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1일 수요일
사람이면 모름지기 3운법칙을 알아야
인간을 위해 에덴을 만드셨다는 기록은 없이 에덴에 한 동산을 인간 위해 창설하셨다는 기록만 있으니 이미 존재하는 에덴이다. 외경-apocrypha-에도 그런 언급이 나온다. 다시 말해 "6일" 창조 이전에 있던 1차 창조가 풍비박산이 되고 2차 창조이셨다. 그래서 자연계는 "혼돈"과 "공허", "암흑"과 "깊음"과 "물"(창 1:2)만 잔존했던 것. 바로 "물로 망한 세계"(벧후 3:6). 자연계는 그렇게 허물어졌으나 함께 창조되었던 영계(신령한)는 영원성이 특징이므로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 그랍과 스룹은 이 1차 창조 때의 창조물. 그룹 중 하나가 타락 방종한 끝에(사 14:12) 이 사달이 나버린 것. 2차 창조 역시 아담과 영물들의 범죄 타락으로 같은 운명에 처해지니 물과 대칭인 불로써(벧후 3:7) 그렇게 된 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최종 정리, 정착된다. 사탄은 역시 거짓말로 그 자신이 바로 그 그룹인 양 속여 온 것이니 하여튼 모든 것을 바벨론 신학으로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담을 위해 신령한 세계인 에덴에 아담을 두셨다는 것은 아담이 이미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었음을 말한다. 아담의 영혼을 조성하신 것이 그 때문. 영원성의 영혼인데 육체도 당연히 영원성을 지녀야. 영혼은 영원한데 육체는 썩어 없어지는 것을 갖다 붙이셨다고 선전하는 바벨론 신학이다. 언제까지 하나님께 감히 원수 노릇을 하려는가! 그래서 "바벨론에서 나오라"(계 18:4) 하신다.
선악과 나무와 생명과 나무는 이와 같은 인간의 생래적/生來的 복합 구조를 말함이다. 즉 처음애는 자연계 물질적 육체의 최고 절정으로, 그 다음 단계는 영적 존재로. 고로 현재는 에덴에 있어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으니 이전의 동물적 육체로 되돌아감으로써 다시금 동물적 육체로 죽어버리는 꼴을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는 엄중 경고를 아담에게 하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려(눅 9:25) 동물적 육체가 됨으로써 영생 구원을 찾는 몸이 되었은즉 "믿음"의 의미가 "순종"으로 직결됨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또 은혜로 얻는 구원을 "믿기" 전에 즉 회개해야 하고(행 17:30), 그 증표로 회개의 세례 받음이 마땅하지 않은가. 회개는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고 절대 복종하겠다는 언약 관계에 들어감이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다"(요 8:43) 하심과 같이 성경에 대한 무식은 성경을 읽을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보다 유식해 보이고 고상해 보이는 신학 서적, 남이 써놓은 주석서 강해서 나부랭이에만 죽자사자 매달리고 어린 아이 같은 심정으로 성령의 가르치심(성경을 통해서만 나타나시는 바가 되는)으로 성경 읽는 것은 유치/幼稚한 것으로만 취급하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바벨론 신학의 도당/徒黨 밖에 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언약 관계에 들어감을 뜻함이라(호 6:7)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요 "믿음"이요 "구원"이요 "자기 부인"이요 "십자가 지는" 것이요 "모든 것을 버림"(눅 14:33) 곧 자기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 위함, 이웃 위함인 것. 이런 철두철미한 공동체 정신이기 때문에 초대/初代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공용/共用)하고 제 재물(財物)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행 4:32). 바로 이것이 교회이다. 지금은 그 전통과 본을 말짱 버렸으니 소위 "자유세계"에서는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어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사이비 교회". 그러나 북한을 비롯해 지금도 핍박 받는 지역에서는 "재물"이라 할 것도 없이 모두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로 평준화가 되어 있어 그나마 "교회"로 남아 있을 뿐.
