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0일 목요일

믿음에 들어올 때의 "회개"가 구원 받았는지 여부를 가름한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세아 6:7).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니"(행 2:38).

회개는 "언약/言約"입니다. 생명은 언약입니다. 사랑은 <약속>입니다. "너만을 사랑할 테니 너도 나만을 사랑하겠지?"입니다. 즉 "우리의 하나됨을 너도 나도 깨뜨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영생도 물론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이 쌍방간의 약속을 가리켜, "계명(명령)" 그리고 "순종"이라 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의 계명"(요 15:10)을 지키심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 하신 것이니 계약 관계이십니다. 홀로 살지 않고 함께 사는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이 모두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니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자기를 다 바치는 사랑인 것입니다. 어버이가 자기 "눈동자처럼 위하는"(시 17:8) 자식이니, 자식이 자기 자신을 위하려고 할 필요가 없고 자식도 그 어버이를 그렇게 위함으로써 순종하면 즉 어버이의 "뜻대로 행하면"(마 7:21ㅡ"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되는 것이라 전연 이상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심이 생명의 영원한 법칙으로 정해진 것이니, 하나님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3위1체"가 만유 존립의 기본 대법칙이 되어 있음과 같습니다. 회개가 약속이 됨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니까 그렇게 회개한 후에는 반드시 그 약속 이행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 받기 전의 회개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세례 받음으로써 죄 용서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무조건 세례만 받으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회개"가 성경대로 진지하게 되어졌느냐로 좌우됩니다. 이 회개가 부실/不實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입으로는 "구원을 확신한다"지만 실제는 헛된 아니, 치명적인 자기기만으로 끝나게 됨이니, <엄중 경고>입니다. "회개"가 최대 관건(열쇠)입니다.

회개가 정상적으로 되지 아니하면 죄 용서도 없고 죄가 용서 안되면 죄 많은 추잡한 곳에 성령 임하심이 이루어질 리 만무합니다. 그러면 평생 구원된 줄로만 착각하다가 그 영혼은 영원히 불 못 밖에 갈 데가 없으니, 크게 각성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라도 이것부터 바로잡는 것이 화급하고 생명이니,
 이 경고에 주목하시기를!

생명의 법칙대로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가책함이 회개이니 즉 자기만을 위했던 언행심사를 뉘우침입니다. 삶의 법칙은 그 누구든 자아중심을 버리고 상대방 중심 즉 하나님만 위하고("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ㅡ마 22:37) 이웃을 위함("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ㅡ22:39)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것입니다(:40).

즉 구원된 다음의 '약속 이행'입니다. 다시는 자아중심이 아니라 이웃을 위함으로서 나타나게 마련이니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나타나지게 마련이므로 이 필연적인 것이 보이지 않음은 오직 하나의 결론, 거짓 없는 진단은, "믿음이 없다"는 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기에, 여고보는 확정적으로 아래와 같이 단언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6). 너무나 옳은 지적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 각 대목은 보는 관점 따라 크게 요동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성령의 계시, 친히 가르쳐 주심>으로 성경을 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21세기는 전무후무의 입증과 확증의 시대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이사야 9:2)ㅡ메시야 송가

https://youtube.com/playlist?list=RD3V_ZZ6ENu-E&playnext=1&si=REM-j1FDmEIqvpQK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소유/所有)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바벨론을 벗어나라" 하심은 <바벨론 교회>의 모든 거짓말을 떨쳐버리고 그 거짓말을 믿음으로써 천연덕스럽게 멸망의 죄를 짓고도 영생 구원이라 믿는 미신(주님 경고하신 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신 대로의 모든 인위적 교리ㅡ마 15:8,9)에서 화급히 탈출해 나오라 하심입니다. 

사탄의 이 세상 통치는, 에덴에서 아담을 죽였던 그 동일한 거짓말을 퍼뜨림을 주무기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온갖 핍박의 환란을 일으킴은 일시적 위협으로 냉탕 온탕울 번갈아 쓰는 악마의 수법입니다. 박해는 외려 견딜만 하다 해도, 거짓말에 걸려 넘어지게 하면 그것은 필살/必殺로 끝나기에 더욱 여기에 마귀 사탄은 집중합니다. 세상 시작되자마자 지금까지 그러했고 특별히 주님 오신 후의 이 2천년 기간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미 누차 설명하여 강조했재만 "믿음"과 "행함"의 주제에서 마귀는 그 맹렬한 독아/毒牙를 번뜩이고 있습니다. "구원 빋았음을 확신한다"는 표방 아래 자행되는 이 사탄의 교리에 극소수의 택하심 받은 자 외에는 거의 전부 휩쓸려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원 운명의 생사/生死가 지금 이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따르느냐 아니면 "넓은 대로와 큰 문"의 사탄의 인기 높은 거짓말을 아담 부부처럼 더 순종해서 끌려가느냐 그 분깃점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행하라 명령하심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행할 수 없음을 스스로 절감하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자들은 일률적으로 일관되게 속여 온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는 대목을 사탄은 악용하는 것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지만 왜 <율법 아래> 있을 때(메시야 주님 오시기 전)와 <은혜의 믿음 아래> 있을 때(주님 오신 후)를 혼동하고 구별을 못하는 것인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지금 이 대목은 후자가 아닌 전자 관련인 것을 왜 모르나요.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믿음으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 받음>은 새 창조를 말함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창조하실 리 없잖아요? 다 의인이고 다 거룩한 자들인 것입니다. 인간이든 영물(천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태로 우리도 복귀하니까 즉 새로 창조하심이기 때문에,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의롭고 거룩한 자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무엇이 요구되겠나요?

당연히 우리로서는 순종이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향후의 삶에서 필수이기에 그렇습니다. 몸이 머리의 지시에 불복하고 제멋대로 놀아나는 꼴을 감히 상상할 수 있나요? 기계적 작용인 동물과 달리 사람이나 천사는 영적 존재이기에 자유의지로 스스로 알아서 그렇게 한다는 그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치하신 양심이나 지성적 판단에 의해 충분히 관련된 선악(좋고 나쁨을 구별해 인식하는)의 지식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지로 생명의 법칙에 불복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며, 반면 동물들은 기계적인지라 불복종하는 일도 없거니와 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담도, 사탄 등 악령들도, 이 자기 판단 따라 스스로 행동하여 죄를 지은 것이며 그 당연한 보응을 받은 실례인 것.

그러므로 인간의 새 창조는, 아담 이후 모든 후대가 다 영생이 불가능한 동물적 육체가 되었은즉, 영생하는 자로 먼저 창조됨이 최우선이고, 그래서 은혜로 그렇게 창조됨을 가리켜 "구원"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구원되었다"고 무조건 영생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창조나 아담 때의 창조나 창조는 같은 것이니까, 검증하는 절차로서의 <시험>이 불가결인 것입니다.

그러면 새 창조로서 영생하는 자로 복귀되었으면 왜 지금 첫사람 아담처럼 신령한 영광의 몸이 아니냐 하겠는데, 아담도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출발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즉 아담도 동물성 육체로서 하나님 형상과 모양으로 처음 창조된후 다음 단계로 영원성의 영혼이 조성된 것이며, 그 결과로 신령한 몸이 될 필요성 내지 필연성에서 에덴에다 아담 위해 한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 아담을 두심으로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모심은, 아담에게 영(혼)이 처음 조성되었음(창 2:7)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 난다" (요 3:3,5,6) 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그 몸으로 이루시고 나와 하나되심을 위하여 예수님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을 가리킵니다. <몸>은 사람이시나 <영>은 하나님이시므로 또 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로 계시는 까닭에 넉넉히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각 사람이 성령으로 나는 것은 아담이 처음 영이 조성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복하는 의미와 같기에 "새 창조"라 하는 것이며(각 사람마다 마치 아담 창조를 되풀이함과 같아), 이제는 육체로 나는 것(이미 첫사람 아담으로 인해 동물적 육체는 받아 있으므로)이 아닌 "성령으로 다시 나는"(3:3,5,6) 것입니다.

이는 맨처음 아담이 동물적 육체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애초 창조되어 있었던 모습 그대로이고, 이후 아담 속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 내쉬심으로 아담에게 영(혼)이 생겨나고 이로써 에덴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순서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같이 성경의 기록 하나하나가 빈 틈 없이 짜여진 진실 그대로임이 입증되고 있음은 놀라운 일입니다.

때문에 주님 부활 후 제자들을 "향하시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20:21) 하셨으니, 이는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 그대로를 재연/再燃해 보이신 것으로서, 부득불 새 창조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하심을 극적으로 증명해 보이심이라, 이 역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니 때때로 음미하여 우리 믿음을 새롭게 활성화할 일입니다.

재삼/再三 강조하지만, 이는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에서 단연 압권입니다. 창세기 아담 창조의 광경에서의 극적인 순간을 창조주 친히 그것도 부활이라는 극적인 순간에 극적으로 친히 묘사해 나타내어 주셨으니까! 그것도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으신 채! 성경이 꾸며낸 것이라면, 천하의 거짓말쟁이 사탄이라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일입니다. 진실이 뚝뚝 묻어나는 성경의 명장면의 이 최고봉을 우리는 수시로 기억하고 수시로 입 밖에 내어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기리고 찬양할 일입니다.

반복하거니와, 아담의 그 영의 조성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의 성령 받아 모심입니다. 또 아담의 육체에 영이라는 새 존재가 들어찼어도 금방 신령한 몸이 되지 않고 별도로 에덴에다 한 동산을 창설하셨던 것과 똑같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 재림 때 우리도 신령한 몸으로 즉각 변형됩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후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일을 온전히 이루신 것처럼, 우리 각자도 새 창조를 받아 구원된 즉시 "보내심을 받은"(20:21) 터이므로, 주님처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4:34)고 말할 수 있는 꼭 그 위치에 지금 있다는 이 엄숙한 사실 앞에 마음을 가다듬읍시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주님을 위하는, 주님의 사랑의 종으로 섬기는 것으로서, 머리되신 주님 친히 머리로서 우리를 위하시고 종으로 선기심과 영원히 맞물리는 생명의 법칙 준수인 것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는 것이다"(눅 22:27).

