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9일 월요일

주기도문 명상 (2)

"이웃 사촌"이란 말이 있듯이 매일이다시피 눈으로 보며 대면하다보면 없는 정/도 생기게 마련인 것이 인생. 그렇지 못하면 있던 정도 끊어진단다. 이것이 동물적 육체의 <5감/感>한계다. 영혼을 지닌 인간이라 동물적 육체로써가 아닌 신령한 몸으로써 최종 창조가 완결된 이유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감>이 필수인 영혼의 보유자이니까.


그래서 "영적"이란 말 그대로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원성울 지녀 불사불멸일 뿐더러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으로 사물을 인지함이 아닌 초자연계 능력으로써 능히 하나님과 직통, 완벽하게 소통했던 아담이었다. 그랬건만, 범죄로 이같이 죽음에 이르는(죽음의) 저급한 육체로 전락/顚落한 결과가 현재와 같은 숨 막히는 양상의 "낮은 몸", "육의 몸"이다.

이렇다보니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도, <눈에 보이는 인간>만큼에도 그 느끼는 정감/情感 정도가 훨씬 미치지를 못하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관련한 모든 것.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 생명 아닌 죽음이 지배하는 때인 고로 아주 가끔씩 일시적으로라도 하나님 관련한 생명의 희락을 맛보는 것이 가능하냐 하면 그조차도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실정이라, 성령 세례 받을 때 썩 드물게 영적 황홀경을 맛보는 경우가 사람 따라 없지는 않으나 잠시 그 한 때뿐 지속되지는 못하니 말해 무엇 하리요.

게다가 악령들의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방해 공작으로서의 거짓과 속임수가 쉴 새 없이 난무하는 2중3중의 난관에 직면해 있는 실상이 어닌가! 이렇게 완전히 버림 받은 죽음의 파멸 상태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감각적인 것만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관련해서는 완전히 남남처럼 되어 있음을 소스라치게 깨어나듯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시급한 첫째 과제이거늘 그런데도 신령한 몸은 박탈 당하고 동물적 육체의 굼벵이 신세로만 구불텅거리니!

그런즉 말의 요점은,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첫머리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 그 "뜻"과 그 "나라" 관련으로 시작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절실하다. 왜냐ㅡ우리 인간의 정작 삶/생명이란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요 1:18)에서 시작되고 또한 머물며 그렇게 해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아기에게는 엄마 품속이 바로 생명이요 삶 그 자체임을 감안할 때 당연히 그러한것이다. 만유를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 앞에서는 "품속"의 아기이심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음에랴.

이러한 실정을 제대로 깨닫고 만유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이러한 생명의 법칙 따라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리며 가장 이상향적인 그 나라를 흠모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고 널리 선전/전파함으로써 실제 실현시킴에 이바지하는 외 달리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 소원 그리고 바람의 최고 결정/結晶인 것.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최대한의 돌파구가 마련되어 있기는 하나, 이 실제 상황만은 우리가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하나라도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받들고 무엇보다 "쉬지 말고 기도함"이 요구되는 것(살전 5:17). 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 하심이다. 사람은 자주 대면함으로써 더 가까워지듯 현재의 우리 처지로서 "품속"으로서의 하나님과 가까워짐은 <기도로써의 대면>을 통함이기에 그러하다.

당시는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이었기에 즉 우리의 "죄의 몸이 멸/하기"(롬 6:6) 이전이라 "<마음>에는 원이나 <육신>이 약하다"는 (:41) 말씀을 하셨지만 지금은 십자가 죽으심의 승리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마침내 등극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 선포하셨으니, 주님을 머리로 모신 몸으로서의 교회 그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된 우리 각자로서 180도 반전/反轉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고로 "머리"의 "몸"으로서 동일하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행사하여 발휘할 수 있기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8-20) 하신 분부를 받들고 있음이요 고로 1이를 수행하는 데에만 전심전력을 다할 잏이다.

믿어야 하는 것. 아무리 사실은 그러해도 이를 믿지 않는 한 한낱 공허한 아지랑이 한낱 허공에 뜬 구름 조각으로 끝날 뿐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우리 믿는 이들이 성경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믿는 중에서도 더 확실히 믿기 위해서다.

요컨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빌 1:21) 이 엄숙한 사실이 중요하고 핵심인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셨으니까 다시 말해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생명의 법칙에 따라 영원히 나만을 위하시는, 나의 삶 자체가 되어 계시는데 더욱이나 이제는 완전한 사람이신지라 사람(구원되어 각각 성령 받아 모신)마다 "내 하나님", "나의 주님"(마치 천지 우주 <오직 나와만> 함께 계시듯 하는 모습)으로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가까운 이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도 실상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계심이다. 가까운 정도를 따라서 "더 사랑", "덜 사랑"의 차이가 나게 마련이라면 그 "차이"에서 단연 으뜸이시다. 이 복된 사실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가볍게)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는 것이다" 하신 말씀에서도(마 6:24) 확인된다. 둘 다 사랑하지 못할 바에야 나머지 하나는 버림을 받는 것이고 결국 이는 "미워함"이라는 결론일 수밖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10:37) 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성령론에서 아들께서 어떠하시면 아버지께서도 그러하시니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시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심과 같다.

이러하신 하나님이시니, 인간으로서 다른 그 어떤 인간이나 사실보다도 하나님을 알고 의식하여 공경하며 그 뜻을 사랑하여 행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받
드는 것 이상 가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은 없기에 주기도문에서 아것이 당연히 첫머리에 명시된 것이니 이를 우리도 마음에 아로새겨 둠이 사탄과의 이 세상 전쟁에서 확고한 교두보 확보인 것이다.


다 같은 그리스도 군단/軍團에 소속되어 있어도 그 역할에서 남녀 차이가 있으니 신체적으로 "더 연약한 그릇"(벧전 3:7)인 여성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 선지자"(눅 2:36)의 본을 따라 주로 기도에 역점을 두고 이에 치중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고 합당하다고 보아야. 또한 성경적인 것이다. 말씀 전파에서는 남성에 비해 어느 정도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라 그러하다. 기도의 중요성은 말씀 전파와 쌍벽을 이룬다. 오히려 베드로 사도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무하리라"(행 6:4) 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를 앞세웠다.

세상 만사 특별히 인간사/그리고 인류사/ 복잡다단한 것 같지만 사실상 너무나 간단 명료한 것. 이 모든 혼돈은 인간의 원수 악령 사탄(고유명사가 아닌 "적대자/敵對者"란 의미의 별칭)의 농단 때문. 더 간결하게 말해, 아담 범죄로 빚어진 결과물이다. 아담의 애당초 신령한 "영광의 몸"(빌 3:21)이 죽음 즉 물질에만 국한되는 육체로 강등/降等되었기 때문.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 이런 몸은 무의미그 자체. 문자 그대로 죽음일 따름이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고통/고난만 가중/加重될 것뿐. 단단한 땅위로 걸어다니다가 어쩌다 실수로 발을 헛디뎌 길 옆 깊은 물 웅덩이에 빠졌다 할 때, "어허, 기분 좋다! 오랜만에 신기한 체험을 해보는군!" 하고 물에 떨어진 채로 철버덩거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에 빠지기가 무섭게 거기서 벗어나려는 생각 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전자와 후자로 나눌 때 이것은 비유이니, 신령한 몸을 잃어버리고 이 동물적 육체가 죽음의 결과임을 알게 된 이상 우리가 향후 취할 생활 자세를 바로잡아 줌인 바, 세상 사랑과 관심사를 일절 끊고 오직 주님 일에 전심전력으로 임하느냐(후자) 아니면 여전히 이전 세상 일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던 그대로이냐(전자), 전자일 경우 이는 "미친 마음"(전도서 9:3)으로 낙인 찍혀 천국 노정/路程에서 영구 탈락만이 운명 지어질 뿐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대로의 우리 염원과 우리의 실제 생활에 어떠한 괴리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이 곧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듦"(눅 18:17)이요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천국 입국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 은혜의 선물로서 믿음으로 값 없이 얻는 영생 구원이 바로 이를 전제/前提하고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됨은 예외없이 하나같이 생명의 법칙(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만을 위함으로써 쌍방 다 자기 자신을 결코 위하지 않는)을 준수하기로 되어 있는 "언약"(호세아 8:1) 관계에 들어감이기에 그러하다.

이 성경적 사실 곧 하나님의 계명("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ㅡ요 15:10) 지킴은 없이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인위적 교리 즉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거짓말을 더 믿어 로마서 7장 24절을 "구원 받은 바울의 체험"이라는 둥 허탄한 소리를 하는 자마다 "헛되이 믿는"(고전 15:2/고후 6:1) 것이니, 너무 늦기 전에 경고를 받을 일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장사지내진 것이니 이론적으로만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 주님 그리스도 친히 그 부활하신 몸으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문자 그대로 "한 영"(고전 6:17)으로 하나되심이 "성령을 선물로 받음"(행 2 :38/ 10:45), "성령 세례"(행 1:5/11:16/고전 12:13),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해 모심"(고후 1:22)인 것이다.

이같이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 사는 것은 주님의 생명과 삶 즉 주님 친히 날의 소유가 되심으로써이니(그 증거가 나 위하신 죽음이라 이렇게 한 번 이루심은 영원 불변), 나의 삶과 죽음 또한 영원히 그와 같이 주님만을 위함이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한 그대로다.

이런 필수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 그 어떠한 "은혜로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이든 자기 기만이요 인위적 교리에 불과하고 무의미할 뿐 오직 바벨론 신학의 속임수일 따름이다. "구원 받았다"는 "신앙 고백"의 거의 전부가 오늘날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모든 사람은 대오각성해야.
이 3위1체를 기반으로 하는 생명의 법칙 즉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는 각자의 의지 여하로써 결정될 일이지 다른 요소는 일절계입될 여지가 없다. 주님 친히 명백히 하신 대로 주님께 대한 사랑 유무 그 여하로써만 좌우될 뿐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요 14: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15). "나를 사랑치 않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함이니"(:24).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식으로 주님을 오해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가 됨을 왜 눈치 채지 못하나.

그런 경우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안개 잡으려는 듯 손만 내어밀어 흔드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해 못하는, 그래서 빈 말을 곧잘 하는 상대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거짓말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23)ㅡ이 구절은 우리 각자 안에 성령으로 오심을 말씀하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뜻대로 행할"(마 7:21)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도 않는데 어찌 그것을 "회개"라 하겠는가! 회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의요 결연한 실천이 아닌가. 회개하는 자만이 세례 받고 세례 받아 죄 용서 받은 깨끗한 마음에야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물론(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핵심 부분이다) 이 순종은 평소 이전 같으면 나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심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 나의 것이 되는 순간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내가 행사하는 내 소유가 되어 주심으로 100% 가동되기 때문.

모든 기도의 특징과 핵심은 다음 사실에 있다. 즉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 것이다"(에스겔 36:36,37) 하심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신 그 약속을 우리 위해 이루시려 하고, 우리는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그와 같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가 <동시에 양손바닥 마주쳐 소리 나는> 이치대로 반드시 하나님 보좌/寶座 앞에 상달/上達되어야 하는 생명의 법칙에서의 필연 과정인 것이다.