살 만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요 12:25) 하시는 것이 아니니, 살고 말고 할 것도 없고 생명이라고는 지푸라기 하나도 구경할 것이 없는데도(자연계 동물이 아닌 인간은 영광의 신령한 몸으로서 죽음 없고 고통 고난 없이 영원한 부유와 풍족을 누려야만 "사는 것", "삶"이라 할 수 있어) 이 세상 신/神으로 군림해 있는 원수 악령 사탄(고유명사가 아닌 "적대자/敵對者"란 의미의 별칭)이 아담 범죄의 결과인 우리의 현재의 이 동물적 육체를 본연의 인간 모습인 양 속여 아담의 "죽음"을 "영적 죽음"이라는 거짓말로 합리화시킴으로써 거의 2천년간 속여 온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는 "영적 죽음"이라는 '바벨론 신학'의 용어 자체가 없었다. 단지 "이 새상에서의 헛된 삶"이라고만 인식시켜 그 위험성을 경고했던 것인데 지금은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미신에까지 빠져 자멸/自滅의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니, 지체 없이 탈출하시라!
오늘날은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시대. 단 천사의 월등한 제압력으로써 이제까지의 악령들로 인한 온갖 거짓을 분쇄해 원래의 순수한 복음이 밝혀졌다는 의미이지, 무슨 초강력의 초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된다는 그런 뜻은 아니니, 이전과 같이 복음 전파자의 흘리는 피와 땀으로 말씀이 전달됨에는 변함이 없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고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 밝혀졌은즉 이 실상대로 세상에 전달해야 하고 여전히 바벨론 신학 그대로의 거짓말을 그냥 덮어두는 경우 그에 따른 엄중한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사사로운 것을 더 사랑헀다는 자아중심이라는 판정을 면할 수 없기에. 자아중심이 모든 죄의 뿌리이니까.
바벨론 신학의 횡포는 전세계적인 것이므로 눈치만 살필 일이 이니니, 최초로 사탄의 거짓의 아성을 쳐 깨뜨리고 뚫고 나가는 은혜의 특임/特任이 한국교회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알고 순종해 나가면 되는 것. 한반도 교회에 이 은혜를 베푸신 것은 거의 90년간(1935-2024)의 핍박 속에서 연단되고 다져진 믿음과 기도의 결실.
여차하면 인간의 자유 의지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시한폭탄 같은 동물적 육체라 눈 깜짝할 사이 인류 공멸/共滅은 절박한 시간 문제이기에 오직 새로 창조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적 여유만은 주시려고 3운법칙을 정하신 것은 모르고, 구원을 모르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구원 받았다"는 자까지 <기도와 복음 전파>(새 창조의 재출생에만 마땅히 사용되어져야 할 금쪽같은 시간)는 젖혀 두고 제 멋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마귀가 부추기는 대로 세상과 짝하여 들떠 지냈으니 그 죄과/罪過가 크다, 때 늦기 전 회개하라!
차례차례로 80억 인류가 멸절해 가는 참극의 심판만이 당장 앞에 가로놓여 있음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한국이 승승장구하고 세계 중심이 된다는 말이 많은데 모든 "예언"은 성령의 이름으로 나지 않는 한 악령이나 귀신들로 인한 것이라 적대적이요 속임수일 뿐 선하고 의로운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과거사가 다 들어맞았더라도 그것은 맨마지막의 거짓말을 위한 위장술/僞裝術의 들러리일 뿐.
이 시기가 "마지막 때" 즉 세상 종말이란 것은 20세기 이후를 지목한 다니엘서로써 이미 확인된 것이고, "한 때, 두 때, 반 때"와 맞물려 나타난 3운법칙과 짝의 법칙과의 상호 검증으로 충분히 확증된 것입니다. 더 이상 증거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늘의 전쟁"(계 12:7)이 끝난 것도 1908년 6월 30일 시베리아 퉁구스카 사건으로 확인되었으니까. 오직 닥칠 일은 "마지막 아담"의 치세/治世의 시작. 이 주님의 재림 앞서 반드시 이루어질 "살아 남을 사람 숫자가 정금 보석보다 희귀해질 것"(사 13:12)이라 하신 대로의 예고된 하나님 심판의 성취뿐.
