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 14).
최종 결과가 주님을 뵙지 못함인데, "구원 확신" 백 날 부르짖은들 무슨 소용인가요?허공에 사라질 뿐인 메아리가 아닌가요?
성경은 누가 읽어도 능히 이해할 평범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일부러라도 쉬운 말을 사용합니다(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의 계시록 외에는)ㅡ왜, 남녀노유 만인 구원이 목표이니까! 이는 너무나 평범한 상식에 속합니다.
성자 하나님 친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마 11:25,26) 하셨기 때문. "어린 아이" 상대로 말씀하시면서 반어/反語 등과 같은 어려운 말을 구사하실 리 만무하고 또는 "영적 죽음"이라는 따위 궤변을 성경에서 농/弄할 리도 없습니다.
용서하지를 않는데,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만 드는데, "모든 사람과의 화평"도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 즉 삶 자체가 자기 위주가 아닌 하나님만 섬김, 하나님만 위함을 뜻함이니 곧 "우리 중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 :7-9)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이를 위해" 즉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한 죽음이 됨으로써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됨"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아닙니다!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 됨으로써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됨" 자체가 구원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아중심의 이기적 욕심으로 영생 하나만 생각하고 "되었다! 영생이다! 만세!" 하는 것이 구원 받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구원 받았다"는 사람의 거의 전부가 이 엄청난 차이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시급히 "바벨론에서 탈출하세요"(계 18:4)! 우리의 지금 주제가 "영생",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되어 있음은 처음 창조될 때 죽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육체로 생겨나서가 아님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임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영원한 영혼을 조성하시고는, 영원하지 못해 이내 죽어 없어져버리고 말 육체를 붙여 주실 리 있나요? 거룩하신 하나님을 도대체 어떻게 인식하기에 그런 발상이 가능한가요! 그런 하나님을 상상하다니요!
마귀의 바벨론 신학이 그런 하나님을 그려내었고 악마의 세상 지배권 통치력으로써 이를 강제 주입시켜 온 결과입니다. 21세기 오늘에까지 이른 아담 범죄의 비참한 결말입니다. 마귀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어 복종한 꼴이 되어 스스로 사탄의 종 노릇을 하니 하나님의 직접 통치 아래에서 벗어나 사탄의 지배권 아래로 스스로 기어 들어간 까닭입니다.
만고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인데도 바벨론 신학은 이 끔찍한 비극을 감추어 와 이통에 이 지상 통치/統治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착각하고 마귀에게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아담의 세상 통치권이 악마에게 넘어간 것을 모르고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이니 하나님의 세상이라고만 무작정 믿어 온 것입니다. 아담의 통치권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에 하나님과 결부시킴은 당연합니다.
영원한 속성의 영혼을 아담에게 주입하심과 상부하게 영원한 속성의 신령한 몸으로 아담을 변환(애초에는 당시 모든 동물의 최고 정점/클라이맥스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동물성 육체 그대로이었지만)시키신 것이 아담 창조의 마지막 단계였던 것인데,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 신령한 육체를 "잃었고" "빼앗긴"(눅 9:25) 것입니다.
이 비극의 원인은 "아담 범죄"입니다. 죄가 무엇이냐? 성경에 분명히 가름했습니다. "불법"(요일 3:4) 즉 범법/犯法이라고. 다시 말해 생명(삶)의 영원한 법칙을 어김입니다. 막연히 살인, 간음, 도둑질, 악한 말이나 생각 등등이 아닙니다. 21세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똑똑히 학습해야 합니다. 마귀의 바벨론 신학은 그냥 얼버무립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뜬 구름 잡듯 말합니다. 그런 것이 거짓말의 속성입니다.
3위1체 하나님의 "3위1체"의 뜻조차 이 거짓말에 가려져 왔던 것입니다. 오직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하신 말씀만이 유효했어요. 그러고서 장장 (거의) 2천년 세월을 흘려 보내다가 이 "마지막 때" 바벨론 탈출(계 18:4)의 하나님 분부에 때 맞춰 그것도 21세기 "표적과 기사"("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ㅡ요 4:48)로서의 3운법칙이 양자역학 등과 더불어 나타나서야 밝혀진 것.
이룰 주님이 언급하신 바대로 "표적과 기사"라 함은, "그러나 그들이 저를 믿지 아니하며 제 말을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할 것입니다"(출 4:1) 하던 때와 동일한 시대적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이 초자연계 즉 신령한 세계이다. 그 에덴에 몸을 담았던 아담 역시 신령한 죽지 않는 영생의 몸이었다"고 외치면, 아담 범죄 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사탄이 장악해 온 세상에서 그 누가 감히 믿으려고 하겠나요.
