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삶을 철저히 부정/否定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로 오해할 것이 아니라 이제 알고보면 전혀 무의미한 동물성 육체에 의한 상상하기조차도 끔찍스러운 현재의 소위 "삶"에 매임으로써 영원한 영광의 찬란한 본격적 삶을 대신 놓쳐버린다면 그보다 더 통탄스러운 일이 또 있겠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인 것이다.
둘 다 누리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무리요 억지인 것이다. 때문에 헛된 것을 위하여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것>으로밖에는 더 이상 취급되지 않음을 알아야. 사람들이 헛된 생각과 목표에 매몰되어 갈팡질팡하는 비극적 구렁창에서 그들을 구출해내는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심히 바쁜 경황에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마음이 나누어져 성경의 경고대로 분산되다니! 시간을 낭비하다니! 절대로 용납될 일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의 법칙에서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이요 시간과 정력 일체인데 마치 내것처럼 내 마음대로 하다니! 구원 받은 사람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신 순간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ㅡ요 20:21) 터에 더 할 말이 있으랴.
영원히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는 영원 세상이다. 자아중심의 세상은 이 한 때만으로써 영원히 끝나고 그 후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불 못에서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고 아니면 캄캄한 암흑 천지에서(시뻘건 불꽃만 한 곳에 이글거릴 뿐 그 주변은 전부가 칙칙한 암흑 천지이니까)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토해내며 슬피 울고 고통 중에 이를 갈아부치는 멸망 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자아중심이다.
이런 자아중심의 현재 세상에서는 살고자 하는 자마다 나 자신도 자아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자아중심은 멸망뿐이다. 이세상은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하는 것을 바울 사도는 "아내/남편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남편에게서 놓였느냐, 남편/아내를 구하지 말라, 아내/남편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은 매입해들인 물건이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는 말로써 표현했을 뿐이다.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왔다면 그 후 종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어도 그냥 종으로 지내라 한 것도 당시 노예가 들끓는 사회에서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활용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인으로서가 아닌 같은 종으로서, 더 친근하게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로지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 물심 양면으로 쏟아 부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고 구원의 복음 전달 그리고 구제 등 선행에 힘씀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써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는"(고전 10:33) 것이 만사/萬事 그 표준 척도인 것이다. 이생에서나 내생에서나 항구불변의 상대방중심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