2025년 9월 25일 목요일

주기도문 명상 (1)

 https://youtuhttps://youtu.be/XVtZmktjhjs?si=wK4Uo8z9HVBc2Pm2.be/XVtZmktjhjs?si=wK4Uo8z9HVBc2Pm2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아버지 나라가 임하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는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저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자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저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악에서 건져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마 6:9-13/눅 11:1-4).


문제 해결을 위해 소원을 풀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가 되지 않았더면 이런 기도가 없었을 것은, <그럴 필요 필요가 없기 때문>. 오직 감사와 찬양만이 일상 언어가 되었을 것이기에.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지 않아 여전히 아쉬운 점이 남아 이를 호소하는 의미가 될 것인즉 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럼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소원이 절절하다 할 수 있느냐 하면 주님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이를 적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각종 악에 의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시고 있고 우리 위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뜻이 감히 묵살 무시되고 있기에, 따라서 인간 세상에 무질서가 자행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권위가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아담 범죄 전 신령한 몸이었을 때는 최소한 죽지 않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할 필연성도 불가항력도 없었으나 지금은 당장 생명의 위협을 받는 실정인데다 기계젹 동물적본능이 자아중심의 죄성으로 작용 완전 지배함에 따라 "죄의 몸"(롬 6:6)까지 되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것이다. 이에 못지 않은 비극적 현실이 또 있으니 원수 사탄의 철통 지배와 폭압적 간섭이다.

신령한 몸이 망가진 것만 해도 원통한데 설상가상으로 원수에게 "절하여"(눅 4:7) 섬겨 그 죄악의 이기주의에 장단 맞추지 않고는 "내 세상"이라 하여 행세도 못해 평생 죽어 지내는 판이라 고생이 자심하다. "약한 자", "천한 자", "없는 자"의 멍에와 서러움에 짓눌려 지내는 고달픔이여!

"이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십사"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끝까지 <견뎌 이기도록> 힘을 주시기를 간구함이 진정한 문제 해결의 단초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밤낮 없는 소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아무쪼록 각자의 심령에 심겨져 발아/發芽디어 영생 구원으로 열매 맺기를 바라는 일편단심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일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결실로 인도하심 받기 위함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 기도와 간구의 <전부>요 달리 무엇이 또 있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해 이것만이 이 나그넷길의 우리 유일한 관심사여야 마땅한 것이다. 그 외의 것은 무엇이든 일체가 무의미요 시간 낭비이니 하나님께 바친 내 시간 나 자신임을 감안할 때 하나님 앞에서의 엄청난 불손 불경이 됨을 우리 함께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

인간으로서 유일무이의 요건은 하나님의 이름 높여 거룩하게 여김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각 사람의 심령과 마음에 뿌리 내리게 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는 것이다"(눅 17:20,21) 하신 대로, 다시 말해 아담이 "잃어버린("빼앗긴")"(눅 9:25) 신령한 몸으로의 복구, 복귀, 회귀, 회복을 의미함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영계/靈界 곧 에덴은 이미 오래 전에 창조되어 있음이다. 인간을 위해 창설하신 "동산"(창 2:8)도 그대로다. 오직 인간의 몸만 썩어 죽어 없어지는 동물적 육체가 되었을 뿐이다. 고로 일구월심 우리가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동경하여 사모해 마지않아야 하는 것은 <신령한 몸 되찾기>이다. 주님께서도 "너희 중 몇은 죽기 전 <하나님 나라>를 볼 자도 있다" 하신 후 신령한 몸으로 변환하심(모세, 엘리야와 더불어)을 제자들에게 보이시지(마 17:4/막 9:5/눅 9:33) 않았는가!

"인자가 그 왕권/王權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마 16:28) 하셨으니 곧바로 이 <메시야 왕국>을 지칭하심이다. '천년 왕국'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다. "천년 왕국"이라 함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의 기간인 1천년을 말함이다. 즉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도 천년간 모든 인간의 선악을 다루어보신 다음 영원 세계를 시작하시기로 처음부터 정하셨던 바로 그 기간인 것이다. 그런데 아담 자신이 볌죄하는 통에 6천년간이나 지연되었다가 이제 주님 재림으로 비로소 그 예정되었던 천년 기간이 시작된다는 의미일 뿐.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임함을 12제자 중 일부(베드로, 야고보, 요한)가 볼 것이라 말씀하신 후 짬/틈을 들이신 것도 마태와 마가는 "6일 후"라 했고 누가는 "8일 쯤" 뒤라 기록하여 상충하는 것은 이렇듯 중요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건 발생임에도, 서로 사전/事前 입맞추기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점에서 의의가 자못 깊고 크다. 누가만 틀리게 말해 즉 확실하지 않아 "쯤"이라 했으니 딱 부러지게 "6일"이라 한 쪽이 정확함이 드러난다. 모든 성경 기록이 진실임은 이러한 4복음서 저자들의 사전 조율 짜맞추기가 없었다는 데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막 10:15/눅 18:17) 하셨으니, 세상 삶도 즐기고 더불어 영생도 한다는 바벨론 신학의 안일하고 느슨한 마음 가짐, 축복 받아 세상 살다가 구원도 덤으로 받겠다는 욕심은 황당무계의 사탄의 옛 에덴 거짓말(아담 부부를 죽음에 몰아 넣은)인즉 양자 택일하라! 취사선택뿐임을 명심하라, 내 영혼아! 어린 아이는 단 한 가지에만 골몰하는 법이기에 "단순하다"는 것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3).

"한 우물만 파라"는 것은 여러 일을 동시에 벌이면(하던 일을 자주 바꾸거나) 어느 하나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성과가 없은즉 한 가지 일만 택하여 집중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니 "천국 받드는" 것도 이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다. 세상 일도 재미 있고 천국 가는 것도 버릴 수 없는 이런 양다리 걸치기로는 절대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음에 유의하라는 것이 본론의 절절한 호소인 것이다.

2025년 9월 24일 수요일

그대들이 똑똑한 지식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숨기시기> 때문에 하나님 부정하고 성경을 폄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학문적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알려 주심으로써만 그 때 비로소 알게 되는 분야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신령한 몸을 잃고 갑자기 죽음을 당했으니 모든 것이 끝이 나버렸는데 할 말이 무엇인가. 생명 아닌 "죽음"인데 완전한 비정상인데 도대체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에게서 대관절 무엇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이 점을 항상 인식하여 세상에 얼리는 것이 전도자의 제1차적 임무다. 즉 아담 범죄로 인한 죽음의 결말이 이 동물적 육체라는 사실이다. 죽음의 확고부동의 증거가 이 가시적 물질로 된 육/肉인 것임을 아는 것이 이 21세기 최대 지혜 중의 지혜다.


이를 알려주지 않는 한,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무식과 무지의 무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는 바벨론 탈출(계 18:4)의 때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을 언제 어디서든 맞을 시점이기에 다급하게 천사 군단이 사탄의 세력을 강압적으로나마 분쇄하여(계 12:7-9ㅡ"하늘에 전쟁이 있어") 실력 행사를 통해 열어놓은 문을 통해 가까스로 내비치는 진리의 광채이기에 이 정도나마 알려진 것이지, 이제까지 악마의 암흑 속에만 갇혀 지냈던 실상을 지금 모든 세상은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신령한 몸의 뇌 작용은 동물적 육체로 된 뇌로써의 지각 활동과 비교조차 불가능한 것임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신령한 몸이었을 때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환하게 밝혀져 알고 있는 고로 어느 누가 굳이 일부러 가르칠 필요도 없이 그 스스로 자동적으로 하나님과 교감할 수 있었던 것이나, 아담 범죄 후에는 사태가 180도로 뒤바꿔졌고 더구나 원수 사탄에게 지배 당하고 있으니 오죽 하랴. 이 엄청난 사탄의 방해 공작은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에서의 불가항력적 당연 결과물이라 원리원칙을 고수하시어 공평공정을 위주하시는 하나님으로서는 달리 어찌하실 도리가 없으시다.

이 순간에서야 이 점에 겨우 착안하는 것이나 늦지는 않으니 독자들이여, 깨어나시라! 사탄이 방해하여 좌우지하는 세상에서 과학자가 하나님을 증명해내지 못한다. 비록 그렇게 할 수 있다고쳐도 악령들이 그들 입맛 따라 조종하는지라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될 것이 뻔하기에 아무 덕이 되지 못한다. 고로 세상의 지식인, 피상적인 학문이나 자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진리를 "숨기시는"(눅 10:21) 하나님이 되실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즉 친히 계시해 주시니까 인간이 겨우 알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진리 계시에서 하나님 존재 관련한 진실도 계시 차원에서 3운법칙을 중심한 짝의 법칙(3위1체의 만유 기본 원리)도 알려 주신 것이다. 한 특정 개인의 변설이나 지식이나 두뇌 작용이 아이다. 하나님 친히 나타내 주신 계시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관련된 모든 성경 해석을 계시 차원으로 수용하지 않는 한 영원한 암흑 즉 "바깥 어두움"(마 8:12/22:13/25:30)만이 그 영구 불변의 운명으로 낙착될 것일 수밖에 없다.

성경대로만 하면 금생과 내생 막론하고 만사태평


양심은 하나님이 생래적/
生來的으로 정해 주신 불문율/不文律임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롬 2:14,15).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니...저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던"(요 8:7-9)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다 성경이라는 성문율까지 이중으로 덧붙여 주신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선악간의 판단을 본능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이를 가르치려고 함은 하나마나한 헛수고일 뿐이니 악을 응징함으로써 이른바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것은 약발을 받지 않으니까 공연히 시간 낭비 헛수고하지 말고 오직 본을 보이는 데에만 힘쓰라는 성경의 <경고>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등등의 <지혜의 말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부끄러워 하도록 만드는 것만이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직 시종일관 사랑을 베푸는 것만이 유일한 대책이자 무기/武器이니 적극 활용할 일이다. 길을 두고 왜 뫼(산의 옛말)로 가려는가? 길을 가리켜 주셨으니 길 따라 가면 될 것 아닌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대우를)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남이 네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마 7:12)라 하셨으니 바로 이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22:37-40)이라 하신 그대로이다. 

