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2).
성경은 명백히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시작되었고 이 한 사람이 전체 인류의 조상이었던 까닭에 다시 말해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린 아담 부부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몸"(6:6)이었기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한 것.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죽음이 후대에 물려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명시하여 강조한 것이다.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민수기 14:18/예레미야 32:18) 하셨으나, 또한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에스겔 18:20)이라 하신 것은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감"(18:20)을 말씀하심이다. 즉 자식이 의를 행하는 경우 부모의 죄악을 담당치 않으나 그 자신도 의를 행하지 않을 때는 윗대로 인한 재앙을 면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이는 구약시대의 기준이고 모든 진실이 드러난 신약시대에 와서는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몸"의 실상을 아는지라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우리 위하신 주님의 고난 당하심과 부활하심을 <믿을> 때에만 그래서 주님과 "하나"됨을 인해서만 "죄의 몸"은 멸절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써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하나"됨, 다시 말해 3위1체에서의 제3위의 위치가 언제나 핵심이고 중심이다. 이 "하나"가 없이는 만유가 지탱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는 청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요 10:30)되심에서부터 일사불란하게 갖추어지는 만고불역/不易의 질서다. 우리의 영생 구원도 "주님과 합하여 이루어지는 한 영됨에 있는 것"(고전 6:17)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극적으로 설명하는 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7:23)는 탄식은 "죄의 몸이 멸하기" 전의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죽으심과 그 부활하심이 주님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심으로써 나와 "합하여 한 영"이 됨에 이르러서는 주님의 죽으심 자체가 바로 내 죽음이 되어 있는 터라 "죄의 몸"이 "멸해져버린" 상태이다. 연결 고리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마귀의 거짓말인 바벨론 신학은, 난데없이 바울의 믿은 후의 개인 체험이라 둘러댔으니 거짓말도 어느 정도 이치에 닿게 해야지, 생짜로 우겨대는 궤변을 토하니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는 쪽의 허물이 더 크다.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인의 실제 체험이라 믿어 오늘날 모든 교파가 예외 없이 이런 혼미와 혼돈 속에 갇혀 있다.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ㅡ마 7:13,14)고 경고하신 그대로다. 로마서 7장을 <해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이 구절에 자신을 비추어 보시기를.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말씀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다. 사탄의 거짓말에 불필요하게 휩쓸리다보니 거짓말은 처음부터 <되지도 않는 말>의 조합인지라, 그런 것을 붙들고 씨름하니까 끝장이 날 수가 없는 것. 그래서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처처에 널려 있는 것이 "미혹케 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딤전 4:1)인데 이 엄청난 올무와 함정, 덫임에도 그 존재마저 부정하고 사탄의 세상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방심 중에 태평스럽기만 하니 어찌 무사하리요!
악마의 거짓과 속임수에 대책 없이 무더기로 내리박히는 꼴만 연출할 뿐이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 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예레미야 13:17) 함과 같이, 바울 사도는 한참 신나게 복음으로 달려갔어야 할 초대교회 당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했었다.
하물며 2천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이랴! 그 "눈물" 그 "밤낮 쉬지 않음"을 슬프다! 오늘날 그 누구에게서, 그 어디에서 구경할꼬! 깨어 있는 자여! 무릎 꿇고 하나님에서 "곡읍/哭泣"(예레미야 9:1)하라! 그리고 나서라! 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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