그러므로 진정한 사람 삶은 머리되시는 우리 주님을 위시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종으로 섬기고 동시에 똑같이 섬김을 받는 가장 이상향적 삶의 향유임을 알았으니, 항상 주님의 평안과 기쁨을 내것으로 삼고 그 생명수가 흘러 넘치는 넘쳐 흐르는 강들("rivers")이 되게 합시다. 그 환희와 희열의 풍성함을 이 지구상의 현재 죽음의 때일망정 만판으로 누리고 주변을 흥건히 적시는 우리 각자의 심령이 되어 있기를!


2025년 10월 28일 화요일

21세기는 전무후무의 입증과 확증의 시대 (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성경에 소개된 대로의 모든 사도 서신들을 통해 당시 샤도들이 말한 일체의 것은 사도들 자신이 말한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성령의 말씀> 곧 하나임의 말씀이심을 우리는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날의 이름 있는 누구누구의 말과는 결코 동격이 아닙니다. 성격이 완연히 다릅니다. 품격이 틀립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우리 주님의 하신 말씀과 똑같은 비중입니다. 똑같이 성령으로 난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령"이시라 함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요 10:30)로 계심을 의미하는 까닭에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심이란 뜻이 됩니다. 사람으로서의 성자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도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서 말씀하심"(요 14:10)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음이다, 아멘"(벧전 4:11). 성자께서는 모든 말씀과 일을 성부께 받아서 하시고 대행/代行하심이니, 성자께서는 성부의 이름으로 하시고 성부께서는 성자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하심입니다.

이것이 "머리"와 "몸"의 "한 몸"됨인 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의 각 지체/肢體 각 부분)은 머리를 위함입니다. 머리가 모든 것을 알고 또 살피고 기획하는 것이지 몸 스스로로는 일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구조/체제로써 만유는 운영되고 있음은 당연합니다.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머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고 그리하여 몸의 이름으호 하는 격이며 몸 또한 그렇게 머리를 위함으로써 머리의 이름으호 하는 것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분이라 "하나"가 됩니다. 이 하나됨을 가리켜 사랑이라 하고 바로 이것이 "생명의 법칙"으로 운용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랑을 강조함이 이 이유에서입니다. 즉 생명의 법칙대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이상향적으로 생을 꾸려 갈 수 있는 유일무이의 방략이기에 그러합니다. <삶>이란 것이 전적으로 이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곧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바로 이 법칙 준수를 말함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닠은 사랑이시라"(요일 4:8) 함은 다름아닌 이 <법칙의 창조주>시라는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음은 이 사랑과는 정반대인 자아중심으로서 사랑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 죄를 "불법"(요 3:4), 범법이라 함이니 이 삶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자께서도 성부께서 낳으신 독생자(독자/외아들)로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실체와 형체로서의 대칭 관계)이시요(골 4:4)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이시니까 엄연히 <머리>와 <몸> 관계입니다. 뚜렷한 인과/因果성입니다. "3위1체"로 설명하면, '머리'는 1위, '몸'은 2위, '한 몸' 즉 "하나"(요 10:30)되심은 3위입니다. 이래서 3위1체 법칙(짝의 법칙)을 만유 생성(창조)과 운행/運行의 <기본 대법칙>이라 함은 마땅합니다.

미시세계에서도 이런 똑같은 법칙의 양상대로 움직임이 가장 확실한 실험 관찰로 확인되었으니, 곧 오늘날 21세기에 불현듯 부상하여 나타난 양자역학입니다. 즉 모든 물질이 입자성과 파동성의 2중 구조임이 판명났고, 입자와 파동 이 둘 중 하나가 1위에 해당하고 그 나머지가 2위로서, 둘 사이는 인과, 주종/主從, 선후/先後, 대소/大小로서의 "하나"로 "얽힘(entanglement" 그리고 "중첩"(superposition)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렇게 하나로 존재함이 <제3위>를 이룸입니다.

따라서 이 또한 만유의 창조자 하나님 실존 증거입니다. 인류사상 최초의 물리학적 증명인 것입니다. 3운법칙을 통해 입증된 3위1체의 법칙이 이 "마지막 때" 21세기에 등장함으로써 이루어진 획기적인 실로 경천동지할 만한 일대 사건입니다. 가히 "21세기 표적과 기사"라 일컬을 만합니다. 하나님께서 3운법칙을 나타내심으로써 이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 3운법칙을 제대로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 친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온 세계인은 이제까지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송두리째 뒤엎어 생의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는 사실, 오직 영원무궁의 참담한 죽음(생명과 대칭)인 고난 고통만을 직면하게 될 것이니 이를 직시해야 합니다. 



2025년 10월 26일 일요일

내 잘못으로 멍에를 메어도 하나님께 맡기면 그 인자하심이 그것을 친히 메워 주심이 된다



내 잘못으로 멍에를 메었어도, 하나님께 맡기면, 그 인자하심이 그것을 친히 메워 주심이 된다ㅡ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유익되게 하신다)"...롬 8:28.

바벨론 신학의 "휴거"는 미신

"너희는 애곡하라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다...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시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할 것이니...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할 것이다"(이사야 13:6-12).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가 영원히 끝도 없이 펼쳐지게 되는 순간의 마지막 심판의 때를 말씀하심이 아니다. 인간이 "희소, 희귀케" 하심이라 이는 다름아닌 "마지막 아담"의 천년 통치 전의 사탄으로 지배되어 오는 이 세상의 멸망과 심판인 것이다. 금세기 세계 인구 절반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네피림의 정리가 주내용일 수 있기에 그러한 것이다.

이 네피림(엘로힘 즉 "신/神<들>과 같은 복수의 의미)은 사탄이 이 세상 통치권(아담 범죄로 "넘겨진"ㅡ눅 4:6) 행사 차원에서 저지른 불법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불법이지만(이 짓거리를 한 악령들은 무저갱에 유폐ㅡ유다서 1:6. 단 사탄은 세상 통치와 직결돼 그 씨가 아비 대신 무저갱에 들어가 있다가 적그리스도로 나오는 바 그래서 "짐승"이라 하는 것) 묵인하시듯 되어버린 것.

이 때 구원 받은 자 즉 성령을 모신 이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공중으로 들려지는데(살전 4:17) 이것이 소위 말하는 "휴거"이다. 고로 이 "끌어올려짐"은 주님 재림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요, 적그리스도로 인한 환란 때를 피해 가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니 속지 말 것이다. 이미 그 이전에 구원된 많은 사람들이 짐승에 대한 경배를 거부함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으니까. 살아남은 자는 극소수이고 이들이 휴거되는 것.

그리고 그런 휴거 대상자가 아니더라도 주님 재림 직전에는 이미 지구상의 인류 그절대 다수가 진노하심에 소멸되어 앞에서 지적한 대로 "희소, 희귀"에 속할 것인즉 실로 처참을 극하는 끔찍스러움뿐이라 지구는 그야말로 만신창이일 것. 그러니 이 21세기 "마지막 때"는 유일의 관심사가 첫째도 구원 받음이요, 둘째도 구원 받음, 셋째도 구원 받음임을 명심해야. 그리고 나 먼저 구원되었으면 유일의 과심사가 내 이웃 영혼 구원임을 부디 마음에 아로새겨야 하는 것이다. 


"세미한 소리"ㅡ"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13)

 



신인학(fashomology)








 



2025년 10월 23일 목요일

주님 오시기 전 나타날 엘리야는 우리 모두의 각자를 가리켜

주님 초림 때 엘리야의 능력으로 임했던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능력을 나타내기커녕 오히려 죄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주님 재림 때도 마찬가지. 21세기 능력의 엘리야는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신 우리 모두 각자이니 우리 각 사람을 통해 주님 <친히 역사하심>이다.





21세기는 "절대적 진리" 활성화의 초입 단계

 


모든 인간이 만유의 기본 대원리로서의 3위1체의 법칙(짝의 법칙)을 기반으로 작동되는 3운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음이 21세기 오늘날 확증되었으니, 이 거창한 검증 작업은 셈(산술)을 할 줄 아는 초등생 정도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유사 이래 초유의 대충격, 대사건에 오늘날 21세기인 모두가 직면해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지금까지의 "과학적 주장"을 뒤집어 엎고 진리의 "절대성"을 부여하고 보증한다는 폭탄 선언이 이 "마지막 때에 
"탄생한 것이다. 인간 생애를 낱낱이 해부하는 연구이니까 "인간학" 또는 "인류학"이면 충분할 것을 왜 굳이 "신/神인학"이라 하느냐 한다면,  성경과 깊은 관련이 있어 그 존재 가치가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3운법칙의 절대적 필요성과 그 정해진 시점(때)을 확정해 놓고 있어 이 사실을 무시하고는 3운법칙 자체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둘(성경과 3운법칙)은 불가분이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종전의 "신학"이라는 개념을 이 "신인학"에 종속 병합시켜 학문다운 학문으로서 새 출발할 것을 감히 권면하는 바이다. "신학"이란 것은 처음부터 어폐가 있으니 성경 이해는 창조주 하나님의 직접 "계시"(마 11:27)에 의함이지 인간의 학문적 분야가 아예 될 수 없다는 그 특성 때문이다. 따라서 신인학은 신론에서 종전의 "신학"을 논하고 그리고 3위1체의 법칙을 양자역학의 연구 결과와 병행하여 심도 있게 다루고, 인간론에서 3운법칙의 다양한 인간 생활 지배 양상을 다각도로 연구 주제로 삼아 통째로 묶어 진행될 것이므로 자못 흥미진진한, 신선한 측면을 촉발시키게 될 것임을 장담하는 바이다. 