이 모든 것 전에 있을 대대적인 말씀 전파를 위한 짧은 유예 기간이 있을 것을,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계 7:3),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말하기릏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14:6 ,7)로 알리셨으니, 오늘 우리가 처한 바로 이 시점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오로지 말씀 전파와 교회 육성(충분하고 간절한 기도가 반드시 동반되는)에만 전념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와 사명 의식을 물타기 작전으로 희석시키려고 사탄은 앞서의 지적과 같은 방해 공작을 일삼는 것이니, 그 간악하게 부추기는 <세상 잠>에 휩쓸려 절대 한 순간이라도 한가히 조는 일이 없이 정신 똑바로 차려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반도 교회가 가장 선봉에 서야 할 것을 아는 악령들의 이같은 훼방에 넘어가지 말아야. 주님의 다시 오심이 바로 눈 앞이든 아니든 복음 전파는 우리의 변함 없는 마땅한 책무이지만, 말씀을 받는 자의 인식 차이(지금의 세상이 끝난다는 것과 그냥 계속된다는 것과의)는 너무나 막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 이 점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 세상 더군다나 기톡교 문화권이라는 구미 제국의 소돔 고모라 난장판(동성 성행위 합법화)이 극에 달해 있어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 앞에 이미 선/線을 넘었습니다. 사태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메시야 우리 주/主(나의 주인, 나를 소유하신 분이시니 고로 나는 주님만을 섬겨 그 뜻만을 따름이 생명이라 이는 주님 친히 나의 소유/所有가 되어 주시어 나를 "섬기시고"-눅 22:27 나만 위하시는 위치에 영원히 계심을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단 번에 증명해 주셨으니까)님의 사랑과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영원한 생명 자체로 역사/役事하시는지라 이 지식만으로도 더 없는 풍성이요 만족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제 곧 지나가니까 환영/幻影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면 깊이 영적 기쁨과 즐거움은 이같이 누려도 육체로는 고난 고통이 여전하니 인간 본연의 "영광의 몸"(빌 3:21 ), "신령한 몸"(고전 15:44)이 아니라 전연 어울리지 않는 동물적 육체의 비정상 상태에 아직도 갇혀 있기 때문인대 이제 그 끝이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알아 온 대로 단순히 동물적 생명을 연이어 가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목적 의식이 투철한 삶의 영위가 영/靈으로서의 이지/理智적 생명인 것. 즉 삶의 낙/樂의 극대화를 꾀함이니 이것은 동물 같은 기계적 존재로서의 자아중심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각자의 일상 자세가 상대방 중심일 때에만 즉 머리는 몸 위하고 몸은 머리 위하는 <한 몸>으로서의 이치로만 작동 가능합니다. 물론 동물의 생태/生態도 육체로는 '머리'와 "몸"의 구조이지만 기계적 작용일 뿐 이성적 판단의 자기 의지/意志는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이성적 판단이라 함은, '상대방의 동시성'인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말합니다. 즉 "나는 너만 위할 터이니 너도 나만 위함으로써 이웃을 위하고 네 자신을 스스로 위하지 말라"는 머리로서의 지시, 명령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이시니까 넉넉히 각자 <개개인만을> 위하심과 동시 <모두를 한 사람 같이> 위하실 수 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당시 화폐 단위)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치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다"(마10:29)고 하심과 같습니다.
