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다"(살전 5:9,10).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은 다시 말해 그릇되게 믿는 것은(믿음이 그릇되다는 것은 말로는 믿는다 하나 실제는 믿지 않고 "믿는 것"처럼 자신을 속인다는 뜻) 우리의 "구원" 관련입니다. "구원"이라면 죽느냐 사느냐의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입니다. 이보더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렇게 크나큰 문제임에도 이를 그르치다니! 놀라 눈을 번쩍 뜰 일입니다.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가 하고.
구원은 <죽음>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문제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삶의 원리와 법칙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범죄했기 때문에 죽음이 와 생명을 잃어버려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으니까! 성경에 죄는 "불법"(요일 3:4) 곧 범법 즉 생명의 법칙대로 아니한 결과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이 무엇인가요? 간단히 말하면 "사랑"입니다. 풀어서 말할 것이면 3위1체 법칙에서 "하나"(요 10:30)됨입니다. 만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을 따라 "짝(제1위)"으로서의 둘로써 "하나(제3위)"됨에 있습니다. 이 3위가 필연이요 그리고 조화/調和입니다. "짝"이라 함은 상반/相反 즉 성질이 정반대임을 뜻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파생한(파생시킨) 자와 파생된(파생 당한) 자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자/母子 관계 다시 말해 인과/因果입니다. 이것이 질서요 법(칙)입니다. 만유(무릇 존재하는 것)는 이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습니다. 이 "하나됨"이 상보성 원리에서의 상보/相補이니 CONTRARIA SUNT COMPLEME NTA.
"상보" 곧 "하나"됨에서는 그 <하나>됨의 여건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성경에 남녀(아내/남편) "한 몸"됨을 설명하여 "남자의 몸은 여자가 주장하고(그 주인이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가 된다 즉 엇바꿈(서로 마주 바꿈)이라 한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닌 "한 영"(고전 6:17)에서도 똑같은 이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삶의 엇바꿈입니다. 갑과 을 둘일 때 갑의 삶은 을이 살아 주고(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것.
각자 자기 자신의 삶을 살면 자기만의 1뿐으로 그치지만 그래서 나 아닌 남의 것을 탐내고 빼앗고 훔치고 그래서 싸우고 죽이고 결국 공동 파멸로 끝나게 마련이지만, 자아중심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상대방중심에서는 나 아닌 남이 1억이라면 그 1억 모두가 나를 위하므로 1의 1억배로 내가 위해지니 탐내고 빼앗고 훔치고 싸우고 죽임으로써 결국 공동 파멸에 이르게 되는 대신 완전히 그 반대가 됩니다. 죽음이 아닌 그 반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생명(삶)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릇 존재하는 이마다가 나를 비롯해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니 성경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유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마 16:24)는 명령은 이 때문에 내리신 것입니다. 이상향적 삶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말함입니다. 머리와 몸의 기계적 삶도 이 이치입니다. 머리가 몸을 위하고 몸이 머리를 위함으로써만 하나로서의 삶이 영위되는 한 개체로서의 생명이 유지되니 생명의 법칙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피조물을 위하십니다. 창조의 첫 출발로 독생자를 낳으심으로 짝을 이루심이 그 시작입니다. 노자가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피조물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는 차원에서(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심 같이 내 이웃도 똑같이 위하시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기쁘시게 해 드림이 나의 삶이므로) 이웃을 위하니 어느 모로나 나 자신은 절대로 위해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당면한 고통도 이 이치를 따름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 죄인이 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 모습이니까 한 몸으로서 나 홀로 예외일 수 없는 것.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니"(고전 12:26).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사함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심도 순수히 이 하나, 한 몸의 원리로 하심입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마찬가지.
우리 구원이 <죽음>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것은 죽었으니까 그저 살아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지 못해 아담이 죽었으니 구원됨은 반드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엄연한 조건부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답게 사는 것은 "한 몸"처럼 "한 영"으로의 삶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주님과와 합하여 한 영으로"(고전 6:17) 살기 위함입니다. 이 삶은 구원 받은 즉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이같은 삶으로 열매가 이루어져 맺혀지지 않을 경우 그 구원은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엄중 경고인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를 일이다"(마 16:24) 하신 그대로입니다. 나의 구원받은 삶은 주님 위해 사는 상대방 중심의 "새 사람"(엡 2:15/4:24/골 3:10)의 "새 생명"(롬 6:4)이고 더 이상 자아중심의 죽음이 아니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다"의 뜻입니다.
때문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고후 13:5)라 한 것입니다. 고로 나의 현재 삶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요 4:34)라고 말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 받았다는 사실부터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엄정 엄숙한 현실 앞에 마주 서야 하는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