3운법칙 연구가 그 주류가 되는 신인학은 그 시초부터가 "계시"였음을 밝혀 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3운법 칙의 도식/圖式을 형성하는 3운법칙의 구조도/構造圖가 성경  중 21세기 "마지막 때"를 지목하는 부분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라는 특이한 문구의 예언으로 이미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이나 이 21세기 "마지막 때"를 겨냥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아래는 AI가 정리한 것



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12ㅡ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그 분 안에서 약하나...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우리가 <은혜>로 <값 없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 죽어 있던 내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이니 창조는 하나님 홀로 하시는 작업이지 피조물과는 전연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죽었던 자가 산 자로 생겨났다는(1) 단순히 그것만으로 전부가 아닌 것이다. 생명의 법칙을 따라 산 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2) 되는 그 첫 걸음을 내어딛는 출발점이라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

즉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일절 위하지 않고 나의 상대(하나님과 및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내 이웃" 즉 믿음의 형제자매)를 오로지 위함이다. 이런 짝(대칭)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한 몸을 구성함이고 "명령(계명)"과 "순종"으로서의 상부상조/相扶相助인 것이다. 일방적인 것은 처음부터 숫제 존재하지를 않는다.

지금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은 (1)만 취하고 (2)는 버리는 아무 쓸모 없는 빈 껍데기였던 것으로 모든 사람을 속임이었다.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된"(마 18:3) 이들만 제외하고는. 이 생명의 법칙은 사람 삶의 상식선에 머무는 것이지 무슨 심오하고 고매한 것도 아니다. 상호간의 약속이 중요하고 한 번 약속은 변함 없이 충실히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생명이다.

지금도 이러한 이상향적 삶은 상호간 사회 계약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소위 "공산주의" 이념이란 것이 이래서 생겨난 것이나 본질은 무시한 채 형식으로만 급조된 탓에 <모래 성/>의 시행착오만 되풀이하고 독재자들의 노리개감으로만 전락한 것이다. 여기서 본질이란, 생명의 법칙에서 그 핵을 이루는 "자기 부인" 즉 자기를 위하지 않는 철저한 이타주의의 상호 협약이다. 이것은 자진자발적인 사랑에 기초하는 것이지 강제와 억압으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애초 하나님 창조에서의 생명(영생)도 이러한 "언약"(호세아 6:7)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인생을 죽음의 파경으로 몰아넣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불순종)도 이 "언약의 어김"(:7)이다. 주님께서는 이 언약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도 하셨으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처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셨고,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다"(10:18) 하심과 같다.

창조 때부터의 원리원칙은 그러하나 아담 범죄로 인해 생명의 신령한 육체가 망가져 현재는 "죄의 몸"(롬 6:6)으로 전락한 죽음의 육체라 새로 창조됨의 "성령으로 다시 남"(요 3:3,5,6,8)이 없이는 전적인 무의미로 그칠 따름이기에,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롬 3:20)이라 한 것이다. "죄의 몸"(롬 6:6)이 시퍼렇게 남아 그 "죄와 사망의 법"(8:2)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기에 이와 같이 자아중심인 이상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일체의 복종, 선행 등이 일절 무의미한 것이다.

영생에 대한 욕심뿐인 자아중심 일색이라 아무리 선행을 하여도 복종을 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의인이 아닌 것이다. 성경대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롬 2:13)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실"(:7,10) 그런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저주스러운 "죄의 몸"이 박살나버려 무덤에 장사지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

주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하는 "하나"(요 10:30)로서의 "한 영"(고전 6:17)됨이 없고는, 다시 말해 내 이름으로 나 위해 죽으셨다가 나 위해 다시 살아나신 주님 친히,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 영 즉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시는 원래 모습의 성령으로 내 안에 친히 임하시어 영원히 내 영혼처럼 계시고 내 영혼과 하나되심이 없으면, 나의 "죄의 몸"은 "멸/지지"(롬 6:6) 않고 나는 죽지 않은 것이다.

내가 죽어 무덤에 장사지내지는 역사적 사건이 내 안에 구현됨이,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하나"로서 영원히 존재하시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므로 바로 이로써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3:16)가 제대로 적응되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율법의 행위"는 예수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은혜가 깡그리 무시되고 자아중심이 여전하게 살아 있는 채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자 함"인 것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그리고 그 편지글(성경에 수록된 대로의 모든 사도 서신)에서 지적하는 바 "행위 구원"론은, 예수 우리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모세의 율법에 속하는 "할례" 등을 주장하는 교회내에 침투해 온 유대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질타였던 것.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죄 용서하심 받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원도 한도 없이 훌륭히 다 마무리된 것이지 또 무슨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모세 시대의 법을 다시 지키려 함은 예수님 믿음을 무용지물로 돌리려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바울 사도 당시에 그랬다는 것이고 지금은 거의 무의미한 내용인 것이니 지금이야 어느 누가 모세 율법, "할레" 등 관련해 입이라도 뻥끗하는가.

바울 서신은 말 그대로 2천년 전의 바울의 편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시 교회 상황 따라 그려진 일종의 삽화/插畫(우리에겐 거의 무의미한) 정도라고 해 둘. 진리만은 영원불변이기에 성경으로는 전혀 손색이 없으나 지금 지적한 부분만큼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 복음의 내용이란 처음부터 간명한 것이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님이다. 성경은 버리고 사람의 말과 생각을 더 따른 결말의 혼동, 혼돈일 뿐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 가르치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 모두 부디 명심할 일이다. 로마서라 해서 특별히 난해한 것도 아니다. 오직 모든 허물은 우리가 <성경에 유념하지 않았다>는 여기에만 귀착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되면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농간이 발 붙일 틈이 없게 된다.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교회 혼란도 없었을 것이다.

2025년 10월 21일 화요일

주기도문 명상 (11)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할 것이다"(야고보서 4:7).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이다"(골 2:15).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악/(evil)에서 건져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주님 가르치신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이고 또 인간 아래 격이 낮은 동물들뿐이라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영장/靈長이요 인간 이상 가는 것이 없는 세상으로 보이나 슬프다, 눈은 떴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가 무진장으로 깔려 있고 널려 있는 이 세상인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원수들(창 3:15), 적대자들이다.

눈에 보인다고 득될 것도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없다보니 아무 일도 없는 양 천하태평으로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것이 더 끔찍스러운 것이다. 코 앞에 온갖 비극적 위험과 위협을 앞두고도 허허허 웃고 지내는 인생들. 처연/凄然하기보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미친 마음"(전도서 9:3)들이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또 있을까. 이 무슨 변괴/變怪인고!

이런 실상을 제대로 아시는 예수 우리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에서,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고 했다.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 성으로 가까이 오시자 성을 보시고는 <우시며>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눅 19:41) 하셨다.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으셨다"(히 5:7).

이 세상은 비애와 고통, 그리고 눈물이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 20:18-21).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26-35).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으니..."(고전 2:4).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 3:18).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시 6:6).

창조주로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사람으로서 우리의 최고 완벽한 본(보기)이 되시고 가장 기본 모습이 되신 주님께서 눈물을 보이셨으니 눈물 없는 이들마다 "우리가 얼마나 정상에서 벗어나 정서상 메말라 있는 비정상인가" 자탄/自嘆해 마지않아야 할 일이다. 우리 믿음의 사표가 되는 바울 사도 역시 그 <눈물>의 목회/牧會적 삶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에 마땅히 유의해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포효하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음이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다"(벧전 5:8,9). 그러한 사탄을 직접 보는 것과 그래서 노상 직접 대하는 것과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런 줄로 인식하는 것과는, 불행히도 현재의 동물적 육체에 처한 우리로서는 하늘과 땅 차이임을 느낀다.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직접 대하면서 대비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격차를 가볍게 여길 때 화가 있다.

우리 앞의 적대자는 365일 24시간 우리를 노리는 자이다. 이 세상이 그의 영역인 것이다. 인간의 세상이 아니다. 사탄의 왕국이다. 그 권세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모든 영광이 그의 것이기에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습니다" 하고 기도하라 하셨으니 마땅히 마음에 둘 일이다. 이는 "세상에게 한 순간도 굴복하지 않도록 해 주십사"의 간구요 그 모든 시험에서부터 지켜 주시기를 갈구함이다.

이와 같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방금 지적한 <눈으로 직접 확인함>과 같은 <대비> 태세를 취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기본 자세가 되므로 우리의 모든 기도 전이나 후에 주기도문을 곁들임이 좋은 것이다. 입에 너무 익숙하므로 그냥 건성으로 외듯 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며 우리 자신을 긍정적 의미로 세뇌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를 쟁취하신 주님과 하나된 우리 각자는 마귀와 당당히 맞서 대적하면 원수는 물러서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함이 병행되어야 함이니, 이는 이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제 성취하심>일지라도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주시기를 구하는"(에스겔서 36:36,37)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으로써만 완전하게 결실하는 이치와 같은 맥락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생명의 법칙에서의 '상대성의 동시성'으로 맞아 떨어져야 모든 것이 비로소 통하는 하나님 법질서의 엄숙, 엄정함인 것이다. 우리가 처한 이 자연계에서 자연법칙이 철두철미 빈 틈 없이 운영됨을 보아서도 우리는 충분히 이를 음미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어야"(빌 2:12) 하는 이유다.

우리가 현재 천하무적 막강하신 "마지막 아담"의 나래 아래 위치하여 원수에게 명령할 수 있고 제압할 수 있지만(야고보서 4:7), 그러나 이로써 사탄을 완전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무력화는 그의 멸망을 말함인데 그 종말은 "마지막 심판" 때에야 이루어진다. 주님의 재림 때에도 일시 유폐되어(무저갱에) 활동을 못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 유폐 기간이 끝나면 일시 방면되어(계 20:7) 움직이나 끝내 패망하여 마지막 심판 후 불 못에 던져진다.

그렇다고 사탄이 무의미한 로봇처럼 되어 활동한다는 뜻은 아니다. 딴에는 잘만 하면 국면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터이다. 이는 사탄이 일개 피조물로서 또는 능력의 한계가 있어 판단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실제 하나님께서 공평공정하게 언제나 만사를 처리하심이다.

사탄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므로 최선을 다하면 돌파구를 열 수 있다고 자신함이다. 실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사탄 자신이 잘 아는 터이다. 마지막 순간 그 직전까지도 그러한 확신 속에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피조물이라고 강압적으로 찍어 누르시는 일을 아니하신다. 자유 의지 아래 충분히 제 역량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 주심이다. 원리원칙에 어긋나니 책망하시고 징벌하시며 멸망에 이르게 하심일 뿐이다.