이 "언약" 관계는 친히 우리 피조물의 창조주로서 머리 역할을 자임/自任하신 하나님의 계명, 율법(법칙)으로
가동/稼動됨이니, 가장 이상향적인 삶의 유일무이의 방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은 이 "언약/言約"(호 6:7)으로 좌우되어 유지 보전됩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각 지체/肢體, 각 부분에 해당되기에 저마다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은 그를 위하시니까 하나님과 머리 몸 관계를 형성해 "언약(약속)"으로 맺어지면 다른 사람도 동일한 관계로 하나님과 일치하게 맺어져 있는 고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 모든 사람(이와 같은 언약 관계에 들어가 있는)의 위함을 받게 되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하면 단 1이지만 그런 이웃이 1억이면 100,000,000 갑절이나 내가 위해지는 것이므로 1억의 나 자신이 새로 생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언약 관계에 들어감을 뜻함이라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요 "믿음"이요 "구원"이요 "자기 부인"이요 "십자가 지는" 것이요 "모든 것을 버림"(눅 14:33) 곧 자기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 위함, 이웃 위함입니다. 이런 철두철미한 공동체 정신이기 때문에 초대/初代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공용/共用)하고 제 재물(財物)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지금은 그 전통과 본을 말짱 버렸으니 소위 "자유세계"에서는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어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사이비 교회". 그러나 북한을 비롯해 지금도 핍박 받는 지역에서는 "재물"이라 할 것도 없이 모두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로 평준화가 되어 있어 그나마 "교회"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살 만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요 12:25)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생명이라고는 지푸라기 하나도 구경할 것이 없는데도(자연계 동물이 아닌 인간은 영광의 신령한 몸으로서 죽음 없고 고통 고난 없이 영원한 부유와 풍족을 누려야만 "사는 것", "삶"이라 할 수 있어) 이 세상 신/神으로 군림해 있는 원수 악령 사탄(고유명사가 아닌 "적대자/敵對者"란 의미의 별칭)이 아담 범죄 결과인 우리의 현재의 이 동물적 육체를 본연의 인간 모습인 양 속여 아담의 "죽음"을 "영적 죽음"이라는 거짓말로 합리화시킴으로써 거의 2천년간 속여 왔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영적 죽음"이라는 '바벨론 신학'의 용어 자체가 없었습니다. 단지 "이 새상에서의 헛된 삶"이라고만 인식시켜 그 위험성을 경고했던 것인데 지금은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미신에 빠져 자멸/自滅의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오늘날은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시대. 단 천사의 월등한 제압력으로써 이제까지의 악령들로 인한 온갖 거짓을 분쇄해 원래의 순수한 복음이 밝혀졌다는 의미이지, 보다 강력하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그런 뜻은 아니니, 이전과 같이 복음 전파자의 흘리는 피와 땀으로 말씀이 전달됨에는 변함이 없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고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 밝혀졌은즉 이 실상대로 전달해야 하고 여전히 바벨론 신학 그대로의 거짓말을 그냥 덮어두는 경우 그에 따른 엄중한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사사로운 것을 더 사랑헀다는 자아중심이라는 판정을 면할 수 없기에. 자아중심이 모든 죄의 뿌리이니까.
