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28일 일요일

모름지기 모든 아름다움은 대칭/對稱의 조화




3운법칙이라는 철망/鐵網(울타리)이 각인에게 씌어져 있지 않으면
가인/아벨 사건은 처처에서 일어나
악인(악인)은 살인자가 되고 의인(아벨)은 피살자가  되며
악인끼리 또 싸워 역시 목숨이 담보되지 않는다.  
고로 자아중심 속성은 제재 불능이라 인간사회는 곧 붕괴.
그럼에도 이렇게 탄탄히 지탱돼 감은  오로지 3운법칙 때문.
이 불가항력의 자아중심은 아담의 범죄로
본능 위주로 살게 돼 있는 동물의 육체(자연계 몸)가 된 까닭.
아담의 범죄 전에는 초자연계 명광의 몸으로
자기 선택인 자유 의지에 의한 자아중심만이 통했었다.
아담의 범죄도, 악령들의 범죄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한 마디로, 이 자아중심으로는 모든 피조물의 파멸뿐.
이런 지식이 있는 자로서 이 세상 살고자 하는 자는
천하없는 바보들이거나 아니면 "미친 마음"(전 9:3)의 소유자. 
고로 자아중심의 이 세상으로는 삷이라는 것은 모래 위의 집,
헛된 망상,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짓, 한바탕 꿈이라고
아주 못을 박아버려야, 쐐기를 박아버려야ㅡ딴 생각 버려야.
<살 수 있다>는 착각은 마귀의 속임수 따라 품었던 허황된 생각.
이제는 3운법칙으로써 실상을 낱낱이 꿰뚫었으니, 그 증명이니,
오직 새 창조되는 일만 시급함을 알았으니, 인생 역전/逆轉하시라.

새 창조는 어떻게 되느냐. 짝의 법칙으로써만 가능하다.
아담이 육체로서 그 육체를 우리에게 물려줌으로써 모두 인간된다.
그 짜임새는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 물질과 반/反물질의 배합. 
이제 "새 창조"에서는 '육체'와 대칭인 '영'.
고로 "마지막 아담"(사람되신 하나님)의 성령(하나님이시니까)을
우리가 물려받음으로써, 그래서 육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나는(요 3:8) 것이라고 설명해주신 것이다. 
성령으로 계신다 함은 아버지 하나님 친히 또한 함께 계심이니
성부/聖父께서는 실체, 성자/聖子께서는 그 형체(형상)로 계셔. 
이렇게 창조주 친히 개입하셔야 모든 인간을 총망라해서
아담으로 인한 처음 창조 파멸을 원상태로의 복구 가능인 것이다.
그리고 처음의 이중 구조(영혼과 육체)에 맞추어져야 함이 필수.
그래서 "마지막 아담"께서 성령으로 친히 내게 오시는 것이니
나라는 존재는 <육체>가 되고 성령은 <영혼> 격이 되시어 
애초의 아담으로 인한 육적 출생인 이중 구조 그대로가 되는 것.

그러므로 새로 창조된 자마다 자기 자신을 이중 구조의 존재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요 8:29) <함께>의 복수, 쌍/雙의 존재. 
"마지막 아담"을 <머리>로서 모시고 나는 그 <몸>으로서의
불가분의 하나, 한 몸이라는 철두철미한 의식 속에서의 하루하루.
머리는 몸을 위해 있고 몸(의 각 지체)은 머리 위해 있고.
머리 없으면 몸도 없고, 몸이 없으면 머리의 존재 의의가 없고.
이것이 둘의 하나됨이니 이같이 머리 몸 관계를 알면 충분히 이해돼.
이렇게 여럿이 하나됨을 가리켜 사랑이라 하고 
그  구조는 항상 머리와 몸의 양자 관계이니 짝의 원리 그대로다.

