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 ,23). "미련하다"는 것은 바보 짓을 한다는뜻입니다. 힘이 있어야 남이 알아 주고 돈 세상에 돈이 있어야 최소한 기를 펴고 사람 대우릏 받는데 당장은 "약한 자", "없는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27,28)로 분류되니까.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끼"(고후 13:4) "우리도 그 분 안에서 약함"(:4)은 당연합니다.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라야만 할 것이다" 하셨으니, 그 분의 가신 길,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도 세상에서 알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틈만 나면 없애버리려는 자들이 그 주변에서 떠나지 않았고 제자들이라는 무리들도 "말씀이 어렵다, 누가 듣겠느냐"며 미련 없이 떠나가버리는 현장의 연속이었다 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서 세상이 열리면서부터 지금까지 "발꿈치를 물리고 머리가 으깨어짐" (창 3:15)으로써만 끝나게 되어 있는 전쟁이기에 그러합니다. 아담 법죄로 세상이 사탄의 천하로 둔갑되어버리면서 시작된 비극적 참상입니다. 아담의 붛순종에 대한 필연적 형벌 차원에서 시행되는 것이므로 우리 주님 친히 최후 승리자로 세상에 다시 오시어 마침내 군림하시기 전에는 지속될 것이나 그렇지만 때는 이제 종결에 이르러 목전에 다달았습니다.
사탄의 응당한 최후 발악이 불가피해 필자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끝날에 가서 죽임을 당할 것이나(계 13:15/단 12:7) 이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의한 최후 승리의 재판/再版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지 위축될 일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아무나 그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친히 가르치심을 받아 배운 자만이 올 수 있는"(요 6:56- 66) 터라, 베드로의 고백처럼 "영생의 말씀이 있으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는 소수만이 끝까지 떠나지 않는 것이니 이 사정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구원 받는 이가 적느냐는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 하셨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비좁고 길이 협소하여 찾는 이가 적음"(마 7:13,14)이라 하신 것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 대체 무엇을 말함이냐. 사람이 아담 범죄로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려 먹고 마시는 것이 유일한 사람 사는 방법인 양 여겨지지만 원래 신령한 몸으로 창조될 때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순종하면 거룩한 천사들처럼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사탄 마귀처럼 악령으로 풀리는 것뿐입니다. 이제는 영원한 생명의 법칙이 발동되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니 멸망의 장본/張本인 자아중심을 타파하고 하나님만 위함으로써 그 뜻을 따라 이웃도 위하면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신 대로 그 이상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를 모르는 세상은 자기 위주/자기 본위로 (1)종교적인 측면에서 또는 소위 (2)유식/有識 계층이라 하여 또는 (3)황금 만능주의 등등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바, 특별히 (1)에는 "기독교"도 포함됩니다. 바벨론 신학이 여기 속합니다. 주님 당시의 유대인처럼 초능력(기적)을 대개 찾으니 오늘날 하나님으로 자처하여 가장하려는 사탄에게 좋은 먹잇감만 됩니다. 모두 자아중심의 비극적 한계를 일순간도 넘어서지 못해 "자기 부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무조건 반발이니 초대교회 당시나 오늘날이나 세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때라 초능력이 무진장 발호하는 때입니다. 여기 관심이 있는 자마다 사탄의 호구/虎口(범의 아가리) 속으로 자진해 들어가는 꼴이 됩니다. 사람마다 듣기 싫어하는 "십자가 짐(사형수의 위치에 서는 자세)"이나 "자기 부인" 과 같은 말을 마치 일부러 골라서 쓰는 것 같은 성경의 논조이지만 실은 진리와 진실 그대로의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습니다.
하나님 친히 우리 유일의 의존처시라 함은 의타심에서 오는 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법칙을 논함이니 가장 이상향적 삶에서 그 핵심인 사랑에서 상대성의 동시성을 말함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위하며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우리만을 위하심입니다. 그 증거가 우리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 나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주셨으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림이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하셨습니다. 이는 생명의 법칙에서의 하나됨을 가리키심입니다. 만유를 주관하는 짝의 법칙에서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가 됨으로 완성됨을 이르심이니 바로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핵심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이시므로 성부께서는 성자를 위하시고 자기를 위하심이 없으시며 이 본을 따리 성자 역시 그러하시니까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하심이지 강요되어 하시는 일이 없으심은 당연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생명의 법칙을 사랑하시어 이를 지키심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성자께는 성부의 "계명"으로 인식되심이 옳습니다.