뱀을 "지혜롭다"(마 10:16)고 창조주이신 주님 친히 말씀하셨으니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지상의 뱀과 에덴의 용은 대칭이다. 자연계 물질의 속성 그대로 초자연계 영적인 것과 짝을 이룬다. 자연계 동물과 짝을 이룬 것이 에덴에서 창조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창 2:19)인 것이다.

이미 각종 동물은 제4, 제5일째 되는 때 창조를 마치신(창 1:20,24,25) 연후다. 고로 에덴에서 또 똑같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2:19)를 만드실 리 만무다. 이전 것과는 별개의 생물이니 곧 영물/靈物임을 뜻한다. 에덴이 영계라는 것이 이로써도 입증된다. 성경을 읽어도 성령께서만이 친히 가르치심인 줄 의식하는 것이 필수다.

영계로서 초자연계 속성인 에덴에 자연계의 동물들이 그 짝(대칭)으로 용/등 영물/靈物을 갖춤과는 별개로, 인간은 그 대칭성적 존재인 영혼을 자기 몸 안에 갖추게 된다. 즉 우리의 영(혼)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자연계 동물(짐승)과 같은 모양새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뱀을 지혜로운 습성으로 만드신 그대로 그 짝인 에덴의 용/도 창조하신 것인데 이 영특함(지혜스러움)이 도리어 교만으로 작용하게 되어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인 아담을 시기하기에 이른다. 하극상으로 시해/弑害하기까지 하는 망동을 부린 것이니, 즉 거짓말로 여자를 꾀어 선악과를 먹도록 부추긴 것이다. 여자와 뱀 다시 말해 교회와 사탄 간의 "원수"(3:15)됨이 이로써 발단된 것.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신령한 몸을 잃고 동물성 육체가 되기가 무섭게 신령한 광채는 사라지고 벌거숭이가 됨으로써 옷(의복)의 유래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고귀한 신분의 아담인데,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도록"(눅 12:27) 창조하실 리는 만무하다. 이로써도 아담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음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

그럼에도 인간이 처음부터 이런 동물적인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놀아남으로써 전도의 문이 크게 막혔던 것이니, 이런 비정상적인 육체로 인한 인간고/人間苦가 엄청난 것이라, "이런 고통을 인간에게 끼친 하나님"읊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주를 마음 깊이 신뢰할 수 있느냐"는 회의론에 빠지게 마련이니까. 그러므로 21세기 오늘날 "마지막 때" 모든 전도자는 모름지기 성경대로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띄고 있다.

우리가 "마지막 아담"과 하나를 이룬 교회로서 아담 고유의 절대적 권한과 권위로 사탄 일당을 제압하지만, 아담 범죄 전과는 달라 사탄의 세상 통치권(첫사람 아담에게서 넘겨 받은ㅡ눅 4:6)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각종 핍박과 시험의 대상이 됨은 필연이요 불변이니 이에 유의해야. 그런즉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로 승리"(골 2:15)하셨은즉 주님을 머리로 모시어 그 몸된 교회로서의 우리 역시 동일한 행보로 초지일관해야.

즉 <주님과 같이> 십자가 고난, 죽음의 고통으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고난 고통과 직결되니까. 그리고 성경은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골로새 3:3,4)이라 했으니까.

때문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하였다. 즉 "우리의 돌아보는 것(관심사)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고후 4:18)이다. 세상사, 세상 사랑은 가시적인 것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이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다. 물질로서 썩는 것이요 시한부다. 신령하여 영원무궁한 몸으로 애초 창조되었었던 우리 인간의 속성이 아닌 것이다.

자기 속성도 아닌 짐승의 속성인 한낱 썩는 물질에 불과한 그런 구차한 목숨에 연연하고 관심을 두는 것은 처음부터 영광의 몸으로 우리를 창조해 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엄청난 불경스러움이 됨을 왜 눈치채지 못하나! 애초 이렇게 구차하게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다면 탓할 것이 없으려니와 처음부터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다른 사고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가증스럽게 보시는 범죄의 결과>로 이런 꼴이 되었는데도 이걸 두고 세상사, 세상 사랑으로 세상에서 희희낙락, 시시덕거리다니! 이는 하나님의 맹렬하신 "분노"(시 7:11)의 불길에 기름 붓기인 줄 알아야. 내가 하나님 위치에 있다고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뻔하지 않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히 12:29/신명기 4:24), 이 둘은 "하나"이다. 물질의 파동성과 입자성 2중 구조에서와 똑같이 그 원리대로, "사랑"이 나타나면 "소멸하는 불"이 나타나지 않고 후자가 나타나면 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둘이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쪽이든 마치 그 전체가 그것뿐으로만 인식된다는 뜻이다. 소멸하는 불로 드러나시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무자비한 폭군처럼 시종일관하시어, 자비와 인애는 그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의미로 정착됨을 의미하는데, 이를 깊이 마음에 담아 두어야! 

2025년 10월 20일 월요일

주기도문 명상 (1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것으로 종결된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상대성'의 '동시성'이다. 사랑에서는, 상대를 이룬 쌍방이 동시에 움직인다.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만 강조하여 왕창 속인 것이다.


사랑은 짝을 이룬 둘의 "하나"(요 10:30)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 하나됨의 의미를 성경은 "한 몸"(창 2:24/고전 6:16)의 하나됨으로써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즉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主掌(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니"(고전 7:4) 이를 어기면 붋의, 불법이 되어 간음자가 되고 멸망에 이르는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죄 곧 <하나님 창조와 그 창조물 운영의 법질서에 어긋남>에서는 경중의 차별이 없고 지극히 작은 일 하나도 지극히 큰 범죄 행위와 똑같은 결말로 이어지는 것이다. 똑같은 자아중심이 그 본질이기 때문이다. "한 몸"의 "하나"됨과 대칭되는 것이 "한 영"(6:17)됨인 바, 여기서 적응되는 법질서를 가리켜 <생명(삶)의 법칙>이라 한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은 갑의 소유가 되어 피차간 똑같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짝을 이룬 자기 상대를 위한다. 머리와 몸은 짝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짝이다. 파생/派生한 자와 파생된 자로서의 대칭. 이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이 물질 세계에서 상보성 원리로 표현되는 바 "상반/相反은 상보/輔"(CONTRARIA SUNT COMPLEMENTA)인 것이다.

이와 같이 짝의 법칙이 만유의 기본 대법칙이 되는 이유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獨生子를 낳으심으로써 창조를 시작하심에 있으니 '실체'와 '형체'를 형성하심이다. 형체(형상)는 여럿이 필요하지 않고 하나만으로 충분한 것. 그래서 파생자와 피파생자. 몸과 머리. 고로 성자 하나님께서 만유를 창조하셨고(요 1:3,10),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로 말미암아 창조하셨다>(히 1:2)라고 말하게 되는 것.

자연/물질계가 있으니 초자연계 즉 영/靈계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또 영물이 생존하는 바, 후자는 불변이요 영존하는 불가시/不可視성이나, 전자는 가시적이며 파괴되기도 하고 다시 조성되기도 함이니 "6일" 창조는 전자에 속한다. 반면 에덴은
후자 속성으로서 스랍(seraphim)과 그룹(cheruphim)은 "6일" 창조 전 피조물로, 당시 창조되었던 '영계'가 "6일" 창조까지 존속됨을 말하고 바로 그 세계를 가리킴이다(에스겔 28:13-18).

"6일" 창조 전에 이미 "땅"과 "물"(창 1:2)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그 증거다. 하나님 창조의 "천지"(:1) 곧 하늘과 땅은, 1:8의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다" 할 때의 그 "하늘", 1:10에서 "뭍을 땅이라 칭하시다"의 그 "땅"을 가리킴이다. 성경이 애매모호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읽는 탓이다. 선입 관념에 사로잡혀 <우리 식>으로 읽으려고 덤비는 데에 명백한 허물이 있다.

"물"과 "땅"이 "6일" 창조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 즉 그 이전에 창조되었다는 것은 만유의 기본 원리 다시 말해 짝(대칭)의 법칙에서 확인된다. 망하는 세계와 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세계와의 대칭이다. 망하는 세상은 물로 망하는 세상과 불로 망하는 세상과의 대칭이다. 영원불변의 세계는 그 자체가 영원하므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불로 망하는 세상에 속한다.

이는 베드로가 잘 설명하고 있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창 1:9,10)...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벧후 3:5-7). 베드로가 여기 지적한 "물의 넘침"은 노아 홍수를 말함이 아니다. "스랍"과 "그룹" 즉 "계명성(새벽별)"들의 세상을 말함이다. 그 때 그룹 중의 하나가 하나님께 반역하여(겔 28:13-18). 바로 이 그룹으로 인한 파멸이 "물의 넘침"인 것이다.

이제 곧 닥칠 "불사름"은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 및 악인(죄인)들의 난동을 인함이니, "마지막 심판"으로 막을 내린다. 사탄 등 악령들은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과 속성이 똑같은 영물로서 단지 죄를 지어 악을 행했기 때문에 "악령"이라 하는 것분이다. 인생들 중에 악인이 있고 의인이 있듯이.

"아담 영상/影像(ADAM pix)"이 그 증거. 거룩한 천사들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므로 필자의 스맡폰에 찍힌 것은 반드시 한 악령의 육체의 일부이나 "천사와 악령의 실질적 현현/顯現(Angel and Devil Actual Manifestations)이라 이름 붙인 이유다. 천사도 그 신령한 몸의 육질/肉質은 똑같기 때문이다.

