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9일 수요일

성찬 예식 고찰 (2)

무신론자들이나 불신자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처럼 성경 내용이 인간이 꾸며낸 것 즉 거짓말이라 가정해봅시다. 성만찬식이라는 종교 행사에 예컨대 불경스러운 자세로 참여했다 할 때 이런 사람들이 정확히 가려내어져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아지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나요. 물론 속이기 위해 그런 내용을 일부러 만들어 퍼뜨릴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속여야 한다는 필요성까지도 사실은 아마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냥 그런 예식을 정하고 때마다 시간이 되면 의식을 집전해도 충분하다고 다 공통으로 느끼고 만족스러워할 것이니까. 그래서 말의 요점은,  바울 사도가 지적한 이 대목이 그렇게 의미가 깊다는 것입니다. 주님 친히 당신 자신을 오늘날 후우리 21세기인들에게도 그 <살아 계심>과 <변함 없이 역사하심>을 어떤 특정의 대대적 "표적과 기사"(요 4:48) 이상으로 훌륭하고 넉넉하게 나타내시어 입증하심이 되는 까닭입니다.

"성령의 가르치심"(고전 2:13)과 "성령의 인도하심"과 "알려 주심"(요 16:13)이 이렇듯 소중한 것이므로 우리는 부단히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마 11:27)는 기록된 말씀(고전 4:6ㅡ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을 통해서입니다. 21세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이 문제가 있어 보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도 바울 사도가 직접 목회하는 <살아 있는 교회>였기에 그런 현상이 당연히 나타났지만, 오늘날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바벨론 교회는, 남달리 핍박 받아 연단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버젓한 외관을 자랑하고 소위 번성하는 교회일수록 대부분 생명 없는 <죽은> 집단일 수가 있어 주님 친히 보살피시는 그런 "은혜"(사랑의 "징계"ㅡ고전 11:32)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징계의 은혜를 마땅히 사모해야 할 일임에도 도리어 껄끄러움으로 마지못해 하는 양으로 성찬식을 대하는 것이 한국교회 작태입니다. 국내 주요 교단이라고 하는 장로교를 보아도 1년 2~4회 정도(소위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에만)로만 그쳐 같은 교단의 미국교회(예컨대 매달 첫째주 등에 성찬식 집전)만도 못합니다. 초대교회  첫 시작 때에는 모일 적마다("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ㅡ행 2:46) 성찬식을 베푼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직접 모시고 뵈오며 시행되는 교회 모임에서 우리 주님의 나 위한 죽어 주심을 기리며 그 크신 은혜를 기념하는 행사야말로 모든 집회에서의 예배 중심이어야 마땅하거늘 이토록 무성의로 일관해 왔다는 것은 심히 유감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전 11:27) 그리고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29)이라고 한 대로의 막강한 비중을 지니는 성찬식인데, 추호라도 이 막중한 의미를 가리는 일이 혹여라도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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