2025년 9월 23일 화요일

항상 감사합니다






 

2천년 전통의 성경의 진실성 자체 증명

창세기의 남녀 창조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것이다"(창 2:24)란 표현을 두고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동물적 육체로 만드셨기 때문이라 오해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그 앞절 23절까지만 아담이 한 말이고 이 24절부터서는 성경의 설명입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설명은 사탄을 계시록에서처럼 "용"이라 하지 않고 창세기에서 단지 "뱀"으로만 표현하는 것과 맞물리는 것으로서 계시록에서 "옛 뱀"(계 12:9/20:2)이라고 한 것과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옛"이란 말이 덧붙여진 것은, "오래 전 세월로서 창세기에 에덴 관련 기록이 나타났던" 당시 "뱀"으로 표현된 바로 그 존재를 가리킴이기에 그러하고 바로 그 뜻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창세기에서는 계시록에서처럼 "용, 마귀, 사단"이라는 주/註를 달지 않고 단지 "뱀"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느냐 하면, 이 대목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아담의 <범죄 전>과 <범죄 후>의 양상이기 때문. 즉 범죄 후에는 "죽음"(창 2:17) 곧 현재와 같은 동물성 육체이니까 범죄 전에는 "죽음"이 아니므로 그 정반대인 생명이라 동물적 육체 즉 "육의 몸"(고전 15:44)이 아닌 "신령한 몸(:4 4) 즉 "영광의 몸"(빌 3:21)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칭 원리(짝의 법칙)를 따라서 풀어 나가고 가름하게 되면 논리가 뚜렷한 설명이 가능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사탄을 "뱀"이라고만 한 것은 아담 범죄로 현재 모든 인간이 동물적 육체가 되어 있어 이를 표준하여 영물로서의마귀 사탄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이그렇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창조된 인간(아담)은 하나님 창조에서 그 절정점/絕頂點을 이루는 것이기에 여기서부터 이 자연계와의 대칭 구조를 형성하시게 됩니다. 즉 자연계와 초자연계. 육적인 것과 신령한 것.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 영원성과 시한부.

그리하여 그 시발점으로 인간(아담)에게 영원성의 영혼을 조성하신 다음 그 육체도 그에 걸맞게 신령한 몸이 되도록 에덴에 아담을 위한 한 터전("동산")을 창설하신 후 거기 아담을 두시어 거처하게 하신 것. 이 동산의 성격 또는 본질은 그 동산 중앙 즉 중심부에 생명과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는데 예컨대 이 생명과 열매를 먹으면 영생할 수 없는 생물(피조물 중에서)이 영생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영적/靈的 속성임이 드러납니다.

이는 "6일" 창조에서 지금까지 작업(창조)하신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설명이 되고 또 성경의 설명에 "에덴에다 한 동산을 지으셨다" 했으니까, 이 "에덴"은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당연히 유의하게 되는 것이 있으니 성경에 "스랍(seraphim/복수형)과 그룹(cheruphim/복수형)"이란 존재는 나타나지만 이 피조물들이 창조된 내력이 창세기든 그 어디든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일정 부분 성경에는 생략된 것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성경이 그 주제가 오직 인생 구원의 방법을 알림에 있는 것이지 무지한 인생들을 일깨울 목적의 단순한 지식 전달에 있지 않음이 명확히 입증됨입니다. 이것은 중요하니 <성경의 진실성>의 변박 못할 <자체 증명>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만일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면 절대로 이런 부분이 남겨져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왕 지어내는 이야기이니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미주알고주알 꾸며 절대로 엉성하게 보이지 않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지적처럼 스랍/그룹 관련해 뻥 뚫려 있는 공간을 어수선하게 남겨두지 않는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성경이 거짓말이라면, 어느 한 구석에라도 거짓말이 있다면) 뜻입니다. 이 점을 널리 홍보하시기를.

관련해 상세한 설명은 이전에 자주 강조했으니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2천년전부터 즉 신약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의 <성경의 확고부동의 진실성 자체 증명>에만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천년 전통"이라 함은, 성경의 이 "생략 부분" 관련한 해명이 있을 법한데도, 기대할 만한데도 여전히 없으므로 이를 강조하는 뜻입니다.

  

2025년 9월 21일 일요일

나를 구원하신 목적(뜻)이 있으니 이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 가는 것 불가능(마 7:21) ㅡ( 2)


잠시 머무는 곳이요 스쳐 지나가는 것뿐인 이 세상인데 그래서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장차 오는 영원 세상에서의 거취 즉 영원한 생사/生死 여부인지라 항상 우리 관심은 <보이는 세상>과 관련된 것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 세상에 있는 것.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가시적인 이 자연계 물질적 세계만 존재한다고 믿는(사탄의 거짓에 속아)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인 몽상가 또는 이상주의자로만 비쳐져 조롱과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어 있으나 오늘날 21세기 3운법칙과 대칭성 원리가 청천백일하에 드러난 마당에 더 이상 그런 거짓됨은 발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천국이든 불 못이든 일단 들어가야 세상이 영원 세계로 변천됨이 아니라 만유 창조 때부터 양면(대칭)으로 창조되었음이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상보성 원리로 확인되기 시작하여 "3위1체"로써 하나님이 아주 쐐기를 박아 주신 것이다. 그런즉 성경이 밝히는 대로 에덴이 초자연계이고 아담이 천사(영물)들과 같은 신령한 몸으로서의 영생하는 자로 처음부터 창조되었음이 드러났으니 이를 통틀어 "21세기 표적과 기사"라 한다. 이로써 악마 사탄의 거짓 즉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로 성경이 묘사한 실상이 실제 어떤 규모인지 이제 드러나기 시작함에 따라 우리는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바다.

이로써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구원과 관련해 금과옥조로 받들어 철석같이 믿어 왔던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선물"이란 말이 얼마나 왜곡되어 왔는지를 인식함에 따르는 충격도 "크다"는 말로는 도무지 마무리 못할 정도임에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다. 하나님 관련해서 그 핵심이라 할 "하나님의 뜻 순종"을 이른바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란 틀 속에 처박아 놓듯 하여 통째 갖다 내어버린 무지막지한 세대여!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아 오늘날처럼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이 절대적인 의미가 되는 부분을 헌신짝처럼 취급하였구나!

이런 것이 에덴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사탄의 피 비린내 나는 살인행위의 전말이다. 오늘날 "바벨론 신학"으로 회자되는 그 정체인 것이다. 한 마디로 뒤죽박죽이요 엉망진창이다. 그렇게 참담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고고/孤高하고 엄연하시다. 그 거룩하고 웅장한 자태를 오늘 "마지막 때" 드러내신 것이다. 고로 누구든지 자신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할진대 더 이상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넋두리를 내뱉지 말 것이다. 그것은 겸손도 경건도 아니다. 사탄에게 장단 맞추는 한낱 부끄러운 치욕과 무지무식의 작태일 뿐이다. 이제는 본연 그대로의 진리를 알았으니 진실대로 말하고 진실을 가르치라. 그리고 더 이상 결코 위축되지 말라. 더 이상 맹목적으로 악령과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에 놀아나지 말 것이다.

"죄의 몸이 멸/해진"(롬 6:6) 것이 아닌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6) 않았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인데 감히 메시야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려는가? 감히 성경 기록의 진실을 폄훼하려는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5:24).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6:14)고 하지 않았나? 순수하신 말씀 그대로만 따르라. 순수하게만 따르라.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마 18: 3) 것이다. 결단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목적(뜻)이 있으니 이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 가는 것 불가능(마 7:21)


상반/相反은 상보/ 그리고 상합/
. 그러면 선과 악이 상반인데 이 둘은 상보 또는 상합인가? 진리와 거짓이 상반인데 그렇다고 이 둘이 상합이고 상보인가? 고로 여기서 반드시 전제/前提할 것이 있게 된다. 즉 3위1체의 법칙이 창조물이라는 것이니 다시 말해 저절로 우연히 생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만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창조주께서 가장 먼저 그 아들을 낳으시고 본질(본체)과 형체로서의 짝(대칭)을 이루신 다음에, 자기의 형상으로서의 이 아들로 <말미암아> 만유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성자께서는 성부의 <이름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여기서 삶(생명)의 법칙이 비롯되고 비로소 상보/상합이 이루어지니 주님 말씀하신 바 곧 "하나"(요 10:30). 이 곧 창조주의 모습이시니 이를 가리켜 "3위1체"라 함이니 영원 불변이다.


바로 이 법칙으로써 만유를 창조하셨고 현재도 이 원리를 따라 만유를 운행하심이다. 즉 생명의 법칙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일절 용납이 되지 않으니 죄악시되는 것. 생명이 아닌 죽음에 속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생명'과 '죽음'의 대칭 관계를 이루어 '상합'/'상보'를 이루게 됨(이 우주를 구성하는 양/兩 기둥이라는 측면에서)이니, 영원한 생명 세계와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서의 "불 못"으로 확인되는 바가 그것이다. 거짓말 등 악을 행한 자는 '죽음'에 소속되니, '생명'과 상반이다.

<생명의 법칙>.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골 3:17) 의미를 여기서 충분히 음미하게 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것도 같은 맥락. 하나님께서 나만 위하시니 나도 하나님만 위하고 나를 일절 위하지 않는 이것이 '삶'이요 '영생'이다.


'하나님 의식'이야말로 생명의 환희요 쾌락인 것이다. 하나님 친히 "생명"이시니까. "하나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니까. 그러면 지금 내가 '하나님 의식'인데 왜 그런 넘치는 기쁨의 감흥을 피부로 느낌이 없느냐 한다면, 지금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너희가 죽었고"ㅡ골 3:3)의 때이기에 생명이 "감추어져"(:3) 있음이다. 


죽음의 때인지라 오직 생명의 일은, 구세주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태어나 새로 창조되고 나 자신 그렇게 된 다음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구원의 희소식(복음)을 듣게 하여 믿어 구원 받게 하는 것 외 달리 무엇이 있을 수 없음이 확실한 것이다.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이 죽음의 때를 생명으로 착각하지 말라, 자아중심의 죄와 악을 범하지 말라고 성경이 끊임 없이 경고함이 이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알고 믿는답시고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마 7:21)고 엄중히 경고하심이 이를 말씀하심이다


이 세상을 삶이라 착각하여 축복 받아 잘 살다가 영생한다는 망상은, 에덴에서 여자를 꾀어 전체 인류를 도탄에 빠뜨린 사탄의 해묵은 그리고 끈질긴 속임수, 거짓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허잡한 되풀이일 뿐이다. 절대로 이 경고를 허수히 가볍게 듣지 말 일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감추어져" 있으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거짓된 이 세상에서 악령들이 꽉 차 방해하는 틈서리에서 성경 외에서는 전혀 듣지 못한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우리 자신을 말씀으로 세뇌시키기 위해서.

과거 모세 시대에도 말씀이 임하실 때 시내산에서처럼 산이 갈라지고 불꽃이 튀것만때만 아니라, 엘리야 당시처럼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세미한 소리"(왕상 19:11 12)로 당신의 말씀을 나타내신 것처럼 오늘날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전 4:6) 하시는 때이니 각별히 조심할 일. "신사도운동"이니 "하나님 음성 듣기" 등 따위의 야단스러움은 전혀 필요치 도 않고 실족거리만 될 것뿐이다.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골 3:17), 주님 친히 하시듯이 하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여"(고전 7:32)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고후 5:9) 것으로써 충분한 것이고 그것이 전부이다. 주님도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同行한 것처럼(창 5:24), 내 주님(나와 똑같으신 사람으로서의)과 기거/起居 동작을 24시간 함께 하여 "나를 세상에 보내신ㅡ이것이 우리 구원 받음의 의미이니까ㅡ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먹을 양식"(요 20:21/롬 14:7-9/요 4:332-34이라 유일한 생명의 낙 그 자체임을 마음에 아로새겨 항상 유의해야.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ㅡ"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임이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ㅡ"나의 먹을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여 이런 말씀들이 내 마음 생명수로 흘러흘러 넘치게 해야.

