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이니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으니"(고전11:27-30).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11:31,32).
성찬식 관련한 바울 사도의 언급에서 유달리 관심을 끄는 대목이 이상 인용한 바와 같이, "주님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어...너희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입니다. 심지어 죽는 자도 있다는 지적이니 소홀히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심판과 결부시켜 멸망이라 하지는 않았고 단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바벨론 탈출"이라는 중대 국면을 맞는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마땅히 유의해야 할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 충만한 사도로서 그의 영적 안목은 정확하였으며 따라서 진실 그대로입니다. "너희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은" 것을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와 결부시켜 결론을 내려 진단한 것입니다.
주님 친히 이 죄를 묵과(간과)하시지 않고 손보신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여 바울이 전달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아무나 이렇게 단정하여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나타나심>(보이시지 않음에도)을 직접 목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지 않게 <은혜>가 됩니다. 마치 주님을 우리 5감을 통하여 확인함과 같이ㅡ.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의 교회 집회에 동석/同席하시는 주님의 바로 그 명백하신 증거. 그 역사/役事하심의 사실이 구체적으로 증명됨입니다. 이는 매우 귀중한 사실입니다. 더욱 더 의미 있는 것은 이것이 <우회적으로> 알려짐에 있어 그 파급 효과가 극대화됨 그 자체에 있습니다.
즉 "성찬예식에 주님 친히 함께 하심으로써, 자기를 스스로 살피지 않고 무엄하게 '주님의 축복의 잔을 나누어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고 떡을 떼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고전 10:16)한 자를 징계하셨다"는 직접적인 말보다, 이와 같이 간접적으로 바울 사도의 성령 충만함으로써 꿰뚫어 보는 사실 파악에 접하는 은혜라 강력하게 인상에 남고 우리의 뇌리에 와 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 13:8)하십니다. 그 때 당시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과 함께 어디서나 그리고 어느 시각에서나 동행同行 동거/同居하심의 훌륭한 증표로서 위의 대목을 명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같은 아름다운 기억이 되게 합시다.
살아 계시어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는 사람이신 주님. 그러나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으로 우리 모든 각자와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처럼 나와만 계시어 나만 상대하시듯 그렇게 1대1로 계시고 그와 같이 역사하심입니다. 이는 몇 백 번 강조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낼 것"(요 16:7)이라 하신 것입니다. "보내신다" 하심은 지금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골 3:1) 때문입니다("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 소리치니"ㅡ행 7:55,56).
허나 "하나님은 영"(요 4:24)이신지라 만유에 충만하시므로("그리스도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심"ㅡ골 3:11) 성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되신 "우리"("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ㅡ요 14:23)로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 네 하나님(네가 믿는)이 어디 계시느냐?" 묻는다면 나는 당당히 대답합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의 그룹들 위(왕하 19:12) 옥좌/玉座(보좌/寶座)에 앉아 계시고 동시에 바로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이사야 57:15/요 14:23). 우리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심을 알지만, 웬걸 뜻하지 않게 이 성찬식이라는 주님 정해 주신 예식으로 말미암아, 이 <함께 하심>의 구체적 현실적 증거·증명이라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대하여 놀라움과 찬미와 찬탄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3운법칙 관련 최근 발견과 같습니다.
3운법칙은 50여년 전에 그 존재를 알아 왔으나 금년에 들어서야 그 생명(핵심)이 되는 사실 즉 인간 생애를 철통처럼 옭아 매어 두실 수밖에 없는 수단으로서의 3운법칙을 언제부터 왜 무엇 때문에 정하셨는지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시어 하나님이 친히 나타내신 손길이심을 증거·증명하심과 똑같은 놀라움인 것입니다.
그 <언제>는 아벨이 가인에게 살해 당한 후 라멕(창 4:23)이 자기의 죽음을 방어하기 위해 부득불 한 소년을 살해한 뒤부터였고, <왜>는 그와 같이 천년 가까웠던 당시 수명도 지켜내지 못하고 불시에 죽어 나가는 무질서를 막고자 하신 조처이셨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동물적 육체를 처음부터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 범죄로 초래된 죽음과 인간고/人間苦임이 만천하에 입증되었고, "영적 죽음"이란 바벨론 신학의 거짓됨이 오늘날 여지없이 까발려진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