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모 마리아"인가. "성모"가 무슨 필요인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 무슨 아쉬운 점이라도 있으시기에 그 야단인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성별로 구분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성별은 생식과 생육 번성을 위한 피조물들의 동식물적 구분일 뿐이다. 애초의 인간도 신령한 몸(동물성 육체로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이후 다음 단계로 영원한 영혼을 조성하심으로써 거기 상합/相合되게 죽지 않는 육체로 변환되도록 영계인 에덴에다 인간의 보금자리를 정해 주심으로써)으로 창조된 까닭에 초능력적 생산 방법으로 일정한 솟자로만 인간이 생성되도록 한정하신 고로, 애당초 자연계 동식물처럼 성별로 구분되지 않는 영물 즉 천사들처럼 온전한(신령한) 육체였음이다(눅 20:35, 36).
아담만이 남녀 구분이 되어 있었으니 이는
동물에서부터 하나님 형상으로 진화되었다는 상징적 의미만이 있음뿐이었다. 자식 생산도 천사들의 도움으로 초능력으로 넉넉히 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여자가 생겨남은 생식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파생자(성부)와 피파생자(성자)로서의 하나이심과 같은 의미로 짝을 이뤄 존재하기 위함인 것.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니까 이는 당연 논리. 그러나 동물적 육체로 퇴화(아담 범죄로)되면서 불가피하게 오늘날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남성 의미의 대명사로 호칭되심은 인간의 형용으로 표현되실 필요성에서 인간은 모두 성별로 나타내어지니까 아담을 기준함뿐이다. 아담이 처음에 성별 없이 존재했었으니까. 성별이 있었다면 아담 창조 즉시 여자도 그 후속 조처로 창조됨이 당연 순서겠지만 그렇게 하시지 아니한 것이다. 바로 그 증거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형용으로 표현하면 엄부/嚴父와 같으시면서도 지극히 자모/慈母와 같으신 것. 성부나 성자나 모두 성품이 그러하시다. 그러면 충분하시고도 남지, 무엇에 부족하시기에 그런 불경/不敬의 극치를 이루는가! "성부", "성자"에다 또 "성모"라니! 어찌 신성 모독이 아닌가!
이 괴이 망칙한 거동에 반발하는 같은 기독교인들을 국가 권력을 빙자해 박해하여 죽이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이 무슨 해괴한 변태란 말인가! 이는 로마 카톨릭(천주교)의 경우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면서"(요 16:2) 살인을 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 똑같다. 그 대표적 사례가 깔벵(Calvin)이다. 스위스 주네브에서 "국가 권력"으로(국가 통치랍시고 나댄 것 자체가 반성경적이니, 사탄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국가를 형성한다면 그 종노릇이란 뜻 하나도 분간 못한단 말인가!) 살인 행위를 자행하고도 양심적 자책 하나 없었다. "물에 몸을 담그는 의식이 아니면 성경적 세례 의식이 아니라"는 주장을 죄로 엮어 물에 빠뜨려 죽이는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모두 바벨론 신학의 거짓과 속임수 그 부끄러운 무지/無知의 결말들이다.
참고로, 우리가 "세례"라 할 때는, 세례 베푸는 방식(몸을 물에 잠기게 하느냐 아니면 물방울로만 적셔 주느냐로 따지는)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의미를 강조하여, <"죄를 씻는"(행 22:16) 예식>의 의미로서 "세례/洗禮"라 한다. 이는 영어 "baptism"이헬라어 원음을 따서 칭함과 같은 취지다.
그러나 성경은 몸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말하고 또한 뜻함이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의미함이라, 죽음의 대표적 상징은 노아 대홍수로 인한 인류 멸망이기 때문이다(벧전 3:20,21/벧후 3:6,7 참조).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지만 이를 행사하는 것은 인간인지라 이 고유의 아담 통치권이 아담 범죄로 원수 사탄에게 송두리째 넘겨져(눅 4:6) 사탄 아래 악인들이 대부분 주물럭거리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 참혹사/慘酷史로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지속될 슬픈 운명이다. 아담의 <죄값>인즉 <형벌> 차원인지라, 감히 누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위 "기독교"의 같은 기독교인 박해가 이와 같이 악용됨이 모두다 원수 악마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원망하거나 의아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는 오직 "인내하고 오래 참고 견디는"(눅 8:15/21:
19/롬 5:3,4/15:4,5/살전 1:3/살후 1:4/ 3:5/딤전 6:11/딤후 3:10/딛 3:2/히 10: 36/12:1/약 1:3,4/5:11/벧후 1:6/계 2: 2,19/3:10/13:10/14:12. 이상은 "인내", 아래는 "오래 참음". 고전 13:4/고후 6:9/갈 5:22/엡 4:2/골 1:11/3:12/살전5:14 /딤전 1:16/딤후 3:10/4:2/히 6:12,15/약 5:10/벧전 3:20/벧후 3:9,15. 다음은 "견디고". 계 2:3) 것만이 하나님 뜻이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까.