2025년 9월 19일 금요일

에녹과 엘리야ㅡ세례 요한을 "엘리야"라 하신 이유 (2ㅡ끝)



 

요약해서 말하면, 왜 에녹과 엘리야 이 둘은 죽음 없이 곧장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어 이 세상 생애를 마쳤느냐 그 이유가 중요하고 이를 설명하는 것이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던 바로 그 내력이었던 것이다. 즉 메시야 우리 구세주님께서는 아담과 대칭되시는 "마지막 아담"이 되심으로써 우리 구원이 되심을 강조하심이다.  "아담"의 총체적 특성은 그 신령한 몸(죽지 않는)에 있음이다. 바로 여기에 에녹과 엘리야 오직 둘이서만 신령한 몸으로 승천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전자는 "첫 사람 아담"(범죄 전에는 신령한 몸이었으니까)과, 후자는 "마지막 아담"(고난 받으신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심)과 각각 직결된다. 이유 없이 <에녹>과 <엘리야>라는 특이한 존재를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에녹은 아담이 죽은 후 곧이어(아담 사망 후 57년만에) 세상을 <두 번째>로 떠난 인물이었으니(가인/라멕의 살인 사건으로 인한 불상사를 제외하면), 이는 인간이 동물적 육체로서의 죽음이 절대로 정상이 아니라는 실상을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경고이셨던 것.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同行한 의인으로서의 에녹, 죽음을 모르는 영생하는 자로서 세상을 떠나게 하심으로써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신 것. 이 에녹에 대비되면서도 또한 에녹과 같은 경우(죽음 없이 영생하는 자로 세상을 떠나는)가 바로 엘리야.

이 엘리야가 에녹과 대비되는 이유가 바로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세우신 이유라 할 것이니,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기 직전 그 떼에 맞추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메시야 오셨음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는 에녹이 아담의 죽음 직후 세상을 떠난 그 <직후>와 맞물린다. 당시 거의 천년 수명/壽命의 시대에서 57년이라는 세월을 "직전"/"직후"라 해서 어색하지는 않다. 둘 다 "아담"과 직결되는 점에서 공통이다. 에녹은 "첫 사람 아담" 관련이고, "엘리야" 곧 세례 요한은 "마지막 아담" 관련이다.

단 여기서 고려할 것은 첫 사람 아담과 달리 마지막 아담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사람이시니, 이에 걸맞게 엘리야 역시 그런 특이점이 없을 수 없다. 즉 이 마지막 아담에 비하면 <단출할> 수밖에 없는 첫 사람 아담을 상징하는 에녹과 달리, 화려한 경력과 능력과 시대적 사명감에 충만한 엘리야가 이 위치에서 적격이다.

그런데 실제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시대상/時代上으로 그 시간적 격차가 너무 크다. 다시 말해 <엘리야를 세례 요한의 위치에다 끌어놓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는데 이를 위해서는 세례 요한과 엘리야를 처음부터 동격시/同格하여 예고/豫告하는 것밖에 없어 그래서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의 예언이 불가결인 것이다(말 4:6/마 11:14/요 1:2125).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능력 있는> 엘리야와 비등한 인물로서 <아무 능력의 행사도 없는> 세례 요한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만일 어떤 능력이라도 행하게 되년 메시야 주님의 능력 행하심과 중복이 되고 혼선을 빚음이 되어 메시야적 유일무이의 특출하심이 제대로 드러나실 수 없고 불필요하게 가려지기 때문. 오직 한 가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메시야 구주님과의 공통점>으로서의 특징이 있으니, 그것은 곧 <죄인의 손에 잡혀 고난 받으심>. 바로 이 모습을 세례 요한으로서 따름이 되었으니과연 이로써 충분한 것이었다. 이보다 더 훌륭하고 합당한 것은 없는 것이다. 즉 헤롯 왕(사실은 헤로디아였지만ㅡ마 14:3)의 손에 잡혀 투옥되고 끝내는 목이 잘리는 참변을 당한 것.

이와 같이 엘리야와 에녹의 인류사상 단 둘만의 특이한 생애 마지막 장식의 피날레는 이상 설명과 같은 심오한 뜻을 함유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세례 요한과 엘리야와의 <기묘한 얽힘>이야말로 중에서도 가히 백미/白眉라 할 것이다. 에녹은 첫 사람 아담의 죽음의 특질(범죄의 결과물)을 알림이었고, 엘리야는 그런 죽음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마지막 아담의 구주되심을 선포함(우리 위한 고난 받으심을 통해)이었던 것.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그 무엇이든 이와 같이 무의미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혈과 육(flesh and blood)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계승/繼承되지 못하고 썩는 것(자연계 물질의 육체)은 썩지 않는 것(초자연계 물질로서 영생하는 육체)을 계승하지 못한다"(고전 15:50) 한 대로 엘리야와 에녹이 자연계 육체로는 승천할 수 없었음을 되새겨야. 이런 점을 보아도, 세상 종교의 막연한 "구원, 영생"은 허구에 가득 찬 거짓, 논리도 없는 인간의 망상뿐임이 입증되는 것이니 오직 "마지막 아담"을 통한 다시 출생함과 새로 창조됨으로써만 이 썩음과 죽음이 영생으로 회복되는 것임을 세상 모든 사람은 알아야. 이 모두 아담의 범죄로 파탄이 남으로써 인간의 죽음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니, "영적 죽음"이라면 "만유 회복"(행 3:21)이라는 거창한 의미가 있을 수 없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을" 뿐인데 무슨 "만유 회복, 운운"이란 말인가. 죽지 않아야 할 모든 인간의 몸(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문자 그대로 썩어 망가진 탓에 만유 창조가 본질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만유 회복" 인 것이다.

모든 창조의 최고 절정 그 완성품으로서 인간이 창조되어 영생하는 존재로 완결되었기에 7일째 날 쉬셨는데(안식), 하나님이 다시 일하실(창조를 다시 시작) 정도가 됐으니(요 5:17) "영적 죽음"이면 인간의 영(혼)만 손보시면 될 일이지 만유까지 손대실 필요가 없지 않은가! 삶을 누리도록("산다"는 것은 자연계 동물이 아닌 인간은 영생을 의미) 창조되었는데, 죽는 존재로 돌연 변이를 일으키는 사고가 생겨났으니 이로 인해 땅까지 저주를 받았기 때문(창 3:17)에 "만유 회복"인 것이다.

마귀는 "구원"을 아주 괴상망칙한 것으로 그 의미를 변질시켜 마치 "영생(구원)"만 얻으면 모든 것이 종료된 것처럼 엉뚱하게 고깔을 뒤집어씌워 놓아 바벨론 신학이라는 거짓말을 지어냈건만 인생들은 무작정 피동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그런 줄로만 아는 참담함만 먹고 마시고 취하여 인사불성이 된 이 비절참절의 비극이여!

"구원받아" 당장 지금 죽어도 영생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 하여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영생이라는 주먹구구식 사고방식에만 온통 지배되고 있다. 성경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지금 "죽어 있다"(골 3:3)고 하지 않았는가! 메시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있는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살아나셨지만 그러나 "감추어져"(:3) 계신다. 주님의 부활/승천이 "감춰져" 있음은 나도 "함께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그 <부활 승천>은 감춰지고 <죽어 무덤에 있는 것>만 드러나져 있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더 다시 죽은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우시고 망극하신 하나님 은혜로 다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감춰졌으니까 당장 감각되는 것은 <죽음>이지 <생명과 삶>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주님과 나)의 부활/승천이 드러나질 때에는 반드시 초자연계 몸으로써이지 이 자연계 육체로써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 뜻을 말함이다.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무릇 "동물적인 육체"는 일체가 인간에게는 "죽음"인 것이니 이래서도 항상 강조되는 것은 "인식 전환" 이다.

바꾸어 말해 이 자연계 몸은 <죽음의 대명사>라는 것. 메시야께서 오심으로 이 의미가 정말 제대로 살아난 것이다. 메시야 오시기 전에는 온 천지가 암흑(행 26:18)이라 분간을 못했었다. 이제 "마지막 아담" 이 오심으로써 <아담>의 실상이 드러나자 모든 사연도 대낮처럼 밝혀져 정상적으로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다. 이 자연계 육체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무덤"이라는 것을. 우리(아담과 나)의 죄로 인한 형벌로서의 죽음이란 측면 외에도, 이와 같은 본원적 의미의 죽음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난 것.

<형벌>만의 의미라면 죽음으로 죄값이 치러진 이상 우리가 이제는 삶을 누리는 자가 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헌데, 여전히 "죽은 자"다. 범죄 전 아담의 모습을 대변한 에녹과, 범죄 후 아담의 모습이 되어 죽으시고 장사지낸 다음의 부활로 정상적인 아담을 회복하신 "마지막 아담"의 모습을 미리 대변한 엘리야의 대조적이고 대칭적인 연관성을 구현한 것을 제외하고는 노아, 욥, 아브라함, 모세 등 모든 인생이 "죽은 자" (마 8:22)로서의 형상인 것.

그 사실이 세상에 오신 "마지막 아담"으로 확인되었다는 것뿐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 누구든 주님 다시 오심으로써 아담 본시(범죄 전)의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됨으로써만 이로 말미암아 "산 자"로서의 모습으로 비로소 정상화되는 것이다. 

엘리야는 우리 주님께서 "영광의 몸",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실 때 역시 그런 몸으로 모세와 함께 나타나는데, 주님은 이 변형/變形됨을 "인자가 그 왕권/王權을 가지고 오는 것"(마 16:28),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막 9:1), "하나님의 나라"(눅 9:27) 등의 의미로 표현하셨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0,21) 하심 그대로의 뜻.

다시 말해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라고 하여 별도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인간(아담)을 창조하신 대로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삶(생명) 자체를 말씀하심이 이로써도 확인된다. 고로 우리 "구원" 은 비로소 영광의 몸으로 변천하는 상황을 가리킴이 아니라 아담이 범죄 전 누렸던 신령한 몸으로의 복귀, 환원임을 오늘날 백번 강조해도 좋다.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으로서의 이러한 몸은,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경계를 순간적으로 무너뜨리고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조화를 부리는 특징이 있으니 주님의 부활하신 몸으로도 증명된다. 부활로 몸을 일으키실 때는 줄곧 초자연계 속성을 나타내시면서도 제자들 앞에서는 (나중 바울 사도에게 나타내셨던) 현란하고 눈부신 광채의 모습은 보이시지 않았던 것이다. 자연 물질계에 속한 육체는 그런 초능력이 없다. 썩어 사라지도록만 되어 있는 구조이기에 그렇다. 이런 헛되고 한심한 것에다 목숨을 걸고 버둥거리는 더더욱 "한심한" 인생들이여! 생명과 구원의 창조주 하나님께 시급히 돌이키라! <흙>의 육체에는 "내일/來日"이란 것이 없다. "오늘"이 영원할 줄로 속아 가는 <착각>만이 존재할 뿐이다.
 