만유가 짝으로 되어 있음은 미시세계 실험(양자역학)에서 모든 물질이 파동성과 입자성의 2중으로 구성되었다는 널라운 사실이 오늘날 전자의 2중슬릿 실험으로 밝혀짐으로써 확증되었으니, 그 '상반'성은 '상보'성임이 즉 짝에서의 "하나"임이 제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구현되지 않고 반드시 둘 중 어느 하나만 나타나기 때문인ㄷ데 이것이 그 확고한 증거다. 이것은 3위1체로서 "하나"이지 않고는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마지막 때" 거의 2천년 해묵은 사탄의 바벨론 신학 그 사악한 거짓을 드러내시고 처음부터 말씀하신 복음의 진리 그 확고부동의 기반을 밝혀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덴이 자연게 한낱 동산이 아니고 영계를 말함이며 그 가운데 한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서 "신령한 몸"(고전 15:44)으로 영원히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영생을 빼앗겨 잃게 된 그 직접 원인인 불순종 척결에 오로지 집중함이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우리 모습이었던 "영광의 몸"(빌 3:21)으로 회복하자는 일념뿐이니 나 먼저 그 복귀의 첫 걸음을 시작했으면 나머지 다른 모든 사람도 그렇게 되도록 그 목적으로 "보내심"(요 20:21)을 받음인고로 이것이 아직도 이 어색한 구차한 몸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다. 이런 실상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나 이 죽음의 세상 살겠다고 난리고 아우성이지 이제 하나님의 막중하신 은혜로 모든 진실에 눈 뜬 우리 중에 누가 이 죽음의 세상살이에 감히 연연하겠는가.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專念하기 위해 우리 각자는 이 세상 일정 기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이 세상에 남아 있으려면 "영광의 몸", "신령한 몸"으로는 불가능하다. 생명의 몸으로는 이 죽음의 세상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득불 죽음의 몸으로 죽음과 어울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골 3:3)이라 한 것이다. 예수 우리 주님께서 애초 그러하셨듯이.

그 분과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고전 12:26ㅡ"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스러워지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니")을 이룬 우리이니만큼 당연히 그러하다. 이 육신 및 이 세상과 관련되어 부유하다는 "부자/字"를 입에 올리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그 뜻을 행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영적 부유함이야 말해 무엇하리요마는 비록 새상에서 3환/環법칙(3자간경제순환/三者經濟循環 법칙)을 따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눅 6:38) 하신 대로 "죄인의 재물이 의인을 위하여 쌓이는"(잠언 13:22) 일이 있어도, 여기서 "의인"의 정의/定義는, "없는 자에게 베풂으로써 자기는 없는 자가 되는 것"에 있으니 혼돈스러워하지 말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생활이 "평균"(고후 8:13 14)하게 하심에 있다. 삶의 평준화이므로, 초대교회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유/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행 4:32). 크고 작음(으뜸과 버금)의 차이는 있어도, 누가 보다 많은 사람을 보듬고 섬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다(막 10:44).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구하라" 하신 그 "시험"에 이 세상 사랑이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사탄은 "내게 절하라(눅 4:5-7), 그래서 자아중심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쉬지 않고 유혹하는 것이다. 

2025년 10월 15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마 6:13).

 
오늘날 인간 세상의 모든 부조리, 불합리, 일체의 악과 죄가 아담 범죄 오직 그 <하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아담만 범죄하지 않았다면 즉 불순종에 빠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하여 유의하고 사랑했다면, 오늘날 죽음과 같은 비극은 절대로 생기지 않았음을 강조하여 깨우쳐 주지 않는 한,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함이 없이는 절대로 "영생, 구원, 운운" 하지 말아야. 전도도 그런 내용이어야.

반드시 "(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2)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의 순서를 따라서만 복음을 제대로 전달해야. 이 말은, 예수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마다 향후로는 일절 아담처럼 죄 짓지 않아야 하고, 불순종하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일구월심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

왜냐 하면 그렇지 않고는 "회개"의 의미가 없으니까. 회개가 없이는 "믿음" 자체가 무의미하고 가장 무서운 <자기 기만>으로만 그칠 것이니까. 오늘날까지 바벨론 신학에서 마귀는 교회를 속여 "구원"을 주먹구구식으로 즉 아무 논리도 없는 사탄의 말장난으로만 두루뭉술 뭉쳐 주입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경고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말씀을 받은 이들만은 그 멸망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왜냐면 나를 죽도록까지 사랑하셨으면 나도 그 분을 죽도록 사랑하여 그 모든 뜻과 말씀에 순종함이 마땅하다는 본성적 양심의 소리는 비록 아이라도 다 들을 수 있기 때문.

그렇지를 않고 단지 '그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서의 영생 구원'이라는 대목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 성향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외 없이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멸의 길에 빠져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설명하듯이 모든 인간이 아담 범죄로 비록 "죄의 몸"이 되어 있기는 하나 "양심"(롬 2:15/요 8:9)이라는 하나님이 설치하신 기계 장치만은 불변으로 작동하기 때문(가룟 유다의 자살ㅡ마 27:45).

고로 현재의 우리 육체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의 몸>도 아니고, <원래의 모습대로 나타나 있을 인간 세상>도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구원 받는 일에서 맨 첫 걸음임을 알아야. 아담의 불순종 즉 범죄로 인하여 애초의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을 빼앗겨 잃어버린 결과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즉 들의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다"(6:28,29) 하신 것.

아담 범죄로 땅까지 저주 받아 오늘낧에는 동식물의 많은 종류가 지상에서 사라져버렸고 그 아름다움의 빛이 바래진 것이야 사실이지만 인간보담은 정상인 것이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라고 찬송을 부르지만 실상인즉 저주 받아 퇴색된 삼라만상이다. 비정상인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 그리고 세상이다.

워낙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창조 솜씨이시기에 이 정도나마 아직도 그 미려/화려한 자태의 흔적을 갖추고는 있는 만물이다. 자연계보다 더욱 상위급에 속하는 에덴의 신령한 초자연계 속성을 가리켜,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하는 문장 표현으로 정평이 나 있는 성경마저,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창 2:9)라 했으니까!

하나님의 애당초 영광의 잔재/殘滓에 불과한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롬 3:23) 상태의 살풍경(아무 볼품 없이 삭막하고 쓸쓸한)에 찌든 이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 구원의 지식에 접하기 시작하는 최초의 일보인 것이다. 그 처참한 피폐상은 현재까지의 인간고/人間苦가 충분히 대변해 준다고 할 것이다.

죽음과 썩음의 자연계 물질의 육성/性으로 인한 인간고의 화신/化身인데다, "죄의 몸"(롬 6:6)으로서의 죄성/性까지 겹쳐 영적 정신적 아수라장의 비극에다가, 또한 악령들의 횡포와 철권 통치에 꼼짝없이 놀아나는 판의 현실이니, 이성 없는 금수/獸의 신세가 외려 부러울 지경이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심으로, 창세 전부터 정하시고 만유의 영원불변 철칙으로 운영하고 계시는 생명의 법칙(창조주 하나님은 그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위함으로 자기 자신을 결코 위함이 없는) 따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친히 사람되어 오셨고, 그 몸 바쳐 자신을 내어 주시고 나 위해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이 벌레 같은 나를 살리셨다. 이 망극하신 은혜로 사랑의 어버이 하나님 품속을 알게 해 주셨으니 영원한 감사 찬송을 영원토록 영원토록 올리옵니다.



(아래 <링크>를 충분히 누르면 "열기"가 나옴)


주기도문 송...바리톤 김주택
https://youtu.be/XVtZmktjhjs?si=1ovDmbPpNKSPGcCU

주기도문 송...Andrea Bocelli
https://youtu.be/Tf1wtzOoXDA?si=TiXmjypyhDpB4JXm

주기도문 송...Jackie Evancho
(당시 11세 미국 소녀)
https://youtu.be/Vg2AsS4CErM?si=fwimvoXKt1w8oap9


2025년 10월 14일 화요일

주기도문 명상 (8)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으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自取하게 될 것이다.


"관리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그러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명령이나 부탁을 이행하는 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다.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怒(공분/公憤; 공적인 일에서의 분노)를 인하여만 아니라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公稅(국가/지방 공공단체가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기 위해 국민/주민으로부터 강제 징수하는 국세/지방세 등)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다. 저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는 것이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 받을 자에게 공세를,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1-7).

예를 들어, 도둑을 붙들었으면 이 사람을 무조건 용서해 줌으로 방면해야 하느냐 아니면 국가가 처리하도록 조처해야 하느냐 등의 양자택일이디. 사회 공동체 <법정의/正義 및 공공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내게 잘못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상충/相衝할 필요는 없다.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로 작정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8:28) 인도하실 터이므로 이에 순종하면 헷갈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나름대로 명분을 내다걸어 교회를 탄압하고 이를 위해 법을 정해 이를 무자비하게 시행할 때는, 그 선악이 분명히 가려졌으므로 그런 악법을 따를 의무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함과 같다. 국법을 준수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그 이름을 앞세워 따르는 것이므로. 때문에 "내가 첫째로 권하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1-4) 하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 11:4). 이는 <우리가 끊임 없이 죄를 짓으니까> "그 죄를 용서해 주십사"가 아닌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죄 짓게 함)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다"(요일 3:8,9).

과거의 모든 죄 다 용서하심 받아 더 다시는 나를 위하는 자아중심이 아니지만, 오늘이라도 누군가가 내게 해를 입히는 것을 못봐주고 마음 속에 재어 두어 악감정을 풀지 않고 서운함이나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 <지난 날의 모든 용서하심이 일체 백지화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5) 하셨기 때문.

이런 경우를 말씀하심이다. 예수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네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입니다"(눅 24/34) 하시고 본을 보이셨듯이. 스데반이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어,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말을 마치고 잠들었다"(행 7:60) 했듯이.