다시 말해 흔히 쓰는 말로서 "정의의 맛을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알이지 이를 개인적으로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든 의탁하신 일이 없으시다. 국가 차원에서만 가능하므로(롬 13:4), "내가 첫째로 권하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딤 전 2:1,2)이라 한 것이다. 이 세상 삶을 사랑하여 누리겠다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상 행동이 보장되는 합리적 세상사가 영위되도록 하나님 앞 제사장의 위치에서 올리는 간구를 뜻함인 것이다.
사탄의 지배 아래에서 국가 권력이 정정당당하게 행사되기보다 악인들의 도구가 되는 예가 더 많았던 것이 현실이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오늘날 20세기 이후 사탄의 최후 발악으로 인류사상 가장 악질적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 소위 "공산주의" 폭동이자 망동이다. 한국은 지금 이 소용돌이 속의 한 가운데에 있다. 이 난동은 용이 하늘에서 영구 추방된 시베리아 퉁구스카 대충돌(성경을 무시함으로써 천지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대폭발"이라 맹신하고 있지만) 사건이 일어난 1908년 직후 곧장 나타난 것이다. 인류사상 모든 대소 전쟁과 분란을 통틀어도 이 공산당의 행패 그 야만성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계 12:12) 함과 같다. 그러한 "분냄"이 목불인견의 끔찍하고 참혹한 재앙의 연속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악당들의 "공산/共産"이라는(한국에서는 "주체 사상"이라는 미사여구까지 겹쳐) 꿀 발린 선전 선동으로 멋모르는 대중 특별히 젊은이들이 유혹되어 피에 주린 아귀처럼 날뛴 것이니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 정확한 증인이요 증언이다.
이 살인마들의 특징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에 있다. 무신론을 아예 간판으로 내어걸고 덤비니 당연 결과다. 바꾸어 말해 양심이나 도덕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다. 속임수와 거짓말도 그들 사이에서는 당연시되고 있다. 또한 그런 악의 부류들이 여기 합세하고 있다. 한국의 2025년 현재 상황이 딱 그 복사판이다. 어느 국가든 "공산당"을 입 밖에 내지 않고도 또는 노골적으로 그런 명칭은 붙이지 않더라도 그런 집단(국가)과 동조 결탁하는 부류(소위 "좌파"란 이름으로 호칭되는 정당 따위)들은 악이라고 분류하여 아예 배척해야 마땅한데 이런 역사적 추이를 분간 못하고 그들의 부추김에 맥없이 놀아나고 있는 것이 비극의 화근이다.
아담이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른 결과로서의 범죄이기에 그 통치권이 사탄에게 넘겨진 것은 사실이지만, 만유 주재의 하나님이시라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므로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고 아담의 세상 통치권을 지금은 사탄이 행사한다는 그 차이뿐이다. 바벨론 느부갓네살왕과 관련해서, 다니엘이 그 손자 벨사살 왕에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라"(단 5:21)고 일갈했듯이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심이다.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라는 의미가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 그 뜻을 이루심이라 얼마든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마 18: 19). 단 둘. 두 사람만 합심해도 크나큰 위력이 발휘된다. 하나님의 말씀이시요 <약속>이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단 두 사람이라도.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다.
⁹그러나, 그 둘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이니까 제자들은 스승을 전심전력으로 심복/心服하여 전적으로 본 받는 자이다. 입맛대로 말씀을 골라 가며 "믿는" 자가 절대로 아니다.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듣겠느냐"(요 6:60) 하지 않는다. 고로 이 점에서는 사람이 문제다.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롬 14:7)는 무리 속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제자"다.