2025년 9월 18일 목요일

에녹과 엘리야ㅡ세례 요한을 "엘리야"라 하신 이유

(본게시물은 2020년에 올렸던 것으로서 앞당겨 놓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이유 그 진정한 목적을 <엘리야ㅡ세례 요한>으로 연계시켜 아주 적확/的確게 설명하고 있는 성경이다. 성령의 가르치심이 없으면 글을 두고도 못읽는 것과 같은 
"성경 문쟁자"가 되는 것이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음을 가리킨다. 

"신학/神學"이란 말 자체가 어폐/語弊다. 성경 이해는 학문이 아닌 "계시"(마 11:27). "신학적 지식"이 있어 스스로 "지혜 있고 슬기롭다"(:25,26)고 여기는 자에게는 성경 진리를 "숨기시는데"(:25), 그리고 이것이 확고부동의 "하나님 뜻"(:26)인데 어찌하랴. 오늘날의 "바벨론 신학"이 그 훌륭한 증거가 아닌가!



2025년 9월 17일 수요일

우리 구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삶/생명의 법칙 준수)에 그 핵심이 있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 18:33 -35). "다 마음을 같이하여 인자스러우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는 그 기준이, 이내 곧 사라져 없어지게 될 일시적이고 임시에 불과한 동물적 육체인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정상 세계인 장차 오는 세상의 "신령한 몸"(고전 15: 44), "영광의 몸"(빌 3:21)에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 스스로 <인식 전환>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즉 관심사)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고후 4: 18)하기 때문이니 <가치>와 <무가치>와의 차이입니다. 후자에는 무관심이요 정작 관심사는 전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생명)은 당연히 미래의 영원성에 있지, 찰나적인 이 보이는 세계에 있지 않음은 한밤 중에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한데 어찌하여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이생에 마음과 몸이 매달리고 있는가요?

동물적 육체에 매여 허우적거리는 인생들,연민/憐憫으로 대합시다. "불쌍히 여깁시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용서 못하는 마음은 <생명의 정상>일 수 없으니 버립시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것을 만드셔서 인생들로 완전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죽음이 있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죽음은 짝으로서 "하나" 를 이루기에, 무릇 하나된 것은 동시에 한꺼번에 나타나는 법이 없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둘 중 하나로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죽음이 있으면 죽음 일색이지 생명(삶)은 섞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양자역학 실험에서 입자의 성질이 '파동성'을 띄면 그 상반/相反인 '입자성' 은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생명이 반드시 먼저 오지 죽음이 먼저 오는 법도 없습니다. 짝을 이룬 둘은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선후/先後의 질서를 지키게 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이는 태초에 성부/聖父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낳으심으로써 만유 창조를 시작하심에서 비롯됨이니, <하나님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창조하신 것을 "낳으셨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성자와 약속(언약)을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너만을 위할 터이니 너도 네 자신을 위하지 말고 나를 위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또한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계명"(요 15:10/10:18)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이 취지를 따릅니다.

이를 가리켜 또한 "하나"(10:30)라고 하는 것이니 육체일 경우 "한 몸"(창 2:24)이라 하여 남녀 한 몸이 되면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 되고 더 다시는 남자의 소유가 되지 않으며(고전 7:4) 여자 또한 그러하고, 영/靈의 경우 "한 영"(고전 6:17)이라 하여 주님과 내가 "합하면"(:17) "내게 사는 것이 주님"(빌 1:21) 이 되어 오직 주님만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으며, 주님은 그 사시는 것이 내가 되어 주님 자신을 위하지 않으시니 그 증거가 바로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인 것입니다. 이 원리로 우리가 구원되었은즉 이 불변의 이치로써 우리 구원이 향유/享有됨으로써 영원히 지속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다시 말헤 하나님 계명에 대한 절대 복종입니다.

이 하나됨이 곧 생명/삶의 법칙이라, 기계적 삶의 자연계 동식물을 제외한 신령한 몸의 모든 초자연계 영물(인간을 포함하여)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이러한 언약 관계에 있기에 성경은 아담 범죄를 설명하여 "언약을 어겼다"(호세아 6:7)고 한 것입니다. 성경을 신약(새 약속)과 구약(첫 언약또는 옛 약속)으로 분류함도 이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새 언약에 속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피로 세우신 것(눅 22:20/히 8:12, 13). 

그러므로 값 없이 은혜의 선물로 거저 받은 구원이라 하여 마치 우주 만유를 무조건 다 얻어 현재 누리게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거의 모든 "구원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착각인데, 생명의 법칙을 준수하는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새 창조임을 모르는 무지무식에서 옵니다. "언약을 어긴" 아담처럼 되면 또는 사탄 및 악령들처럼 자아중심 즉 하나님 위한 삶이 아니고 제멋대로 자기를 위함으로 생명의 영원한 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 파탄은 필지입니다.


2025년 9월 16일 화요일

흐르지 않는 물은 웅덩이로서 죽어 간다ㅡ"가나안 성도"들에게 주는 성경의 엄중 경고



물은 흘러야 생명이라 정체하여 고이면 썩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받아 내가 구원 받은 것으로써만 정체해 있으면 썩습니다. 구원 받은 것도 "잃거나 빼앗기게"(눅 9:25) 마련이니까. 계속 흘러 보내어야, 즉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구원 받은 것을 이세상에서 길이 보존하는("잃거나 빼앗기지" 않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마지막 때"라 "내 백성아, 거기(바벨론)에서 나와 그(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시는 명령이 임하신 때로서,
전도해낸 사람들을 바벨론 교회에 보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이시고 지도자이신 "마지막 아담"(고전 15:45) 우리 주님께서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시대로서, 주변에 교회다운 교회가 없으면 내가 전도자로서의 책임 완수 차원에서 전도 대상자를 집 또는 적당한 장소에 모여 가르치면 됩니다.

여자면 여자끼리 남자면 남자끼리 가족이면 가족이 모여,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주님께서 친히 계신다" (마 18:20)고 약속하셨으니까. 주님 계시면 성부 하나님 또한 계시니(성부와 성자께서 언제나 "하나이시니"(요 10:30) 하나님께 예배가 이뤄지고 이는 곧 교회의 시작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핍박이 일상화되었던 초대교회는 오늘날의 <북한교회>처럼 "집 교회"(고전 16:19/골 4:15/몬 1:2)가 일반화된 현상이었으니까. 가장 교회다운 교회로서 21세기 오늘날 그 표본으로 세우신 것이 북한교회를 비롯한 <핍박 받는 지하/地下교회들>이니까. 이 점에 항상 유념해 주시기를. 

2025년 9월 15일 월요일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방법

<진리와 진실> 그리고 이와 상반되는 <거짓> 밖에 없는 그래서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뿐인 오직 2분법으로만 가름되는 이 세상이다. 최소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그러하다. 하나님의 실존 여부는 성경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聖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됨이니 그런즉 저들이 핑계댈 수 없다"(롬 1:20) 한 대로, <보이지 않으시는> (볼 수 없는) 창조주는 <보이는> 창조물이 그 유일한 증거/증명이요 해답일 수밖에 없다.


보이는 이 우주만 해도 너무 방대하여 그 한정된 일부분만 눈에 들어올 뿐 나머지는 볼 수 없는데, 이런 피조물도 '볼 수 없으면서' 이 만유를 만드신 만유보다 크신창조주를 '보려 하는' 당신이야말로 지성적인가, 이성적인가를 묻고 싶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인간은 그런 따위 질문을 하지 않는 법이니 이 하나만이라도 명심해 두라.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특징인 가시적 존재이실 수 없고 오직 불가시적 "영"이신 것이다. 피조물은 아무리 "영물" 이라도 예외 없이 가시성/可視에 속한다. 보이는, 볼 수 있는 증거/증명 중 가장 대표되는 것이 오늘날 21세기에 밝혀졌으니 곧 3운법칙으로서, 모든 인간이 하나하나씩 아주 그 정수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간섭되고 강제되어 그 출생에서 죽음까지
철두철미 관할된다는 확실한 증거/증명인데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입이 백개가 있은들 할 말이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시면 그 만드신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그 유일한 것이 성경이다. 바로 이 성경의 <정확한 해석(풀이)>을 위하여 바로 그 증명 증거로서 이 3운법칙이 이제 필요를 따라 세상에 계시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유일무이한 것일진대 그 의미 즉 정확한 해석도 오직 하나일 뿐이니, 이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진리 아니면 거짓, 거짓 아니면 진실, 오직 대칭으로만 나누어지는 취사선택,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이에만 전념하고 그 외 다른 무엇에든 한눈팔지 말 것은, 하나님의 소유인 내 시간을 도둑질하려는 사탄 악마의 획책에 넘어가지 않는 유일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혜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다" (잠 3:18).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할 것이다"(계 2:7). 

2025년 9월 14일 일요일

생명의 진리에 이르는 오직 하나의 길로 인도하는 오늘날의 길잡이ㅡ그들이 어디 있느냐

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계 17:5)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1)를 가리키며,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5), 그 짐승의 정체로 말하면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8)로서 사도 요한이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겼다>"(:6) 했으며, 나중에는 짐승이 이 음녀를 "미워하여"(:16) 멸젙시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종당에는 바벨론이 사라지게 될 것을 가리켜 계시록은,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18: 2) 했습 니다. 표면으로는 "짐승"이 "음녀"를 없애는 형태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인 것입니다. 진리를 떠나 자행된 영적 음란 행위 곧 일체의 악행에 대한 보응이신 것입니다.

이상 서술된 것을 종합하면, 사이비 교회 다시 말해 바벨론 신학의 바벨론 교회가 초대교회 이후 곧장 나타나 "하나님 섬김"을 표방하여 가장하고, 세상 각국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백성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서고, 실질상 적그리스도 행세(하나님 성전에 앉아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짓거리)를 하는데, 때가 오면 지금까지 "복음"으로 위장해 왔던 일체를 한꺼번에 뒤집어 엎고 몌시야 예수 우리 구주님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으로 꾸며 행세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당장 우리가 척결해야 하는 것은 바벨론 신학 곧 황당무계의 모든 사탄의 성경 관련 거짓말과 속임수이므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4) 하심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거짓됨을 통해 사탄이 노리는 바가, <세상 삶의 사랑> 즉 자기 부인을 무시함에 있고 일반적으로 <범죄(불순종)> 행위를 이 세상에서는 불가항력의 그 무엇인 양 인식하게 만들어 자아중심을 버리지 않게 하는 사이비 성경 풀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행함으로 구원 얻음"과 "믿음으로 구원 얻음"으로만 양분시켜 마치 그 양자 택일로써 영생 여부가 가름되듯 그릇 인식시키는 것, 그리고 로마서 7장 24절의 죽음의 탄식을 구원된 자 곧 바울 사도 자신의 직접 체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니, 왕년 에덴에서 치명타를 입히던 간악한 계략 그대로입니다. 혼란과 혼돈으로 뒤범벅된 너무나도 기가 찬 뒤죽박죽, 엉망진창의 소위 신학("계시"가 아닌ㅡ눅 10: 22)입니다.

주님의 경고 즉 스스로 "돌이켜(나는 신학적 지식에 통달해 있으니 "지혜롭고 슬기 있다"는 일체의 자부심을 버려야ㅡ눅 10: 21)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마 18:3)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숨기시는데" 인간이 무슨 수로 감히 구원을 얻는답니까!