"천국은 그 신하들과 채무 결산을 하는 어떤 임금과 같으니, 정산할 때 1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는데 갚을 것이 없는지라 왕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고자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조금 참으시면 다 갚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고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신하가 나가서는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불과하나,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큰 액수)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하니 그 동료가 엎드려 빌며 '참아 주시게, 갚겠네' 하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 동료들이 이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게 여겨 왕에게 가서 그 일을 다 말하니 이에 왕이 그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으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어버렸다"(마 18:23-34) 하심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6:25). 각종 손실을 당하고 재해를 입는 등의 이 세상 모든 일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등의 세상 스쳐 가는 수준의 자질구레한 잣단 것일 뿐이다. 우리가 구원된 이후에도 줄곧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세상에 "보내심 받아"(요 20:21)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함 오직 그 때문이다. 하나님 모르던 과거 시절처럼 세상 계속 살라고 하심이 아닌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목숨"이요 "몸"이다. 멸망할 것을 다시 살려 주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안겨 주시고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이 되게 하신 터에, 이 이상 더 우리가 바랄 것이 무엇인가. 황송하옵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여, 은혜로 얻은 생명, 그 <자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이에 비하면, 이 넘치는 은혜의 영생의 희망과 동경하는 바 그 모든 영광의 기대에 비하면, "원수 사랑", "악을 선으로 이김" 등이 무슨 대단한 것도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뿐이다. 세상 자체가 죽음 일색임에도 마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는 것", "삶"으로 오인하는 착각에 휩쓸리다보니, <억울하게> 죽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지, 남 밑지지 않게 세상 살겠다는 이전의 철부지 욕망만 툴툴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먼지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니까. 실상이 그러하니까. 알고 보면 신기루에 불과함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이 하나님 교회에 사탄의 핍박과 환란, 각종 탄압이 가해질 리 만무함을 알아야.  무의미와 허무/虛無 일색인 세상이기에 이에 격이 맞도록 가해지는, 아니, 실제는 엄청난 전화위복의 하나님 은혜로서의 이세상 핍박과 환난(재난)', 환란(재앙)인 것이다.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닌 것이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명'과 '사망' 사이의 격차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물은 곬으로 흐르듯이, 구름은 하늘에서만 떠돌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움일 뿐이다. 오직 <인식 전환>이다. 제대로 인식하고 의연히 말씀대로 따라가면 거칠 게 없다. 죽음("육의 몸", "낮은 몸")은 죽음대로, 생명("영광의 몸", "신령한 몸")은 생명의 참 모습 그대로 직시하여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보 일보 전진해야. 세상은 "만질 것도, 붙잡을 것도, 맛볼 것도 없이, 쓰는 대로 <부패/썩음>"(골 2:21,22)으로만 끝남뿐이니까.


2025년 10월 11일 토요일

주기도문 명상 (7) ㅡ "<나의> 하나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실 것이다"(야고보서 7:8). 우리 각자가 자기 아버지 하나님/예수 주님을 모시고 있는 까닭에 여기서부터의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시다>고밖에는 더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다. 필자 본인이 독자 어느 분이 모신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다. 모시고 있는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내가 가까이 하는 대로 각자 모신 하나님이 표현되시기 때문이다.


똑걑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하나 사람(구원된)마다 <자기> 하나님을 모시고 있음이니 이것이 "성령으로 계심"의 의미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니"(요 16:7), 이것이 그 뜻이다. 즉 "유익하다" 하신 의미이다.

세계 어디서든 <장소와 거리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든 <인종과 그 사람됨됨이를 막론하고> 똑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람("임마누엘"ㅡ"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다)>으로 계시는 까닭에 그러하고 또 동시에 처음부터<"영이신 하나님"ㅡ요 4:24>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러하시다.

이 게시글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웃 사촌"을 언급했듯이 사람으로서의 특성 그대로이시기에 그러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만유 안에 계시어 충만하시므로 얼마든 각자 안에 오심으로 함께 하시기에 <각자가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계시는 까닭에 그러한 것이다.

시편 139편이 바로 이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예언함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합니다"(시 139:6)로 시인/詩人이 노래한 그대로다. 아무리 남이라도 자주 만나 교류하면 친형제간보다 가깝지만 그러한 "사귐"(요일 1:3,6,7)이 없을 때 친형제라도 남보다 못함과 같음이다. 이와 같은 <사람 사이>이기에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으로 착각하는 이기주의적 자세로는 영원히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없음을 엄중 경고하는 바이다.

 

주기도문 명상 (6) ㅡ 구원의 3단계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사람이 동물성 육체로 전락함으로써 자초하게 된 재앙은 1). 죽음과 <일체의 인간고/人間苦> 초래, 2). 자아중심이 선천적 본능이 되어버림으로 인해 평생 불가항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롬 8:2/7:24)의 철통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됨, 3). 아담의 범죄는 본의 아니게 사탄 마귀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른 결과가 됨을 인해 사탄의 인간 세상 통치/지배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3중고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논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된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이유다. 상대가 용서를 빌든 않든 나로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의 우리 주님처럼 또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팔매질에 숨을 거두면서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는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곧 "저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저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ㅡ눅 11:4)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5)이다.

아담 범죄로 인한 이 육의 몸을 인해 우리가 선천적인 죄인 즉 무조건 멸망의 운명일 뿐 아니라 악령들의 쉴 새 없는 시험을 받아 그 충동질에 의해서도 범죄를 하게 되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사탄처럼 스스로의 선택을 따라 된 악인도 있겠지만 그런 사정은 하나님만 아시지 우리의 소관사는 아니다. 우리는 갑, 을, 병, 정 가리지 않고 용서해 줄 따름.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라"(요 12:47)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20:21)을 받은 것은 새상의 악을 처단하는 심판자로서가 아니라(하나님은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심판권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마 7:21) 위함이니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 6:40) 즉 구원의 복음 말씀을 듣고 믿어 온전한 순종에 이르도록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함"이 유일의 관심사일 뿐이다. 이 점에 변동이 있을 수 없다.

고로 문제 해결은 간단한데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가? 천만에. <죄의 몸>으로서 이미 죽었는데, 죽은 자가 손 끝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실상을 모르는 유대인들이 그래서 무턱대고 "선을 행하겠다" 하고 "순종하겠다" 하니 행함으로(행위로)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바울 사도는 거듭거듭 강조하며 깨우치려 한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다.

왜? 하나님 친히 그 새 창조로 우리 위해 다 이루심이기 때문에! 창조는 홀로 하나님의 역사/役事이시지 피조물이 끼어드는 법이 있던가? 창조는 창조주만 하시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새 창조"의 일을 하시는가? 친히 죽으심으로써다. 우리 위해 친히 죽은 자가 되심으로써다. 죽음 가운데 머물러 무덤에 드신 다음에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다.

그러나, 잠깐! 죽으시기만 하면 (구원의 역사가) 끝나는 줄로 알고 <성경읗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무식한 말을 하기에 바쁘지만, 그 역시 "천만에"다. <부활하심>이 덧붙여져야 나도 "죽은 자"를 벗어나 비로소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거의 모두 이 "부활"을 간과하는데, 그리 되면 "죽으심"마저 무의미하게 됨을 왜 진작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죽으심>은, 아담 범죄로 인한 동물성 육체의 최종 마감/종결, 그리고 또한 "죄의 몸"이 멸절(롬 6:6)됨, 그리하여 향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시작, 그리고 지나간 모든 죄 용서하심의 실질적 바탕이 됨이나, 그렇다고 구원과 직결되지는 않음이니 오직 <전/단계>일 따름이다. <중간 단계>로 넘어가는 엄연한 순서가 있으니 그것이 <부활>이다.

전단계는 이 후속 단계를 위한 준비 단계인 것이다. 그리고 또한 부활은 <최종 단계>를 위한 제2 준비 단계다. 뻔하지 않은가ㅡ'죽음'으로써 일이 저질러졌으니 의당히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써 마무리되어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아무리 유의미한 것이라 해도 그저 죽음으로만 그칠 뿐. '부활'로써만 그 <유의미>가 살아나는 것.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바울 사도는 이를 또 거듭 강조한다. 마치 오늘날의 혼돈과 혼탁을 예견이나 하듯이ㅡ.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니(:17,18). 보라! 죽으심만으로는 우리 구원이 될 수 없음을 말하지 않는가! 부활이 떠받쳐 주어야 비로소 완결임을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읗 모르는 사람들"이라 했고, 이런 사람들이 버벨론 신학의 혼돈과 혼탁의 주역/主役들인 것이다. 왜 성경을 모르느냐,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계시"가 아닌 엉뚱하게도 "학문" 취급하여 남들이 써놓은 주석서 따위만 붙잡고 늘어지려 하니 잘못 해석은 고사하고 무엇 풀이한 것이라도 있다 싶으면 불문곡직 대책 없이 줄줄이 도미노식으로 따라 넘어가는 판이다. 한 번 그렇게 쓰러지면 반영구적으로 다시는 일어날 줄 몰랐던 것이 바벨론 신학이었다.

우리 위해 즉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이루셨다고 그것이 곧장 우리 구원으로 정착하고 일단락되는 것이 아니다. <전단계>, <중간 단계> 다음이 <최종 단계>다. 이 최종 단계야말로 오늘날까지 감추어져 온 제2의 핵심인 것이다. 제1핵심은 물론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가 없으면 마치 음식은 장만했는데 이를 담아 먹을 그릇이 없음과 같이 된다.

성경을 읽으려 하지 않고 엉뚱한 데 가서 서성거린 결과로 이 중요 부분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성경을 그저 읽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 말씀하셨듯이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마음의 자세로 임해야 "성령의 친히 가르치심"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숨기신"(눅 10:21 것인데 어찌 알 수 있으랴.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막 7:6-8) 하신 그대로다.

그러면 그 <최종 단계>는 무엇이냐. 아직은 말하자면 그림의 떡으로만 그쳤을 뿐인데, 실제 떡으로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무엇이냐. 그림은 떡이 실재한다는 그 설명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 내 것으로 적응되어야 명실공히 구원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주님 친히 나와 "하나"(요 10:30)되심으로써 가능하다. '사람'으로서 나 위해 죽으시고 나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이제는 '하나님'으로서 내 안에 내 영혼처럼 되어 오심으로써만 더 이를 데 없는 완벽한 "하나"로서의 구원 그 구조/체제다. 즉 더 이상 '그림의 떡'이 아니다. '떡' 자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부터 "3위1체"의 "하나"로 계셨고 이렇게 계시는 모습을 따라 이를 만유 기본 원리로 정하시어 만유를 창조하셨고 주재 주관하시므로 인간 구원도 이 이치대로 하심이 당연 사리/當然事理다. 이 "하나"로서의 모습이 성령이신 것이다. 이 "이름"(마 28:19)은 고유명사처럼 활용되지는 않고 성부 하나님의 영도, 성자의 영도 다 성령이시나("하나님은 영"이시므로ㅡ요 4:24), 특별히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시대와 달리 일반적으로 성부와 성자로 "하나"되어 계심을 의미함이다.