바벨론 신학은 전세계적인 것이므로 눈치 볼 것 전혀 없습니다. 최초로 이를 쳐 깨뜨리고 뚫고 나가는 은혜의 특임/特任이 한국교회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알고 순종해나가면 됩니다. 한반도 교회에 이 은혜를 베푸신 것은 거의 90년간(1935-2024)의 핍박 속에서 연단된 믿음과 기도의 결실입니다.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바벨론 탈출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똥
말씀을 정확히 아는 것이 생명선/生命線입니다. "믿으면 구원"이라 해서 우격다짐으로 특정 사실을 "믿는다"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구원되지 못한다"(마 18:3) 하셨는데 어린 아이는 그 사랑하는 상대(엄마)의 말을 따르고 순종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순진무구하다거나 기타 그 무엇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성경이 단언했으니까. 그리고 동물적 육체는 본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기계적 작용이니까(자동으로 작동하므로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고 이 자아중심은 동물의 종/種 보전의 핵심) 너무나 자연스럽고 순수 그 자체입니다. 자아중심이 죄가 되는 것은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선택의 이지적 피조물에게만 해당되는 것. 고로 동물적 육체는 자연계 동물의 것이지 인간이나 초자연계 동물(2:19) 즉 영물/靈物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아담은 초자연계인 에덴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차이를 알아야 하는데 이런 극히 기본적인 성경의 ABC 즉 에덴, 아담이 초자연계 속성이었다는 것도 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성경 연구라고 "신학/神學, 운운" 하는 것입니까. 부끄럽지도 않나요? 바벨론 신학이 우리 모두를 바보 멍청이 웃음거리로 만든 것인데도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그러나 이 모둔 화근/禍根의 장본이 이 세상 지배자인 사탄이다보니 속절없이 내처 2천년 가까이 내리달아 속아 온 것이 오늘날까지의 너무도 서글픈 현실이 아니던가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우니까 그 나머지는 일사천리 내리닫이로 우스꽝스러운 미신/迷信 일변도의 기독교 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의 독생자(독자, 외아들)를 내어 주셔서 우리 위해 희생 제물로 삼으셨으니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셨다"(요 3:16)는 이 말씀만 믿으면 그래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어린 아이 같이 되면" 넉넉히 구원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입니다.
오직 문제는 여기에다 사탄 악령의 거짓말(바벨론 신학)을 덕지덕지 끼워 넣어 로마서 7장이 "바울 사도 자신의 믿은 후 체험"이라느니, "대신 죽음"이라느니, 아담을 동물적 육체의 죽는 존재로 처음부터 창조하셨다느니, 갖가지 속임수의 '약' 아닌 '독'만 삼킨 꼴입니다. "믿음", "믿음" 하니까 믿음에 무슨 특별한 비책/秘策, 비결이나 있는 줄 아는지, 20세기 대표적 개신교 인물로 추앙 받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같은 경우,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연 모르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자기에게는 미지의 신이라도 그 신이 선한 줄 알고 또 기도를 들을 줄 알고 성심껏 구한다면 그 믿음을 기반으로 응답될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니 비벨론 신학에 물들고 찌든 오늘날의 일반적인(극소수만 제외하고) 이른바 "교회"의 처참한 실태입니다.
출처:
https://x.com/kwontayseek/status/1804355488697717019
https://carm.org/preachers-and-teachers/billy-graham/
2024년 7월 26일 금요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ㅡ다시 정리하면 (7)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 많은 사람이 오해하여 혼동하는 것이 "하나님 은혜" 관련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도맡아 우리 위해 일방적으로 처리해 주시는 것이 은혜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망상, 더 정확히 말해 우리를 적대하는 사탄 악마의 악랄한 공작에 의한 거짓말에 휘둘려 그렇습니다. 에덴 당시처럼 사탄은 언제나 거짓말로 한 몫 보는 자입니다. 그 때의 아담처럼 인간들이 그 황당한 거짓말에 잘도 넘어 가 주니까.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냥 넘어가시고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해 주시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아예 법(칙)은 있으나마나이니까.