21세기 이 세상 "마지막 때"에 거의 2천년만에 맞는 이런 중대한 전환점의 "때"를 예고해 알리심에서, 그 시대적 특이 사항이 결코 없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에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한 "표적과 기사"(요 4:48ㅡ"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가 필수였듯이.

2천년이 가깝도록 이런 언어도단, 어불성설의 사탄의 거짓말에 휘둘려 왔으므로 이런 끔찍한 사탄의 거짓에 포로되었다가 비로소 해방되는 순간의 중대성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이짚트 탈출에 결코 못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의 "표적과 기사"는 과거와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사탄도 지금 적그리스도의 때를 당해 이전 시대의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규모가 더 큰 초능력을 과시할 채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세기 표적과 기사"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다름아닌 3위1체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 개개인의 생애를 눈금 자로 재듯이 엄격한 원리 원칙에 맞추어 재단/裁斷(옷감이나 재목 등을 치수에 맞게 자르거나 다듬는 것)하듯 다루는 것이니, 이야말로 창조자 하나님의 증명/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리요?

이뿐만 아닙니다. 이 법칙이 아담 때부터 시작하는 등 무조건 정해진 것이 아님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데에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부득불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정해졌음이 명백히 드러났으니, 이렇게 정해진 것을 두고 정신 이상이 어니고서야 누가 "우연"이라 하겠나요. 그 정해진 시점과 목적/의도가 100%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 나자말자 살인 행위부터 일어났으니 아우 아벨이 형 가인에게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천년 가까이 살게 되어 있었으니까(이는 아담이 영생하는 신령한 몸이었다는 증거로서 초자연계적 육체의 기운이 서서히 사그라졌다는 설명이 되는 까닭) 3운법칙이 그 때에도 적용되었다면 아벨이 그렇게 100세 미만에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그런 젊은이의 죽음이, 살인자 가인의 4대손인 라넥 때에 다시 일어납니다. 한 젊은이가 창으로 라멕을 공격해 와 상처를 입히며 계속 덤벼들어 자기가 죽을 위기에 이르자 그 "소년"을 죽여버린 것입니다(창 4:23,24). 이 때만 해도 3운법칙을 아직 정하시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정하셨다면, 아담의 아들 셋의 7대손 노아가 950살에 죽었으니까 당시까지만 해도 천년 가까운 장수를 누리는 때라 "소년"의 죽음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기에.

가인의 4대손인 라멕 이후에야 3운법칙을 정하셨음이 명백하니, 노아의 생애가 SN유형임이 드러났기 때문. 즉 라멕 이후에 3운법칙을 정하셨다는 것은, 라멕의 살인 사건으로 인간은 더 이상 자율/自律에 맡겨서는 안되고 그 생애를 강제로 규제하시어 최소한 구원될 수 있는 기회만은 보장해 주실 필요성에서 비로소 3운법칙을 정하셨음이 입증되는 까닭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에도 3운법칙(왜 3가지 종류이냐 하면 만유가 3위1체의 구조로 되어 있고 또 이 체제로 움직이는 까닭이고 또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3운법칙이기 때문)을 정하실 수도 있지만, 가인의 4대손에 이르기까지 미루시고 3운법칙을 정하시지 않은 것은 같은 살인이라도 가인과 라멕의 경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전자에서는 아담이 동물성 육체가 됨으로 인한 자아중심적 본능이 원인이었지만 후자에서는 남을 미워하여 없애버리려는 악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자기를 위해서도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강요되는 살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강제력의 불가피성이 드러나자 라멕 이후부터 모든 인생들을 3운법칙이라는 일정 틀 안에 묶어 놓으신 것이고 죽을 때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목숨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처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런 상황에서는 "우연"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고 단 한 구석도 발 붙일 틈이 없습니다. 서로 죽이지 않더라도 불의/不意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고 불시의 자연 재해만 해도 엄청난데 모든 개개인을 철저히 감시 대상으로 삼아 죽을 때 외에는 절대 죽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초능력(설사 천사들을 동원하시어 그 작업을 수행하게 하신다 해도)에만 해당되는 것이야 삼척동자라도 능히 이해할 수 있을 일이니까.

더군다나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 즉 3위1체의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 운용이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소한의 구원 받을 시간만이라도 확보해 주시기 위함이라 했지만 네피림은 악령의 분신이기에 구원 자체가 불가능해 해당되지 않으나, 네피림의 직접적 식별은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 때문에라도 무릇 인간으로 태어난 자는 3운법칙에서 예외가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산되어 나오거나 철도 들지 않아 영아로 죽는 경우 네피림인 것이 확증되므로 이런 간접적 식별은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죽지 않으면 또 네피림이 아니라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장수하는 네피림도 많으니 모든 것은 하나님의 관장/管掌 아래 있습니다.

네피림을 식별할 수 없으니까, 유달리 악하다고 해서 또는 천성이 선하게 보인다 해서 또한 이렇다 저렇다로 단정 짓지 못합니다. 극악한 사람 중에도 구원될 사람이 있고 성인으로 추앙 받아도 네피림(히브리어로 단수가 아닌 복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기 전 회개가 선행됨이 필수이므로 선을 행함이 의인됨의 절대 요건임은 불변아라 할 것입니다(롬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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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18:3).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더구나 아담 범죄로 죽고 썩는 그래서 아주 비천한 동물적 육체로서 오셨으니 오로지 나를 위해 물불을 가리시지 않는 일편단심 사랑으로 그렇게 피조물의 형태가 되심도 불사하신 것입니다.

나와 "하나"(요 10:30)되심, "한 영"(고전 6:17)이 되셔야, 그래서 내 영혼처럼 영원히 내 안에 계셔야 아담 범죄의 동물적 육체를 벗어나 인간을 애초 창조하신 대로의 "신령한 몸"(고전 15:44), 영생하는 육체로 내가 환원, 복귀(이것이 "구원")될 수 있기 때문. 성자 하나님께서 그리 하셨으나, 성부 하나님 또한 똑같은 십자가 고난/고통을 당하셨으니 성부자/父子께서 "하나"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자께서 처녀의 태/胎에 들어가실 때만 분리되어 계셨고, 이후 약 30년 뒤 성자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성부의 성령이 성자에게 임하심으로써(마 3:16) 다시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부자('낳으신 자'와 '낳음을 받으신 자' 곧 '낳아지신 자'로서의 '짝') 관계로 "하나"되심을 만유의 으뜸 가는 법질서로 정하시고 만유의 창조와 운영의 최고 기준으로 삼으시니 이를 "3위1체의 법칙" 또는 "짝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며, 이렇게 세상에 비로소 알려짐이야말로 21세기 "마지막 때"의 최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되시어 나와 함께 하나되어 영원히존재하시니 우리 주님보다 내게 가까운 사람이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가리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 10:37) 하셨으니,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내 가족도 나 위해 사람되신 주님의 '가까우심'에 견줄 수 없는 실상 그대로를 밝히심입니다. 

단순히 우리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시니 영원한 이상향적 삶의 최대 행복의 뿌리요 원천/源泉으로서의 '생명(삶)' 그 자체이신 까닭입니다. '진리'와 '진실' 그 자체이시고 모든 '문제 해결' 그 자체이신 까닭입니다(요 14: 6).

단지 지금 이 시점만은 "사망의 권세"(히 2:14)를 잡은 자가 일시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인지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골 1:24) 하는 때이지만 이 역시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여자의 해산의  때를 인한 근심"(요 16: 21) 정도이니 그래서 "참고"(롬 2:7) "견디는"(마 10:22) "소망(희망) 중의 인내"(살전 1:3)에 불과할 뿐인즉 조금도 위축될 일이 없습니다. 악령들과의 전쟁 중이니까 최후의 승리만이 유일한 답이 되는 것이니까.


"내 마음 그윽한 데서"

1.
내 마음 그윽한 데서 내 마음 그 깊은 데서
생명 샘(계 7:17)이 강물(요 7:38)되어 
흘러 흘러 넘치네
주님 안 '늘 평안'(요 14:27)되어
주님의 '늘 기쁨'(15:11/17:13)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넘치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내 영혼 그윽한 데서 내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이안삼 곡에 맞추어
https://youtu.be/GtBP-sSlAJQ?si=4hpzRSBaGyFvqlSL

2025년 9월 10일 수요일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 아래 광야의 길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는 것이다"(고전 15:44). '육의 몸→신령한 몸'의 순서/단계는 지금 우리에게만 비로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담 창조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지금의 우리는 그 짝을 이루어 있는 것뿐입니다. 즉 "첫사람 아담"(:45)과 "마지막 아담"(:45)의 대칭성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는 때를 가리켜, "보라...비밀을 말하니 우리가 다 잠잘(그리스도인들의 죽어 장사지내짐을 가리킴ㅡ행 7:60)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이니 나팔 소리가 난즉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할 것"(고전 15:51,52)이라 했습니다. 즉 주님의 재림이 그 <때>입니다.

소위 "휴거"라는 것은, 세상 끝이 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 거의 모든 이들이 죽음을 맞았지만("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마다 죽임을 당하므로ㅡ계 13:15) 그래도 소수 살아 남은 자 중 일부에게만 해당됩니다. 이렇게 공중으로 들려 감을 받는("휴거") 이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현재의 육체 그대로라 천년 왕국(아담 때처럼 천년 가까운 수명을 누리는 시대)에서 자식들을 낳고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멸망의 대상자는 물론 제외하고.

이들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은 절대 다수가 젊은이들로서 장차 천년 왕국을 구성할 인원/人員이기 때문. 여기 속하는 극소수(이사야 13:12) 청춘 남녀는 주님 재림시 멸망은 면한 터이지만 신령한 몸에서는 제외되었으니 구원은 받은 몸이나 주님을 위해 이렇다 할 고난은 받지 않아서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딤후 2:12)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천년 왕국에서 부조/父祖 역할로만 한정될 뿐이고, 왕권/王權 행사의 자격은 없습니다. "천년 왕국"이란 것은 반복 설명이지만,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잠깐 즉 천년간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마지막 심판을 실시했을 필연적 과정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폐기, 유보되었다가 "마지막 아담"께서 "첫 사람 아담"을 이제 대신함으로써 그 순연/順延, 보류되었던 아담의 세상 통치가 지금 비로소 진행됨에 있음을 뜻 합니다.

아담 자신은 비록 범죄하지 않았더라도 그에게서 난 소생들 중에는 분명 선악과에 손대는 자들이 일부 생기게 마련이고 그것도(아담의 통치 중이라) 벼르고 벼르던 끝에 일시에 집단적으로 저질렀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동물적 육체가 생겨나 한 세상을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상정/想定한 것이 "마지막 아담"의 이 "천년 왕국"인 것입니다.