이렇게 예수 우리 주님 친히 성령으로서 믿는 각 사람에게 임하심이니, 엄밀히 말해 이것이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가 이루어짐이라 <최종 단계>로서의 우리 구원인 것이다. 물 세례(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되므로 이것을 "구원 받음"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성령의 세례",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직접 영접함"이 필수가 됨이니,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바벨론 신학에 매여 이 성령 받아 모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니 오늘날에서야 밝혀진 것. 다만 유의할 것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경고하신 대로, 어린 아이의 특징은 절대적 신뢰(믿음)와 사랑(순종)에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필수 지식이 없어도 이상 두 가지만 겸비해 있으면 성령께서 예외 없이 임하여 오셨고 구원 받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고를 하셨던 것이나, 이런 지식도 없고 "어린 아이 같음"도 없을 때 진정 재앙만이 있었으니ㅡ.

이와 같이  '짝의 법칙'에서는 이 "하나"(요 10:30)됨이 "3위1체"에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음양론에서는 음양조화라고 부르면 되겠고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 "얽힘"이나 "중첩" 현상이 이에 해당된다. "3위1체"에서 "3위/三位"에 해당한다. 짝을 이룬 둘이 따로따로 놀지 않고 "하나"를 이룸으로 만물의 대칭적 아름다움(對稱美)도 보장됨이니, 이같이 "상반/相反은 상보/補"로 종결되고 영원 불변. CONTRARIA SUNT COMPLEMENTA.

이와 같이 동물성 육체(이 "동물성 육체"라는 표현에 대해 혹자는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나 우리는 이 진실을 강조하고 우리 자신을 세뇌시킬 필요가 있어)로 인해 또는 악령들의 충동질에 넘어가 불가항력으로 모든 인류가 악인 행세를 하는 등 난장판을 이루니, 다시 말해 "알지 못하고"(눅 23:34) 행하는 악이니까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모두를 용서해 주어야 마땅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며 선으로, 선행/善行이라는 무기로 무찔러 장쾌하게 이겨야 하는 것.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의인 아벨을 죽인 가인의 죄를 벌하시는 대신 도리어 불쌍히 여기시어 그 소청대로 이루어 주심으로 본을 보이셨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심판자로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며"(골 1:24)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1) 주님처럼 사람들을 멸망에서 건져내려는 일편단심뿐인 것. 구약시대의 권선징악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상벌/賞罰 관련한 인생의 초보 학습인 것이다. 신약시대에서 아담 범죄 등 모든 실상과 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짐에 대한 사전/事前 교육 차원.

우리 구원을 <전단계>, <중간 단계>, <최종 단계>로 나누어 고찰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그저 그런 관념상의 교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의 실생활에 절대적 영향을 미쳐 갑은 을만을 위하고 을은 갑만을 위하는 생명의 법칙에 그 운영의 운명이 직결되어 있음을 강력히 경고함에 목적이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고전 4:20)이다. 


2025년 10월 8일 수요일

주기도문 명상 (5)

1865-67, 스웨덴 대기근


히브리서는 모세의 특징을 "<
보이지 아니하는> 분(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히 11:27)는 것으로 규정했다. '은혜의 성령 시대'에 있는 우리들로서 특별히 이 "마지막 때" 주님 다시 오시는 시점 우리라고 이에 뒤질 수 없고 모세보다 못할 수 없다. 21세기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크신 은혜를 입고 있는가! 2천년간 거의 무지의 황무지 상태에 있던 "3위1체" 하나만 해도 그렇다. 양자역학이라는 최신 과학 지식에 힘입어 그 소상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된 우리들 모두가 아닌가! 그만큼 지식면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워졌고 친숙해졌다는 의미다. 가일층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유감 없이 세계 만방에 전달하는 매개 도구로서의 우리가 되어야.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영원히 사람이 되어 오시기 위해 완전히 여자의 태/를 통하여 오셨다. 따라서 '몸'은 사람이시고 '영'으로만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은 영"이신지라 하나님으로서의 원래 모습은 그대로이시고 변함이 없으시다. 단지 이제는 영원히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그 차이만 있다 할까.

또 하나 우리와의 약간 차이는 우리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우리처럼 성별/性別의 지배를 받으신 것이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 천사들과 똑같은(눅 20:35,36) <완전한> 모습으로 계심이니, "완전하다" 함은 "영광의 몸"(빌 3:21), "신령한 몸"(고전 15:44)을 말하는 것이다.

범죄 전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있을 때는 현재와 같은 인간의 몸이 아니었다. 초자연계 초능력의 광채로 둘러 쌓여 현재의 동물적 육체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성별의 의식이 없었다. 지금은 동물적 육체의 근성으로 원시적인 식욕, 성욕에만 매달려 삶의 낙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는 듯이 되어 있지만,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는 그런 단세포/單細胞적 취향 대신 진정한 생명의 멋과 맛을 한도 없이 누리는 황홀경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낙의 연속이었기 때문.

원래 아담 홀로였을 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독생자를 "낳으실" 때와 같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주려 하심이었지, 자녀 생산과 번식이 목적이 아니셨던 것이다. 만일 그러했다면 아담 창조를 끝내시기가 무섭게 곧장 여자를 창조하셨겠지만 그러지 않으셨으니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야 여자를 만드시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반드시 자연계 생물과 같은 암수 양성 결합으로써가 아닌 초능력으로 인간은 생식하고 번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담 범죄로 동물성 육체가 되면서 동물과 같은 형태와 양식으로 전락한 것이다. 벗은 것 즉 벌거숭이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창 2:25/3:7,10) 본능 작용이 여기 기인한다. <죄의식>과도 연관되어 <비정상>임을 자각함에서 유래된 것이다.

동물적 육체의 "낮은 몸"으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초능력으로 진행되는지라 아담 부부에게서 나는 자식들은 성별 없이 "천사와 동등"(눅 20:36) 급의 몸으로 생산되었을 것이요 아담 부부 역시 단순한 남녀 결합이 아닌 "신령한 몸"다운 초능력적 조처로 천사들의 각종 도움을 받아 자식들을 세상 밖으로 얼마든 배출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초능력"이라 함은 자연법칙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본디로 돌아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3)에서 3위1체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 관련해 조금 더 논한다면, 성경에 인간을 창조하시는 대목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26)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다시 말해 성부와 성자 하나님 즉 두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창조의 역사에서 최초의 "짝"을 이루심이다. 그리고 짝의 법칙(3위1체 법칙)의 시발점/始發點이 되신 것이다. 짝을 이룬다는 것은 짝을 이룬 그 둘이 "하나"(요 10:30)가 된다는 의미로서 성경에서 뜻하는 <3위1체>라, 만유의 근간이 됨을 오늘날의 물리학이 밝히고 있음이니 이는 시의적절하고 또한 당연한 귀결이다.

이 "3위1체"를 만유 창조와 운영의 근본으로 삼으신 것이다. 미립자의 미시세계에서 그 명확한 증거가 20~21세기 오늘날 양자물리학(양자역학)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이 사실 즉 "3위1체"를 기반으로 하신 우주 만상의 주재/主宰를 밝혀,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 계심을 최후 확정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3운법칙(fashomo/파쇼모)의 기반이 바로 이 3위1체의 법칙임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자께서 만유를 창조하셨고(요 1:3/골 1:16) 성부께서는 "그(성자)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히 1:2). 성부, 성자 두 분이 "하나"(요 10:30)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하나"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서 성질이 정반대의(서로 짝을 이룬) 두 개념이 하나의 개념으로 융합해 있음을 이중슬릿 실험으로 입증한 오늘날의 양자역학이 있는 것이다. 성질이 상반/相反이다보니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다. 그러나 "하나"로서의 상보/인지라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이런 2중성을 띠고 있는 구조다.

따라서 그 특징은 성경적으로 잘 표현되고 있으니,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성자/로 나타나신 것으로 인식해도 좋고 동시에 성부/聖父로 인식해도 옳다. 이는 주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씀으로써 충분히 확인되었으니 앞글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요 14:9).

이와 같이 "하나"로서의 '머리'와 '몸'은 확고부동의 삶의 이치요 둘은 불가분인지라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1억의 1억배가 모여 있어도 마치 한 사람과 같은 "하나"라는 가장 이상향적 법질서가 확립되는 세상이 꾸려지게 마련이다. 이렇듯이 창조주 하나님 친히 내게(우리에게)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되시므로 이 영광스러운 생명의 법칙에서 우리의 가장 첫째 가는 소원의 기도도 하나님을 위하는 하나님 관련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소원, 간구, 희망 사항 등 일체가 그 첫머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되심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과, "하나님의 나라" 임함과 관련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순서다. 이렇듯이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인 짜임새로 되어 있기에 이 하나님 뜻을 따르기만 하면 즉 그 "뜻을 행하면"(마 7:21) 되는데도 자아중심으로 용은 아담을 시기하여 제거하려 헀으며 아담 부부는 머리이신 하나님 및 그 말씀을 소홀히 여겼으니 그 대가/代價가 오늘날의 비극.

그리고 "죽게 된다" 하신 경고대로 인간이 모두 동물적 육체가 되니 당장 이 "낮은 몸"(빌 3:21), "육/의 몸"(고전 15:44)의 유지 보존에 불가결한 "먹을 양식"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창조시 먹고 마시지 않아도 전혀 무관하게 생명을 구가/謳歌할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 영광을 빼앗겨 우선 당장 먹고 살아남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담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은 상황에서랴. 땅만 아니라 땅에 사는 동식물까지 고통이 아닌가. 저주 받은 땅에서 무슨 풍성한 먹거리가 생겨나겠는가!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릏 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처참하게 기근과 아사자가 인류역사상 생겨났던가.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주님 재림 때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을 동물적 육체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면> 이런 기근 소동이 생겨날 리가 없음을 알아야.

자연계 동식물이야 자연 조정(번식 수/의 다과/多寡 조절)이 때때로 필수 불가결이라 하지만, 인간은 영이 있어 독립적 존재이기에 미리 그 숫자만큼의 적정 수준으로 식/생활 환경이 엄정히 보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이 이런 "낮은, 육의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그렇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하시지를 않았던 것이다. 아담 범죄라는 돌발 사고/事故로 인해 이런 혼돈과 혼란은 필연적이게 된 것. 이런 점에서도 인간의 이 동물적 육체는 아담 범죄에 따른 "돌연변이"임이 확인된다.