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셔서 그 응분의 죄과를 지게 하심이니 그 결과가 오늘날의 이 비극적인 동물적 육체의 비참함과 혹독함의 썩음과 죽음인 것.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그와 같은 죄값 즉 형벌을 "한 몸"의 이치(고전 12:26)에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히 할 수 없는 것을 처음부터 하라고 명령하실 리 없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의 상태 즉 "율법 아래 있는" 상태는, 그 명령을 행하라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행할 수 없는' 죽음의 처지임을 깨닫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계명, 명령)은 생명이시므로 죽은 자 상대일 수 없는 것. 사탄(마귀)의 속이는 거짓말로 인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그 진실을 알아 죽은 자임을 자각하도록 만드심인 것입니다. 죽은 줄 알아야 살고자 하여 산 자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바 지시를 따를 수 있기 때문. 고로 이 때 내리시는 지시는 그 특정된 것을 "<몸으로써>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영의 <마음으로써> 그 지시를 전폭 따르겠는지 여부를 결정하라는 것이니 이것이 "회개(뉘우침)"(막 1:15/행 3:19)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언약/言約)이기도 합니다. 기계적(자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자연(물질)계의 동물적 생명이 아니라, 영혼의 자유 의지와 선택으로 작동되는 생명체이기에. 즉 순종과 불순종의 갈림길에서 생명의 마땅한 도리인 머리와 몸의 한 몸되는 이치를 따라 머리되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 복종을 스스로 다짐함입니다. 이는 모든 영적/靈的 피조물 창조에서 한결같이 적용됨이니 아담이 그러했고(호 6:7) 아담 보좌역으로 창조된 허다한 영물/靈物(천사)이 그러했고 오늘날 새 창조의 대상으로서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순종이 곧 "행함"입니다. 하나님 은혜로 "산 자"가 되어 더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므로. 이제는 "몸으로써" 모든 언행심사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과(롬 2:7) 의를(고전 15:34/골 3/25/요일 2:29/3:7,10/계 22:11) 행하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 것 즉 불순종은 "불법을 행하는"(마 7:23) 것이니 아무리 믿음 좋아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 전파의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어도"(마 7:22)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는 사형선고만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도 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이다. 앞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내 힘으로 한 것처럼 착각하나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함께 일하셨기 때문에 한 것이니까. 이 차이를 힝상 인식해야. 그리고 이 경우 결정적인 것이 형제 자매들의 서로간 위하는 기도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여"(롬 15:30).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니"(빌 1:22).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니"(히 13:19).
2024년 7월 21일 일요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ㅡ다시 정리하면 (6)
다시 강조하지만(백 번 강조해도 좋은 것) 동물적 육체는 본시부터 기계적 생명에만 소용되어 이 "본능/本能" 작용은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고 그러나 그 움직임이 정밀성이 요구되는 기계적 작용이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와 같은 욕심(지나침 또는 임의에 의한 궤도 이탈)이 없으니 자연계 동물들의 생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있어 자유 선택이 가능한 인간에게 이 "육의 몸" (고전 15:45)이란 것은 죄/罪의 시한폭탄 그 자체입니다. 가인의 아벨 살인이 그 단적 증거. 그러니 3운법칙과 같은 강제 제약이 없으면 서로 죽이기 바쁘고 죽어 나가기가 바쁘니 이 현실을 오늘날 모든 사람은 뼈저리게 인식해야합니다. 처음부터 이같은 동물적 육체를 아담 즉 인간에게 창조해 주실 리가 만무한 것. 신령한 몸(영생하는)을 입히신 것인데 선악과를 먹어 이 꼴이 된 것입니다. 이런 극도의 험악한 살풍경 속에서 사람 삶을 꿈꾼다는 것은, 3운법칙을 나타내 주신 오늘날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철부지.
