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6일 토요일

스데반의 순교 정신을 갖추지 못했음을 자각하거든 아예 설교 강단에 서지 말기를







이 세상에서의 부자는 자기 위로를 다 받아버려(눅 6:24) 
장차에는 받을 위로가 없다 하신 그 "위로"의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부자(거지 나사로의 이웃)가 죽은 후 불속에서 고민하는 이유(16:25),
오직 부자되었다는 "죄"밖에 없습니다. 왜 죄가 되느냐 하면
부자가 되어도 "마음을 높이지 않고 재물에 일절 기대하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게 부유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면"(딤전 6:17,19) 죄가 되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어도 세상 삶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함께 하는 고통,
함께 나누는 죽음의 저주(아담 범죄로 인한)를 의식하여 
오직 장차 오는 영원한 육체의 영원한 생명의 새 창조에다
희망을 두므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비정상 아닌)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를 알던 부자는 그 거지를 외면한 것입니다.
복이 많으니까 부자이고 없으니까 거지라는 잘못된 믿음에서입니다.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마 8:22)의 죽음의 세상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수 없으니
누구든지 오늘날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소리 하는 이마다
마귀의 사주를 받아 그 꼭두각시로 놀고 있다는 100% 확증입니다.
그 무슨 기적, 초능력을 행해도 모두 마신/魔神일 뿐이란 증거입니다.
이유는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라 공언함이 됨이니
죽은 자라 확정하신 세상에 삶의 축복이면 그런 모순도 없습니다.
이를 무시할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란 원래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마귀의 시초부터의 거짓말(창 3:4,5) 
그 뿌리 깊은 선동을 따르는 가증스러움밖에 안되는 까닭입니다.

경은 이 세상을 두고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요 3:36), 
세상 인생들을 향해서는 "매일 분노하신다"(시 7:11) 했습니다.
이런 판에 무슨 삶을 감히 구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영원한 죽지 않는 육체로서의 삶 외에는 삶이 아닙니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능히 판단할, 어린 아이라도 이해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도 이런 한시적인 장차 멸망할 세상이면 삶의 무대가 아닙니다.
영원히 요동치 않는세계에서의 안정된 우주에서의 삶이라야 합니다. 
고로 인내로써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 외에 달리 말씀 아니하십니다.

"지금은 아니다, 앞으로 온다, 지금은 만물이 함께 고통하고
있지 않으냐"(롬 8:23) 오직 이 말씀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런 죽음의 세상, 다시 말해 삶의 향략이 외면 당하는 때는
세상에서 "웃고 배부른"(눅 6:25) "있는 자"(고전 1:26-28)들은
이런 면에서 보면 저주 받은 자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판입니다.
마음 돌려 이 죽음의 실상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이는 필연입니다.

고로 세상의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 받는 자, 없는 자
그래서 세상 낙을 못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사실상 정상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교회는 이런 사람들이 주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배도"(살후 2:3)의 교회는 이와는 거꾸로 갑니다. 
잘 사는 자, 강한 자, 높은 자, 힘 있는 자를 선호합니다. 
"목이 곧고(뻗대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함으로
(외양만 중시하고 내면은 어젼히 그대로라 변혁이 없는-롬 2:28,29)
항상 성령을 거스려 행하기"(행 7:51)에 그러합니다. 
스데반처럼 돌팔매에 맞아 죽더라도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 전함을 
주저하거나 사람을 두려워하고 눈치만 보려거든 
설교 강단에서 화급히 내려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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