이 "하나"(요 10:30)됨에서 "한 몸"(창 2: 24)됨도 나오고 우리의 구원에서 주님과의 "한 영"(고전 6:17)됨도 이루어집니다.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머리이시고 그 피조물은 그 몸으로서의 각 지체 각 부분 역할입니다. "마지막 아담"께서 우리 구원 받은 모두의 머리이시고 또한 그 머리되심이 성부 하나님이시니 성자 하나님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으로서의 이 "하나"(요 10: 30)됨은, 갑과 을이 짝을 이루었다고 볼 때 "갑 안에 을이 있고 을 안에 갑이 있음"으로써 표현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38) 하심이 그 뜻입니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가리켜 다시 가르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함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14:10)을 의미함이라고 정확히 설명하신 것입니다.
즉 갑 안에 을이 있음은 갑을 통해 을이 움직인다는 뜻이요 이는 바꾸어 말해 갑이 을을 위하고 갑 자신을 결코 위하지 않음을 의미함이니, 그 반대로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짝의 법칙에 기반한 생명의 법칙에서 그 핵심을 밝히시기를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17:10)이라 하신 것이니 성경을 통해 우주 만물 즉 만유의 기본 원리를 이같이 소상히 다 설명하심이라 이보다 더 정확한 하나님 증거/증명이 없습니다.
역시 성경은 남녀 한 몸됨에서도 역시 같은 원리를 적용하여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함"(고전 7:4)이라고 가르칩니다.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같은 설명입니다. 이것이 둘이 짝을 이루어 하나되는 정확한 구조, 얼개(structure)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기를, "네가 (사람으로서)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마 16:23)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시고 사람을 위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함이 항존/恒存의 생명의 법칙 그 불변의 원리이기에 그러합니다.
고로 성경에서 말하는 정확한 의미의 "회개"는 이 영원불변의 삶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자아중심으로 치달은 일체의 언행심사/言行心思를 지칭함입니다. 자아중심은 동물적 육체의 특성입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니까 생명 유지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창조의 기반이 되어 있는 인간이나 영물들은 이지적 판단에 의해 자유의지가 작용하므로 그런 자아중심의 동물적 본능이 해당되지 않음은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몸과 머리의 관계에서 몸은 머리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상호 작용의 유기체 이 자연 순리대로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도 당연히 이 원리를 따름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당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머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시는 이치입니다. 머리와 몸은 하나, 한 몸이니까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고전 12:26)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아직도 이 "함께 하는 고통"은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땅히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의 숫자가 다 채워져야 다시 말해 더 이상 구원될 사람이 없는 그 때에서야 이 해산/解産의 산고/産苦는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오늘날 주님의 재림 때가 박두했습니다. 그 순간까지는 주님의 <머리>로서의 "남으신 고난"을 그 <몸>된 교회 일원으로서의 "내 육체에 채워야"(골 1:24)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롬 8:22) 때입니다. 이런 형편에 "부/富, 성부/聖富(예수전도단에서처럼), 운운" 하는 것마다가 헛소리요 멸망으로의 유인질인데 이를 영적으로 분별 못하고 무작정 그 감언이설에만 끌려 따라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관심사는 영적 부유함이지 세상 물질적 풍요가 아닙니다. 그것은 멸망의 지름길일 뿐입니다.
멸망으로 유인하는 바벨론 신학의 특징은 죄를 희석시켜 그 물타기 작전으로 죄가 선명히 드러나지 않게 하는 술책에 있습니다. 세상 사랑을 회석시켜 그 간교한 사악함이 드러나지 않게 함입니다. 바벨론 신학 척결에서 욧점은 죄를 죄로 바로 알아 차단시키고 "참고 선을 행함"(롬 2:7)으로써 "영생에"(:7) 이르게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6) 때문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이 "행함"을 말살시켰습니다. 이로써 성경을 폐쇄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고후 5:10)이라는 경고의 성경을 무용지물로 격하시킨 그 나머지 미신 나부랭이를 "복음"이랍시고 부둥켜 안고 영원 멸망으로 빠져들게 만든 것입니다. 행함은 순종입니다. 행함으로써 순종이 이루어지는 고로,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가겠습니다' 하다가 가지 않고 둘째에게 가니 '싫어요'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냐"(마 21:28-31)는 말씀으로 순종의 행함이 핵심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순종 않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담의 범죄와 기타 모든 피조물의 불의/불법이 하나님의 계명 즉 영원한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불순종에 있음을 누가 부인하리요. 그러나 바벨론 신학은 그 궤변으로 이를 말살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처음부터 믿음이 아닙니다. 절대적 순종인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범죄가 이루어져 동물적 육체가 되니 이런 육체 자체가 인간에게는 "죄의 몸"(롬 6:6)의 작동인지라 이 해결책의 일환으로 "믿음"에 의한 구원인 것이지 원래는 순종 곧 "행함"이 핵심 골자인 것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나 그 때에 내가 저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을 것이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때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다"(마 7:21-27).