그러니 답은 뻔하니, 이같이 "죽을 때"를 정해 주신 것은 그 찰나같은 기간이라도 <살라>고 주신 것일 수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봇물 터지듯 둑이 무너지듯 순간적으로 사태가 벌어지면 순식간에 쓰나미에 휩쓸려 떠내려갈 판이라 그 최종 비극의 최종 물살이 덮쳐 오기 전 피신하는 것 외에 달리 신경 쓸 틈이 없는 이세상의 현실입니다. 그 피신할 시간적 여유가 3운법칙의 의미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 그렇게 피신할 만반 준비를 갖추었으면 나의 이웃 즉 다른 사람도 그 위험을 알고 피신하도록 해 주는 바로 그런 시간적 여유 밖에 없는 것이 3운법칙으로 관장/管掌되는 이 세상의 유일무이의 의미인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다른 의미는 일절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3운법칙을 통해서 알았으니까 이런 말이 얼마든지 통합니다. 이전에는 철저히 눈이 가리워져 있어(이 세상 신/神 악마의 눈가리개로 덮씌어져) 볼 수 없었던 것인데(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이미 오래 전부터 경고를 받아 왔음에도 우리 스스로 교만해져 그 경고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인간에게는 '시한폭탄'과 같은 이 위험천만한 동물적 육체를 떨쳐내는 방법은 너무나 과학적인 것입니다. 만유의 법칙(짝의 법칙) 그대로이기 때문. 즉 "영(성령)으로 난다"(요 3:6)의 "영/靈"은 "육/肉"과 대칭(짝)입니다. 그리고 이 '육(체)'은 썩음(죽음)으로써만 종결되니까 반드시 죽어야 끝나는 것이고 그렇게 끝이 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방법 외에는 일절 해결책이 없는 고로 창조주 하나님 친히 그래서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 주시어 죄인처럼 죽으셔서(내가 죄인이니까)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되게 하심이니 이 얼마나 섬세하심(과학적)이십니까. 이는 짝의 법칙에서 3위1체의 원리대로 하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즉 그렇게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내 안에 내 영혼처럼 오시어 문자 그대로 나와 <둘이 하나됨>을 이루신 것이니까.
메시야 우리 주님의 의/義(순종)가 내게 전가/轉嫁(imputation)되어 내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내것이 되어 내가 주님 안에서 실제 죽었기 때문에 나의 "죄의 몸"(롬 6:6)이 무력화되어 "죄와 사망의 법"이 더 다시는 나를 지배할 수 없는 고로 내가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계명, 율법)(모세의 율법이 아닌)을 능히 지키게 됨으로 인한 의인됨입니다(롬 2:6,13). 물론 그 전에 의인으로서의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 내가 죽음으로써 이미 이루어진 것. 이렇게 의인된(이는 주님의 나 위하신 죽음으로 은혜로 된 것) <바탕> 위에서 순종(선과 의를 행함)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므로 나의 과거 죄가 주님께 전가되는 것 역시 있을 수 없으니 성경에 "전가" 개념이란 너무나 이질적인 것. 엉뚱하게 구약시대 그림자적 의미의 희생 제물의 의미를 그대로 도입하여 만든 바벨론 신학의 멸망의 교리일 뿐. 전가 즉 "대신 죽음"이 아닌 "함께 죽음" 즉 주님과 하나됨으로 인한 우리의 구원임을 알아야. 바벨론 신학의 이 전가 교리로 인해 "사람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부득불 죄짓지 않을 수 없다"는 거짓말에 속아(에덴 당시처럼) 많은 사람이 멸망에 이른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빈 틈 없는 과학성/科學性은 오늘날 짝의 법칙이 알려짐으로써 "3위1체"의 의미가 명백히 드러나면서 만천하에 알려진 것입니다. 겸하여, 짝의 법칙에 의한 <삶과 사랑의 법칙>(가장 이상향적으로 사는 법) 또한 그 모습(정체)이 나타났으니 곧 "상대성의 동시성"입니다. 즉 짝을 이룬 "갑"과 "을" 둘이 하나("병")를 이루는 토대/근거가 밝혀진 것입니다. 다름아닌 '갑' 안의 '을', '을' 안의 '갑'입니다(요 10:38/14:10,11/17:21). 이는 갑은 갑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 상대(짝을 이룬)인 을을 위하고, 을 역시 을 자신을 위하지 않고 갑을 위함입니다.
⁶즉 자아중심이 철저히 배격되고 자기 부인으로 시종일관함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한 몸'이 되는 이치 그대로입니다. 이 영원한 법칙을 어김으로써 범죄함이니 아담이든 악령이든 다 그러하고 따라서 우리도 이 시험의 기간(현재의 세상이 지속되는 동안은ㅡ이제 그 끝이 이르렀지만)에는 이같이 범죄할 때는 가차 없이 그 생명을 "잃거나 빼앗기는"(눅 9:25)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 설명과 같이 성령으로 다시 나 새로 창조되어도 새 창조든 처음 창조든 창조는 똑같은지라 인간만은 차별 대우하실 리 없으니 영원 멸망뿐이라는 결론에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악령 사탄은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로 근 2천년간 그렇게 속여 왔지만. 그러므로 이 자아중심을 이제는 원수시함으로써 회개하여 버리는 결단만이 영으로 다시 나 새로 창조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바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모든 창조는 예외 없이 다 창조자의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시니까!.