또 유의할 것은, 이른바 "통성"기도는 합심 기도를 깨뜨리는 독소임을 알아야. 각자가 모두 자유 기도로 돌입할 수도 있으므로 "합심"의 의미를 일거에 무너뜨려놓기 때문이다. 합심 기도에서 대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므로 그와 같은 인도를 확신 못하는 경우 절대로 입을 열지 말아야.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간구와 소원을 올리는 것이 <합심>이기 때문이다. 자유로 하는 개인적인 기도는 각자 홀로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인즉 함께 모일 때는 마땅히 지양되어야 하는 것. 시간을 낭비하지 말 것이다. 기도 집회 인도자는 이러한 분위기를 적절히 파악하는 것이 요긴하므로 영적 통찰력이 요구된다.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은 '말씀 전파'에 앞서 항상 '기도'를 중시했음이 베드로의 언변 중에 은연히 그러나 확실히 묻어남을 확인할 수 있다(행 6:4). 주님께서 얼마나 기도에 힘쓰셨는지 복음서를 읽는 자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기도의 뒷받침이 없이는 모든 말씀 전파는 무위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이름 있는 설교자보다 이름 없는 기도자가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우위/優位에 위치했음을 각 설교자는 명심하기를. 설교자가 설교를 잘해서 유명세를 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기도를 일심으로 해 준 덕에 그 결과임을 알아야. 필자의 말씀 강해도 여러분의 기도에 절대적으로 힘입음이요 기인/起因함이다. 먼 훗날 오늘날의 이 바벨론 탈출의 역사/役事를 평가함에서 단연코 이 기도에 충성한 여러분들께서 상위/上位에 위치하실 것이다. 말씀 전파자는 단지 말씀을 받은 대로 세상에 알리기를 힘쓰느라 날밤을 새는데 그치지만 기도자는 직접 악령들과 맞닥뜨려 단병전/單兵戰을 벌이는 역전/歷戰의 투사 /鬪士들이기에 충분히 그러하다. 이렇듯이 외압/外壓을 막아 주었기에, 필요한 내적/內的 충실을 도모할 수 있었음이다.
전지전능 하나님이시니까 인간의 힘을 빌리실 필요가 있느냐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하고 간딘히 판단해버릴 사람이 많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약하셔서가 아니라 우리도 함께 동참한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함"에 있어, 생명의 법칙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위해 드리고 우리 일은 하나님께서 해주심이기에 그러하다.
때문에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 것이다"(에스겔 36:36,37). 다시 강조하거니와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 위하여 이루시마고 분명 약속하셨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같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자세가 필수임을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같은 일을 두고도 하나님으로서는 우리를 위하심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심으로써 "하나"로서의 완전 조화를 이룸이니 곧 상대성의 동시성. 사랑은 항상 동시에 움직이는 법. 이 얼마나 화려한 <아름다움>인가! 이 이상향적 삶의 구조에서 사랑의창조주 하나님 친히 유일하신 구심점이 되신다. 그 절대 불가결성의 요인이 되신다.
만인간과 '머리'와 '몸'의 관계를 형성하신 바탕 위에서만 이상향적 사회가 능히 넉넉히 구축됨이다. 아담 범죄 전 세상이 이에서 출발했건만 아담 범죄로 한꺼번에 무산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친히 그 십자가 사랑으로 재차 솔선수범해 보이심으로써('머리'로서) 그 '몸' 을 이룬 각자의 심벽/心壁에 이 생명의 법칙을 각인해 두셨으므로 생명과 영광의 역사는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구체적 방안이 세상 어느 종교를 통해서도 밝혀진 역사가 없다. 성경을 믿는다는 교회마저 초대교회의 가르침에서 "신속히 떠나"(갈 1:6) 바벨론 신학에 물듦으로써 그저 막연히 영생, 구원만을 줄창 외쳐 왔으니, 바울 사도 생전시에도 그러했거늘 하물며 사도들의 부재 중의 오늘에 와서야 말해 무엇하리.
입법, 사법, 행정부가 썩었으면 호국 간성인 군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썩었는데 군이라고 성할 리 없다. 기백도 없을 뿐더러 죄편향의 사상에 감염되어 문드러진 지 이미 오래다. 교회도 썩었다. 성경에 어찌하여 구약시대로부터 "남은 자" (롬 9:27/이사야 10:22)라는 표현이 등장했겠는가! 사탄의 광기가 곳곳에 스며 있기에 그 혼란상이 처처에서 불거져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서두에서부터 지적했듯 최후 발악 중의 악마라 천하가 그 난장판이다. 모든 원인은 여기에 있다. 오직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깨닫는 자가 이 시대 주역/主役일 수밖에는 없다. 그 숫자가 얼마이든 상관 없다. 역사상 숫자의 다과/多寡를 논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기드온을 통한 전쟁에서 3만2천명의 모군/募軍 중에 수천명도 아닌 수백명 즉 그 1/100로 한 줌 밖에 안되는 숫자로 확 줄이셨다. 300명 용사로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언제든 적군의 기습이 예상되는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가정하고 목이 마를 때 취할 수 있는 자세를 연출해보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전투 태세가 되어 있는> 자가 그 정도였다는 얘기다.
이것이 하나님 이루시는 역사/役事이시고 그 역사/歷史이다. 합심 기도를 외치는 이유이다. 묵묵한 순종만이 답이다. 이에 대한 각자 각성만이 유일의 해결책임을 단언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누가복음 10:27). 단 "두 사람"(만 되어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님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이다"(야고보서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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