 충만하신 창조주처럼 전지전능은 결코 될 수 없기에 자기를 기준하면 먼지 한 알보다 못한 우주선이라는 기계가 카메라를 작동시켜 자기 형체를 있는 그대로 찍어내 온 세상에 구경시키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것. 움직이는 우주선에다 움직이는 용이 카메라의 눈에 제 때 맞추어지는 것도 확률적으로 제로에 가까운 것이니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마지막 때" "바벨론에서 나오라"(게 18:4) 하시는 분부와 함께.

이 나사 사진의 용 옆에(향하여 오른쪽)  보면 3개의 또다른 형체가 보이는데(화살표와 숫자로 표시했음) 이는 필시 용을 보좌하는 영물들로서 만일(그들의 상전인 용이 그래도 모를 인간의 눈에 띄일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을 위해 일부러 용과 같은 자연계 물질의 몸으로 변환시켜 보조를 같이  취하고 있는 모양새다. 물론 필자의 추측일 뿐이지만.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정보 수집 관련해 보좌 역할만은 분명힌 것. 성경이 지적한 대로 용의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에 유의해야. 이는 하나님 내리신 저주의 일환임에 명백한 것이다. 신령한 몸이 졸지에 "흙"(자연계 물질)의 특질과 혼합이 되는(창 3:14) 과정에서ㅡ.

참고로, 이상의 사진 필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느 외국인(아마 미국 UFO 연구가일 듯)이 지적한 것으로서, 처음 이 용의 NASA 사진도 한 UFO 연구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물론 UFO든 "외계인"이든 모두 사탄과 그 일당인 악령들의 속임수로서 스스로를 그렇게 변신시킨 것이거나 초능력으로 만들어 인생들을 농락하는 것이지 실물로서  그런 것이 실존해서가 아닌 줄은 항상 우리가 명심해야. 

2025년 7월 4일 금요일

믿어 구원된 순간 악령들과의 일대 격전이 세상 끝까지 벌어진다




사탄이 거짓말로 여자를 속여 아담을 몰락시켰으나 아담으로서는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임에도 먹었으니 범죄가 되고 또한 이는 결국 하나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을 더 따른 결론이 돼 아담 고유의 세상 통치권이 마귀에게 넘겨져(눅 4:6) 동물성 육체로 전락함으로 인한 인간고/人間苦에 또 겹쳐, 악령들(사탄 추종의 영물들 및 네피림)에게 극도로 시달리기까지 하는 2중고/二重苦의 <비극의 주인공>이 된 인생들.


그 구제책으로 창조주 하나님 친히 "마지막 아담"이 되어 주시는 은혜의 결단을 내리심으로써 인간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피동적 위치를 벗어나서 일대 국면 전환을 이루어 지금까지 대접전/大接戰을 전개하게 되니(창 3:15) 이것이 6천년 인류사이다. 또 바로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100% 실상인 것이다. 이 외 달리 그 무엇으로 인식하든 위험천만의 사탄의 전략에 넘어감이다. 때문에 구원 받아 영생에 들어가는 자를 "이기는 자"(계 2:7,11,17, 26/3:5,12,21/21:7)라 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하셨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주님 재림 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이기에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구원 받음의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됨을 부디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 바벨론 교회는 이 엄중한 진실을 가르치지를않는다.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살다가 영생한다는 식의 감언이설로 일관한다.

그렇다면 묻노니,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점술/占術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는 말씀 중에 "두려워하는 자들(coward, timid)"의 정체가 무엇인가? 믿는 자인가, 믿지 않는 자인가? 자기 구원을 확신하는 자인가, 그런 확신이 없는 자인가?

전장에 임하는 자로서 <두려워하는 자>는 전투가 아예 불가능하다. 도리어 주변에 악영향만 끼친다. 살고자 하는 자아중심이기 때문이다. 자아중심은 무조건 죄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 25). 사즉생/死卽生(죽고자 하면 살고) 생즉사/生卽死(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 세상를 삶의 현장으로 인식하는 자마다 영생의 꿈을 접을 일이다.

"이기는 자"만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신다. 이미 구원 얻어 영생하는 자인데 무슨 또 생명나무인가 하지 말 것이다. 앞에서 읽지 않았는가. "이기는 자"가 아니고 "두려워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눅 9:25). 있지도 않았는데, 소유하지도 않았는데 "잃거나 빼앗기는" 법은 없다. 구원을 받아 오로지 상대방 중심으로서 자아중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롬 6:6/갈 5:24/6:14) 다시 자아중심이 되니 원천무효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영적 전쟁은 바벨론 신학으로 인해 허공을 치는 것뿐이었다ㅡ<제사장으로서의 기도> 외에는




 

2025년 7월 3일 목요일

NASA의 용 (4)

사탄을 제외한 악령들은 모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비가시적 형체 그대로다. 이 신령한 몸은 그 초능력으로 수시로 그 원하는 대로 자연계 물질(가시적)에 속한 형태로나 비가시적 형태로나 자유자재로 스스로를 변형시킬 수 있다. 이 영물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아담처럼 창조되지는 않았으나 사람의 형상으로는 얼마든지 또한 자기를 나타낼 수 있다. 부활하신 직후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 이전의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그 몸은 이미 신령한 몸이셨기에 육중한 무덤의 돌 문도 거뜬히 통과해 밖으로 나오셨고 몸을 일으키실 때 그 머리를 겹겹이 감았던 수건도 친히 그 손으로 푸실 필요 없이 그냥 몸을 일으키시기만 하니 스르르 흘러버리듯 하여 안개처럼 빠져 나오셨기 때문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시신을 쌌던)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다"(요 20:7)는 것이 제자들의 증언이었다. 승천하실 때에도 여러 제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지켜 보는 중에 구름을 타고 곧장 하늘로 오트신 것이다.