2024년 7월 20일 토요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ㅡ다시 정리하면 (5)
그러므로 현재의 "때(시점/時點)"를 정확히 파악하여 이에 따라 행동함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하니 다시 말해 다니엘서 예언의 그 "마지막 때"인 20세기 이후(단 12:4)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그 특징으로서 지적한 바 "하늘의 전쟁"(계 12:7)의 종료 즉 "하늘로서부터의 사탄 패거리의 지상/地上 추방"(:8-12)이, 이미 1908년 6월 말 저 유명한 "시베리아 퉁구스카" 사건(인터넷 검색어 "1908 tunguska explosion", "1908 시베리아 퉁구스")으로 확실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연결: 아래 링크.
고로 현재 이 시점은 세상 종결(6천년의 사탄의 세상 지배 종료) 및 연이은 "마지막 아담"(메시야 구원자님)의 "천년 통치" 시작 외 일절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따라서 "바벨론에서 나오라"(18:4)는 "천사가 가진 복음"(14:6
) 전파(반드시 기도를 힘씀이 수반되는)가 유일의 할 일(과심사)이고 이외 달리 무엇을 염두에 두어 "쟁기를 잡고도 뒤돌아보는"(눅 9:62) 자마다 심판 대상이 될 것이니 전에 없이 엄중한 경고됨을 알아야. 따라서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의 각종 재앙 즉 "천년 통치" 직전의 하나님 심판이 단계적으로 가차 없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니 이를 우리 각자 마음에 아로새겨야 합니다. 이러한 오늘날 모든 인생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회개하라"이십니다(계 2:5,16,21,22/3:3,19/9:20,21/16:9,11).
세상에 처음 사람 나자마자 살인 사건(가인이 아벨을 죽임)부터 생겨나 자아중심의 본능으로 움직이는 동물적 육체로는 인간이 도무지 살 수 없고 인간 멸종은 시간 문제이기에, 3운볍칙(죽을 때가 되어야 죽도록 정하신 하나님의 강제력)이란 것을 새로 정하시어 그 때문에 겨우 "인간 사회"란 것도 생기고 지금껏 6천년이란 인류사도 가까스로 유지되어 온 것이 3운법칙과 짝의 법칙의 상호 검증으로 이미 완벽하게 확인되어 있는데, 또 무슨 미련이 있어 이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단 말인가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산다"는 것이 완연한 허상/虛像임이 철두철미하게 입증되어 있음을 아직도 인식 못하나요? 이 놀랍고도 엄청난 진실이 밝혀지기는 유사이래/有史以來 처음입니다. 따라서 사실상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인류사상 최대의 발견인 것입니다. 인류가 이제껏 속아 왔던 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려 진실 그대로를 간신히 드러내어 모든 거짓을 여지없이 폭로시킨 초유/初有의 사태인 것입니다. 전적으로 무의미한 지금까지의 6천년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오직 유의미한 것은 아담 범죄로 인한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 해방되어 "영(성령)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것", 오로지 이것뿐입니다. 이것만이 화급한 유일의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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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가 심하여 한 달 넘게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이전처럼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우리의 합심 기도로만 이루어집니다. 여러 형제자매의 합심 기도로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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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기도집회 성령 운동(미국 제2차 영적 각성 운동이라 하지만 사실은 "미국 최대의 교회 부흥 운동")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은 말년에 빗나가버려 되려 교회에 큰 해독을(덕보다는) 끼친 인물이었으니 변절자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