영생 구원의 문제 원인이 아담 범죄 즉 생명의 법칙대로 하지 않음에 있고, 이 법칙은 머리(창조주 하나님)와 몸(모든 피조물)으로서의 한 몸 이룸의 영원한 도리 즉 머리는 몸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에 있음인즉, 따라서 영생 구원은 이 "하나"(요 10:30)됨을 복구시킴에 있는 것입니다. 3위1체에서의 이 "3위"의 위치가 바로 그 핵심입니다.
짝을 이루어 있는 둘(제1위와 제2위로서의 '갑'과 '을')이 제3위('병')로서의 하나가 되는 요건은, 갑의 것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의 소유는 갑의 소유가 됨("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 것은 제 것"ㅡ요 17:10)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갑의 것은 을이 그 임자 즉 소유주이고 을의 것은 갑이 임자/소유주인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할 때의 그 "주(인)"의 뜻입니다.
지위가 높은 상대에게 "소인은 당신의 종이니 분부만 내리시면 거행하겠습니다"라는 뜻의 의미가 성경에서는 창조주의 사랑과 관련된 것이므로 엄마의 "품속"에 있는 아기에게 엄마가 언제나 종 노릇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기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아기입니다. 영원히 그렇습니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순종입니다.
아기가 그렇습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엄마를 본성으로 사랑하여 신뢰하니까.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라"(마 18:3)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하나님의 "품속"(요 1:18)에 계신다 했고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14:28)이라 하심도 그런 뜻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심으로써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사야 9:6)이시고 우리는 그 "자녀(childrenㅡ히 2:13)"이지만(첫 사람 아담에게 육신적으로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성령으로"(요 3:5) 다시 날 때 이 경우의 성령께서는 성자만 아니신 성부와 "하나"로 계심인지라 성부 하나님 친히 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심"(약 1:18)입니다. 하나님의 "양자/養子"(롬 8:15) 곧 하나님의 아들들(요일 3:1/롬 8:14,19/갈 3:26)이 되었으므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니"(히 2:11)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심"(롬 8:29/히 1:6)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종 노릇함과 같이 우리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하시므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 하신 것이며 이렇게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한 몸 이룸을 허물어뜨림이 자아중심(이기주의)의 범죄인 것입니다. 이 범죄로써 영생을 박탈 담했은즉 사람의 교리 즉 바벨론 신학이 아닌 성경적 구원은(반복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자기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 위해 죽는 자도 없어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어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는 것"으로 마땅히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 :7-9)에 있다고 우리 구원은 명확히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정확한 정의/定義입니다. 범죄 즉 생명의 법칙을 어김으호 영생을 벅탈 당했으니 생명의 법칙으로 댜시 돌아감이 구원 영생임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생명(영원 삶)의 법칙은 바꾸어 말하면 상호간의 섬김의 법칙인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진해서 기쁨으로 종 노릇하여 상대를 주인으로 받듦입니다. 나의 것이 다 내 상대의 것/소유이니까. 그가 나의 모든 것의 임자, 소유주, 주인이니까. 또 나의 상대의 모든 소유는 내가 그 임자요 주인이요 소유자이니까. 한 마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나는 1억 인구 모든 개개인을 주인으로 섬기고 동시에 그 1억 인구의 모든 소유를의 실질적 임자가 되어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단 이것은 하나님 친히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어 계실 때 가능해집니다.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상호간의 약속("언약")으로 한 몸으로 구성될 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 메시야 우리 주님을 머리로 모시어 그 몸된 교회를 이룬 곳이면 그 수가 "두 세 사람"(마 18:20)이라도 교회로서 모일 때 그러합니다. 주님 친히 그 2,3인의 머리가 되어 계시기에 그러합니다. 초대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법칙으로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나타나지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삶)"(마 7:21)이 영생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21)고 명백히 하셨으니까. "<이를 위하여(이를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 하신 그대로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주님의 소유,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께서는 나의 것, 나의 소유가 되시는 것(그래서 그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됨으로써 내 죄가 용서 받았으니까)이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이 엄정한 생명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제아무리 "주님 나 위해 죽어 주셨다"고 곱백번 외친들 믿은들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구원 받았다 하여 자기만 속이는 꼴입니다. 평생 이렇게 자기를 "구원 받은 몸"이라 속이다가 마침내 죽고나서야 "어이쿠! 속았구나!"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온다고(롬 10:1 7) 하니 "내가 믿으니까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기적 욕심 하나에만 매달리고 하나님 말씀 자체에 대한 애착이 없어 성경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함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 사랑도 그 말씀 사랑도 아예 없다는 종거입니다. 구원을 어슬프게 가르쳐 왔던 것이 바벨론 신학입니다. 사랑은 자율/自律로서,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적임을 명심해야. 억지로도 아니고 누가 일일이 시켜서도 아닙니다. 내 스스로 기뻐하고 즐기기 때문에 하는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입니다.
엄마의 아기 사랑도, 아기의 엄마 사랑도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고 본성으로 우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있다면 있는 것이고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상대성의 동시성으로 작동하기에 그렇습니다. 만유는 "3위1체"로 움직입니다. 3위1체는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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