하나님의 피조물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이렇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필수불가결이요(비단 구원 때문만 아니라) 절대적 의미를 지니심을 우리는 마음에 아로새겨야. 만물의 머리이시기에 이 머리의 부재/不在는 삶 자체의 붕괴, 불가능으로 직결되기에. 특별히 인간에게 그 머리되심이 절대적 의미를 지니심이니 그 중요성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상향적 삶이란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개별적 언약/言約 관계에 들어감이므로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관계는 이렇듯 막중한 것이다.

신령한 몸은 먹고 마심은 단지 식도락/食道樂을 위함일 뿐 생사 문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니 그야말로 영원한 자유의 향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만인 공유요 공용인지라 따라서 역대 교회 전통은,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행 4:32) 바로 이것인데, 바벨론 신학의 거짓이 교회를 장악함으로써 오늘날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되었으니, 지금 시급한 과제는 이 '교회적 영광'을 되찾는데 있다. 말을 바꾸면 이런 실천이 없으면 이름만 "교회"이지 실제는 아닌 것이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을 무시하는 자리에 계실 리 만무한 것이다.

주기도문 명상 (4)

다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절박한 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함>이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않고 길쌈도 아니한다"(마 6:26,28) 하신 말씀의 내용과는 다소 온도 차를 느낄 수 있다. 즉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는"(:31) 않으나, "일용할 양식 주시기를" 구해야 함이니, 이는 동물적 육체로서의 자연계 짐승은 원래 창조하신 그대로의 모습이건만 인간은 전혀 다르기 때문.

애초 동물적 육체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이 창조된 것이 영생하는 존재로 변환되기 위한 그 1단계였기에, 그 2차 단계로 영혼을 주신 것이고, 3차 단계로 에덴으로(인간 아담을 위해 거기 특별한 동산을 창설하신 후) 인도하시어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 즉 영원성의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먹지 말라고 엄금하신("먹으면 죽는다"고 하심으로써) 선악과를 먹음으로 도로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린 비극이다. 그러나 이는 이전 자연계 물질에 속했던 동물성 육체로의 <환원>이 아닌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던 원래의 "영광의 몸"(빌 3:21)을 <아주 잃어버리는> 일대 참사/慘事라 이 둘은 차원이 다르다.

선악과 나무 열매의 "선악" 관련 "지식"의 의미 즉 "좋고(선/善) 나쁨(악/惡)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은 동식물들의 육체에 기계(자동)적으로 작동되는 놀라운(인간의 지능을 훨씬 뛰어넘는) 기능을 장치해 두심으로써 그들 생물이 자신에게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기피하게 하시어 한정된 기간 스스로 자기 목숨을 유지해 가는 그런 기능을 말한다.

인간 또한 그 육체만큼은 똑같은 구조/체제다. 인간 신체의 작동에 비교적 친숙해 있는 의료 관계자들도 떼로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우연 발생이기에는 너무나 조밀하고 치밀한 인체 조직의 작동 체계를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몸>과는 별도의 <영>이 있어 이 영은 자유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지라 그런 선악 관련 식별("지식")은 도리어 자아중심으로만 작동될 뿐 모든 악과 죄의 근원으로서의 온상/溫床 역할이기에 동물성 육체(아담 범죄의 결과물)로 야기되는 2중, 3중고/重苦인 것이다.

짐승은 먹고 마시고 생식/生殖하는 것으로써 자기 자신(종/種)을 유지 보존함뿐이나 인간은 영/靈인지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창 1:27/5:1/약 3:9) 관계로 영구히 죽음과 썩음이 없도록 신령한 속성의 몸으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독립된 존재라, 하나님 친히 "부자/父子" 관계로 <머리와 몸>의 짝을 이루시어 그 "하나"(요 10:30)되심으로써 생명(삶)의 법칙을 친히 확립하심과 같이 우리 또한 똑같이 스스로 이를 준수함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신 것.

즉 자연계의 생물처럼 자기 위주/본위의 <자아 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의 사랑으로써만 이 생명의 법칙은 운용됨이니하나님 계시는 모습인 '3위1체'가 그 기반인 것이다. 곧 나를 위하는 것은 남인 것이고 나 자신이 아니며 따라서 나도 남을 위하는 일관성을 시종 고수함이 생명이다.

짐승은 본능적 욕구를 채움으로 그치나, 인간은 이성적/理性的 사랑으로써 <짝으로서의 "하나"(요 10:30)됨>을 따르니 이 법질서 준수가 영원한 삶/생명인 것. 나 자신 나를 위하지 않는 대신 즉 나를 소유하지 않는 대가로 나 외의 모두를 내 것으로 소유하여 누리는 가장 이상향적 삶의 유일무이의 방법이 되는 것.

자아중심은 무리하게 억지로 빼앗고 훔치고 억압하여 내 것으로 겨우 차지해도, 그나마 일부 곧 부분적으로 누리는 것으로 그치지만, 자기 부인으로 출발하는 상대방 중심은 자기를 탈탈 비우는 <무소유>에서 <만유 소유>로 귀착하는 최대 최고의 지혜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반면, 그 피조물로서의 나는 나의 일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됨이라 그래서 우리 구원도 "하나님이 그 피 값으로 사신 교회"(행 20:28/계 5:9)로 표현됨과 같다.

이렇게 각자가 하나님-사람, 사람-하나님을 중보자/仲保者로 모셔 <'머리'와 '몸' 관계>를 형성해 <한 영>과 <한 몸('머리'와 '몸'으로서>을 이룸인즉 이와 같은 "하나" (요 10:30)됨은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요 17:10)이라 하신 그대로 주님의 것은 나의 것, 나의 것은 주님의 것으로 또한 나타나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과연 우리의 실생활이 그러한가 자문자답할 일이다. 말로써는 그리고 자기 딴에는 아무리 "구원 받은" 확신이 철석 같아도, "나무는 그 열매로 판별한다"(눅 6:44)는 주님의 엄중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바울 사도가 여기서 지적한 것이 바로 "열매" 유무이다. "하나님의 일"에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나 자신의 욕심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면 자기 기만일 따름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 10:38) 하신 대로, 나도 주님 안에,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이 구원이다. 주님 친히 내 안에 계셔 나와 "한 영"으로 "하나"이시니까 나를 위하신 그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어 죄 용서를 받은 것이다.과거 자아중심의 <나>란 존재가 죽어 없어졌다. 없는데 왜 있는 듯이 내 욕심, 나의 욕망 그대로인가. 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과는 달리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노라"고 자기를 속여 온 것뿐이다. 믿으면 믿는 것일 뿐이지 믿으려고 <애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믿음과 사랑과 순종의 <스승>, <본>으로 "어린 아이"를 자주 언급하시어 강조하셨다. 어린 아이를 따라 하면 된다. 단 한 가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부지런히 문을 두드려야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면 찾게 되고 얻게 되고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법칙임과 동시 약속이다.

나만 문을 두드림이 아니요 주님 친히 나의 "문을 두드리신다"(계 3:20). 예수(히브리어로 "구세주, 구원자"의 뜻)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해 오심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Comforter, Helper)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함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처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요 14:16-18) 하심과 같다.

"또 다른" 보혜사라 하셨으니까 먼젓번의 보혜사는 예수님이시기에 "보혜사"의 뜻이 금방 드러난다. 단 육체가 아니신 성령으로 오시는 똑같은 <바로 그 예수님>이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라 하신 말씀이 그 확고한 증거. 그러면 왜 "성령이 오신다" 하시고,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라" 하셨는가? 어떤 "유익"인가?

사람(구원된)마다 예수님을 직접 모시게 되는 바로 그 "유익". 이 얼마나 굉장한 사실, 의미인가! 그러면 육체가 아닌 그 영으로 오시기에 성령으로 오심인가? 아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오심이라 그러하신가? 아니다. "함께"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 오심이다. "함께"와 "하나"가 어떻게 다른가.

"하나"이실 경우 똑같은 한 모습이시나 성자 하나님으로 보면 틀림 없으신 예수 우리 주님이시고, 성부 하나님으로 보면 역시 틀림 없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다. 이는 <착시 현상>도 아니고 무슨<요술>도 아니다. 실상 그대로를 설명함이다. "함께"에는 이런 의미가 전혀 없다. 주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 9) 하신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키심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1:18) 함도 당연히 이를 가리킴이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뵌 것이다. 우리가 뵐 수 있게 성자와 더불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라, 아멘"(딤전 6:15,16)으로 못박았는데 이는 왜인가?

성자 하나님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는"(골 3:11) 분이시다. 이 광대무변의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지라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은 상식에 속한다. 또 성부께 관해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요 14:28)이라 하셨다.
성경은 또 "만유 안에 계시고(in all) 만유를 관통해 계시고(through all) 만유 위에 계신(above all)"(엡 4:6) 분으로 성부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만유보다 크신"(요 10:29) 하나님을 무슨 수로 본다는 말인가.

일부러 사람 형상이 되시어 나타나시면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경우 사람이라 하지 하나님이라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아닌게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땅 위에 서신"(욥기 19:25) 것이다. 욥은 이 사실을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여 그 오심을 찬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람으로만 취급하여 결국 십자가에 달리심을 당하셨다.

이런 여러 사정을 미리 감안하시어 볼 수 없으신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창 1:26) 인간을 만드시어 하나님의 모습답게 즉 <흉한 모습으로 썩어 죽는> 육체가 아닌 <광채로 나타나는> 신령한 몸으로 입히셨던 것. "6일 창조"로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도록"(:26) 창조하신 인간 곧 하나님의 대리자로 친히 세우신 <하나님의 상징>이 앙상한 백골로 썩어 문드러지는 흉측한 모습의 "하나님 형상"이 되도록 방치하시는 하나님으로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일을 당연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당신이라면 그런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는 허물을 면치 못하리라" 할 때, 당신은 이 말을 지나치다고 책하겠는가.


 

원상 회복 (2)

우리 구원이 <원상 복구>이기 때문에 "회개"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거룩하고 의로운 인간으로 죄가 없었으니까. 아담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