일부가 그런 범죄 행위를 했을 것이고 나머지는 그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럴 경우 지금처럼 아담도 신령한 몸일 것이요 또한 가담치 않은 자들 역시 그러한 아담의 소생들이니까 신령한 몸 그대로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 때에도 신령한 몸을 가진 자들은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범죄자들에게 신/神과 같고 왕/王과 같은 존재였을 것.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 터라 "마지막 아담" 즉 사람의 아들들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애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유추/類推를 통해서도 너무나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 받기 전에 소위 "휴거"를 통하여 그 재앙을 비켜 간다는 자아중심적 망상은 아주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이기적이고 저속한 탐욕적인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아 구원된 사람의 특징은,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내고 믿음을 붙들어 주고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합심 기도에 항상 몰입해 있어 그런 넋 나간 잡념에 빠져 있을 여가가 도무지 없으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 1) 바로 이것이 "깨어 있음"(마 24:42, 43/25:13)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일단 구원 받았으니 이는 영구 불변이라 이제는 마음 놓고 태평스럽게 지내도 좋다는 말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고후 13:5)라는 경고만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7) 했듯이 쉬지 않는 상호간의 기도를 역설한 것은,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절절한 경고와 맞닿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로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너희 중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전 11:18/히 10:25/ 3:12,13) 한 그대로입니다. 히브리서도 그 문맥과 내용 등으로 판단컨대 바울 사도의 글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상 모든 것은 구원 받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구약의 핵심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짚트 탈출과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 여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묘사함이요 관련된 모든 경고/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짚트의 압제를 알단 벗어났으니 이는 우리의 <구원 받았음>에 해당합니다.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나 광야 통과는 절대 무시 못하는 <현실>이요 실제 난관이었던 것임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이짚트(애굽)를 탈출한 장정/壯丁(20세 이상)이 60만(출애굽기 38:26)이었는데 그들 중(장정 수에 들지 않은 이후 성장한 나머지는 제외) 실제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오직 둘뿐이었으니 그 함축하는 의미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거짓말은 이같은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전하다", "평안하다"는 말만 남발해 왔고, 그리하여 모든 각종 비극으로 유도해 온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어도 마귀가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범죄 형벌 차원에서도 악령들의 개입이 당연시되니 오호라! 곤고한 인생들입니다. 핍박과 탄압만 아니라 온갖 거짓이 난무합니다. 바벨론 신학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험한 광야 길이 그 명백한 상징입니다. 광야 자체가 이 세상 상징입니다. 사람 살지 못할 황무지 일색이 현세의 가감 없는 특징적묘사입니다.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착각하면 영혼의 영원한 삶을 잃거나 빼앗깁니다. 오직 성령의 "불 기둥, 구름 기둥" (민수기 14:14)의 인도하심 따라 일보씩 조심해서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전도서)

전도서 3:11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 성)을 "사모하는"영원 마음을 주셨다고 되어 있는데(한글개역), 영원성의 신령한 몸을 아담 범죄로 잃었으니까 그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론이라 생각하면 그뿐이나, 혹여라도 처음부터 인간을 이같은 죽는 육체로 만드셨다는 근거로 삼을까 저어하여 몇 자 적는다면, "사모한다" 함은 우리말 번역자의 의역/意譯일 뿐 58개 영역(BIBLEGATEWAY) 모두 단순히 "생각하게 만드셨다" 정도이고, "영원(eternity)"이란 것도 28개 역본만 그렇고 나머지 군데에서는 "세상" 등으로 달리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래 인용 게시물을 참고하시기를.

"마지막 때"로서 21세기 지금 이 시점은 "바벨론"(계 18:4)의 모든 거짓된 사탄의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처음부터 계시된 복음 그대로를 가감 없이 전달할 때입니다. 아담의 여자와 "뱀"과의 에덴 대화를 두고 "뱀이 무슨 인간과 통화하느냐" 따위의 신화/神話와 같은 인상을 사탄은 만들어 주어, 성경 자체를 아주 지능적으로 폄훼하여 성경을 멀리하게 해 교회에 최대 타격을 입혔던 것입니다.

3위1체에 대한 몰이해는 물론이고, "처음부터 인생에게 인간고를 안겨 주신 하나님"(아담 범죄로 야기된 동물적 육체로서의 현재의 비극임에도 도리어 하나님께 뒤집어 씌움으로써ㅡ"영적 죽음"이라 하여)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하나님과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든 장본이 되어 온 "바벨론 신학". 사탄에게 장단만 맞추어 온 일체의 짓거리를 이제부터는 헌신짝처럼 버려야,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여겨야, "날마다 분노하심"(시편 7:11)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에 보조를 맞추지 않는 자 무릇 누구든지 그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2025년 9월 7일 일요일

세상 최고의 강자들(하나님 아들들)이 쓰는 천하무적의 무기(무술)




유한한 우리 인생들이라 그 하는 일도 유한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주님 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1,42) 하셨으니 "몇 가지"가 아닌 "한 가지"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다"(요 12:47)하신 대로 주님을 머리로 모신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머리께서 하신 대로 하고 본을 보이신 대로 따를 뿐 달리 다른 무엇을 생각하여 "염려하고 근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로 우리도 "사람 살리는" 알에만 오로지 전념합시다. 몸 자체가 죄만 짓도록 되어 있는 기계적 움직임만 가능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깁시다.

아담 범죄의 결말로서의 이 선천적인 악함은 <죄인으로서의 하나님 앞 회개>의 경우에만 유용할 뿐 일체 쓸모 없는 것이라 오직 구제책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는 것뿐입니다. 즉 우리가 절대적으로 무조건 순종하게 되어 있는 머리이신 우리 구세주 예수("구세주"라는 의미)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나의 것으로 전폭 수용하는 믿음으로써, 이 "죄의 몸"의 쇠사슬을 아주 끊어버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에 있읍니다.

원수 갚고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죄를 용서하지 않는) 따위의 일은 우리의 소관사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 하실 몫인즉,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등의 "참고 선을 행함"(롬 2:7)에만 전심전력을 다합시다. 바로 이것이 사탄 마귀를 한 번에 내리찍어버리는 천하무적의 철퇴이니까. 왜 이 좋은 무기를 버리고 다른 것을 찾느라 전전긍긍 야단인가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현자에 불과한 이솝도 "해와 바람의 힘 겨루기ㅡ길 가는 행인의 외투 벗기기" 우화를 말하지 않았던가요. 하나님은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장치하신 양심의 초능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양심"이라는 급소를 치는 전술전략으로써 선으로 악을 이기는 현책/賢策을 오늘날 세상에 크게 퍼뜨림에 앞장 섭시다. 그들이 복 받아 거듭 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원수 위한 기도"(원망과 증오 대신)를 힘씁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들들만의 모습입니다(눅 23:34).

2025년 9월 5일 금요일

3운법칙의 경이/驚異 및 그 막강한 생명력은 그 정해진 시기와 목적이 명확히 밝혀짐에 있다



지금은 주님 재림이 임박한 때로서 악마와 그 일당들의 최후 발악이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믈들이니까 초능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야 식은 죽 먹기인 줄 아는 우리 믿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런 지식이 전혀 없는 세상 사람들은 악령들의 속임수 횡포에 대책 없이 휩쓸리고 요동치는 상황이니 여기 덩달아 놀아나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 시간을 낭비함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런 초능력을 "고도로 발달한 문명, 운운" 하며 소위 "외계인" 소동으로 위장하기에 그렇습니다. 어디까지 확장될는지, 아마 그런 "외계인에 의한 지구 창조" 정도로 확대되지 않을까,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결국 자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성경으로 애초 세상에 나타나신 창조주 하나님의 확실성 및 그 검증은 오늘날 21세기 3위1체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으로 완료/완성되었음을 항상 명념합시다. 인간의 모든 생애 하나하나가 모두 3가지 유형(3운법칙에 따른)으로만 철통 관장 지배되고 있음을 저학년 초등생 정도의 셈법을 아는 이면 누구나 <직접 검증 확인할> 수 있도록 완전 개방되어 있음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점이 우선 가장 특출한 그 자체 증명의 하나입니다.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런 특이성이야말로 사상 초유의 전무후무한 유일 사례라 하겠습니다. 창조주의 손길이 친히 움직이심을 목도하게 되는 그 놀라운 증거입니다. 금상 첨화로, 이 3운법칙이 왜 정해졌는지 그 정해진 <때>가 성경에 무언중에 밝혀짐으로써 그 설정된 <목적> 또한 동시에 대낯같이 그림처럼 밝혀져 최근 완전 공개되었다는 것은 경약 그 자체입니다.

마치 모세 시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비할 정도의 직접 들려지는 3운법칙 관련 설명이시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3운법칙은 처음 아담 때로부터 설정된 것이 아니고 가인의 아벨 살해를 거쳐 라멕(창 4:23)의 "소년" 살인 행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하셨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이 8,9백세였으니까 "소년"이라면 50~100살 정도였는지 모르나, 최소한 노아 때까지는 모든 인류가 팔구백년 훌쩍 넘겨 살았던 당시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라멕 이후 즉 라멕의 "소년" 살해 사건이 있게 되는데 바로 그 사건 뒤 3운법칙이 청해진 것임이 확인되는 바 왜냐 하면 950년 수명의 노아 생애 도표가 산뜻한 SN유형으로 확실하게 정해져 있음을 보기 때문. 따라서 아벨과 예의 그 "소년" 외에는 아담부터 노아까지 인류는 천년 가까이 살았으니까 "소년" 살해자 라멕 이전까지만 해도 3운법칙이 정해져 있지 않았음은 명백한 사실이 됩니다. 이유는 "소년"이 죽었으니까. 그러나 노아가 3운법칙 따라 생애를 마쳤으므로(950세로 장수했어도) 3운법칙으로 인간의 죽는 때를 정하신 그 <때>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아무 목적 없이 3운법칙이 설정되어 인간 수명이 철저히 통제될 리가 만무한 것. <특정 시기>에 정해졌으니까 <특정 목적>이 있게 마련. 다시 말해 사람의 죽는 때를 강제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강제하시느냐 하면 죽을 때가 오지 않으면 '사람'으로든 '사건'으로든 사람 목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처하심입니다.

이 <사람 죽는 때 정해짐>이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때를 따라 정해져 실현된다면 그 실현시키는 주체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니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달리 그 어떤 설명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이성과 지성이면 모든 인류에게 통하는 확고무오의 설명인 것입니다. 바로
<성경으로만 알려지신 하나님>이십니다.

(5ㅡ끝)




리가 하나님 계심을 알고 그 만유 주관하심을 확신할진대, 한 가지 확고부동의 기준이 서 있음을 보는 바,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실 때 공평공정을 기하신다는 것. 따라서 사람마다 적용 잣대가 서로 다른 듯이 보일 때 그것은 임시적 과도기 현상이고 일시일 뿐이라 정상(영원성)이 아니고 비정상이라 한 때 스쳐 지나감뿐이라는 증거.