믿음이 있으니까 "선지자 노릇도 하여 말씀을 전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며 주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성경에 밝혀 놓으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반드시 인도해 주시니까. 성경을 항상 가까이함이 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필자도 유력 교파 선교사 주관의 신앙 월간지 번역 일을 한 때 맡아보며 고금의 세계 교계 유명 인사들의 저술을 섭렵해 보았습니다. 성경을 직접 읽을 필요가 없다고 그 때는 확신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죠지 뮬러와 같이 믿음의 역사를 시작해보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나름대로 결심하며 성경을 새로이 읽게 되면서 변화가 왔습니다. 얼마나 성경을 잘못 읽었는지 잘못 알고 있었는지 따라서 얼마나 잘못 전도를 했는지 뼈아프게 자각하는 순간이 왔던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의 차이는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아담 범죄로 인한 동물적 육체로 되돌아간 죄의 몸 때문에 순종을 할 수 없다가 "믿음"으로 구원된 후 비로소 순종이 가능해짐으로써 당연히 요구되는 순종 즉 "행함"을 따져 "영생" 여부가 마지막 심판대에서 가름되기 때문입니다(2:6). 순종은 위의 주님 가르치심에서도 확인되듯 자유의지로 결정되는 것이라, 아무리 순종할 수 있어도 내 자신 이를 싫어해 아니하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니까.
뿐만 아니라 바벨론 신학은 로마서 7장의 탄식을 믿음에 들어온 바울 자신의 체험이라는 거짓말까지 토해내어 이 세상에서는 부득불 죄짓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많은 영혼을 멸망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세상 삶을 사랑하여 살고자 하니 또한 죄짓게 되는 것입니다. 한없이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그 심판대에서 "믿음" 유무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날강도 같은 거짓말에 속아 자기 생명(은혜의 믿음으로 얻은)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눅 9:25) 말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마귀를 가리켜 "온 천하를 속이는 자"(계 12:9)라 했듯이 지금 지구상의 모든 기독교가 이 속임수의 마수/魔手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처참한 실상입니다. 한시바삐 이 올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을 믿는다면서 성경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 관심을 두지 않는 참담함입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탈바벨론"을 외치니 누구 하나 제대로 귀를 기울여 듣는 자가 없는 상황에서 다음의 주님 말씀만 인용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이 모든 전파의 말씀이 오늘날 성령의 말씀이심을 믿으시기를. 그렇지 못하겠거든 이 말씀과 함께 보여진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라도 믿으시기를! 모세가 처음 하나님 앞에서,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않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할 것입니다"(춭애급기 4:1) 하니,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셨습니다. 3운법칙 등은 사람의 머리로 알아낸 것이 아니며 알아낼 수 있는 성격의 일도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모세 지팡이"라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자문자답하시기를.
주님은 "내가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신 다음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오시어 각 시대 모든 교회 하나님 군대의 모든 전투를 진두 지휘하실 것임을 미리 밝히심이니 때문에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21세기 표적과 기사"가 그런 예입니다.
2025년 7월 30일 수요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유무가 아닌 "참고 선을 행함"(롬 2:7) 여부로 가름되는 마지막 심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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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명상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마 6:13). 오늘날 인간 세상의 모든 부조리, 불합리, 일체의 악과 죄가 아담 범죄 오직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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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명칭인 DPA pix를 ADAM pix로 변경하였습니다 . ADAM은 Angel and Devil's Actual Manifest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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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가 심하여 한 달 넘게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이전처럼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우리의 합심 기도로만 이루어집니다. 여러 형제자매의 합심 기도로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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