사탄(용)의 몸도 신령한 몸은 그대로이나(그래서 중력의 법칙은 무시한 채 우주 공간을 자유자재로 활동하나) 자연물질로서의 특성인 가시성/可視性만은 벗어날 수 없는 유일무이의 영물이 된 것이다. 아담의 신령한 몸이 가시적인 동물적 육체로 전락되도록 유인했던 사악함에 대한 응분의 조처, 형벌, 하나님의 진노, 저주이신 "종신토록 흙을 먹음"(창 3:14)의 결말인 것이다.

사탄이 이렇게 될 줄 몰라서 아담이 동물적 몸이 되게 부추긴 것은 아니다. 사탄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설마 하나님이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을 개의 치 아니하시고"(히 12: 2) 피조물 인간이 되시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자기를 표준하여 확신컨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못하리라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벌 주시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즉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일을 마무리하실 것이 틀림 없다고 자신했던 것.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뜻 밖이었다. 하나님은 원리원칙을 따라 용에게 형벌을 내리셨던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하나님 친히 인간을 위해 핒ㅎ물로서는상상도 못할 자기 부인의 길을 따르시겠다는 퐉고하신 의지 표현이셨다.

그러므로 영물 중에 유일하게 마치 아담이 그 범죄로 종전의 화려 찬란한 빛의 옷이 벗겨지고 <알몸뚱이>로 드러나 누더기 같은 스스로 만든 옷을 겉치게 된 것과 똑같은 모양새로 사탄이 <뻘거숭이>로 전락하게 된 것이 현재의 그 가시적 형상인 것이다. 이 실상을 마음 깊이 아로새겨야.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에서 두 <알몸뚱 이>와 <뻘거숭이>의 대조되는 <괴변/怪變>이다.

모든 신령한 존재는 불이 그 상징이다. 주 님의 재림도 "그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심"(살후 1: 7)이라 하였고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히 1:7) 함과 같다. 용 사탄도 그 몸이 불꽃이고 그 입에서는 불이 토해진다. 그러나 더 이상 현란한 광채로는 둘러 싸이지 않고 자연게 물질로 된 육체의 '가시성'에서는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명명백백한 사실에 근거하여 모름지기 21세기 복음 전도자들은 성경대로 역사적 바벨론 탈출을 선언해야 하며, 충실히 진실과 진리를 따라 복음을 선포함을 시대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는 것이니 즉 에덴과 아담의 애초 속성이 자연계가 아니요 초자연계이고 육/肉이 아니고 영/靈임을 외쳐야 하는 것이다. 이 중차대한 시대 소명을 외면하는 자마다 가차 없이 탈락될 것임을 엄중 경고하는 바이다.

2025년 7월 1일 화요일

NASA의 용의 실물 사진 (3)

천사들은 아담을 돕기 위해 아담 이후에 창조된 것이다(창 2:20). 지금까지 거의 2천년간 유포된 "루시퍼(계명성/새벽별ㅡ그룹과 스랍을 가리킴)"라는 이름은 사탄이 자기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인생들에게 거짓말해 온 것. 천사 등 영물들은 초능력으로 사람처럼 자기 모습을 변형시키기는 하지만(마리아에게 나타낸 것처럼) 원래의 모습은 자연계 짐승들의 생김새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뱀에 해당되는 것이 용인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인간(아담)에게만 한정되는 것. 하나님의 대리자로 지정된 아담 때문. 그 덕에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된 것.


모든 영물 중에 유독 용만이 가시적 존재가 된 것은 아담을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리게 만든 책벌로 저주를 내리신 까닭. 아담을 자연게 육체가 되도록 한 죄에 상응하는 형벌이라 할 것이다. "흙을 먹게 됨" 과 "배로 기어 다니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심이 이를 뒷받침하니 즉 영적 몸이면서도 동시에 물질적인 몸으로서의 요소가 가미된 특질을 이루게 된 것. 이것이 세상에 용의 모습이 광범위하개 드러나게 되는 실마리가 된 것이다. 사탄(본명이 아니고 인간의 "대적자"라는 별명) 자신은 인간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터이나(따라서 이에 수반하는 고통도 가중되는 것은 당연) 별 수 없이 인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은닉처로 바다를 선호할 수밖에 없어 동양권(중국을 비롯한)에서는 용궁, 용왕 등으로 알려진 이유다. 사탄 자신도 마치 그런 존재가 있는 것처럼 꾸민 것도 물론이다. 그 외에도 사탄은 애덴이 자연계라고 속여 만물의 대칭성을 감추려고 애썼으며 아담이 물질적 육체로 창조되었다고 선전하여 인생들을 세뇌시켜 성경의 품격을 현저히 떨어뜨리기에(동화나 신화인 양 속여) 광분해 왔던 것이다. 이 선동질에 넘어가는 인생들이 어리석지 어찌 자연계 동산인데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 나무가 존재하겠는가! 이것이 현재 바벨론 신학(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이라 알려진)의 현주소다.