둘째는, "천국"과 "불 못"은 영원한 양면성임과 같이, 고로 불변의 진실임이 자체 증명이 됨과 같이, 짝의 법칙은 영원 불변의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즉 생명과 죽음은 대칭을 이루고 그 중간도 없고 그 외 달리 무엇이 있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처럼 생명이라 인식되는 것과 죽음으로 보이는 것이 한데 뒤섞여 있듯이 보일 때, 그것은 죽음 일색일 뿐 "뒤섞인" 것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짝을 이룸은 반드시 인과, 주종, 선후, 대소 관계를 이룹니다. 서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대등하면 애시당초 짝이 형성되지를 못합니다. "남녀 평등"은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짝을 이룬 둘은 동시에 창조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자연계 생물의 양성 생식에서 수컷에게서 암컷이 나온 것입니다. 다 알다시피 먼저 '본'을 뜨고 그 다음에 그 '짝'이 되는 것을 맞춤과 같은 이치입니다.

처음부터 뒤섞였다는 것은, "본"이 되는 것이 제 구실을 못했다는 의미이므로 원본은 폐기되고 그 짝이 되었던 것만이 남게 됨이며 고로 다시 새로 작업하여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실상을 생명 아닌 죽음으로만 인식하는 유일한 설명입니다. 아담 범죄로 죽음 일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죽음'과 '비정상"인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고, 오직 장차 빛날 생명의 하나님 일에만 몰두하는 것만이 다가올 생명의세대에 참여하는 오직 하나뿐인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의 "죄의 몸" 이 "죽음"으로 끝나고 "부활"로 새로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놀라우신 은혜입니다. 위 설명처럼 현재의 모든 세계가 죽음과 "저주"(창 3:17)로 덮여 있고 주님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는 변함 없는 상태임을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으니까 이를 항상 명심하고 혹여라도 착각함이 없어야 합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 <인식 전환>입니다. 세상과는 차별되는 성경(하나님 말씀)적 인식 오직 하나뿐. 육지에서는 오뚜기처럼 쓰러지지 않고 바다에서는 가라앉지 않는 우리의 유일한 보루/堡壘(fort)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과 "연합한"(고전 6:17) "한 영"(:17)됨입니다. '머리'되신 주님과 우리가 이렇게 <한 몸>으로서의 '몸"이라 "하나"(요 10:30)되어 있으니 주님이 영원불변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단 지금은 천하가 죽음과 저주 일색인데다 하나님의 "매일 분노하심"(시 7: 11) 아래 있는 "때"(전도서 3:1)인지라,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골 1:24) 것이 필연인즉 이에 항상 유의해야.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24)입니다. 세상에서 갖가지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음은 이 때문입니다. 인내로 기쁨으로 맞아야. 이 "바벨론 탈출"의 세계적인 말씀 전파 다음 순서로는 반드시 스데반의 순교와 같은 죽음("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ㅡ계 13:15)이 닥칠 것이니 이에 대비해야.

이와 같이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어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그 영(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오시어 영원히 함께 계시니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에서 우리 둘은 완전 하나됨이라, 양자역학적으로 표현하면 입자성과 파동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이 각각으로 나타나는 조화를 부리는 것같지만 엄연히 <둘이 하나>로서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만 아니시고 성자와 더불어 성부 친히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신 것이니 주님이 나와 하나되어 계심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송("할렐루야")!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 받음이 구세주 우리 주님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 오셨음과 똑같다(요 20:21) 하셨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하신 대로 <머리>되신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같은 사명을 띠고 우리도 파송됨인즉 악을 응징하고자 함이 아니요 나 자신을 온통 바쳐서라도 사람들을 구출해내고자 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음은 악을 응징하는 심리이지 구출하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취지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분부를 내 멋 대로 무시함은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중심 즉 자기가 자기를 위하려는 모든 욕구는 생명 세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욕심"(약 1:15)이요 악이요 죄의 원천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내 이웃이 전적으로 나를 위함에 있으므로 내가 나를 위하면 1로서 그치나 내 이웃이 1억이면 1억배로 내가 위해지는 까닭에 가장 이상향적 삶의 방식이라 하는 것입니다.



2025년 9월 4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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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범죄 이후 우리의 육체 자체가 썩음과 죽음의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온상/溫床인 동물성 육체일 뿐만 아니라, "죄의 몸"(롬 6:6)인지라 죄의 화약고/火藥庫인데다, 엎친데덮친격으로 사람(아담)이 다스리는 세계가 아닌 "원수"(창 3:15) 사탄 과 그 일당인 악령들(네필림과 그 죽은 망령들인 많은 귀신도 포함)에게 그 통치권이 "넘겨진"(눅 4:6) 상태라 365일 24시간 그들이 인간 세상에 군림하여 그들에게 시달리는 참담한 나날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과 속임수도 그 일환으로 성경은 가리켜 마귀가 "온 세상을 꾄다(속인다)"(계 12: 9)'고 한 것. 따라서 악령들이 우리(하나님께 속한)가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방치해 둘 까닭이 없습니다. 반드시 못살게 집적이게 되어 있는데도 이런 현실을 뭇하고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고 꿈꾸는 절대 다수ㅡ완전히 사탄 아래 있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계시는 터라 모든 것을 회복하심이 필연이지만, 만유는 "때"(전 3:18)와 순서를 따라 진행되므로 주님의 재림이 시작되어야 멸실 공히 그 통치권이 정식 발효되기에 지금은 인내로써 기다려야 합니다. 정작 복이 있는 자는 이러한 이들입니다.

불신자도 세상을 "고해/苦海"라 했으니까말 다한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두고 절대 "사람 삶의 세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해, 아무런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은 그럴수록 어리석게 도 살려고만 무턱대고 발버둥치는 것. 우리는 그렇게 헛되이 발버둥침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 사람들을 구원해 건져 올리는 "사람 낚는 어부"(마 4:19) 일에 열중함이 현재 유일한 낙입니다.

그런즉러므로 때마다 우리가 피차간 강조하는 것은 세상 삶의 낙(그나마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에 한눈파는 일이 없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자는 것입니다.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 것은 오로지 썩음으로만"(골 2:21,22/창 3:3) 종결되는 이 세상이라, 스스로 멸망에 빠져 들어가는 지름길 밖에 더 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아니까.

우리의 구원은 가장 먼저 이 "죄의 몸"부터 척결함이 첫째 순서이고 이는 이 육체가 죽어 망하는 것으로만 해결되기에 주님 메시야(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허나, 죽음으로만 끝나면 아무 의미(소용)가 없고(고전 15:14- 18), 그 죽음에서 부활해야만 새 창조가 되는 까닭에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됨으로써 이 일이 완성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에서 그 흘리신 피가 내 죄를 씻는 보배로우신 피(보혈)이기에 내 죄가 용서되고 그 부활로써 나는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서의 "새 창조"(고후 5:17)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이론만으로 써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그 영(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내 안에 내 영혼이 있듯이) 친히 나와 "하나"
(요 10:30) 곧 "한 영"(고전 6:17)이 되심이니까 <실제 상황>인 것입니다.

성령이 누구시며 3위1체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이제까지는 이 사실을 몰라도 그래서 제대로 설명을 못해도, 참으로 회개하고 참으로 믿으면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신지라 성령(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로 계심)께서는 임하여 오셨고 우리 구원에 일절 하자가 없었던 것. 남녀노소 불문이므로, 어린 아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회개와 믿음이 없이 저절로 구원 얻는 일이 없는 것은 인간이 타고나는 것이(시편 51:5) "죄의 몸"이므로 이 죄의 몸이 "멸/滅해져야"(롬 6:6)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아 또는 믿지 않고 세례 받지 않은 어린 아이가 죽으면 멸망인가? 그가 구원 받으려면 충분히 철들어 복음을 이해하고 세례를 받을 정도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구원되지 못한 것입니다.

소위 "유아세례" 등은 무의미한 인위적 종교 교리에 해당하는 것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노아 홍수 당시 죽은 자들도 회개하여 믿어 구원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영으로...전파하셨으나"(벧전 3:19/4:6) 이런 유아들이 그 죽은 자들의 세계에 가서 복음을 듣게 되는지 여부는 미상이요 우리가 궁금히 여길 대상은 아닙니다.

아니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그 영혼들이 네피림일 수도 있다는 것. 죽은 망령으로 떠돌던 네피림 즉 귀신이 무차별적으로 아무 산모의 태에나 들어가 사람 태어나는 달수를 채우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 비일비재니까. 어뗜 사유로든 철도 들지 않았는데도 요사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네피림은 원천적으로 구원이 불가입니다. 악령의 씨에 불과하니까. 이렇게 해서 네피림이 재차 생겨나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윤회", "전생", "환생" 등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죽은 자의 세계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있는지라 충분히 구원될 기회가 있으니 굳이 세상에서 복음 전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는 악하고 미련한 생각을 혹 품는 자가 있겠으나, 바울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전 9:6) 했으니, 반드시 전도 활동은 수행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대한 명백한 불순종과 정면 도전이 되므로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 찍혀 그 결말은 영원 "불 못"일 뿐입니다.

전도 활동이 다름 아닌 사람 살리는 목적인즉 만나는 사람마다 그 대상이고 이 일에는 교회를 운영하는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더구나 "양 무리의 본"(벧후 5:3)이어야 하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또한 이 전도 활동에는 불신 세상을 위한 끊임 없는 제사장적 기도가 수반되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는 열아홉 전후 나이에 출가한 후 7년 뒤 과부 된 지 84년 넘게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긴 우리의 기도의 사표/師表입니다(눅 2:36:37).

그리고 주님이 경고하신 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눅 9:26)이는 경고 말씀 역시 불변입니다. 사탄 아래 있는 세상이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그 추종자에게는 시종일관 적대적이고 우호적이었던 역사가 없으니까. 우호적인 듯 싶어도 올무와 함정이라 약화시키려는 음모일 뿐이니까.

적과 싸우되(창 2:15) 우리는 적지/敵地에 위치하기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으며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고귀한 자)가 많지 않다"(고전 1 :26)고 한 이유입니다. 이 세상이 사탄의 적지/敵地입니다. 하나님 편은 당연히 막강하지만 현재 눈에 보이어 인식되는 것은 모조리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나타나기에 이는 당연지사로서 수용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써만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일임을 우리 각자는 자기 위치에서 명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이 평등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보내심 받아 세상에 오신 "주님의 일을 하는"(15:58) 위치입니다. 맡겨진 일에는 오직 충성만이 요구됩니다(4:2).

'왕이 말하기를,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을 것이다." 혹이 왕에게 고하기를 "엘리사가 도단에 있습니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말이 끄는 전투 수레)와 많은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밤중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다. 하나님의 사람(엘리사)을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 보니 군대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부르짖기를 "아아, 주인님, 우리가 어찌 할까요!" 엘리사가 대답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 하고 기도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원하오니 이 종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 주십시오" 한즉,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 주시므로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꽉 차 있어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다'(왕하 6:13-17).

오늘날의 엘리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어 365일 24시간 함께 하시는 만유의 주재 하나님이신 성령이십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요 14: 16)이라 약속하심과 같습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어도 살고, 지는 것같아도 최종적으로 이기고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는 일시적으로 비록 "약하고 천하고 없는 자"(고전 1:26-31)의 모습이나. 엘리사의 종의 경우처럼, 우리들의 부홣하신 주님처럼,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계속)

주기도문 명상 (9)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마 6:13).   오늘날 인간 세상의 모든 부조리, 불합리, 일체의 악과 죄가 아담 범죄 오직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