한 분 머리를 모시니 그 아래 몸의 모든 지체가 바로 나 자신이다. 
이래서 주님의 계명(명령, 분부, 법칙)이 이 이치 그대로를 나타내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다름아닌 이 몸과 머리 관계를 말씀하신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어
"과연 그렇구나!" 하고 우리는 무픞을 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까 가장 가까운 관계가 머리와 몸으로서의 주님과 나.
고로 "나보다 보모처/(또는 부/夫)자를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마 10:37) 하셨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음은
머리를 먼저 위하고 따라야지 머리 무시하고서 몸의 각 지체끼리
아무리 찌지고 볶고 서로 위해보아야 도로무공이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이 첫째 하나님, 둘째 이웃(22:40).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은 제대로 읽어 이해하기만 하면
세계에서 제일 쉽고 간명하고 백 번 옳고 이치에 맞는 말씀들뿐. 

고로 몸이 머리 의식 않고는(그 지시 전달 없이) 단 1분이라도
존재할 수 없듯이 몸(의 각 지체, 각 부분)된 내가 주님들
단 1분이라도 의식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중심으로
매일 매시간을 요리/料理해 나가야 믿음 생활의 정상 모습.
영생만 욕심내어 특정일, 특정 장소에 특정 의식 행하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는 것으로는 천국 들어가지 못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머리와 몸은 실체와 형체의 관계이므로
머리 없이 몸 홀로 나다닐 수 없고 이 사정은 머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둘의 하나됨, 하나로서의 둘의 특징이다. 
형체 없이는 실체가 웃는지 우는지 알 도리가 없다. 
형체라야 웃는 표정, 우는 표정이 가능해. 
또 형체인 몸은 머리로서의 실체 없이는 죽은 것이다. 
바늘에 실 가듯이, 실이면 반드시 바늘 있듯이
머리 없이 몸 홀로 부지 못하고, 몸 없는 머리 없듯이
나와 주님과의 "한 영"(고전 6:17)됨이 그러하다. 
하루 24시간 주님 의식이 바로 이 때문이다. 곧 새 사람, 새 생명.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마 8:22 )되어 영원 멸망을 앞두고 있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마지막 아담"이라는 하나님 선물의 희소식을
전달해주겠다는 그리고 이 일을 위해 기도하는 일편으로 나날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보내야 가히 몸과 머리의 하나됨인 것이다. 

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한다"(막 8:38)고 하셨을까.
"부끄러워하는" 자마다 직통으로 멸망인데(:38)ㅡ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기를 뽐냄이 없고 자랑하지 않는, 따라서 자랑거리가 없는 
멸시 받는 약자, 천한 자, 없는 자로 여겨지기 때문(고전 1:26,28).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 특징 중 하나인 세상과 어울리지 않아
응달진 곳의 별볼일 없는 하류민/下流民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
이는 자연스러우니 이들이 절대 댜수이고 상류층은 극소수인 때문,
한 마디로 요약해, 이 세상의 "임금"(요 14:30)이 악한 자 마귀인 때문.

천국이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 몸이 자연계 속성이 됨으로써 이런 구별이 생긴 것이다. 
아담의 범죄 전 몸이 초자연계 속성임을 가리켜
그리고 그러한 몸으로 살게 되어 있던 환경을 지칭하여 왈, "천국". 
우리가 아담의 육으로 출생함으로써 '영혼'과 '육체'가 불가분이었고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 두 번째(다시) 출생함으로 '나'와 '성령'.
즉 사람으로서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과 나와의 
몸과 머리로서의 영원한 행복과 사랑의 쌍쌍이 돌아드는 "랑데부".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의 연가(love song)를 
애창함을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한다"(엡 5:19) 하는 것이니
곧 "성령 충만"(:18)의 기반이다. 

이상 설명의 "이중 구조(머리와 몸)"의 복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영혼과 육체의 첫 사람의 구조는 주님과 나의 새 사람의 구조.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듯이 말로만 주님과 나의 관계로
아무리 나 자신을 세뇌시켜도 허공에 울려나는 메아리로 그쳐.
오로지 행함으로 사랑이 나타나듯이 내 실제 생활에서 
"주님을 어찌해야 기쁘시게 해드릴까"(고전 7:32/고후 5:9) 의식이 
1년 365일 24시간 내 생활을 지배해야 그 하나된 증거이니
꽃이 아름다워 보기에 싫증이 안나듯 사랑하는 관계면
그 결속 자체가 바로 천국 삶인데 어찌하랴.
반면, 사랑하지 않는 관계라면 그런 하루는 바로 지옥 그 자체. 
항상 '대칭'으로만 진행되어 가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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