현세에서의 모든 인간의 고통 고난도 영생의 신령한 몸이었던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동물적 육체로 전락한 결과라고 전도를 하면 아주 깨끗하게 해결되는 것임에도 사탄의 노략질에 넘어가 그 대답을 못해 줌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방황하게 만들어 왔던가! 구원의 복음은 학문이 아닌 것이다. 학문으로 위장시킨 자가 사탄인 것이다. 성령의 계시로 모든 성경 진리를 알게 된다고 경고하셨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버렸으니 하나님도 버리셨다 해도 지나친 말일 수가 없는 것이다.

미우주항공국(NASA) 카메라에 뜻 밖에 촬영된(2001년) 용의 실물 사진을 통한 21세기 하늘의 메시지 (2)

 


아담이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결과는 죽음이니, 성경에 무식한(사탄에게 휘들려 그 거짓말만 믿는 고로) 바벨론 신학자들이 주장함과 같은 소위 "영적 죽음"이 아닌 자연계 동물과 같은 물질계 육체로 전락해버린 것을 의미함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이 사탄에 의한 바벨론 신학의 농락으로 지금까지 거의 2,000년간 그 어느 인간도(성경을 최초로 기록한 선지자 및 외경/外經을 기록한 이들ㅡ외경에는 구체적으로 안급되어 있으니까ㅡ그리고 메시야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사도들과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ㅡ요한 사도의 계시록[계 12:9/20:2)을 중심으로ㅡ외에는 그 누구도) 발설한 적이 없는 영계/靈界로서의 에덴과 거기 소속된 영계의 동물(탁월한 지적 존재로서 초능력을 구사하여 신/神들로 인정되는) 관련 진실이다.

이들 존재는 우리가 "천사"라 일컫는 영물/靈物들로서 그 중 범죄 타락한 것이 용/龍 곧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며 용/dragon은 자연물질계의 뱀과 대칭/짝이 됨을 일컬음이다. 영계(초자연계)의 동물은 자연계 동물과 대칭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그러하나 육체와 영혼의 대칭으로 통합되어 있을 뿐이다. 용은 파충류 영물들의 수장(천사장)이고 미가엘, 가브리엘 등은 일테면 사자, 독수리, 소(cow)에 대응되는 천사장급. 모두 아담의 보좌역들로서 수하/手下들이다(창 2: 19). 창세기에 용을 "뱀/serpent"(3:1)이라 한 것은, 창세기 기록 당시 이미 아담은 범죄로써 동물적 육체로 도로 돌아와 있는 상황이기에 더 이상 신령한 몸이 아닌지라 이런 아담을 기준해 그 위계질서를 따라 표현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것. 혼동치 말아야.

이같은 짝을 이룬 대칭 개념으로서의 확실한 세계관, 우주관은 3위1체 법칙이 밝혀져야 온당한 설명이 되기에 지금까지 유보되어 온 것이라 보아도 일단은 무방하다. 이 모든 것은 아담 범죄라는 불가피한 현실에서 빚어진 후유증이다. 사탄의 꾐에 넘어가 세상 통치권을 원수 사탄에게 "넘겨 준"(눅 4:6) 비극적 대가/代價이기 때문이다. 그 아담의 통치권으로서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으로 무소불위의 거짓과 속임수를 자행해 왔던 것이니,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에서 이루어진 악령 일당의 만행이었으므로 천사들도 지금까지 개입할 수 없었던 것이나 분기 탱천한 거룩한 천사들의 수 십년에 걸친 대판 격전 끝에 용을 지상(시베리아 밀림 퉁구스카)에다 힘껏 내리꽂아 완전히 처박은 다음에야 끝날 수 있어 오늘날 "21세기 표적과 기사"와 같은 경이/驚異가 탄생한 것이다.

1908년 6월 30일 7시 17분. 100년 하고도 몇 십년을 훌쩍 넘겼지만 과학계는 전혀 미궁 속에만 맴돌고 있고 그 원인 규명을 못하고 있으니 뻔하지 않은가! 영계(초자연계)의 실상도 모르고 성경은 더군다나 믿지 않으니 천년을 경과한들 알아내겠는가! 인류사상 최초로 용을 실물 증거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2001년 NASA 무인우주선 디스카버리호(STS105) 카메라에 찍힌 촽영물과 쌍벽을 이루는 최대 수확인 것이다.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다.





원상 회복 (2)

우리 구원이 <원상 복구>이기 때문에 "회개"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거룩하고 의로운 인간으로 죄가 없었으니까. 아담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